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나는 “설교자”다!

"현명한 자의 말들은 찌르는 막대기들 같고, 집회의 선생들에 의해 박힌 못들 같으니, 한 목자에게서 받은 것이라." (전 12:11)

“설교”는 “라틴어”로 “찌르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어떤 설교가 그것을 듣는 개인이나 회중을 제대로 찌르지 못하면, 그것은 “실패한 설교”나 다름없다. “요한 웨슬리”는 많은 젊은이를 훈련시켜 거리에서 복음을 전하는 “거리 설교자”로 내보냈는데, 그 청년들이 설교하고 돌아오면, 반드시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첫째는 “설교를 통해 죄인들이 구원받았느냐”는 것이고, 둘째는 “설교를 듣고 화를 낸 사람이 있었느냐”는 질문이었다. 만일 두 질문에 모두 “아니오!”라고 답하면, ‘그 젊은이는 설교자로 부름받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이는 성령께서 “죄”에 대해 강력히 책망하시기에, 복음을 제대로 전했다면 죄인들 대부분이 “그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자신의 죄들을 지적한 것에 대해 분노를 표출하든지,” 둘 중 하나의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군산의 한 자매”가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인터넷 방송으로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있으면, 마치 제 자신이 프라이팬에 올라가 지글지글 튀겨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설교”다! 사람들이 곤히 잠자고 있는 집에 불이 났는데, “잠자는 사람을 깨웠다가는 괜히 기분 나빠할 수 있다는 생각”에 조그마한 목소리로 “불이야...” 하겠는가? 아마 큰 소리로 “불이야!” 하며 깨울 것이다. “지옥 불”로 질주하는 죄인에게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달콤한 CCM”이나 불러 주며 한가로이 감상적인 사랑에 빠져 있을 시간이 어디 있는가? “설교자”는 말 그대로 “설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말씀은 살아 있고 능력이 있어 양날 있는 어떤 칼보다도 예리하다(히 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