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죽음에 대한 노예근성

"죽음을 두려워하므로 평생을 노예로 속박되어 있는 자들을 놓아주시려 함이니라." (히 2:15)

필자에게는 스마트폰이 두 개가 있다. 그 둘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둘 다 “죽은 사람”이 남기고 간 것이다. 하나는 교회의 “죽은” 성도의 폰이고, 다른 하나는 “죽은” 장모의 폰이다. 그래서인지 하필 죽은 사람의 것을 쓰느냐는 말을 듣는다. 그런데 왜 그 말을 하는 것일까? “죽음”에 대한 부정적 의식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노예근성”이랄까, 필시 그런 것에 사로잡혀 그러는 것이다. 즉 “죽음”이 시키는 대로 주체성 없이 “죽음”의 눈치만 보며 생각하고 행동하는 성질인데, 그리스도인인 나에게 “죽음”은 더 이상 내 폭압적인 주인이 아니다. 오히려 “죽음”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셋째 하늘의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통로가 된다. 교회가 휴거되기 전에는 죽어서 육신의 장막을 벗지 않고서는 주님께로 갈 방법이 없다. 그리스도인이 되고서도 여전히 “죽음”이 두렵다면 다음의 말씀을 읽어 보라. 『자녀들이 피와 살에 참여하는 자인 것같이 그 역시 같은 모양으로 동일한 것에 참여하신 것은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망시키시며 또 죽음을 두려워하므로 평생을 노예로 속박되어 있는 자들을 놓아주시려 함이니라』(히 2:14,15).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는 노예로 살아서는 안 된다. “죽은” 성도, 곧 먼저 “잠든” 성도의 물건을 쓴다고 해서 어떤 부정적인 일이 일어날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미신”이다. 나보다 앞서 셋째 하늘로 간 “성도들의 물건”을 사용하는 것일 뿐, 물건은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이 미신적인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

진리를 알게 되리니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