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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문화 비평 분류

디지털 굿판을 벌이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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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5년 11월호>

지난 6월에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케이팝 데몬 헌터스,” 이를 줄여서 “케데헌”이라고 하는 애니메이션이 있다. 이와 같은 온라인 동영상은 공개된 후 다른 신작들과의 경쟁과 알고리즘 경쟁에 밀려 시청률이 감소하면서 인기가 식기 마련인데, 케데헌은 공개된 지 근 넉 달이 다 되어 가는 지금도 여전히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식을 줄 모르는 케데헌의 인기는 애니메이션에만 국한되지 않고, 거기에 사용된 골든(Golden), 소다 팝(Soda Pop), 유어 아이돌(Your Idol)과 같은 주요 OST 곡들이 미국 빌보드 메인 차트 톱 10에 진입할 정도로 전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파급력이 극장 애니메이션인 “겨울왕국”에 필적할 만한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전 세계가 열광하는 애니메이션 케데헌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리스도인은 절대로 열광할 수 없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다. 우선 애니메이션 전반에 구더기들처럼 득실거리는 샤머니즘적인 요소들로 역겨움을 참지 못하게 될 것이다. 샤머니즘은 보편적인 원시 종교의 한 형태로, 20세기 종교학과 비교신화학에 영향력 있는 학자였던 고(故)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는 샤머니즘의 “샤먼”을 성(聖)과 속(俗)을 연결하는 인류의 원형적 중개자로 정의하였다. 이 샤머니즘이 한국에 들어와 무속이 되었으며, 샤먼은 무당으로 불렸다. 신접한 무당은 신과 인간의 매개자로서 신에게 인간의 복을 빌거나, 질병 치유를 구하거나, 미래 일을 점치는 등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존재로 여겨졌다.

그와 같은 샤머니즘을 차용하여, 극중 무당으로 나오는 여성 아이돌 그룹 “헌트릭스”(HUNTR/X)가 악귀로서 등장하는 남성 아이돌 그룹 “사자 보이즈”(Sa- ja Boys)와의 대결에서 그들을 물리치고 노래로 세상을 보호한다는 것이 케데헌의 주요 줄거리이다. 그래서인지 오프닝에서부터 무당들이 악귀들과 싸우는 장면이 펼쳐진다. 이때 그들이 사용하는 무기도 무당들이 굿할 때 쓰는 무구(巫具)를 모티브로 했다. 케데헌의 감독 매기 강은 한 인터뷰에서 무당을 케이팝 아이돌의 기원으로 설정한 이유에 대해, 무당의 대다수가 여성이기에 케데헌의 여성 영웅 서사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울러 굿이 최초의 콘서트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면서, 음악과 춤으로 요괴를 물리치는 것에서 굿과 케데헌 스토리의 공통점을 발견했다고도 했다.

위와 같이 케데헌의 문제는 무속과 무당을 친근한 이미지로 각색하여 무속의 경계를 허무는 것에 있다. 이뿐 아니라 한국에서 무속은 민중의 삶을 지켜 온 전통 종교 문화라는 메시지를 각인시키고 있다. 사람들이 무속을 전통과 문화로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분위기를 형성시킨 것이다. 국내 점(占) 시장 규모가 1조 4천억 원으로 추산되는 가운데 지금도 연말연시에는 점집이 성황을 이루는 판에, 이제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무속 콘텐츠와 문화를 찾고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무속 콘텐츠를 사용하고, 용하다는 무당을 찾는 일을 단순히 재미로 한번 해 볼 수 있다고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무당들이 접신하여 영들을 부리는 일을 성경은 분명 죄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스라엘의 사울왕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원인들 중 하나가, 부리는 영에게 조언을 구한 죄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대상 10:13,14)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부리는 영들을 지닌 자들로 더럽혀지지 말라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부리는 영을 지닌 자들을 돌로 쳐 죽임으로써(레 20:27) 그런 자들에게 묻는 자나 강신술사가 없게 하라고 하셨다(신 18:11).

성경에서 언급하는 마술사는 오늘날처럼 무대에서 벌이는 눈속임으로 돈이나 벌어들이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마귀들린 자들로서, 초혼력이나 강신술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갖고 있다. 그렇기에 무속 콘텐츠나 앱을 보고 즐긴다든지, 무당들을 찾아가서 묻고 조언을 구하는 일은 악령과 직접적으로 접촉하여 악령이 들어올 수 있는 통로를 스스로에게 열어 주는 일이 된다. 이처럼 마귀에게 틈을 열어 준 자들은 마귀에게 의지를 점유당하게 되는데, 마귀는 그런 사람을 정복하여 자신의 종으로 삼는다(벧후 2:19). 이와 같이 무속 신앙에 기웃거리다가 마귀에게 단단히 사로잡힌 사람들은 결국 “이 세상의 신”(고후 4:4)인 마귀가 다스리는 세상에 마음과 시선을 빼앗기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노예로 속박되어 그 썩어짐의 속박에서 해방되지 못한 채 죽어 지옥에 던져진다. 케데헌과 같은 무속 콘텐츠는 결코 심심풀이 오락거리가 아닌 것이다.

케데헌은 또한 선과 악의 경계를 허물어 버리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1970년대 이후에 등장한 영화들은 거의가 신(新)할리우드 영향을 받았으며, 이미 그 시기부터 선악의 경계가 모호한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제는 그 모호함이 어린이의 영화에까지 들어왔는데, 여성 아이돌 그룹 헌트릭스의 리더이자 메인 보컬인 루미는 태생이 혼혈적이다. 즉 아버지가 악령이고 어머니는 인간이다. 그렇기에 악령들에게 나타나는 문양이 그녀의 몸에 타투처럼 그려져 있고, 이 때문에 루미는 그 문양을 동료들이 볼까 봐 노심초사한다. 극중에서 선의 역할을 하는 주인공이 자기 안에 있는 악으로 인해 고뇌하는 것이다. 이에 대항하는 진우라는 악귀는 그 반대다. 그는 악귀로서 헌트릭스에 대항하지만, 그의 이야기에는 악마의 유혹에 빠져 가족을 버리고 혼자만 살아남은 자신의 악한 모습을 부정하며 괴로워하는 모습이 나온다. 악의 대표로 제시되는 핵심 인물이 자기 속에 내재된 선함으로 인해 고뇌하는 것이다. 이렇게 선과 악의 구도가 깨져 버린 케데헌과 같은 애니메이션을 본 아이들은, 그릇되게도 선을 공감이나 회복의 능력으로 인식하고, 악을 사회적 불평등이나 고통이 낳은 결과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혜의 시작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에 있다(시 111:10, 잠 9:10).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곧 악에서 떠남을 의미한다(잠 16:6).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해진다면, 누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악에서 떠날 수 있겠는가? 오히려 그들은 주님께서 선도 행하시지 않고 악도 행하시지 않는다고 여기지 않겠는가!(슾 1:12) 그들은 결국 재판관 시대의 이스라엘처럼 서로 자신들의 눈에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하면서도(판 17:6) 그것이 선이며 진리라고 믿게 될 것이다. 선과 악에 대한 성경의 기준을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 이를 모호하게 만드는 자들에게는 화(過)가 있을 것이다!(사 5:20)

케데헌은 선과 악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면서 생기는 극적인 긴장감을 골든(Golden)이라는 노래를 통해 해결하고 있다. 그런데 가사의 내용이 극히 인본주의적이다. 그 내용을 보면 루미 자신은 원래 여왕으로 태어났지만 자기 몸에 새겨진 악의 문양으로 인해 스스로를 억압하며 정상과 비정상, 그 두 길에서 방황했던 과거를 회상한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문양이 있는 것이 자신의 본 모습이라는 점을 깨닫고 이제는 더 이상 숨기지 않고 드러내어, 있는 그대로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겠다고 한다. 그래서 루미의 몸에 새겨진 악의 문양은 어떤 갈등이 해소되는 식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문양이 있는 루미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람들에게 그것을 당당하게 내보임으로써 오히려 무지갯빛을 띤 새로운 색의 문양으로 승화되어 스스로를 구원한다.

그와 같은 자세는 “인본주의적 구원관”을 보여 준다. 인본주의자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거부하면서도 윤리적인 삶, 개인 완성, 그리고 인류의 더 큰 선(善)을 지향하는 삶의 태도를 강조하며 인본주의를 가리켜 기존 종교를 대체하는 새로운 종교라고 규정했다. 결국 인간의 의로 자신을 구원하겠다고 선포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의에 대해 『그러나 우리는 다 불결한 것 같고,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걸레 같으며, 또 우리는 다 잎사귀처럼 시들며 우리의 죄악들은 바람처럼 우리를 옮겨갔나이다.』(사 64:6)라고 말씀하신다. 인간이 자신의 걸레와 같은 의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오만이다. 하지만 케데헌은 인간 자신에 대한 희망을 가지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으며, 그렇게 구원받은 인간들이 모이면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이 모이는 곳은 그 어디나 전쟁과 종교와 쓰레기만 있는 비참한 현실을 망각한 허울 좋은 몽상에 지나지 않는다.

다윗은 『우리의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죽음으로부터의 문제는 주 하나님께 속하였느니라.』(시 68:20)라고 말했다. 죽음 이후에 자기 결정권을 갖는 인간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기록된 말씀에 따라 하나님께서 결정하신다(계 20:11,12). 하나님께서는 걸레처럼 더러운 인간 자신의 의를 신뢰한 인본주의자 같은 자들은 지옥의 불로 태우시겠다고 말씀하셨다(살후 1:8,9). 반면 그 지옥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제시하셨다(요 14:6). 디지털 굿판을 벌이며 “스스로를 구원하라”고 하는 케데헌에 시간 낭비하지 말라. 그 대신 성경이 강조하는 “구원”에 관심을 갖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함으로써 지옥의 영원한 형벌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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