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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말씀보존학회 - 한글킹제임스성경 및 진리의 지식을 전파합니다 &amp;gt; 바이블마스터 &amp;gt; 지식뱅크 - 한국 교계 비평</title>
<link>https://www.biblemaster.co.kr/bb5</link>
<description>테스트 버전 0.2 (2004-04-26)</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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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목회를 시작하는 동역자에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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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목회는 영광스러운 부르심이지만 동시에 끊임없는 영적 전쟁의 현장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섬기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여러 문제와 반대를 경험하게 된다. 성경은 『실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박해를 받을 것이라.』(딤후 3:12)라고 말씀한다. 그러나 모든 문제가 외부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 목회자의 고집과 감정적인 태도, 말실수와 성급함으로 인한 오판, 교만, 인간관계의 미숙함 때문에 스스로 문제를 만들어 내어 불필요한 충돌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문제를 직면하는 솔직한 용기뿐 아니라, 문제를 예방하는 지혜도 함께 갖추어야 한다. <br/><br/>무엇보다 목회의 통로인 “말”을 거룩하게 하라. 실제로 교회 안의 많은 상처와 분열은 “말”에서 시작된다. 말한 것은 지키고, 지킬 것만 말하라. 목회자의 말은 강단보다 비공식 자리에서 더 쉽게 무너진다. 식사 자리, 차량 이동, 사적인 대화, 심지어 문자와 SNS까지도 목회의 연장선이다. 강단에서의 광고조차 말할 내용은 미리 기록해 두고 자신의 생각과 말이 일치되도록 훈련하라. 들려오는 온갖 헛된 말이나 험담은 그 진위가 확인될 때까지는 즉흥적이거나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아야 한다. 성도들에 대해 우선적으로 좋은 점을 찾아 말하라. 비판하기보다 세워 주는 말을 하고, 진실만 말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성도들을 위한 중보기도에도 우선 그 성도의 선한 부분을 먼저 아뢰고, 그 다음 중보기도의 내용을 말씀드리라. <br/><br/>목회의 재정은 “실패의 통로”가 되기 쉬우므로 엄격히 관리해야 한다. 재정은 반드시 체계적인 구조로 관리해야 하며, 개인의 양심에 맡겨서는 안 된다. 투명한 시스템이 목회자를 돈으로부터 보호한다. 목회자가 성도와 돈거래를 한다면 거의 신용을 다 잃었다고 보아야 한다. 외모로 사람들을 차별하지 말되, 특히 돈과 관련하여 더욱 그러해야 한다(약 2:3). 대접도 한 사람으로부터 집중적으로 받다 보면, 그에게 문제가 있을 때 그를 바로잡아 주지 못하게 될 여지가 있다. 또한 예산을 세우고 집행하는 데 있어서는 믿음과 무모함의 차이를 분별해야 한다. 분명한 필요가 있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그 필요를 채워 주시기를 간청하고 기대하라. 목회자라는 이유로 사람들이 무언가를 해 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을 갖지 말라. 누군가가 목회자를 섬기려고 베푼다면 정중히 받아들이고 감사하되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는 말라.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신 모든 것에 감사하며 그 손길들을 축복하고 자신도 관대하게 베풀어야 한다. <br/><br/>목회의 기초는 “인격”이기에 삶으로 신뢰를 얻어야 한다. 목회자의 권위는 위임된 것이며, 본을 통해 인정되고, 신뢰를 통해 유지된다. 지나치게 권위적이거나 지나치게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 지도력을 잃기에, 목회자는 겸손과 담대함을 함께 가져야 한다. 맡겨진 양무리를 섬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권위가 필요한데(고후 10:8), 지도력이 없으면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 권위는 지배를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벧전 5:3) 양무리의 본을 보인 섬김을 통해 인정받는다. 목회자도 실수를 할 수 있지만 신뢰를 잃을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경우든 실수할 수 있기에 실수했을 때는 즉각 사과해야 마귀에게 틈을 주지 않게 된다. 다른 사람의 실수를 물고 늘어지는 것은 그야말로 패착이다. 잘못을 지적하려면 당사자를 개인적으로 대면하라. 비겁하게 소위 “표적 설교”를 통해 공격해서는 안 된다. 특별히 긴급한 경우가 아니라면 해결해야 할 문제를 설교에 거론하고자 할 때는 최소 한두 주가 지난 뒤에, 자신의 감정적 찌꺼기들이 모두 여과된 후에 설교에 올리는 것이 현명하다. 즉 전달할 내용을 충분히 자신 안에서 먼저 여과시키고 모든 사람에게 적용 가능하도록 보편화시킨 후 전달해야 한다. 핵심을 비껴가지 말고 분명하게 설교하되, 메시지는 강하면서도 태도는 진실되고 은혜로워야 한다. 그렇게 해야 목회자의 진정성을 통해 신뢰를 얻는다. 강물이 흐르다 물 좀 튀었다고 “이 강은 거꾸로 흐르네!”라고 단정 짓지 않듯, 사람도 가끔 실수할 수 있으니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그 사람의 인격 전체를 “나쁜 사람”으로 매도하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목회자는 자기 과시나 독선적 태도를 경계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분명한 기준과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결국 목회자의 지도력은 직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의 경건과 진실성과 성도들을 향한 사랑이 담긴 인격에서 나온다. 성도들은 목회자를 존중하고 사랑해야 하지만(살전 5:12,13), 그들이 설령 목회자를 좋아하지 않을 때에도, 목회자는 말과 행실과 사랑과 영과 믿음과 순결에 있어서 믿는 자들의 본이 되어 이를 극복해야 한다(딤전 4:12).<br/><br/>목회의 열매인 “관계”를 지키라. 목회자는 순결과 도덕성에 흠이 없는 삶을 추구해야 한다. 특히 여성 문제에 대해서는 철저한 경계가 필요하다. 우선 목회자는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며 존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회중이 알도록 해야 한다. 회중 앞에서는 절대 어떤 방식으로든 아내를 난처하게 만들거나 깎아내리지 말라. 교회 성도들 누구라도 목회자와 그의 아내가 서로 깊이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목자를 들이받고자 하는 양의 속성이 표출될 때 목자에게 틈이 없으면 목자의 아내를 공격하게 되어 있다. 여성과의 상담에서 장시간 상담하거나 감정적으로 지나치게 가까워지는 상황은 피해야 한다. 간략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명한 권면을 제시하고, 기도하는 것으로 마무리할 수 있다. 이성 상담은 기본적으로 10-15분 내에 마무리하되, 상담이 계속 요구된다면 아내나 적합한 자매를 참석시키거나 그들에게 맡겨야 한다. 이것이 다소 극단적으로 보이더라도 『악은 어떤 형태이든지 피하라.』(살전 5:22)라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 사탄은 종종 작은 틈을 통해 목회자의 삶과 사역을 무너뜨린다. <br/><br/>교회 안의 동역자들을 대하는 태도 역시 중요하다. 모든 지체들은 경쟁자가 아니라 협력하는 동역자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원칙과 역할을 제시하되, 동시에 존중과 배려로 관계를 세워 가야 한다. 정기적인 기도와 소통, 명확한 책임 분담은 많은 갈등을 예방한다. 또한 일을 위임할 때는 단순한 친분보다 책임감과 신실함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br/><br/>목회자는 “반대”와 “비판”도 반드시 경험하게 되는데, 모든 반대를 적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어떤 반대는 목회자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일 수도 있기에 비판을 들을 때는 먼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자신을 점검해야 한다. 동시에 성경적 확신이 있다면 사람들의 반응 때문에 물러서지 말아야 한다. 교리 문제, 공개적인 죄 등에 대해서는 즉시 대응하고, 감정 충돌, 오해에 관한 문제는 시간을 두고 대처하라. 중요한 것은 강압적인 태도가 아니라 온유함과 성숙함이다. 모든 사람이 목회자를 적극적으로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가능한 한 모든 사람과 화목하게 지내려는 자세가 필요하기에(롬 12:18), 이를 위해 우선적으로 사람들의 장점을 보려고 노력하고, 친절과 사랑으로 대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 결과 시간이 지나면서 오해가 풀리고 관계가 회복되는 경우도 많다. 교회 안에서 분열이나 갈등이 발생할 때도 지나치게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때로는 어떤 사람들이 떠나는 것이 오히려 교회의 질서와 평안을 가져오기도 한다(마 15:13). 목회자는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말고, 침착함과 사랑을 유지하는 훈련에 집중해야 한다.<br/><br/>목회는 능력이 아닌 관계의 문제이며,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목회 사역이 바빠질수록 하나님 앞에 머무는 시간이 더더욱 필요하다. 목회자 자신도 언제든지 실수하고, 상처받고, 낙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연루되지 않는 한, 그분께서 부르신 종을 버리지 않으신다. 목회 현장에서 수많은 문제를 만나더라도, 기도와 사랑과 말씀 안에 거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길을 열어 주신다. 그러므로 목회를 시작하는 동역자는 문제를 두려워하지 말고, 동시에 불필요한 문제를 만들지 않도록 늘 자신을 살피며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자들을 지배하려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3).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5 May 2026 11:27:39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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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예수 그리스도의 강건하고 훌륭한 군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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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대배교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죄의 유혹과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 타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한 번 타락의 늪에 깊이 빠져들면, 그곳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빠져나와 영적인 회복을 이루기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다. 이는 인간이 가진 타락한 육신의 본성뿐만 아니라, 그 배후에서 성도의 발목을 집요하게 붙들고 있는 마귀의 권세가 실재하기 때문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마귀의 공격이 어떠한 경로와 방법으로 이뤄지는지에 대한 영적 인식이 점점 흐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이 지금 이 시대를 향하여 『아주 어려운 때』(딤후 3:1)라고 명확히 경고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br/><br/>아프리카 선교의 최전선에서 전 생애를 바쳤던 C.T. 스터드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다. 즉 세상에서 용맹하다고 자부하는 어떤 전사들보다 더 용맹하며, 질병과 위험, 그리고 죽음조차 자신의 친구처럼 여길 줄 아는 영웅이다. 그렇지 못한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는 단지 물방울이 닿거나 연기에 스치기만 해도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초콜릿 그리스도인’에 불과하다.” 스터드의 이 날카로운 지적은 안락함만을 추구하며 주님을 위해 아무런 고난도 감당하려 하지 않는 나태한 성도들을 향한 꾸짖음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초콜릿 그리스도인들”이 급격히 늘어났고, 강건한 군사를 찾아보기가 매우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주님을 위해 기꺼이 싸우기를 원하는 소수의 군사가 존재하며, 우리가 이겨야 할 영적 전쟁은 남아 있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 즉 어떤 고난도 감당하겠다는 강건함을 지닌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가 되어야만 한다.<br/><br/>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는 배운 진리를 잘 가르치는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명하신 두 가지 지상명령은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는 것”(행 1:8)과 “모든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는 것”(마 28:20)이다. 주님을 따랐던 사도들로부터 교회사 속의 모든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타인에게 진리를 잘 가르칠 수 있는 영적 군사들이었다.<br/><br/>“가르치는 일”은 강단에 서는 목사나 성경 교사에게만 맡겨진 것이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받은 복음을 주변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는 근본적인 사명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모든 인류는 죄 가운데 태어나 죄에 대한 심판으로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게 된다”는 성경의 선포를 복음을 듣는 이들에게 명확히 인지시키고,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도록 적극적으로 인도하는 것이 영적 군사의 가장 기초적인 임무다.<br/><br/>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는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진리의 지식에 이르도록 성경을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 자신이 배우고 깨달은 진리를 또 다른 신실한 사람들에게 전수하여, 그들 역시 다른 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영적 재생산의 통로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이 『네가 많은 증인들 가운데서 내게 들은 것들을 신실한 사람들에게 맡기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2)라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성경적 지식은 단순히 머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삶의 현장에서 증명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해야 하며(딤후 2:15), 가까운 가족부터 시작하여 주변인들이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의 군사로 바로 설 수 있도록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br/><br/>거듭난 지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말씀의 전문가가 되지 못했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일이다. 사도 바울은 영적 성장을 거부하던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고기로 먹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너희가 지금까지 소화시킬 수 없었음』(고전 3:2)이라고 책망했다. 성경대로 믿는 대열에 합류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로서 성장하는 일에 실패해서는 안 된다. 과거에 한 설교자는 이렇게 외쳤다. “당신이 활용할 수 있는 모든 힘과 재능, 수사력을 총동원하여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전파하는 일에 인생을 거십시오! 인생에서 그보다 더 고귀한 목표는 결단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br/><br/>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는 고난을 견디며 이생의 일들에 얽매이지 않는다. 모든 성도는 구원받은 순간부터 군사로서 양육 과정을 거쳐야 한다. 왜냐하면 갓 거듭난 때가 마귀의 공격 속에서 성장하느냐 시들어 버리느냐를 결정짓는 영적 “골든타임”이기 때문이다. 피터 럭크만 목사는 구원 후 2주 내에 양육이 시작되지 않으면 마귀가 구원의 확신을 흔들고 결국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게 만든다고 경고했다. 바다거북 수백 마리 중 단 1%만이 사투 끝에 생존하듯, 성도가 하나님의 바른 말씀 위에 세워진 교회로 인도되어 정착하는 것은 하나님의 세밀한 섭리의 결과다. <br/><br/>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성경대로 믿는 지역 교회에 소속되어 영적 전쟁터에 투입된 군사들은 “하나님의 전신갑옷”으로 무장하여 어떤 고난도 견뎌 내야 한다(딤후 2:3). 고난은 강인한 군사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필수 과정이다. 고된 훈련이 단단한 용사를 빚어내듯, 고난을 통한 영적 연단만이 훌륭한 군사를 만들어 낸다. 『훈련된 자들에게는 화평한 의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11)라는 말씀처럼, 고난을 견뎌 내는 사람만이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게 된다. “성도에게 닥치는 고난은 주의 말씀을 지키라는 하늘의 신호”라는 말이 있다. 시련을 견뎌 낸 군사는 이전보다 견고한 믿음을 소유하게 되며, 주님께서 쓰시는 강건한 군사로 성장하게 된다.<br/><br/>성경은 『전쟁에 임하는 자는 아무도 이생의 일들에 얽매이지 아니하나니 이는 자기를 군사로 뽑은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4)라고 말씀한다. 군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이생의 일들에 대한 집착”이다. 세상일이 너무 바빠 성경 읽을 시간도 없고, 기도는 형식적이며, 복음 전도지 한 장 전할 여유조차 내지 못한 채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이생의 일들에 결박된 상태다. 육신으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기 위해 헛된 씨앗을 심고 있는 것이다. 군대 대장이신 주님께서 하늘로의 소환 명령을 내리시기 전까지, 우리는 이 땅의 전장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초소를 죽기까지 사수해야 한다.<br/><br/>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는 규칙대로 달리는 사람이다. 헤비급 챔피언 마이크 타이슨이 반칙으로 실격패하고 몰락했듯이, 규칙에서 벗어난 자들의 끝은 오직 부끄러움뿐이다. 성경 속 영웅 삼손 역시 성별의 규칙을 가볍게 여기다 비참한 신세로 전락했다. 성경은 『규칙대로 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하리라.』(딤후 2:5)라고 엄중히 경고하신다. 그리스도인은 믿음과 실행의 최종권위인 성경의 법칙을 철저히 준수할 때 비로소 인정받는 군사가 될 수 있다.<br/><br/>우리의 믿음의 경주는 단순한 완주가 아니라,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얻기 위해 이기려고 애쓰는 질주여야 한다. 『이기려고 애쓰는 사람은 누구나 모든 일에 자제하나니 이제 그들은 썩어질 면류관을 받으려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을 면류관을 받고자 함이라』(고전 9:25). 사도 바울은 우리가 상을 얻기 위해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절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고전 9:27). 경주자에게 요구되는 절제와 인내는 그리스도인의 품격을 결정짓는 기본적인 규칙이다.<br/><br/>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규칙적인 말씀 읽기와 기도, 성경 공부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또 자신의 몸을 의의 병기로 드리기 위해 일상의 모든 부분에서 절제를 실천해야 한다.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는 훈련은 호흡이 다하는 날까지 지속해야 할 영적 과업이다. 지극히 작은 일에서부터 신실함을 보이지 못한다면 그 파국적인 결과는 반드시 드러나게 된다. 지난 역사 속에서도 뜨거운 열심을 내던 이들이 낙오한 것은 “규칙대로” 달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말씀을 어긴 자들에게 가차 없이 실격 선언을 하신다. 면류관을 얻는 영광은 오직 말씀의 규칙을 철저히 준수하며 끝까지 인내하는 자만이 누리게 된다.<br/><br/>조지 패튼 장군은 “군인의 가장 영예로운 죽음은 전장에서 전사하는 것”이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 역시 주님을 위해 선한 싸움을 싸우다가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각오가 있어야 한다. 죽기까지 신실한 군사로 남기 위해, 일상의 모든 순간마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전심전력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상고하고, 다른 성도들을 양육하는 일에 헌신하라. 그리고 주님을 위한 고난을 감사히 여기고, 썩어 없어질 이생의 일들에 마음을 뺏기지 말아야 한다. 우리를 위하여 면류관을 예비하신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 이기도록 달려야 한다. 사도 바울은 대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충성을 지켜 낸 “군인 중의 군인”이었다. 바로 그 바울이 지금 우리를 향해 “은혜 가운데서 강건하라!”(딤후 2:1)고 권면하고 있다. 앞서 간 성도의 응원을 받는 우리 모두가 경주를 완주하고 주님과 대면하는 그날, “잘하였도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라는 거룩한 칭찬과 최고의 명예를 얻는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5 May 2026 11:20:36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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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정치적 술수의 산물인 “니케아 신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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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A.D. 325년의 니케아 공회는, 콘스탄틴 황제가 A.D. 313년 기독교를 공인한 후, 교회들을 통합하여 하나의 국가교회를 수립하고 기독교에 대한 황제의 통제권을 강화하기 위해 소집한 공회이며, 역사적으로 개최된 첫 번째 공회이다. 이 공회에서 결정된 사항은 삼위일체 교리, 니케아 신조, 부활절 날짜, 그리고 교회 규범 20개 항목이었다. 친카톨릭 교회사가들은 이 공회를 삼위일체 교리가 확정된 중요한 공회로 평가한다. 왜냐하면 이 공회에서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주장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 고백을 담은 니케아 신조를 채택하여 삼위일체 교리를 확정하였기 때문이다.<br/><br/>니케아 공회의 삼위일체 논쟁에서 아리우스파의 주장은 “아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피조된 신”으로서 하나님과 유사한 존재(유사 본질)이긴 하지만 동일한 존재(동일 본질)가 아니라는 것이었고, 아리우스파의 주장에 반대한 아타나시우스파는 아들 하나님은 피조된 존재가 아니라 “낳아진 존재”로서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라는 것이었다. 아리우스파의 주장은 아리안주의라고도 일컬어지며, 현대에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아리우스파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여 그들의 교리로 삼고 있다. <br/><br/>니케아 신조는 “사도 신경”과 매우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그 마지막 부분에 아리우스파의 파문을 염두에 둔 내용이 덧붙여져 있다. 「“성자께서 존재하지 않은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분은 태어나기 전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분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에서 생겨났다.”라고 말하는 이들을, 또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다른 실체나 본질에서 생겨났다거나,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창조되었거나 변할 수 있거나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을 가톨릭 교회는 파문한다」(한국천주교주교회의 번역, &lt;하인리히 덴칭거: 신경, 신앙과 도덕에 관한 규정·선언 편람&gt;, pp.125,126). 니케아 신조는 이후 보완되어 A.D.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회에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로 명명된다. <br/><br/>A.D. 313년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틴 황제는 자신의 통치 체제를 굳건히 할 목적으로 기독교의 통제권을 갖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콘스탄틴이 필요로 했던 것은, 자기들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종교 지도자들을 황제의 통제하에 두고 그들의 종교적 주장을 받아들여 줌과 동시에, 콘스탄틴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펴 나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콘스탄틴은 당시 기독교계에 있었던 문제들 중에서 “삼위일체” 문제와 “부활절 날짜” 문제를 기회로 삼아 황제의 주관하에 공회를 소집한 것이었다. 콘스탄틴은 종교 계급을 자신의 독재하에 통제할 수 있는 최적의 기회를 적절히 활용한 것이다. 콘스탄틴의 진심은 결국 자신이 교회들의 권위가 되려는 것이었다.<br/><br/>사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주요 논제는 “삼위일체”나 “부활절 날짜”가 아니었다. “삼위일체”는 이미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당연한 교리였고, 부활절은 성경에서 날짜를 정해서 지키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주요 논제는 “침례”와 “교회의 순수성”과 “재림”이었다.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물침례에 의한 구원”과 “기독교 공인 전의 배교자들”과 “후천년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교회들로부터 “분리”를 실행하고 있었으며, 이미 “노바티안”과 “몬타니스트” 같은 그리스도인들은 오염된 교리를 실행하는 사람들로부터 “성별”을 실행한 상태였다. 그러므로 니케아 공회는 황제의 정치적 술수에 휘말려 그에게 기독교 통제권을 넘겨 준 기념행사에 불과했던 것이다.<br/><br/>제50차 한국복음주의조직신학회(회장 유창형 박사) 정기학술대회가 “니케아 공의회 1700주년을 보내며”라는 주제로 지난 5월 9일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열렸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니케아 신조를 통해 본 기독론 해석과 신학적 교훈”을 주제로 안명준 박사(한국성서대 초빙교수, 평택대 명예교수)가 기조 강연을 했는데, 니케아 신조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성경적 이해가 잘못되었기에 이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br/><br/>안 교수는 니케아 신조에 대해 “교회사적으로 가장 보편적·규범적 신앙고백으로, 기독론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이단적 신학 사상을 평가하는 초석이자 규범으로 기능해 왔다.”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것은 카톨릭이 정한 “신조”나 “규정”을 성경보다 우위에 두는 친카톨릭적 사고에서 나온 평가이다. “신조” 같은 것을 만들어 예배 등의 의식 때마다 암송하며 “헛된 반복”을 계속하는 것은 카톨릭의 전통에 불과하다. 하물며 그가 말한 “기독교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이단적 신학 사상을 평가하는 초석이자 규범”은 “니케아 신조”가 아니라 “성경”이다. 그는 잘못 배워도 한참 잘못 배운 것이다. “신조” 따위를 “성경”이 있어야 할 권위 위에 올려놓는 것은 늘 카톨릭이 해 온 일이기 때문이다.<br/><br/>또한 안 교수는 니케아 신조가 원래 “예배와 고백을 위한 언어였으나, 아퀴나스에 이르러... 니케아 신앙을 철학적으로 완성했지만, 성경의 구속사 중심성과 은혜의 급진성을 약화시킨 한계를 가진다.”라고 말했는데, 니케아 신조는 결코 “예배와 고백을 위한 언어”가 아니었으며, 역사적으로 콘스탄틴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만들어진 인위적인 문서였기에, 그와 관련하여 “구속사”라든가 “은혜”와 같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가치를 억지로 찾아내어 비판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그는 “니케아 신조가 오늘날까지 가톨릭과 정교회, 개신교를 묶어 주는 유일한 ‘신학적 분모’이자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만들어 왔다.”라고 주장했다. “신조” 하나를 과대평가하고 신성시하기까지 하는 표현에 더하여,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라는 카톨릭이 스스로를 칭할 때 사용하는 명칭을 가져다가, 카톨릭과 정교회와 개신교를 묶어 하나의 교회라고 칭한 것은 극단적인 친카톨릭적 성향을 보여 준다 하겠다. <br/><br/>안 교수는 “니케아 신조는 교회 예배 시 ‘사도신경’과 더불어 함께 고백돼야 한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고백되면 좋을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사도신경”에 관한 그의 역사적, 신학적 평가에도 심각한 오류가 있음을 드러내었다. “사도신경”은 “사도들”과는 무관하게 로마의 히폴리투스(A.D. 170-235)가 세례 시 사용한 신앙고백문에 기초하고 “니케아 신조” 등의 영향을 받아 8세기경 현재의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카톨릭에서 주로 “유아 세례”나 “묵주 기도”를 할 때 사용한다. 이교도인 카톨릭의 잘못된 전통이 개신교에도 그대로 전해져서 마치 불교의 염불처럼 암송되고 있는 것인데, 한국 교계에서 소위 “주기도문”과 함께 가장 많이 암송되는 것이 바로 사도신경이다. 이러한 “헛된 반복”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금하신 것이다(마 6:7). 안 교수는 “니케아 신조”나 “사도신경”이 신학적으로 무가치한 카톨릭 전통임을 모른 채 실로 무지한 주장을 펼친 것이다. 바른 신앙 고백은 “신조”나 “신경”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 하나하나를 믿는 “믿음” 그 자체가 바른 신앙 고백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5 May 2026 11:18:2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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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성소수자”를 향한, 진리를 상실한 긍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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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지난 4월, 뉴스앤조이는 서울 중구에 소재한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서울제일교회에서 열린 고(故) 육우당(본명 윤현석) 23주기 추모 예배 소식을 보도했다. 그는 동성애적 성향으로 인해 학창시절 내내 괴롭힘에 시달리다가 학교를 자퇴한 뒤 사회운동에 뛰어든 인물이었다. 동성애에 대해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사회를, 특히 “기독교인들”을 탓하며 18세의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그는, 유서에 이렇게 썼다. “소돔과 고모라 운운하는 가식적인 기독교인들에게 무언가 깨달음을 준다면 난 그것만으로도 나 죽은 게 아깝지 않다고 봐요. 몰지각한 편견과 사회가 한 사람을, 아니 수많은 성적소수자를 낭떠러지로 내모는 것이 얼마나 잔인하고도 반성경적, 반인류적인지. 우리더러 죄인이라 하기 전에 자기네들이나 먼저 회개하고 이웃사랑 실천을 해야 할 거예요.”<br/><br/>이 자리에서 교인들은 “그 모습 그대로” 등의 CCM을 부르면서 눈시울을 붉혔고, 설교를 맡은 홍보연 목사는 “육우당이 겪은 고통뿐 아니라, 끝까지 붙든 소망을 함께 기억하자”고 했다. 여기서 말한 “소망”이란, 이 추모 예배 참가자들이 한목소리로 말했던 것처럼 “이 땅의 모든 교회가 누구라도 있는 모습 그대로 존재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란다”는 것이었음이 분명했다. 이와 같은 “소망”을 품은 교인들은 아직까지 소수에 불과하지만, 그런 자들이 제도권 안에서 버젓이 정체를 드러낸 채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 봐도 격세지감을 느끼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성소수자 인권운동 기독교 단체인 “무지개예수”에 따르면, 당당하게 교회 이름과 장소를 공개한 “무지개교회,” 즉 “성소수자 친화적”인 교회의 수는 2017년을 기준으로 서울에만 11곳, 전국적으로는 19곳이었다. 눈치가 보여 공개적으로 “무지개교회”임을 표명하지 못하는 교회들까지 합하면, 그 수는 몇 배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뉴스앤조이에서는 2023년 「성소수자 교인 “커밍 인” 과정 책으로 기록한 교회」라는 제하의 기사로 경기도 의정부시에 있는 “정언향교회”라는 곳을 소개했는데, 공식적으로는 보수적인 교단에 속한 그 교회는 성소수자들을 환대하되 “무지개교회”임을 표명하는 대열에는 동참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 과거에 정체가 탄로 나는 바람에 직장을 그만둔 경험을 했던 성소수자 교인이 거기에 정착했던 것이 그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다니는 교회가 “무지개교회”로 알려지면, 같은 일이 반복되지 말란 법이 없었던 것이다.<br/><br/>그 교회의 담임목사인 권영진 목사는 막 교회를 개척했을 무렵부터 “언젠가 우리 교회에도 성소수자 교인이 올 수 있을 텐데.” 하는 고민을 품고 성소수자에 대해 공부했다고 한다. “성서학” 전공자인 그가 내린 결론은 “성경에서 죄악시하는 동성애는 오늘날 성소수자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였다. 그러던 중 정말로 한 청년이 스스로가 성소수자임을 털어놓는 일이 벌어지자, 정 목사는 그가 교회에서 “커밍아웃”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이 일에 정 목사를 도운 김석희 전도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희는 성소수자만을 위한 교회나 운동 단체처럼 성소수자가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애썼던 건 아니에요. 눈앞에 성소수자 지체들이 드러났고, 이들과 어떻게 함께 지낼까를 고민했던 것뿐이죠... 저는 교회가 누군가를 소외시키지 않고, 다른 위치와 입장에 있는 서로를 들여다보고 헤아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br/><br/>“성소수자 친화적인 교회들”은 동성애는 죄가 아니며, 설령 죄일지라도 모든 인간이 다 죄인인데 어찌하여 성소수자만 교회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느냐고 다른 교회들을 향해서 따져 묻는다. “무지개예수”는 “동성애는 죄인가요?”라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한다. “성서의 모든 구절은...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또한 앞뒤 문맥 속에서, 성서가 집필되었던 당시 사회문화적 조건 속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되어야 합니다. 동성애를 부정하고 죄악시했던 성서 구절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레 18:22)와 같은 구절의 경우... 자신의 욕망을 위해 타자를 도구화하는 모든 행위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 밖에 동성애를 정죄하는 데 쓰이는 모든 성구들은 성경에 흐르는 무게 있는 가르침인 약자에 대한 보호, 주어진 성의 의미, 사랑, 정의, 평등을 강조하는 말씀으로 바르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br/>그들은 또 이렇게 이야기한다. “또 많은 사람들이 소돔이 동성애로 인해 멸망당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서에는 소돔이 멸망한 이유로 동성애를 직접 언급한 구절이 없습니다... 특히 선지서들을 보면 이사야는 소돔의 죄는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학대하고 정의를 추구하지 않는 악한 행위(사 1:10-17)를, 예레미야는 간음, 거짓말, 악행(렘 23:14)을, 에스겔은 교만, 음식물의 풍족함, 즉 탐식, 배고픈 자에 대한 무관심, 가난한 자들을 방기하고 돕지 않는 것(겔 16:49)을 소돔의 죄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런 성경의 기록들을 볼 때 소돔의 죄를 동성애로 보는 것은 무리입니다. 더구나 소돔성이 동성애 때문에 멸망했다는 것은 더 근거가 없는 해석입니다.”<br/><br/>잘 모르면 입이라도 다물면 될 터인데(잠 17:28), 대부분의 무식한 군상들은 “자신이 잘 모른다는 것”조차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하질 못한다(요 9:40,41). 먼저, 성경은 문자적으로 보아서는 안 되고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주지시켜 줄 필요가 있겠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그러므로 네가 보는 것을 책에 써서』(계 1:11). “알파와 오메가”이신 주님께서는 문자로 쓰인 “책”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되, 처음부터 그 끝을 선포하는 분이시다(사 46:10). 오늘날의 학자들은 성경이 여러 기록자들과 편집자들에 의해 차츰차츰 그 모습을 갖춰 갔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이 하늘, 곧 시간의 흐름이 멈추기에 “영원”이라고 불리는 곳에 이미 영원히 세워졌다고 말씀하신다(시 119:89). 따라서 성경의 어떤 부분도 변화하는 시대상에 맞춰 “재해석”될 필요가 없다. 성경은 그 모든 변화까지도 아우르며 “끝”을 선포하실 수 있는 분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의 질문은 “오늘날 그 구절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가 아니라 오직 이것이어야 한다. 『율법에는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너는 어떻게 읽느냐?』(눅 10:26) 성경에서 『너는 여자와 함께 하듯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그것은 가증함이니라.』(레 18:22)라고 말씀하시면, 그대로 읽으면 되는 것이다.<br/><br/>또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아들들 중에서는 남색자가 있지 못할 것이니라.』(신 23:17)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변개된 성서들에서는 “남색자”라는 단어가 신명기의 말씀에서 사라져 버리고 없다. NIV, NASB, NRSV는 모두 “남색자”를 “신전(이교)에서 몸 파는 자”로 바꿔 버렸고, 한국 교회의 개역개정판도 “남색자”를 “남창”으로 옮기고 있다. 이 “남색자”라는 단어는 영어로 “sodomite”이며, 직역하면 “소돔인”이라는 뜻이 된다. 왜 “무지개예수” 같은 단체가 “소돔성이 동성애 때문에 멸망했다는 것은 근거가 없다.”라고 주장하는지 이제 알 만하지 않은가? “sodomite”라는 단어를 빼 버린 변개된 성서들을 사용하는 주석가들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할 뿐인 그들로서는, 소돔인들의 멸망을 초래한, 소돔인들의 “트레이드마크” 격인 죄가 바로 “남색”이었음을 알 턱이 없는 것이다. [참고로, “sodomite”라는 단어가 빠지게 된 것은 순전히 동성애자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였다. 1900년을 전후하여 나온 변개된 성서들인 RV와 ASV에도 “sodomite”라는 단어는 그대로 있다. 1960년대에 일어났던 “게이해방운동” 전에는, “동성애는 불과 유황을 받을 만한 죄다.”라는 것을 변개된 성서들도 인정했던 것이다.]<br/><br/>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죄인들을 위해 피를 흘리셨기에, 설령 성소수자라고 해도 자신이 죄인임을 시인하고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가족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동성애가 죄라는 사실을 인정하지도 않고, 또 자신이 그런 짓을 자행한다는 사실을 버젓이 드러내는 사람이 지역 교회에 소속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에 대해 『율법에는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너는 어떻게 읽느냐?』(눅 10:26)를 묻는다면, 성경은 만일 형제라고 하는 어떤 자가 음행하는 자이고 그것이 알려졌거든, 그와 사귀지도 함께 먹지도 말고 너희 가운데서 쫓아내라고 말씀하셨다고 하겠다(고전 5장). 동성애는 인간이 범할 수 있는 또 다른 “음행”이다(고전 6:9,10). 그런 음행하는 자를 지역 교회의 회원이 되도록 허용하는 일은 “이웃사랑의 실천”이 아니라 부끄러운 일이다(고전 6:5). 정 그런 자들을 포용하는 “사랑”을 베풀고 싶다면, 교회 간판부터 내리고 하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교회”는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니 말이다. 『우리가 진리를 거슬러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해서만 할 수 있느니라』(고후 13:8).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5 May 2026 11:09:3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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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주기도문 오독(誤讀)의 시대</title>
<link>https://www.biblemaster.co.kr/bb5/%EC%A3%BC%EA%B8%B0%EB%8F%84%EB%AC%B8-%EC%98%A4%EB%8F%85%E8%AA%A4%E8%AE%80%EC%9D%98-%EC%8B%9C%EB%8C%80/</link>
<description><![CDATA[책의 본문을 읽고 해석하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주관적”이다. 그러나 그 주관성이 독자 자신의 편견을 강화하는 도구로 전락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혹자는 독자의 주관이 개입된 “창조적 오독”이 새로운 문학을 탄생시킨다고 했지만, 오독은 대부분 창조적이지 않으며, 성경과 관련해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은 독자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취하는 책이 아니다. 그러한 자세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의 의도를 왜곡할 뿐만 아니라, 본문에 따라서는 오독한 독자를 지옥에 던져 넣을 수도 있다. 교회와 관련되어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배우거나 만들어 낸 해석의 감옥에 갇혀, 성경 본문을 읽으면 읽을수록 오류가 강화되는 비극에 빠져 있는 것이다.<br/><br/>우리에게는 성경을 아무렇게나 읽을 자유가 없으며, 오히려 성경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것을 읽는 독자의 생각들과 의도들을 판단하는 인격을 지닌 매우 무서운 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능력이 있어 양날이 있는 어떤 칼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 그리고 관절과 골수를 찔러 가르고 마음의 생각들과 의도들을 판별하느니라』(히 4:12). 『성령의 칼』(엡 6:17)인 성경은 그것을 잘못 읽어 낼 때 혼을 파괴하는 가장 위험한 무기가 된다. “책들의 제왕”인 성경은 그 어떤 책보다도 권위가 높기에, 그 해석에 따른 책임 또한 그 무엇보다 무겁고, 결과는 극과 극을 오간다. 해석에 따라 하늘나라와 지옥을 오가는, 초극단적인 결과를 낳는 책이 바로 “성경”인 것이다.<br/><br/>이 마지막 때는 “주기도문 오독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대”라는 말에는 “그 시기의 특징이나 징후가 뚜렷한 시대적 구간”이란 뜻이 담겨 있다. 본 논단의 제목을 “주기도문 오독의 시대”라고 정했을 때는 나름대로 엄중한 이유가 있다. 현재 우리가 지나고 있는 배교한 “라오디케아 교회 시대”(1900년 - 현재)는 “주기도문 오독”이 영적 소경이 된 모든 교회들의 강단과 성경 공부, 신학교들의 강의실과 기독교 서가의 책들에서 매우 광범위하고도 뚜렷하게 자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주기도문 오독”을 “라오디케아 교회 시대의 거대한 영적 특징”이라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br/><br/>혹자는 주기도문에 관하여 “학자연(學者然)하는” 설명을 늘어놓는다. “주기도문은 마태복음에 수록된 단순한 ‘기도 교육용 텍스트’나 신약성경 내에 고립된 파편적 본문이 아니다. 이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의 언약 사상과 고대 세계의 종교적·문화적 토양이라는 거대한 지평 위에서 주기도문을 재위치시켜야 한다. 후반부의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나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와 같은 간구는 철저히 고대인들이 마주했던 실존적 불안정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주기도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형성되고 전승되던 고대 세계의 문화적·종교적 토양에 대한 배경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br/><br/>풍유적 해석을 선호하는 자들은 “일용할 양식”에 관해 “창조적 오독”으로 횡설수설한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말라. 예수님이 고작 하루 먹을 밥을 구하라고 하셨겠는가? 여기서 ‘양식’은 영적인 양식, 즉 ‘말씀’이자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는 것이다. 주기도문을 육신의 배를 채우기 위한 기도로 격하시키지 말라.” <br/>“행위 구원”을 좋아하는 자들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에 푹 빠져 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는 구원의 조건이다. 성경에 ‘우리가 남의 죄를 용서해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것은, 내가 남을 용서 안 하면 하나님도 나를 용서 안 하신다는 뜻이다. 즉 구원은 내 행위에 달린 것이다!”<br/><br/>“단편적 성경 지식 예찬자”는 구절과 구절을 비교해 가면서 오류를 방출한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는 오역이다. 야고보서에 보면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고 했는데, 왜 주기도문에는 하나님보고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라’고 기도하는가? 번역이 잘못됐다! ‘우리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 달라’고 번역해야 맞다.”<br/>본 논단을 읽는 독자는 이 가운데 어떤 부류에 속하며, 주기도문을 어떻게 “오독”하는가? 독자도 “주기도문 오독의 시대”를 부채질하는 숨은 공모자인가? 그 허황된 지식의 잿더미 위에 얹어질 또 하나의 불쏘시개인 것인가? <br/><br/>배교한 교회들에서 주기도문이라고 불리는 기도는,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마 6:9)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주님께서 “유대인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알려 주신 “제자들의 기도”이다. 이 구절의 『너희』를 신약 그리스도인들로 해석함으로써 치명적인 이단 교리를 교회에 퍼뜨린 자들이 무수히 많았다. 『너희』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성하는 “유대인 제자들”을 지칭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민족적으로” 낳으신 “한 아들”이기에(출 4:22), 그들은 하나님을 부를 때 민족적으로 『우리 하나님』(수 24:24, 삼상 7:8, 왕하 19:19 등)이라고 부른다. 그렇기에 이 기도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 아닌 “우리 아버지”로 부르면서 그 아버지의 영광에 초점을 맞춘 내용으로 시작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시옵고,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시오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10). 성경이 기록된 첫 번째 목적은 『교리』(딤후 3:16)이기에, “제자들의 기도” 역시 “교리”적으로 올바르게 해석되어야만 한다. 그 시작부터 “아버지의 왕국의 도래”가 강조되는 기도에 “왕국”과 관련된 진리가 담겨 있어야 한다는 점은 너무도 당연하다.<br/><br/>“유대인들”이 그들의 하나님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기도는 『아버지의 왕국』이 문자적으로 “땅”에 이루어지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 왕국에 관해 유대인 제자들에게 통치를 약속하셨다. 『나의 아버지께서 나에게 왕국을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가 나의 왕국에서 내 식탁에서 먹고 마시며 또 보좌에 앉아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하게 하리라』(눅 22:29,30). 이 왕국은 왕국 백성인 유대인의 거부로 초림 때 이뤄지지 않았다. 따라서 그것은 주님께서 장차 재림하시어 “다윗의 보좌에 앉아 통치하실”(눅 1:31-33) 물리적인 왕국이 된다. 초림 때는 주님의 왕국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었지만(요 18:36), 재림 때는 세상 왕국들을 접수하여 그분의 왕국으로 삼으실 것이다(계 11:15). 이것은 교회 시대의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롬 14:17)가 아닌,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왕국이다.<br/>주님께서는 미래, 곧 재림 때에 “왕국이 임할 것”(마 6:10)을 구하면서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셨기 때문에, “제자들의 기도”가 드려지는 시점은 왕국이 임하기 전인 “대환란 기간”으로 설정될 수밖에 없다. 주님께서는 그 기간에 다음의 세 가지 사항을 놓고 기도할 것을 가르치셨다.<br/><br/>1. 일용할 양식 : 광야에서의 초자연적 부양<br/>『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 6:11)라는 간구는 교회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드려야 할 일상적인 기도가 아니다. 주님께서 왕국을 가져오시기 전, 이 세상에는 전무후무한 대환란이 있게 되는데, 이는 『야곱의 고난의 때』(렘 30:7)라 불리는 이스라엘의 민족적 고난 기간이다. 대환란 때 적그리스도의 박해를 피해 “셀라 페트라”라 불리는 바위 성읍으로 피신한 유대인들은 짐승의 표 없이는 경제활동을 할 수 없기에(계 13:17), 후 삼 년 반 동안 초자연적인 부양을 받아야만 한다(계 12:14). 과거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만나를 공급받았듯이(시 74:14, 미 7:14,15), 대환란 때의 유대인 환란 성도들은 그날의 생존을 위해 이 기도를 드려야 한다. 이것은 대환란 때 유대인들이 적그리스도의 박해 아래서 드려야 할 실질적인 “생존 기도”인 것이다.<br/><br/>2. 용서의 조건 : 행위와 인내가 요구되는 대환란 기간의 구원 방법<br/>『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진 것들도 용서해 주시오며』(마 6:12)라는 말씀은 교회 시대의 은혜 복음과 전혀 다른 교리를 담고 있다. 교회 시대의 성도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근거로 행위라는 조건 없이 죄 용서를 받았지만(골 1:14), 대환란 때에는 타인의 죄(죄의 빚, 눅 11:4)를 용서하는 “행위”가 뒷받침되어야만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다. 이는 명백한 “행위 구원”의 요소이며, 대환란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더하여 계명을 끝까지 지키는 “인내”가 뒤따라야 구원받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계 14:12). 『대환란』(마 24:21)을 예언하는 마태복음 24장에서는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가 왕국에 들어가는 조건인 “왕국 복음”으로서 제시된다(마 24:13,14). “끝까지 견디는 인내”를 강조하는 구원론은 믿음과 행위로 끝까지 견뎌야만 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 환란 성도들을 위한 것이다.<br/><br/>3. 시험과 악으로부터의 구원 : 적그리스도의 박해에 따른 배교의 위험<br/>『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악에서 구하여 주시옵소서.』(마 6:13)라는 간구는 대환란 때의 급박한 상황을 전제한다. 환란 성도들은 행위로 구원을 지켜야 하기에, 광야의 시험 때처럼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죄를 지으면 구원을 상실할 위험이 크다(히 3:8). 무엇보다 짐승의 형상에게 경배하지 않으면 목베임을 당하는(계 13:15) “악”의 통치 아래서, 믿음을 부인하는 죄를 짓지 않도록 날마다 시험에서 구원받는 일은 생명보다 귀중한 일이 된다. 만약 적그리스도의 극심한 박해 아래서 시험에 들어 적그리스도와 타협한다면, 즉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형상에게 경배한다면 “구원을 잃어버려” 영원한 불못의 심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계 14:9-11). 대환란 때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믿음”과 하나님의 계명들을 끝까지 인내하며 지키는 “행위”로 구원을 유지하면서, 그들의 조상이 2천여 년 전에 거부했던 그 “왕국”을 기다려야 한다. “제자들의 기도”는 대환란 때에 왕국을 기다리는(마 6:10) 유대인들이 드려야 하는 기도이며, 기도에 담긴 “모든 실제적인 목적”을 위해서 드려져야 할 기도이다.<br/><br/>기도의 마지막 내용은 『그 왕국과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옵니다.』(마 6:13)이다. 주님께서는 기도의 시작 부분인 10절에 이어 또다시 “왕국”을 언급하시며 기도를 종결지으신다. 기도의 “시작”과 “끝”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지상에 세우실 “왕국”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마태복음 6장의 “제자들의 기도”는 적그리스도의 박해 아래 있는 유대인 환란 성도들이 그들을 구원하실 메시아 왕의 지상 왕국을 기대하면서 드려지는 기도인 것이다.<br/><br/>초림 때 실패한 왕국, 그 “연기된 왕국”에 대한 무지가 “신학적 혼란”을 낳았고, 무수한 “창조적 오독”을 낳았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기도”를 가르치신 당시 상황은 철저히 유대적인 “왕국 복음” 전파 시기였다(마 4:23). 이 왕국 복음은 다시 전파될 것이다(마 24:13,14). 그 일이 일어나는 대환란 때 드려질 기도를 분별하지 못한 채 예배 때마다 주문처럼 웅얼거리는 한국 교회는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딤후 2:15) 해석하지 못하는 “아전인수식 영해(靈解)”를 당장 중단해야 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5 May 2026 11:07:02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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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성경”을  매일 읽어야 할 이유</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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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라는 말이 있다. 독서가 육체의 양식처럼 마음을 채우고, 사유와 감정, 인격을 키우는 데 기여한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다. 물론 독서가 좋은 습관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인정한다. 하지만 아무 책이나 닥치는 대로 읽는 것을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쓸데없는 잡지식이라든가 진리를 거스르는 거짓 이론과 정보는 인간에게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독서가 의미 있으려면 “양서들”을 읽어야 한다. 특히 모든 인간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 있는데, 이 책은 단순한 삶의 유익을 넘어 인생의 존망을 결정하기에 다른 책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생 필독서이다. 이 책에 무지하면 누구를 막론하고 심지어 한 국가까지 멸망하게 된다(호 4:6). 그 책은 바로 절대 진리의 말씀인 “성경”(단 10:21, 요 17:17)이다.<br/><br/>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성경 읽기를 등한시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바쁜 일상에 치여 사느라 여유가 없는 것도 원인일 테지만, “성경책”보다는 “스마트폰”에 의존하는 생활 습관이 성경 읽는 시간을 빼앗는 더 큰 원인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성경 읽기를 소홀히 하면 영적 지식에 무지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성도의 영적 생활이 무기력해지며, 하나님을 섬기는 일도 형식적으로 전락하게 된다. 심지어 성경을 읽지 않는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상하게 여겨지는, 결코 있어서는 안 될 기현상까지 벌어진다(호 8:12).<br/><br/>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은 성경을 읽는 데서 시작한다. 성경을 읽는 일은 단순한 선택 사항이나 기호가 아니라 성경에 분명히 계시된 하나님의 명령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내가 갈 때까지 읽는 것... 에 전념하라.』(딤전 4:13)라고 말했다. 이것은 사역자에게만 주신 명령이 아니라 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진 명령이다. 그리스도인이 “진리의 지식”에 이르려면(딤전 2:4) “성경”을 우선적으로 읽어야 한다. 성경을 읽는 일은 하나님의 명령을 넘어 그리스도인의 삶의 질을 결정하고, 심지어 인생의 성패(成敗)를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신앙 요소이다. 그렇기에 “성경을 매일 읽는” 삶은 굉장히 중요하다.<br/><br/>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명령을 지키지 않아 인생에 실패한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았던 솔로몬이 인생 말년을 배교로 끝내게 된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곁에 두고 그것을 평생 읽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그와 함께 두고 평생 동안 그것을 읽어서 그가 주 그의 하나님을 두려워함을 배우게 하고 이 율법의 모든 말씀들과 이러한 규례들을 지켜 그것들을 행하게 할지니라. 그리하여 그의 마음이 자기 형제들보다 높아지지 아니하고 그가 그 계명에서 오른편이나 왼편으로 돌이키지 아니하면 종국에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그와 그의 자손이 그 왕국에서 자기 날들을 늘리게 되리라』(신 17:19,20).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에게도 왜 매일 성경을 읽어야 하는가를 보여 준다. 말하자면 매일 성경을 읽어야만 인생에 실패하지 않는 것이다. 매일 성경을 읽는 성도는 영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건을 스스로 구비할 수가 있다.<br/><br/>첫째, 성경을 읽으면 『주 그의 하나님을 두려워함을 배우게』 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모든 지혜와 지식의 시작이다(잠 1:7, 욥 28:28).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경이로운 역사, 자애하심을 알게 되면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분을 두려워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진리를 성경을 읽으며 깨달을 수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지금 성경을 읽지 않고 있는 것이다. 성경을 읽으면 성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위로, 다가올 심판과 영광을 인식하게 되어 『경외함과 경건한 두려움』(히 12:28)으로 그분을 섬기게 된다.<br/><br/>둘째, 성경을 읽으면 단순히 말씀을 듣기만 하지 않고 “행하는 자”가 될 수 있다(약 1:22).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그러나 순종의 전제 조건은 일단 성경을 “알아야” 한다는 데 있다. 성경을 알려면 그 책을 읽어야 한다. 아무리 훌륭한 설교자의 성경적인 설교나 강의를 듣는다고 해도 그 일이 성경을 직접 읽고 깨닫는 것보다 위대할 수는 없다. 성경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말씀이 그것을 읽는 성도의 마음과 생각을 판별한다(히 4:12). 그렇기에 우리가 성경을 직접 읽을 때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통해 우리의 마음에 찔림을 주시고, 우리가 그에 반응하면 말씀을 실행하게 되는 것이다.<br/><br/>셋째, 성경을 읽는 성도는 그 『마음이 자기 형제들보다 높아지지』 않는 겸손함을 지니게 된다. 말씀을 매일 읽음으로써 진리의 지식 안에서 믿음이 올바르게 자라는 성도일수록,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인지하기 때문이다. 지역 교회 안에는 연약한 지체를 함부로 판단하며 잘못을 섣불리 지적하는 자들이 있고, 신실한 목자의 설교와 권면, 섬김을 폄하하며 불평을 쏟아냄으로써 교회의 결속력을 약화시키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에 대하여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롬 12:3) 품고서, 은혜가 아닌 지식에 치우쳐 교만해져 있는 것인데(고전 8:1), 이런 자들의 결정적 특징은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들의 마음이 형제들보다 높아져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점을 입증한다. “겸손함”은 “주를 두려워함”과 긴밀히 맞물려 있다(잠 22:4). 이 모든 선한 열매는 성경을 항상 진지하게 읽는 성도에게 나타나며, 하나님께서는 그런 성도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벧전 5:5).<br/><br/>넷째, 성경을 읽는 성도는 죄를 멀리한다(시 119:9). 무엇을 보고 듣느냐가 마음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유튜브나 TV 같은 세속적 매체에 지나치게 노출되면, 그 마음이 세상의 죄악된 조류에 휩쓸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다. 이 치명적인 오염을 방지하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굳게 간직하는 것이다(시 119:11). 성도의 속사람이 말씀으로 충만해지면, 더러운 세상의 욕심들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사라진다. 설령 연약함 가운데 죄에 넘어져도 『말씀에 의한 물』(엡 5:26)로 깨끗이 씻어 다시금 거룩함을 회복할 수 있다(요 13장). 죄에 승리하는 삶을 갈망하는 성도라면, 반드시 매일 성경을 읽어야 한다.<br/><br/>다섯째, 성경을 읽는 성도의 삶은 풍성한 열매로 가득해진다. 우리가 친숙하게 잘 알고 있는 “참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가 그 점을 알려 준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열매』, 『더 많은 열매』, 『많은 열매』를 맺고자 한다면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해야 한다고 하셨다(요 15:2-8). 말하자면 성경을 열심히 읽고 묵상하며 실행하여 주님께 밀착할 때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은 바로 성경을 읽는 데 있다! 특히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은 번성하게 된다. 『그의 즐거움이 주의 법에 있으니, 그가 주의 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강가에 심겨진 나무 같아서 계절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의 잎사귀도 마르지 아니하리니, 그가 무엇을 하든지 번성하리로다』(시 1:2,3).<br/><br/>솔로몬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과업인 “성경 읽기”를 멸시한 탓에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여기에는 그 누구도 예외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않는 성도는 그 말씀을 멸시하는 자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말씀을 멸시하는 자가 맞게 될 파멸을 경고한다(잠 13:13). 성경 읽기를 게을리함으로써 자멸하지 말라!<br/><br/>인생의 진정한 성공과 번영은 “성경”에 달려 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고 주야로 그 안에 있는 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모든 것대로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너의 길을 번영하게 만들 것이고 네가 좋은 성공을 이루리라』(수 1:8). 밥 존스 시니어가 설파했듯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것을 행하는” 삶이 진정 성공한 인생이다. 이러한 삶을 실현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기록된 그대로 철저히 실행해야 한다. 그럴 때 인생의 실패를 면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세밀한 돌보심과 인도하심 속에서 “풍성한” 열매가 맺히는 복된 삶을 누리게 된다. 우리가 성경을 매일 읽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br/><br/>바울이 “읽는 것에 전념하라”(딤전 4:13)고 했던 당부는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참으로 엄중하고도 중요한 명령이다. 바울은 죽음을 목전에 둔 순간까지도 책 읽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딤후 4:13). 그가 그토록 읽고자 했던 것은 당연히 “성경”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성경을 “읽는 것”에 전심전력해야 한다. 물론 성경뿐만 아니라 영적 성장에 유익한 “양서들”도 함께 읽을 필요가 있다. 피터 럭크만 목사가 성경 외에도 여러 신앙 서적들을 추천했듯이 말이다. 그러나 성경 읽기가 그 무엇보다 우선이라는 점을 망각하지 말라. 성도는 성경을 필두로 검증된 좋은 책들을 읽으며, 인생의 귀한 시간을 가치 있게 선용해야 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Wed, 22 Apr 2026 09:35:16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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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기술이 신이 되는 사회 (3)  “지구를 구해 주시옵소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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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지난 4월 22일은 “지구의 날”이었다. 민간 주도의 환경 운동에서 출발한 이 날은, 현재 전 세계 190여 개국에서 약 10억 명 이상이 동참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민간 환경 기념일로 자리 잡았다. 매년 지구의 날에는 환경오염, 특히 기후 변화의 심각성을 알리며 환경 보호를 위한 범세계적 관심과 실천을 강력히 촉구한다. 하지만 이러한 전 지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구는 현재 심각한 기후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다. 특히 “기후 비상사태” 선언은 오늘날 기후 문제가 얼마나 위태로운 단계에 도달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지표라 할 수 있다.<br/><br/>산업화 이후의 기온 상승 속도는 과거 자연적 변동 속도보다 10-20배나 빠르다. 이는 지구 역사에서 사례를 찾아보기가 어려운 급격한 변화다.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 제6차 보고서에서는 지구 온난화의 임계점인 1.5℃ 사수를 위해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9년 대비 43% 감축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2024년 초 지구 평균 기온이 이미 일시적으로 1.5℃를 넘어섰고, 그린란드 빙하의 소실 속도는 1990년대 대비 7배나 가속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일각에서는 지구의 온난화가 태양 활동이나 지구 자전축의 변화로 인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과학계는 이러한 주장에 대한 검증을 거쳐 이미 기각된 가설로 일축하고 있다. 현재의 기후 위기는 인류의 활동으로 인한 실제적이고 시급한 위협이라는 점에 대해, 97% 이상의 기후 과학자들이 동의하며 과학계의 정설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br/><br/>현재 기후 변화를 위기로 보는 이유는, 그것이 폭염, 가뭄, 홍수의 빈도와 강수량을 증가시키고, 해수면을 상승케 하며, 식량 생산을 불안정하게 하고, 에너지와 물 부족을 악화시키는 등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하는 “기저 리스크”이기 때문이다. 파괴된 생태계로 인해 기후 조절 기능은 저하되고 기후 위기가 심화되는 악순환이 발생하는 것이다.<br/><br/>위와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대응 방안으로 “기후공학”이 유력한 대안으로 등장하고 있다. 특히 지구온난화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이산화탄소를 직접 제거하는 방법(CDR)과 포집·저장하는 방법(CCUS)이 “넷 제로”[Net Zero, 배출하는 탄소량과 흡수하는 탄소량을 같게 만들어, 실질적인 탄소 배출량을 “0”(Ze- ro)으로 만드는 상태]를 향한 핵심적이고도 근본적인 해결 전략으로서 제시되고 있다. 이미 2021년에 아이슬란드에서는 “오르카”(Orca)로 명명된 “직접공기포집”(DAC) 시설이 가동되어 연간 약 4,000톤의 이산화탄소를 포집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시설은 현재 전 세계 15곳에서 운영되며, 연간 9,000톤 이상의 이산화탄소를 포집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 한편 기후공학자들은 이러한 흐름을 넘어 차세대 “탄소 포집·자원화 기술 혁신”에 주목하고 있으며, 고효율 포집 기술도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 2025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 “오마르 야기” 박사는 단 200g으로 약 20kg의 이산화탄소를 포집할 수 있는 “COF-999”(공유결합 유기 구조체)를 개발했다. 이 신소재는 나무 한 그루가 1년간 흡수하는 이산화탄소에 상응하는 흡수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현재 상용화를 위한 효율적인 제조 공정이 개발 중에 있다. 또한 독일 뷔르츠부르크대와 연세대 공동 연구팀은 공액 유기 반도체 소재인 “페릴렌 비스이미드”의 분자 구조를 활용하여 빛 에너지를 화학 에너지로 전환하는 “초분자 전선” 기술을 개발 중인데, 이 기술은 이산화탄소를 탄수화물 같은 유용 물질로 전환하여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줄이는 데 기여할 전망이다. <br/><br/>위와 다른 접근 방식도 있는데, 이산화탄소를 직접 감축하기 어려운 현실을 고려해, 지구로 유입되는 태양 복사 에너지를 감소시켜 지구 온도를 낮추는 “태양 복사 관리”(SRM) 방법이다. 1991년 발생한 필리핀 피나투보 화산 폭발 당시 방출된 2,000만 톤의 이산화황이 지구 평균 기온을 0.5℃ 하강시킨 사례에서 착안한 것으로, 지구의 성층권에 에어로졸(이산화황 등의 미세 입자)을 인위적으로 살포해 태양의 복사 에너지를 반사시키고 냉각 효과를 유도하는 것이다. 컴퓨터의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연간 약 500만 톤의 에어로졸을 성층권에 살포할 경우 지구 평균 기온을 1-2℃ 정도 낮출 수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경제적 효율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되는데, 하버드대와 예일대 연구팀은 15년간의 프로그램 구축 비용을 약 35억 달러(5조 원 내외)로 추산한 바 있다. 이는 여타 기후 대응 기술과 비교할 때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기후 문제를 과학 기술로 해결할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과학계 내부에서 신중론이 제기되고 있지만, 과학 기술이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낙관적 시각 또한 지배적이다. KIST 등의 주요 연구기관의 조사에 따르면, 기후 위기의 기술적인 해결 가능성에 대해 일반 시민은 43.4%가 긍정적으로 응답한 반면, 과학 기술 전문가는 73.5%나 긍정적으로 응답했다. 특히 빌 게이츠나 일론 머스크와 같은 글로벌 기술 기업가 및 혁신가들은 인류의 혁신 역량을 근거로 기후 위기를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br/><br/>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들이 그토록 신뢰하는 과학 기술로는 환경오염을 비롯한 기후 문제를 결코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인간의 노력으로 해결한 문제는 결국 또 다른 문제를 낳게 된다. 기후 문제를 포함하여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다면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환경오염이나 기후 변화 등의 문제가 해결된 상태, 곧 만물의 회복에 대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늘은 만물이 회복될 때까지 그분을 마땅히 받아들여야 하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이 일에 관하여 그의 모든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니라』(행 3:21).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범죄로 인해 죄의 저주 아래 놓인 창조 세계가 원래의 상태로 회복될 때가 올 것에 대해 말씀하셨다. 우선 땅에 내려졌던 저주가 풀린다. 가시나무와 엉겅퀴가 사라지고, 땅은 다시 비옥해질 것이다(사 51:3; 55:13). 사막 또한 변모한다. 메마른 광야와 사막에 시내가 흐르고 장미처럼 꽃이 피며, 저 옛날의 에덴동산과 같은 최적의 기후로 회복된다(사 35:1,2, 겔 36:34,35). 아울러 광명의 강도도 증가하는데, 달빛은 햇빛같이 밝아지고 햇빛은 현재보다 일곱 배 더 밝게 된다(사 30:26). 여기에 풍성한 수확이 예고되어 있으니, 땅의 소산이 크게 증가하여 파종과 수확이 연이을 정도로 풍요가 임하고, 기근과 배고픔이 사라지게 된다(암 9:13-15).<br/><br/>그뿐만 아니라 생물계에도 큰 변화가 일어나는데, 동물들의 식성이 변하여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거하고,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는 상태로 회복된다. 창조물들 간의 조화와 교감 또한 이루어지는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눕고,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을 쳐도 해를 입지 않는다(사 11:6-8). 그야말로 모든 창조물이 그 썩어짐의 속박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릴 영광스런 자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롬 8:21) 이와 같은 변혁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새 세대”(regeneration)라고 표현하셨다(마 19:28). 사도 바울이 “중생”(rege- neration)이라고 했던 것과 동일한 헬라어가 사용된 것이다(딛 3:5).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함으로써 죽었던 영이 “되살아나는” 중생을 경험하듯이, 피조 세계 역시 물리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br/><br/>모든 창조물이 신음하면서 간절히 기다리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영광의 보좌에 앉아 세상을 다스리실 때 비로소 창조물들이 썩어짐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참된 자유에 이르게 된다. 인류의 유일한 소망은 곧 다시 오셔서 영원히 통치하실 “주 예수 그리스도”께만 있다.<br/><br/>그렇다면 만물이 회복되는 새 세대가 도래하는 시점은 언제일까?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예루살렘에 있는 다윗의 보좌(눅 1:32), 곧 영광의 보좌(마 19:28)에 앉아 세상을 철장으로 다스리실(계 19:15) 때이다. 말하자면 모든 창조물과 “그리스도인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과학 기술의 진보가 아니다. 그들 모두가 간절한 소망 가운데 기다리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인 것이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런 일들을 증거하신 분이 말씀하시기를 “반드시 내가 속히 오리라.” 하시니라. 아멘. 그러하옵니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7,12,20). <br/><br/>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은 그 마지막 장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세 번이나 약속하며 강조하고 있지만, 구원받지 않은 죄인들은 주님의 재림을 믿지도 기다리지도 않는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보다 현대 과학 기술을 더 믿고 신뢰하는 것이다. 그런 죄인들은 주님의 재림을 안중에 두지 않지만 역사는 그들 뜻대로 흐르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이야기”(his story)인 “역사”(history)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성경에 예언된 대로 진행될 것이다. 하늘들로 올라가신 주님께서 이제 곧 다시 오셔서(행 1:11) 인류가 당면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더 “늦기” 전에 “과학”이라는 마음속 “우상”을 제거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함으로써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도록 하라!(암 4:12). BB [이번 호를 끝으로 「현대 기술 진단」은 종료됩니다.]]]></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Wed, 22 Apr 2026 09:33:38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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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바른 성경”을 배격하는 자들의  “바른 교리” 허상</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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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최근 세계기독교이단대책협회(이하 세이협)가 “제8회 정기총회 및 이단 대응 세미나”를 주최했다. 11개국에서 모인 70여 명의 소위 “이단 전문가”라는 자들은 글로벌 이단 공동 대응 방안을 논의한다며 한 편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 내용의 핵심은 실로 가관이다. 그들은 “1611년판 킹제임스성경만이 유일하게 완전무오한 성경이라고 주장하는 사상은 정통 기독교 신학과 양립할 수 없는 이단 교리”라고 규정하며, 이를 전파하는 자들을 이단으로 간주하겠다는 적반하장격 입장을 표명했다. 나아가 그들은 이단 탈퇴자들의 입을 빌려 “성도들이 이단에 빠지는 가장 큰 이유는 체계적인 교리 교육의 부재 때문”이라면서 정통 교회의 바른 교리 교육이 절실함을 촉구했다.<br/><br/>그러나 우리는 이 거창하고도 가소로운 종교적 촌극 앞에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절대적인 진리의 기준, 즉 “완전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 존재함을 스스로 부정한 자들이 도대체 어떤 잣대로 이단을 정죄하겠다는 것인가? 스스로도 완벽한 기준이란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서로 충돌하고 모순되는 교단 교리들의 늪 속에 빠져 허우적대면서 도대체 무엇을 “바른 교리”라고 가르치겠다는 것인가? “성경 보존”의 약속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단이란 것인가?<br/><br/>자칭 “이단 전문가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섭리로 보존하신 성경을 부정하는 자들이야말로 진정한 이단이라는 점이다. 세이협은 &lt;킹제임스성경&gt;의 완전성을 믿는 순수한 믿음을 “이단 교리”로 매도했지만, 성경은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라. 흙 도가니에서 단련되어 일곱 번 정화된 은 같도다. 오 주여, 주께서 이 말씀들을 간수하시리니 주께서 이 세대로부터 영원토록 그것들을 보존하시리이다』(시 12:6,7).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요 1:1), 곧 예수님께서도 『하늘과 땅은 없어져도 내 말들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 24:35)라고 선언하셨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성경 보존”을 믿는 믿음이 이단이라는 것인가?<br/><br/>오늘날 우리 손에 펼쳐서 읽고 만질 수 있는 “오류 없는 완전한 말씀”이 존재하지 않고, 오직 사라져 버린 “최초의 원본”만이 무오하다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무능한 거짓말쟁이가 되시고 만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하나님께서는 말씀 보존에 있어서 철저한 실패자이신 것이다.<br/><br/>성경 보존의 역사는 시리아 안티옥 계열의 “다수 본문”(표준 원문, Textus Receptus)과,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오리겐 등에 의해 부패된 “소수 본문”(알렉산드리아 사본) 간의 치열한 영적 전쟁이다. 오늘날 소위 “정통”을 자처하는 교단들이 사용하는 현대 역본들은 바로 이 부패한 카톨릭계 사본들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딤전 3:16, 요 9:35, 행 8:37)과 삼위일체(요일 5:7), 동정녀 탄생(사 7:14, 마 1:25), 구속 사역(마 9:13; 18:11, 요 1:29), 부활(욥 19:26, 벧전 3:18), 승천(눅 24:51), 보혈(골 1:14), 재림(요 18:36, 딛 2:13, 계 11:17) 등에 관한 결정적 구절들이 심각하게 변개되거나 13구절이 통째로 삭제되어 “(없음)”이라고 되어 있다. 현실이 이러한데도 하나님께서 섭리로 보존하신 &lt;킹제임스성경&gt;을 믿음과 실행의 최종권위로 삼는 성도들이 어떻게 이단이 될 수 있는가? 오히려 “이 땅에 완벽한 하나님의 말씀은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절대 기준을 허물고 상대주의적 혼란을 부추기며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자들이야말로 치명적인 이단인 것이다.<br/><br/>절대 기준이 없는 “바른 교리”는 그들의 망상일 뿐이다. 세미나에서 “이단 전문가들”은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해 “복음의 본질과 바른 교리를 철저히 가르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는데, 이 점은 그들이 얼마나 심각한 자기모순에 빠져 있는가를 보여 줄 뿐이다. “바른 교리”는 실로 그럴듯한 명분이지만, 그들이 말하는 “바른 교리”는 대체 어떤 교리를 말하는 것일까? 전 세계 11개국에서 모였다는 이단 전문가들과 “정통”이라 불리는 교단들(장로교, 감리교, 순복음, 침례교 등)의 속을 들여다보라. 그들의 신학은 뼈대가 되는 구원론부터 정면으로 충돌한다. 칼빈주의를 표방하는 자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며 비성경적인 예정론과 무조건적인 선택, 제한적 속죄, 저항할 수 없는 은혜, 성도의 견인 따위를 진리라고 가르치지만,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자유의지를 인정하며 “행위 구원”과 “구원 상실 가능성”을 주장한다. 은사주의자들은 사도 시대 이후로 중단되어 버린 방언을 성령 세례의 표적으로서 제시하며, 사도들을 흉내 낸 거짓 치유의 은사를 자랑한다. 급기야 종말론에 이르면 전천년주의를 배격하는 무천년주의, 후천년주의가 뒤엉켜서 도대체 무엇이 진리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 상호 충돌하는 교리들로 인해 자신들도 혼란스러우면서 어떻게 “바른 교리”를 운운할 수 있는가? 답이 여러 개라는 것은 정답이 없다는 뜻이다. 옛 바빌론 종교가 기독교의 옷을 입고서 등장한 이교도 로마카톨릭이나 흉내 내면서 성경에 없는 유아 세례를 실행하고, 카톨릭을 따라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자들에게 어떤 영적 분별력이 있겠는가? <br/><br/>신약교회사에서 가장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사도 바울은 『전염병자가 되어 세상에 있는 온 유대인 사이에 소요를 일으킨 자로서 나사렛 이단의 두목』(행 24:5)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이단자 바울”은 유대인들이 『이단이라고 하는 그 도를 따라서』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서들에 기록된 모든 것을 믿으며 의인과 불의한 자에게 다 죽은 자의 부활이 있게 되리라는 소망을』 유대인들 『스스로 받아들이고 있듯이』 그도 『하나님을 향하여 가지고 있』었으며 『이 소망 때문에』 바울 『자신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 항상 거리낌이 없는 양심을 지니려고 힘쓰』고 있었는데(행 24:14-16), 이 “성경대로 믿는 이단자”가 지적했던 점이 무엇이었는지 아는가? 바로 그 당시 돈에 눈이 먼 자들로 인해 횡행하던 “성경 변개”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킴으로써 이익을 취하는 여러 사람들과 같지 않고 오직 성실함으로써 또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로서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 <br/><br/>“정통”이라는 거대한 간판 뒤에 숨어 바른 성경에 대한 믿음을 이단이라고 조롱하는 자들은 스스로 영적 소경임을 만천하에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는 법이다(마 15:14). 그들은 누구도 바른 진리로 계도할 수 없다. 부패한 사본들에서 나온 변개된 성경과, 그로 인해 빚어진 인간의 혼란스러운 전통들과 교단 교리들을 버리고, 일곱 번 단련된 순수한 은과 같은 &lt;한글킹제임스성경&gt;을 믿음과 실행의 최종권위로 삼을 때 비로소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 있다. 그 완전한 말씀의 반석 위에 굳게 서라! 다수가 모였다고 해서 진리를 실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바른 성경에서 나온 바른 교리를 통해서만 그 일이 가능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Wed, 22 Apr 2026 09:26:16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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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한국 교회의 낯부끄러운 “돈 문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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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종교 개혁이 일어난 배경에 대해 설명하자면 아마 십수 가지도 넘게 그 요인들을 나열할 수 있을 테지만, 그 서사를 가장 명쾌하게 설명해주는 요인은 단연 “돈 문제”일 것이다. 당시 로마카톨릭은 초호화 건축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위해 대대적인 모금 활동을 벌였는데, 그 과정에서 독일 지역의 면죄부 판매 총책이었던 요한 테첼은 이런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헌금함에 동전이 떨어져 짤랑이는 순간, (고통받고 있는 여러분의 가족들의) 영혼은 연옥으로부터 솟구쳐 위로 올라간다.” 종교 개혁자들은 돈으로 하나님의 선물을 살 수 있다고 주장하는(행 8:20) 그 가증스런 작태에 대항하여 “오직 성경으로!”를 외쳤던 사람들이었다. 로마카톨릭은 성경과 성경적 지식을 통제함으로써 면죄부 판매가 하나님의 뜻인 양 사람들을 속이려 들었으나, 종교 개혁자들이 이단 정죄나 순교를 불사하고 성경을 평범한 사람들의 언어로 번역하여 보급함으로써 로마카톨릭의 미혹을 깨부쉈던 것이었다.<br/><br/>“개신교회”는 그렇게 탄생했건만, 오늘날 한국의 개신교회들은 마틴 루터보다는 요한 테첼의 모습에 훨씬 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성경에 존재하지 않는 방식으로 교인들의 돈을 갈취하고, 누군가가 문제를 제기하면 교권으로 찍어 누르거나, 교회를 분열시킨다며 적반하장식으로 정죄하고 나서는 꼴을 보노라면, 로마카톨릭이 주름잡던 중세 암흑시대가 절로 떠오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그들의 “돈 문제”를 들춰내시는 것은, “프로테스탄트 정신”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이제 여기에는 더 이상 개선의 여지가 없으니, 버리고 떠나는 것이 유일한 답이다.”라는 사실을 알려 주려고 보내시는 일종의 경보인지도 모른다.<br/><br/>지난날 발생했던 “돈 문제”의 실상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테니, 최근 발생한 사례 하나를 제시하는 것으로 그것을 갈음하려 한다. 지난 4월, 뉴스앤조이는 ｢재정 공개 요구했다고...대형 로펌까지 선임해 교인 재판한 도림교회｣라는 제하의 기사를 보도했다. 사건의 당사자는 10년 넘게 해당 교회에 다녔던 집사로, 교회에 여러 가지 “돈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순진(?)하게도 이 사안의 정상화를 위해 담임목사를 직접 만나 편지를 전달했다. 헌금 집행 내역을 공개해 줄 것과, 어째서 기존에 250억 원으로 책정되었던 예배당 건축 공사비가 두 배 가까이 불어났는지를 설명해 달라는 것이 그 골자였다. 담임목사인 정명철 목사가 침묵을 지키는 사이에 그 편지는 모종의 경위로 교회 장로 10여 명에게 전달됐고, 교회의 “어르신들”(은퇴장로들)은 그를 허위 사실 유포, 문서 위조 등의 혐의로 당회에 기소했다. 그가 날조된 사실을 유포하는 편지를 뿌렸다는 것이었다. 도림교회는 심지어 국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로펌에까지 이 사건을 의뢰하여 해당 집사를 압박했다.<br/><br/>이 사건은 그렇게 영등포노회로 넘어갔고, 노회는 “증거가 불충분한 의혹을 바탕으로 허위 사실을 유포해 위임목사 명예를 훼손했고 장로 및 교인들을 선동·협박한 혐의가 인정된다.”면서 해당 집사를 노회 재판국에 회부했다. 피의자는 자신이 해외 출장 중이었기에 편지의 유포자가 될 수 없을뿐더러, 백 번 양보해서 그렇다손 치더라도 편지를 보낸 것이 징계 사유가 되느냐며 억울함을 토해냈지만, 바뀌는 것은 없었다. 노회는 도림교회의 수뇌부와 한통속이었던 것이다. 정명철 목사는 도림교회 장로들이 한술 더 떠 그 집사를 세상 법정에 세워야 한다며 아우성이라고 뉴스앤조이와의 통화에서 밝혔다. 그는 설교단에서 건축비를 둘러싼 모든 잡음은 교회를 분열시키려는 마귀의 거짓말이라면서, “(마귀는) 목사와 교인을, 교인과 교인을 이간질한다. 많은 한국 교회가 이 거짓말에 속아 넘어갔다.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br/><br/>위와 같이 교계 전체가 이파리부터 뿌리까지 “돈 문제”에 있어 낯부끄러운 행보를 보이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교인들의 수와 헌금이 줄어들고, 그에 따라 수많은 교회들이 “폐업”에 이른 것은 필연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목회자들은 그 인과관계를 잘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목회데이터연구소가 2026년 1월 발표한 “한국 교회 헌금 실태와 인식 조사”에서 교인들에게 헌금 감소의 이유를 물었을 때 응답자 중 14%가 헌금의 필요성에 대한 확신 감소, 헌금 사용의 불투명성, 교회 및 목회자에 대한 실망(비도덕성, 교회 분쟁 등) 때문이라고 답했다. 이런 문제로 아예 교회를 이탈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임을 감안한다면 액면 그대로보다 훨씬 큰 숫자를 상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목회자들에게 질문했을 때 위와 같은 원인을 지목한 비율은 3.7%에 불과했다. 그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 채, 교인들의 열성이 식었거나 그들의 주머니 사정이 나빠진 탓에 헌금이 적게 걷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br/><br/>그와 같은 현실 속에 교인들의 헌금에 대한 인식은 점차 “탈교회화”되고 있다. 교인들에게 헌금을 어디에 드려야 할지에 대해 물었을 때, “헌금은 반드시 출석 교회에 해야 한다”고 답한 비율은 52.1%에 불과했으며, 거기에 거의 필적하는 43.7%가 “선한 일에 사용한다면 교회 밖 단체에 해도 무방하다”고 답했다. 이는 한국 교계의 씁쓸한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교인들은 도대체 헌금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종교심의 발로로 돈을 내는 한편, 교회들은 진리를 모르는 종교인들에게조차 그 매력을 잃고 있는 것이다.<br/><br/>혹자는 헌금 문제가 이 지경이 된 원인을 그들의 도덕적 부패에서 찾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뉴스앤조이에 글을 연재하는 어떤 작은 감리교회 목사는, 자신의 교회에서는 교인들에게 돈을 내라는 압박으로 작용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명목 헌금과 절기 헌금을 폐지했다면서 그 “청렴성”을 뽐냈다. 그럼에도 그 교회는 딱 하나, “기후 위기 시대에 상징성이 있는 ‘탄소 헌금’은 별도로 구별”한다고 했는데, 그러면서도 그 목사는 “헌금하느니 가난한 사람을 돕겠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필자는 그를 포함한 이 나라 목사들에게 묻고 싶다. 교회들이 헌금을 그런 식으로 사용하는데 어떻게 교인들이 “선한 일에 사용한다면 교회 밖 단체에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지 않을 수 있겠는가?<br/><br/>자, 종교 개혁자의 후예라고 자부하는 자들이여, “오직 성경으로!”라는 구호로 다시 돌아가 보도록 하자. 성경은 교회가 『외부 사람들로부터도 좋은 평판을 받아야』(딤전 3:7) 한다고 말씀하신다. 특히 돈 문제에 있어서는 더더욱 아무에게도 비난받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후 8:20,21). 그러려면 당연히 교회의 재정은 “빛 가운데” 있어야 한다(요 3:19-21, 엡 5:11-13). “암묵적인 규칙” 따위에 강요받는 일 없이 오직 자원함으로만 헌금이 드려져야 하며(고후 9:7), 그렇게 걷힌 돈은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한다. 교회 정관에 “교인 3분의 2의 동의가 있어야 장부를 열람할 수 있다.”와 같은 문구를 집어넣어 (제도권 교회들은 “등록 교인”과 “출석 교인” 수가 현저히 차이나기에 교인 3분의 2가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장부를 영원히 “어두움” 속으로 숨기려는 이 나라의 수많은 대형 교회들은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 한다.<br/><br/>헌금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매주 첫날, 곧 예배를 드릴 때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지역 교회에 내는 것이 원칙이다(고전 16:1-3). 헌금은 그 사용처가 사역자들의 생계비(고전 9:11,14),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구제금(행 6:1) 등으로 정해져 있는 돈이기에 자선 단체에 내는 돈, 심지어는 기독교 단체에 내는 돈과도 성격이 아예 다른 돈이다. 헌금이 지역 교회의 사역과 무관하게 세상을 이롭게 하는 데 사용된 사례는 성경에 단 한 건도 나오지 않는다. 사도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해야 된다』(갈 2:10)고 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구원받은 형제자매들”에게 한정되는 말이었다. 교회는 세상에 속하지 않는 집단이기에(요 15:19) 세상에 줄 것이라고는 “책망”밖에 없다(요 16:8). 주님께서는 세상을 위해서는 기도조차 하지 않으셨으므로(요 17:9), 스스로 그 발자취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고백한다면 그 본을 따라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소속된 지역 교회가 도저히 헌금을 낼만한 곳이 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교회 밖 단체에 헌금을 낼 게 아니라, 『그런 데서 네 자신은 빠져 나오라』(딤전 6:5).<br/><br/>“돈 문제”는 그리스도인에게 기본 중에 기본이다. 하나님을 섬긴다면 다른 건 몰라도 그것으로부터는 자유로워야 한다(마 6:24). 육신적인 교회였던 고린도 교회 외에는 사도 바울로부터 그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지침을 받은 교회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그런 “쉬운” 문제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들 잘 했던 것이다! 이 나라의 개신교회들이 돈 문제로 골머리를 썩게 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없다. 그들이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느냐?』(롬 4:3)라는 가장 중요한 질문을 잊었기 때문인 것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Wed, 22 Apr 2026 09:11:59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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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부활절의 기적? 부활의 기적!</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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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지난 4월 3일, 미군 F-15E 전투기가 이란군에 의해 격추되자, 긴박한 수색 작전 끝에 실종된 미군 장교를 “부활절 당일”(그레고리력 기준 4월 5일) 극적으로 구조했다. 이에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그 구조 작전을 “부활절의 기적”이라면서 구조대원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한편 4년 넘게 전쟁 중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측은 “정교회의 부활절”(율리우스력 기준 4월 12일)을 맞아 현지 시간으로 4월 11일 오후 4시부터 12일 자정까지 약 32시간 동안 모든 교전 지역에서 적대 행위를 중단하는 데 합의했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정교회 최대 명절인 부활절을 맞아 신자들이 평화롭게 예배에 참석할 수 있도록 모든 전선에 공격 중단을 명령한 것인데, 이에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이 호응하여 동의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현재 전 세계인들의 우려스런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전쟁 당사국 수장들, 곧 국제법상으로 “침략국”(Aggressor State)에 해당하는 국가의 수장들이 공히 “부활절”을 언급했다는 점은 흥미롭다. “그들은 과연 ‘부활’을 믿고 있기에 그런 말을 한 것일까? ‘부활의 기적’을 믿는 것일까?”<br/><br/>한국 교회는 지난 4월 5일 여의도순복음교회에 73개 교단이 “2026 한국 교회 부활절 연합예배”로 모였다. 언론에 따르면 “생명의 부활, 한반도 평화”를 주제로 개최된 금번 예배의 대회사를 맡은 이영훈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리켜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요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면서 “한국 교회가 연합 예배를 통해 다시 하나 되고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 이 나라와 민족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뤄 가는 거룩한 공동체로 세워지기를 바란다”고 했다. <br/><br/>이번 연합예배에는 이재명 대통령도 참석해 축사를 전했는데, 그는 “부활절 연합예배는 우리 사회에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 온 자리다. 오늘날 우리는 전쟁과 경제 불안 등 여러 도전에 직면해 있지만, 이럴 때일수록 부활의 의미인 평화와 사랑을 되새겨야 한다”면서 “요한복음 20:19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신 것처럼,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희망과 서로를 향한 사랑과 연대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이므로, 분쟁이 아닌 평화를, 증오가 아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br/><br/>보다시피 이번 부활절의 특징은 세계 정치 지도자들이 부활절 혹은 부활에 관하여 무언가 한마디씩 거들었다는 데 있다. 그들은 “부활이 사실이라면” 그것이 인류에게 미칠 긍정적 영향 정도는 감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교도 로마카톨릭의 부활절을 흉내 내어 연합예배를 드린 한국 교회 역시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든 아니든” 교회사적으로 끼친 영향을 인정하고 있다. 그들이 주님의 부활을 적용하는 영역이 기껏해야 “한반도 평화”라는 점은, 그 신앙의 수준이 부활절을 지키려고 “휴전”을 선포한 러시아 대통령 정도밖에 안 되며,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가지고 “평화와 사랑”을 이야기한 이 나라 대통령 정도밖에 안 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br/><br/>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지고서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이들이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의 부활은 그 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기적”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셔서(딤전 3:16) 죄인들에게 “고난”을 당하신 뒤 삼 일 만에 “부활”하신(마 16:21) 일은 인류 역사에 두 번 다시 없을 위대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또다시 죽으셨다가 부활하실 일은 없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한 번의 속죄제를 영원히 드리신 후 부활 승천하시어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셨다(히 10:1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해 말하면서도 마음에 아무런 변화도 없고 세상의 평화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다음의 세 가지 사실에 주목함으로써 진리로 돌이켜야 한다. <br/><br/>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주님의 “신성”을 증명한다. 로마서 1:3,4은 주님께서 『육신으로는 다윗의 씨에서 나셨으며 거룩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고 말씀한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선포되신 방식은 바로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이었다. 성경은 이것을 “능력”이라고 말씀하는데, 인류 역사상 자신의 능력으로 부활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능력으로 부활하셨는데, 주님께서는 그분 자신의 능력으로 부활하실 것이라고 친히 선언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성전을 헐라. 그러면 내가 삼 일 만에 이것을 다시 일으키리라.”고 하시니라... 그러나 주께서는 성전 된 자기 몸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이라. 그후 주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셨을 때 제자들은 주께서 그들에게 하신 이 말씀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더라』(요 2:19,21,22). 성경에는 부활한 사람들이 여럿 나오지만, 그들 모두는 다시 죽어야 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 하나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요일 5:20)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자신의 능력으로 부활하여 다시 죽지 않으셨다. 주님을 빌라도에게 고소했던 유대인들은 주님께서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다 하여 죽이려 했는데(요 19:7),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주장 자체가 주님의 신성을 강조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유대인들이 걸고넘어진 죄목은 “신성모독죄”였다.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으로써 “하나님”이심을 자처했으니 그것이 하나님을 모독한 죄가 되므로 율법에 따라 죽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율법 준수에 철저했던(빌 3:5,6)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신 분이란 점은 경건의 신비이기에 논쟁의 여지없이 위대하다고 선언했다(딤전 3:16). 주님께서는 친히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의 신성을 나타내셨다. 『신격의 모든 충만함이 몸의 형태로 거하시』는(골 2:9) 『참 하나님』(요일 5:20)이심을 부활로서 입증하신 것이다.<br/><br/>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주님의 “동정녀 탄생”을 증명한다. 『그녀에게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보라, 한 처녀가 잉태하여 한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해석하면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라』(마 1:20,23).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우리와 달리 썩어질 남자의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된 것이었다. 남자를 알지 못한 마리아가 처녀인 상태에서 아기를 낳을 수 있었던 것은 성령님께서 그녀를 초자연적으로 잉태시키셨기 때문이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셉의 씨를 통해 나셨다면 요셉의 씨는 죄성을 유전시키는 “썩어질 씨”이기에 주님은 결코 부활하시지 못하고 여타 인간들처럼 사망과 썩어짐 가운데 계셔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죄 없으신 하나님이시기에 사망에 매여 계실 수가 없었다! 다윗은 이와 같으신 주님에 관해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 예언하기를 『내가 주를 항상 내 앞에서 미리 뵈었으니 이는 그분께서 내 오른편에 계시어 나로 요동치 못하게 하심이라. 그러므로 내 마음이 즐거워하였고 내 혀가 기뻐하였으며 또한 나의 육체도 소망 속에 안식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 혼을 지옥에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며 또 주의 거룩하신 분으로 썩어짐을 보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나에게 생명의 길들을 알게 해주셨으니 주께서 나를 주의 임재하심 속에서 기쁨으로 충만케 하시리로다.』(행 2:25-28)라고 했다. 『주의 거룩하신 분』,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의 예언에 따라 “썩어짐을 보지 않고” 부활하셨다! 본래 씨가 없는 여자에게서 “여자의 씨”(창 3:15)로서 초자연적인 탄생을 하신 주님께서는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셨기에 “인간으로서의 본성”과 “하나님으로서의 본성”을 동시에 소유할 수 있으셨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본성을 지니셨어도 죄가 없으셨기에(히 4:15) 썩어짐을 보지 않고 부활하셨다. 주님의 부활은 주님의 “동정녀 탄생”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만일 요셉의 씨를 통해 나셨다면 결코 부활하실 수 없으셨을 것이다.<br/><br/>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주님 안에서 죽은 성도들의 부활”을 보장한다. 사도 바울은 부활에 관해 논쟁이 일어난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도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만일 그리스도께서 일으켜지지 못하셨다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너희 죄들 가운데 있는 것이라.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멸망한 것이라』(고전 15:13,17,18)라고 기록했다.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쓰던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신 것이 전파되었음에도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었다(고전 15:12).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린도전서 15장 전체(총 58절)를 할애하여 “부활”에 관해 논증한 것인데, 요점은 다음과 같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그분은 자신의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이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가 처리되지 못했다는 뜻이기 때문에, 설령 우리가 그분을 믿고 죽는다 해도 결국 지옥에서 직접 죗값을 치러야 한다.”<br/><br/>말하자면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복음”도 없는 것이다.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셔서 잠들었던 자들의 첫열매들이 되신 주님은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신” 분이기에, “그분 안에서” 잠든 모든 성도들 또한 부활할 수 있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 아닌가! 주님께서 마르다에게 하셨던 말씀, 곧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며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누구나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이것을 믿느냐?』(요 11:25,26)라는 말씀대로, “죽어도 부활하여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 복음의 정수인 것이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오히려 우리가 모두 변화될 것이니 마지막 나팔 소리에 눈 깜짝하는 순간에 그러하리라. 나팔 소리가 나면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하는 몸으로 일으켜지며 우리도 변화되리라. 그리하여 이 썩을 몸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몸을 입고 이 죽을 몸이 반드시 죽지 아니할 몸을 입으리라. 이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또 이 죽을 몸이 죽지 아니함을 입게 되면 그때 “사망이 승리 속에 삼킨 바 되었느니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전 15:51-54).<br/><br/>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성도들의 부활은 주님의 부활이 보장하는 성경의 진리이다. 주님의 부활은 썩고, 수치스럽고, 약하고, 흙으로 만들어진 몸을 지닌 성도가 썩지 아니하고, 영광되고, 능력 있고, 하늘에서 나신 분과 똑같은 몸을 입고 부활하는 일을 가능케 한다. 어디 그들뿐이겠는가? 주님께서 공중재림하실 때 살아 있을 성도들 또한 주님의 부활하신 몸과 똑같은 모습으로 변모되어(빌 3:21, 요일 3:2) 영원히 살면서 하나님을 영원무궁토록 찬양하게 될 것이다. 『너희는 주를 찬양하라. 오, 주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자비는 영원히 지속됨이라』(시 106:1).<br/><br/>“부활절의 기적”으로 자축하지 말라! “부활절 휴전”으로 의로운 척하지 말라! “부활절의 평화와 사랑”으로 부활을 오도하지 말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지닌 의미에 무지한 채, 부활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자들은 하나님을 불쾌하게 해 드릴 뿐이다. “하나님의 뜻”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인류의 죗값을 대신 치르시고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왕들과 권세자들이 모두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이다(딤전 2:2,4). “부활의 생명”이 “정치적 생명”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Wed, 22 Apr 2026 09:07:48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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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반드시 내가 속히 오리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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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성경은 예언의 책이다. 예언은 단순히 미래를 내다보는 인간적 예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신 성품이 담긴 절대적인 약속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거룩하신 본성상 결코 거짓말하실 수 없으며(민 23:19), 그렇기에 그분의 예언은 인류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 그 자체가 된다. 말하자면 성경은 “미리 기록된 역사책”인 것이다. 미래에 대한 인간의 예측은 환경이 조금만 바뀌어도 빗나가 버리지만, 성경의 예언은 하나님의 불변하심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결코 무효화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한 번 내뱉으신 예언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되고 마는데, 이는 그것이 하나님의 변치 않는 뜻이자, 그분의 온전하신 성품에서 나온 거룩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br/><br/>성경은 약속이 있는 예언의 책답게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요한계시록 22장”에 주님께서 속히 오시겠다는 약속이 세 번이나 언급되어 있다(계 22:7,12,20). 그중 첫 번째로 하신 말씀은, 『보라, 내가 속히 오리라. 이 책의 예언의 말씀들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도다.』(계 22:7)이다. 여기서 언급된 『이 책』은 일차적으로 “요한계시록”을 뜻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66권 전체를 의미한다. 이는 성경의 모든 기록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유기적으로 연결된 예언 체계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바로 그 말씀들을 믿고 신실하게 지켜야 한다. <br/><br/>성경의 “예언”은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를 넘어, 우주의 역사를 관통하여 이루실 일들을 미리 말씀하고 기록하신 것이다. 그것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미리 보여 주신 “인생의 지도”이자 “확실한 약속”이다. 실제로 성경에는 약 800여 개의 예언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중 예수님의 탄생과 고난, 죽음과 부활에 관한 300여 개의 예언은 이미 역사 속에서 단 하나도 빠짐없이 정확하게 이루어졌다. 지나온 모든 예언이 일점일획의 오차도 없이 성취되었다면, 아직 우리 앞에 남아 있는 500여 개의 재림과 관련된 예언도 반드시 실현될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그 말씀들을 소망하고 지키면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자신의 생애를 일치시키며 사는 성도가 인생을 가장 현명하게 사는 것이다.<br/><br/>요한계시록 22장에서 주님의 재림을 약속한 두 번째 말씀은,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행위에 따라 주리라.』(계 22:12)이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심판석』(고후 5:10)을 기다리는 교회 시대의 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대환란 시대의 환란 성도들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이다. 주님께서 오시는 이유 중 하나는 각 시대 성도들의 행한 것들에 대한 보상으로 상을 주시기 위함인 것이다. <br/><br/>그러나 상은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경기장에서 달리는 사람들이 모두 달릴지라도 한 사람만이 상을 받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너희도 상을 얻게 되도록 달리라.』(고전 9:24)라고 말씀한다. 상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상을 얻기 위해 달린” 사람이지, 달리지도 않았는데 상을 주시지는 않는다. 한 가지 매우 이상한 일은, 성경에 상을 주시겠다는 말씀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주실 상에 대해 무감각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예 구원받지 못했을 수도 있고, 구원받았음에도 마귀에게 점유당하여 성경의 진리에 무관심한 것일 수도 있다. <br/><br/>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상을 받기 위해 달려야 하고, 누구나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서야 한다. 이 심판석에서의 심판은 불로 태우는 것으로 이루어지는데, 그때 불타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일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일한 것”은 그것이 어떤 종류이든지 불로 태워질 것이고, 불로 태워 봤을 때 『만일 어떤 사람의 일한 것이 세운 그대로 있으면 그는 상을 받을 것이』다(고전 3:14). 구원받았음에도 자기 멋대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휴거되어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서게 될 사람은 주님의 강한 책망을 면치 못할 것이다. 또한 주님께서는 불꽃 같은 눈으로 성도를 바라보시며 그가 행한 일들의 질과 동기를 심판하실 것인데, 주님을 사랑하기에 섬기지 않고 자기를 드러내려고 섬겼거나 육신적인 방법으로 행한 사람은 그 일한 것이 불타 버려서 손해를 당하게 될 것이다(고전 3:15). <br/>주님께서 오시면 약속하신 대로 그리스도인 각 사람에게 그의 행위에 따라 상을 주실 것이다.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주시는 상은 상징적인 것이 아니다. 영적인 것도 아니고 은유적인 것도 아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상은 실제적이며 영광스럽고 고귀한 영예가 영원히 지속되는 상이다. 그 상은 주님의 약속을 믿고 끝까지 신실하게 달리는 성도만이 받을 수 있다. <br/><br/>요한계시록 22장에서 주님의 재림을 약속한 세 번째 말씀은, 『이런 일들을 증거하신 분이 말씀하시기를 “반드시 내가 속히 오리라.” 하시니라. 아멘. 그러하옵니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이다. 여기서 『반드시 내가 속히 오리라.』라는 약속은 주님께서 성경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며, 이는 또한 왕국의 도래를 예고한 것이다.<br/>성경의 주제는 왕국이며, 그 초점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분의 지상 왕국에 맞춰져 있다. 주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재림하시어 만왕의 왕으로서 통치하실 것이다. 『자기 때가 되면 주께서 나타나시리니 그분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통치자시요,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라』(딤전 6:15). 주님께서는 “반드시 내가 속히 오리라.”라고 약속하신 대로 이제 곧 재림하셔서 쓸모없는 것들을 심판하시고 전 세계의 수도인 예루살렘에서 다윗의 보좌에 앉으시어 천년왕국 정부를 기반으로 하여 철장으로 통치하실 것이다. <br/><br/>(하나님께서는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시다(민 23:19). 위대하신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분께서 말씀하신 것을 속히 이루시기 위해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다.<br/>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다시 오신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들이 재림을 믿지 않으며, 거들떠보지도 않는 현실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들은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 세상에 평화를 이루려 하지만, “화평의 통치자”이신 주님 없이는 평화가 없다. 만왕의 왕이신 주님만이 폭력과 전쟁이 가득한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오실 유일한 분이시다.)<br/><br/>그러나 교회에 다닌다는 수많은 사람들이 재림에 관한 주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심지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하나님을 아예 믿지 않거나,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재림을 믿지 않는다면 당연하게 받아들이겠지만, 소위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이, 자신도 교회에 다니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자처하면서도 주님께서 하신 마지막 약속을 믿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는다는 것은 결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지혜와 능력으로 이 세상에 평화를 이룩하겠다고 난리이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없이는 평화가 없다는 것을 알라.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화평의 통치자』(사 9:6)이시기 때문이다. 폭력과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이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실 분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통치자시요,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딤전 6:15)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인 것이다.<br/><br/>주님께서는 『나를 거절하고 내 말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말한 그 말이 그를 마지막 날에 심판하리라.』(요 12:48)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를 거부하고 그분의 재림을 믿지 않는 자들은 주님의 말씀에 의해 심판받게 될 것이다(계 20:12).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멸시하고 성도들이 품고 있는 재림의 소망을 비웃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진리의 빛을 거부하고 계속 어둠 속에 머물러 있다면, 결국 성취될 예언의 말씀 앞에 스스로 심판의 근거를 쌓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br/><br/>그리스도인은 재림에 대한 약속을 믿고 『아멘. 그러하옵니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라고 화답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성도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모두와 함께 있을지어다.』(계 22:21)와 같은 축복의 말씀이 주어진다. 주님의 은혜가 재림에 관한 예언을 믿고 그 예언이 성취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성도에게 풍성하게 임하는 것이다.<br/><br/>구원받은 성도가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잘하는 일이고, 그 예언의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의 심판석을 대비하는 것은 더욱 잘하는 일이다. 예언에 따라 그리스도의 심판석을 대비하려면 이 마지막 때를 정신을 바짝 차리고 보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들을 붙들고 하루하루를 주님과 동행하는 성도에게는, 다시 오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이 두려움이 아닌 가장 큰 위로와 기쁨이 될 것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4 Mar 2026 18:02:0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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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성경의 눈으로 읽는 “이란의 최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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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성경을 공부하다 보면 “메데-페르시아”라는 표현을 접하게 된다. 독자는 인류 역사에 등장한 특정 국가의 이름을 그렇게 부르는 이유를 알고 있는가? “메데”는 무엇이고, “페르시아”는 무엇인가? 왜 둘을 합쳐서 부르는 것인가? <br/>“메데”(메디아)와 “페르시아”는 고대 근동의 패권을 다투며 현대 이란의 기틀을 마련한 두 핵심 세력이었다. “메데인”은 이란 고원에 정착한 인도-유럽어족 계열의 부족들로서, 당시 서아시아의 맹주였던 앗시리아에 대항하며 세력을 키웠다. B.C. 7세기경 데이오케스에 의해 부족들이 통합되고, 수도 엑바타나[『악메다』(스 6:2), 이란의 “하마단”]를 중심으로 왕국이 형성되었다. “메데”의 키악사레스왕은 신바빌로니아와 동맹을 맺고 B.C. 612년에 앗시리아의 수도인 니느웨를 함락함으로써 아시아의 강자로 급부상했다. “메데”는 당시 “페르시아 부족들”을 “속국”으로 거느릴 만큼 강력했으나, 체계적인 중앙집권 체제보다는 부족 연맹체 성격이 강했다.<br/><br/>“페르시아”는 원래 메데 남동쪽의 “안샨”이라는 작은 지역을 다스리던 부족 중 하나였다.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가문의 코레스 2세(코레스 대왕)는 메데의 마지막 왕 아스티아게스의 외손자였으나, B.C. 550년에 외조부를 꺾고 메데를 흡수했다. 코레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리디아(소아시아)와 신바빌로니아를 차례로 정복하며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를 건설했다. 이 코레스가 바로 바빌론의 유대인들을 해방시켜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낸 그 왕이다(대하 36:22,23, 스 1:1,2).<br/><br/>“메데-페르시아”라는 명칭은 두 나라가 단순한 정복 관계를 넘어, 하나의 제국 안에서 결합된 이중적인 구조를 지녔기에 붙여진 것이다. 즉 페르시아의 건국자 코레스왕은 그의 어머니(만다네)가 메데의 마지막 왕인 아스티아게스의 딸이었다. 코레스가 메데를 정복한 일은 단순한 타국의 침략이 아니라, (직계 혈통이 아닌) 방계 왕족이 본가의 왕위를 찬탈하거나 계승한 형태에 가까웠던 것이다. 이로 인해 메데인들은 페르시아의 지배를 비교적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페르시아는 메데를 정복한 후 메데를 피지배층으로 전락시키지 않고 제국의 제2인자로 대우했다. 제국의 고위 관료나 군대 지휘관 자리에 페르시아인뿐 아니라 메데인들도 대거 기용했으며, 메데의 수도였던 엑바타나를 페르시아 제국의 “여름 수도”로 사용했다. 성경은 바빌론을 멸망시킨 이들을 메데와 페르시아의 연합 세력으로 묘사하며(『페레스는 왕의 왕국[바빌론]이 나뉘어서 메데인들과 페르시아인들에게 주어진다 함이니이다』 - 단 5:28), 두 나라의 법도를 『메데인과 페르시아인의 법』(단 6:8)이라고 표현한다. “메데-페르시아”라는 명칭은, 비록 페르시아가 메데를 정복했어도 그 시스템과 인력을 그대로 흡수하여 “메데의 유산을 이어받은 페르시아 제국”의 형태를 띠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 것이다.<br/><br/>성경에는 이 “메데-페르시아” 제국에서 유대인과 관련하여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 아래서 페르시아 왕들의 칙령을 통해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일을 다룬다. 코레스왕은 바빌론을 정복한 후 유대인들에게 “귀환 명령”을 내렸고(스 1장), 다리오왕은 “성전 완공”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며(스 6장), 아탁세르세스왕은 서기관 에스라와 총독 느헤미야를 예루살렘으로 보내어 “성벽”을 재건하게 했다(스 7장, 느 2장). 두 책 뒤에 위치한 “에스더서”는 페르시아 왕궁[『수산궁』(에 1:2)]에서 일어난 일을 다루는데, 유대인들을 멸절시키려는 하만의 계략이 페르시아의 강력한 군주인 아하수에로왕의 왕비가 된 에스더를 통해서 무산된다. <br/><br/>오늘날 “이란”은 스스로를 “페르시아의 후예”로 여기며, 그 역사적 자부심이 국가적 정체성의 핵심을 이룬다. “이란”이라는 국가의 “뿌리”가 바로 “페르시아”라는 것이다. 성경은 “제국들의 역사”와 관련하여 “페르시아”에 중요한 위치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의 후예”이자 “이스라엘의 숙적”인 “이란”이 미래에 맞이할 “최후”를 계시한다. “선지자 다니엘”은 바빌론 시대부터 페르시아 시대까지 생존했던 인물로서, 환상을 통해 페르시아 제국의 등장과 패망을 예언했다. “다니엘서”는 이방 왕국들의 개요로부터 시작하여 그 세부적인 예언들을 계시해 나가는데, 거기에 “페르시아”가 수차례 언급된다.<br/><br/>1 다니엘 2장의 “느부캇넷살의 꿈”: 다니엘 2장은 느부캇넷살이 꿈에 본 형상을 통해 이방 왕국의 역사를 계시한다. 형상은 금으로 된 “머리,” 은으로 된 “가슴과 양팔,” 놋으로 된 “배와 넓적다리,” 철로 된 “다리,” 철과 진흙으로 된 “발과 열 발가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금 머리는 “바빌론,” 은 가슴은 “메데-페르시아,” 놋 배는 “그리스,” 철 다리는 “로마 제국,” 철과 진흙이 섞인 “발과 열 발가락”은 “적그리스도의 왕국”을 가리킨다. “하나의 가슴”에서 나온 “양팔”과 같은 “메데-페르시아”는 금 머리인 “바빌론”에 이어 두 번째 왕국으로 계시되며, “금”보다 비중이 낮은 “은”으로 상징되기에 “바빌론보다 못한 다른 왕국”(단 2:39)으로 해석된다.<br/><br/>2 다니엘 7장의 “네 짐승의 환상”: 다니엘 7장부터는 다니엘이 직접 본 환상이 언급된다. 즉 “네 짐승”을 통해 “네 왕국”을 계시하는데, “큰 바다”(지중해)에서 출현한(2,3절) 짐승들은 모두 “지중해”와 연관된 왕국들이다. 첫째 짐승은 사자와 같고(4절), 둘째 짐승은 곰(5절), 셋째 짐승은 표범(6절), 넷째 짐승은 “두렵고 무서우며 힘이 매우 세고, 철로 된 큰 이빨을 가진 짐승”이다(7절). 이 짐승들은 다니엘 2장의 형상에 나타난 왕국들과 연결되는데, 이 환상이 바빌론의 마지막 왕인 “벨사살왕”의 “원년”에 주어졌고(1절), 앞으로 『땅에서 일어날』(17절) 네 왕국이기 때문에 “바빌론”은 환상의 해석에서 제외된다. 따라서 네 짐승들은 다니엘 2장의 형상에서 “은 가슴”부터 시작되며, 그렇기에 “사자”는 “메데-페르시아,” “곰”은 “그리스,” “표범”은 “로마 제국,” “두렵고 무서운 짐승”은 “적그리스도의 왕국”에 적용된다. <br/><br/>다니엘 7장의 환상이 주어진 목적은 “적그리스도의 왕국”을 계시하는 데 있다. “적그리스도”는 표범과 같고, 발은 곰의 발, 입은 사자의 입 같기에(계 13:2) “표범”과 “곰”과 “사자”가 “복합된 짐승”이다. 이 “세 짐승”이 다니엘 7장의 “네 짐승의 환상”에서도 나타나는 것은, 그 네 번째 짐승이 상징하는 “적그리스도의 왕국”이 “메데-페르시아”(사자)와 “그리스”(곰)와 “로마 제국”(표범)을 복합시켜 놓은 것과 같은 힘을 지닌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의 관심사인 “메데-페르시아”와 관련하여 본다면, “적그리스도의 왕국”은 “사자”인 “메데-페르시아”처럼 온 세상을 집어삼켜 버릴 것이다. 앞선 “바빌론” 제국은 전성기 때의 영토가 그리 넓지 않았기 때문에 온 세상을 집어삼켰다고 볼 수 없다. “바빌론”은 앗시리아의 영토보다도 작았고, 바빌론 당대에도 동쪽과 북쪽에는 “메데 제국”이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후 “메데-페르시아”로 통합된 이 제국은 동쪽으로는 인더스강까지 진출했고, 북쪽의 아르메니아 지방과 서쪽의 소아시아를 삼키고, 그리스 본토까지 침략했기 때문에 “사자”처럼 온 세상을 삼켰다고 할 만하다. 이 “메데-페르시아”의 속성을 지닌 “적그리스도의 왕국” 또한 세상을 닥치는 대로 집어삼킬 것이다(계 6:2).<br/><br/>3 다니엘 8장의 “숫양과 숫염소의 환상”: 선지자 다니엘은 바빌론의 마지막 왕인 벨사살 치리 제삼년에, 바빌론 이후 “숫양”(메데-페르시아)이 등장하여 세력을 확장하는 환상을 보았다(단 8:1-4). 다니엘이 본 “두 뿔 가진 숫양”은 “메데-페르시아”를 상징하며, 나중에 나온 뿔이 더 길다는(단 8:3) 것은 “메데”보다 늦게 일어난 “페르시아”(코레스)가 더 강력해질 것을 의미한다. “숫양”이 “서쪽과 북쪽과 남쪽을 향하여 밀어붙여도” 막을 자가 없다는 점(단 8:4)은 “메데-페르시아”가 펼친 정복 활동의 엄청난 규모를 보여 준다. 그러나 이 “숫양”은 뒤에 등장한 “숫염소”의 강력한 공격을 받고 꺾이고 마는데(단 8:6,7), 이는 “페르시아”를 파죽지세로 공격하는 “그리스” 알렉산더 대왕의 막강한 위세를 예언한 것이다(단 8:20,21).<br/><br/>4 다니엘 10장의 “페르시아 왕국의 통치자”: 다니엘 10:13에는 『페르시아 왕국의 통치자가 이십일 일 동안 나를 가로막았도다.』라는 말씀이 있다. 주님께서 다니엘의 기도에 응답하려고 오실 때 『페르시아 왕국의 통치자』라 불리는 하늘의 영적 존재에게 방해를 받으신 것이다. 결국 “페르시아”를 통치하는 마귀의 방해를 “이스라엘의 위대한 통치자인 미카엘”(단 12:1)의 도움을 받아 물리치고 다니엘에게 오셨는데, 다니엘에게 계시를 마치신 주님은 그 『페르시아의 통치자』와 싸우려고 다시 돌아가셨다(단 10:20). 이 점은 “이스라엘”과 “페르시아”(이란)의 싸움이 단순한 지상전이 아닌,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서 주님과 마귀 사이에 일어나는 전쟁임을 시사한다. <br/><br/>이제 위와 같은 “페르시아,” 곧 “이란”의 “최후”를 이야기할 차례이다. 현재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있는 “이란”은 장차 어떤 최후를 맞이할 것인가? 에스겔 38장에 보면 “천년왕국 끝”에 『메섹과 투발의 최고 통치자 곡』(3절)이 동맹군을 이끌고서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내용이 나오며, 이 동맹군 가운데 “페르시아”가 끼어 있다. 『그들과 함께한 페르시아와 에디오피아와 리비아인데 그들 모두는 방패와 투구로 갖추었고』(5절). 그들은 천년왕국 때에 『성벽이 없이 빗장이나 문도 없이 모두가 평안하고 안전하게 사는』(11절) 이스라엘을 향해 『폭풍같이』(9절), 『구름이 땅을 덮듯이』(16절) 공격해 올 것이지만, 그때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것이다. 즉 이스라엘 땅에 큰 진동이 있어 산들과 절벽들과 모든 성벽이 무너져 내리고(20절), 곡의 동맹군끼리 서로를 칠 것이며(21절), 그들에게 전염병과 피의 병이 돌 것이고(22절), 곡과 함께한 부대와 많은 백성들 위에 『범람한 비와 큰 우박과 불과 유황』(22절)이 쏟아지는 것이다! 이 일은 요한계시록 20장에 예언된 “사탄의 최후의 반역”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 천 년이 끝나면 사탄이 그의 감옥에서 풀려나, 땅의 사방에 있는 민족들,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려고 나가서 그들을 함께 모아 전쟁을 일으키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그들이 땅의 넓은 데로 올라가서 성도들의 진영과 사랑하시는 도성을 포위하니, 하늘에서 불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와 그들을 삼켜 버리더라』(계 20:7-9). <br/><br/>이란은 국제무대에서 예나 지금이나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국가로 통한다. 하지만 그들의 무력도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심판 앞에서는 무력하다.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것은 “하나님의 눈동자”를 손대는 것과 같기 때문에(슼 2:8) 그 『사랑하시는 도성』을 공격해 온 “이란인들”은 하나님의 격렬한 진노의 불에 삼켜지고 말 것이다.<br/>한때 코레스의 칙령을 통해 유대 민족의 회복을 도왔던 “페르시아”가 오늘날 이스라엘의 존립을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대적자로 변모한 사실은, 인류가 성경의 예고대로 종말을 향해 가고 있음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지금 중동에서 요동치는 국제 정세는 하나님의 말씀의 궤적을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 마지막 장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 점은 “역사의 주관자”가 누구이신가를 보여 주는데, 그분은 바로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삼하 7:27)이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4 Mar 2026 17:43:3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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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모사드(MOSSAD): 이스라엘의 보이지 않는 방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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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하나님의 예언의 시간표에 따라 1948년 기적적으로 독립한 이스라엘은, 영토가 대한민국의 약 5분의 1에 불과한 작은 나라다. 사방이 적대국으로 둘러싸인 지정학적 환경 속에서 좁은 영토로 인한 전략적 완충 지대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적국의 대규모 선제공격을 받을 경우 치명적인 타격을 피하기 어렵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은 안보 전략의 핵심 개념으로 “선제적 정보 우위”를 내세우고 있다. 적국의 전쟁 준비 동향, 테러 계획, 무기 개발 현황 등을 사전에 파악하여 선제적 대응 전략을 수립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이스라엘 정보기관의 역할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중요할 수밖에 없다.<br/><br/>이스라엘 정보기관의 모체는 1929년 창설되어 1948년까지 활동한 “샤이”(Shai)였다. 히브리어로 “선물”을 뜻하는 샤이는, 이스라엘 건국 이전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에서 활동한 비밀 민병대 “하가나”(Haganah) 소속의 첩보 조직이었다. 이스라엘 독립 이후 이 첩보 조직은 여러 정보기관으로 재편된다. 국내 보안·방첩을 담당하는 “신베트”(Shin Bet), 군 정보기관이면서 국가정보판단 보고서를 작성하는 “아만”(Aman), 그리고 이스라엘 안보 관련 정보의 수집·분석과 해외 특수공작 및 대테러 활동을 수행하는 “모사드”(Mossad)가 그것이다. 모사드의 공식 명칭은 “정보 및 특수임무 연구소”(The Institute for Intelligence and Special Tasks)이다. 모사드는 1949년 12월 외무부 산하 정치국으로 출범했으나, 1951년 3월 조직 개편을 통해 총리 직속기관으로 격상된다. 아울러 모사드 부장이 국가최고정보위원회 의장을 겸임하며 다른 정보기관들의 조정 업무를 맡게 되면서, 모사드는 여타 정보기관보다 우위에 서서 강력한 해외 공작 능력을 갖추게 된다.<br/><br/>모사드의 정확한 실체는 외부에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다만 1990년대에 전직 모사드 요원 “빅터 오스트로브스키”(Victor Ostrovsky)가 그의 저서 &lt;기만의 방식으로, By Way of Deception&gt;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모사드는 크게 작전 담당 부서와 지원 담당 부서로 나뉜다. 작전 부서는 수집국, 정치활동연락국, 심리전국 등으로 구성된다. 수집국은 해외 첩보를 수집하고, 정치활동연락국은 우호국 정보기관과의 협력 및 외교 관계가 없는 국가들과의 접촉·연락 업무를 담당한다. 심리전국은 심리전, 선전, 기만 작전을 맡는다. 주요 작전 부서로는 차프리림(Tzafririm), 네비오트(Neviot), 링(Ring), 테벨(Tevel), 야할로민(Yahalomin), 메차다(Metsada) 등이 있다. 차프리림은 전 세계 유대인과의 연락을 담당하고, 네비오트는 도청·해킹 등 기술적 정보 수집을 전문으로 담당한다. 링과 테벨은 각각 경제 분야 정보 파악과 외국 정보기관과의 협력 업무를 맡는다. 야할로민은 특별통신 부서로, 적대국에서 활동하는 첩자들과의 통신을 담당한다. 메차다는 모사드의 핵심 부서로, 암살과 비밀 파괴 공작, 준군사적 활동 등 비밀 공작을 수행하며, 그 산하에는 암살을 전문으로 하는 키돈(Kidon)이 있다. 지원 부서로는 기술국, 요원훈련국, 행정지원국 등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br/>모사드 본부는 텔아비브(Tel Aviv)에 위치하며, 미국 CIA는 모사드 요원이 약 7,000명, 연간 예산은 27억 3천만 달러(약 3조 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방의 적들로 둘러싸인 이스라엘은, 온갖 정보를 수집하고 그것을 해석하는 일을 생존의 조건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br/><br/>모사드는 수많은 굵직한 작전으로 그 존재감을 세계에 알려 왔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1960년 아르헨티나에 은신해 있던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압송했던 작전을 꼽을 수 있다. 1972년 9월 5일에는 뮌헨 올림픽 선수촌에 팔레스타인 게릴라 단체 “검은 9월단” 소속 테러리스트 8명이 난입하여 이스라엘 선수단 11명이 목숨을 잃는 참사가 벌어졌다. 진압 과정에서 테러리스트 5명이 사살되고 3명이 체포되었는데, 이후 모사드는 “하나님의 분노”(Wrath of God)라 명명된 보복 작전을 통해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을 하나씩 추적·암살하였다. 1981년에는 이라크 핵 시설 타격 작전인 “오페라 작전”(바빌론 작전)에서 핵 개발 관련 정보를 수집하고 시설의 위치와 구조를 파악하여 공군의 정밀 타격을 가능하게 했다. 1980-90년대에는 “모세 작전”과 “솔로몬 작전”을 통해 에티오피아에 거주하던 수만 명의 유대인을 이스라엘로 이주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br/><br/>2000년대 이후에는 이란의 핵 프로그램을 견제하는 데 집중하여, 이란 혁명수비대 미사일 담당인 “하산 테라니 모가담” 장군 암살(2011년), 이란 핵 관련 문서 대량 탈취(2018년), 수석 핵무기 과학자 “모센 파크리자데”에 대한 원격 조종 기관총 암살(2020년) 등 일련의 공작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특히 미국이 “장대한 분노”(Epic Fury)라 명명한 금년 2월 28일의 이란 공습과 하메네이 제거 작전에서 모사드가 결정적 정보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그 높은 위상이 다시금 확인되었다. 그간 미국은 이란과 핵 협상을 이어왔지만, 하메네이 체제 아래 이란은 지속적으로 핵농축 능력을 강화해 왔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이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는 것은 인류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이란이 중동 내 미군 기지에 대한 대규모 미사일 공격을 계획하고 있다는 첩보가 입수되자 선제 타격을 결정하게 된다. 문제는 공격이 시작될 경우 하메네이가 즉시 지하 벙커로 피신할 것이기 때문에 그를 제거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이때 모사드는 하메네이가 테헤란의 특정 장소에서 회의를 가질 것이라는 정보를 복수의 경로를 통해 확인했고 이를 미국 측에 전달해 공습 날짜가 결정된 것이다. 모사드는 이미 수년 전부터 이란의 교통 카메라를 해킹하여 영상 정보를 축적해 왔으며, 이를 통해 해당 시각 하메네이의 위치를 복합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나아가 공습 직전에는 하메네이 집무실 인근의 이동통신 기지국 12개를 교란함으로써 경호원들이 외부로부터 공격 경보를 수신하지 못하도록 차단했다.<br/><br/>그러나 모사드의 작전이 항상 성공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1973년에는 민간인을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로 오인하여 암살한 “릴레함메르 사건”이 발생했고, 같은 해 “욤키푸르 전쟁”에서는 정보 판단의 실패로 이집트와 시리아의 기습 공격을 허용하기도 했다. 1997년에는 하마스의 정치 지도자 “칼레드 메살”에게 독극물을 주입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작전 직후 요원들이 체포되어 외교적 파장을 일으켰다. 이스라엘은 해독제를 제공하고 수감 중이던 하마스 창시자 “셰이크 야신”을 석방하는 조건으로 요원들을 돌려받아야 했다. 2010년에는 하마스 고위 지휘관 “마흐무드 알 마브후흐”를 두바이의 한 호텔에서 암살했지만, 요원들의 모습이 CCTV에 고스란히 포착되어 여권 도용 문제까지 불거지게 되면서 국제적 논란과 외교적 갈등을 초래했다.<br/><br/>위와 같은 실패 사례들은 한 가지 중요한 진실을 일깨워 준다. 즉 선제적 정보 우위를 앞세운 세계 최고 정보기관 모사드라 해도, 그들은 정보를 분석하고 판단하는 데 있어 오류와 실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모사드의 로고에는 잠언 11:14 말씀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라고 변개된 개역개정판을 인용하며, 마치 모사드의 “지략”이 곧 국가의 방패가 되어 적의 공격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평안을 가져다줄 수 있는 것처럼 오용하고 있다. 그러나 살펴본 것처럼, 세계 최고 정보기관이라 해도 얼마든지 실수할 수 있다. &lt;한글킹제임스성경&gt;에 보존된 본래의 말씀은 『의논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나, 의논자가 많으면 안전하니라.』이다. 진정한 “의논”(counsel)을 베풀어 주실 수 있는 분, 곧 참된 “의논자” (counsellor)는 “상담자”(Counsellor)이신 주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이는 우리에게 한 아이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음이니, 정부가 그의 어깨 위에 있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경이로운 분이라, 상담자라, 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원하신 아버지라, 화평의 통치자라 불리리라』(사 9:6). 이 구절의 하나님은 바로 2천년 전 이 땅에 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지금 이 순간, 진정한 “상담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야만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예언의 시간표에 따라 이스라엘은 결국 “다니엘의 70째 주”(단 9:24)요 “야곱의 고난의 때”(렘 30:7)라 불리는, “대환란”이라는 전무후무한 “고난의 때”(단 12:1)를 통과하게 된다.<br/><br/>그 고난은 그들이 제2차 세계대전 때 당한 참상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극심할 것이다. 그때 모사드는 이스라엘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주 하나님만이 진정한 방패가 되어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오 이스라엘아, 너는 행복하도다. 오 주에 의해 구원받은 백성이여, 누가 너와 같으리요, 그분은 네 도움의 방패시며 네 탁월함의 칼이시로다! 네 원수들이 네게 거짓말쟁이로 드러날 것이요, 너는 그들의 높은 곳들을 밟으리라』(신 33:29). 『내 반석의 하나님, 그분을 내가 신뢰하리라. 그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며,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주시라. 주께서 나를 폭력으로부터 구원해 주시나이다』(삼하 22:3). 이 방패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방패”다. 에스더서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위기 때마다 보이지 않으시는 방패로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책 전체에 드러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서 이방 땅에 흩어져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주신 의로운 약속을 신실하게 이행하셨다. 사탄의 예표인 하만이 유대인을 멸절하려 했으나, 그들의 방패이신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손길로 이스라엘 민족을 지켜 내셨던 것이다.<br/><br/>대환란의 때가 되면,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그토록 의지해 온 “지략”을 등에 업고 등장하는 사악한 지략가(나 1:11), 곧 적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받아들이고 그와 평화조약을 맺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를 두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망과 더불어 맺은 너희의 언약이 무효화되며 지옥과 한 너희의 합의가 서지 못하리니 넘치는 재앙이 지나가면 너희가 그것에 짓밟힘을 당하리라』(사 28:18). 말하자면 적그리스도는 7년 대환란 기간의 중반에 그 평화조약을 파기하고 이스라엘을 극심하게 박해할 것이다(단 9:27). 그때 이스라엘은 비로소 그들의 방패이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피난처인 반석으로 숨어들 것이다(시 94:22). 환란의 때에 바위 성읍, 곧 셀라 페트라로 피신하게 되는 것이다.<br/><br/>이스라엘이 위와 같은 진리를 알지 못한 채 모사드를 운용하며 중동 정세에 대응하는 현실은, 자신들의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인간의 지략으로 현실을 헤쳐 나가고자 하는 인본주의적 몸부림에 불과하다. 진정한 승리는 최첨단 첩보 기술이나 치밀한 전략에 있지 않다. 이스라엘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보이지 않는 방패”는 그 민족을 섭리 가운데 인도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신 7:9)이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4 Mar 2026 17:42:5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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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밀월”에서 “증오”로 변한 이스라엘 - 이란 관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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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미국-이란 전쟁”이 전면전 양상으로 치닫고 있는 현 시점에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반세기쯤 전만 해도 이스라엘과 이란은 “우방”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돈독한 관계였다. 이란은 이슬람권 국가들 가운데서는 터키 다음으로 빠르게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고(1950), 수도 테헤란 한복판에 이스라엘 “대사관”을(주변국 눈치 때문에 곧이곧대로 “대사관”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지만) 뒀던 나라였다. 경제적 협력도 활발하여 많은 이스라엘 사업체가 이란에서 성업했고, 기술자들은 이란의 인프라 구축을 도왔다.<br/><br/>이스라엘과 이란, 이 둘 사이에는 심지어 군사적인 협력도 있었다. 이스라엘은 이란에 무기를 수출했고, 양국은 각자의 장점인 “군사 기술”과 “오일 머니”의 시너지를 통해 첨단 탄도미사일을 공동으로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기도 했다. 제4차 중동전쟁(1973) 당시 아랍 국가들이 석유 수출 중단 조치를 통해 이스라엘을 말려 죽이려고 했을 때, 이스라엘의 탱크와 전투기가 멈춰 서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란의 석유 덕분이었다.<br/><br/>양국 간의 좋은 관계는 지정학적 이해관계에 의해 형성된 것이었다. 우선 건국(1948)과 동시에 국경을 둘러싼 아랍 국가들로부터 존립을 위협받던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생존을 위해 그 밖의 국가들과 손잡을 필요가 있었다. 이스라엘의 국부(國父)인 벤구리온 총리는 이를 “주변부 동맹”(Alliance of the Peri- phery)이라는 이름으로 구체화했다. 아랍 국가들의 포위망 너머 반대편에서 그들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터키, 이란, 에티오피아 등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하는 외교 전략으로, 쉽게 말해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것이었다.<br/>아랍 민족주의 색채를 띤 국가들을 견제해야 했던 이란 입장에서도, 이스라엘이 내민 손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덧붙이자면 이란은 아랍 국가가 아니다. “아랍 국가”란 “아랍어”를 사용하는 “아랍인”이 다수인 국가를 말하는데, 이란은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페르시아인”이 과반 이상이다.) 물론 다른 “이슬람 형제들”의 반발이 있었으나, 티를 내는 것만 자제하면 그들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랍 국가들로서는 확실한 명분도 없는데 “주적” 이스라엘을 뒤에 두고 이란을 치러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던 것이다.<br/><br/>둘 사이의 “물밑 협력” 관계는 쿠데타(1953)를 통해 본래 입헌 군주국이었던 이란을 절대 왕정 체제로 바꿔 놓은 이란의 “샤”(페르시아어로 “왕”을 뜻함),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의 치세에서 한층 깊어졌다. 쿠데타의 발단은 민족주의자 총리 모사데그가 본래는 이란에 들어온 영국계 회사가 운영하고 있던 석유 산업을 국유화하는 “반(反)제국주의적” 정책을 폈던 데에 있었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정책에는 자유세계의 강력한 보복성 제재가 뒤따를 수밖에 없었고, 석유가 있어도 팔 수가 없게 되자 이란의 경제는 파탄이 났다. 이때 미국과 영국의 정보기관은 샤에게 접촉하여 쿠데타를 종용했다. 혹 총리가 소련과 결탁하여 문제를 타개하려 들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샤는 처음엔 이를 거절했으나, 여론의 악화를 견디다 못한 총리가 급기야 비상대권을 선언하면서 샤의 권한까지 빼앗으려 들자 동의의 뜻을 전했다.<br/><br/>미국과 영국의 도움으로 쿠데타에 성공한 샤는 이후로도 철저한 친미노선을 걸으며 권력기반을 확고히 했다. 그는 이윽고 “백색 혁명”(1963)이라는 서구식 근대화 개혁을 단행했는데, 이는 문맹 퇴치, 사회 기반 시설 구축과 같은 복지의 영역으로부터 여성의 참정권 부여, 국영 기업의 민간 매각, 토지 개혁 등의 굵직한 정치, 경제적 영역까지를 아우르는 대개혁이었다. 이 개혁의 산물은 사람들이 흔히 회자하듯 “테헤란 도심에서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들이 오픈카를 몰던” 자유롭고도 풍요로운 이란이었다(물론 이것은 6,70년대의 이란이다). 석유 매장량만 해도 세계 3,4위를 다툴 정도로 엄청난 자원 잠재력을 가진 나라가 미국의 호감을 살 만한 일만 골라서 했으니, 당시 국제 정세상 그와 같은 눈부신 발전은 이미 예견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br/><br/>“백색 혁명”은 단순한 근대화 혁명이 아니라, 이란의 근간을 뒤흔들겠다는 샤의 원대한 포석이기도 했다. 샤가 꿈꿨던 이란은 성직자들의 눈치를 보면서 후진적 사회에 머무르는 “이슬람 국가”가 아니었다. 그는 그 옛날 코레스 대왕 치세에서 중동 전체를 호령했던 “세속 왕정” 페르시아의 영광을 재현하기를 원했다. “백색 혁명”의 핵심이라고 할 만한 토지 개혁이나 교육 정책 등은 바로 그 영역에서 기득권을 쥐고 있던 이슬람 성직자들로부터 그것을 빼앗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실제로 샤는 “이슬람교가 아닌 페르시아 제국이 바로 이란의 뿌리”라는 인식을 대중에게 각인하고자 하는 작업을 착착 수행해 나갔다. 이란에서는 옛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페르세폴리스로 세계의 정상들을 초대하여 제국 건국 2,500주년을 기념하는 성대한 행사가 열리기도 했고(1971), 수백 년간 사용해 오던 달력 체계인 “이슬람력”(마호메트의 메카 성지순례 기준)이 폐지되고 코레스의 즉위를 기점으로 하는 “제국력”이 도입되기도 했다(1976).<br/><br/>바로 이때, 서두에서 본 것과 같은 이스라엘과 이란의 “밀월 관계”는 “큰형님” 미국이 흐뭇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절정에 달했다. 이란이 이슬람교가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페르시아 제국 시대로 회귀하려 했을 때 이스라엘과 가까워지고 또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는 것은 성경을 아는 우리에게는 참으로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셨던 『너를 축복하는 자들에게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리라. 네 안에서 땅의 모든 족속들이 복을 받을 것이라.』(창 12:3)라는 약속이 이스라엘에게 계승되었음을 염두에 둔다면, 샤의 “백색 혁명”은 이란 입장에서는 복을 받을 수 있는 첩경이었음이 분명하다.<br/><br/>그러나 이란의 종교계는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그들은 빠른 경제 성장의 혜택에서 소외된 빈곤층, 그리고 민주적 공화정을 열망하던 지식인층과 연대하여 샤를 압박했다. 그 중심에 있었던 “아야톨라”(이슬람 율법에 대한 유권해석 권한이 있는 시아파의 최고위급 성직자를 부르는 칭호) 루홀라 호메이니는 쿰의 한 신학교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이 정권은 이슬람 그 자체와 종교적 가르침의 존재를 대적합니다. [이 정권과 밀월 관계에 있는] 이스라엘은 이 나라에 코란이 존재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우리와 여러분, 그리고 국가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러분의 경제를 장악하고, 무역과 농업을 파괴하고, 여러분의 재산을 빼앗기를 원합니다... 가난에 찌든 우리 국민들의 고생으로 만들어진 부를 외국의 은행들에 채워 넣은 이 정부, 하늘 높이 솟은 궁전을 세우면서도 국민들을 평안하게 해 주지 못하는 그들은, 우리의 자원을 가지고 그들과 이스라엘의 호주머니를 채우려 합니다. 참으로 기생충과 같은 자들이 아닙니까?”<br/><br/>샤를 폭군이자 기생충으로 묘사한 이 연설을 계기로 호메이니는 체포되었고, 이는 대규모 반정부 폭동으로 이어졌다(1963). 호메이니는 추방을 면치 못하고 터키와 이라크 등 타국을 전전하게 되었지만,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오히려 나날이 커져만 갔다. 정부는 언론을 통제하여 그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막아 보려 들었으나, 카세트테이프에 녹음되어 밀수된 호메이니의 메시지는 이란 전역에 있는 수만 개의 모스크를 통해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결국 우리가 군사 정권 시절에 겪었던 것과 유사한 격동의 과정 끝에 팔라비 왕조는 무너졌고, 호메이니는 이란으로 돌아와 이슬람 성직자들이 지배하는 이슬람 원리주의 국가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이란 이슬람 혁명”(1979)이 성공한 것이다. 민주 공화정이 세워질 줄 알고 혁명에 가담했던 지식인층은 뒤늦게 자신들이 어리석었음을 깨달았지만, 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죽음, 침묵, 혹은 망명뿐이었다.<br/><br/>호메이니 체제 아래에서 공식 국호를 이란 “이슬람” 공화국으로 정한 이란은 서구 사회로부터 온 모든 문화적, 경제적 영향을 몰아냈고, 그간 자신들을 약탈해 왔던 “작은 사탄,” 이스라엘을 지도상에서 지워 버리는 것을 국가적 과제로 삼았다(“큰 사탄”은 미국이다). “코란대로 믿는 사람들”인 그들이 이스라엘을 향한 적개심을 불태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너희는 신자들을 향해 가장 맹렬한 원한을 가진 자들은 유대인과 다신교도들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lt;코란&gt; 5:82).<br/><br/>그러나 이스라엘을 치겠다는 이란의 뜻은 쉽게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두 나라는 국경을 맞대고 있지도 않을뿐더러, 대부분 수니파인 주변의 아랍국 역시 시아파의 맹주로 부상한 이란에게 호의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란의 존재는 여전히 세속 왕조의 통치가 이어지던 국가들에게 상당한 부담이기도 했다. 이란의 영향력이 커지면 자국에서도 똑같은 이슬람 혁명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판단하에, 아랍의 왕조들은 이란을 견제할 수밖에 없었다.<br/><br/>이와 같은 상황에서 호메이니가,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이란 최고 지도자가 된 알리 하메네이(1989)가 선택했던 전략은 “대리전”이었다. 이란은 80년대 초 레바논의 무장 정파 헤즈볼라의 창설에 깊이 관여한 이후로,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 이라크의 시아파 민병대, 예멘의 후티 반군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대리할 무장 세력들을 키워 내어 “시아파 벨트”를 형성했다. 90년대 초에는 종파가 다를지라도 반(反)이스라엘이라는 목표를 공유하는 하마스도 이 “연합”의 일원으로 합류했다. 목숨을 건 테러 행위도 불사할 이 광신도들에게 전폭적으로 자금과 무기를 대줌으로써, 이란은 앙숙인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 등의 수니파 패권국이 함부로 할 수 없는 힘을 갖추는 한편,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최근 이스라엘이 미국과 공조하여 하메네이를 포함한 이란 수뇌부를 폭사시킨 배경에는 이와 같이 수십 년간에 걸쳐 형성된 깊은 원한 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br/><br/>『그가 거친 사람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대적할 것이요,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대적할 것이라.』(창 16:12)라는 예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는 “이스마엘의 씨”(아랍인)라면 몰라도, 그 뿌리가 완전히 다른 “페르시아의 후예” 이란인들은 “투쟁적인 역사”에 휘말릴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들이 아랍인들과 “같은 생각”(이슬람교)을 공유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들이 입으로 떠드는 것처럼 진정한 “평화”를 그 땅에 가져오고 싶거든,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 행위를 중단하고 그 관계를 정상화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이 일은 말처럼 쉽게 되지 않을 것이다. 현재의 이란이 이스라엘과의 관계에 있어 막장에 이른 것으로 보이는 것은, 지금 예언의 시간표가 “교회의 휴거”를 가리키고 있고, “온 세상”이 적그리스도를 따르며(계 13:3) 이스라엘을 짓밟을(계 11:2) “대환란”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4 Mar 2026 17:42:1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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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중동의 화약고, 이스라엘과 이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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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중동의 화약고, 이스라엘과 이란<br/><br/>목 차<br/>1. 역사의 중심 “이스라엘” / 박승용<br/>2. “밀월”에서 “증오”로 변한 이스라엘-이란 관계 / 손주영<br/>3. 모사드(MOSSAD) : 이스라엘의 보이지 않는 방패 / 박동일<br/>4. 성경의 눈으로 읽는 “이란의 최후” / 한승용<br/><br/><br/>&lt;편집자 주&gt;<br/>인류 역사의 시계 바늘은 언제나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과거와 미래, 종교와 정치가 한데 뒤섞인 이 좁은 땅덩어리는 늘 세계사적 격변의 중심지였으며, 지금 또다시 미국-이란 전쟁과 관련하여 뜨거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왜 세계의 시선은 이 작은 땅 조각에 머물 수밖에 없는가? 그 근원적 이유는 무엇인가?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전략적 파트너였던 이스라엘과 이란은 현재 서로의 생존을 위협하는 숙적이 되었다. 코레스왕의 호의가 흐르던 페르시아 땅이 반(反)이스라엘의 선봉이 된 과정은 극적이다. 국가의 존망을 걸고 펼쳐지는 모사드의 정보전 또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무엇보다 성경은 이스라엘과 이란의 갈등이 종국에 어떤 종착지에 이를 것인가를 예언한다. 역사는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중동의 지정학적 갈등 이면에는 거대한 섭리가 흐르고 있다. 본 특집은 복잡한 중동 정세를 분석함으로써 그 예언적 결말을 명쾌하게 읽어 준다.]]></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4 Mar 2026 17:40:58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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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하나님의 위로와 그리스도인의 소명</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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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고통과 절망의 시간을 지낼 때가 있다.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는 이세벨의 위협에 낙심하여 죽기를 구했다(왕상 19:4). 위대한 사도 바울 또한 고난으로 인한 극심한 압박 때문에 삶의 절망에까지 이르렀다(고후 1:8). 그럼에도 그가 맡은 바 사역을 성공적으로 감당했던 동력은 하나님의 위로에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사역의 완성을 위해 고난을 허락하시지만, 또한 『모든 위로의 하나님』(고후 1:3)으로서 사역에 필요한 위로를 더해 주신다. <br/><br/>오늘날 이 세상에서는 “위로자”가 더욱 절실히 필요하다. 세상이 너무나 많은 짐을 지우기 때문이다. 죄악과 우울한 일들, 거칠고 폭력적인 사람들, 감당하기 힘든 환경과 상황, 반복되는 실망과 낙심, 이 모든 것 때문에 인생의 짐은 종종 너무 무겁게 느껴진다. 교회가 하는 일들 가운데 하나는 “위로”하는 것이다. 인생의 시험 속에서도 다시 걸어갈 힘을 주는 사람들, 낙심한 자를 일으켜 세우는 사람들, 신뢰할 수 있고 상처 주지 않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모든 성도의 사명 가운데 하나는 “위로”하는 일이다. 위로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모든 행동은 결국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과 같다. 교회는 사랑과 격려와 위로의 분위기가 조성되고 유지되는 곳이어야 한다. 그 결과 교회가 모든 성도들이 영적으로 최대한 성장할 수 있는 곳이 되는 것이다. 성경을 공부하는 목적 가운데 하나는 어떻게 위로를 받으며, 또 어떻게 다른 이들을 위로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를 배우는 것이다. <br/><br/>무엇이 그리스도인에게 위로를 주는가? <br/>첫째,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신다. 성령님께서는 “위로자”시다. 『또 내가 아버지께 기도하겠고, 그분께서 또 다른 위로자를 너희에게 주시리니 그가 너희와 함께 영원히 거하시리라』(요 14:16). 성령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내주하시는 한, 그리스도인은 구속의 날까지 하나님의 위로 가운데 머물러 있게 된다. 사울이 회심하여 교회를 박해하던 일을 멈췄을 때, 교회들은 평안을 누리고 든든히 세워져 갔으며, 주를 두려워함과 성령의 위로 가운데 행하였고 수적으로 성장했다(행 9:31). 성령님께서는 지금도 동일하게 교회와 성도를 위로하기 원하신다. 그리스도인이 성령님을 슬프게 하지 않고 소멸케 하지 않는 가운데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성령의 열매』(갈 5:22)를 맺으며 살아갈 때 그의 삶은 위로로 가득 차게 된다.<br/><br/>둘째, 성경이 인내와 위로와 소망을 준다.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그리스도 예수를 따라서 서로 같은 생각을 갖게 하사 한 생각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길 원하노라』(롬 15:5,6). 성경의 인물들을 보면 그들 모두 시험을 견뎠고, 하나님께서 구해 내셨으며, 그들의 고난과 희생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복을 받았다. 나쁜 상황, 불가능해 보이는 환경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선을 이루셨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인내를 주고 위로와 소망을 준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을 읽는 이유이다. <br/><br/>셋째, 말씀의 선포는 위로가 된다. 『그러나 예언을 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말하며 세워 주고 권면하고 위로하느니라』(고전 14:3). 참된 설교는 성도를 세우는데, 그 안에는 격려와 위로가 포함된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죄를 날카롭고 통렬하게 책망하시고 나서(사 1-39장) 말씀의 궁극적 목적을 이렇게 선언하신다. 『너희는 위로하라. 너희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의 하나님이 말하노라』(사 40:1). “심판”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고, “회개”는 끝이 아니라 회복을 위한 길이며, “말씀”은 언제나 위로이다. “교리”의 목적은 성도를 짓누르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 안으로 이끌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에게 권고하노니』(롬 12:1). 찰스 스펄전은 자신의 설교 노트에 이렇게 썼다 “목회자의 본분은 성도를 영적으로 먹이고 양육하는 것이다. 어떤 설교자들은 ‘믿어라, 믿어라!’라고만 외치나,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양을 먹이지 못한다... 만약 지금 양들(성도들)을 먹이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을 죽이는 일(즉 영적으로 쇠약하게 하는 일)을 한다면 내년에는 새로운 양떼를 어디서 구하겠는가?” 즉 적합하지 않은 책망이나 꾸짖음, 또는 성도가 자라지 못하게 하는 말만 하는 것은 오히려 영적 죽음을 야기하는 일에 가깝다고 했다. 참된 설교는 책망에만 그치지 않고, 지친 혼들을 따듯하게 감싸 안아 위로하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br/><br/>넷째, 신실한 성도들의 교제는 큰 위로가 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의 통로 가운데 하나는 “사람의 방문”이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도 직분을 의심하는 사람들의 공격으로 인해 어려움을 당할 때, 위로로 충만해져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기쁨으로 차고 넘친다고 말할 수 있었던 원인은 “디도의 방문”이었다.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께서 디도를 오게 하심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며』(고후 7:6). 디도는 문제를 들추어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어려움 가운데 있는 동역자를 세워 주고 회복시키는 방문자였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고, 교회는 박해를 받아 내일이 불확실할 때, 투기고는 이 모든 부정적 상황에 대해 소문을 퍼뜨리는 자가 아닌, 진실과 신실함으로 사실을 알려 주어 교회를 위로했다. 『이제 너희는 내가 하고 있는 일과 나에 관한 것을 알게 되리니 사랑하는 형제요, 주 안에서 신실한 일꾼인 투기고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내가 이를 위하여 그를 너희에게 보내노니 너희가 우리에 관한 일을 알게 되고 아울러 그가 너희의 마음을 위로하리라』(엡 6:21,22). 바울에게 있어서는 성도들의 형편을 진심으로 마음에 두는 디모데의 방문 자체가 하나님의 위로였다(빌 2:19). 이뿐만 아니라 유스토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위로가 되었다(골 4:11). 하나님께서는 고난 속에 있는 성도들을 주로 사람들을 통해서 위로하신다. “신실한 성도”는 하나님의 “위로의 도구”이다. 신실한 성도와의 교제는 하나님의 위로가 된다. 성도들이 나누는 교제의 특징은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것이다(히 10:24). 그러므로 우리는 진지하게 질문해야 한다. “나는 누군가에게 위로로 찾아가는 사람인가, 아니면 문제로 다가가는 사람인가?”<br/><br/>무엇보다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큰 위로가 된다. 타락한 인간의 마음은 두려움으로 어둡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크다. 바울은 죽음의 현실 앞에서 슬퍼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 그가 보낸 서신의 목적이라고 말하지 않고, 소망이 없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형제들아, 잠든 자들에 관해서는 너희가 모르게 되는 것을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가 소망이 없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살전 4:13). “슬픔”은 인간적이고, “눈물”은 믿음의 결핍이 아니지만, “절망”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의 정서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깨어날 것을 전제로 하는 “잠”이다. 휴거는 이미 주와 함께 있는 성도가 그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게 되는 날이다. 휴거가 주는 위로는 더 이상 사망이나 슬픔이나 울부짖음, 고통이 없다는 데 있다. 휴거가 이루어지면 더 이상 믿음으로 붙들어야 하는 대상도 없다. 주님과 영원히 함께 있는 일(살전 4:17)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갈망의 종착지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 4:18). “재림”이 주는 구체적인 위로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위로”와 “사랑하는 이와의 사별은 영원한 이별이 아닌 재회의 약속이라는 위로,” “주님과 영원히 함께한다는 위로,” “모든 상처와 눈물이 최종적으로 치유된다는 위로”이다. 성경은 이 땅에서의 시간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궁극적인 위로는 다가올 세상에서 하나님 앞에 서는 날, 그분의 최종적인 평가를 통해 완성된다. 『이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어 의로운 재판관이신 주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내게 주실 것이며 또 나뿐만 아니라 그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이라』(딤후 4:8). 바울의 이 고백은 감옥에서 사형을 앞두고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나온 말인데, 단 하나의 절망적인 표현도 찾아볼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위로할 수 있는 “위로자”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위로로 다른 사람을 위로하라(고후 1:3,4). 마음이 약하여 낙담한 자들을 위로하고(살전 5:14) 서로를 세워 주라(살전 5:11). “그리스도인”은 위로의 능력으로 한 마음이 되어 평안 가운데 살 수 있어야 한다(고후 13:11).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4 Feb 2026 09:37:39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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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기술이 신이 되는 사회 (2) “불사의 몸을 주시옵소서”</title>
<link>https://www.biblemaster.co.kr/bb5/%EA%B8%B0%EC%88%A0%EC%9D%B4-%EC%8B%A0%EC%9D%B4-%EB%90%98%EB%8A%94-%EC%82%AC%ED%9A%8C-2-%EB%B6%88%EC%82%AC%EC%9D%98-%EB%AA%B8%EC%9D%84-%EC%A3%BC%EC%8B%9C%EC%98%B5%EC%86%8C%EC%84%9C/</link>
<description><![CDATA[에덴에 동산을 만드시고 자신의 형상대로 영과 혼과 몸을 지닌 사람을 창조하신(창 2:7, 살전 5:23) 하나님께서는, 그 뒤 사람에게 다산하고 번성하며 땅을 다시 채우고 정복하며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셨다(창 1:28).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분의 명령대로 행하고 영원히 살면서 지구를 가득 채우면, 대기권 밖으로 나가 거주하면서 온 우주를 가득 채우게 하려는 영원한 왕국(사 9:7)의 계획을 갖고 계셨다. 하지만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그 아담을 통해 이루고자 하셨던 계획은 무산되었고, 무엇보다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아담은 930년을 살다 죽었는데(창 5:5), 이후로 태어나는 사람들도 죽게 되어 그 생명의 연수가 계속해서 짧아졌다. 즉 셋(912년), 에노스(905년), 카이난(910년), 마할랄렐(895년), 야렛(962년), 에녹(365세, 에녹은 죽지 않고 하나님께서 데려가셨다), 므두셀라(969년), 라멕(777년), 노아(950년), 셈(600년), 아르박삿(438년), 에벨(464년), 르우(239년), 스룩(230년), 테라(205년), 그리고 아브라함(175년), 이삭(180년), 야곱(147년), 요셉(110년)과 같이 줄어들더니, 이후로 아침 햇빛에 사라지는 안개와도 같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는 짧은 연수를 살게 되었다(약 4:14, 시 90:10).<br/><br/>이처럼 보편적으로 채 100년도 못 살게 된 사람은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범죄한 사람, 곧 당신에게 정하신 법칙이다. 아담의 범죄로 세상에 “죄”가 들어오고, 그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었으니(롬 5:12), 하나님께서는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고, 그 뒤에는 심판이 정해져 있다고 선포하신 것이다(히 9:27). 그럼에도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자신만의 방법을 동원해 “불사”(不死)를 이루려고 노력해 왔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대적하고 거스르는 악한 본성을 드러낸 것이다. B.C. 2000년대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길가메시의 서사시”에는 불멸을 꿈꾸는 길가메시 이야기가 나온다. 인도의 베다 문헌(B.C. 1500)에도 “암리타”라는 불사의 음료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으며, 중국의 진시황이 B.C. 219년경 불로장생(不老長生)을 꿈꾸며 방사(方士, 신선술을 닦는 도사)인 서복에게 명하여 불로초(不老草)를 구해 오라고 했던 이야기는 이미 유명하다. 이처럼 진시황 때부터 시작된 제왕의 불로장생 사상을 중국 전한(前漢)의 제7대 황제인 한무제(漢武帝, B.C. 141-87)가 계승하는데, 한무제는 도교적 요소를 가미한 방술(方術)과 신선(神仙) 사상을 열렬히 신봉하여, 그의 통치 말년에 불로장생의 비법을 안다고 주장하는 방사들을 대거 조정에 등용한다. 이로써 불로장생을 추구하는 일이 국가적 제도 안으로 편입되었는데, 그와 같은 과거의 역사에 영향을 받은 듯 현재의 중국은 바이오기술, AI에 이어 “장수 산업”을 국가의 최우선 과업으로 삼고 수십억 달러를 투자하고 있다. <br/><br/>불로장생과 관련된 항노화 기술은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발전하며 폭발적인 투자를 받고 있다. 예를 들어 “세포 재프로그래밍”(Cellular Re- programming)이라 불리는 항노화 기술은 불로장생에 가장 가까워 보이는 기술로, “야마나카 인자”(OSKM)라는 유전자를 사용하여 노화된 세포를 젊은 상태로 되돌린다. “세놀리틱”(Senolytics)이라는 기술은, 죽지 않고 염증을 유발시키며 주변 세포를 망가뜨리는 노화 세포만을 선별하여 제거하는 기술이다. “mTOR 억제”(라파마이신 계열) 기술은 세포 성장, 증식, 생존 대사를 조절하는 mTOR 신호 전달 경로를 제어하여 세포의 자가포식 활성화를 억제하는 기술이다. 그리고 NAD⁺(미토콘드리아 계열) 기술이 있는데, 이 NAD⁺는 세포 호흡 및 전자전달계에서 필수적인 보조 효소로, 노화에 따라 수치가 감소하여 미토콘드리아 기능 장애를 유발하기 때문에 이를 감소하지 않도록 보충시키는 기술이다. 이러한 기술들이 오늘날 노화 방지 기술로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 <br/><br/>한편 “항노화 산업”에 투자하는 실리콘밸리의 “억만장자들”이 눈에 띈다. 미국의 월스트리트 저널은 지난 25년간 억만장자들이 “장수 산업”에 약 6조 9,400억 원 이상을 투자했다며 실리콘밸리의 거물인 피터 틸(페이팔 공동창업자), 샘 올트먼(OpenAI의 CEO), 유리 밀너(인터넷 투자사인 DST의 CEO), 마크 안드레센(넷스케이프 창업자이자 벤처 투자자) 등이 “장수 산업”에 대규모 자금을 쏟아부은 주역들이라고 보도했다. 이들이 항노화에 집착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공포”와 더불어 죽음을 통제하려는 “통제 욕구” 때문이다. 그들 억만장자들은 돈과 권력 그리고 영향력 등을 모두 가진 사람들로서, 현대 기술을 이용해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해 온 이들이다. 그런데 죽음만큼은 예외였다. “죽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공포심도 문제지만, 그들은 죽음을 일종의 “해결해야 할 버그”로 여기면서 자신의 통제권 안에 두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들이 이제는 죽음도 통제가 가능한 시점이 가까웠다고 주장한다. 즉 기술의 발전 속도가 노화 속도보다 빨라진다는 이른바 “수명탈출속도”(Longevity Escape Velocity)라는 개념을 언급하는데, 마지막 때에 등장한 이 생소한 개념은 &lt;특이점이 온다&gt;라는 책으로 유명해진 “레이 커즈와일”이 제시한 것으로서, 그 시점을 2032년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때가 되면 “건강하게” 10년을 더 살 수 있는 기술이 나올 것이고, 그 기술로 수명을 10년 “연장하게” 되면 그 10년 안에 기술의 발달로 수명 연장을 더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반복되면서 죽음의 문제를 통제할 수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해 세계적인 기술 및 의료 미래학자인<br/><br/>사람들은 불사의 기술이 이미 사람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기정사실처럼 여기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그 기술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로 그 화두를 돌리고 있다. 하지만 현대의 기술은 인간에게 결코 불사의 몸을 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죽지 않는 몸은 죄 문제를 해결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br/><br/>“제이미 메출”은 그의 책 &lt;슈퍼컨버전스, 초융합 시대가 온다&gt;에서 다음처럼 기술했다. “수천 년 동안 다양한 문화권에서는 생명을 창조하고, 연장하고, 재창조하는 능력이 있는 신을 상상해 왔다. 이제는 새로운 기술이 인간에게 이러한 능력을 부여하고 있으며, 우리는 매우 중요한 결정의 갈림길에 섰다. 인류와 다른 많은 생명체의 미래를 좌우할 문제 앞에서 던져야 할 본질적인 질문은 바로 우리가 신과 같은 힘을 현명하게 사용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br/><br/>현대 기술의 발달로 인간은 불로장생의 꿈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인간의 기술은 인간 자신에게 결코 불사의 몸을 줄 수 없다. 왜냐하면 “죽음”이라는 문제의 원인을 잘못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인간이 죽는 직접적인 원인은 세포 손상, 노화, 기능 장애 등이 아니라 인간의 “죄” 때문이다. 인간의 수명이 단축된 이유도 다름 아닌 “죄” 때문이었다. 즉 아담은 범죄한 이후 “생명 나무”에서 나는 열매를 먹을 수도 있었다. 만약 그가 그 열매를 먹었다면 죄로 가득한 몸에 “영생”을 갖게 되어 “영원히 추악한 괴물”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그 점을 미리 내다보시고 아담을 에덴 동산에서 내어 쫓으셨다(창 3:22,23). 그런데 지금의 사람들은 죽음을 불러온 근원적이고 직접적인 원인인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불로장생을 추구함으로써 그와 같이 소름끼치는 괴물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이 알아야 할 것은,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진정한 불멸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생명과 불멸을 밝히신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그것이 드러났으니, 그는 죽음을 폐기하시고 복음을 통하여 생명과 불멸을 밝히셨느니라』(딤후 1:10). 『오직 그분만이 불멸하시며, 어떤 사람도 접근할 수 없는 빛 가운데 거하시며,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는 분이시니, 그분께 영원한 존귀와 능력이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딤전 6:16). 따라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고 영접한다면 불멸이신 그분께서 들어가셔서, 그 죽어 썩을 몸을 그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불사불멸”의 몸으로 변모시켜 주실 것이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의 자녀로 입양하시겠다고 예정하셨을 때 정해졌다(엡 1:5). 이 예정은 칼빈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구원으로의 예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과 일치”하게 하시려는, 곧 우리의 천한 몸을 그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변모시켜 주시려는 예정이며(롬 8:29, 빌 3:21), 그 일은 “휴거” 때 일어날 것이다(고전 15:51-56, 요일 3:2,3).<br/><br/>이제 곧 하나님께서는 재림 이후 수립될 천년왕국을 지나 영원으로 들어가심으로써, 아담이 망쳐 놓은 예전의 계획을 이루실 것이다. 사람들이 생명 나무를 먹고 영생을 얻어 다산하고 번성하여 새 땅을 채우면, 새 우주로 나가 그곳을 영원히 채우게 하실 것이다. 하지만 지금 구원을 받는다면 굳이 생명 나무를 먹을 필요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와 똑같은 불사의 몸을 약속받게 된다. 이 불로불사의 현실은 인간의 기술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을 통해 진정한 현실이 될 수 있다. “혼”은 불멸한다. 만약 하나님의 방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결국 몸이 죽은 뒤 불멸의 “혼”이 지옥에서 영원을 보낼 수밖에 없다. 불확실한 현대 기술에 온 세상보다도 귀한 자신의 혼(마 16:26)을 걸고 도박하지 말라. 그 대신 하나님의 말씀에 확실히 보장된 “영원한 생명”을 지금 당장 붙잡도록 하라! BB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4 Feb 2026 09:35:14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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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소돔”을 “개혁”하려는 헛된 노력을 중단하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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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제22대 국회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재발의되자 교계 안팎에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진정한 평등을 바라며 나쁜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전국 연합”(이하 진평연)을 비롯한 700여 개 단체가 성명서를 발표하고, 손솔 의원(진보당)이 대표 발의한 차별금지법안의 즉각적인 철회를 강력히 촉구했다. 지난 21대 국회에서 임기 만료로 폐기되었던 법안이 유사한 형태로 재발의되자, 교계와 시민단체가 즉각적인 반대 행동에 나선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그와 같은 행위는 타락의 수렁에서 헤어 나올 줄 모르는 세상의 풍조를 순수한 의도로 저지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집단적인 움직임을 “성경”이라는 절대적인 거울에 비추어 냉철하게 판단해야 한다. 동성애의 물결을 막아내려는 움직임은 가상하게 여겨질 수 있지만, “세상의 방법으로, 세상과 연합하여” 세상 법을 막아내는 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맡기신 사명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br/><br/>성경은 동성애에 대해서 단 한 번도 모호한 태도를 취한 적이 없다. 그 죄에 대한 구약의 심판은 명확하다. 『어떤 남자가 여자와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그들은 가증한 짓을 행한 것이니 그들을 반드시 죽일 것이며』(레 20:13). 율법하에서 세워진 신정통치 국가였던 이스라엘에서 동성애는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으며, 아사와 요시야 같은 개혁 군주들은 남색자들을 그 땅에서 물리적으로 쫓아냈다(왕상 15:12, 왕하 23:7).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도 동성애에 대한 심판의 무게는 변함이 없다. 로마서 1장은 동성애를 『본래대로 쓰는 것에서 본성을 거역하는 것』(롬 1:26)이라고 정의하며,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들이 마땅히 죽음에 처해져야 한다는 하나님의 심판』(롬 1:32)을 선언한다. 비록 신약 교회가 그들을 물리적으로 처형할 권한은 없지만, 동성애가 영원한 멸망의 형벌, 곧 지옥에 던져질 죄라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동성애의 본성을 주신 적이 없다. 그것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한 인간이 스스로 선택한 타락의 결과일 뿐이다.<br/><br/>문제는 “동성애”라는 죄에 대처하는 배교한 교회들의 방식이다. 소위 “교회”라는 곳들이 거듭나지 않은 시민 단체들과 연합하여 투쟁하는 것은 그들이 거듭나지 않았고 세상과 동일한 영을 지녔다는 증거이다. 시민 단체들이 동성애를 반대하는 이유는 “성경적 거룩함” 때문이 아니라, “전통적 윤리,” “여성의 안전,” “사회 질서” 등 인본주의적 가치 때문이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다음과 같은 성경의 경고에 귀 기울여야 한다. 『믿지 않는 자들과 멍에를 같이 메지 말라. 의가 불의와 어찌 관계를 맺으며 빛이 어두움과 어찌 사귀겠느냐?』(고후 6:14) 교회가 하나님의 법을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세상 사람들과 손을 잡는 것은 “영적 간음”이다. “롯”이 소돔의 죄악을 막겠다고 “소돔 시민들과 연대”했다면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천사들을 통해 롯의 손을 잡아 이끌어 그 성읍을 빠져 나오게 하시지 않았던가?(창 19:16) <br/><br/><br/>또한 우리는 신약교회사를 통해 교회의 역할을 확인해야 한다. 초대 교회를 비롯한 성경대로 믿는 신약 교회는 결코 물리력을 행사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법안을 통과시키거나, 법적 제도를 통해 교회를 위한 보호막을 치려고 하지 않았다. 신약성경의 그 어떤 장을 넘겨보더라도, 사도들이 지역 시민들과 연합하여 그리스도인에게 유리한 규례를 제정하려고 사회운동을 벌였다는 기록은 없다. 오히려 성경은 일관되게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라.』(롬 13:1, cf. 벧전 2:13)라는 준엄한 명령을 내리고 있다. 이것은 악법에 동조하라는 뜻이 아니며, 교회의 영적 싸움이 세상 법을 바꾸는 정치적이고 물리적인 투쟁이 아니라는 뜻이다(고후 10:3-5). 『악한 사람들과 사기꾼들은 더욱 악해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리라.』(딤후 3:13)라는 말씀처럼, 세상은 더욱 악해져서 “동성애자 적그리스도”(단 11:37)를 그들의 통치자로 받아들일 것이고, 이것은 인간이 결코 막을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이다. 그리스도를 거부한 세상은 적그리스도를 영접할 것이다(요 5:43). 동성애를 인위적으로 막기 위해 교회가 정치적 집단이 되는 순간, 복음의 능력을 상실하고 세상의 조롱거리로 전락할 뿐이다. <br/><br/>오늘날 교계가 차별금지법 저지에 사활을 거는 이면에는 “법적인 보호막이 없으면 설교할 수 없다”는 두려움이 깔려 있다. 그러나 주님의 사도들은 복음 전파가 막힐 때 물리적으로 저항하지 않았고, 기꺼이 감옥행을 택하며 진리를 선포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 역시 우상 숭배를 강요하는 법 앞에서 정치적 타협 대신 “용광로”를 택했다. 그리스도인은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통과되어 설교하다가 감옥에 갈지라도, “동성애는 지옥에 갈 죄”라고 강력하게 외칠 수 있는 담대함이 넘치는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어야 한다. 광장의 함성에 휩쓸려 영적 분별력을 잃지 말라. 세상이 “동성애자들의 소돔”(창 19:5)이 되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때가 다가옴을 알리는 성경적 징조이다. 악한 현 시대를 이기는 힘은 700개 단체의 성명서가 아니라, 세상과 구별된 성도의 “거룩한 삶”과 “타협 없이 선포하는 진리”에 있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4 Feb 2026 09:28:1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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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영성”이란 것은 성경에 없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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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요즈음 신학적 담론에서는 “영성”이라는 키워드가 어딜 가나 빠지지 않는다. 배본철 성결대학교 명예교수는 “영성”에 관한 논의가 “21세기를 맞이한 현대 기독교회와 신학계의 최대 관심사” 가운데 하나라고 이야기했다. 인공지능을 비롯한 기술의 발달로 인해 조성된 위기감은 안 그래도 뜨거웠던 “영성”에 대한 관심에 기름을 부었다. 이것이야말로 기계가 따라할 수 없는 영역이요, 자신들의 “밥그릇”을 지켜 줄 최후의 보루라고 여긴 사역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영성”이라는 주제를 탐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오륜교회를 설립한 김은호 목사는 올해 1월 기독일보와의 대담에서 “어떤 데이터나 누군가의 말을 인용하면, 성도들은 바로 그 자리에서 검색을 해 봅니다. 그래서 정말 깊은 영성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그런 영성이 없으면 목회하기가 더욱 힘들어진 요즘입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br/><br/>신학적, 목회적 고민과는 거리가 먼 교인들도 “영성”에 관심이 있기는 마찬가지다. 목회데이터연구소에서 작년 5월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전체 교인들 가운데 무려 83.9%가 영성 생활에 관심이 있다고 답했다. 교회 출석률이 점점 저조해지는 것과는 대조적인 결과였다. 최근 교인들이 소위 “SBNR”(Spiritual But Not Re- ligious), 곧 “종교적인 열성은 없어도 영적인 것에 대해 관심은 있는” 양상을 보인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데이터이기도 했다. 같은 달 교인들에게 담임목사로부터 가장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을 때는 “충만한 영성”(18%)이라는 응답이 “설교 능력”(13.7%)이라는 응답을 앞지르는 일도 있었다.<br/><br/>지난 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영성” (spirituality)이란 매우 생소한 개념이었다. 이동원 지구촌교회 원로목사는 2014년 미국에서 열린 한 컨퍼런스에서 “최근에 와서 영성에 대한 추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을 새로운 트렌드로 볼 수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영성”은 로마카톨릭이 60년대에 있었던 제2차 바티칸 공회 이후 고안해낸 단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공회를 통해 대대적인 개혁과 “평신도 친화 정책”을 펼쳤다. 그 일환으로 공회에서는 “인간의 존엄성을 증진하고, 인류 공동선을 실현하는” 것을 교회의 사명으로 천명했다. 이에 따라 일상의 삶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이웃 사랑”을 실천한다면, 설령 말씀과 기도를 통해 자신을 훈련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 되었다. 그간 미덕으로 강조되던 “수도원에 틀어박힌 성직자들”의 “경건”이 아닌, “천직에 열중하는 평신도들”의 “거룩함”이 카톨릭교도로서의 삶의 중심으로 제시되는 순간이었다(이들이 말하는 “경건”과 “거룩함”이 성경적인 개념과 괴리가 있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구태여 설명하지는 않겠다). 이러한 일대 전환이 대중들의 호응을 얻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복잡한 규례를 잘 몰라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다 보면 얼마든지 위대해질 수 있다는데, 누가 싫다고 했겠는가? 이처럼 “다양성”을 인정하는 로마카톨릭의 “진보적” 행보는 당대 세계의 정치, 종교계로부터도 박수갈채를 받았다. 사회복음적이고 종교 통합적인 분위기가 팽배해 있던 그 당시 사회는 그런 변화가 퍽 달가웠던 것이다.<br/><br/>공회를 마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카톨릭은 그들의 “새로운 개념”을 설명하려면 “거룩함”이라는 “구시대적 표현”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서인지 “거룩함”을 “영성”이라는 “현대인들의 언어”로 갈음하기 시작했다. 공식 석상에 나타난 교황들은 카톨릭교도들에게 “영성”을 강조하면서, “노동 자체가 영적인 것이다.”라는 둥, “고요한 삶에 영성이 있다.”라는 둥, “테러 발생 지역에서 봉사하는 게 나의 영성이었다.”라는 둥 떠들었다. 그러니 “영성”이라는 말은 비천한 몸을 입고 살아가는 인간의 삶과 인격을 예찬하는, 사람들의 호감을 사기 위해 고안된 단어였던 것이다.<br/><br/>이미 대세가 된 “영성 강조”의 흐름에 각 교단의 신학자들이 하나둘 편승함에 따라, 이제 “영성”은 신학교에서 “영성학”이라는 과목을 개설해서 가르칠 만큼 신학의 큰 줄기가 되었다. 당연하게도 “영성”은 그에 걸맞은 “세련된” 정의도 갖게 되었는데, “영성학”의 세계적 권위자인 산타클라라대학교의 예수회 신학교 명예교수 산드라 M. 슈나이더스는 “영성”을 이렇게 정의한다. “인간 주체에 속한 하나의 요소로, 인간은 그 능력을 통해 절대자와의 관계에 있어 스스로를 초월하는 통합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니까 현대에 신학적으로 논의되는 “영성”이란 인간의 잠재력을 개발하면 신과 같은 초월적 존재가 될 수 있다고 하는 신비종교나 영지주의 따위와 그 궤를 같이하는 개념인 것이다. 물론 교인들은 이렇게까지 고민해 보지는 않았을 테고, 그저 하나님과 가까워짐으로써 얻게 되는 초자연적 직관(?)이나 하나님께로부터 우대받는(?) 정도, 혹은 고상한 인품 같은 것을 “영성”이라고 여기는 듯하지만 말이다.<br/><br/>문제의 핵심을 말하자면, 성경에 “영성”이란 것은 없다. 단순히 성경에 나오지 않는 표현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비성경적인 개념이라는 뜻이다. “4차원의 영성”이니, “영성 학교”니, “영성 목회”니 하는 말들이 제아무리 제도화된 교계에서 통용된다고 해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성경 어디에 구도(求道)의 자세로 자신의 인생에 충실하면 그분과의 관계가 깊어진다는 말씀이 있던가?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일한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한, “영성”이 있었던 한 농부를 박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성”에 대해서 “악하다”고 평하기까지 하셨다(요일 3:12). 우리는 그가 누군지 안다. 바로 의로웠던 동생 아벨을 죽인 살인자 “카인”이다.<br/><br/>“영성학”은 그 대전제, 곧 우리 “인간 주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능케 한다는 것부터가 잘못되었다. 우리의 주체인 “혼”에는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기능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혼”이 아직 “사망”한 상태가 아님에도(계 21:8)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저마다의 미신에 빠져 살아가기 일쑤다(행 17:22,23).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을 알려면 “사망”한 상태에 있는 “영”이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엡 2:1-7). 그러면 성령님께서 그 거듭난 영과 하나가 되셔서 그 사람에게 주 하나님을 계시하시고, 그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도와주기도 하신다. 자학(왕상 18:28), 금욕(골 2:21-23), 외모(삼상 16:7), 자기기만(갈 6:3, 요일 1:8) 등으로 “우회로”를 찾아내려고 발버둥을 쳐봤자, 이 시대에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외에 존재하지 않는다.<br/><br/>혹자는 “영성”이란 “거룩함”이나 “경건”과 같은, 영적인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요소들과 비슷한 것인데 왜 문제가 되느냐며 의아해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어휘들을 무분별하게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하다가는 사탄의 계략에 걸려들기 십상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비슷하지만 다른 것”을 제시하여 혼란을 조장하는 것이야말로 사탄의 전매특허다(고후 11:13-15). <br/><br/>“영성”과 “거룩함, 경건”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결정적 간극이 있다. 바로 “영성”은 “개인”에게 속한다는 것이다. “영성”을 운운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어떤 개인의 삶, 경험, 노력, 혹은 그 사람 자체와 같은 것들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소위 “뛰어난 영성”의 소유자라고 불리는 사람들끼리도 그 “영성”을 나타내는 양상은 천차만별이다. 어떤 이들은 배를 곯아가며 남들을 도운 일로, 어떤 이들은 강단에서 발휘하는 번뜩이는 재치로, 심지어 어떤 이들은 타인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것으로 그 “영성”을 높이 평가받는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영성”이란 영적인 사람만이 소유한 무엇인가라기보다 사실상 “업적”이나 “장점” 혹은 “자아” 따위와 훨씬 가깝다. 그러니 혹자의 “영성”을 칭송하거나 인간 자신의 “영성”을 개발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인간을 높이는 가증한 짓이 된다.<br/><br/>반면 “거룩함”과 “경건”은 철저히 “하나님”께 속한다. 우리의 “거룩함”의 출처는 어디인가?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체이시다(고전 1:30). 그렇다면 “경건”의 출처는 어디인가? 그 의미 자체가 “하나님 같음”(godliness)인 데서도 알 수 있거니와 그 출처 역시 “하나님”이시다(벧후 1:3). 그래서 “자기 부인” 없이는 어떤 사람도 “거룩”할 수 없고, “경건”에 이를 수 없다. 애당초 우리 안에는 그런 선한 것이 있지도 않다(롬 7:18). 그것들은 모두 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들이기에, 누구에게서나 동일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즉 “거룩한 사람,” “경건한 사람”은 하나같이 성경이 죄라고 말씀하시는 것들을 멀리하고 또 미워하는 것이다.<br/><br/>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는 시대요, 가려운 귀를 즐겁게 해 주는 아첨꾼들의 시대에(딤후 4:3) “영성”이 주목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말씀을 따라 옳고 그름에 대한 객관적 판별을 추구하는 일보다, 느낌을 따라 “영성”에 대한 주관적 체험을 추구하는 일이 훨씬 인기가 있을 수밖에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자기 눈에 옳은 대로”(판 21:25) 성경에도 없는 영성을 추구하는 자들의 영적 상태에 무슨 개선이 있을 리는 만무하다. 정말로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 싶다면 그분께서 정하신 방법대로 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친구라면 모름지기 “나의 아버지께로부터 들은 모든 것들”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던가?(요 15:15)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을 읽도록 하라. 하나님과 가까워졌다는 “느낌”을 좇을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정말로 그분께 밀착하도록 하라!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4 Feb 2026 09:25:43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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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진화론”으로 침투하는 사탄의 계략</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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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지난 2월 12일은 “다윈의 날”(Darwin Day)이었다. 진화론자들은 &lt;종의 기원&gt;(1859)을 출간함으로써 창조론을 공격할 획기적인 기틀을 마련한 찰스 로버트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1882)을 추앙하며 그의 생일을 기념일로 삼고, 진화론과 관련된 행사를 진행해 오고 있다. 진화론자들은 다윈의 생일을 “다윈의 날”로 제정한 것과 함께 &lt;종의 기원&gt; 출간일인 11월 24일을 “진화의 날”로 정해 기념한다. 다른 과학자들에 비해 다윈을 특히 기념하고자 하는 데는 하나님께 도전하고 승리한 듯한 착각을 줌으로써, 인류에게 죽음과 지옥의 심판에 관한 현실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사탄의 계략이 숨어 있다. 다윈이 &lt;종의 기원&gt;(1859)을 출간한 지 167년이 지나는 동안 많은 진화론자들이 진화를 믿고 증명하려고 노력했으나, 그들의 노력을 보상해 줄 만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 진화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화석이나 관련 연구들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만 드러났을 뿐인데도 그들은 여전히 착각 속에 있다. 정직한 과학자들은 우주가 빅뱅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빅뱅 우주론”이나 유기물 원시 수프가 자외선을 받아 생명체로 변화되었다고 주장하는 “원시 수프 이론”이 확정된 과학 법칙에 역행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지만, 진화론자들은 하나님을 부인하기 위해 추측에 불과한 진화론을 여전히 부여잡고 있는 것이다. <br/><br/>우리나라는 “발명학회”가 일제강점기였던 1934년에 당시 세계 최고 과학자로 여겨지던 다윈의 기일(忌日)인 4월 19일을 “과학 데이”로 지정하고 과학기술 보급 행사를 개최하였는데, 이것이 “과학의 날”의 시초였다. <br/>“과학 데이”는 일제의 탄압으로 계속되지 못하였고, 대한민국 정부가 1967년 4월 21일에 과학기술처를 발족한 것을 기념하여 매년 4월 21일을 “과학의 날”로 정하면서 새로 시작되었다. “과학의 날”이 4월에 있기에 자연스럽게 4월이 “과학의 달”로 불리게 되었으며, 다양한 과학 행사들이 4월에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현재 진화론은 과학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에 항상 과학 행사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국립과천과학관”의 행사만 보더라도 “자연사관 탐구교실”에서 “진화와 핀치새”라는 주제로 전시 연계 체험교실 등을 운영한다. 핀치새는 갈라파고스 제도에 서식하는 조류로 각기 다른 먹이 환경에 적응하려고 서로 다른 부리 모양으로 진화한 사례로서 인용된다. 대중에게는 다윈의 자연선택설과 적자생존 이론에 결정적인 영감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먹이 종류와 부리 모양 사이의 필연성이 결여되어 있는데도 여전히 사실인 것처럼 잘못 교육되고 있다.<br/><br/>진화론을 확실히 지지할 만한 과학적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진화론이 확정된 과학 법칙에 역행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은 어떻게 해서 과학 교과서를 장악했고, 과학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제시되고 있는가? 어째서 각 국가의 교과서와 과학 행사에 진화론이 항상 포함되고 권장되는 것인가? 그것은 20세기에서 21세기에 걸쳐 전 세계 학문의 종주국으로서 자리 잡은 미국에서 사탄이 진화론에 관한 교육 정책과 교육법을 장악해 버렸기 때문이다. 사탄이 미국 교육계를 장악하는 데 이용한 진화론 관련 중요 재판이 세 차례 있었는데, 그것을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br/><br/>사탄의 첫 번째 전략은 학교 교육에 진화론을 침투시키는 것이었으며, 그 첫 걸음이 “버틀러법”에 대한 도전이었다. 1925년 테네시주는 “버틀러법”을 제정하여 공립학교에서 창조론만 가르칠 것을 법적으로 규정하고,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자 사탄은 “미국시민자유연맹”을 이용했다. 그들은 버틀러법이 헌법 위반이라는 주장을 하기 위해 일부러 “버틀러법”을 위반하는 사건을 만들었다. 즉 교사인 존 T. 스콥스가 고등학교에서 다윈의 진화론을 가르쳤다며 자기 자신을 고소함으로써 재판이 열리게 만든 것이다. “테네시주 대 스콥스 재판”이라 불린 이 재판에서 스콥스는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1927년 테네시주 대법원은 이 사건을 절차상의 이유로 기각했다. 사탄은 이 재판을 이용해 “진화론”을 “교육”이 아닌 “법”의 문제로 만들었다. 이후 40년이 지난 1967년에 버틀러법은 폐지되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미 사탄은 미국 공립학교에서 하나님과 성경을 몰아내고 있었다. 버틀러법 폐지 전인 1962년에 “엥겔 대 비탈레 재판”에서 “공식적인 기도”를 공립학교에서 금지하는 판결이 내려졌고, 1963년 “애빙턴 교육구 대 솀프 재판”에서 “성경 읽기”를 공립학교에서 금지하는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후 1980년에는 “스톤 대 그레이엄 재판”에서 “십계명 게시”를 공립학교에서 금지하는 판결이 내려졌다.<br/><br/>사탄의 두 번째 전략은 창조론과 진화론의 균형을 깨는 것이었다. 1981년 루이지애나주에서 “창조 과학과 진화 과학의 균형적 처우법”(약칭 “창조론 균형법”)이 통과되었다. 이 법은 공립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칠 경우, 반드시 창조론도 함께 가르쳐야 한다고 규정하는 법이다. 1987년 루이지애나주의 공립학교 생물학 교사였던 아귈라드는 이 법이 헌법에 위배된다며 소송을 제기했고, 당시 루이지애나 주지사 에드워즈가 소송을 방어하여 “에드워즈 대 아귈라드 재판”으로 불렸다. 결국 대법원에서는 “창조론 균형법”이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br/><br/>사탄의 세 번째 전략은 창조론을 공립학교들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것이었다. 2004년 펜실베이니아주 도버 교육위원회는 생물학 수업에서 진화론을 가르칠 때 “지적 설계”도 함께 소개해야 한다는 과학 정책을 제정했다. “지적 설계”란 “우주가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고도의 지적 수준을 가진 존재에 의해 설계되었다는 이론”이다. 도버 교육위원회는 학생들에게 진화론이 과학 법칙에 역행한다는 글을 읽게 하고, 진화론의 대안으로 “지적 설계”를 설명하는 책 &lt;판다와 인간&gt;을 읽도록 권유했다. 이에 사탄은 일부 학부모들로 하여금 “미국시민자유연맹”과 함께 소송을 제기하도록 만들었으며, 소송 원고 중 한 명이었던 키츠밀러의 이름을 따서 “키츠밀러 대 도버 재판”이라 불리게 되었다. 연방 법원은 “지적 설계”를 창조론의 변형으로 보고, 공립학교에서 “지적 설계”를 가르치지 못하도록 판결했다. 이렇게 사탄은 100년도 되지 않아 미국 교육 정책과 교육법에서 창조론을 완전히 몰아내고, 진화론을 유일한 과학으로 가르치게 만들었다. <br/><br/>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심판 사건의 결정문 중 보충의견에서 개역성경의 아모스 5:24인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찌로다.」를 인용했던 안창호 헌법재판관이 국가인권위원장 후보자로 대기 중이던 2024년 9월 1일, 그가 국회 인사청문회를 이틀 앞두고 “교육과정에서 진화론을 가르친다면 창조론도 가르쳐야 한다.”라고 한 말이 기사화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그는 정부를 대표하여 말한 것이 아니고, 단지 한 개인으로서의 의견을 제시했을 뿐이다. 우리 정부는 어떤 식으로든 창조론에 자리를 내준 적이 없다.<br/><br/>사탄의 계략에 의해 미국의 과학 교육이 무너진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나라의 상황은 더욱 열악하다. 애초에 성경적 배경이 없던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진화론을 과학으로 받아들여 가르쳐 왔기 때문에 창조론이 개입될 여지가 없었고, 공립학교들뿐만 아니라 기독교 재단에서 설립된 사립학교들도 대학 입시 등을 이유로 학교 교육 과정에서 진화론을 배제하지 못했다. <br/><br/>그러나 그리스도인 학부모들은 우리 믿음의 자녀들을 세상의 인본주의 교육과 진화론 속에 방치하지 말고, 바른 성경과 과학 지식으로 “빅뱅 우주론”이나 “원시 수프 이론”의 허구를 올바로 설명하고 “성경의 창조론”을 올바로 가르치는 학교에서 양육받도록 건전한 교육 환경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br/><br/>미국 공교육을 진화론으로 장악한 과정에서 본 바와 같이, 사탄은 작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거점을 마련하고, 조금씩 영향력을 확보하며 기회를 엿보다가, 끝내는 전부를 집어삼켜 버리는 전략을 구사한다. “진화론”과 “공산주의”는 사탄의 작품이기에, 중국 공산화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공산주의자 마오쩌둥은 “국공합작”을 이용해 중국 전체를 공산화했다. 중국 “국민당”(장제스)과 중국 “공산당”(마오쩌둥)이 공동의 적인 일본군을 막기 위해 일시적으로 손을 잡았으나, 그 일이 계기가 되어 공산당이 세력을 확장하여 민심을 얻었고, 결국 중일전쟁이 끝난 뒤에 벌어진 중국 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함으로 중국 전체를 장악했던 것이다. “점진적 잠식”이 바로 사탄의 수법이다. 그는 국가라는 거대한 조직뿐만 아니라, 한 개인을 무너뜨릴 때도 동일한 공식을 사용한다. 작은 방심을 틈타 거점을 확보하고, 눈치 채지 못할 속도로 영역을 잠식하여, 결국 삶 전체를 파멸로 몰아넣는다. 우리는 진화론을 통해 미국 교육의 근간을 뒤흔든 사탄의 전략을 거울삼아야 한다. 그에게 어떠한 틈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우리 자신과 자녀들을 온전히 지키는 영적 파수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7). 『사탄이 우리에게서 유익을 취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략을 모르지 않음이라』(고후 2:11).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3 Feb 2026 18:02:5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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