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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말씀보존학회 - 한글킹제임스성경 및 진리의 지식을 전파합니다 &amp;gt; 바이블마스터 &amp;gt; 지식뱅크 - 한국 교계 비평</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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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테스트 버전 0.2 (2004-04-26)</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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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반드시 내가 속히 오리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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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성경은 예언의 책이다. 예언은 단순히 미래를 내다보는 인간적 예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신 성품이 담긴 절대적인 약속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거룩하신 본성상 결코 거짓말하실 수 없으며(민 23:19), 그렇기에 그분의 예언은 인류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 그 자체가 된다. 말하자면 성경은 “미리 기록된 역사책”인 것이다. 미래에 대한 인간의 예측은 환경이 조금만 바뀌어도 빗나가 버리지만, 성경의 예언은 하나님의 불변하심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결코 무효화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한 번 내뱉으신 예언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되고 마는데, 이는 그것이 하나님의 변치 않는 뜻이자, 그분의 온전하신 성품에서 나온 거룩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br/><br/>성경은 약속이 있는 예언의 책답게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요한계시록 22장”에 주님께서 속히 오시겠다는 약속이 세 번이나 언급되어 있다(계 22:7,12,20). 그중 첫 번째로 하신 말씀은, 『보라, 내가 속히 오리라. 이 책의 예언의 말씀들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도다.』(계 22:7)이다. 여기서 언급된 『이 책』은 일차적으로 “요한계시록”을 뜻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66권 전체를 의미한다. 이는 성경의 모든 기록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유기적으로 연결된 예언 체계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바로 그 말씀들을 믿고 신실하게 지켜야 한다. <br/><br/>성경의 “예언”은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를 넘어, 우주의 역사를 관통하여 이루실 일들을 미리 말씀하고 기록하신 것이다. 그것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미리 보여 주신 “인생의 지도”이자 “확실한 약속”이다. 실제로 성경에는 약 800여 개의 예언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중 예수님의 탄생과 고난, 죽음과 부활에 관한 300여 개의 예언은 이미 역사 속에서 단 하나도 빠짐없이 정확하게 이루어졌다. 지나온 모든 예언이 일점일획의 오차도 없이 성취되었다면, 아직 우리 앞에 남아 있는 500여 개의 재림과 관련된 예언도 반드시 실현될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그 말씀들을 소망하고 지키면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자신의 생애를 일치시키며 사는 성도가 인생을 가장 현명하게 사는 것이다.<br/><br/>요한계시록 22장에서 주님의 재림을 약속한 두 번째 말씀은,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행위에 따라 주리라.』(계 22:12)이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심판석』(고후 5:10)을 기다리는 교회 시대의 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대환란 시대의 환란 성도들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이다. 주님께서 오시는 이유 중 하나는 각 시대 성도들의 행한 것들에 대한 보상으로 상을 주시기 위함인 것이다. <br/><br/>그러나 상은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경기장에서 달리는 사람들이 모두 달릴지라도 한 사람만이 상을 받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너희도 상을 얻게 되도록 달리라.』(고전 9:24)라고 말씀한다. 상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상을 얻기 위해 달린” 사람이지, 달리지도 않았는데 상을 주시지는 않는다. 한 가지 매우 이상한 일은, 성경에 상을 주시겠다는 말씀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주실 상에 대해 무감각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예 구원받지 못했을 수도 있고, 구원받았음에도 마귀에게 점유당하여 성경의 진리에 무관심한 것일 수도 있다. <br/><br/>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상을 받기 위해 달려야 하고, 누구나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서야 한다. 이 심판석에서의 심판은 불로 태우는 것으로 이루어지는데, 그때 불타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일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일한 것”은 그것이 어떤 종류이든지 불로 태워질 것이고, 불로 태워 봤을 때 『만일 어떤 사람의 일한 것이 세운 그대로 있으면 그는 상을 받을 것이』다(고전 3:14). 구원받았음에도 자기 멋대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휴거되어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서게 될 사람은 주님의 강한 책망을 면치 못할 것이다. 또한 주님께서는 불꽃 같은 눈으로 성도를 바라보시며 그가 행한 일들의 질과 동기를 심판하실 것인데, 주님을 사랑하기에 섬기지 않고 자기를 드러내려고 섬겼거나 육신적인 방법으로 행한 사람은 그 일한 것이 불타 버려서 손해를 당하게 될 것이다(고전 3:15). <br/>주님께서 오시면 약속하신 대로 그리스도인 각 사람에게 그의 행위에 따라 상을 주실 것이다.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주시는 상은 상징적인 것이 아니다. 영적인 것도 아니고 은유적인 것도 아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상은 실제적이며 영광스럽고 고귀한 영예가 영원히 지속되는 상이다. 그 상은 주님의 약속을 믿고 끝까지 신실하게 달리는 성도만이 받을 수 있다. <br/><br/>요한계시록 22장에서 주님의 재림을 약속한 세 번째 말씀은, 『이런 일들을 증거하신 분이 말씀하시기를 “반드시 내가 속히 오리라.” 하시니라. 아멘. 그러하옵니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이다. 여기서 『반드시 내가 속히 오리라.』라는 약속은 주님께서 성경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며, 이는 또한 왕국의 도래를 예고한 것이다.<br/>성경의 주제는 왕국이며, 그 초점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분의 지상 왕국에 맞춰져 있다. 주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재림하시어 만왕의 왕으로서 통치하실 것이다. 『자기 때가 되면 주께서 나타나시리니 그분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통치자시요,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라』(딤전 6:15). 주님께서는 “반드시 내가 속히 오리라.”라고 약속하신 대로 이제 곧 재림하셔서 쓸모없는 것들을 심판하시고 전 세계의 수도인 예루살렘에서 다윗의 보좌에 앉으시어 천년왕국 정부를 기반으로 하여 철장으로 통치하실 것이다. <br/><br/>(하나님께서는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시다(민 23:19). 위대하신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분께서 말씀하신 것을 속히 이루시기 위해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다.<br/>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다시 오신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들이 재림을 믿지 않으며, 거들떠보지도 않는 현실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들은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 세상에 평화를 이루려 하지만, “화평의 통치자”이신 주님 없이는 평화가 없다. 만왕의 왕이신 주님만이 폭력과 전쟁이 가득한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오실 유일한 분이시다.)<br/><br/>그러나 교회에 다닌다는 수많은 사람들이 재림에 관한 주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심지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하나님을 아예 믿지 않거나,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재림을 믿지 않는다면 당연하게 받아들이겠지만, 소위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이, 자신도 교회에 다니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자처하면서도 주님께서 하신 마지막 약속을 믿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는다는 것은 결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지혜와 능력으로 이 세상에 평화를 이룩하겠다고 난리이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없이는 평화가 없다는 것을 알라.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화평의 통치자』(사 9:6)이시기 때문이다. 폭력과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이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실 분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통치자시요,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딤전 6:15)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인 것이다.<br/><br/>주님께서는 『나를 거절하고 내 말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말한 그 말이 그를 마지막 날에 심판하리라.』(요 12:48)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를 거부하고 그분의 재림을 믿지 않는 자들은 주님의 말씀에 의해 심판받게 될 것이다(계 20:12).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멸시하고 성도들이 품고 있는 재림의 소망을 비웃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진리의 빛을 거부하고 계속 어둠 속에 머물러 있다면, 결국 성취될 예언의 말씀 앞에 스스로 심판의 근거를 쌓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br/><br/>그리스도인은 재림에 대한 약속을 믿고 『아멘. 그러하옵니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라고 화답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성도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모두와 함께 있을지어다.』(계 22:21)와 같은 축복의 말씀이 주어진다. 주님의 은혜가 재림에 관한 예언을 믿고 그 예언이 성취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성도에게 풍성하게 임하는 것이다.<br/><br/>구원받은 성도가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잘하는 일이고, 그 예언의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의 심판석을 대비하는 것은 더욱 잘하는 일이다. 예언에 따라 그리스도의 심판석을 대비하려면 이 마지막 때를 정신을 바짝 차리고 보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들을 붙들고 하루하루를 주님과 동행하는 성도에게는, 다시 오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이 두려움이 아닌 가장 큰 위로와 기쁨이 될 것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4 Mar 2026 18:02:0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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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성경의 눈으로 읽는 “이란의 최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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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성경을 공부하다 보면 “메데-페르시아”라는 표현을 접하게 된다. 독자는 인류 역사에 등장한 특정 국가의 이름을 그렇게 부르는 이유를 알고 있는가? “메데”는 무엇이고, “페르시아”는 무엇인가? 왜 둘을 합쳐서 부르는 것인가? <br/>“메데”(메디아)와 “페르시아”는 고대 근동의 패권을 다투며 현대 이란의 기틀을 마련한 두 핵심 세력이었다. “메데인”은 이란 고원에 정착한 인도-유럽어족 계열의 부족들로서, 당시 서아시아의 맹주였던 앗시리아에 대항하며 세력을 키웠다. B.C. 7세기경 데이오케스에 의해 부족들이 통합되고, 수도 엑바타나[『악메다』(스 6:2), 이란의 “하마단”]를 중심으로 왕국이 형성되었다. “메데”의 키악사레스왕은 신바빌로니아와 동맹을 맺고 B.C. 612년에 앗시리아의 수도인 니느웨를 함락함으로써 아시아의 강자로 급부상했다. “메데”는 당시 “페르시아 부족들”을 “속국”으로 거느릴 만큼 강력했으나, 체계적인 중앙집권 체제보다는 부족 연맹체 성격이 강했다.<br/><br/>“페르시아”는 원래 메데 남동쪽의 “안샨”이라는 작은 지역을 다스리던 부족 중 하나였다.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가문의 코레스 2세(코레스 대왕)는 메데의 마지막 왕 아스티아게스의 외손자였으나, B.C. 550년에 외조부를 꺾고 메데를 흡수했다. 코레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리디아(소아시아)와 신바빌로니아를 차례로 정복하며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를 건설했다. 이 코레스가 바로 바빌론의 유대인들을 해방시켜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낸 그 왕이다(대하 36:22,23, 스 1:1,2).<br/><br/>“메데-페르시아”라는 명칭은 두 나라가 단순한 정복 관계를 넘어, 하나의 제국 안에서 결합된 이중적인 구조를 지녔기에 붙여진 것이다. 즉 페르시아의 건국자 코레스왕은 그의 어머니(만다네)가 메데의 마지막 왕인 아스티아게스의 딸이었다. 코레스가 메데를 정복한 일은 단순한 타국의 침략이 아니라, (직계 혈통이 아닌) 방계 왕족이 본가의 왕위를 찬탈하거나 계승한 형태에 가까웠던 것이다. 이로 인해 메데인들은 페르시아의 지배를 비교적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페르시아는 메데를 정복한 후 메데를 피지배층으로 전락시키지 않고 제국의 제2인자로 대우했다. 제국의 고위 관료나 군대 지휘관 자리에 페르시아인뿐 아니라 메데인들도 대거 기용했으며, 메데의 수도였던 엑바타나를 페르시아 제국의 “여름 수도”로 사용했다. 성경은 바빌론을 멸망시킨 이들을 메데와 페르시아의 연합 세력으로 묘사하며(『페레스는 왕의 왕국[바빌론]이 나뉘어서 메데인들과 페르시아인들에게 주어진다 함이니이다』 - 단 5:28), 두 나라의 법도를 『메데인과 페르시아인의 법』(단 6:8)이라고 표현한다. “메데-페르시아”라는 명칭은, 비록 페르시아가 메데를 정복했어도 그 시스템과 인력을 그대로 흡수하여 “메데의 유산을 이어받은 페르시아 제국”의 형태를 띠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 것이다.<br/><br/>성경에는 이 “메데-페르시아” 제국에서 유대인과 관련하여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 아래서 페르시아 왕들의 칙령을 통해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일을 다룬다. 코레스왕은 바빌론을 정복한 후 유대인들에게 “귀환 명령”을 내렸고(스 1장), 다리오왕은 “성전 완공”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며(스 6장), 아탁세르세스왕은 서기관 에스라와 총독 느헤미야를 예루살렘으로 보내어 “성벽”을 재건하게 했다(스 7장, 느 2장). 두 책 뒤에 위치한 “에스더서”는 페르시아 왕궁[『수산궁』(에 1:2)]에서 일어난 일을 다루는데, 유대인들을 멸절시키려는 하만의 계략이 페르시아의 강력한 군주인 아하수에로왕의 왕비가 된 에스더를 통해서 무산된다. <br/><br/>오늘날 “이란”은 스스로를 “페르시아의 후예”로 여기며, 그 역사적 자부심이 국가적 정체성의 핵심을 이룬다. “이란”이라는 국가의 “뿌리”가 바로 “페르시아”라는 것이다. 성경은 “제국들의 역사”와 관련하여 “페르시아”에 중요한 위치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의 후예”이자 “이스라엘의 숙적”인 “이란”이 미래에 맞이할 “최후”를 계시한다. “선지자 다니엘”은 바빌론 시대부터 페르시아 시대까지 생존했던 인물로서, 환상을 통해 페르시아 제국의 등장과 패망을 예언했다. “다니엘서”는 이방 왕국들의 개요로부터 시작하여 그 세부적인 예언들을 계시해 나가는데, 거기에 “페르시아”가 수차례 언급된다.<br/><br/>1 다니엘 2장의 “느부캇넷살의 꿈”: 다니엘 2장은 느부캇넷살이 꿈에 본 형상을 통해 이방 왕국의 역사를 계시한다. 형상은 금으로 된 “머리,” 은으로 된 “가슴과 양팔,” 놋으로 된 “배와 넓적다리,” 철로 된 “다리,” 철과 진흙으로 된 “발과 열 발가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금 머리는 “바빌론,” 은 가슴은 “메데-페르시아,” 놋 배는 “그리스,” 철 다리는 “로마 제국,” 철과 진흙이 섞인 “발과 열 발가락”은 “적그리스도의 왕국”을 가리킨다. “하나의 가슴”에서 나온 “양팔”과 같은 “메데-페르시아”는 금 머리인 “바빌론”에 이어 두 번째 왕국으로 계시되며, “금”보다 비중이 낮은 “은”으로 상징되기에 “바빌론보다 못한 다른 왕국”(단 2:39)으로 해석된다.<br/><br/>2 다니엘 7장의 “네 짐승의 환상”: 다니엘 7장부터는 다니엘이 직접 본 환상이 언급된다. 즉 “네 짐승”을 통해 “네 왕국”을 계시하는데, “큰 바다”(지중해)에서 출현한(2,3절) 짐승들은 모두 “지중해”와 연관된 왕국들이다. 첫째 짐승은 사자와 같고(4절), 둘째 짐승은 곰(5절), 셋째 짐승은 표범(6절), 넷째 짐승은 “두렵고 무서우며 힘이 매우 세고, 철로 된 큰 이빨을 가진 짐승”이다(7절). 이 짐승들은 다니엘 2장의 형상에 나타난 왕국들과 연결되는데, 이 환상이 바빌론의 마지막 왕인 “벨사살왕”의 “원년”에 주어졌고(1절), 앞으로 『땅에서 일어날』(17절) 네 왕국이기 때문에 “바빌론”은 환상의 해석에서 제외된다. 따라서 네 짐승들은 다니엘 2장의 형상에서 “은 가슴”부터 시작되며, 그렇기에 “사자”는 “메데-페르시아,” “곰”은 “그리스,” “표범”은 “로마 제국,” “두렵고 무서운 짐승”은 “적그리스도의 왕국”에 적용된다. <br/><br/>다니엘 7장의 환상이 주어진 목적은 “적그리스도의 왕국”을 계시하는 데 있다. “적그리스도”는 표범과 같고, 발은 곰의 발, 입은 사자의 입 같기에(계 13:2) “표범”과 “곰”과 “사자”가 “복합된 짐승”이다. 이 “세 짐승”이 다니엘 7장의 “네 짐승의 환상”에서도 나타나는 것은, 그 네 번째 짐승이 상징하는 “적그리스도의 왕국”이 “메데-페르시아”(사자)와 “그리스”(곰)와 “로마 제국”(표범)을 복합시켜 놓은 것과 같은 힘을 지닌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의 관심사인 “메데-페르시아”와 관련하여 본다면, “적그리스도의 왕국”은 “사자”인 “메데-페르시아”처럼 온 세상을 집어삼켜 버릴 것이다. 앞선 “바빌론” 제국은 전성기 때의 영토가 그리 넓지 않았기 때문에 온 세상을 집어삼켰다고 볼 수 없다. “바빌론”은 앗시리아의 영토보다도 작았고, 바빌론 당대에도 동쪽과 북쪽에는 “메데 제국”이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후 “메데-페르시아”로 통합된 이 제국은 동쪽으로는 인더스강까지 진출했고, 북쪽의 아르메니아 지방과 서쪽의 소아시아를 삼키고, 그리스 본토까지 침략했기 때문에 “사자”처럼 온 세상을 삼켰다고 할 만하다. 이 “메데-페르시아”의 속성을 지닌 “적그리스도의 왕국” 또한 세상을 닥치는 대로 집어삼킬 것이다(계 6:2).<br/><br/>3 다니엘 8장의 “숫양과 숫염소의 환상”: 선지자 다니엘은 바빌론의 마지막 왕인 벨사살 치리 제삼년에, 바빌론 이후 “숫양”(메데-페르시아)이 등장하여 세력을 확장하는 환상을 보았다(단 8:1-4). 다니엘이 본 “두 뿔 가진 숫양”은 “메데-페르시아”를 상징하며, 나중에 나온 뿔이 더 길다는(단 8:3) 것은 “메데”보다 늦게 일어난 “페르시아”(코레스)가 더 강력해질 것을 의미한다. “숫양”이 “서쪽과 북쪽과 남쪽을 향하여 밀어붙여도” 막을 자가 없다는 점(단 8:4)은 “메데-페르시아”가 펼친 정복 활동의 엄청난 규모를 보여 준다. 그러나 이 “숫양”은 뒤에 등장한 “숫염소”의 강력한 공격을 받고 꺾이고 마는데(단 8:6,7), 이는 “페르시아”를 파죽지세로 공격하는 “그리스” 알렉산더 대왕의 막강한 위세를 예언한 것이다(단 8:20,21).<br/><br/>4 다니엘 10장의 “페르시아 왕국의 통치자”: 다니엘 10:13에는 『페르시아 왕국의 통치자가 이십일 일 동안 나를 가로막았도다.』라는 말씀이 있다. 주님께서 다니엘의 기도에 응답하려고 오실 때 『페르시아 왕국의 통치자』라 불리는 하늘의 영적 존재에게 방해를 받으신 것이다. 결국 “페르시아”를 통치하는 마귀의 방해를 “이스라엘의 위대한 통치자인 미카엘”(단 12:1)의 도움을 받아 물리치고 다니엘에게 오셨는데, 다니엘에게 계시를 마치신 주님은 그 『페르시아의 통치자』와 싸우려고 다시 돌아가셨다(단 10:20). 이 점은 “이스라엘”과 “페르시아”(이란)의 싸움이 단순한 지상전이 아닌,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서 주님과 마귀 사이에 일어나는 전쟁임을 시사한다. <br/><br/>이제 위와 같은 “페르시아,” 곧 “이란”의 “최후”를 이야기할 차례이다. 현재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있는 “이란”은 장차 어떤 최후를 맞이할 것인가? 에스겔 38장에 보면 “천년왕국 끝”에 『메섹과 투발의 최고 통치자 곡』(3절)이 동맹군을 이끌고서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내용이 나오며, 이 동맹군 가운데 “페르시아”가 끼어 있다. 『그들과 함께한 페르시아와 에디오피아와 리비아인데 그들 모두는 방패와 투구로 갖추었고』(5절). 그들은 천년왕국 때에 『성벽이 없이 빗장이나 문도 없이 모두가 평안하고 안전하게 사는』(11절) 이스라엘을 향해 『폭풍같이』(9절), 『구름이 땅을 덮듯이』(16절) 공격해 올 것이지만, 그때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것이다. 즉 이스라엘 땅에 큰 진동이 있어 산들과 절벽들과 모든 성벽이 무너져 내리고(20절), 곡의 동맹군끼리 서로를 칠 것이며(21절), 그들에게 전염병과 피의 병이 돌 것이고(22절), 곡과 함께한 부대와 많은 백성들 위에 『범람한 비와 큰 우박과 불과 유황』(22절)이 쏟아지는 것이다! 이 일은 요한계시록 20장에 예언된 “사탄의 최후의 반역”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 천 년이 끝나면 사탄이 그의 감옥에서 풀려나, 땅의 사방에 있는 민족들,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려고 나가서 그들을 함께 모아 전쟁을 일으키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그들이 땅의 넓은 데로 올라가서 성도들의 진영과 사랑하시는 도성을 포위하니, 하늘에서 불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와 그들을 삼켜 버리더라』(계 20:7-9). <br/><br/>이란은 국제무대에서 예나 지금이나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국가로 통한다. 하지만 그들의 무력도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심판 앞에서는 무력하다.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것은 “하나님의 눈동자”를 손대는 것과 같기 때문에(슼 2:8) 그 『사랑하시는 도성』을 공격해 온 “이란인들”은 하나님의 격렬한 진노의 불에 삼켜지고 말 것이다.<br/>한때 코레스의 칙령을 통해 유대 민족의 회복을 도왔던 “페르시아”가 오늘날 이스라엘의 존립을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대적자로 변모한 사실은, 인류가 성경의 예고대로 종말을 향해 가고 있음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지금 중동에서 요동치는 국제 정세는 하나님의 말씀의 궤적을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 마지막 장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 점은 “역사의 주관자”가 누구이신가를 보여 주는데, 그분은 바로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삼하 7:27)이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4 Mar 2026 17:43:3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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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모사드(MOSSAD): 이스라엘의 보이지 않는 방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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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하나님의 예언의 시간표에 따라 1948년 기적적으로 독립한 이스라엘은, 영토가 대한민국의 약 5분의 1에 불과한 작은 나라다. 사방이 적대국으로 둘러싸인 지정학적 환경 속에서 좁은 영토로 인한 전략적 완충 지대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적국의 대규모 선제공격을 받을 경우 치명적인 타격을 피하기 어렵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은 안보 전략의 핵심 개념으로 “선제적 정보 우위”를 내세우고 있다. 적국의 전쟁 준비 동향, 테러 계획, 무기 개발 현황 등을 사전에 파악하여 선제적 대응 전략을 수립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이스라엘 정보기관의 역할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중요할 수밖에 없다.<br/><br/>이스라엘 정보기관의 모체는 1929년 창설되어 1948년까지 활동한 “샤이”(Shai)였다. 히브리어로 “선물”을 뜻하는 샤이는, 이스라엘 건국 이전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에서 활동한 비밀 민병대 “하가나”(Haganah) 소속의 첩보 조직이었다. 이스라엘 독립 이후 이 첩보 조직은 여러 정보기관으로 재편된다. 국내 보안·방첩을 담당하는 “신베트”(Shin Bet), 군 정보기관이면서 국가정보판단 보고서를 작성하는 “아만”(Aman), 그리고 이스라엘 안보 관련 정보의 수집·분석과 해외 특수공작 및 대테러 활동을 수행하는 “모사드”(Mossad)가 그것이다. 모사드의 공식 명칭은 “정보 및 특수임무 연구소”(The Institute for Intelligence and Special Tasks)이다. 모사드는 1949년 12월 외무부 산하 정치국으로 출범했으나, 1951년 3월 조직 개편을 통해 총리 직속기관으로 격상된다. 아울러 모사드 부장이 국가최고정보위원회 의장을 겸임하며 다른 정보기관들의 조정 업무를 맡게 되면서, 모사드는 여타 정보기관보다 우위에 서서 강력한 해외 공작 능력을 갖추게 된다.<br/><br/>모사드의 정확한 실체는 외부에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다만 1990년대에 전직 모사드 요원 “빅터 오스트로브스키”(Victor Ostrovsky)가 그의 저서 &lt;기만의 방식으로, By Way of Deception&gt;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모사드는 크게 작전 담당 부서와 지원 담당 부서로 나뉜다. 작전 부서는 수집국, 정치활동연락국, 심리전국 등으로 구성된다. 수집국은 해외 첩보를 수집하고, 정치활동연락국은 우호국 정보기관과의 협력 및 외교 관계가 없는 국가들과의 접촉·연락 업무를 담당한다. 심리전국은 심리전, 선전, 기만 작전을 맡는다. 주요 작전 부서로는 차프리림(Tzafririm), 네비오트(Neviot), 링(Ring), 테벨(Tevel), 야할로민(Yahalomin), 메차다(Metsada) 등이 있다. 차프리림은 전 세계 유대인과의 연락을 담당하고, 네비오트는 도청·해킹 등 기술적 정보 수집을 전문으로 담당한다. 링과 테벨은 각각 경제 분야 정보 파악과 외국 정보기관과의 협력 업무를 맡는다. 야할로민은 특별통신 부서로, 적대국에서 활동하는 첩자들과의 통신을 담당한다. 메차다는 모사드의 핵심 부서로, 암살과 비밀 파괴 공작, 준군사적 활동 등 비밀 공작을 수행하며, 그 산하에는 암살을 전문으로 하는 키돈(Kidon)이 있다. 지원 부서로는 기술국, 요원훈련국, 행정지원국 등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br/>모사드 본부는 텔아비브(Tel Aviv)에 위치하며, 미국 CIA는 모사드 요원이 약 7,000명, 연간 예산은 27억 3천만 달러(약 3조 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방의 적들로 둘러싸인 이스라엘은, 온갖 정보를 수집하고 그것을 해석하는 일을 생존의 조건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br/><br/>모사드는 수많은 굵직한 작전으로 그 존재감을 세계에 알려 왔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1960년 아르헨티나에 은신해 있던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압송했던 작전을 꼽을 수 있다. 1972년 9월 5일에는 뮌헨 올림픽 선수촌에 팔레스타인 게릴라 단체 “검은 9월단” 소속 테러리스트 8명이 난입하여 이스라엘 선수단 11명이 목숨을 잃는 참사가 벌어졌다. 진압 과정에서 테러리스트 5명이 사살되고 3명이 체포되었는데, 이후 모사드는 “하나님의 분노”(Wrath of God)라 명명된 보복 작전을 통해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을 하나씩 추적·암살하였다. 1981년에는 이라크 핵 시설 타격 작전인 “오페라 작전”(바빌론 작전)에서 핵 개발 관련 정보를 수집하고 시설의 위치와 구조를 파악하여 공군의 정밀 타격을 가능하게 했다. 1980-90년대에는 “모세 작전”과 “솔로몬 작전”을 통해 에티오피아에 거주하던 수만 명의 유대인을 이스라엘로 이주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br/><br/>2000년대 이후에는 이란의 핵 프로그램을 견제하는 데 집중하여, 이란 혁명수비대 미사일 담당인 “하산 테라니 모가담” 장군 암살(2011년), 이란 핵 관련 문서 대량 탈취(2018년), 수석 핵무기 과학자 “모센 파크리자데”에 대한 원격 조종 기관총 암살(2020년) 등 일련의 공작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특히 미국이 “장대한 분노”(Epic Fury)라 명명한 금년 2월 28일의 이란 공습과 하메네이 제거 작전에서 모사드가 결정적 정보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그 높은 위상이 다시금 확인되었다. 그간 미국은 이란과 핵 협상을 이어왔지만, 하메네이 체제 아래 이란은 지속적으로 핵농축 능력을 강화해 왔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이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는 것은 인류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이란이 중동 내 미군 기지에 대한 대규모 미사일 공격을 계획하고 있다는 첩보가 입수되자 선제 타격을 결정하게 된다. 문제는 공격이 시작될 경우 하메네이가 즉시 지하 벙커로 피신할 것이기 때문에 그를 제거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이때 모사드는 하메네이가 테헤란의 특정 장소에서 회의를 가질 것이라는 정보를 복수의 경로를 통해 확인했고 이를 미국 측에 전달해 공습 날짜가 결정된 것이다. 모사드는 이미 수년 전부터 이란의 교통 카메라를 해킹하여 영상 정보를 축적해 왔으며, 이를 통해 해당 시각 하메네이의 위치를 복합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나아가 공습 직전에는 하메네이 집무실 인근의 이동통신 기지국 12개를 교란함으로써 경호원들이 외부로부터 공격 경보를 수신하지 못하도록 차단했다.<br/><br/>그러나 모사드의 작전이 항상 성공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1973년에는 민간인을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로 오인하여 암살한 “릴레함메르 사건”이 발생했고, 같은 해 “욤키푸르 전쟁”에서는 정보 판단의 실패로 이집트와 시리아의 기습 공격을 허용하기도 했다. 1997년에는 하마스의 정치 지도자 “칼레드 메살”에게 독극물을 주입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작전 직후 요원들이 체포되어 외교적 파장을 일으켰다. 이스라엘은 해독제를 제공하고 수감 중이던 하마스 창시자 “셰이크 야신”을 석방하는 조건으로 요원들을 돌려받아야 했다. 2010년에는 하마스 고위 지휘관 “마흐무드 알 마브후흐”를 두바이의 한 호텔에서 암살했지만, 요원들의 모습이 CCTV에 고스란히 포착되어 여권 도용 문제까지 불거지게 되면서 국제적 논란과 외교적 갈등을 초래했다.<br/><br/>위와 같은 실패 사례들은 한 가지 중요한 진실을 일깨워 준다. 즉 선제적 정보 우위를 앞세운 세계 최고 정보기관 모사드라 해도, 그들은 정보를 분석하고 판단하는 데 있어 오류와 실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모사드의 로고에는 잠언 11:14 말씀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라고 변개된 개역개정판을 인용하며, 마치 모사드의 “지략”이 곧 국가의 방패가 되어 적의 공격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평안을 가져다줄 수 있는 것처럼 오용하고 있다. 그러나 살펴본 것처럼, 세계 최고 정보기관이라 해도 얼마든지 실수할 수 있다. &lt;한글킹제임스성경&gt;에 보존된 본래의 말씀은 『의논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나, 의논자가 많으면 안전하니라.』이다. 진정한 “의논”(counsel)을 베풀어 주실 수 있는 분, 곧 참된 “의논자” (counsellor)는 “상담자”(Counsellor)이신 주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이는 우리에게 한 아이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음이니, 정부가 그의 어깨 위에 있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경이로운 분이라, 상담자라, 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원하신 아버지라, 화평의 통치자라 불리리라』(사 9:6). 이 구절의 하나님은 바로 2천년 전 이 땅에 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지금 이 순간, 진정한 “상담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야만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예언의 시간표에 따라 이스라엘은 결국 “다니엘의 70째 주”(단 9:24)요 “야곱의 고난의 때”(렘 30:7)라 불리는, “대환란”이라는 전무후무한 “고난의 때”(단 12:1)를 통과하게 된다.<br/><br/>그 고난은 그들이 제2차 세계대전 때 당한 참상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극심할 것이다. 그때 모사드는 이스라엘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주 하나님만이 진정한 방패가 되어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오 이스라엘아, 너는 행복하도다. 오 주에 의해 구원받은 백성이여, 누가 너와 같으리요, 그분은 네 도움의 방패시며 네 탁월함의 칼이시로다! 네 원수들이 네게 거짓말쟁이로 드러날 것이요, 너는 그들의 높은 곳들을 밟으리라』(신 33:29). 『내 반석의 하나님, 그분을 내가 신뢰하리라. 그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며,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주시라. 주께서 나를 폭력으로부터 구원해 주시나이다』(삼하 22:3). 이 방패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방패”다. 에스더서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위기 때마다 보이지 않으시는 방패로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책 전체에 드러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서 이방 땅에 흩어져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주신 의로운 약속을 신실하게 이행하셨다. 사탄의 예표인 하만이 유대인을 멸절하려 했으나, 그들의 방패이신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손길로 이스라엘 민족을 지켜 내셨던 것이다.<br/><br/>대환란의 때가 되면,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그토록 의지해 온 “지략”을 등에 업고 등장하는 사악한 지략가(나 1:11), 곧 적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받아들이고 그와 평화조약을 맺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를 두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망과 더불어 맺은 너희의 언약이 무효화되며 지옥과 한 너희의 합의가 서지 못하리니 넘치는 재앙이 지나가면 너희가 그것에 짓밟힘을 당하리라』(사 28:18). 말하자면 적그리스도는 7년 대환란 기간의 중반에 그 평화조약을 파기하고 이스라엘을 극심하게 박해할 것이다(단 9:27). 그때 이스라엘은 비로소 그들의 방패이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피난처인 반석으로 숨어들 것이다(시 94:22). 환란의 때에 바위 성읍, 곧 셀라 페트라로 피신하게 되는 것이다.<br/><br/>이스라엘이 위와 같은 진리를 알지 못한 채 모사드를 운용하며 중동 정세에 대응하는 현실은, 자신들의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인간의 지략으로 현실을 헤쳐 나가고자 하는 인본주의적 몸부림에 불과하다. 진정한 승리는 최첨단 첩보 기술이나 치밀한 전략에 있지 않다. 이스라엘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보이지 않는 방패”는 그 민족을 섭리 가운데 인도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신 7:9)이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4 Mar 2026 17:42:5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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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밀월”에서 “증오”로 변한 이스라엘 - 이란 관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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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미국-이란 전쟁”이 전면전 양상으로 치닫고 있는 현 시점에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반세기쯤 전만 해도 이스라엘과 이란은 “우방”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돈독한 관계였다. 이란은 이슬람권 국가들 가운데서는 터키 다음으로 빠르게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고(1950), 수도 테헤란 한복판에 이스라엘 “대사관”을(주변국 눈치 때문에 곧이곧대로 “대사관”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지만) 뒀던 나라였다. 경제적 협력도 활발하여 많은 이스라엘 사업체가 이란에서 성업했고, 기술자들은 이란의 인프라 구축을 도왔다.<br/><br/>이스라엘과 이란, 이 둘 사이에는 심지어 군사적인 협력도 있었다. 이스라엘은 이란에 무기를 수출했고, 양국은 각자의 장점인 “군사 기술”과 “오일 머니”의 시너지를 통해 첨단 탄도미사일을 공동으로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기도 했다. 제4차 중동전쟁(1973) 당시 아랍 국가들이 석유 수출 중단 조치를 통해 이스라엘을 말려 죽이려고 했을 때, 이스라엘의 탱크와 전투기가 멈춰 서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란의 석유 덕분이었다.<br/><br/>양국 간의 좋은 관계는 지정학적 이해관계에 의해 형성된 것이었다. 우선 건국(1948)과 동시에 국경을 둘러싼 아랍 국가들로부터 존립을 위협받던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생존을 위해 그 밖의 국가들과 손잡을 필요가 있었다. 이스라엘의 국부(國父)인 벤구리온 총리는 이를 “주변부 동맹”(Alliance of the Peri- phery)이라는 이름으로 구체화했다. 아랍 국가들의 포위망 너머 반대편에서 그들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터키, 이란, 에티오피아 등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하는 외교 전략으로, 쉽게 말해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것이었다.<br/>아랍 민족주의 색채를 띤 국가들을 견제해야 했던 이란 입장에서도, 이스라엘이 내민 손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덧붙이자면 이란은 아랍 국가가 아니다. “아랍 국가”란 “아랍어”를 사용하는 “아랍인”이 다수인 국가를 말하는데, 이란은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페르시아인”이 과반 이상이다.) 물론 다른 “이슬람 형제들”의 반발이 있었으나, 티를 내는 것만 자제하면 그들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랍 국가들로서는 확실한 명분도 없는데 “주적” 이스라엘을 뒤에 두고 이란을 치러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던 것이다.<br/><br/>둘 사이의 “물밑 협력” 관계는 쿠데타(1953)를 통해 본래 입헌 군주국이었던 이란을 절대 왕정 체제로 바꿔 놓은 이란의 “샤”(페르시아어로 “왕”을 뜻함),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의 치세에서 한층 깊어졌다. 쿠데타의 발단은 민족주의자 총리 모사데그가 본래는 이란에 들어온 영국계 회사가 운영하고 있던 석유 산업을 국유화하는 “반(反)제국주의적” 정책을 폈던 데에 있었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정책에는 자유세계의 강력한 보복성 제재가 뒤따를 수밖에 없었고, 석유가 있어도 팔 수가 없게 되자 이란의 경제는 파탄이 났다. 이때 미국과 영국의 정보기관은 샤에게 접촉하여 쿠데타를 종용했다. 혹 총리가 소련과 결탁하여 문제를 타개하려 들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샤는 처음엔 이를 거절했으나, 여론의 악화를 견디다 못한 총리가 급기야 비상대권을 선언하면서 샤의 권한까지 빼앗으려 들자 동의의 뜻을 전했다.<br/><br/>미국과 영국의 도움으로 쿠데타에 성공한 샤는 이후로도 철저한 친미노선을 걸으며 권력기반을 확고히 했다. 그는 이윽고 “백색 혁명”(1963)이라는 서구식 근대화 개혁을 단행했는데, 이는 문맹 퇴치, 사회 기반 시설 구축과 같은 복지의 영역으로부터 여성의 참정권 부여, 국영 기업의 민간 매각, 토지 개혁 등의 굵직한 정치, 경제적 영역까지를 아우르는 대개혁이었다. 이 개혁의 산물은 사람들이 흔히 회자하듯 “테헤란 도심에서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들이 오픈카를 몰던” 자유롭고도 풍요로운 이란이었다(물론 이것은 6,70년대의 이란이다). 석유 매장량만 해도 세계 3,4위를 다툴 정도로 엄청난 자원 잠재력을 가진 나라가 미국의 호감을 살 만한 일만 골라서 했으니, 당시 국제 정세상 그와 같은 눈부신 발전은 이미 예견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br/><br/>“백색 혁명”은 단순한 근대화 혁명이 아니라, 이란의 근간을 뒤흔들겠다는 샤의 원대한 포석이기도 했다. 샤가 꿈꿨던 이란은 성직자들의 눈치를 보면서 후진적 사회에 머무르는 “이슬람 국가”가 아니었다. 그는 그 옛날 코레스 대왕 치세에서 중동 전체를 호령했던 “세속 왕정” 페르시아의 영광을 재현하기를 원했다. “백색 혁명”의 핵심이라고 할 만한 토지 개혁이나 교육 정책 등은 바로 그 영역에서 기득권을 쥐고 있던 이슬람 성직자들로부터 그것을 빼앗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실제로 샤는 “이슬람교가 아닌 페르시아 제국이 바로 이란의 뿌리”라는 인식을 대중에게 각인하고자 하는 작업을 착착 수행해 나갔다. 이란에서는 옛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페르세폴리스로 세계의 정상들을 초대하여 제국 건국 2,500주년을 기념하는 성대한 행사가 열리기도 했고(1971), 수백 년간 사용해 오던 달력 체계인 “이슬람력”(마호메트의 메카 성지순례 기준)이 폐지되고 코레스의 즉위를 기점으로 하는 “제국력”이 도입되기도 했다(1976).<br/><br/>바로 이때, 서두에서 본 것과 같은 이스라엘과 이란의 “밀월 관계”는 “큰형님” 미국이 흐뭇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절정에 달했다. 이란이 이슬람교가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페르시아 제국 시대로 회귀하려 했을 때 이스라엘과 가까워지고 또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는 것은 성경을 아는 우리에게는 참으로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셨던 『너를 축복하는 자들에게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리라. 네 안에서 땅의 모든 족속들이 복을 받을 것이라.』(창 12:3)라는 약속이 이스라엘에게 계승되었음을 염두에 둔다면, 샤의 “백색 혁명”은 이란 입장에서는 복을 받을 수 있는 첩경이었음이 분명하다.<br/><br/>그러나 이란의 종교계는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그들은 빠른 경제 성장의 혜택에서 소외된 빈곤층, 그리고 민주적 공화정을 열망하던 지식인층과 연대하여 샤를 압박했다. 그 중심에 있었던 “아야톨라”(이슬람 율법에 대한 유권해석 권한이 있는 시아파의 최고위급 성직자를 부르는 칭호) 루홀라 호메이니는 쿰의 한 신학교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이 정권은 이슬람 그 자체와 종교적 가르침의 존재를 대적합니다. [이 정권과 밀월 관계에 있는] 이스라엘은 이 나라에 코란이 존재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우리와 여러분, 그리고 국가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러분의 경제를 장악하고, 무역과 농업을 파괴하고, 여러분의 재산을 빼앗기를 원합니다... 가난에 찌든 우리 국민들의 고생으로 만들어진 부를 외국의 은행들에 채워 넣은 이 정부, 하늘 높이 솟은 궁전을 세우면서도 국민들을 평안하게 해 주지 못하는 그들은, 우리의 자원을 가지고 그들과 이스라엘의 호주머니를 채우려 합니다. 참으로 기생충과 같은 자들이 아닙니까?”<br/><br/>샤를 폭군이자 기생충으로 묘사한 이 연설을 계기로 호메이니는 체포되었고, 이는 대규모 반정부 폭동으로 이어졌다(1963). 호메이니는 추방을 면치 못하고 터키와 이라크 등 타국을 전전하게 되었지만,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오히려 나날이 커져만 갔다. 정부는 언론을 통제하여 그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막아 보려 들었으나, 카세트테이프에 녹음되어 밀수된 호메이니의 메시지는 이란 전역에 있는 수만 개의 모스크를 통해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결국 우리가 군사 정권 시절에 겪었던 것과 유사한 격동의 과정 끝에 팔라비 왕조는 무너졌고, 호메이니는 이란으로 돌아와 이슬람 성직자들이 지배하는 이슬람 원리주의 국가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이란 이슬람 혁명”(1979)이 성공한 것이다. 민주 공화정이 세워질 줄 알고 혁명에 가담했던 지식인층은 뒤늦게 자신들이 어리석었음을 깨달았지만, 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죽음, 침묵, 혹은 망명뿐이었다.<br/><br/>호메이니 체제 아래에서 공식 국호를 이란 “이슬람” 공화국으로 정한 이란은 서구 사회로부터 온 모든 문화적, 경제적 영향을 몰아냈고, 그간 자신들을 약탈해 왔던 “작은 사탄,” 이스라엘을 지도상에서 지워 버리는 것을 국가적 과제로 삼았다(“큰 사탄”은 미국이다). “코란대로 믿는 사람들”인 그들이 이스라엘을 향한 적개심을 불태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너희는 신자들을 향해 가장 맹렬한 원한을 가진 자들은 유대인과 다신교도들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lt;코란&gt; 5:82).<br/><br/>그러나 이스라엘을 치겠다는 이란의 뜻은 쉽게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두 나라는 국경을 맞대고 있지도 않을뿐더러, 대부분 수니파인 주변의 아랍국 역시 시아파의 맹주로 부상한 이란에게 호의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란의 존재는 여전히 세속 왕조의 통치가 이어지던 국가들에게 상당한 부담이기도 했다. 이란의 영향력이 커지면 자국에서도 똑같은 이슬람 혁명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판단하에, 아랍의 왕조들은 이란을 견제할 수밖에 없었다.<br/><br/>이와 같은 상황에서 호메이니가,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이란 최고 지도자가 된 알리 하메네이(1989)가 선택했던 전략은 “대리전”이었다. 이란은 80년대 초 레바논의 무장 정파 헤즈볼라의 창설에 깊이 관여한 이후로,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 이라크의 시아파 민병대, 예멘의 후티 반군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대리할 무장 세력들을 키워 내어 “시아파 벨트”를 형성했다. 90년대 초에는 종파가 다를지라도 반(反)이스라엘이라는 목표를 공유하는 하마스도 이 “연합”의 일원으로 합류했다. 목숨을 건 테러 행위도 불사할 이 광신도들에게 전폭적으로 자금과 무기를 대줌으로써, 이란은 앙숙인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 등의 수니파 패권국이 함부로 할 수 없는 힘을 갖추는 한편,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최근 이스라엘이 미국과 공조하여 하메네이를 포함한 이란 수뇌부를 폭사시킨 배경에는 이와 같이 수십 년간에 걸쳐 형성된 깊은 원한 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br/><br/>『그가 거친 사람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대적할 것이요,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대적할 것이라.』(창 16:12)라는 예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는 “이스마엘의 씨”(아랍인)라면 몰라도, 그 뿌리가 완전히 다른 “페르시아의 후예” 이란인들은 “투쟁적인 역사”에 휘말릴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들이 아랍인들과 “같은 생각”(이슬람교)을 공유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들이 입으로 떠드는 것처럼 진정한 “평화”를 그 땅에 가져오고 싶거든,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 행위를 중단하고 그 관계를 정상화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이 일은 말처럼 쉽게 되지 않을 것이다. 현재의 이란이 이스라엘과의 관계에 있어 막장에 이른 것으로 보이는 것은, 지금 예언의 시간표가 “교회의 휴거”를 가리키고 있고, “온 세상”이 적그리스도를 따르며(계 13:3) 이스라엘을 짓밟을(계 11:2) “대환란”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4 Mar 2026 17:42:1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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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중동의 화약고, 이스라엘과 이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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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중동의 화약고, 이스라엘과 이란<br/><br/>목 차<br/>1. 역사의 중심 “이스라엘” / 박승용<br/>2. “밀월”에서 “증오”로 변한 이스라엘-이란 관계 / 손주영<br/>3. 모사드(MOSSAD) : 이스라엘의 보이지 않는 방패 / 박동일<br/>4. 성경의 눈으로 읽는 “이란의 최후” / 한승용<br/><br/><br/>&lt;편집자 주&gt;<br/>인류 역사의 시계 바늘은 언제나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과거와 미래, 종교와 정치가 한데 뒤섞인 이 좁은 땅덩어리는 늘 세계사적 격변의 중심지였으며, 지금 또다시 미국-이란 전쟁과 관련하여 뜨거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왜 세계의 시선은 이 작은 땅 조각에 머물 수밖에 없는가? 그 근원적 이유는 무엇인가?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전략적 파트너였던 이스라엘과 이란은 현재 서로의 생존을 위협하는 숙적이 되었다. 코레스왕의 호의가 흐르던 페르시아 땅이 반(反)이스라엘의 선봉이 된 과정은 극적이다. 국가의 존망을 걸고 펼쳐지는 모사드의 정보전 또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무엇보다 성경은 이스라엘과 이란의 갈등이 종국에 어떤 종착지에 이를 것인가를 예언한다. 역사는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중동의 지정학적 갈등 이면에는 거대한 섭리가 흐르고 있다. 본 특집은 복잡한 중동 정세를 분석함으로써 그 예언적 결말을 명쾌하게 읽어 준다.]]></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4 Mar 2026 17:40:58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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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하나님의 위로와 그리스도인의 소명</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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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고통과 절망의 시간을 지낼 때가 있다.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는 이세벨의 위협에 낙심하여 죽기를 구했다(왕상 19:4). 위대한 사도 바울 또한 고난으로 인한 극심한 압박 때문에 삶의 절망에까지 이르렀다(고후 1:8). 그럼에도 그가 맡은 바 사역을 성공적으로 감당했던 동력은 하나님의 위로에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사역의 완성을 위해 고난을 허락하시지만, 또한 『모든 위로의 하나님』(고후 1:3)으로서 사역에 필요한 위로를 더해 주신다. <br/><br/>오늘날 이 세상에서는 “위로자”가 더욱 절실히 필요하다. 세상이 너무나 많은 짐을 지우기 때문이다. 죄악과 우울한 일들, 거칠고 폭력적인 사람들, 감당하기 힘든 환경과 상황, 반복되는 실망과 낙심, 이 모든 것 때문에 인생의 짐은 종종 너무 무겁게 느껴진다. 교회가 하는 일들 가운데 하나는 “위로”하는 것이다. 인생의 시험 속에서도 다시 걸어갈 힘을 주는 사람들, 낙심한 자를 일으켜 세우는 사람들, 신뢰할 수 있고 상처 주지 않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모든 성도의 사명 가운데 하나는 “위로”하는 일이다. 위로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모든 행동은 결국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과 같다. 교회는 사랑과 격려와 위로의 분위기가 조성되고 유지되는 곳이어야 한다. 그 결과 교회가 모든 성도들이 영적으로 최대한 성장할 수 있는 곳이 되는 것이다. 성경을 공부하는 목적 가운데 하나는 어떻게 위로를 받으며, 또 어떻게 다른 이들을 위로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를 배우는 것이다. <br/><br/>무엇이 그리스도인에게 위로를 주는가? <br/>첫째,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신다. 성령님께서는 “위로자”시다. 『또 내가 아버지께 기도하겠고, 그분께서 또 다른 위로자를 너희에게 주시리니 그가 너희와 함께 영원히 거하시리라』(요 14:16). 성령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내주하시는 한, 그리스도인은 구속의 날까지 하나님의 위로 가운데 머물러 있게 된다. 사울이 회심하여 교회를 박해하던 일을 멈췄을 때, 교회들은 평안을 누리고 든든히 세워져 갔으며, 주를 두려워함과 성령의 위로 가운데 행하였고 수적으로 성장했다(행 9:31). 성령님께서는 지금도 동일하게 교회와 성도를 위로하기 원하신다. 그리스도인이 성령님을 슬프게 하지 않고 소멸케 하지 않는 가운데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성령의 열매』(갈 5:22)를 맺으며 살아갈 때 그의 삶은 위로로 가득 차게 된다.<br/><br/>둘째, 성경이 인내와 위로와 소망을 준다.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그리스도 예수를 따라서 서로 같은 생각을 갖게 하사 한 생각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길 원하노라』(롬 15:5,6). 성경의 인물들을 보면 그들 모두 시험을 견뎠고, 하나님께서 구해 내셨으며, 그들의 고난과 희생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복을 받았다. 나쁜 상황, 불가능해 보이는 환경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선을 이루셨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인내를 주고 위로와 소망을 준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을 읽는 이유이다. <br/><br/>셋째, 말씀의 선포는 위로가 된다. 『그러나 예언을 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말하며 세워 주고 권면하고 위로하느니라』(고전 14:3). 참된 설교는 성도를 세우는데, 그 안에는 격려와 위로가 포함된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죄를 날카롭고 통렬하게 책망하시고 나서(사 1-39장) 말씀의 궁극적 목적을 이렇게 선언하신다. 『너희는 위로하라. 너희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의 하나님이 말하노라』(사 40:1). “심판”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고, “회개”는 끝이 아니라 회복을 위한 길이며, “말씀”은 언제나 위로이다. “교리”의 목적은 성도를 짓누르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 안으로 이끌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에게 권고하노니』(롬 12:1). 찰스 스펄전은 자신의 설교 노트에 이렇게 썼다 “목회자의 본분은 성도를 영적으로 먹이고 양육하는 것이다. 어떤 설교자들은 ‘믿어라, 믿어라!’라고만 외치나,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양을 먹이지 못한다... 만약 지금 양들(성도들)을 먹이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을 죽이는 일(즉 영적으로 쇠약하게 하는 일)을 한다면 내년에는 새로운 양떼를 어디서 구하겠는가?” 즉 적합하지 않은 책망이나 꾸짖음, 또는 성도가 자라지 못하게 하는 말만 하는 것은 오히려 영적 죽음을 야기하는 일에 가깝다고 했다. 참된 설교는 책망에만 그치지 않고, 지친 혼들을 따듯하게 감싸 안아 위로하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br/><br/>넷째, 신실한 성도들의 교제는 큰 위로가 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의 통로 가운데 하나는 “사람의 방문”이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도 직분을 의심하는 사람들의 공격으로 인해 어려움을 당할 때, 위로로 충만해져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기쁨으로 차고 넘친다고 말할 수 있었던 원인은 “디도의 방문”이었다.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께서 디도를 오게 하심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며』(고후 7:6). 디도는 문제를 들추어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어려움 가운데 있는 동역자를 세워 주고 회복시키는 방문자였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고, 교회는 박해를 받아 내일이 불확실할 때, 투기고는 이 모든 부정적 상황에 대해 소문을 퍼뜨리는 자가 아닌, 진실과 신실함으로 사실을 알려 주어 교회를 위로했다. 『이제 너희는 내가 하고 있는 일과 나에 관한 것을 알게 되리니 사랑하는 형제요, 주 안에서 신실한 일꾼인 투기고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내가 이를 위하여 그를 너희에게 보내노니 너희가 우리에 관한 일을 알게 되고 아울러 그가 너희의 마음을 위로하리라』(엡 6:21,22). 바울에게 있어서는 성도들의 형편을 진심으로 마음에 두는 디모데의 방문 자체가 하나님의 위로였다(빌 2:19). 이뿐만 아니라 유스토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위로가 되었다(골 4:11). 하나님께서는 고난 속에 있는 성도들을 주로 사람들을 통해서 위로하신다. “신실한 성도”는 하나님의 “위로의 도구”이다. 신실한 성도와의 교제는 하나님의 위로가 된다. 성도들이 나누는 교제의 특징은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것이다(히 10:24). 그러므로 우리는 진지하게 질문해야 한다. “나는 누군가에게 위로로 찾아가는 사람인가, 아니면 문제로 다가가는 사람인가?”<br/><br/>무엇보다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큰 위로가 된다. 타락한 인간의 마음은 두려움으로 어둡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크다. 바울은 죽음의 현실 앞에서 슬퍼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 그가 보낸 서신의 목적이라고 말하지 않고, 소망이 없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형제들아, 잠든 자들에 관해서는 너희가 모르게 되는 것을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가 소망이 없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살전 4:13). “슬픔”은 인간적이고, “눈물”은 믿음의 결핍이 아니지만, “절망”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의 정서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깨어날 것을 전제로 하는 “잠”이다. 휴거는 이미 주와 함께 있는 성도가 그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게 되는 날이다. 휴거가 주는 위로는 더 이상 사망이나 슬픔이나 울부짖음, 고통이 없다는 데 있다. 휴거가 이루어지면 더 이상 믿음으로 붙들어야 하는 대상도 없다. 주님과 영원히 함께 있는 일(살전 4:17)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갈망의 종착지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 4:18). “재림”이 주는 구체적인 위로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위로”와 “사랑하는 이와의 사별은 영원한 이별이 아닌 재회의 약속이라는 위로,” “주님과 영원히 함께한다는 위로,” “모든 상처와 눈물이 최종적으로 치유된다는 위로”이다. 성경은 이 땅에서의 시간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궁극적인 위로는 다가올 세상에서 하나님 앞에 서는 날, 그분의 최종적인 평가를 통해 완성된다. 『이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어 의로운 재판관이신 주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내게 주실 것이며 또 나뿐만 아니라 그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이라』(딤후 4:8). 바울의 이 고백은 감옥에서 사형을 앞두고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나온 말인데, 단 하나의 절망적인 표현도 찾아볼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위로할 수 있는 “위로자”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위로로 다른 사람을 위로하라(고후 1:3,4). 마음이 약하여 낙담한 자들을 위로하고(살전 5:14) 서로를 세워 주라(살전 5:11). “그리스도인”은 위로의 능력으로 한 마음이 되어 평안 가운데 살 수 있어야 한다(고후 13:11).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4 Feb 2026 09:37:39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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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기술이 신이 되는 사회 (2) “불사의 몸을 주시옵소서”</title>
<link>https://www.biblemaster.co.kr/bb5/%EA%B8%B0%EC%88%A0%EC%9D%B4-%EC%8B%A0%EC%9D%B4-%EB%90%98%EB%8A%94-%EC%82%AC%ED%9A%8C-2-%EB%B6%88%EC%82%AC%EC%9D%98-%EB%AA%B8%EC%9D%84-%EC%A3%BC%EC%8B%9C%EC%98%B5%EC%86%8C%EC%84%9C/</link>
<description><![CDATA[에덴에 동산을 만드시고 자신의 형상대로 영과 혼과 몸을 지닌 사람을 창조하신(창 2:7, 살전 5:23) 하나님께서는, 그 뒤 사람에게 다산하고 번성하며 땅을 다시 채우고 정복하며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셨다(창 1:28).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분의 명령대로 행하고 영원히 살면서 지구를 가득 채우면, 대기권 밖으로 나가 거주하면서 온 우주를 가득 채우게 하려는 영원한 왕국(사 9:7)의 계획을 갖고 계셨다. 하지만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그 아담을 통해 이루고자 하셨던 계획은 무산되었고, 무엇보다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아담은 930년을 살다 죽었는데(창 5:5), 이후로 태어나는 사람들도 죽게 되어 그 생명의 연수가 계속해서 짧아졌다. 즉 셋(912년), 에노스(905년), 카이난(910년), 마할랄렐(895년), 야렛(962년), 에녹(365세, 에녹은 죽지 않고 하나님께서 데려가셨다), 므두셀라(969년), 라멕(777년), 노아(950년), 셈(600년), 아르박삿(438년), 에벨(464년), 르우(239년), 스룩(230년), 테라(205년), 그리고 아브라함(175년), 이삭(180년), 야곱(147년), 요셉(110년)과 같이 줄어들더니, 이후로 아침 햇빛에 사라지는 안개와도 같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는 짧은 연수를 살게 되었다(약 4:14, 시 90:10).<br/><br/>이처럼 보편적으로 채 100년도 못 살게 된 사람은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범죄한 사람, 곧 당신에게 정하신 법칙이다. 아담의 범죄로 세상에 “죄”가 들어오고, 그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었으니(롬 5:12), 하나님께서는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고, 그 뒤에는 심판이 정해져 있다고 선포하신 것이다(히 9:27). 그럼에도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자신만의 방법을 동원해 “불사”(不死)를 이루려고 노력해 왔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대적하고 거스르는 악한 본성을 드러낸 것이다. B.C. 2000년대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길가메시의 서사시”에는 불멸을 꿈꾸는 길가메시 이야기가 나온다. 인도의 베다 문헌(B.C. 1500)에도 “암리타”라는 불사의 음료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으며, 중국의 진시황이 B.C. 219년경 불로장생(不老長生)을 꿈꾸며 방사(方士, 신선술을 닦는 도사)인 서복에게 명하여 불로초(不老草)를 구해 오라고 했던 이야기는 이미 유명하다. 이처럼 진시황 때부터 시작된 제왕의 불로장생 사상을 중국 전한(前漢)의 제7대 황제인 한무제(漢武帝, B.C. 141-87)가 계승하는데, 한무제는 도교적 요소를 가미한 방술(方術)과 신선(神仙) 사상을 열렬히 신봉하여, 그의 통치 말년에 불로장생의 비법을 안다고 주장하는 방사들을 대거 조정에 등용한다. 이로써 불로장생을 추구하는 일이 국가적 제도 안으로 편입되었는데, 그와 같은 과거의 역사에 영향을 받은 듯 현재의 중국은 바이오기술, AI에 이어 “장수 산업”을 국가의 최우선 과업으로 삼고 수십억 달러를 투자하고 있다. <br/><br/>불로장생과 관련된 항노화 기술은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발전하며 폭발적인 투자를 받고 있다. 예를 들어 “세포 재프로그래밍”(Cellular Re- programming)이라 불리는 항노화 기술은 불로장생에 가장 가까워 보이는 기술로, “야마나카 인자”(OSKM)라는 유전자를 사용하여 노화된 세포를 젊은 상태로 되돌린다. “세놀리틱”(Senolytics)이라는 기술은, 죽지 않고 염증을 유발시키며 주변 세포를 망가뜨리는 노화 세포만을 선별하여 제거하는 기술이다. “mTOR 억제”(라파마이신 계열) 기술은 세포 성장, 증식, 생존 대사를 조절하는 mTOR 신호 전달 경로를 제어하여 세포의 자가포식 활성화를 억제하는 기술이다. 그리고 NAD⁺(미토콘드리아 계열) 기술이 있는데, 이 NAD⁺는 세포 호흡 및 전자전달계에서 필수적인 보조 효소로, 노화에 따라 수치가 감소하여 미토콘드리아 기능 장애를 유발하기 때문에 이를 감소하지 않도록 보충시키는 기술이다. 이러한 기술들이 오늘날 노화 방지 기술로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 <br/><br/>한편 “항노화 산업”에 투자하는 실리콘밸리의 “억만장자들”이 눈에 띈다. 미국의 월스트리트 저널은 지난 25년간 억만장자들이 “장수 산업”에 약 6조 9,400억 원 이상을 투자했다며 실리콘밸리의 거물인 피터 틸(페이팔 공동창업자), 샘 올트먼(OpenAI의 CEO), 유리 밀너(인터넷 투자사인 DST의 CEO), 마크 안드레센(넷스케이프 창업자이자 벤처 투자자) 등이 “장수 산업”에 대규모 자금을 쏟아부은 주역들이라고 보도했다. 이들이 항노화에 집착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공포”와 더불어 죽음을 통제하려는 “통제 욕구” 때문이다. 그들 억만장자들은 돈과 권력 그리고 영향력 등을 모두 가진 사람들로서, 현대 기술을 이용해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해 온 이들이다. 그런데 죽음만큼은 예외였다. “죽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공포심도 문제지만, 그들은 죽음을 일종의 “해결해야 할 버그”로 여기면서 자신의 통제권 안에 두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들이 이제는 죽음도 통제가 가능한 시점이 가까웠다고 주장한다. 즉 기술의 발전 속도가 노화 속도보다 빨라진다는 이른바 “수명탈출속도”(Longevity Escape Velocity)라는 개념을 언급하는데, 마지막 때에 등장한 이 생소한 개념은 &lt;특이점이 온다&gt;라는 책으로 유명해진 “레이 커즈와일”이 제시한 것으로서, 그 시점을 2032년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때가 되면 “건강하게” 10년을 더 살 수 있는 기술이 나올 것이고, 그 기술로 수명을 10년 “연장하게” 되면 그 10년 안에 기술의 발달로 수명 연장을 더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반복되면서 죽음의 문제를 통제할 수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해 세계적인 기술 및 의료 미래학자인<br/><br/>사람들은 불사의 기술이 이미 사람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기정사실처럼 여기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그 기술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로 그 화두를 돌리고 있다. 하지만 현대의 기술은 인간에게 결코 불사의 몸을 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죽지 않는 몸은 죄 문제를 해결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br/><br/>“제이미 메출”은 그의 책 &lt;슈퍼컨버전스, 초융합 시대가 온다&gt;에서 다음처럼 기술했다. “수천 년 동안 다양한 문화권에서는 생명을 창조하고, 연장하고, 재창조하는 능력이 있는 신을 상상해 왔다. 이제는 새로운 기술이 인간에게 이러한 능력을 부여하고 있으며, 우리는 매우 중요한 결정의 갈림길에 섰다. 인류와 다른 많은 생명체의 미래를 좌우할 문제 앞에서 던져야 할 본질적인 질문은 바로 우리가 신과 같은 힘을 현명하게 사용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br/><br/>현대 기술의 발달로 인간은 불로장생의 꿈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인간의 기술은 인간 자신에게 결코 불사의 몸을 줄 수 없다. 왜냐하면 “죽음”이라는 문제의 원인을 잘못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인간이 죽는 직접적인 원인은 세포 손상, 노화, 기능 장애 등이 아니라 인간의 “죄” 때문이다. 인간의 수명이 단축된 이유도 다름 아닌 “죄” 때문이었다. 즉 아담은 범죄한 이후 “생명 나무”에서 나는 열매를 먹을 수도 있었다. 만약 그가 그 열매를 먹었다면 죄로 가득한 몸에 “영생”을 갖게 되어 “영원히 추악한 괴물”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그 점을 미리 내다보시고 아담을 에덴 동산에서 내어 쫓으셨다(창 3:22,23). 그런데 지금의 사람들은 죽음을 불러온 근원적이고 직접적인 원인인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불로장생을 추구함으로써 그와 같이 소름끼치는 괴물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이 알아야 할 것은,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진정한 불멸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생명과 불멸을 밝히신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그것이 드러났으니, 그는 죽음을 폐기하시고 복음을 통하여 생명과 불멸을 밝히셨느니라』(딤후 1:10). 『오직 그분만이 불멸하시며, 어떤 사람도 접근할 수 없는 빛 가운데 거하시며,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는 분이시니, 그분께 영원한 존귀와 능력이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딤전 6:16). 따라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고 영접한다면 불멸이신 그분께서 들어가셔서, 그 죽어 썩을 몸을 그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불사불멸”의 몸으로 변모시켜 주실 것이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의 자녀로 입양하시겠다고 예정하셨을 때 정해졌다(엡 1:5). 이 예정은 칼빈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구원으로의 예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과 일치”하게 하시려는, 곧 우리의 천한 몸을 그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변모시켜 주시려는 예정이며(롬 8:29, 빌 3:21), 그 일은 “휴거” 때 일어날 것이다(고전 15:51-56, 요일 3:2,3).<br/><br/>이제 곧 하나님께서는 재림 이후 수립될 천년왕국을 지나 영원으로 들어가심으로써, 아담이 망쳐 놓은 예전의 계획을 이루실 것이다. 사람들이 생명 나무를 먹고 영생을 얻어 다산하고 번성하여 새 땅을 채우면, 새 우주로 나가 그곳을 영원히 채우게 하실 것이다. 하지만 지금 구원을 받는다면 굳이 생명 나무를 먹을 필요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와 똑같은 불사의 몸을 약속받게 된다. 이 불로불사의 현실은 인간의 기술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을 통해 진정한 현실이 될 수 있다. “혼”은 불멸한다. 만약 하나님의 방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결국 몸이 죽은 뒤 불멸의 “혼”이 지옥에서 영원을 보낼 수밖에 없다. 불확실한 현대 기술에 온 세상보다도 귀한 자신의 혼(마 16:26)을 걸고 도박하지 말라. 그 대신 하나님의 말씀에 확실히 보장된 “영원한 생명”을 지금 당장 붙잡도록 하라! BB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4 Feb 2026 09:35:14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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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소돔”을 “개혁”하려는 헛된 노력을 중단하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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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제22대 국회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재발의되자 교계 안팎에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진정한 평등을 바라며 나쁜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전국 연합”(이하 진평연)을 비롯한 700여 개 단체가 성명서를 발표하고, 손솔 의원(진보당)이 대표 발의한 차별금지법안의 즉각적인 철회를 강력히 촉구했다. 지난 21대 국회에서 임기 만료로 폐기되었던 법안이 유사한 형태로 재발의되자, 교계와 시민단체가 즉각적인 반대 행동에 나선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그와 같은 행위는 타락의 수렁에서 헤어 나올 줄 모르는 세상의 풍조를 순수한 의도로 저지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집단적인 움직임을 “성경”이라는 절대적인 거울에 비추어 냉철하게 판단해야 한다. 동성애의 물결을 막아내려는 움직임은 가상하게 여겨질 수 있지만, “세상의 방법으로, 세상과 연합하여” 세상 법을 막아내는 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맡기신 사명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br/><br/>성경은 동성애에 대해서 단 한 번도 모호한 태도를 취한 적이 없다. 그 죄에 대한 구약의 심판은 명확하다. 『어떤 남자가 여자와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그들은 가증한 짓을 행한 것이니 그들을 반드시 죽일 것이며』(레 20:13). 율법하에서 세워진 신정통치 국가였던 이스라엘에서 동성애는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으며, 아사와 요시야 같은 개혁 군주들은 남색자들을 그 땅에서 물리적으로 쫓아냈다(왕상 15:12, 왕하 23:7).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도 동성애에 대한 심판의 무게는 변함이 없다. 로마서 1장은 동성애를 『본래대로 쓰는 것에서 본성을 거역하는 것』(롬 1:26)이라고 정의하며,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들이 마땅히 죽음에 처해져야 한다는 하나님의 심판』(롬 1:32)을 선언한다. 비록 신약 교회가 그들을 물리적으로 처형할 권한은 없지만, 동성애가 영원한 멸망의 형벌, 곧 지옥에 던져질 죄라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동성애의 본성을 주신 적이 없다. 그것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한 인간이 스스로 선택한 타락의 결과일 뿐이다.<br/><br/>문제는 “동성애”라는 죄에 대처하는 배교한 교회들의 방식이다. 소위 “교회”라는 곳들이 거듭나지 않은 시민 단체들과 연합하여 투쟁하는 것은 그들이 거듭나지 않았고 세상과 동일한 영을 지녔다는 증거이다. 시민 단체들이 동성애를 반대하는 이유는 “성경적 거룩함” 때문이 아니라, “전통적 윤리,” “여성의 안전,” “사회 질서” 등 인본주의적 가치 때문이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다음과 같은 성경의 경고에 귀 기울여야 한다. 『믿지 않는 자들과 멍에를 같이 메지 말라. 의가 불의와 어찌 관계를 맺으며 빛이 어두움과 어찌 사귀겠느냐?』(고후 6:14) 교회가 하나님의 법을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세상 사람들과 손을 잡는 것은 “영적 간음”이다. “롯”이 소돔의 죄악을 막겠다고 “소돔 시민들과 연대”했다면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천사들을 통해 롯의 손을 잡아 이끌어 그 성읍을 빠져 나오게 하시지 않았던가?(창 19:16) <br/><br/><br/>또한 우리는 신약교회사를 통해 교회의 역할을 확인해야 한다. 초대 교회를 비롯한 성경대로 믿는 신약 교회는 결코 물리력을 행사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법안을 통과시키거나, 법적 제도를 통해 교회를 위한 보호막을 치려고 하지 않았다. 신약성경의 그 어떤 장을 넘겨보더라도, 사도들이 지역 시민들과 연합하여 그리스도인에게 유리한 규례를 제정하려고 사회운동을 벌였다는 기록은 없다. 오히려 성경은 일관되게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라.』(롬 13:1, cf. 벧전 2:13)라는 준엄한 명령을 내리고 있다. 이것은 악법에 동조하라는 뜻이 아니며, 교회의 영적 싸움이 세상 법을 바꾸는 정치적이고 물리적인 투쟁이 아니라는 뜻이다(고후 10:3-5). 『악한 사람들과 사기꾼들은 더욱 악해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리라.』(딤후 3:13)라는 말씀처럼, 세상은 더욱 악해져서 “동성애자 적그리스도”(단 11:37)를 그들의 통치자로 받아들일 것이고, 이것은 인간이 결코 막을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이다. 그리스도를 거부한 세상은 적그리스도를 영접할 것이다(요 5:43). 동성애를 인위적으로 막기 위해 교회가 정치적 집단이 되는 순간, 복음의 능력을 상실하고 세상의 조롱거리로 전락할 뿐이다. <br/><br/>오늘날 교계가 차별금지법 저지에 사활을 거는 이면에는 “법적인 보호막이 없으면 설교할 수 없다”는 두려움이 깔려 있다. 그러나 주님의 사도들은 복음 전파가 막힐 때 물리적으로 저항하지 않았고, 기꺼이 감옥행을 택하며 진리를 선포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 역시 우상 숭배를 강요하는 법 앞에서 정치적 타협 대신 “용광로”를 택했다. 그리스도인은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통과되어 설교하다가 감옥에 갈지라도, “동성애는 지옥에 갈 죄”라고 강력하게 외칠 수 있는 담대함이 넘치는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어야 한다. 광장의 함성에 휩쓸려 영적 분별력을 잃지 말라. 세상이 “동성애자들의 소돔”(창 19:5)이 되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때가 다가옴을 알리는 성경적 징조이다. 악한 현 시대를 이기는 힘은 700개 단체의 성명서가 아니라, 세상과 구별된 성도의 “거룩한 삶”과 “타협 없이 선포하는 진리”에 있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4 Feb 2026 09:28:1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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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영성”이란 것은 성경에 없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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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요즈음 신학적 담론에서는 “영성”이라는 키워드가 어딜 가나 빠지지 않는다. 배본철 성결대학교 명예교수는 “영성”에 관한 논의가 “21세기를 맞이한 현대 기독교회와 신학계의 최대 관심사” 가운데 하나라고 이야기했다. 인공지능을 비롯한 기술의 발달로 인해 조성된 위기감은 안 그래도 뜨거웠던 “영성”에 대한 관심에 기름을 부었다. 이것이야말로 기계가 따라할 수 없는 영역이요, 자신들의 “밥그릇”을 지켜 줄 최후의 보루라고 여긴 사역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영성”이라는 주제를 탐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오륜교회를 설립한 김은호 목사는 올해 1월 기독일보와의 대담에서 “어떤 데이터나 누군가의 말을 인용하면, 성도들은 바로 그 자리에서 검색을 해 봅니다. 그래서 정말 깊은 영성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그런 영성이 없으면 목회하기가 더욱 힘들어진 요즘입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br/><br/>신학적, 목회적 고민과는 거리가 먼 교인들도 “영성”에 관심이 있기는 마찬가지다. 목회데이터연구소에서 작년 5월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전체 교인들 가운데 무려 83.9%가 영성 생활에 관심이 있다고 답했다. 교회 출석률이 점점 저조해지는 것과는 대조적인 결과였다. 최근 교인들이 소위 “SBNR”(Spiritual But Not Re- ligious), 곧 “종교적인 열성은 없어도 영적인 것에 대해 관심은 있는” 양상을 보인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데이터이기도 했다. 같은 달 교인들에게 담임목사로부터 가장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을 때는 “충만한 영성”(18%)이라는 응답이 “설교 능력”(13.7%)이라는 응답을 앞지르는 일도 있었다.<br/><br/>지난 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영성” (spirituality)이란 매우 생소한 개념이었다. 이동원 지구촌교회 원로목사는 2014년 미국에서 열린 한 컨퍼런스에서 “최근에 와서 영성에 대한 추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을 새로운 트렌드로 볼 수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영성”은 로마카톨릭이 60년대에 있었던 제2차 바티칸 공회 이후 고안해낸 단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공회를 통해 대대적인 개혁과 “평신도 친화 정책”을 펼쳤다. 그 일환으로 공회에서는 “인간의 존엄성을 증진하고, 인류 공동선을 실현하는” 것을 교회의 사명으로 천명했다. 이에 따라 일상의 삶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이웃 사랑”을 실천한다면, 설령 말씀과 기도를 통해 자신을 훈련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 되었다. 그간 미덕으로 강조되던 “수도원에 틀어박힌 성직자들”의 “경건”이 아닌, “천직에 열중하는 평신도들”의 “거룩함”이 카톨릭교도로서의 삶의 중심으로 제시되는 순간이었다(이들이 말하는 “경건”과 “거룩함”이 성경적인 개념과 괴리가 있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구태여 설명하지는 않겠다). 이러한 일대 전환이 대중들의 호응을 얻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복잡한 규례를 잘 몰라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다 보면 얼마든지 위대해질 수 있다는데, 누가 싫다고 했겠는가? 이처럼 “다양성”을 인정하는 로마카톨릭의 “진보적” 행보는 당대 세계의 정치, 종교계로부터도 박수갈채를 받았다. 사회복음적이고 종교 통합적인 분위기가 팽배해 있던 그 당시 사회는 그런 변화가 퍽 달가웠던 것이다.<br/><br/>공회를 마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카톨릭은 그들의 “새로운 개념”을 설명하려면 “거룩함”이라는 “구시대적 표현”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서인지 “거룩함”을 “영성”이라는 “현대인들의 언어”로 갈음하기 시작했다. 공식 석상에 나타난 교황들은 카톨릭교도들에게 “영성”을 강조하면서, “노동 자체가 영적인 것이다.”라는 둥, “고요한 삶에 영성이 있다.”라는 둥, “테러 발생 지역에서 봉사하는 게 나의 영성이었다.”라는 둥 떠들었다. 그러니 “영성”이라는 말은 비천한 몸을 입고 살아가는 인간의 삶과 인격을 예찬하는, 사람들의 호감을 사기 위해 고안된 단어였던 것이다.<br/><br/>이미 대세가 된 “영성 강조”의 흐름에 각 교단의 신학자들이 하나둘 편승함에 따라, 이제 “영성”은 신학교에서 “영성학”이라는 과목을 개설해서 가르칠 만큼 신학의 큰 줄기가 되었다. 당연하게도 “영성”은 그에 걸맞은 “세련된” 정의도 갖게 되었는데, “영성학”의 세계적 권위자인 산타클라라대학교의 예수회 신학교 명예교수 산드라 M. 슈나이더스는 “영성”을 이렇게 정의한다. “인간 주체에 속한 하나의 요소로, 인간은 그 능력을 통해 절대자와의 관계에 있어 스스로를 초월하는 통합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니까 현대에 신학적으로 논의되는 “영성”이란 인간의 잠재력을 개발하면 신과 같은 초월적 존재가 될 수 있다고 하는 신비종교나 영지주의 따위와 그 궤를 같이하는 개념인 것이다. 물론 교인들은 이렇게까지 고민해 보지는 않았을 테고, 그저 하나님과 가까워짐으로써 얻게 되는 초자연적 직관(?)이나 하나님께로부터 우대받는(?) 정도, 혹은 고상한 인품 같은 것을 “영성”이라고 여기는 듯하지만 말이다.<br/><br/>문제의 핵심을 말하자면, 성경에 “영성”이란 것은 없다. 단순히 성경에 나오지 않는 표현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비성경적인 개념이라는 뜻이다. “4차원의 영성”이니, “영성 학교”니, “영성 목회”니 하는 말들이 제아무리 제도화된 교계에서 통용된다고 해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성경 어디에 구도(求道)의 자세로 자신의 인생에 충실하면 그분과의 관계가 깊어진다는 말씀이 있던가?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일한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한, “영성”이 있었던 한 농부를 박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성”에 대해서 “악하다”고 평하기까지 하셨다(요일 3:12). 우리는 그가 누군지 안다. 바로 의로웠던 동생 아벨을 죽인 살인자 “카인”이다.<br/><br/>“영성학”은 그 대전제, 곧 우리 “인간 주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능케 한다는 것부터가 잘못되었다. 우리의 주체인 “혼”에는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기능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혼”이 아직 “사망”한 상태가 아님에도(계 21:8)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저마다의 미신에 빠져 살아가기 일쑤다(행 17:22,23).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을 알려면 “사망”한 상태에 있는 “영”이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엡 2:1-7). 그러면 성령님께서 그 거듭난 영과 하나가 되셔서 그 사람에게 주 하나님을 계시하시고, 그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도와주기도 하신다. 자학(왕상 18:28), 금욕(골 2:21-23), 외모(삼상 16:7), 자기기만(갈 6:3, 요일 1:8) 등으로 “우회로”를 찾아내려고 발버둥을 쳐봤자, 이 시대에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외에 존재하지 않는다.<br/><br/>혹자는 “영성”이란 “거룩함”이나 “경건”과 같은, 영적인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요소들과 비슷한 것인데 왜 문제가 되느냐며 의아해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어휘들을 무분별하게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하다가는 사탄의 계략에 걸려들기 십상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비슷하지만 다른 것”을 제시하여 혼란을 조장하는 것이야말로 사탄의 전매특허다(고후 11:13-15). <br/><br/>“영성”과 “거룩함, 경건”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결정적 간극이 있다. 바로 “영성”은 “개인”에게 속한다는 것이다. “영성”을 운운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어떤 개인의 삶, 경험, 노력, 혹은 그 사람 자체와 같은 것들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소위 “뛰어난 영성”의 소유자라고 불리는 사람들끼리도 그 “영성”을 나타내는 양상은 천차만별이다. 어떤 이들은 배를 곯아가며 남들을 도운 일로, 어떤 이들은 강단에서 발휘하는 번뜩이는 재치로, 심지어 어떤 이들은 타인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것으로 그 “영성”을 높이 평가받는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영성”이란 영적인 사람만이 소유한 무엇인가라기보다 사실상 “업적”이나 “장점” 혹은 “자아” 따위와 훨씬 가깝다. 그러니 혹자의 “영성”을 칭송하거나 인간 자신의 “영성”을 개발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인간을 높이는 가증한 짓이 된다.<br/><br/>반면 “거룩함”과 “경건”은 철저히 “하나님”께 속한다. 우리의 “거룩함”의 출처는 어디인가?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체이시다(고전 1:30). 그렇다면 “경건”의 출처는 어디인가? 그 의미 자체가 “하나님 같음”(godliness)인 데서도 알 수 있거니와 그 출처 역시 “하나님”이시다(벧후 1:3). 그래서 “자기 부인” 없이는 어떤 사람도 “거룩”할 수 없고, “경건”에 이를 수 없다. 애당초 우리 안에는 그런 선한 것이 있지도 않다(롬 7:18). 그것들은 모두 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들이기에, 누구에게서나 동일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즉 “거룩한 사람,” “경건한 사람”은 하나같이 성경이 죄라고 말씀하시는 것들을 멀리하고 또 미워하는 것이다.<br/><br/>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는 시대요, 가려운 귀를 즐겁게 해 주는 아첨꾼들의 시대에(딤후 4:3) “영성”이 주목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말씀을 따라 옳고 그름에 대한 객관적 판별을 추구하는 일보다, 느낌을 따라 “영성”에 대한 주관적 체험을 추구하는 일이 훨씬 인기가 있을 수밖에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자기 눈에 옳은 대로”(판 21:25) 성경에도 없는 영성을 추구하는 자들의 영적 상태에 무슨 개선이 있을 리는 만무하다. 정말로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 싶다면 그분께서 정하신 방법대로 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친구라면 모름지기 “나의 아버지께로부터 들은 모든 것들”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던가?(요 15:15)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을 읽도록 하라. 하나님과 가까워졌다는 “느낌”을 좇을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정말로 그분께 밀착하도록 하라!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4 Feb 2026 09:25:43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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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진화론”으로 침투하는 사탄의 계략</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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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지난 2월 12일은 “다윈의 날”(Darwin Day)이었다. 진화론자들은 &lt;종의 기원&gt;(1859)을 출간함으로써 창조론을 공격할 획기적인 기틀을 마련한 찰스 로버트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1882)을 추앙하며 그의 생일을 기념일로 삼고, 진화론과 관련된 행사를 진행해 오고 있다. 진화론자들은 다윈의 생일을 “다윈의 날”로 제정한 것과 함께 &lt;종의 기원&gt; 출간일인 11월 24일을 “진화의 날”로 정해 기념한다. 다른 과학자들에 비해 다윈을 특히 기념하고자 하는 데는 하나님께 도전하고 승리한 듯한 착각을 줌으로써, 인류에게 죽음과 지옥의 심판에 관한 현실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사탄의 계략이 숨어 있다. 다윈이 &lt;종의 기원&gt;(1859)을 출간한 지 167년이 지나는 동안 많은 진화론자들이 진화를 믿고 증명하려고 노력했으나, 그들의 노력을 보상해 줄 만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 진화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화석이나 관련 연구들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만 드러났을 뿐인데도 그들은 여전히 착각 속에 있다. 정직한 과학자들은 우주가 빅뱅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빅뱅 우주론”이나 유기물 원시 수프가 자외선을 받아 생명체로 변화되었다고 주장하는 “원시 수프 이론”이 확정된 과학 법칙에 역행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지만, 진화론자들은 하나님을 부인하기 위해 추측에 불과한 진화론을 여전히 부여잡고 있는 것이다. <br/><br/>우리나라는 “발명학회”가 일제강점기였던 1934년에 당시 세계 최고 과학자로 여겨지던 다윈의 기일(忌日)인 4월 19일을 “과학 데이”로 지정하고 과학기술 보급 행사를 개최하였는데, 이것이 “과학의 날”의 시초였다. <br/>“과학 데이”는 일제의 탄압으로 계속되지 못하였고, 대한민국 정부가 1967년 4월 21일에 과학기술처를 발족한 것을 기념하여 매년 4월 21일을 “과학의 날”로 정하면서 새로 시작되었다. “과학의 날”이 4월에 있기에 자연스럽게 4월이 “과학의 달”로 불리게 되었으며, 다양한 과학 행사들이 4월에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현재 진화론은 과학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에 항상 과학 행사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국립과천과학관”의 행사만 보더라도 “자연사관 탐구교실”에서 “진화와 핀치새”라는 주제로 전시 연계 체험교실 등을 운영한다. 핀치새는 갈라파고스 제도에 서식하는 조류로 각기 다른 먹이 환경에 적응하려고 서로 다른 부리 모양으로 진화한 사례로서 인용된다. 대중에게는 다윈의 자연선택설과 적자생존 이론에 결정적인 영감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먹이 종류와 부리 모양 사이의 필연성이 결여되어 있는데도 여전히 사실인 것처럼 잘못 교육되고 있다.<br/><br/>진화론을 확실히 지지할 만한 과학적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진화론이 확정된 과학 법칙에 역행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은 어떻게 해서 과학 교과서를 장악했고, 과학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제시되고 있는가? 어째서 각 국가의 교과서와 과학 행사에 진화론이 항상 포함되고 권장되는 것인가? 그것은 20세기에서 21세기에 걸쳐 전 세계 학문의 종주국으로서 자리 잡은 미국에서 사탄이 진화론에 관한 교육 정책과 교육법을 장악해 버렸기 때문이다. 사탄이 미국 교육계를 장악하는 데 이용한 진화론 관련 중요 재판이 세 차례 있었는데, 그것을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br/><br/>사탄의 첫 번째 전략은 학교 교육에 진화론을 침투시키는 것이었으며, 그 첫 걸음이 “버틀러법”에 대한 도전이었다. 1925년 테네시주는 “버틀러법”을 제정하여 공립학교에서 창조론만 가르칠 것을 법적으로 규정하고,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자 사탄은 “미국시민자유연맹”을 이용했다. 그들은 버틀러법이 헌법 위반이라는 주장을 하기 위해 일부러 “버틀러법”을 위반하는 사건을 만들었다. 즉 교사인 존 T. 스콥스가 고등학교에서 다윈의 진화론을 가르쳤다며 자기 자신을 고소함으로써 재판이 열리게 만든 것이다. “테네시주 대 스콥스 재판”이라 불린 이 재판에서 스콥스는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1927년 테네시주 대법원은 이 사건을 절차상의 이유로 기각했다. 사탄은 이 재판을 이용해 “진화론”을 “교육”이 아닌 “법”의 문제로 만들었다. 이후 40년이 지난 1967년에 버틀러법은 폐지되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미 사탄은 미국 공립학교에서 하나님과 성경을 몰아내고 있었다. 버틀러법 폐지 전인 1962년에 “엥겔 대 비탈레 재판”에서 “공식적인 기도”를 공립학교에서 금지하는 판결이 내려졌고, 1963년 “애빙턴 교육구 대 솀프 재판”에서 “성경 읽기”를 공립학교에서 금지하는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후 1980년에는 “스톤 대 그레이엄 재판”에서 “십계명 게시”를 공립학교에서 금지하는 판결이 내려졌다.<br/><br/>사탄의 두 번째 전략은 창조론과 진화론의 균형을 깨는 것이었다. 1981년 루이지애나주에서 “창조 과학과 진화 과학의 균형적 처우법”(약칭 “창조론 균형법”)이 통과되었다. 이 법은 공립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칠 경우, 반드시 창조론도 함께 가르쳐야 한다고 규정하는 법이다. 1987년 루이지애나주의 공립학교 생물학 교사였던 아귈라드는 이 법이 헌법에 위배된다며 소송을 제기했고, 당시 루이지애나 주지사 에드워즈가 소송을 방어하여 “에드워즈 대 아귈라드 재판”으로 불렸다. 결국 대법원에서는 “창조론 균형법”이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br/><br/>사탄의 세 번째 전략은 창조론을 공립학교들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것이었다. 2004년 펜실베이니아주 도버 교육위원회는 생물학 수업에서 진화론을 가르칠 때 “지적 설계”도 함께 소개해야 한다는 과학 정책을 제정했다. “지적 설계”란 “우주가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고도의 지적 수준을 가진 존재에 의해 설계되었다는 이론”이다. 도버 교육위원회는 학생들에게 진화론이 과학 법칙에 역행한다는 글을 읽게 하고, 진화론의 대안으로 “지적 설계”를 설명하는 책 &lt;판다와 인간&gt;을 읽도록 권유했다. 이에 사탄은 일부 학부모들로 하여금 “미국시민자유연맹”과 함께 소송을 제기하도록 만들었으며, 소송 원고 중 한 명이었던 키츠밀러의 이름을 따서 “키츠밀러 대 도버 재판”이라 불리게 되었다. 연방 법원은 “지적 설계”를 창조론의 변형으로 보고, 공립학교에서 “지적 설계”를 가르치지 못하도록 판결했다. 이렇게 사탄은 100년도 되지 않아 미국 교육 정책과 교육법에서 창조론을 완전히 몰아내고, 진화론을 유일한 과학으로 가르치게 만들었다. <br/><br/>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심판 사건의 결정문 중 보충의견에서 개역성경의 아모스 5:24인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찌로다.」를 인용했던 안창호 헌법재판관이 국가인권위원장 후보자로 대기 중이던 2024년 9월 1일, 그가 국회 인사청문회를 이틀 앞두고 “교육과정에서 진화론을 가르친다면 창조론도 가르쳐야 한다.”라고 한 말이 기사화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그는 정부를 대표하여 말한 것이 아니고, 단지 한 개인으로서의 의견을 제시했을 뿐이다. 우리 정부는 어떤 식으로든 창조론에 자리를 내준 적이 없다.<br/><br/>사탄의 계략에 의해 미국의 과학 교육이 무너진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나라의 상황은 더욱 열악하다. 애초에 성경적 배경이 없던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진화론을 과학으로 받아들여 가르쳐 왔기 때문에 창조론이 개입될 여지가 없었고, 공립학교들뿐만 아니라 기독교 재단에서 설립된 사립학교들도 대학 입시 등을 이유로 학교 교육 과정에서 진화론을 배제하지 못했다. <br/><br/>그러나 그리스도인 학부모들은 우리 믿음의 자녀들을 세상의 인본주의 교육과 진화론 속에 방치하지 말고, 바른 성경과 과학 지식으로 “빅뱅 우주론”이나 “원시 수프 이론”의 허구를 올바로 설명하고 “성경의 창조론”을 올바로 가르치는 학교에서 양육받도록 건전한 교육 환경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br/><br/>미국 공교육을 진화론으로 장악한 과정에서 본 바와 같이, 사탄은 작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거점을 마련하고, 조금씩 영향력을 확보하며 기회를 엿보다가, 끝내는 전부를 집어삼켜 버리는 전략을 구사한다. “진화론”과 “공산주의”는 사탄의 작품이기에, 중국 공산화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공산주의자 마오쩌둥은 “국공합작”을 이용해 중국 전체를 공산화했다. 중국 “국민당”(장제스)과 중국 “공산당”(마오쩌둥)이 공동의 적인 일본군을 막기 위해 일시적으로 손을 잡았으나, 그 일이 계기가 되어 공산당이 세력을 확장하여 민심을 얻었고, 결국 중일전쟁이 끝난 뒤에 벌어진 중국 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함으로 중국 전체를 장악했던 것이다. “점진적 잠식”이 바로 사탄의 수법이다. 그는 국가라는 거대한 조직뿐만 아니라, 한 개인을 무너뜨릴 때도 동일한 공식을 사용한다. 작은 방심을 틈타 거점을 확보하고, 눈치 채지 못할 속도로 영역을 잠식하여, 결국 삶 전체를 파멸로 몰아넣는다. 우리는 진화론을 통해 미국 교육의 근간을 뒤흔든 사탄의 전략을 거울삼아야 한다. 그에게 어떠한 틈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우리 자신과 자녀들을 온전히 지키는 영적 파수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7). 『사탄이 우리에게서 유익을 취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략을 모르지 않음이라』(고후 2:11).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3 Feb 2026 18:02:5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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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영계”(靈界)를 모르면 망한다</title>
<link>https://www.biblemaster.co.kr/bb5/%EC%98%81%EA%B3%84%E9%9D%88%E7%95%8C%EB%A5%BC-%EB%AA%A8%EB%A5%B4%EB%A9%B4-%EB%A7%9D%ED%95%9C%EB%8B%A4/</link>
<description><![CDATA[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땅”을 “허공”(虛空)에 매다셨다(욥 26:7). “우주”라 불리는 이 “허공”은 관측 가능한 은하의 수가 약 2조 개 이상이 되고, 우리가 사는 은하 내의 별들의 수는 약 1,000억 - 4,000억 개라고 한다. 우리의 지구와 태양계가 속한 은하를 단순히 “우리 은하”라고 하는데, 이를 칭하는 “은하수”(銀河水)는 “은빛으로 빛나는 강”이란 뜻이다.<br/><br/>“우리 은하”의 지름은 약 87,500광년이며, 중심핵은 직경이 약 10,000광년, 두께가 약 15,000광년이다. 지구가 속한 “태양계”는 은하의 중심이 아니라, 그 중심에서 약 26,000광년 떨어진 “오리온자리 팔”이라고 불리는 변두리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 인간은 이러한 우주에서 “하나님”을 찾겠다고 우주선을 발사해 왔지만, 그들은 “허공”에 가시적인 “물질계”와 비가시적인 “영계”가 공존한다는 점을 모르고 있다. 유리 가가린(Yuri Gagarin)에 이어 두 번째로 지구 궤도를 돈 소련의 우주비행사 게르만 티토프(Gherman Titov)는 직설적인 무신론 발언을 했는데, 그는 1962년 미국 방문 당시 기자회견에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주에 사신다고 하지만, 나는 주의 깊게 살펴보았어도 천사나 신을 한 명도 보지 못했다.”라고 했다(이 말은 “물질이 정신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유물론자들이 “무신론 공산주의”를 선전하는 데 매우 유용한 자료가 되었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1971년 달착륙선 아폴로 15호의 조종사로 참여했던 미국의 제임스 어윈(James Irwin)은 달에 다녀온 이후 “지구에서는 하나님에 대해 말로만 들었지만, 우주에서는 그분의 임재를 직접 느꼈다”면서 지구에 귀환한 뒤 주님을 섬기는 일에 헌신했다고 한다. 이것은 “우주”라 불리는 “허공”에 대한 인류의 상반된 인식을 보여 주는 매우 극명한 예가 아닐 수 없다.<br/><br/>“우주”라는 “허공”에 “물질계”와 “영계”가 공존한다는 것은 “몸”과 “혼”과 “영”을 지닌 사람이 알아야 할 매우 중요한 진리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물질인 “몸”으로만 살지 않고 비물질인 “영”으로도 사는 “혼”이기 때문이다. “혼”은 외부의 자극을 전달하는 “몸”에도 반응하고 하나님을 인식하는 “영”에도 반응하는 “자아”이다. 물리적 구조와 영적 구조가 공존하는 사람은 자신보다 먼저 창조된 “물질계”와 “영계”라는 두 세계에 알맞게 지음받았다.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몸]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콧구멍에다 생명의 호흡[영]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창 2:7). 『화평의 하나님 바로 그분께서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책망할 것이 없게 보존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노라』(살전 5:23). 사람이 “빵”으로만 살아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하는(마 4:4) 이유는,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사고 팔고, 심고 건축하는”(마 24:38, 눅 17:28) 일들이 사람의 일생을 구성하는 전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을 지닌 사람은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하고, “영의 호흡”인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감으로써 『한 영』이신 『하나님』(요 4:24)과 “접속”되어야 한다. 그러할 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물질계”와 “영계”를 균형 있게 누리는 인생을 살 수 있다. “영계”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물질계”에 『일곱 별과 오리온을 만들고... 낮을 밤으로 어둡게 만들며 바다의 물들을 불러 지면에다 붓는... 주』, 곧 하나님 자신을 『찾으라.』(암 5:8)라고 “사람”에게 명령하신다. “물질계”를 누림과 동시에 “영계”에 바르게 “접속”되어 있어야 할 의무가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몸, 혼, 영)대로 지음받은(창 1:26,27) “사람”은, 그런 면에서 “영들”인 “천사들”과 차별화된 매우 독특한 피조물이다.<br/><br/>클라렌스 라킨은 “사람의 삼중성,” 곧 “몸, 혼, 영”을 “뜰, 성소, 지성소”로 구성된 “성막”을 통해 설명한다. 「성막과 그 뜰은 “사람의 삼중성”과 같은 형태이다. “뜰”은 몸, “성소”는 혼, “지성소”는 영을 의미하며, 뜰에서 “지성소”로 통하는 길은 오직 “성소”를 통하는 길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몸과 영도 혼을 통하지 않고는 연결될 길이 없다. 성막이 다 완성된 후에도 하나님의 영이 내려와 지성소에 거하시기까지 그곳은 하나님의 임재 없이 비워진 채로 있었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몸과 혼과 영이 완전한 것 같아도 성령께서 사람의 영에 들어와 그 영을 살리시고 내주하시기 전까지 사람의 영은 거듭나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 일(성령의 내주 - 필자 주)은 거듭날 때(새로운 출생) 일어난다」(&lt;세대적 진리&gt;, p.183).<br/><br/>성막이 존재했던 목적은 사람이 그 가장 깊은 곳 “지성소”에 계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있었다. 뜰에서 잡은 짐승의 피 흘린 희생 제사를 통해 죄가 용서되었고(히 9:22), 지성소 “자비석”에 계신 하나님께로부터 자비가 베풀어졌다. <br/>성막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 하나님의 임재 장소인 “지성소”였듯이, 사람의 삼중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님께서 내주하실 수 있는 “영”(엡 3:16, 고후 4:7)이다. “지성소”에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성막이 아무 의미 없는 곳이었듯이, 성령님께서 사람의 죽어 있는 “영”을 다시 살려(엡 2:1) 그 “영”과 하나 되어(고전 6:17) 내주하시지 않는 한, 사람은 아무 의미 없는 인생을 살게 된다. 이러한 사람이 죽으면 “혼과 영”이 “몸”에서 떠나는데, “몸”은 예전에 있던 대로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셨던 하나님께로 돌아간다(전 12:7). “혼”은 “구원 여부”에 따라 그 목적지가 “낙원”(하늘나라)과 “지옥” 둘 중 하나로 달라진다(cf. 눅 16:23, 고후 12:4). <br/><br/>성령님께서 오신 뒤로 “혼”의 운명은 “영”의 상태에 달려 있다. “영”이 거듭났는가, 거듭나지 않았는가에 따라 “혼”이 구원의 생명을 누릴 수도 있고(벧전 1:9) 영원한 사망에 처해질 수도 있다(계 21:8). 성경에 계시된 이와 같은 진리를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은 이해할 수 없다. “영이 거듭나고,” 그 영 안에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이신 성령님께서 내주하셔야만 영적인 것들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2).<br/><br/>하나님께서 “허공”에 매다신 땅에 죄가 들어와 사람의 “영”이 죽어 버린 일의 이면에는 “허영심”이 있다.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고 “신들과 같이 되고자”(창 3:5) 했던 일이 발단이 되어 결국 세상에 죄가 들어오고 온 인류에게 사망이 전달되는(롬 5:12) 비극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고 “영계”와의 관계에도 “치명적 손상”을 입혀, 사람이 하나님이 아닌 사탄과 그의 세력, 곧 『정사들과 권세들과 이 세상 어두움의 주관자들과 높은 곳들에 있는 영적 악』(엡 6:12), 그리고 『미혹하는 영들과 마귀들』(딤전 4:1)과 “접속”되는 결과를 낳았으며, 이로써 마귀가 최초의 사람에게 불어넣은 “허영심”은 죄성을 물려받은 후손에게도 유전되어 부정적인 열매를 맺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고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너희는 더 이상 다른 이방인들처럼 허망한 마음으로 행하지 말라. 그들 마음의 완고함 때문에 그들 안에 있는 무지를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에서 멀리 떨어졌고 그들의 명철은 어두워졌으며 감각을 상실하여 자신을 방탕에 내어주어 욕심으로 모든 불결한 것을 행하느니라』(엡 4:17-19). 이 말씀에서 보듯이, “허망한 마음,” 곧 “허영심”의 특징은 “명철을 어둡게 하고 감각을 상실케 하여 죄를 짓게 한다”는 데 있다. 이러한 일이 거듭나지 않은 이방인들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사도 바울의 가르침인데, 왜냐하면 그가 “그리스도인”을 향해서 『너희는 더 이상 다른 이방인들처럼 허망한 마음으로 행하지 말라.』라고 명령하기 때문이다. <br/><br/>“허영심”을 품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명철은 어둡게 되며 감각을 상실하여 욕심으로 죄를 짓게 되지만, 그 자신은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는 특징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성도는 “왕년에 내가 이런 사람이었다.”라고 교회 성도들에게 자랑하면서 성도들 위에 군림하는 태도를 취하는데, 그 자신은 주님을 위해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으면서, 단지 자기가 세상에서 “대단한(?)” 일을 했다는 사실만을 중요하게 여긴다. 어떤 성도는 “나는 교회에서 직분을 가지고 있다. 나는 주님의 사역을 하는 사람이다.”라고 자부하거나 남이 그렇게 소개해 주는 걸 좋아하는데, 이 역시 “허영심”이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두려워하며 매주 발표되는 구령 결과 보고에 지나치게 민감한 성도도 있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오면서 누구 보란 듯이 외모를 지나치게 꾸민 탓에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상실해 버린 성도도 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찾고” “배우고” “섬기는” 목적(!)이 정상적인 성도들과 다른 이들이며(사 58:1-4), 결과적으로 기도응답이 되지 않는다(사 59:1,2). <br/><br/>그리스도인에게 “허영심”이 자리잡으면, 무엇보다 “영계에 속하신 성령님”과의 관계가 단절된다. 성도의 거듭난 영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께서는 성도가 하나님을 섬길 능력을 주시는데, 즉 “복음 전파”(행 1:8)와 “넘치는 소망”(롬 15:13), “풍성한 삶”(엡 3:20)이 모두 성령님께로부터 나오는 능력의 결과이다. “허영심”은 성도에게서 이 모든 가능성을 끊어 버림으로써 “성령의 열매”(갈 5:22,23)도 맺지 못하고 “성령 충만”(엡 5:18,19)도 경험할 수 없는 육신적인 삶을 살게 한다. 허영으로 마음이 들뜬, “물기 없는 구름”과 같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성경은 『어떤 일도 다툼이나 허영을 따라서 하지 말고 오직 생각의 겸손함으로 남을 자신들보다 존중하』라고 명령한다(빌 2:3). 성도의 “허영심”은 사실상 “영계”에 대한 그의 무지를 보여 준다. 그런 성도가 “영적으로 망하지” 않은 경우는 지난 2천 년 신약교회사에 단 한 번도 없었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3 Feb 2026 17:55:43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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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말씀이 역사하지 못하는 성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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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성경대로 믿는 지역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복된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승인을 받아 세워진 그곳에는 바른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을 믿음과 실행의 최종권위로 삼아 올바르게 가르치고 인도하는 목자가 있으며, 무엇보다 『하나님의 본성에 동참』(벧후 1:4)한 신실한 성도들이 함께 교제하며 주님을 섬기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러한 영적 풍토 속에서 마땅히 건강하게 성장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와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오히려 성경대로 믿는 교회에 적응하지 못해 실족하거나, 심지어 교회에 “반기”를 들며 “배교”하는 이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성경대로 믿는 교회와 목자가 바른 성경에 입각하여 올바르게 가르치고 인도한다는 사실이 명백하다면, 문제는 결국 그들 자신에게 있다. 이들의 근본적인 결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마음의 상태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안에서 효과적으로 역사하지 못한 것이다. 그 결과 말씀의 열매를 맺지 못한 그들은 “쭉정이”로 전락하여 믿음을 지키지 못한 채 날아가 버리고 만 것이다(시 1:4).<br/><br/>도대체 왜 성경적인 설교와 바른 말씀에 근거한 가르침을 듣고서도 믿음이 자라기는커녕, 오히려 침체되거나 퇴보하는 이들이 계속 나오는가? 이는 성경대로 믿고 실행하려 하기보다 육신적인 발상으로 하나님을 믿으려는 습관, 그리고 세상 지향적인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중심이 온통 세상일에만 쏠려 있다 보니,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가서 이생의 염려와 부와 쾌락에 억눌려 온전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지』(눅 8:14) 못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움으로 받는 대신 육신적인 편견과 아집으로 판단하기에 급급한 성도는, 정작 자신 안에서 역사하려는 말씀의 기운을 막아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영적 정체를 방치하면 결국 실족하고 배교에 이르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단순히 성경대로 믿는 지역 교회에 출석한다는 “의무감”이나 “소속감”만으로는 결코 신앙을 지켜낼 수 없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현재 자신의 삶에 말씀의 열매가 맺히고 있는지를 스스로 점검하고, 말씀의 역사를 가로막는 원인을 철저히 찾아내어 조속히 해결해야 마땅하다.<br/><br/>그리스도인이 바른 성경에 근거한 진리를 배우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근본 원인은 “세상 지향적”인 가치관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염려들과 재물의 속임수와 다른 일들에 대한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억눌러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들』(막 4:19)이라고 지적하셨다. 즉 성도의 마음속에 이 세 가지 요소가 자리 잡고 있으면 말씀의 기운이 막혀 아무런 영적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일에 마음을 빼앗긴 성도는 그와 같은 『가시떨기』(막 4:18)의 실체를 명확히 간파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속히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좋은 땅”으로 가꾸어야 한다.<br/><br/>그러한 가시떨기 중에서도 우선적으로 경계해야 할 것은 우리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이 세상의 염려들”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야 할 중차대한 순간에 집안의 소소한 일이나 직업상의 염려가 떠올라 집중을 방해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성도는 목자가 심혈을 기울여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은혜로 받아 자신 안에서 효과적으로 역사하게 해야 함에도, 『이생의 염려』(눅 8:14)가 마음을 짓눌러 말씀의 성장이 방해받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려면 “염려하지 말라”는 주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해야 한다. 우리가 염려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것이다. 『너희의 염려를 다 하나님께 맡기라. 이는 그분께서 너희를 돌보심이니라』(벧전 5:7). 그리스도인이 감사함으로 기도할 때 우리를 돌보시는 주님께서는 마음의 평강을 약속하셨다(빌 4:6,7). 우리는 이 약속을 굳게 믿고 실행함으로써 마음의 밭을 일구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경청하고 집중하는 데 전념해야 한다.<br/><br/>또한 그리스도인은 말씀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방해하는 “재물의 속임수”를 주의해야 한다. “재물”은 본래 사람들로 하여금 더 큰 애착을 갖도록 유혹하는 성향이 강하다. 여기에 걸려든 사람들은 “물질만능주의”를 옳게 여기는 미혹에 빠져 결국 “부자”가 되고픈 욕망에 사로잡히고 만다. 그러나 세상의 수많은 이들이 오직 “돈” 때문에 파멸에 이르는 사례는 결코 적지 않다. 그리스도인이 “부”의 실체를 간과하는 순간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져 믿음에서 떠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니, 이것을 욕심내는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방황하다가 많은 슬픔으로 자신들을 찔렀도다』(딤전 6:10). 말하자면 세상은 성도의 마음에 『다른 일들에 대한 욕심』(막 4:19)을 집어넣어 말씀의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누가복음에서 이를 『쾌락』(눅 8:14)이라고 기록한 것은, 쾌락을 추구하는 근원이 바로 인간의 욕심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러한 탐심을 『우상 숭배』(골 3:5)라고 규정하며,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는다고 경고한다(약 1:15). 이처럼 탐심은 말씀의 기운을 막아 우리의 마음을 질식시켜 버린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한 무의미한 “집착”을 과감히 버려야 한다. 먹을 것과 입을 것으로 마땅히 만족하며(딤전 6:8), 불확실한 재물이 아닌 모든 것을 풍요하게 주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만을 온전히 신뢰해야 한다(딤전 6:17).<br/><br/>위와 같은 권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시떨기 사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성도는 “데마”처럼 이 세상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딤후 4:10). 데마의 인생은 안타깝게도 “배교”로 종결되었다. 그가 세상을 사랑하게 된 순간, 이미 그의 안에서 말씀이 역사하지 못했음이 틀림없다. 성도가 세상을 사랑하는 순간 자신 안에 하나님께서 자리 잡으실 수 없음을 유념해야 한다(요일 2:15,16). 그렇기에 성도는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성별하고(롬 12:2),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사모하는 열정으로 말씀을 듣고 배우는 일에 열중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좋은 땅』과 같은 『정직하고 선한 마음』(눅 8:15)을 갖출 수 있다. 이처럼 준비된 마음이 될 때, 성경대로 믿는 교회에서 선포되는 참된 말씀이 그 성도 안에서 효과적으로 역사하여 비로소 열매 맺는 삶을 풍성히 향유하게 될 것이다.<br/><br/>그리스도인 안에 말씀이 역사하지 못하는 또 다른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말”로 판단하려는 데 있다. 『이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들의 말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사실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음이니, 이 말씀이 믿는 너희 가운데서도 효과적으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성경대로 믿는 지역 교회 내에서 성도마다 영적 성장과 삶의 질에 차이가 나는 이유가 무엇인가? 바른 말씀인 &lt;한글킹제임스성경&gt;을 똑같이 배우고 공부함에도 동일한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원인은 “말씀을 대하는 자세”에 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한 인간”의 설교로 치부하여 판단하고 불신하거나 안일하게 대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행위이며, 성경은 그런 자가 “멸망”할 것이라고 엄중히 경고한다(잠 13:13).<br/><br/>지역 교회에서 선포되는 능력 있는 말씀 앞에 반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지 않은 자들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들을 듣느니라.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들을 듣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음이라』(요 8:47). 단순히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만으로 신실한 성도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사역자의 열정적인 권면을 알아듣지 못하고 멸시하는 자들은 영이 다른 자일 수 있으며, 결국 믿음의 대열에서 이탈하게 된다. 우리는 이런 자들이 언제든 교회에 들어올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행 20:29).<br/><br/>그러나 거듭난 성도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 게으르고, 성경 말씀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성도 역시 믿음의 대열에서 이탈할 수 있다. 교회와 목자에 대한 육신적인 편견이나 쓴 뿌리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는다면, 그 사람은 피폐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주여, 말씀하소서. 주의 종이 듣나이다.』(삼상 3:9)와 같은 자세로 경청하며 순종해야 한다. 그럴 때 그 사람의 마음은 “좋은 땅”이 되어 말씀이 잘 심겨지고, “삼십 배, 육십 배, 일백 배”의 열매를 맺게 된다.<br/><br/>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을 기록된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성도 안에서만 효과적으로 역사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바른 성경인 &lt;한글킹제임스성경&gt;의 예언들을 신뢰하며, 그것을 있는 그대로 선포하는 설교와 강의를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들”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한 성도에게서는 육신적인 습관과 세상 지향적인 가치관이 사라지고,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삶의 변화가 나타나며(갈 5:22,23),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구령의 열매도 맺힌다(잠 11:30).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면서(딛 2:13) 다가올 영원에 삶의 초점을 맞추고(고후 4:18) 세상으로부터 성별된 헌신적인 삶을 살게 된다. 이런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이며, 이런 성도가 지역 교회에 많아질수록 교회가 더욱 강성하게 성장한다. 당신도 하나님께 인정받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고 싶은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 안에 역사하도록 하여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하라.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7 Jan 2026 17:48:21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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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기술이 신이 되는 사회 (1) AI신(神)의 등장</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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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2022년 11월 “오픈 AI”에서 “생성형 AI”인 “챗GPT”를 공개했다. 챗GPT는 채팅 인터페이스를 통해 자연어 텍스트를 생성하는 혁신적인 AI 모델이다. 자연어 처리가 가능한 대화형 인터페이스를 사용하기에 사람과 고도의 상호작용이 가능하다. 그래서 실제 사람과 대화를 주고받는 것처럼 AI와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다. 생성형 AI에는 챗GPT 외에도 “미드저니,” “달리,” “쥬크덱,” “뮤즈넷,” “소라” 등 목적에 따른 여러 모델이 존재한다. 이와 같은 AI 기술은 이미 의료, 금융, 제조, 운송, 교육 등 산업 전반에 사용되며, 활용 범위가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는 사회 전반에 많은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있는데, 종교계 또한 예외는 아니다.<br/><br/>특히 불교계는 AI를 포교와 수행에 적극 활용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는 “진우”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이 신년 간담회에서 “인공지능(AI) 시대를 두려워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선도하며, 그 성과를 다시 마음 평안과 깨달음의 길로 회향하고자 합니다.”라고 발언한 내용에서도 확인된다. “AI부디즘연구소”의 소장인 “보일” 승려는 “AI 스님”에 대한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서 “AI 스님은 인간 스님의 ‘보조자’나 ‘대체재’가 아닌, 독특한 방식으로 불법(佛法)을 체현하고 전파하는 새로운 유형의 지적 존재로서 이해될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br/><br/>이와 같은 AI에 대한 수용적인 태도는 기독교계도 마찬가지다. AI는 이미 목회 현장이나 신학 연구의 “보조 도구”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목회자데이터연구소”에서 목회자의 챗GPT 사용 실태 조사를 진행했는데, 2023년도 사용률은 41%였으나 2025년도에는 80%로 약 두 배가량 급격히 증가한 것으로 조사됐다. 더욱이 설교 준비에 있어 향후 AI의 역할을 물은 결과 응답자의 44%가 필수적인 도구가 될 것이라고 답해 AI 활용의 보편화를 예견했다.<br/><br/><br/>교인들도 AI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개인 묵상 파트너로서 성경에 대해 질문하거나 기도문 작성에 도움을 얻기도 하며, 위로를 받거나 신앙 상담 창구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초창기에 “주님 AI”에서 “초원 AI”로 명칭을 바꾼 국내 묵상 앱이 2025년 8월 기준으로 약 80만 명 이상의 가입자 수를 기록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해외의 “AI Je- sus”나 “Ask Bible” 같은 AI 기반 앱들 또한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으며 사용자들이 급증하는 추세다. <br/><br/>이와 더불어 핀란드의 “세인트 폴 루터교회”에서는 AI가 설교문을 작성하고 찬송을 작곡하며 시각 자료를 제공하는 등 예배 인도 실험을 진행했다. 독일 바이에른주의 “성 바울 교회”와 미국 텍사스의 “바이올렛 크라운시티 교회”에서도 이와 비슷한 실험을 수행했다. 스위스 루체른의 성 베드로 성당에서는 “기계 속의 신”(Deus in Machina)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생성형 AI 기술로 “AI 예수”를 구현하여 고해소에 설치한 것이다. 이에 천 명 이상이 방문해 AI와 대화했고, 230명의 피드백 중 3분의 2가 “영적인 경험”을 했다고 응답했다. 여러 갑론을박이 있겠지만 현 세태를 냉정히 보면 사람들은 이미 AI에게 신으로서의 역할과 지위를 부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br/><br/>거듭남이 없는 종교나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의 교회는 혼적 달관을 추구한다. 이송오 목사는 “혼적 달관은 사람이 겪을 수 있고 사람에게 닥칠 수 있는 근심, 걱정, 위험, 위기 이런 것들을 의식적으로 망각하거나 체념하고, 그런 일에 매이지 않으며 자기만이 설정해 놓은 가치관과 의미를 부여하여 그것을 진리인 양 붙들고 사는 삶의 한 방편이요 자세를 말한다.”라고 했다. 그렇기에 거듭나지 않은 채 혼적 달관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에 따라 그들이 붙잡는 것은 무엇이나 그들의 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돌이든 나무이든, 또 사람의 형상이든 짐승의 형상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심지어 그것이 AI가 되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다. 이러한 혼적 달관은 결국 대환란 때에 적그리스도 숭배로 이어짐을 알아야 한다. 『그가 짐승 앞에서 행할 권세를 받아 그 같은 기적들을 통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또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말하기를 칼로 상처를 입었다가 살아난 그 짐승을 위하여 형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더라. 또 그가 짐승의 형상에게 생명을 주는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형상으로 말도 하게 하고, 그 짐승의 형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죽이도록 하니라』(계 13:14,15).<br/><br/>요한계시록 13장에는 두 짐승이 등장한다. 그 장의 1-10절에 나오는 짐승은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으로 적그리스도다. 적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모방한 기적을 세상에게 보여 준다(계 13:1-3,14). 이 짐승 앞에서 행할 권세를 받은 자 또한 짐승이라고 불리는데, 이 자는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으로, “거짓 선지자”이다(계 13:11). 이 거짓 선지자가 생명을 주는 권세를 받아 짐승의 형상, 즉 적그리스도의 형상에 생명을 주어 말도 하게 하는 기적을 보이는 것이다. 물론 짐승의 형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지금의 휴머노이드에 AI를 결합시킨 것을 연상시킨다. <br/><br/>거듭나지 못한 종교인들의 혼적 달관은 현실의 고통과 위기를 의식적으로 외면하며 자신만의 가치관을 진리로 믿는 삶의 자세이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돌과 나무, 심지어 AI조차도 본인의 마음에 따라 신으로 섬길 수 있다. 이와 같은 영적 분별력 결여는 다가올 대환란 때에 적그리스도를 아무런 거부감 없이 숭배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다.<br/><br/>특히 성경은 무서운 용모를 한 적그리스도가 난해한 문장들을 깨닫는 능력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한다(단 8:23-25). 불가사의한 비유 속에 감추어져 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운 글들을, 지금의 AI나 곧 등장할 범용인공지능(AGI)이 명쾌하게 해석해 낼 수 있게 됨으로써 그 예언의 말씀이 성취될 가능성이 열리고 있다. 짐승의 부활과 하늘에서 땅 위로 불이 내려오는 기적들 속에서(계 13:13,14), 그동안 거듭남 없이 혼적 달관만을 추구하며 AI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적그리스도와 그 형상 앞에 엎드려 경배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br/><br/>AI의 등장에 종교인들, 특히 기독교인들은 이를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하지만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이에 대해 별다른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참된 기독교 신앙은 AI가 넘볼 수 없는 “영”에 속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현 세상 사람들과 세상 종교들이 AI와 관련하여 마치 자신들이 영적인 것들을 다루는 것처럼 여기지만, 이는 혼적 달관 가운데 혼적인 것을 영적인 것으로 착각하여 내놓은 것에 불과하다. 설령 영적인 것들과 관련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악령들의 역사에서 오는 것일 뿐 전혀 영적이지 않다. 말하자면 영적인 것은 거듭남 없이는 논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한 영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한 영이시니 그분께 경배드리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경배드려야만 하리라』(요 4:24). 삼위일체의 하나님(요일 5:7)께서는 그분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 1:26,27). 그렇기에 사람은 영, 혼, 몸의 삼중구조로 된 존재인 것이다.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몸] 그의 콧구멍에다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으시니[영],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혼]』(창 2:7). 사람의 삼중성은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말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창 2:17). 아담이 이브가 건넨 열매를 먹었을 때, 그 날에 죽었던 것은 아담의 영이었다. 왜냐하면 아담은 범죄했음에도 구백삼십 년을 살고 죽었기 때문이다(창 5:5). 이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탓에, 그 후로 온 인류가 영이 죽어 버린 아담의 형상을 따라 영이 죽은 채로 태어나게 된 것이다(창 5:3, 엡 2:1).<br/><br/>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담이 잃어버린 형상을 회복시키려고 이 땅에 오셨다. 바로 이 주님께서 “육신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므로, 내가 너희에게 너희는 거듭나야만 한다고 말한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요 3:6,7)고 말씀하신 것은 “영의 거듭남”을 강조하신 것이었다. AI가 마치 신처럼 인간의 영의 문제를 다룰 수 있으리라고 여기는 거듭나지 않은 죄인들과 세상 종교들, 그리고 거듭나지 않은 채 습관적으로 교회만 다니는 이 땅의 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너의 문제는 바로 너의 죽어 버린 영이다!”라고 엄중히 말씀하시는 것이다. 죽은 영이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는 믿음이 필요하다(롬 10:9,10). 주님의 보혈을 통해 죄 문제를 해결할 때, 성령께서 그 사람 안으로 들어가시어(롬 8:9) 그의 죽은 영을 살리시는 것이다. 그렇게 영이 거듭난 그 사람만이 비로소 하나님과 영교를 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은 참된 기독 신앙에 있어서 AI는 단순한 도구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br/><br/>이제 사람들은 AI가 제시하는 답을 맹신하면서 AI를 신의 위치에까지 높이고 있다. 그러나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기술이 아닌 주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사람이다. 사람은 먼저 영이 거듭나야 하며, 주님께서 주신 거룩한 말씀과 지식을 마음에 깊이 간직해야 한다. 이처럼 주님을 향한 온전한 신뢰가 마음에 굳게 자리 잡을 때, 비로소 기술이 신이 되려 하는 마지막 시대의 거센 조류에 휩쓸리지 않고 믿음을 지켜 낼 수 있는 것이다. 『너는 귀를 기울여 현명한 자의 말들을 듣고, 내 지식을 네 마음에 두라. 그것들을 네 속에 간직하면 즐거움이 있나니, 그것들이 모두 네 입술에 바르게 자리잡으리라. 너의 신뢰가 주께 있게 하려고 오늘 내가 너에게 이것을 알게 하였으니, 바로 너에게라』(잠 22:17-19). BB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7 Jan 2026 17:47:00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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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70주년 극동방송”의 70년 허송세월</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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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정교(政敎) 유착, 비성경적 방송 운영 등으로 빈번한 비난과 질책을 받아 온 극동방송이 올해로 창사 70주년을 맞이했다. 1956년 12월 23일부터 하루 두 시간 정도의 대북 복음 방송으로 첫 전파를 발송한 극동방송은 창사 당시 명칭이 “국제복음방송국”이었다. 1967년에 현 마포구 사옥으로 이전하면서 “극동방송국”으로 명칭을 바꾸었고, 1979년에 상호명을 “(재)극동방송”으로 변경하여 비영리재단법인으로서 운영되고 있다. <br/><br/>창사 이래 지금까지 “복음 방송”의 사명에 최선을 다해 왔다는 극동방송의 창사 70주년 슬로건은 “복음전파 70년, 그리고 영원히!”이고, 사역 표어와 주제 성구는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사 43:19)이다. 그들이 바른 성경 교리에 무지한 곳이라는 사실은 슬로건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나는데, 교회 시대의 “은혜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중 재림하시어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휴거될 때까지만 전파되는 것이지 결코 “그리고 영원히”가 아니다. 교회 시대 이후로 오는 환란 시대는 “믿음과 행위”로 구원받기에 “오직 믿음”으로의 교회 시대 교리가 연장되지 않는다. 대환란 이후의 천년왕국 시대에는 왕국 헌법(마 5-7장)을 지키는 “행위”로 구원받는다. 따라서 “복음전파 70년, 그리고 영원히!”라는 슬로건은 성경적 시대를 구분할 줄 모르는 이들의 발상이자, 교회의 휴거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지 않는 이들의 구호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게 바른 성경 교리에 무지하기에 “복음 방송 사역을 한다”는 원래의 취지를 온전히 수행하지 못했고, 오히려 방송 청취자들에게 비성경적인 실행으로 나쁜 영향을 줌으로써 하나님께 쓰임받지 못하고, 그 오랜 70년이란 세월을 헛되이 보낸 것이다.<br/><br/>극동방송은 창사 70주년을 맞이하여 지난 1월 5일 오전 11시, 대전 ICC호텔 그랜드볼룸홀에서 3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극동방송 창사 70주년 발대식”을 개최했다. 발대식의 취지는 “1956년 창립 이래 70년 동안 방송 사역을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그동안 기도와 후원으로 동역해 온 전국의 청취자들과 교회에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하고자 준비한 창사 70주년 기념 사역 계획을 발표하는 것”이었다. 이날 발대식은 1부 예배와 2부 발대식 행사로 나뉘어 진행됐는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원래 “발대식”이란 “일정한 편제를 갖추어 조직된 단체가 만들어져 그 활동을 시작하는 공식적인 모임”을 의미하기 때문에 “새로 시작되는 조직”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70주년 기념 사역을 위한 새로운 조직을 만들지도 않고 “발대식”이란 이름을 붙여 명칭부터가 어색한 행사가 되고 말았다. “‘70주년 기념 사업단’ 발대식”처럼 70주년 기념 사역을 위한 새로운 기관이 행사명 안에 제시되어야 했는데, 준비되지 않은 행사를 급히 진행하느라 담당 기관도 새로이 설치하지 못하고 기관명도 정하지 못한 채, 엉성하게 행사부터 진행한 것으로 판단된다.<br/><br/>1부 설교는 극동방송 재단이사인 조봉희 목사가 전했다. 그는 극동방송 70주년의 의미와 복음 방송 사명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면서 “지난 70년의 은혜에 감사하며, 앞으로도 오직 복음으로 시대를 섬기는 방송이 되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자신의 설교에서 극동방송이 지난 70년간 “오직 복음으로 시대를 섬기는 방송”으로서의 사명을 다해 왔기에 하나님과 성도들로부터 은혜를 받은 것처럼 그들의 방송 사역을 포장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처럼 말했으나, 그것은 그간 있어 온 극동방송의 비성경적 실행에 대한 질책에 관해 아무런 반성도 하지 않는, 그들만의 “자축”과 “자화자찬”이었을 뿐이다.<br/><br/>2부 발대식에서는 창사 70주년을 기념한 주요 사역 계획이 발표됐다. 극동방송은 “지난 70년간 함께해 온 한국 교회의 기도와 헌신을 기리고, 교회 성장이 어려운 현 시대 속에서 전국 70개 미자립 교회를 돕는 사역을 통해 침체된 교계에 새로운 소망과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그 방송의 이사장인 김장환 목사는 70개의 미자립 교회를 돕게 된 배경으로 “지난 70년 동안 극동방송이 받은 은혜를 한국 교회에 흘려보내기 위해 마련했다. 70주년 기념행사로 단순한 이벤트를 여는 것이 아닌 전국의 어려운 교회 70곳을 선정해 13개의 전국 극동방송 지사들이 함께 도우려 한다. 이를 통해 한국 교회가 다시 일어나고 부흥의 역사가 펼쳐지길 소망한다.”라고 밝혔다. <br/><br/>김 이사장이 내세운 70개의 미자립 교회 지원은 부흥을 빙자한 포장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진정으로 “국제 복음 사역”에 뜻이 있었다면 최소한 해외 선교사 지원 체계를 수립하고 장기적 비전을 내놓았어야 했다. 이 나라의 8만 개의 교회 앞에서 고작 70개 교회의 지원을 내세우며 부흥을 논하는 것은, 70주년 기념용 생색내기를 거창한 사업으로 둔갑시키려는 의도가 아닐까. 김 이사장을 비롯한 전체 극동방송 직원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교회의 부흥은 그 같은 이벤트로 성취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모든 한국 교회가 바른 성경인 &lt;한글킹제임스성경&gt;을 믿음과 실행의 최종권위로 믿고 “바른 복음”과 “바른 진리”를 선포할 때 비로소 참된 부흥이 시작될 수 있다.<br/><br/>김장환 목사는 극동방송의 방송국장(1977-1979), 사장(1979-2008), 이사장(2008-현재)을 역임하면서 약 50년간 정치 권력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특히 전두환 전 대통령의 추도식이나 특정 정치인의 행사에서 신앙적 권위를 빌려 그들을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하거나, 방송을 통해 특정 정당의 논리를 일방적으로 전파하는 경우가 잦았다. 특히 전두환 전 대통령은 극동방송 창사 50주년 기념행사에서 축사를 한 바 있고, 2007년 11월 김장환 목사가 원로목사로 있는 수원중앙침례교회 추수감사절 예배에 참석해 약 10분간 축사를 하기도 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야 할 설교 강단에 불교인이 올라가서 축사를 하고 박수까지 받았다고 하니, 과연 그 목사에 그 교인들이 아닌가?<br/><br/>극동방송은 복음 방송을 위해 기금을 모아 왔는데, 기금을 기부한 사람들에게는 “전파 선교사”라는 명칭을 붙여 준다. 선교 기금을 기부함으로써 극동 방송의 전파 선교에 실제적인 도움을 주므로 “선교사”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의미를 부여해 준 것이다. 그러나 “선교사”라는 명칭은 그렇게 아무에게나 붙일 수 있는 명칭이 아니다. 선교사는 복음의 불모지인 국외 지역에 직접 나가서, 죄로 멸망해 가는 혼들을 복음으로 살리고 진리의 지식을 가르치는 사역자에게 붙여 주는 명예로운 칭호이다. 선교사는 복음과 진리를 온전히 전달하고자 현지 언어를 습득하여 현지인들과 소통할 뿐만 아니라, 선교지의 온갖 역경을 인내로 극복하며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사명을 완수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선교사”는 단순히 “기부금”을 내는 이들에게 함부로 부여할 수 있는 명칭이 결코 아니다.<br/><br/>극동방송의 설교와 간증 프로그램에는 “번영신학적” 요소들이 자주 등장하여 청취자들에게 잘못된 신앙관을 심어 준다. 방송 프로그램의 상당수가 “하나님을 믿고 사업에 성공했다,” “교회에 열심히 봉사했더니 병이 나았다”는 식의 “결과 중심적 간증”에 치중하는데, 그러한 표현은 신앙의 목적이 마치 이 땅에서의 성공인 것처럼 오도할 수 있다. 또한 가난과 질병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꼭 신앙심이 부족해서인 것처럼 잘못 인식하게 할 수도 있다. 이러한 “번영신학적” 설교와 간증은 오히려 건전한 믿음을 부패시킨다. <br/><br/>또한 극동방송은 교회 세습이나 개인적 치부 등 도덕적 결함이 있는 목사를 방송에 계속 출연하게 함으로써 암묵적으로 면죄부를 부여해 주고 자기 정당화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김용민 평화나무 이사장이 극동방송 프로듀서로 근무하던 시절, 그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와 그 아들에 대한 비판 글을 개인 홈페이지에 올리자, 당시 사장이었던 김장환 목사가 “종교 개혁을 하려면, 마틴 루터처럼 밖에 나가서 하라.”라고 말했다는 일화는, 극동방송과 김 목사가 대형 교회들의 비리에 어떤 자세를 가져 왔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br/><br/>지난 70년간 극동방송이 복음 방송으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방황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 중심에는 복음의 본질보다 조직의 유지와 특정 인맥의 영향력 강화, 그리고 세속적 축복을 우선시한 운영 방식이 자리 잡고 있다. 그들은 바른 성경을 믿음과 실행의 최종권위로 삼고 바른 신앙을 한국 교회에 전파하는 대신, 교단 권력과 자본주의 논리에 매몰된 한국 교계의 병폐를 그대로 되풀이해 왔다. 이제 청취자들은 &lt;한글킹제임스성경&gt;의 진리 위에 서서 그러한 변질에 오염되지 않아야 한다. 극동방송 또한 지금이라도 바른 성경에 기초한 참된 복음을 선포하며 복음 전파의 사명을 다하는 기관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바로 그러할 때 하나님께 인정받는 복음 전파 사역을 실행할 수 있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7 Jan 2026 17:39:2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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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그리스도인,” 그는 누구인가?</title>
<link>https://www.biblemaster.co.kr/bb5/%EA%B7%B8%EB%A6%AC%EC%8A%A4%EB%8F%84%EC%9D%B8-%EA%B7%B8%EB%8A%94-%EB%88%84%EA%B5%AC%EC%9D%B8%EA%B0%80/</link>
<description><![CDATA[필자는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로, 특히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의 대열에 선 이후로 “성령을 거스르는 육신의 처절한 죄성”(갈 5:17)과 마주해야 했다. 성령님께서 내주하시자마자 시작되는 “육신의 발악”이 무엇인가를 나뿐만 아니라 내 옆의 지체들을 통해서 실질적으로 맛보았고, 그로 인한 실망과 말 못할 상처 속에서 “신앙이란 무엇인가”에 관해, “어둠 속에서 빛을 더듬어 찾듯” 조금씩 고민해 나갔다. 즉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장 방해하는 것이 ‘성경대로 믿는’ 동료 그리스도인의 ‘육신’이라는 사실”을 지난 26년 동안 몸소 겪으면서 깨우쳤다. 이런 깨달음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이 어느 날 문득 “낯설게” 여겨진다는 점도 알았다.<br/><br/>지역 교회 안에는 도덕적 결핍을 무심코 쏟아 내는 이들이 있고, 자신의 영적 미숙을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내는 이들도 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일지라도 여전히 “아담의 타락한 본성”을 지닌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설교자든 극악무도한 범죄자든 그들이 입고 있는 “육신” 자체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기에(롬 7:18) 성령님의 통제를 받지 못하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br/><br/>따라서 우리는 인간에 대한 헛된 기대를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구원받은 죄인”에 불과함을 인정한 뒤, 내 옆의 지체들의 영적, 도덕적 실패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나 자신에 관해 진지한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마 7:3). 결국 우리가 이르러야 할 종착지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형제자매들은 육신을 입고 있기에 변덕스럽고 부서지기 쉽지만, 오직 주님의 말씀만은 썩지 않고 영원하며 완전하기 때문이다(벧전 1:23-25, 시 19:7). 본 논단에서 다룰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단순히 구원받은 죄인”을 넘어선다. 즉 “나”부터가 소망 없는 육신을 신뢰하지 않고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음과 실행의 최종권위로 삼고 살아가는 존재여야 함을 “뼈저린 경험”(시 119:28,50,51)과 내색하지 않는 “오래 참음”(골 3:12) 속에 터득해 나갈 때, 비로소 “익숙해지는” 이름이다.<br/><br/>성경에서 말씀하는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교회에 출석하거나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진 사람을 뜻하지 않는다. 그 이름은 신약성경에서 “세 가지 경우”에 단 “세 번”(행 11:26; 26:22-28, 벧전 4:16) 언급되지만, 성경 전체적으로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합당한 삶이 매우 구체적이고도 엄격하게 제시된다.<br/><br/>“그리스도인”이 성경에 최초로 언급된 예는 “사도행전 11:26”이다. 『그를 만나 안티옥으로 데리고 오니라. 그리하여 그들이 일 년 내내 교회와 함께 있으면서 많은 무리를 가르치니 안티옥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더라.』 제자들이 안티옥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린 이유에 대해 성경은 함구한다. 누가, 왜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는지에 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추측이 난무하지만 정확히 알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안티옥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렸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안티옥의 교회에서 바나바와 사울(바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배웠고, 그런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br/><br/>중요한 것은, “제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렸다는 사실이다. “제자”는 영어로 “disciple”이며, 이 단어는 “훈련”의 뜻을 지닌 “discipline”과 깊은 연관이 있다. 즉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연단과 훈련을 거쳐 “그리스도인답게” 길들여져야 하는 것이다. 죄인이 처음 구원받은 순간은 아직 훈련되지 않은 상태이며, 하나님께서는 자녀가 된 그들을 적합한 시련과 징계를 통해 단련시키기 시작하신다(히 12:6-8). 복음을 선포하고 잃어버린 혼들을 주님께로 이겨오는 구령 활동은 갓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도 즉시 수행할 수 있다. 그러나 거리에서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연단된 제자”로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구령은 복음에 대한 믿음만으로도 가능하지만, 제자의 길은 그보다 깊은 차원의 헌신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br/>“참된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인생의 모든 순간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최우선 순위에 모시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최종권위와 가치관의 기준으로 삼으며, 그 어떤 순간에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주님과 그분의 일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아끼는 모든 것과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어놓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사람”이 “제자”요 “그리스도인”이다.<br/><br/>“그리스도인”이 성경에서 두 번째로 언급된 것은 “사도행전 26:22-29”에서이다. 사도 바울이 아그립파왕에게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실 것과 그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신 첫 번째 분이 되셔서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들에게 광명을 선포하시리라는 것”(행 26:23)을 증거했을 때다. 그때 아그립파는 바울에게 『네가 나를 설득시켜 거의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행 26:28)라고 했고, 바울은 그에게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게 듣는 모든 사람도 거의 그리스도인이 되었거니와 이렇게 결박당한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바라나이다.』(행 26:29)라고 했다. [29절의 “그리스도인”은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문맥상 이해를 돕기 위해 넣은 단어이다.] 이 경우에 “그리스도인”의 의미는 단순하다. 그것은 “복음을 믿고 거듭난 사람”을 뜻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되심과 부활을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사건으로 믿고 구원받은 사람을 가리킨다.<br/><br/>“그리스도인”이 성경에서 세 번째로 언급된 것은 “베드로전서 4:16”에서이다. 이때 “그리스도인”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을 뜻한다. 『그러나 만일 너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당하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16). 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은 박해의 상황 속에서 마지막으로 나타난다. 현 세상에서는 “그리스도인”이란 이름 자체가 고난의 이유가 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그 이름을 주신 그리스도를 세상이 미워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것은 너희를 미워하기 이전에 나를 미워한 것임을 알라』(요 15:18).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겪는 박해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에 따른 경건을 추구하며 세상에서 성별한 대가”로 받는 당연한 결과이다(요 17:14, 딤후 3:12). 사도 베드로는 세상에서 갖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오히려 그 고난이 “내가 세상이 아닌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요 17:14,16)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일의 정점에 “고난”이 있는 것이다.<br/><br/>“그리스도인”은 죄로 인해 죽었던 “영”이 성령님에 의해 다시 살아난 사람이다(엡 2:1, 요 3:6-8). 성령님께서는 그의 영이 거듭날 때 그의 혼을 “육신의 죄들의 몸”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그리스도의 할례』(골 2:11)를 행해 주셨다. 이로써 “그리스도인”은, 영이 죽은 채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된(엡 2:12) 죄인들과 달리, 『영과 혼과 몸』(살전 5:23)의 삼중구조가 더욱 분명해졌으며, 자신이 『영과 혼과 몸』의 구조로 창조된 존재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성령님께서 행하신 영적 할례는 죄의 몸을 벗어 버린 “혼”이 육신의 죄에 오염되지 않게 함으로써, 또 그 혼을 그리스도의 몸 안에 넣어 주심으로써(고전 12:13) “혼의 구원”(벧전 1:9)을 영원히 보장받도록 했다. <br/><br/>『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딛 3:5)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 된 “그리스도인”은 그의 존재적 체계 자체가 세상 죄인들과 다르다. 그의 “영”은 거듭났고, 그 “속 사람” 안에 “성령님”께서 내주하신다(롬 8:16, 엡 3:16).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아들로서 행하게 되며(롬 8:14),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면 어떤 성경이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말』(고전 2:13)인가를 알게 된다(&lt;한글킹제임스성경&gt;).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 바른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일들』(고전 2:11)을 깨닫기 위해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공부하는 사람이다(세대주의, 딤후 2:15). 성령님께서는 “그리스도인” 안에 충만해지실 수 있고(엡 5:18),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며(갈 5:22,23), “그리스도인”이 세상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행 1:8). 『하나님의 영』, 곧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을 소유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사람”(롬 8:9), 즉 “그리스도인”이다. 『진리의 영』께서 영원히 함께 거하신다는(요 14:16,17) 사실은 “그리스도인”을 세상에서 가장 독특한 존재가 되게 한다.<br/><br/>성경에는 “그리스도인,” 곧 “하늘로부터 오실 구주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하늘의 시민권자”(빌 3:20)에게 주시는 “상호 관계 명령”이 있다. “형제애로 서로 다정하게 사랑하며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 하라”(롬 12:10). “오직 생각의 겸손함으로 남을 자신보다 존중하라”(빌 2:3). “모든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엡 4:2). “서로 친절하고 다정다감하며 서로 용서하라”(엡 4:32). “서로 물어 뜯고 삼키다가 서로 멸망하지 않도록 성령 안에서 행하라”(갈 5:15,16). “사랑으로 서로 섬기라”(갈 5:13). “너희의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전 16:14). “그리스도인, 그는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은 “사랑”에 있다. “누가 그리스도인인지 어떻게 아는가?”에 대한 해답도 “사랑”에 있다(요 13:35). “사랑”은 시기하지도 교만하지도 무례하지도 않다!(고전 13:4,5) “사랑”은 동료 그리스도인에게 “육신의 악취”(고전 3:3)를 풍기지 않는다.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육신을 억제하고(갈 5:17) “사랑”에 관한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진짜 그리스도인”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7 Jan 2026 17:37:59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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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온전한 상을 받으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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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미국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 선수 가운데 가정주부이자 아기 엄마인 선수가 주목을 받은 적이 있는데, 이 선수에게 등수나 기록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선수의 자랑과 영광은 중간에 멈추지 않고 끝까지 달렸다는 점에 있었다. 이 가정주부 선수는 “오늘은 나에게 승리의 날이었다.”라고 선언했는데, 이것은 자신이 세운 목표를 성취한 것을 승리로 여기고 한 선언이었다. 이 점을 그리스도인의 영적 전쟁에도 적용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순간부터 목표가 정해졌고,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경주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또한 모든 무거운 것과 쉽게 에워싸는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하자』(히 12:1). 이 말씀에서 보듯이 믿음의 경주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인내”이다. 경주에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은 오직,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히 12:2) 달려가야 하는 경주라는 점을 보여 준다. 특히 “경주”에는 “상”이 따르는 법인데, 사도 요한은 『너희 자신을 돌아보라. 이는 우리가 이루어 놓은 것들을 잃지 아니하고 온전한 상을 받으려는 것이라.』(요이 1:8)라고 말한다. 믿음의 경주를 달리고 있는 성도들에게 이보다 현실적인 말씀은 찾아보기 힘들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꾸준히 인내하며 달려가서 온전한 상을 받는 일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성도들이 마귀의 공격으로, 또는 건강이 좋지 않아서, 방심하다가 하찮은 돌에 걸려서 넘어지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위의 말씀을 기억하여, 주님께서 주실 온전한 상을 받기 위해 다시 힘차게 달려가야 한다.<br/><br/>그리스도인이 온전한 상을 받기 위해서는, 첫째,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무엇보다도 구원받지 못했을 때의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그때 우리는 모두 죄인이었다. 럭크만 목사는 거듭나기 전의 자신을 “살인 병기”라고 했는데, 군대에서 훈련 교관을 했던 그는 언제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지를 가르치는 사람이었다. 그가 자신의 27세 때 모습에 대해 기록한 것을 보면, 그때까지 그는 차를 가져 본 적도 없었고, 개인 수표책도, 은행 계좌도 없었다.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옷가지 몇 개밖에 없었다. 그때 그는 어디서 권총 하나를 훔쳐서 “잔인한 이 세상이여, 안녕.”이라고 짧게 말한 뒤 입속에 권총을 집어넣고 방아쇠를 당기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실수 없이 죽으려고 했던 것인데, 이때까지 “죄인 럭크만”은 파산했고 “술주정뱅이”였으며, 내일이 없는 “막가파 인생”이었다. 우리나라의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스승인 이송오 목사 역시 40세까지 세상에서 무서운 것이 없는 사람으로 살았다. 이 목사는 자신이 “세상에서 담대한 사람으로서 죄밖에 지을 것이 없었고, 개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라는 말을 종종 하곤 했다. <br/><br/>위의 내용은 두 영적 스승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허물과 죄들 가운데서 태어난 죄인이라면 누구나 “죄인의 삶”을 살게 된다.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혐오스런 우상 숭배를 행하여 이방인들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벧전 4:3). 모두 죽음과 한 걸음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으며, 지옥의 문 앞에 서 있었지만, 하나님의 자비와 오래 참으심 때문에 구원받았으니, 이제는 자신이 구원받지 않았을 때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br/><br/>또한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은 이후의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특별히 성경대로 믿는 성경침례교회 성도들은 다른 교회에서 종교 생활을 하다가 구원받았던 시절을 돌아봐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성도들 대부분이 헛된 일에 시간을 보내다가 성별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헛된 종교 생활만 하던 사람이었다. 구원받고 안 받고는 둘째고, 나는 복음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몰랐고 복음을 전할 줄도 몰랐다. 교회 다닌 지 몇 년이 지나고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를 하면서도 아버지가 돌아가시는데 복음을 전할 줄 몰랐기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지옥에 가지 않게 구원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면서, 아버지에게는 ‘아버지, 예수님 믿고 구원받으셔야 해요.’라고만 했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고, 내가 아는 모든 것이었다. 그때 내가 지금처럼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lt;한글킹제임스성경&gt;을 알게 된 후에 성경침례교회에 와서야 영과 진리로 경배드리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교회만 다녔던 그 헛된 시간이 참으로 아깝지만, 이제라도 올바른 경배를 드리고 잃어버린 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이겨올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은 이후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보다 더 확실하게 자신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br/><br/>그리스도인이 온전한 상을 받기 위해서는, 둘째, “자신이 이루어 놓은 것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사도 요한이 『너희 자신을 돌아보라. 이는 우리가 이루어 놓은 것들을 잃지 아니하고 온전한 상을 받으려는 것이라.』(요이 1:8)라고 한 것은, 이 서신을 쓸 때 자신이 이루어 놓은 것을 잃어버리는 성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도 요한의 편지를 받은 택함받은 부인과 그녀의 자녀들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 주시는 성령님의 권면이다. 많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자신이 받을 것보다 훨씬 더 적은 상을 받을 수도 있다는 점을 경고하신 것이다. 이와 같은 진리를 보여 주는 역사적인 사건이 구약성경에 나온다. 여호사밧왕은 유다의 선한 왕이었는데, 이스라엘의 아합왕과 친족 관계를 맺었다(대하 18:1). 그는 아합왕과 전쟁에 함께 나갔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간신히 살아났고(대하 18:31),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 선견자 예후에게서 경고를 받았다(대하 19:2). 여호사밧왕은 그 후 이스라엘의 아하시야왕과 제휴를 맺어 타시스로 가는 배를 만들었다. 목적을 달성하고자 또다시 악인과 손을 잡은 것인데, 그의 배들은 『왕이 아하시야와 제휴한 까닭에 주께서 왕이 지으신 것을 부수셨나이다.』(대하 20:37)라는 엘리에셀의 예언대로 파선하여 타시스로 가지 못했다. 이 사건은 성도가 악인과 함께 하는 일이 상으로 이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미 이뤄 놓은 것들까지도 잃어버리게 된다는 점을 잘 보여 주고 있다.<br/><br/>그리스도인이 온전한 상을 받으려면 자신이 이루어 놓은 것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자신이 받을 것보다 훨씬 더 적은 상을 받을 수 있다. 이 점을 여호사밧왕이 아하시야왕과 제휴를 맺어 타시스로 가는 배를 만들었지만 배가 파선해 버린 일에서 읽을 수 있다. 즉 성도가 악인과 함께 하는 일은 상으로 이어지지 않으며, 이미 이뤄 놓은 것들까지도 잃어버리게 된다.<br/><br/>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루어 놓은 것들을 잃지 않고 온전한 상을 받을 수 있을까? 간단하다.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는 죄를 짓더라도 구원이 취소되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상을 잃어버리고 수치를 당하게 된다. 그렇기에 항상 죄에 민감해야 하며, 자신의 처한 환경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카인은 “아벨을 시기함으로써 죄의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동생을 죽이고 말았다. 에서는 “배고프고 몹시 지쳐 피곤할 때”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 버렸다. 다윗은 “나태할 때” 죄에 빠져 간음과 살인을 저질렀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멀찍이 떨어져서 따라간” 뒤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며” 불을 쬐다가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함으로 제자의 지위를 상실했다. 아나니아와 삽피라는 교회의 사역을 위해 돈을 바칠 때 “신실한 척 위선을 부리다가” 죽고 말았다.<br/><br/>사도 바울은 그의 삶 전체를 하나의 경주로 보았다. 『그러나 나의 달려갈 길을 기쁨으로 끝마치고 내가 주 예수로부터 받은 사역,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라면 이런 일을 전혀 개의치 아니할 뿐 아니라 나의 생명을 조금도 아끼지 아니하노라』(행 20:24).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어 의로운 재판관이신 주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내게 주실 것이며 또 나뿐만 아니라 그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이라』(딤후 4:7,8). 사도 요한이 말한 “온전한 상”(요이 1:8)은, 사도 바울처럼 자신이 달려갈 길을 “모든 무거운 것과 쉽게 에워싸는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 자기 앞에 놓인 경주를 했을 때”(히 12:1) 받을 수 있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께만 시선을 고정시킨(히 12:2) 바울은, 그 십자가의 길에서 자신이 달려갔던 일들이 어떻게 해서든 헛되지 않게 하려고 애를 썼고, 이로써 생명의 말씀을 제시하는 일에 있어서 자기가 헛되이 달리지도 아니하였고 헛되이 수고하지도 아니하였다는 것을 확신했다(빌 2:16). 사도 바울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러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을 시작했다면,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라.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것들이 있다면, 그중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온전한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3 Dec 2025 10:41:31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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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죄를 죄라고 말하지 못하는 한국기독교장로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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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당신은 “퀴어 신학”이란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쉽게 말해 동성애자들의 신학인데, 그런 죄인들이 “신학”을 추구한다는 것 자체가 가증스럽다.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의 제110회 정기 총회에서 그들의 목포노회가 “퀴어 신학 이단성 검증 및 공식 입장 표명”과 관련된 헌의안을 제출하면서 동성애와 관련된 큰 이슈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는데, 그만큼 “퀴어 신학”은 배교한 기독교계에서도 논란이 큰 신학이다. <br/><br/>그런데 그 “퀴어 신학”에 대해 총회 차원의 공식 입장 표명이 이루어질 것인가에 이목이 집중되었음에도 공식 입장 표명은 무산되었다고 한다. 기장은 과거 동성애 논란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이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는 문구가 삽입된 1972년도 “신앙고백서”로 대응할 뿐, 가타부타 공식적인 언급을 회피해 왔다. 이 소극적 대응은 매년 논란을 키우는 원인이 되었고, 이 점은 지난 총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목포노회에서 제출한 헌의안에 대해 총회는 “성소수자목회연구특별위원회” 신설을 역제안했다. 이는 “전통 신앙과 인권 존중 사이의 갈등을 학문적으로 검토하자”는 취지하에 이미 과거 2021년도에 비슷한 사례에서 유사한 특위를 신설한 바 있다. 하지만 아무런 성과 없이 3년 만에 해체되어 버린 전례가 있기에 공식적인 입장 표명의 유보를 위한 시간 끌기 전략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샀다. 결국 이 헌의안은 교단 분열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기각되고 말았다.<br/><br/>이와 관련하여 기장 총회에서는 산하 기관인 한신대학교의 신학대학원장 인준과 관련해서도 잡음을 냈다. 제8대 원장으로 추대된 “김희헌” 목사는 “향린교회”의 담임목사로(2017-24년),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위해 앞장서 왔다. 이와 관련해 “기장 소속 동성애·동성혼 반대 대책위원회” 위원장 김창환 목사는 김희헌 목사가 과거 여러 글과 설교에서 퀴어 신학에 우호적인 글을 쓰고 발언했던 것을 공개했다. 그러면서 이와 같은 사람을 신학대학원 원장으로 앉혔으니 신학교가 신학교로서의 제 역할에 충실할 수 있겠냐며, 다른 사람으로 재인준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br/><br/>본래 영어 단어 “퀴어” (queer)는 “괴상한,” “기이한”이라는 뜻이다. 과거에는 동성애자들을 비하하는 말로 사용되었는데, 1980년대에 동성애자들이 이 단어를 의도적으로 자신들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함으로써 현재는 동성애자들을 포함한 소위 성 소수자를 가리키는 포괄적인 단어로 사용된다. 이들은 여기에 “신학”이라는 단어를 덧붙여 “퀴어 신학”이라는 “괴기한 용어”를 만들어 교계와 신학교에 침투시키고 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기장 총회는 소위 “진보적 가치”라는 미명하에 동성애자들에 대한 성경적 판단을 계속 유보해 왔다. 사실 “퀴어 신학”이라는 것은 논의할 거리도 되지 않는다. 1950년대에 동성애를 옹호하는 성경해석 연구에 영향을 받으면서 시작되어, 1980년대에 사회적 성(gender)과 성적 지향(sexuality)의 해체를 강조한 포스트모더니즘, 해방 신학, 여성 신학의 흐름 속에서 본격적으로 형성된 것이 바로 “퀴어 신학”이다. 그러나 그 신학의 모티브가 된 동성애를 성경은 분명히 “죄”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작금의 이 시대는 그 “죄”를 인간들끼리 “죄”가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소돔인들은 사악하였고 주 앞에 극심한 죄인들이었더라』(창 13:13). 성경은 이 창세기 13:13에서 처음으로 『죄인』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여기서 “죄인”은 바로 동성애자들을 지칭한다. 소돔인들, 즉 동성애자들은 단순한 죄인이 아니라 주 앞에 “극심한” 죄인이었다. 이 소돔인들로 인해 구약성경에 “소도마이트”(sodomite), 즉 “남색자”라는 단어가 쓰였을 정도이다(신 23:17, 왕상 14:24; 15:12; 22:46, 왕하 23:7), “소돔인들”은 “동성애”라는 극심한 죄를 저지르는 극악한 죄인들이었던 것이다. <br/><br/>하지만 “퀴어 신학”은 성경을 믿음과 실행의 최종권위로 삼지 않는다. 성경의 “말씀”을 성경의 “텍스트”라고 표현하면서, 성경의 “텍스트”는 각자의 경험에 비추어 재해석될 수 있는 상대적 “텍스트”이기 때문에 동성애를 죄라고 말씀하신 성경 말씀은 기록 당시의 시대적, 문화적 상황에서 발생한 오해일 뿐 “죄”는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오히려 현대 인간의 다양한 성적 욕망을 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삼위일체를 성적 상징으로 재해석하면서, 거룩한 하나님을 과거의 답답한 전통에서 “해방되어 나오는 하나님”(Come-Out God)으로 주장하는 불경을 저지른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사실 동성애적 성향을 가지셨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주님의 부활을 “퀴어 해방”의 상징으로 재해석한다. 교회 또한 동성애를 포함한 다양한 성 정체성을 성례전적으로 인정하여 성적 지향이 다른 사람들도 포용하는 “참된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보자면 참으로 “퀴어”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br/><br/>성경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그리스도인에게는 논의거리도 되지 못할 “퀴어 신학”에 대해 지속적으로 판단을 유보하는 기존 교단의 모습은 이 마지막 시대가 왜 라오디케아인들의 교회 시대인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해 준다. 이 시대는 “시민의 권리”로 특징지어진다. 그래서 “정통 신앙과 소수 변태 성욕자들이 누려야 할 인권 사이의 갈등을 학문적으로(?) 검토”할 필요성이 있다고 에둘러 말하는 것이다. 이 마지막 시대는 인권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서는 시대이기 때문에 신학의 토대가 되는 성경 말씀에서 “죄”라고 하시는 “동성애”조차 학문적으로 검토하고 논의하면 죄가 아닐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소위 “하나님”과 “성경”을 믿는다는 곳에서 벌어지는 그러한 가증스러운 작태 때문에 그런 집단 안에 계시지 못하고 문 밖에 서 계셔야만 한다(계 3:20). <br/><br/>그리스도인은 오늘날 퀴어 신학, 동성애자들의 인권, 탄압받는 소수자, 진보적 가치, 다양성 포용 등 허울 좋은 말로 꾸미는 자들, 곧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되 사랑하는 대상의 성별이 나와 동일할 뿐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을 결코 가볍게 지나쳐서는 안 된다. 동성애자들은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자기 어머니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결합하리니, 그들이 한 몸이 될 것임이니라.』(창 2:24)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는 극악한 죄인들이다. 이 죄인들은 서로에 대한 음욕이 불일 듯 하여 여자들을 본래대로 쓰는 것에서 벗어나 남자들이 남자들과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는 자들인 것이다(롬 1:27). 성경은 그러한 죄를 범한 죄인이 받아야 할 형벌을 “사형”으로 규정한다(레 18:22,29; 20:13, 롬 1:26-32). “사형”은 동성애를 저지르는 죄인들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선고이며, 그 점에 있어서 어떤 동정이나 연민도 없으시다.<br/><br/>하나님께서는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은 것, 불결한 것과 깨끗한 것의 차이를 구별하라고 말씀하셨다(레 10:10). 하나님께는 그 차이가 분명하기에 그 중간이라는 것은 없다. 더욱이 이 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서 알 수 있는 것으로(잠 30:3),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차이점을 가르치며, 불결과 정결의 차이를 분별하게 하라고 말씀하신다(겔 44:23). 이 점을 가르치고 알려 주기는커녕, 그 차이를 무시하고 경계를 무너뜨리는 오늘날의 작태는 하나님께서 옮기지 말라고 두 번이나 말씀하신 옛 지계표를 마음대로 옮기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잠 22:28; 23:10).<br/><br/>하지만 결국 동성애자들의 주장은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받아들여질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곧 등장할 “적그리스도”가 바로 “동성애자”이기 때문이다. 『또 그는 자기 조상들의 하나님이나 여자들의 원하는 바를 개의치 않으며 또 아무 신도 개의치 아니할 것이니, 이는 그가 모든 것보다 자신을 높일 것임이라』(단 11:37). 적그리스도는 여자들의 원하는 바를 개의치 않는 자, 곧 여자들의 성적 욕구에 무관심한 “남색자”로 등장할 것이다. 성경에서 “극심한 죄인”이라고 규정하신 바로 그 “동성애자”로서 온 인류 앞에 등장하는 것이다. 물론 적그리스도가 전면에 등장하기 전에 그리스도인들은 휴거되어 셋째 하늘로 올라갈 것이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디모데후서 3장에서 말한 마지막 날들, 곧 교회 시대의 마지막 날들에 적그리스도의 등장과 관련되어 조성되는 시대적 상황만큼은 미리 보고 올라갈 것이다. 『또 이것을 알라. 마지막 날들에 아주 어려운 때가 오리라.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리니, 이런 자들에게서 돌아서라』(딤후 3:1,2,4,5).<br/><br/>장차 등장할 적그리스도는 여자들의 원하는 바, 곧 그들의 성적 욕구에 무관심한 동성애자이다. 적그리스도는 성경에서 “극심한 죄인”으로 규정된 “동성애자”로 온 인류 앞에 등장할 것이다. 배교한 교회들이 “퀴어 신학”을 공공연히 수용하는 것은, 그들이 “적그리스도 친화적”으로 준비되어 “남색자 적그리스도”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br/><br/>위와 같이 성경에 예언된 이 시대는 “퀴어 신학”이란 말이 교회 안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되는 때이다. 성경을 가르친다는 신학자와 목사들이 하나님께서 성경에 “죄”라고 하신 “동성애”에 대해 판단을 유보하는 모습은, 이제 곧 “남색자 적그리스도”가 나타났을 때 그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교회들을 “적그리스도 친화적”으로 준비시키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동성애가 보편화되는 현상을 목도하는 그리스도인은 낙담하지 말고 믿음 안에 굳게 서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깝다는 점을 보여 주는 시대의 표적이기 때문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3 Dec 2025 10:36:3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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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목사를 투표로 뽑아도 되는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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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일상생활에서 잘 쓰이지 않는 한자어를 제도화된 교회들에서는 왕왕 쓴다. “송영”이라느니, “노방 전도”라느니, “서리집사”라느니 하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로서는 무슨 말인지 감을 잡는 것조차 버거운 용어들이 아무렇지 않게 통용되는 것이다. 그 가운데는 “청빙”이라는 것도 있다. 문자 그대로 보자면 “부탁하여 부름”이라는 뜻이지만, 교회들에서는 흔히 (담임)목사를 “선출”하는 것을 칭한다.<br/><br/>청빙은 대개 전임 목사의 은퇴와 함께 이루어진다. 국내 주요 교단들은 대부분 목사의 정년을 70세로 하고 있는데, 정년을 채우지 않고 은퇴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실제로는 그보다 빠른 시기에 청빙 과정이 진행되곤 한다. 2026년을 기준으로 하면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가 63-71세가 되기 때문에, 앞으로는 이들의 은퇴와 더불어 청빙은 더 활발하게 일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br/><br/>한때는 청빙의 과정이 주로 지명(혹은 승계)의 방식으로 행해지던 시절도 있었으나, 그런 것은 이미 옛말이 되었다. 요즈음 대부분의 교회들에서는 청빙위원회를 구성하여 교회 안팎에서 후보자를 “추천”받거나 “공개 모집”을 한 뒤, 일차적으로 그 자격 요건을 검토한다. 그렇게 해서 어느 정도 자격을 갖춘 후보들이 추려지고 나면, 설교 “경연”이 벌어지고, 최종적으로 회중들의 “투표”를 통해 담임목사가 결정된다.<br/><br/>목회데이터연구소(이하 목데연)가 작년 5월부터 6월까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현직 담임목사들 가운데 후보자를 “추천”하는 방식과 “공개 모집”하는 방식으로 청빙된 이는 각각 전체의 50.2%, 28.8%였다. 이미 강단을 차지하고 있는 목사들 가운데 약 80%가 나름대로의 “민주적인” 절차로 “당선”된 사람들인 셈이다. 그러나 교인들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못하는 듯하다. 교인들에게 바람직한 청빙 방식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는 무려 전체의 92.8%가 “추천”과 “공개 모집”이라고 답했고, 고작 7.2%만이 “지명 및 승계”라고 답했으니 말이다.<br/><br/>투표는 입후보자의 존재가 전제되어야 성립할 수 있다. “민주적인” 청빙 방식이 주를 이루게 된 배경에는 지원자가 많다는 현실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목데연에서 지난 2023년 5월에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부목사들 가운데 향후 진로를 “선교사,” “교회 개척”으로 응답한 비율은 각각 3.6%, 14%밖에 되지 않은 데 비해, “담임목사 청빙”으로 응답한 비율은 50.4%였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하는 부목사 생활을 하다가 “남이 차려 둔 밥상”에 숟가락을 얹고 싶다는 자칭 사역자들의 속내가 여실히 드러난 조사였다. 그들의 응답이 바울의 간증과 얼마나 다른가? 『또 나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불려지지 아니한 곳에서만 복음을 전파하려고 노력하였으니 이는 다른 사람의 기초 위에다 짓지 아니하려 함이라』(롬 15:20).<br/><br/>물론 경연과 투표를 통해 담임목사를 선출하는 게 보편화된 데에는 제도화된 교회들에서 지명 방식으로 후임 목사가 선출될 때 온갖 부도덕한 일들이 벌어진 것도 큰 몫을 했다. 인맥, 혈연, 더한 경우에는 “뒷돈” 따위가 지명 과정에 개입되는 것을 보면서 환멸을 느낀 교인들이 점차 민주적인 청빙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래서 요즈음 대부분의 교회들에서는 청빙위원회를 구성할 때 담임목사를 배제한다. 분명 차기 담임목사를 선정하는 데에 그간 교회를 이끌어 왔던 현직 담임목사의 의견이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는 것은 “비상식적인” 일이다. 그렇지만 교인들은 “비상식”이 “부도덕”보다는 낫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br/><br/>청빙을 둘러싼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교회들이 해야 할 일은, 반드시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느냐?』(롬 4:3)라는 질문을 던져 보는 것이다. 목사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아갔고 사람들에게는 은사들을 주셨다.”고 하셨느니라... 그가 어떤 사람들은 사도로,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들은 복음 전도자로, 어떤 사람들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들을 온전케 하며 섬기는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여』(엡 4:8,11,12).<br/><br/>자,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위의 말씀에는 짚고 넘어갈 만한 이상한 점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 말씀하시는 “장로”나 “감독”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목사와 교사를 언급할 때만큼은 “어떤 사람들은 목사로, 어떤 사람들은 교사로”라고 하지 않으시고, “어떤 사람들은 목사와 교사로”라고 하셨다는 점이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를 쓰다가 졸아서 실수를 한 것이 아니라면, 이에 대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뿐이다. 바로 “장로”나 “감독”은 “목사”와 같은 직분이며(딛 1:5-9, 벧전 5:1-5를 주의 깊게 읽어 보라), 또 모든 “목사”는 성경 “교사”라는 것이다(딤전 3:2). 이와 같은 성경의 조명에 입각하여, 필자는 지금부터 “감독,” “장로,” “교사”에 대해 말씀하시는 구절들을 목사직에 관한 참조 구절로서 제시할 것이다.<br/><br/>본론으로 돌아오자면, 성경은 목사로 세워지는 권위가 사도나 선지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은사”로서 주어지는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다른 모든 은사들이 그러하듯이, 목사직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주신다는 것이다(고전 12:11). 여기에는 성도들의 의견이 반영될 틈이 없다. 심지어 목사직을 원한다고 무조건 주시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신약성경 전체를 뒤져 보아도 “집사”를 선출한 사례는 찾을 수 있을지언정(행 6:2-6), “목사”를 선출한 사례는 찾아볼 수가 없다. 목사는 언제나 하나님께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은 사람의 지명에 의해 임명되었던 것이다(딤전 1:3, 딛 1:5).<br/><br/>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목사들을 임명하신 목적은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맡기신 일은 교회 시대의 경륜을 안착시키는 것이었는데(엡 2:20), 경륜의 전환이 완전하게 이루어짐에 따라 그들의 역할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복음 전도자들” 역시 과거 위대한 부흥사들의 사역으로 끝이 났고, 이제는 “목사들”에게 맡겨진 역할이 교회 시대의 끝까지 유효하다. “복음 전파”라는 순수한 의미에서는 여전히 복음 전도자들이 있으며, 그들은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행 8:26; 21:8). 목사들이 해야 할 일은 그들의 사역을 통해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인 지역 교회를 감독하는 것이다(행 20:28).<br/><br/>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목사였던 디모데에게 『그리고 네가 많은 증인들 가운데서 내게 들은 것들을 신실한 사람들에게 맡기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2)라는 권면을 준 바 있다. 당연히 이것은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고 돌보는 목사 본연의 임무와 동떨어진 게 아니었고, 그 사역의 안정성과 지속성을 담보하기 위해 함께할 사람들을 세우라는 것이었다. 같은 이유로 각 교회들은 한 명의 감독이 아니라 감독“들”을 두었다(행 14:23, 빌 1:1). 그런즉 목사 안수란 기본적으로 함께 양무리를 맡을 동역자를 세우는 일이요, 자신의 유고 시에 양무리가 길을 잃지 않도록 일종의 보험을 들어 두는 일이었다고 하겠다.<br/><br/>이런 까닭에 목사 안수는 “갑자기”(경솔히) 행해져서는 안 되었고(딤전 5:22), 지역 교회 내외부의 평판으로부터 가정사에 이르기까지(딤전 3:2-7) 사람됨 전반을 철저히 검증한 후에 행해져야 했다. 자신이 담임하고 있는 지역 교회에 소속되지 않은 형제들에 대해서는 이런 점을 속속들이 알 턱이 없었을 테니, 외부에서 데려온 형제에게 목사 안수를 주는 일이 불가능했음은 자명하다.<br/><br/>성경의 조명에 비추어 보면, 머릿속에 “청빙받을 생각”만 가득한 부목사들은 스스로 그리스도의 군사입네 하면서도 제 역할조차 모르는 “고문관들”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들이 “목사 안수”를 받았다면, 그것은 자신이 소속된 지역 교회를 감독하기 위한 것이었어야 한다. 그런데도 다른 교회에서 불러 줄 날만을 기다리며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이런저런 활동들에 참여하면서 이력서를 다듬고 있다면, 그런 자들은 스스로 “목자”가 아닌 “삯꾼들”(요 10:12,13)임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사례비”라는 요소를 빼놓고서, 그들이 현재의 부목사직을 내려놓아야만 맡을 수 있는 다른 교회의 담임목사직을 희망하는 이유에 대해 온전하게 설명할 길이 있겠는가?<br/><br/>현직 담임목사를 청빙위원회에서 배제한 채 “민주적인” 방법으로 차기 목사를 청빙하려는 교인들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다. 목사가 거짓 교리를 가르친다면 그 교회에서 빠져 나오면 해결될 일이고(딤전 6:3-5), 목사가 부도덕하다면 송사를 통해 쫓아내든지 징계를 받게 하든지 하면 될 일이다(딤전 5:19). 이도 저도 아닌데도 현직 담임목사로부터 후임 지명권을 탈취하려 드는 교인들은 제 분수를 한참 벗어난 것이다(민 16:7).<br/><br/>6ㆍ25 전쟁 당시, 미국의 언론들은 군인들에게 연고도 없는 타지에서 목숨을 버릴 것을 강요하는 미군 수뇌부를 “비민주적”이라며 질타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이에 대하여 한마디의 말로 일축했다. “군대에는 민주주의가 없다.”<br/>실로 그렇다! “영적 전쟁”을 운운하면서도 교회는 “민주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정말로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다. 그런 교회들은 “무질서하게”(disorderly, 살후 3:6) 운영되는, “병” (disorder)이 든 교회들이다. 그런데도 꿋꿋하게 “민주적인 절차”를 고집하려 든다면, “치유의 방책”(remedy)이 없을 것이라고(대하 36:16, 잠 29:1) 성경은 경고하신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3 Dec 2025 10:31:59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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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성경의 진리”를 왜곡하는 코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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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코란은 마호메트가 A.D. 610년부터 632년까지 23년간 “천사 가브리엘”에게서 받은 메시지를 구전으로 전하다가 완성한 책으로 알려져 있다. “문맹”인 마호메트는 그가 받았다고 하는 계시들을 순전히 “기억력”에 의존하여 “암송의 형태”로 전수했는데, 코란의 문제점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즉 코란은 “인간의 불완전한 기억력”에 의존해서 전달된 내용을 담고 있다. 이와 같은 전수 방식은 많은 부정확한 암송들을 낳았고, 그로 인해 서로 모순되는 내용들도 많아졌다. 그러한 코란이 어떻게 영감으로 주어진 말씀이 될 수 있겠는가? <br/><br/>“천사 가브리엘”에게 계시를 받는 중에 마호메트는 “간질병” 발작을 일으키곤 했다. 그런 정신 상태로 무언가를 계시받았다는 것은, 사실상 마귀에게 이끌림받고 있었다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마호메트는 자신이 만났다는 “천사 가브리엘”에게 날개가 600개나 달려 있었다고 했지만, 성경에서 천사는 날개가 없는 존재로 나타나며, 이 점은 『사람의 척도, 곧 천사의 척도』(계 21:17)라는 말씀에서도 읽을 수 있다. 즉 “천사”는 날개 없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마호메트가 만났다는 “날개 600개 달린 천사”는 천사가 아니라 마귀였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마귀는 성경에서 “날개가 달린 새”로 비유되기 때문이다(막 4:4,15, 계 18:2).<br/><br/>“마귀에게서 받은 계시들”이 “부정확한 암송” 때문에 그 진위를 알기 어렵게 되자, “칼리프”라 불리는 마호메트의 계승자들은 “구전 코란”을 “기록”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리하여 여러 암송 내용들을 수집하고 정리하여 편집했다. 그런데 그 보존 과정에서 코란의 내용이 달라졌기에 여러 번의 교정 작업을 거쳐야 했다. 그러다 보니, 오늘날 모슬렘들이 보고 있는 코란은 “원본 코란”과 내용이 많이 달라져 있다. 모슬렘들은 그와 같은 코란을 “완벽하고” “오류가 없으며”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책이라고 주장하며, 코란이 “성경의 진실됨을 확증”하고 “성경의 틀림없음을 증명”하는 책이라고까지 말하는데, 과연 그러한 것인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직접” 계시하셨고, 처음부터 문서 형태로 존재한 “성경”과, 습관적인 간음자요 문맹에 불과한 간질병자와 그의 추종자들의 불명확한 기억력에 의존하여 짜깁기한 “코란”이, 과연 성경과 동일한 “진리”를 계시하는지 직접 확인해 보도록 하자. <br/><br/>첫째, 코란은 “성경의 하나님”이 이슬람교의 신인 “알라”라고 가르친다. 즉 하나님과 함께하는 참 종교가 이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코란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은 다르다. 코란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정하며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강조하는 반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 인격(『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마 28:19)으로서 영원히 존재하는 한 분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한다. 『이는 하늘에서 증거하시는 이가 세 분이시니, 아버지와 말씀[아들]과 성령이시요, 이 세 분은 하나이심이라』(요일 5:7). <br/><br/>둘째, 코란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라가 이스라엘에게 호의를 베풀어 한 본이 되게 한,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인간에 불과하다고 가르친다(수라 43:59). 이슬람교도들은 코란의 가르침에 따라 예수님을 하나님의 한 선지자로서, 죄 없는 분으로서, “메시아”로서 찬양하지만, 하나님 아버지와 신성을 공유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는 찬양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코란이 “하나님께는 독생자는커녕, 어떤 아들도 없다.”(수라 112:3)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많은 선지자들 중 한 명일뿐이며 결코 『하나님의 독생자』(요 3:18)는 아니셨다는 것이며, “마리아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하는 자들은 신성모독의 죄를 저지르는 불신자들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br/><br/>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령으로 잉태케 하시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게 하신 『아버지의 독생자』(요 1:14)라고 말씀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침례인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그 안에서 내가 매우 기뻐하노라.』(마 3:17)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 자신도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요 11:4)이라 하셨고, 사도 바울을 위시한 신약성경의 기록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당연시한다(마 16:16, 막 1:1, 롬 1:4, 요일 3:8). 심지어 마귀들도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마 8:29)이심을 인정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무도 어느 때나 본 적이 없는 하나님을 『아버지의 품 안에 계신 독생자』(요 1:18)로서 분명히 밝히신 분이시니, 문자 그대로 “하나님을 밝히 보여 주신” 하나님 자신이시다(『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 요 14:9, cf. 요 10:30).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주신 이 『독생자』를 믿으면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지만(요 3:16), 『독생자의 이름』(요 3:18),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지 않으면 정죄를 받고 멸망하게 된다. 『그러므로 다른 이에게는 구원이 없나니 이는 하늘 아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을 인간에게 주신 적이 없음이라』(행 4:12).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났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우리로 그를 통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요일 4:9). 성경의 이 말씀들은 “구원”에 있어서도 코란과 일치하지 않는데, 이는 코란이 “구원은 이슬람교도가 되어 알라의 가르침에 철저히 복종할 때만 성취된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이슬람교 외의 종교들은 제거의 대상일 뿐 결코 인정되지 않는다. 오직 알라의 뜻에 따라 선을 행해야 죄를 용서받고 택함을 받음으로써 하늘나라에 간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어 죽으셨다는 것(마 27:26-50)도 믿지 않고, 주님의 부활(마 27:53; 28:6)도 믿지 않으며, 주님의 승천(막 16:19, 눅 24:51)도, 주님의 재림(마 24:30; 25:31, 계 22:20)도 믿지 않는다. 그들은 신약성경 전체를 부정하면서도 코란이 성경과 일치한다고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있다.<br/><br/>셋째, 코란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마호메트”가 “모세와 같은 한 선지자”라고 가르친다(수라 28:44). 마호메트를 위시한 모든 모슬렘들이 모르고 있는 것은, “모세와 같은 한 선지자”는 “유대인들”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사실이다. 『주 너의 하나님께서 네 가운데로부터 네 형제들 가운데서 나와 같은 한 선지자를 네게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에게 경청할지니라』(신 18:15). 『내가 그들의 형제들 가운데서 너와 같은 한 선지자를 그들에게 일으켜서 내 말들을 그의 입에 두리라. 그리하면 그는 내가 그에게 명령할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리라』(신 18:18). 마호메트는 유대인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명기의 예언대로 유대인 형제들 가운데서 일으켜지신 그 『선지자』이셨다. 『육신으로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이스라엘인들, 롬 9:4]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영원히 송축받으실 하나님이시라. 아멘』(롬 9:5). 이 말씀에서 보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본래 『영원히 송축받으실 하나님』이시지만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스라엘인들, 곧 유대인들에게서 나셨다. 사도 베드로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명기의 그 선지자이심을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또 하나님께서 전에 너희에게 전파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리라. 하늘은 만물이 회복될 때까지 그분을 마땅히 받아들여야 하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이 일에 관하여 그의 모든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니라. 모세도 실로 조상들에게 말하기를 ‘주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한 선지자를 너희에게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가 너희에게 무엇을 말하든지 그에게서 모든 말을 들으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그 백성 가운데서 멸망되리라.’고 했느니라』(행 3:20-23).<br/><br/>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거이다(요 5:39). 따라서 코란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가르치는 것만 보아도 성경과의 일치 여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주님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철저히 부인하는 코란은 “성경의 진리를 왜곡하는” 책이다! 코란은 그 외에 성경의 다양한 내용들에 있어서도 성경과 심각한 불일치를 보이고 있다. <br/><br/>1. 코란은 예수님의 모친을 마리얌이라고 한다. 마리얌은 아론과 모세의 누이인 “미리암”에 대한 아랍어이며, 코란 19:28은 그녀를 “아론의 누이”라고 말하고 있다. <br/><br/>2. “성경이 이스마엘과 이삭에 대해 거짓말하고 있다”(수라 36:14). 이스마엘의 후손인 모슬렘들은 이스마엘을 “아브라함 안에서 받을 유업이 없는 여종의 아들”(창 21:10, 갈 4:28-30)로 계시하는 성경을 믿지 않는다. 그들이 믿거나 말거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약속의 자녀인 “이삭”만을 아브라함의 하나뿐인 아들, 곧 『네 독자 이삭』(창 22:2)으로서 인정하신다는 점을 강조한다.<br/><br/>3. 코란은 이스라엘을 박해한 파라오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파라오와 하만”의 군대라고 말한다(수라 28:6,8). “하만”은 에스더서에 나오는 인물인데도, 코란은 그를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을 박해한 이집트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파라오와 하만의 공통점은 둘 다 이스라엘 민족을 멸하고자 했다는 점에 있는데, 마호메트는 그의 유대인 아내들에게서 이스라엘을 박해하는 파라오와 하만 이야기를 얻어듣고서 하만을 파라오의 신하로 오인한 것이다. <br/><br/>4. “마호메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언하신 성령이다”(수라 17:81).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거룩한 영”이신 성령(Holy Spirit)을 『또 다른 위로자』(요 14:16)로서 보내겠다고 하셨지, “습관적으로 간음하고 살인을 저지르는 불한당”을 보내겠다고 하지 않으셨다.<br/><br/>5.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마호메트의 제자가 되었다”(수라 5:111). 예수님의 제자들은 1세기 사람들이고 마호메트는 7세기 사람인데, 어떻게 주님의 제자들이 마호메트의 제자가 될 수 있는가? <br/><br/>6. “땅에 사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면 안 된다”(수라 114:1). 코란이 틀린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초림 때 사람들의 경배를 받으셨기 때문이다(마 2:11; 8:2; 14:33, 막 5:6, 눅 24:52).<br/><br/>7. “천사들은 여성이다”(수라 53:27). 하지만 성경은 천사들이 서른세 살 반의 남성이라고 말씀한다(창 18:2,16).<br/><br/>8. “마호메트는 죄가 없었다”(수라 53:2). 그러나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말씀하고 있다(롬 3:23; 5:12).<br/><br/>코란이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증거는 많다. 코란은 성경을 “표절”하려다 실패한 책이다. 구약성경의 예언을 도용한 부분을 제외하면 예언이 전무하지만, “성경”은 예언으로 가득하다. “예언”은 “무엇이 진리인가”를 알 수 있게 하는 시금석이다(사 41:22,23). 예언이 부재한 코란은 “아무것도 아닌 헛것”에 지나지 않는다(사 41:24). 진리와 무관한 “헛소리들”로 “성경의 진리”를 왜곡하는 책이 바로 “코란”인 것이다. 코란은 마호메트처럼 글을 몰라도 만들 수 있는 종교적 거짓말이며, 그 “영감(?)의 근원”이 “거짓말의 아비인 마귀”(요 8:44)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3 Dec 2025 10:30:42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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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생활 속에 침투한 이슬람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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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서양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려면 &lt;성경&gt;과 &lt;그리스·로마 신화&gt;를 읽고, 동양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려면 &lt;삼국지&gt;를 읽고, 아랍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려면 “아라비안나이트”를 읽으라는 말이 있다. 각 지역 문화권에 대한 이해는 역사를 통해 그들의 정신세계에 영향을 주어 온 많은 요소들을 고려해야 하지만, “종교”가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서양 문화에는 기독교, 동양 문화에는 불교와 유교와 도교, 즉 “유불선”이, 아랍 문화에서는 이슬람교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lt;삼국지&gt;에서 유불선 사상의 영향이 읽히고, &lt;아라비안나이트&gt;에서 이슬람교의 영향을 읽을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br/><br/>우리나라도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기독교 문화가 함께 들어와, 2000년대 초에 기독교 인구가 1,000만 명을 넘었던 적도 있을 만큼 기독교의 영향이 커졌다. 이제는 절이나 사당보다 교회가 더 친숙할 정도로 우리 문화 속에 기독교 문화가 뿌리 깊게 정착해 있다. 불교나 유교에 비해 역사가 짧지만, 기독교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우리 문화 안에 정착했고, 종교적 영향력도 커졌다.<br/><br/>그러나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정착한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우리의 문화 안으로 침투해 오는 종교가 있는데, 바로 “이슬람교”이다. 현재의 이슬람교는 우리나라 초기 기독교에 비해 선교에 있어서 문화적으로 더 유리한 위치에 있다. 우리나라 초기 기독교는 조선 문화와의 접점이 전혀 없었지만, &lt;아라비안나이트&gt;의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에 나오는 “열려라 참깨”와 같은 주문이나 “램프의 요정 지니”는 책뿐만 아니라 영화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매우 친숙한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램프의 요정 지니” 애니메이션은 2019년 우리나라에서 개봉되었을 때, 관객 수가 1,250만 명을 넘기기도 했다. <br/><br/>또한 우리는 “아랍어”에서 온 단어들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매거진(잡지), 뮤직(음악), 소파, 슈가(설탕), 시럽, 알케미(연금술), 알코올, 오렌지, 자스민, 체스, 카펫, 커피, 코튼(면), 타월, 파자마 등 많은 단어들이 아랍인들의 언어에서 유래했다. 이슬람 문화는 이미 우리 문화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 <br/><br/>우리나라에 이슬람이 들어온 것은 통일 신라 때부터라는 문헌 기록이 있지만, 현대 이슬람교의 유입은 이슬람 국가인 튀르키예(터키)가 지난 6ㆍ25 전쟁에 참전했을 때부터였다. 6ㆍ25 전쟁 때 튀르키예군이 기도하던 이태원에 한국 최초의 모스크가 세워졌다. 튀르키예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우리나라를 인도적으로 지원했는데, 전쟁 중에 두 명의 모슬렘 개종자가 생겼고, 1955년에 이들이 중심이 되어 “이슬람협회”가 결성되었다. 1970년대 중동에 파견되었던 건설 근로자들이 귀국할 때 이슬람교도가 되어 온 사람들이 있었고, 1975년의 석유 위기 이후 당시 정부가 친아랍 정책을 펴면서 이태원의 이슬람 사원도 생겼다. 이후 1990년대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유입되면서 국내에 체류하는 모슬렘들의 수가 늘었는데, 그에 따라 모슬렘 다문화 가정이 늘어나, 초기 모슬렘 가정의 자녀들이 이미 성인이 된 상태다.<br/><br/>법무부와 한국이슬람교중앙회의 발표에 의하면, 외국인을 포함한 한국 내 모슬렘 인구는 2021년 기준 총 26만 명이고, 이 가운데 순수 한국인 모슬렘이 6만 명을 넘어섰다. 또 문화체육관광부와 통계청 등에 따르면, 2025년에 국내에서 거주하는 외국인 모슬렘의 인구는 약 30만 명으로 추산된다. 그러므로 2025년 현재 국내 모슬렘 수는 내외국인을 합해 36만 명 이상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이슬람 공식 사이트에 의하면, 이슬람 성전인 모스크는 21개이고, 공식 사이트에 정확한 수가 나와 있지 않지만, 기도처인 무살라는 약 200곳으로 추산된다. 모스크와 무살라는 단순한 건물이 아니다. 이 둘은 이슬람 세계 전체를 하나로 묶는 핵심 연결 고리이다. 특히 “모스크”는 코란과 하디스 등을 가르치는 이슬람의 대학이자 결혼식장이요 장례식장이며, 또한 이슬람의 전시관이다. 마치 기독교의 교회 건물이 단순히 예배만을 위한 모임의 장소가 아닌 것처럼, 모스크와 무살라도 단순한 경배나 모임 장소 이상의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다.<br/><br/>국내 거주 인구 외에 매년 입국하는 모슬렘 관광객 수는 전체 관광객의 약 7%인 7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고 있다. 모슬렘 관광객의 증가에 발맞춰 한국 정부는, 모슬렘 방문자들을 위한 “모스크”와 “임시 예배소,” “할랄 식당” 등을 제공해 이슬람 문화를 확산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할랄”은 아랍어로 “허용된 것”이라는 뜻으로, 이슬람 교리에 따라 먹고 사용할 수 있는 음식과 물건에 붙는 말이다(이와 반대로 금지된 것에는 “하람”이라는 말이 붙는다). 이태원에 조성된 “할랄 음식 메카” 문화거리는 국내외 모슬렘들이 자주 찾는 명소가 되었다. 모슬렘들을 위한 “할랄 인증 마크”의 음식 재료와 포장 음식이 이미 상용화되어 있는 것이다.<br/><br/>그뿐 아니라 국내 대학가에도 이슬람 문화가 확산되어 있다. 서울대, 카이스트 등에 이슬람교 동아리가 생겼고, 서울대 모슬렘 학생회는 금요일마다 정기 합동 예배를 갖는다. 카이스트의 경우에는 매주 금요일 기도 모임을 갖고, 일요일에 이슬람 경전인 코란를 공부하며, 비모슬렘 학생들에게 이슬람 문화를 소개하고 교류하는 행사를 열기도 한다. 서울시립대, 한국외대 등은 캠퍼스 내에 모슬렘 전용 기도 공간을 만들었으며, 일부 대학은 교내에 “할랄 식당”을 열었다. 2013년에 한양대가 처음으로 할랄 식당을 연 것을 기점으로, 세종대, 이화여대, 경희대, 서울대가 2018년부터 할랄 메뉴를 제공하고 있다. 카이스트엔 할랄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식당도 생겼다. 이슬람 문화는 더 이상 먼 나라 문화가 아니다.<br/><br/>이슬람교도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선교 전략을 가지고 있다. 이슬람이 취하는 선교 전략을 “다와”라고 하는데, 이 말은 “사람들이 이슬람을 믿도록 만드는 일체의 행위”를 뜻한다. 모슬렘 선교사는 “다이”라 불리며, 현재 전 세계에 파송되어 있다. 미국이나 한국에서 이슬람 국가로 보내는 선교사의 수보다 미국과 한국으로 선교하기 위해 온 모슬렘 선교사들의 수가 더 많다고 한다. 한 자료에 의하면, 한국에서 전 세계로 파송한 기독교 선교사의 수는 약 1만 7천 명인데, 한국에 들어온 이슬람 선교사는 약 2만 명인 것으로 추산된다.<br/><br/>이슬람 선교사들은 주로 학생, 교수, 사업가의 신분으로 활동하며, 이들의 선교 전략은 크게 3가지이다. 첫째가 이슬람 문화 활동을 통한 “이슬람 문화 친숙화”이다. 이때 이들이 자주 하는 말이 “이슬람교는 평화의 종교다.”이다. 둘째가 “모스크”를 세우는 것이다. 모스크는 이슬람 선교의 핵심이다. 이슬람이 유럽의 전진 기지로 삼은 영국에는 1962년만 해도 모스크가 1개였지만 60여 년이 지난 지금은 644개의 모스크가 있다. 셋째가 “지하드”이다. “성스러운 전쟁”을 의미하는 “지하드”는 무력에 의한 이슬람 선교로서, 코란은 “지하드”를 모슬렘의 의무라고 규정하고 있다. 무력이 통하지 않을 때는 평화적 선교 정책을 펴지만, 무력이 통할 때는 무력을 써 온 것이 이슬람교의 역사이다.<br/><br/>이슬람교의 파급 속도와, 생활 속에 침투해 온 이슬람 문화의 양상으로 볼 때,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기독교의 하나님과 이슬람교의 알라는 같은 신 아니에요?” “기독교보다 이슬람교가 더 맞는 것 같아요.” “저 최근에 이슬람교로 개종했어요.”와 같은 말을 듣는 일이 “흔할” 날이 매우 가깝다. 우리가 “성경”의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진리의 지식을 열심히 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는 한민족이 “알라”를 자신들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어려운 일이겠는가?<br/><br/>느부캇넷살이 유다의 청년들에게 칼데아인들의 학문을 가르쳐서 국가의 핵심 인물로 사용하고자 했을 때, 맨 처음 한 것은 왕의 음식, 즉 “칼데아인들의 음식”을 주고, “이름”을 바꾼 것이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이슬람 문화”가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할랄 음식”을 먹고, 이슬람 매체를 통해 “이슬람 생활방식”에 심취할 사람들이 생길 것이다. 심지어 자기 “이름”을 이슬람식으로 바꾸고 자녀의 이름도 덩달아 이슬람식으로 짓는 이들이 생길지도 모른다.<br/><br/>우리는 어느 날 대한민국의 한 젊은이가 매일 메카를 향해 다섯 번 기도하고, “할랄 음식”만을 먹으며, “코란”을 열심히 읽고, “모스크”에서 다양한 이슬람교도들과 교류를 가지더니, 극단적인 지하디스트가 되어 자살 테러를 감행했다는 뉴스를 접하게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슬람교는 그런 종교이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이슬람교도들이 평화를 말할지 모르나, 그들의 코란은 “알라를 위한 성스러운 전쟁,” 즉 “지하드”를 명령하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3 Dec 2025 10:29:5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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