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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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가면을 쓴 “4차원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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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6년 10월호>

배교한 기독교계로 “4차원의 영성”을 들여온 이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였다. 조 목사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아” (4차원, 1979)을 출간했고, 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수정을 거쳐 우리말로 된 <4차원의 영적 세계>(1996)를 냄으로써 한국 교회를 “뉴에이지”로 무너뜨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영문판 도서는 데이브 헌트(Dave Hunt)와 T.A. 맥마혼(McMahon) 공저 (기독교 속의 미혹, 1985)에 의해 호된 비평을 받았는데, 헌트와 맥마혼은 “4차원의 영적 세계”가 교회 속으로 유입된 “샤머니즘”이라고 일축했다. “샤머니즘”이라는 말은 교회와 그 사역자에게 적용하기에 매우 부적합한 용어가 아닐 수 없는데, 두 저자는 조 목사를 노먼 빈센트 필과 로버트 슐러와 더불어 기독교계 내로 샤머니즘을 들여온 인물로 못박았다. 이유인즉, 조 목사의 <4차원의 영적 세계>가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는데다가 급기야는 “뉴에이지”의 영적 원형(元型)인 “샤머니즘”과 몹시도 흡사하기 때문이었다.

조 목사에 따르면, 4차원은 시간과 공간 속에 있으면서도 이를 초월하는 영적 세계로, 그 아래에 위치한 3차원(물질세계)을 지배한다. 4차원에 속한 존재는 서열에 따라 하나님(가장 높은 4차원), 마귀(중간 4차원), 인간(가장 낮은 4차원)으로 구분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은 인간적·마귀적 4차원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4차원으로 옮겨지며, 그렇게 해서 들어간 4차원에서 3차원의 물질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 그 힘의 본질을 “꿈”으로 정의한 조 목사는, 보이지 않는 4차원을 변화시켜서 보이는 3차원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생각, 믿음, 꿈, 말”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네 요소를 바르게 설정하는 것이 “기도”보다도 우선한다고 했으니, “생각하고, 마음에 그림(꿈)을 그리고, 믿고, 입으로 선포(말)하면” 3차원의 현실이 그대로 바뀌어서 성취된다는 것이었다.

조 목사가 그와 같은 “4차원의 영적 세계”를 주장하기 위해 내세운 “성경적(?)” 근거 중 첫 번째가 “창세기 1:2”이다. 땅이 형체가 없고 공허하며 어두움이 깊음의 표면에 있으며 하나님의 영께서 물들의 표면에서 거니신 일을 “원어”를 들먹이면서, 성령께서 물들 위에서 “알을 품듯 부화하고” 계신 것처럼 가르쳤는데, 성령께서 3차원의 세계를 “품으시고” 운행하심으로써 그 “부화”의 역사로 인해 창조가 현실로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조 목사가 성령의 창조 사역에 있어서 “부화”를 주장하기 위해 근거를 든 것은 히브리어 원어였다. 개역한글판성경의 「운행하시니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로하프”로, 바른 성경인 <한글킹제임스성경>에는 『거니시더라[moved]』로 번역되었다. 이 “로하프”는, 원시적 어근(原始的 語根, primitive root)으로서 “알을 품다” (brood)의 뜻이고, 암시적으로는 “긴장을 풀다, 쉬다” (to be relaxed)의 뜻을 지니고 있다. <킹제임스성경> 번역자들은 이와 같은 “로하프”를 “flutter”(퍼덕이다, 신 32:11), “move”(거닐다, 창 1:2), “shake”(떨다, 렘 23:9)로 번역했으니, “로하프”는 원시적 어근으로서, 암시적 의미로서 지니는 정적(靜的)인 의미에 반하여, 성경의 문맥 속에서는 매우 동적(動的)인 의미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섭리로 보존된 <킹제임스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조 목사는 “로하프”의 원시적 어근에 집중하는 오류를 범함으로써 그것이 문맥 속에서 지니는 다양한 동적 의미를 놓쳐 버렸고, 성령께서 마치 새나 파충류처럼 “알을 품어” 세상을 “부화시킨” 것처럼 어느 이교 신화에서나 들을 수 있는 소리를 한 것이다. 실제로 고대 인도 문헌인 <베다>와 <마누법전>의 신화에, 우주가 형성되기 전, 아무것도 없는 혼돈의 물 위에 금빛 알인 “히라냐갈바”(Hiranya- garbha)가 떠돌았는데, 이 알이 반으로 쪼개지면서 위쪽 껍질은 하늘이 되고 아래쪽 껍질은 땅이 되었으며, 그 안에서 창조신 브라흐마(Brahma)가 태어나 만물을 창조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중국 신화 “반고 이야기” 또한 그와 유사한데, 태초에 우주는 거대한 닭의 알과 같은 혼돈의 상태였으며, 그 알 속의 거인 반고(盤古)가 잠에서 깨어 도끼로 알을 깨고 나오자, 알의 가볍고 투명한 기운(양기)은 위로 올라가 하늘이 되고, 묵직하고 탁한 기운(음기)은 아래로 내려앉아 땅이 되었다고 한다.
성령이 아닌 세상의 영의 통제를 받으면 “진리의 가면을 쓴 채” 세상의 말을 하게 되어 있다. 성령께서는 창세기 1:2에서 물들의 표면을 “거니셨을” 뿐, 세상을 알을 품듯 품어 “부화”시키지 않으셨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부화”와 같은 기술을 통해 창조하신다고 가르치지 않는데도, 4차원의 영성은 하나님의 창조 “방법”을 제한하고, 그분의 능력을 특정 방법론에 국한시켰다. 이러한 오류는 그와 동일한 “기술”을 사용할 수 있다면 인간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할 수 있다는 망상을 일으키는데, “4차원의 영성”이 그러하다. 인간 역시 “4차원”의 영적 존재이므로 현실을 “시각화하고” “부화하면” “창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4차원의 영성”에서는 “꿈”과 “환상”이 성령의 영적 언어로서 가르쳐진다. 조 목사는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일컫는 이들이 3차원의 세계를 “부화”할 수 있는 방법으로 “상상력”과 “비전”(환상)과 “꿈”을 제시하는데, 우리가 시간과 공간에 제한된 한계의 벽을 뛰어넘어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젊은이에게는 환상을, 늙은이에게는 꿈을 꾸게 도와주신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된 근거로 든 “요엘 2:28,” 곧 『그후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 위에 부으리라. 그러면 너희 아들들과 너희 딸들이 예언할 것이요, 너희 노인들은 꿈들을 꿀 것이며, 너희 청년들은 환상을 보리라.』라는 말씀은 “너희,” 곧 “이스라엘”의 아들들과 “이스라엘”의 딸들과 “이스라엘”의 노인들과 “이스라엘”의 청년들을 향한 말씀으로서, “지상 재림”(욜 2:31) 전, 즉 “왕국”이 임하기 전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욜 2:32)에게 일어날 현상을 다룬다. 사도 베드로가 “사도행전 2:17”에서 그 구절을 인용한 것은, 당시 사도들이 여전히 “왕국”에 중점을 두고(행 1:6) 메시아의 부활을 증거하는 상황에서,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때 일어난 일(즉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임하신 일)에 관하여 설교하기 위해, 상황이 유사한 “설교용 구절”을 찾아내어 인용한 것에 불과하다. 교회 시대에 성령의 언어가 “꿈”과 “환상”이라는 것은 성경적 근거가 전무한 주장이다.

성경에 계시된 “성령의 언어”는 사도 바울에 따르면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말,” 곧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words)”이다. 『또한 우리가 그것들을 말하되 인간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말[the words... which the Holy Ghost teacheth]로 하나니 영적인 일들을 영적으로 비교하여 말하느니라』(고전 2:13). 이처럼 성령께서 누군가로 하여금 진리를 전하게 하실 때는 성경에 기록된 영적인 일들을 영적으로 비교하여 말하게 하신다. 이것이 교회 시대에 진리를 전하는 방법이다. 위의 고린도전서 말씀에 따르면, “꿈과 비전이 성령의 영적 언어이며, 성령께서는 여러 가지 꿈과 비전을 성도들의 마음속에 불어넣어 주시고 그것들을 통해 계속 말씀하신다”는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헛소리가 되고 만다.
“4차원의 영성”에서는 특히 “바라봄”(시각화)이 강조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인간은 “4차원”의 영적 존재이기에 현실을 “시각화하고” “부화하면” “창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를 위해 아브라함이 “바라봄”과 “믿음”으로 이삭을 낳았다는 주장을 꺼내 든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출생을 “4차원의 영적 세계”와 연관시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15장에서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세게 하셨을 때, 그 별들을 바라보는 아브라함은 별들이 자신을 향해 “아버지 아브라함!” 하고 부르는 듯한 감동을 받고, 그 별들이 자손들처럼 생각되면서 가슴속에 “꿈”과 “그림”으로 선명하게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그 영상들이 영적 비전과 꿈의 언어로서 그의 4차원의 영적 세계에 역사하게 되었고, 그것이 성령께서 백 살이나 된 아브라함의 신체 조건을 변화시켜 이삭의 출생을 성취하시려는 준비 단계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시각화”했더니 그것이 3차원의 물질세계에 현실로 나타나 아들 이삭이 탄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인 해석”이 아니다. 신약교회사에서 하나님께서 들어 쓰신 사람들 가운데는 성경을 그런 식으로 해석한 이가 없었다. 만일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시각화하여 가슴에 담고 그것을 계속 그리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실 수 없었을까? 일례로 아브라함은 주님께서 『너는 네 고향과 네 친족과 네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라고 하셨을 때, “순종하여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떠났다”(히 11:8).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은 그때 계시되지 않았기에, 아브라함은 “바라볼”(시각화할) 만한 대상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고향을 떠났다. 카나안 땅을 구체적으로 “마음에 그리지” 않았음에도 그는 그곳에 이르렀으며, 그곳에 도착해서야 그 땅의 소유에 대한 약속을 받게 되었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마음속에 “꿈”과 “그림”을 간직하여 3차원의 물질세계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었다. 반대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대한 전적인 확신이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을 찾을 때 마땅히 보상받을 것을 믿는 믿음이었다(히 11:6). 즉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별들을 보고 약속된 씨들을 “시각화하지 않아도”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약속”이란 말한 것을 이루겠다는 “일방적 다짐”이 아닌가? 약속하신 주님은 언약과 자비를 일천 대까지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며(신 7:9), 맹세하신 것을 변경하지 않는 분이시다(시 132:11). 신실하신 주님께서 “약속하신” 아들 이삭은 생식 기능이 멈춰 버린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주신 조건 없는 “선물”이었다. 이 하나님의 선물은 마음속의 “꿈”과 “그림”을 결코 요구하지 않았다.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셔야 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 계보를 통해 “메시아”를 탄생시킬 계획이 있으셨기 때문이다(마 1:1-17). “여자의 씨”(사 7:14, 마 1:18)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은 “창세기 3:15”에서 이미 “예언”으로 주어졌으니, 하나님께서는 “약속된 메시아의 탄생”을 마태복음의 계보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상상”과 “믿음”에 의존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전지전능하신 주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었다. 따라서 주님의 계획과 목적이 실현되는 과정 속에 “인간”의 “시각화”와 “부화”를 개입시키는 것은 전지전능하신 분을 지극히 제한하는 일이 된다(사 2:22). 교회의 휴거, 7년 대환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역시 인간이 마음에 그리지 않아도 반드시 현실이 될 “예언된 역사”이다.

성경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하는 “4차원의 영성”은 뉴에이지의 “끌어당김의 법칙”과 “마음의 시각화를 통한 현실 창조” 개념과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출처와 명분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뀌었을 뿐, “인간이 마음의 이미지를 조작하여 원하는 결과를 얻어 낸다”는 기술적 원리 자체는 “뉴에이지 시각화”와 동일하다. “뉴에이지의 철학”을 무분별하게 수용함으로써 그 무너짐이 가속화된 한국 교회! 진리의 기반이 부재한 그 교회가 “뉴에이지의 홍수”에 와해된 것(마 7:26,27)은 시간 문제였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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