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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에이지가 낳은 “현대 교회 음악”(C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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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6년 10월호>
세계적인 음악 산업 분석 기관 “루미네이트”(Luminate)가 지난 2025년 발표한 연간 보고서에는 눈을 의심케 하는 통계가 실렸다. 미국 내의 “온디맨드 오디오 스트리밍량,” 즉 어떤 곡을 직접 골라 재생하는 시간의 양에 있어 “크리스천 / 가스펠” 장르가 전년 대비 18.5%의 성장을 보였다는 것이었다. 전체 음악 산업의 성장률이 4.6%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폭발적이라 할 만한 수치였다. 이는 그간 CCM 시장을 주도하던 호주의 “힐송 워십,” 미국의 “베델 뮤직” 등의 “라이브 워십 팀”의 인기에 더해,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CCM 가수들의 눈부신 선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기성세대들에게는 익숙지 않은 이름일지 모르겠으나, CCM 가수 “포레스트 프랭크”와 “브랜든 레이크” 등은 “Z세대”를 중심으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둘은 2025년 상반기에 함께 “빌보드 핫 100 차트”에 이름을 올리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는데, 이는 그들의 음악이 “기독교인”들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매력적이었음을 방증하는 지표다.“브랜든 레이크”는 차트 40위에 오른 자신의 곡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의 귀에도 감미롭게 들리는 오늘날의 CCM은 어떻게 세상에 나왔을까? 그 이야기를 하려면 1960년대 후반 미국으로 되돌아가 보아야 한다. 사실상 제2차 세계대전의 최대 수혜국으로서 물질적 풍요를 누렸던 미국인들 가운데는, 물질문명으로 인한 폐해와 세계대전 이후로도 끊임없이 발발하는 전쟁에 대한 회의감을 품는 이들이 점차 늘어났다. 그리고 그런 생각에 극단적으로 경도되어 그간의 제도, 통념, 가치관 등을 부정하고, 무정부주의 및 평화주의를 추구하며 자연으로 귀의하기에 이른 자들이 있었으니, 이른바 “히피들”이었다. 히피들은 미국 주류 문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겨난 이들이었던 만큼 “기독교적 가치관”에 반(反)하는 종교적 체험을 추구했다. 뉴에이지의 원류라 할 수 있는 동양의 신비 종교들에 심취하는 것이나 환각제(LSD)를 통한 “의식의 확장”을 도모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양상이었다.
한편 히피들이 급속도로 늘어나던 때를 즈음하여 미국 서부를 중심으로 은사주의 기반의 기독교 운동인 “예수 운동”(Jesus Movement)이 확산되었는데, 이 운동의 영향으로 히피 출신의 음악가들 가운데도 “회심”한 이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그들은 “지난날의 생활로 충분”(벧전 4:3)하지 못하다고 여겼는지 “기독교인”이 되고 나서도 여전히 히피 시절에 즐기던 포크, 록 음악 양식을 고수하며 가사만 기독교적으로 바꾸었다. 당연하게도 대다수 교회들에서는 비판 여론이 일었는데, 아프리카에서 “수입된” 그들의 음악은 본래 주술적 무아지경 상태를 유도하기 위해 창안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메시지 자체도 문제였으니, 하나님을 찬양하거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신 히피들이 추구하던 “개인의 신비적 체험”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졌다. 그러나 “저항 정신”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히피 출신 음악가들은 자신들의 뜻을 꺾지 않고 음악 활동을 계속함으로써 최초의 CCM이라 할 수 있는 “예수 음악”(Jesus Music)을 만들어 냈다. “크리스천 록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래리 노먼”은 이때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왜 마귀가 좋은 음악을 다 가져야 하나요?”
누구나 쉽게 짐작하겠지만, CCM이라는 장르가 탄생했을 때는 기독교계뿐 아니라 음악계에서도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이와 관련하여 비틀즈의 폴 메카트니가 뛰어난 음악성을 가지고도 성공하지 못하는 래리 노먼을 안타까워하며 “(당신 곡에서) 그 하나님 소리만 뺀다면 유명해질 수 있을 텐데.”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처럼 “비주류 문화”에 머물던 CCM이 “주류 음악계”로 도약할 계기를 맞은 것은 1980년대의 일이었다. 그 일등공신은 듀엣곡
에이미 그랜트가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는 대가로 치렀던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이었다. 초기에는 (비록 음률은 세속적이었을지언정) “하나님”이나 “말씀” 등을 명시적으로 노래하던 그녀가 “영적인 삶에 대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더 큰 맥락”을 추구하는 것으로 점차 방향을 선회했던 것이다. 즉 그녀는 대중가요처럼 보이는 곡에 영적인 메시지를 “은유적으로” 내포하거나, 아예 영적인 메시지가 전혀 없는 대중가요를 부름으로써 “팬층”을 두텁게 하는 길을 택했다. 이에 “배신감”을 느낀 교인들은 그녀를 향해 “예수님은 어디로 가신 거냐?”라는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으나, 그녀는 후일 “모든 노래가 예수님에 대해서만 말한다면, 인간으로서의 진정성을 갖지 못할 것 같았다.”라고 당시를 회고하면서 자신이 “타협”으로 돈과 명성을 거머쥔 일을 정당화했다.
“크리스천 팝”을 대중화했던 에이미 그랜트를 필두로 하여 “크리스천 발라드”의 “마이클 W. 스미스,” “크리스천 소울”의 “베베 앤 세세 와이넌스,” “크리스천 재즈”의 “테이크 6,” “크리스천 힙합”의 “디시 토크” 등 8,90년대를 주름잡은 가수들에 의해 CCM은 “황금기”를 맞았다. “주찬양선교단,” “시인과 촌장,” “예수전도단” 등 “한국 CCM 1세대”가 활동을 시작했던 것도 1980년대의 일이었다. 이들은 세팅 드럼이나 전자 악기 소리는 물론이요, 야니 혹은 조지 윈스턴 등의 뉴에이지 음악가들이 몽환적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사용하는 “엠비언트 사운드”나 히피들이 환각적 체험을 음향으로 구현하는 과정에서 발전시킨 “사이키델릭 사운드”까지 자신들의 곡에 “과감하게” 사용했다. 그런 음악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법” 대신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 대신 “내면을 들여다보며 명상하는 시간”을 갖게 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CCM의 황금기가 도래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전자 악기를 이용한 청소년 및 청년 예배의 유행이 뒤따랐는데, 국내에서는 전자 악기 수요가 폭증하는 기현상이 발생했을 정도였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음반 산업 자체의 쇠퇴와 함께 CCM 시장에도 꽤 긴 겨울이 찾아왔지만, 예배를 기반으로 한 “라이브 워십 팀들”은 여전한 수요를 바탕으로 교회에서 “히피 음악”을 열창하는 명맥을 이을 수 있었다. 그렇게 오늘날 콘서트장을 방불케 하는, 자세히 묘사하자면 “둥둥” 울리며 온몸을 전율케 하는 베이스 기타와 세팅 드럼 소리에 맞춰 높이 쳐든 손을 흔들고, 반복되는 후렴구를 “떼창”하며 “무아지경”에 이르게 되는 “경배”의 모습이 보편화되었던 것이다.
기존의 찬송가가 아닌 “새로운 음악”으로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노래를 할 수 있다면서 “친(親) CCM 진영”이 내놓는 변명은 크게 둘이다. 하나는 “루터, 웨슬리, 블리스, 생키 등의 찬송 작곡가들도 모두 당대의 ‘최신 음악’을 사용했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친숙한 표현이나 음악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태까지 상술(上述)한 내용을 따라왔다면, 전자는 “눈속임”이요 후자는 “불복종의 정당화”(삼상 15:22,23)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을 것이다.
먼저 “새로운 음악”에 대해서라면, 그 자체는 오히려 장려될 일이라 하겠다. 아닌 게 아니라 “주께 노래하며 곡조를 만들라”(엡 5:19)는 명령이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늘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러나 문제는 “새로운 음악”을 만드는 주체가 바로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클래식이나 1900년대 초까지의 “가스펠 송”의 기틀을 다진 사람들은 최소한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포크, R&B, 록, 힙합 등의 “새로운 음악”은 누가 만들었는가? “불순종의 영”(엡 2:2,3)을 소유한 히피들이나 마귀들과 교제하는 아프리카 주술사들이 아니던가?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가 벨리알과 어찌 조화를 이루며 또한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어떤 부분을 같이하겠느냐?』(고후 6:15)
복음을 전하거나 영적인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친숙한 음악을 사용하겠다는 주장에 대해서라면, “이익이 경건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딤전 6:5)는 말로 쉽게 일축할 수 있겠다. 애당초 사람들의 비위를 맞춰 준다고 해서 그들이 하나님께 돌이키는 일이 일어날 리도 없거니와(창 19:1-9에서 소돔 사람들이 자신들을 “형제”라고 부르는 롯에게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찬찬히 읽어 보라.), 백 번 양보해서 그것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런 수단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며(갈 1:10), 세상과의 친교는 반드시 하나님과의 대립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약 4:4). 세상 사람들이 찬송가는 거북스러워하는 반면, CCM은 쉽게 수용한다면, 그것은 “찬송가”는 말씀에 입각하고 CCM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그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더니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나이다.』(요 17:14)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어떤 사람들은 “음악에는 죄가 없다”면서, 음악의 “도구적 중립성”을 이야기한다. 어떤 악기나 음향 효과 자체에는 선악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이라면 그런 말에 동의할 수가 없다. 사울에게 악령이 임했을 때, 다윗은 어떤 가사도 읊조리지 않고 그저 하프를 탔다. 그랬더니 악령이 떠나고 사울은 힘을 얻었다(삼상 16:23). 비슷한 사례가 또 있다. 엘리사는 유다와 이스라엘과 에돔 왕 앞에서 예언해야 했을 때 악사를 필요로 했다. 악사가 연주하자, 주의 손이 엘리사에게 임했고 엘리사는 예언하기 시작했다(왕하 3:15,16). 우리가 이와 같은 말씀들을 통해 깨닫는 바는, “음악”이 “영의 세계”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진리다. “가사”나 “의도”와는 관계없이 말이다. 어떤 음악은 악령을 쫓아내고 하나님의 역사를 불러오는가 하면, 어떤 음악은 우상 숭배를 조장하고 성령을 소멸케 하는 것이다(출 32:18,19).
장차 “뉴에이지 사상”을 가진 통치자, 적그리스도가 성전에 앉아 자신이 “신”이라는 주장을 펼 때(살후 2:4) 사용할 주요한 도구도 바로 “음악”이다. 그 옛날 다양한 언어권의 민족들을 제국으로 편입시킨 느부캇넷살왕이 백성들을 일치단결시켜 자신의 형상에 경배하도록 만들기 위해 음악을 사용했던 것처럼 말이다(단 3:4-6). 혹시 “음악에는 죄가 없다”는 말에 미혹당해 “아무 생각 없이” CCM이나 대중가요를 흥얼거리고 있었다면 이제 정신을 차리고 그것들을 어서 “불태워 버려야” 한다(행 19:19). 그와 같은 음악에 귀를 내준다는 것은 장차 인간을 속이 텅 빈 꼭두각시처럼 만들어 통제할 적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미리 온, “많은 적그리스도”(요일 2:18)의 “모의실험”에 동참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B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