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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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를 가장 모르는” 은사주의의 미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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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5년 07월호>

한국의 기독교계를 가장 크게 망가뜨린 사탄의 거짓 교리 두 가지는 칼빈주의와 은사주의다. 특히 그 중에서도 은사주의는 교인들의 헛된 욕망과 물질만능주의를 공략함으로써, 배교한 현대 교회들 속에 깊이 뿌리내렸다. 은사주의는 이제 “교회 성장”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수단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마귀의 강력한 미혹에 속아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은사주의의 유래는 고대 바빌론 종교에 있다. 거기서 나온 “신비적 체험”에 대한 강조는 중세 암흑시대에 수도원으로 흘러들어 갔다. 11세기 초에 시작된 십자군 전쟁의 비극의 중심에 있었던 신비주의자들의 미혹과 선동도 은사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은사주의는 교회들이 종교 개혁 성경인 <킹제임스성경>(1611)을 버림으로써 배교의 시대가 닥친 후 본격화되었다. 은사주의 운동의 발원은 찰스 파함이 캔자스 주 토피카에 성서 대학을 설립했던 19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운동은 1906년 “아주사 거리 사역”을 통해 가속화되었고, 1900년대 후반에는 순복음 친교회가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960년대 초부터는 로마 교황청이 이 운동에 협조하기 시작함으로써, 은사주의 운동은 에큐메니즘과 뉴에이지 운동에서도 중심 역할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은사주의 운동에서 나타났던 “은사들”은 신약 교회의 사역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들뿐이었다. 이에 대해 논하려면 먼저 “은사”가 무엇인지부터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은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카리스마”(charisma)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재능”(gift)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때로 “선물”(gift)로도 번역된다. 『이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선물[gift]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말미암은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라』(롬 6:23).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보배로운 피로 사신 교회의 성도들에게 다양한 은사들을 선물로 나눠 주신 것인데, 이 일은 성도들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하신다. 성령님께서 행하시는 내적 역사가 성령의 열매를 통한 인격의 형성이라면, 성령님의 외적 역사는 은사들의 분배를 통한 섬김과 사역의 위임이다(고전 12:4-11).

하지만 은사주의자들이 자신들에게만 특별하게 주어졌다고 주장하는 “은사”들을 보면, 대개 병을 고친다거나 귀신(?)을 내쫓는다거나 방언을 한다는 것들에만 국한된다. 그들은 교회를 세우는 데 필요한 다른 성경적 은사들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관심하다. 이는 성경이 은사에 대해 주시는 권면에 역행하는 작태이다. 『알지 못하는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자신을 세우나 예언하는 사람은 교회를 세우느니라... 너희도 마찬가지라. 너희가 영적인 은사들을 열망한 이상 교회를 세우는 데 풍성하기를 구하라...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일만 마디의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말하기보다는 차라리 나의 지각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여 나의 말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기를 원하노라』(고전 14:4,12,19).

은사주의자들은 “신사도 운동,” “사도권 계승” 등을 운운하지만, 그들의 사역은 사도들의 그것과 닮은 데가 없다. 사도들의 사역 가운데 병을 고쳐 주거나 악령들을 내쫓는 것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사도들이 주로 했던 일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파하고 성경적 진리들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목회를 맡은 디모데에게 네 안에 있는 은사를 소홀히 여기지 말라고 이야기하면서 『네 자신과 교리에 주의하고 이 일들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써 네 자신과 네 말을 듣는 사람들을 구원하리라.』(딤전 4:16)라고는 했으되, 병을 고치고 축사(逐邪)하고 방언을 하라고 한 적은 없다.

은사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은사들은 사실 오늘날 유효하지 않은 것들이다. 성경을 구성하는 66권의 책들 가운데 은사에 대해 가장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고린도전서”인데, 이 서신에 열거된 은사들 가운데는 현재의 그리스도인들과 무관한 것들도 있다. 현대 교회들이 은사주의의 이단성을 분별하지 못하는 까닭은 바로 이러한 진리에 무지하기 때문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성경을 올바로 나눠서 공부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은사주의자들 중에는 “그 말씀은 현 시대에 적용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믿음으로 주장한다 해도 소용이 없어요.”라고 가르치는 성경 교사가 없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말씀은 신기할 만큼 잘 “나눈다.” 그들은 『병든 자들을 고쳐 주고, 문둥병자들을 깨끗게 하며, 죽은 자들을 살리고, 마귀들을 내어쫓으라.』(마 10:8)라는 말씀은 도용하면서도, 어째선지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너희가 값없이 받았으니 값없이 주라. 너희의 돈주머니에 금이나 은이나 놋을 가지고 다니지 말라. 여행을 위하여 자루나 두 벌의 겉옷이나 신들이나 지팡이들도 지니지 말라. 일꾼이 자기 음식을 받는 것은 합당하니라.』(마 10:8-10)라는 말씀은 못 본 체한다.

성경은 자신의 감정이나 유불리에 따라 나누어 보는 책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이 기록된 대상과 시기에 따라 나누어 적용해야 한다. 성경은 인류를 세 부류, 곧 “유대인”과 “이방인”과 “하나님의 교회”로 구분한다(고전 10:32). 따라서 어떤 말씀은 유대인들을, 어떤 말씀은 구원받지 못한 이방인들을, 어떤 말씀은 교회 시대에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한다. 예컨대 『네가 율법을 지킨다면 할례가 정녕 유익하지만 네가 율법을 위반하는 자가 되면 네 할례가 무할례로 되느니라.』(롬 2:25)라는 말씀은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라 불리는 “그리스도인들”이 거듭날 때 받은 『그리스도의 할례』는 그들의 혼이 성령님에 의해 『육신의 죄들의 몸을 벗어 버린 것』을 말하며(골 2:11), 이 할례는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무할례가 되는 법이 없다. 또한 “음행하는 자들과 사귀지 말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교회” 안에 적용되는 규칙이다. 그것은 이방인들이 지켜야 할 규칙이 아니다(고전 5:9-13).

“은사”에 대해 논하는 고린도전서는 A.D. 57년경이라는 아주 독특한 시간적 배경 속에 기록되었다. 그때는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이 유대인에서 이방인으로 이동하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유대인들을 향한 사역의 문이 완전히 닫힌 상태는 아니었다. 적어도 사도 바울이 자신의 설교를 거부하는 로마의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이방인들에게 보낸 것과 그들이 그것을 들을 것을 너희가 알라.”라고 선포했던 A.D. 63년경까지는 그랬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는 민족이므로(고전 1:22), 그맘때까지는 “방언”과 “신유” 같은 표적으로서의 은사가 유효했다. 그러나 그러한 은사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취를 감추고 만다. A.D. 68년경 기록된 디모데후서에는 바울이 트로피모를 고쳐 주지 못해 밀레토에 남겨 뒀다는 내용이 나온다.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자에게 대기만 해도 질병이 떠나던(행 19:11,12) 시절은 이제 다 가고, 본격적으로 “보지 않고 믿는 자들”(요 20:29)의 시대, 곧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하는”(고후 5:7) 시대로의 전환이 일어난 것이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A.D. 57-59)를 통해 계시되는 은사들 가운데는, 과도기적 상황까지만 허용되었던 것들도 있었다. “방언”이 그 대표 격이며,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위해 주어진 표적”으로서의 은사였다(고전 1:22; 14:22). 이 점을 받아들이지 못하겠거든 사도행전에서 “방언”이란 말을 모조리 찾아보라. 사도행전에서 “방언”은 총 세 번, 곧 2장과 10장과 19장에서 나온다. “사도행전 2장”에서 방언이 주어진 까닭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아버지께로부터 성령의 약속을 받으셨다는 사실을(행 2:32,33) 당시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머물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증거하기 위함이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이방인인 코넬료가 성령을 받은 후 방언을 했던 이유도 유사하다. 하나님께서 코넬료에게 눈에 보이는 “선물”을 주셨던 까닭은 이방인이 성령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 자리에 있던 “유대인들”에게 깨우쳐 주시기 위함이었다. “사도행전 19장”에서 바울이 에베소에서 요한의 침례만 알고 있던 유대인 제자들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성령께서는 바울의 복음이 요한의 침례만 알고 있던 아폴로의 복음을 폐한다는 사실을 유대인 제자들에게 증거하기 위해 방언으로 말하게 하셨다.

은사주의자들이 자랑하는 병 고치고 귀신을 쫓는다는 “신유”와 “축사”의 은사도 이 시대에는 유효하지 않은 표적이다(진정한 축사는 귀신이 아니라 마귀를 내쫓는 것을 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복음교회나 성락교회(베뢰아아카데미) 등에서는 이러한 은사들을 사역의 중심에 둔다. 그래도 “교회”라는 간판을 걸려면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면 그 즉시 성령님께서 그 사람 안으로 들어가 영원히 내주하신다는 복음적 진리를 그 중심에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사랑하시는 이 안에서 우리가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보혈을 통하여 구속, 곧 죄들의 용서함을 받았느니라...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 구원의 복음을 듣고서 그분을 신뢰하였으니 또 너희가 그분을 믿고서 약속의 그 성령으로 인침을 받은 것이니라』(엡 1:7,13). 그들은 이와 같은 진리 대신 “순복음”과 “베뢰아 복음”을 전한다. 구원받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은 별개의 일이며, 성령을 받은 증거가 방언이나 축사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의 영께서 자신 안에 계신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하는 사람은 버림받은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고후 13:5),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방언이나 축사를 못하면 성령을 받지 못한 것이므로, 그런 사람은 여전히 버림받은 상태에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들이 가르치는 것은 사실상 행위 구원이자 저주받을 “다른 복음”(갈 1:6-8)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은사주의자들이 바른 복음과는 멀찍이 떨어져 “신유”와 “축사” 같은 은사들에 목을 매는 이유는 성경과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생의 여정 가운데 찾아오는 고난과 역경과 질병 등은 대개 죄에 대한 징계요, 하나님을 찾고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일 수 있다. 그러나 은사주의자들은 모든 상황이 “회복”되고 “긍정적”으로 바뀌는 데만 집착하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믿음”이 부족한 탓으로만 여긴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신의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했지만 치유받지 못하고 의사인 누가를 대동해야 했던 사도 바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고후 12:1-10). 사도 바울도 “믿음”이 부족했던 것인가? 백 번 양보해서 그렇다손 치더라도, 바울이 소유한 믿음으로도 해내지 못한 일을, 전도지 한 장 똑바로 만들 줄 모르는 자들의 믿음으로 어떻게 해낼 수 있겠는가?

수년 전, 제도권 교회에 출석하던 필자의 친구의 아내가 암 진단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녀의 암은 초기였기에, 현대 의학으로도 충분히 치료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의사의 도움을 거부했다. 자신에게 기도를 받으면 낫는다는 은사주의 목사의 말을 굳게 신뢰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제발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라고 수차례 권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독자들이 짐작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 결과는 비참할 수밖에 없었다.

거짓말의 아비인 마귀는 에덴에서 최초의 인류를 속여 이 세상의 지배권을 찬탈한 뒤로, 지금까지 “이 세상의 신”(고후 4:4)으로 군림하면서 온 세상을 미혹하고 있다(계 12:9). 마귀는 이브를 미혹했을 때도, 거짓 선지자들을 통해 주님의 백성을 속였을 때도 “새로운 거짓말”을 지어내지 않았다. 그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하여 거기에 조금씩 더하고 빼서 자신의 목적을 이뤘다. 은사주의자 같은 이단들도 동일한 방법을 사용한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운운한다고 해서 “저들도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겠거니” 하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은사주의자들이 뭐라고 떠들건 간에, 당신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죄인인 당신을 위해 보혈을 흘려 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받는 것이다(롬 10:9,10). 이미 그렇게 하여 지옥의 형벌에서 벗어났다면, 이제는 바른 말씀과 건전한 교리를 가르치는 성경대로 믿는 지역 교회를 찾아가서 그곳에서 침례를 받고, 주님을 바르게 섬겨야 한다. 은사주의의 이단 교리가 판을 치는 교회에 몸을 담고 있다면, 어서 그곳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 울부짖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니는 마귀에게 삼켜지기 전에(벧전 5:8) 속히 그 억센 입에서 자신을 빼내야 하는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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