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 ?>
<rss version="2.0" xmlns:dc="http://purl.org/dc/elements/1.1/">
<channel>
<title>말씀보존학회 - 한글킹제임스성경 및 진리의 지식을 전파합니다 &amp;gt; 바이블마스터 &amp;gt; 지식뱅크 - 이단연구</title>
<link>https://www.biblemaster.co.kr/bb15</link>
<description>테스트 버전 0.2 (2004-04-26)</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item>
<title>성경을 “난도질하는” 극단적 세대주의 (2)</title>
<link>https://www.biblemaster.co.kr/bb15/%EC%84%B1%EA%B2%BD%EC%9D%84-%EB%82%9C%EB%8F%84%EC%A7%88%ED%95%98%EB%8A%94-%EA%B7%B9%EB%8B%A8%EC%A0%81-%EC%84%B8%EB%8C%80%EC%A3%BC%EC%9D%98-2/</link>
<description><![CDATA[“극단적 세대주의”는 성경을 올바로 나누는 것을 넘어 성경의 권위 자체를 난도질하며, 교회의 기초와 성령의 사역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치명적인 우를 범한다. 이들의 핵심 주장은 단 하나로 집약되는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개인적인 계시를 받고 사역을 시작한 시점부터 비로소 존재하게 되었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얼핏 보면 사도 바울의 특별한 권위와 그가 받은 계시의 독특함을 높여 주는 듯하지만,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성경 전체의 통일성을 파괴하고,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뿌리를 흔들어 버리는 위험한 독소가 가득하다. <br/><br/>극단적 세대주의가 탄생하게 된 가장 근본적인 토대는 성경의 핵심 용어에 대한 치명적인 오역과 자의적 해석에 있다. 이들은 『과연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진대』라는 에베소서 3:2 말씀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을 “하나님의 은혜의 시대”로 해석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시대가 바울에게 주어졌다.”라고 주장한다. 즉 “사도 바울과 함께 은혜의 시대(교회 시대)가 개막되었다.”라고 곡해한 것이다. 이는 마치 기업에 새로운 전문 경영인이 부임하여 혁신적인 경영 방침을 발표한 날을 두고, 그날이 기업의 창립일이라고 우기는 것과 같은 논리적 비약이다.<br/><br/>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을 『그분이 계시로 내게 신비를 알게 하신 것』(엡 3:3)이라면서 『다른 시대들에서는 사람들의 아들들에게 알려지지 아니』한(엡 3:5)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있는 나의 지식』(엡 3:4)이라고 말한다. 즉 『이방인들이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이 되며 그의 약속에 동참자가 된다』(엡 3:6)는 “교회 시대”와 관련한 지식이 사도 바울에게 계시된 것은 맞지만, 그것이 곧 교회의 탄생 시점과 일치해야 한다는 주장은 성경 어디에도 근거가 없다. 사도 바울은 이미 존재하던 “교회”라는 유기체에 관한 “경륜”(경영 방침)을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받았을 뿐이다. <br/><br/>극단적 세대주의자들은 교회가 사도 바울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한목소리로 주장하지만, “사도행전의 어느 구절부터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시작인가?”라는 구체적인 질문 앞에서는 사분오열되어 서로를 비판한다. <br/>가장 과격하고 파괴적인 벌링거(E.W. Bullinger)와 그의 추종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시작”을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유대인들에게 최종적인 거부 선언을 하고 이방인에게로 향한 시점인 “사도행전 28장 이후”로 잡는다. 이들은 사도행전의 전체 기간을 유대인을 위한 “왕국 시대”로 간주하며, 사도행전 28장 이후에 기록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옥중서신)만이 진짜 교회 시대를 위한 교리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사도행전 기간에 기록된 바울의 서신들(로마서, 고린도전서,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등)은 “교회 시대”를 위한 진리가 아니라는 뜻이 된다.<br/><br/>벌링거의 주장이 너무 비상식적이라는 것을 깨달은 스탬, 베이커, 오헤어 등은 교회의 시작점을 사도행전 중간 어디쯤으로 앞당기려고 시도했다. 오헤어는 사도행전 18장에서 “고린도 교회”에 관한 계시가 나오는 때를 교회의 시작점으로 주장하는데, 이는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성령침례로 한 몸인 교회가 형성된다는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고전 12:12,13). 그러나 이것은 지식적인 계시일 뿐 사도 바울의 고린도 사역과 관련된 사도행전 18장이 교회의 탄생 시점이라는 뜻이 아니다. 스탬이나 베이커는 교회가 “바울과 더불어 시작되었다”는 것을 그가 회심한 시점(행 9장) 또는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한 때(행 13장)로 잡는다. 이들의 견해도 문제인 것은, 사도행전 13장 이전인 10장에서 이방인 코넬료와 그 집의 사람들이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죄들의 사함을 받으리라.』(행 10:43)라는 신약 구원 교리와 일치하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구원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바울이 사도행전 9장에서 등장하기 이전인 8장에서는 이방인 에디오피아 내시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음으로써”(행 8:37) 구원받았다. 이들은 모두 “바울이 나타나기 전에” 신약적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롬 10:9,10)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형성했다. 바울이 개인적으로 계시를 받기 시작하거나 이방인을 대상으로 한 사역을 본격화한 때가 교회의 탄생 시점이라는 주장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<br/><br/>성경에는 바울 이전에도 “그리스도의 몸”이 존재했다는 거부할 수 없는 증거들이 있다. 교회는 바울이 등장하기 전부터 실존하고 있었으며, 영적인 생명력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1:13에서 자신의 과거 행적을 회상하며 『내가 유대교에 있었을 때...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하였으며 황폐시켰고』라면서 교회가 바울이 회심하기 전부터 있었음을 고백한다. 이뿐 아니라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바울(사울)에게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가두던 사울에게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행 9:4)라고 하신 일은, 당시에 박해받던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와 이미 유기적으로 결합된 “몸”으로서의 “교회”를 구성하는 지체들이었음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이다. <br/><br/>사도 바울은 로마서의 마지막 인사에서 안드로니코와 유니아를 가리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고 기록한다(롬 16:7). 성경에서 『그리스도 안에』는 죄인이 성령침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그 몸의 지체가 된 것(고전 12:12,13)을 가리키는 핵심적인 표현이다. 바울 본인이 자신보다 먼저 교회의 지체가 된 사람들이 있었다고 기록한 것은, 바울 자신이 교회의 시작점이 될 수 없음을 스스로 천명한 것과 같다. <br/><br/>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도행전 1:5에서 앞으로 제자들이 받게 될 “성령침례”를 예언하셨다. 제자들은 예언에 따라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에 “한 성령에 의하여 한 몸(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침례를 받았고”(고전 12:13), 이로써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극단적 세대주의자들은 이 점을 부인하는데,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보라. 그들의 주장대로 사도행전 28장 이전까지 “그리스도의 몸”이 없었다면, 사도 바울은 회심하고 나서 사도행전 28장까지 “그리스도의 몸” 안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사도행전 9장”파에 대해서는 어떤가? 당시 다마스커스로 가던 사울의 회심 이후에 제자들이 성령침례로 그리스도의 몸 안에 들어갔다면, 그보다 이전인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침례를 받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같은 제자들은 그동안 어느 몸에 속해 있었던 것인가? 이와 같은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극단적 세대주의자들은 성령침례가 마치 둘 이상 존재하는 것처럼 가르친다. 즉 사도행전 9장 이전에 성령침례를 받은 “유대인들”로 구성된 한 몸과 사도행전 9장에서 바울과 함께 시작된 “이방인들”로 구성된 한 몸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br/><br/>극단적 세대주의자들의 문제점은 “경륜”과 “교회의 시작”에 관한 것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극단적 세대주의자들의 또 다른 심각한 문제는 “물침례”를 신약 교회에서 완전히 제거해 버린다는 점이다. 이들은 에베소서 4:5의 『한 침례』를 근거로, 현재 우리에게는 오직 “성령침례”만 있을 뿐 “물침례”는 유대적 의식이므로 행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문자적 해석을 가장한 직무유기인데, 주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고(마 28:19)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극단적 세대주의자들은 이 명령에 관해서도 궤변을 늘어놓기를, 그것은 “유대인 사도들”에게 주어진 것이며, 미래 세대인 대환란 때 적용되는 진리이므로, “물침례”는 교회 시대의 이방인 성도들이 실행할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후 그들에게 “물침례”를 주었다는(고전 1:14-16) 점도 모르는 것인가? 만일 “물침례”가 이방인 교회와 상관없는 것이었다면, 바울이 왜 이방인들에게 침례를 베풀었겠는가?<br/><br/>마태복음 28장의 “지상 명령”을 교회 시대와 상관없는 “대환란 때의 유대적 왕국 복음과 관련된 명령”이라고 해석하게 되면, 교회 시대에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와 같은 명령들을 모두 거부해야 한다는 논리가 선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마태복음이 왕국 복음의 성격을 띠고 있을지라도 그 안에 담긴 “지상 명령”은 교회 시대의 복음 전파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극단적 세대주의자들이 “골방의 신학자”일 뿐 “거리설교자”와 “복음 전파자”가 되지 못한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들은 성경을 “난도질해서” 복음 전파의 동력을 가루로 만들어 흩어 버린 것이다.<br/><br/>극단적 세대주의는 성경을 과도하게, 그것도 잘못 나눔으로써 혼란을 야기하고 믿음을 파괴해 버린 극악한 이단 교리이다. 극단적 세대주의자들은 “성경을 나누라”는 명령에만 집착했지, 성경을 “어떻게 올바로 나누어” 해석하고 적용하는지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무지한 자들이다. 그들은 성경에 기록된 건전한 진리의 지식들을 내던져 버리고, 매우 혼란스럽고 불명확한 지식들만을 양산했다. 이처럼 세대적 진리를 망쳐 버린 자들에게 속지 않으려면, 성경을 건전한 영으로 올바로 나눔으로써 세대주의를 정확히 공부해야만 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4 Mar 2026 17:59:48 +0900</dc:date>
</item>


<item>
<title>성경을 “난도질하는” 극단적 세대주의 (1)</title>
<link>https://www.biblemaster.co.kr/bb15/%EC%84%B1%EA%B2%BD%EC%9D%84-%EB%82%9C%EB%8F%84%EC%A7%88%ED%95%98%EB%8A%94-%EA%B7%B9%EB%8B%A8%EC%A0%81-%EC%84%B8%EB%8C%80%EC%A3%BC%EC%9D%98-1/</link>
<description><![CDATA[『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성경을 올바르게 나누어 공부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다. 그러나 이 지극히 성경적인 원리를 극단으로 밀어붙여 성경 체계 자체를 무너뜨리는 자들이 바로 “극단적 세대주의자들”(Hyper-Dispensationalists)이다. 이들은 C.I. 스코필드가 “세대”(Dispen- sation)를 단순한 “기간”이나 “시대”로 정의한 것을 오용하여, 성경을 제멋대로 “난도질하는” 우를 범했다. 가장 심각한 오류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시작을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이 아닌, 사도 바울의 특정 사역 시점으로 못 박으려 한다는 점이다. 초기 인물인 에델버트 벌링거(E.W. Bullinger)는 교회의 시작을 사도행전 28장으로 잡음으로써, 28장 이전에 기록된 바울 서신들의 교리적 권위를 상실시켰다. 이러한 모순을 덮고자 존 오헤어(John C. O’Hair)와 찰스 베이커(Charles F. Baker)와 코넬리우스 스템(Cornelius R. Stam)은 사도행전 9장이나 13장을 교회의 기점으로 주장하며 그들끼리 일관성 없는 논쟁을 벌였다. 극단적 세대주의는 겉으로 성경의 문자적 해석과 무오성을 외치지만, 성경이 명백히 증거하는 “바울 이전의 교회”를 부정하며 그리스도인들에게 심각한 교리적 혼란을 야기하는 이단적 체계이다. 우리는 그들의 교묘한 왜곡이 어떻게 성경의 진리를 가리는지 직시해야 한다.<br/><br/>우리말로 “세대”라고 번역되는 영어 “dispensation”은 라틴어 “dispen- satio”에서 나온 것으로, “나누어주는 행위, 행정, 관리” 등을 뜻한다. 고전적으로는 약사가 약을 조제할 때 어떤 성분의 약을 잘 “분배”하는 행위의 뜻으로 사용되었으며, “economy,” 곧 “경제”라고도 해석될 수 있다. “dispensation”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오이코노미아(oikonomia)”이며, “오이코스”(oikos, 집)와 “네모”(nemo, 음식을 분배하거나 법을 시행하다)의 합성어이다. 즉 “집이나 집안일의 관리, 특히 타인의 재산을 관리, 감독, 경영함, 감독자나 청지기의 직분” 등을 뜻하는 것이다. <br/><br/>그런데 극단적 세대주의자 벌링거는 「“dispensation”을 뜻하는 헬라어 단어 “오이코노미아”는 관리(경영) 활동을 언급한다. 그리고 환유법에 의해서, 관리(경영) 활동은 그 관리(경영)가 수행되는 기간으로 그 의미가 전이된다... “dispensa- tion”이라는 용어가 관리, 경영, 감독 활동만이 아니라 그 활동이 수행되는 “기간”이나 “시대” 등에 반드시 적용되어야 한다.」1)라고 주장했다. 즉 환유법 원칙에 따라 “dispensation”의 원관념은 관리(경영) 활동이 일어나는 “시대”나 “기간”이고, 보조관념이 “관리(경영) 활동”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극단적 세대주의에서는 “dis- pensation”의 사전적 정의인 “관리, 감독, 경영 활동”이 주개념이 되지 못하고, 그 활동이 수행되는 “기간”이나 “시대”가 주개념이다. “경영”이라는 본질을 “시대,” “기간”이라는 환경으로 대체시켜 버린 것은 “dispensation”의 뜻을 심각하게 왜곡시킨 것이다. “경륜”(dispensation)은 하나님께서 시대별로 사람들을 다루시는 그분의 “경영 방침”일 뿐, 그 자체가 “시대”나 “기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br/><br/>1)(E.W. Bullinger, How to Enjoy the Bible (Grand Rapids: KregelPublica- tions, 1990), p.86)<br/><br/>성경에는 분명한 “구분들”(divisions)이 존재하고, 그 안에서 “시대들”이 나뉜다. 그런데 시대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대상들”도 있다. 그 대상은 “유대인”과 “이방인”과 “하나님의 교회”이다(고전 10:32).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신 말씀들을 기록한 책이다. 벌링거는 하나님께서 이 세 부류를 구분하여 다루시는 것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그들을 각각 다른 경영 방침과 별개의 시대나 세대 속에서 다루신다고 주장했다.2)<br/><br/>2) (E.W. Bullinger, 위의 책, p.88)<br/><br/>성경을 나누는 기준을 항상 “시대”로 잡다 보니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 말씀들만의 시대와 세대에 속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것은 자신과 다른 시대에 속한 말씀들은 자신에게 적용할 수 없다는 뜻이 되는데, 성경에는 서로 다른 시대에 해당하는 말씀들이 교차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아담의 언약에서 남자와 여자, 땅에 대한 저주의 말씀은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창 3:16-19). 노아의 언약에서 제정된 “피째 먹는 일의 금지”와 “사형 제도”(창 9:4-6)는 율법 시대와 교회 시대의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레 17:11,14, 행 15:28,29). 율법 시대 이전과 율법 시대 이방인들은 모두 “양심”에 의해 심판받는다(롬 2:14,15). 성경을 단순히 시대별로 나누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br/><br/>“경륜”(dispensation)이란 용어는 &lt;킹제임스성경&gt;에 “네 번” 사용된다 : 1)『복음의 경륜』(고전 9:17). 2) 『때가 찬 경륜』(엡 1:10). 3)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엡 3:2). 4) 『하나님의 경륜』(골 1:25). “경륜”으로 번역된 “오이코노미아”는 신약성경에서 총 “일곱 번” 사용되며, 이로써 “경륜”이 아닌 다른 용례로 “세 번” 더 쓰임을 알 수 있다. 즉 누가복음 16장의 “청지기의 비유”에서 “청지기직”으로 세 번 번역된다. 『주인이 그를 불러 말하기를... 네가 청지기를 더 이상 못하리니 네 청지기직[stewardship]을 청산하라.’고 하더라. 그러자 그 청지기가 속으로 말하기를... 청지기직[stewardship]을 박탈하니 내가 무엇을 할까?... 이렇게 하면 내가 청지기직[stewardship]에서 해고된 후에도 사람들은 나를 자기들의 집으로 맞아 주리라』(눅 16:2-4). 누가복음에서 “청지기직”으로 번역된 “오이코노미아”는 신약성경의 다른 곳들에서 “분배하는 행위, 청지기가 각 사람에게 그가 받은 지시대로 물품을 분배하다.”라는 뜻의 “경륜”(dispensation)으로 번역된다. “분배를 통한 경영”과 관련된 이 유사성은 그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오이코노미아”는 어떤 은혜나 임무를 분배하는 “행위”의 의미를 나타낼 때는 “경륜”으로 번역되고, 그런 행위를 하도록 부여된 “직임”일 때는 “청지기직”으로 번역되는 것이다.<br/><br/>성경의 주제는 “왕국”이며, 하나님의 이 왕국 통치 계획에 따라서 “경륜”이 나뉜다. 성경에는 “언약”에 따른 “경륜”이 총 일곱 가지가 등장하는데, 1) 무죄 시대의 경륜(에덴 시대의 경륜; “에덴의 언약,” 창 1:28-30; 2:15-17) 2) 양심 시대의 경륜(“아담의 언약,” 창 3:14-19). 3) 인간 정부 시대의 경륜(“노아의 언약,” 창 9:9-13) 4) 약속 시대의 경륜(족장 시대의 경륜; “아브라함의 언약,” 창 12:1-3; 13:14-17; 15:18-21) 5) 율법 시대의 경륜(“모세의 언약,” 출 19:5,6) 6) 교회 시대의 경륜[“새 언약” (New Testament), 마 26:26-28] 7) 왕국 시대의 경륜[메시아 시대의 경륜; “새 언약”(New Cove- nant), 렘 31:31-34, 히 8:8-12)이 그것이다. 이 일곱 경륜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왕국을 수립하시는 과정에서 세우신 각 시대에 맞는 “경영 방침”을 보여 준다. 여기에 클라렌스 라킨이 내린 “세대주의”에 관한 정의, 곧 “시대에 따른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잘 드러난다. <br/><br/>성경을 시대별로 나눈 벌링거는 성경을 “일곱 시대”로 구분한다.3)<br/><br/>3)(E.W.Bullinger, 위의 책, pp.89-98)<br/><br/>1) 에덴 시대(무죄 시대) : 창세기 1-3장까지로 아담의 타락 이전까지의 시대 <br/>2) 가부장제 시대(인류를 전체로서 다룬 시대) : 창세기 4장부터 출애굽기 19장까지 율법이 없던 기간 <br/>3) 이스라엘 시대 : 출애굽기 20장부터 사도행전 28장까지 율법 아래 있는 시대 <br/>4) 교회 시대(은혜 시대) : 에베소서 3:2을 근거로 하나님의 은혜가 바울과 더불어 시작되었기 때문에 특별히 “은혜의 시대”라고 강력히 주장함<br/>5) 심판 시대(대환란) : 다시 이스라엘이 중심이 되는 기간이며, 이스라엘이 율법이 아닌 심판으로 다스림을 받는 시대 <br/>6) 천년 시대 : 이전에 율법이 있기 전처럼 하나님께서 인류를 다시 전체적으로 다루시되, 세상을 율법, 은혜, 심판이 아닌, 의와 권세와 영광으로 다루시는 기간 <br/>7) 영원 시대 :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이전 하늘과 땅이 사라지고 난 이후에 시작되는 끝없는 기간 <br/><br/>벌링거의 일곱 시대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교회 시대”이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에 따라 모든 것이 “교회 시대”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듯 순환하고 있다고 주장했으며,4) 다른 극단적 세대주의자들도 동일한 입장을 취한다. 그들은 “교회 시대”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시대이기에 “교회 시대”만을 “은혜의 시대”라고 강조하여, 이 시대에만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에베소서 3:2의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에서 “경륜”을 특정 “시대”나 “기간”으로 해석한 데서 기인한 오류이다. 즉 『내게[바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을 “바울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은혜의 시대”로 해석하다 보니, “바울에게 계시된 교회의 시대”만이 “하나님의 은혜가 베풀어지는 시대”이며, 다른 시대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억지 주장을 펼친 것이다.<br/><br/>4) (E.W. Bullinger, 위의 책, p.90)<br/><br/>극단적 세대주의자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교회 시대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시대인 것은 맞지만(엡 2:8,9),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시대에 걸쳐 작용한다는 점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는 “바울”과 더불어 시작된 것이 아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받았지만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것이라.』(요 1:17)라는 말씀만 보아도 바울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의 시작점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가져오시기 전부터 인간에게 베풀어졌다. “하나님의 은혜”는 구원이 “행위”와 결부된 시대들에도 주어졌다. “생명 나무를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 곧 『값없는 선물[free gift]』(롬 5:15)인 것처럼 『마음대로[freely]』(창 2:16) 먹음으로써 영원히 살 수 있었던 아담,” “주의 눈에서 은혜를 찾았던 노아”(창 6:8), “광야 생활 동안 할례를 받지 않았음에도 ‘죽지’(창 17:14, 출 4:24-26) 않고 카나안 땅에 무사히 들어온 출애굽 2세대의 남자들”(수 5:2-5), “여리코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소요된 ‘칠 일’ 사이에 포함된 안식일을 어겼음에도 ‘죽지’(민 15:32-36) 않은 이스라엘인들”(수 6:3,4), “나실인에게 금지된 것들을 범했는데도(민 6장, 판 14-16장) 주님께 쓰임받고 믿음의 영웅으로 등재된 삼손”(히 11:32), “생명의 속전이 허용되지 않는 ‘간음’과 ‘살인’을 범하고도 용서받은 다윗”(레 20:10, 민 35:31, 시 51편) 등 성경은 구원이 “행위”와 결부된 시대들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음을 보여 준다. 율법 이전 시대와 율법 시대는 물론, 율법이 다시 효력을 발휘하는 대환란 시대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여전히 베풀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 “전무후무한 대환란”(마 24:21)의 재앙을 통과할 사람이 누구인가? “하나님의 은혜”는 교회 시대에만 제한적으로 베풀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어느 시대의 어떤 사람도 결코 존재할 수 없다. BB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4 Feb 2026 09:10:56 +0900</dc:date>
</item>


<item>
<title>“결혼”을 통해 천국을 건설하려는 통일교</title>
<link>https://www.biblemaster.co.kr/bb15/%EA%B2%B0%ED%98%BC%EC%9D%84-%ED%86%B5%ED%95%B4-%EC%B2%9C%EA%B5%AD%EC%9D%84-%EA%B1%B4%EC%84%A4%ED%95%98%EB%A0%A4%EB%8A%94-%ED%86%B5%EC%9D%BC%EA%B5%90/</link>
<description><![CDATA[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대한민국 사람”은 누구일까? 오늘날을 살아가는 한국인들은 이 질문에 대해 저마다 다른 기업인, 정치인, 연예인, 운동선수 등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에는 한 사람의 이름만 독보적이었다. 바로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하 통일교)를 창시한 “문선명”이다. 당시에 해외에서 한국인임을 밝히면 외국인들은 “미스터 문”을 아느냐, “미스터 문”의 교회에 다니느냐고 묻곤 했다. 세계인들, 특히 서구인들의 눈에는, 일면식도 없고 심지어 언어도 다른 수천 쌍의 남녀가 교주의 중매로 합동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이 그만큼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br/><br/>통일교는 요 근래 이른바 “통일교 게이트”라는 정교유착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또다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이와 관련하여지난해 9월 JTBC는 「한학자 “나는 독생녀”… 특검 조사서 ‘통일교 교리’ 설파」라는 제하의 기사를 보도했다. 문선명의 아내이자 현 통일교 총재인 한학자가 정치자금법 위반, 청탁금지법 위반, 업무상 횡령, 증거인멸 교사 등의 혐의로 특검의 조사를 받는 자리에서 대부분의 혐의를 부인하며 상당한 시간을 통일교 교리를 설명하는 데 썼다는 것이었다.<br/><br/>통일교 공식 홈페이지에 올라온 글은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참어머님께서는 조사 중에도 특검 검사들에게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의 섭리를 설명하시었습니다. 특검이 질문하는 자리가 참부모님의 가르침이 전해지는 자리로 바뀌는 것을 보며, 우리는 참어머님의 담대하심과 하늘부모님에 대한 절대적인 효정을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상식 있는 사람이라면 다소 기괴하게 들리는 “독생녀,” “참어머님,” “하늘부모님,” “참부모님” 등의 어휘 선정으로부터 통일교가 “이단”의 범주에도 들어오지 않는 “사이비 종교”임을 알아채는 데 어려움이 없을 터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그들이 믿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려면 그들의 역사와 교리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br/><br/>통일교를 창시한 “문선명”은 본래 장로교인이었다. 그는 10대였던 1935년 부활절 아침에 산에서 기도하던 중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데, 그 내용인즉 유대인들에게 거부되심으로써 못다 이루신 “천국의 건설”을 그에게 맡기시겠다는 것이었다. 그 사명을 위해 떠돌던 문선명은 1945년 서울에서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줄 “은사,” “이스라엘수도원”의 김백문을 만났다. 김백문은 그동안 이 땅에 존재했던 이단 교리들을 집대성하여 &lt;기독교근본원리&gt;를 출판해 낸 인물인데, 문선명은 당시 원고를 집필 중이던 그로부터 많은 교리들을 흡수했다.<br/><br/>김백문은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에서 나는 열매를 먹은 범죄는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며, 이브가 뱀과 육체적으로 결합함으로써 그 혈통에 죄가 들어온 것을 말한다고 가르쳤다. 문선명은 이를 그대로 도용하여 자신의 교리서인 &lt;원리강론&gt;에 이렇게 썼다. “해와[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하는 것은 그가 사탄(천사)을 중심한 사랑에 의하여 서로 혈연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아담마저 [이브와 결합함으로써] 타락하였기 때문에, 사탄의 혈통을 계승한 인류가 오늘날까지 번식하여 내려온 것이다.” 문선명은 여기에다 스스로에게 맡겨진 메시아적 사명을 결합함으로써, 자신이 인류의 타락한 혈통을 본래와 같이 순결한 상태로 돌이키기 위해(“혈통 복귀”) 온 “재림주”요, 인류는 아담의 핏줄이 아닌 자신을 “참부모”로 둔 혈통 안으로 들어올 때에야 비로소 구원받는다는 자신만의 신학을 완성했다.<br/><br/>성경에 비추어 봤을 때 이브와 뱀 사이에 육체적 결합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고후 11:2,3, 요일 3:12). 그리고 우리 육체에 흐르는 피가 죄의 결과물이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창조되었을 당시, 본래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였던 인간의 생명이 유한하게 되었음을 보여 주는 게 바로 “피”이기 때문이다(레 17:11). 그러나 그렇다고 현 인류가 사탄의 “혈통”이라는 것은 상식에서조차 벗어난 주장이다. 가령 이혼한 여인과 결합하여 자녀를 낳으면 그 아이가 전 남편의 “혈통”이 된다는 말이지 않은가?<br/><br/>세상으로 죄가 들어오게 된 원인으로 성적 결합을 지목한 것도 진리에서는 한참 빗나간 것이다. 성경은 그 원인이 아담의 “불순종” 때문이었다고 말씀하신다(롬 5:19).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오직 그 열매만을 금지하셨고 이브를 금지하신 적이 없기에, 죄는 “먹어서” 들어온 것이지 “결합해서” 들어온 게 아님은 분명하다. 게다가 백 번 양보해서 성적 결합이 문제였다손 치더라도, 문선명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 역시 죄인인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더러운 피”를 가진 죄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죄 문제는 “죄 없는 출생”을 하셨고, “깨끗한 피”를 가지신 분만이 해결하실 수 있다. 우리의 혼을 지옥의 형벌에서 구하시고, 우리의 몸을 자신의 부활하신 몸과 같이 변모시키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인간 아버지가 아닌 성령으로 잉태되어(마 1:18,20) 출생하셨으며, “하나님의 피”(행20:28)를 십자가에서 흘려 주신 주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다!<br/><br/>“거룩한 혈통”을 만들어 나가겠다는 포부를 품은 문선명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었다. 바로 “참어머니”가 될 여인이었다. 그런 여인을 찾기 위해 우여곡절을 겪던 그는, 41세가 되던 1960년에 17세인 한학자와 “어린양 혼인식”을 치름으로써 드디어 “참가정”을 이룰 수 있었다. 통일교는 이 “성스러운 결혼식”을 인류가 한 가족으로 함께 사는 평화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 치러진 것으로 본다. 실제로 통일교 신자들은 “참부모”의 축복 속에 “축복결혼”에 참여함으로써, 자신들이“천국의 건설”에 이바지한다고 여긴다. 모든 인류가 국경, 종교, 인종, 과거사 등으로 인한 갈등 없이 평화롭게 사는 세계를 만들려면, 모두가 혈연으로 이어지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그래서 그들은 인종이나 국적이 다른, 특히 갈등 관계에 있는 국가의 남녀들로 가정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 <br/><br/>문선명과 한학자의 결혼식, 그리고 통일교인들의 합동결혼식은 『어린양의 혼인식』(계 19:7)과 관계가 없다. 이 혼인식은 “평화”가 아닌 “전쟁”이 따르기 때문이다(계 19:11-21).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가족으로 만듦으로써가 아니라,그분께 불순종하는 모든 죄인들을 쓸어버림으로써 지상에 평화를 가져오실 것이라고 성경은 예언한다(살후 1:6-10).<br/>문선명이 사망한 뒤, 그의 아내와 아들들 사이에 후계자 자리를 놓고서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 여기에서 승리한 아내 한학자는 권력 기반을 확고히 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독생녀”라고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메시아적 권위는 오직 문선명에게만 있다는 기존의 교리를 깨는, 한학자 자신이 여성 메시아이자 여성격 하나님의 현현이라는 주장이었다. 특검의 조사 과정에서 튀어나온 “독생녀”라는 단어 뒤에는 이와 같은 나름의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다.<br/><br/>그러나 한학자의 주장은 “독생”(only begotten)이라는 말에 대한 무지의 소치이다. 개신교에서 “이단 감별사”를 자처한 자들도 무지하긴 매한가지기에 여기에 대해 입도 뻥끗하지 못한다. 그들은 “독생”이란 말을 “유일한”(only)정도의 뜻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독생자』(요 3:18)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독자”가 아니셨다. 하나님께는 수많은 “아들들”이 있기 때문이다(창 6:2, 욥 38:7). 주님께서 “독생자”이신 까닭은, 수많은 “아들들”가운데서도 유일하게 창조하지 않고 “낳으신”(begotten) 아들이셨기 때문이다(히 1:5). 그러니까 “독생자”란 본래 말씀 하나님으로서 태초부터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태를 통해 지상에 오시면서 받으신 칭호라는 얘기이다. 인간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고, 본래 인간으로 태어난 한학자는 “독생”과 아무런 관련도 없다!<br/><br/>문선명은 &lt;원리강론&gt;을 통해 “성서를 바르게 읽음으로써 진리(眞理)를 깨달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일견 문제없어 보이나 “바르게 읽는다는 것”이 문제의 표현이다. “성서의 예언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현대인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이 문제의 진정한 내용을 해명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문선명에게 있어 성경을 바르게 읽는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지 않고 그 이면의 의미를 탐구한다는 뜻이었던 것이다.<br/><br/>사실 그와 같은 관점은 문선명 고유의 것이 아니다. 에스겔은 자신이 문자적인 불을 말하는데도 사람들이 “그는 비유를 말하지 아니하는가?”라고 한다며 하나님 앞에서 통탄해 한 바 있다(겔 20:45-49).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판테누스, 클레멘트, 오리겐, 그리고 같은 노선을 따른 어거스틴과 토마스 아퀴나스 등도 그런 점에 있어서는 “통일교교주”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성경이 그렇다고 말씀하시는데도, “아니라고 다른 뜻이 있을 거라며 부득부득 우기다가” 그들모두 지옥의 불길 속으로 자비 없이 던져졌다.<br/><br/>“남들은 모르는 심오한 것들을 찾아냈노라”고 말하려는 교만하기 그지없는 욕망을 품고, 하나님께서 쉽게 기록하신 거룩한 말씀을 비틀어 보려는 자들은 모두 동일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현명하다고 여기는 자들을 정죄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거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단순함』(고후 11:3)을 지켜야 한다. 성도에게는 “새로운 것”(행 17:21)을 알기보다 이미 알았던 사실을 “기억하는 것”(벧후 1:12-15)이 더 필요하다는 점을 명심하도록 하라.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7 Jan 2026 17:42:52 +0900</dc:date>
</item>


<item>
<title>가짜 목사가 지어 낸 “권세”에 취한 “다락방”</title>
<link>https://www.biblemaster.co.kr/bb15/%EA%B0%80%EC%A7%9C-%EB%AA%A9%EC%82%AC%EA%B0%80-%EC%A7%80%EC%96%B4-%EB%82%B8-%EA%B6%8C%EC%84%B8%EC%97%90-%EC%B7%A8%ED%95%9C-%EB%8B%A4%EB%9D%BD%EB%B0%A9/</link>
<description><![CDATA[“다락방 전도 운동”(약칭 “다락방”)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능력 있게 복음을 전파하였듯이, 이 시대에도 전도를 위한 능력 있는 제자를 양성한다”는 취지로 부산에서 류광수 목사에 의해 시작된 “이단” 전도 운동이다. 이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세계복음화전도협회”1) 는 전문적인 “전도인 양성”을 위해서 “렘넌트신학연구원”을 운영하고 있으며, 다락방 제도를 도입한 교회들은 “다락방 전도 운동”의 지부처럼 활동한다. 이 교회들은 다락방의 “제자 훈련” 프로그램을 통해 전도인을 양성하고, 학교와 직장 등지에서 전도 활동과 제자 훈련을 전개한다. <br/><br/>“다락방 전도 운동”의 모든 프로그램은 “제자 훈련”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다락방의 “제자 훈련”은 순전히 “전도인 양성”만을 위한 프로그램이다. 다락방 전도인을 통해 구원받은 사람은 “제자 훈련”을 받도록 권유받는다. 물론 이때 전해진 “구원의 복음”은 잘못된 복음이다. “제자 훈련”에 동의하면 그 사람은 구원의 확신 등 구원과 관련된 교리들을 배운다. 이것 또한 “극단적 칼빈주의”에 의한 잘못된 구원의 확신과 교리들이다. 그리고 그 후에는 바른 성경으로 믿고 가르치며 양육하는 교회에 가서 교육을 받고, 자신이 받은 은사에 따라 소속된 교회의 사역에 동참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제자 훈련”이라는 명목하에 전도하는 요령을 가르치고 실행하게 함으로써 한 사람의 “전도인”으로 양성시킨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세계복음화”를 “다락방”에 위임하셨고, “다락방”의 전도 운동에 동참하는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 특권을 허락하셨다고 가르침으로써, 결국 다락방에 매여 있도록 만든다. 말하자면 다락방은 교회에 소속된 건전한 그리스도인을 양성하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다락방이라 불리는 전도 운동에 종속된 “종교인”을 양성하는 프로그램인 것이다.<br/><br/>다락방의 가장 큰 문제점은 “구원의 복음”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락방에서 전하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 즉 하나님을 만나는 길 되신 분(선지자), 죄 문제를 해결하신 분(제사장), 사탄의 머리를 부수신 분(왕)이라는 사실”이고, 이것을 깨닫는 것이 “구원”이다. <br/><br/>다락방의 설명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문제들은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지음으로써 시작되었는데, 그때부터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죄에 빠져 사탄에게 “잡혀” 있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깨달으면 구원을 받게 되고 “죄”의 원인인 “사탄”을 굴복시키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다락방의 구원론이다. 단순히 죄 문제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모든 문제, 즉 생활 문제, 가정 문제, 자녀 문제, 직장 문제, 정신 문제 등이 모두 해결된다고 한다. 구원받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식의 논리는 은사주의와 매우 유사하다. 은사주의자들처럼 류광수 목사도 기도만 하면 모든 축복을 향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br/><br/>다락방은 복음뿐만 아니라, 복음 전파 사역의 근거 구절도 교리적으로 바르지 않다. 먼저 다락방은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왕국 위임 명령을 그리스도인들이 수행해야 할 복음 전파 명령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복음 전파를 통해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차야 주님께서 오시기 때문에 그 수를 채우기 위해 전파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br/><br/>다락방의 복음 전파 논리에는 “극단적 칼빈주의” 교리가 혼합되어 있다. 다락방의 전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들과 구원받지 못할 자들을 이미 예정해 놓았다고 배운다. 그렇다면 다락방의 전도인들은 왜 복음을 전하는가?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라도 구원을 받으려면 복음을 믿어야 하는데, 이 과정에 전도인들이 개입하여 정해진 구원이 완성되도록 돕는다는 것이다. 다락방의 전도는 결국 지옥에 갈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지옥의 형벌로부터 구원받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기로 정해진 사람들의 믿는 과정에 개입하여 돕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br/><br/>(다락방의 복음 전파 논리에는 극단적 칼빈주의가 혼합되어 있다. 다락방 전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들과 구원받지 못할자들을 이미 예정해 놓았다고 배우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전도인들이 그들만의 복음을 전하는 까닭은, 이미 구원받기로예정된 자라 해도 구원을 받으려면 복음을 믿어야 하는데, 그 과정에 전도인들이 개입하여 구원받기로 정해진 사람들이 믿는일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br/><br/>다락방은 “영적 전쟁”에 관해서도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있다. 창세기 3:15의 『내가 너와 여자 사이에, 또 네 씨와 그녀의 씨 사이에 적의를 두리니, 그녀의 씨는 너의 머리를 부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부술 것이라.』`에서 “여자의 씨가 뱀의 머리를 부수는 사건”은 “재림” 때 있을 일인데도, 그들은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사탄의 머리를 부순 것을 의미한다고 잘못 해석한다. 다락방은 이런 구절을 근거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의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여, 그 사람을 장악하고 있는 마귀를 쫓아내 주면, 그 마귀에 의해 발생했던 그 사람의 모든 문제들이 해결된다.”라는 식의 거짓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br/><br/>다락방은 그들의 전도인이 “기도”를 통해 누릴 수 있는 3가지 특권을 강조한다. 이것은 류광수 목사만의 독특한 주장이며, 성경적 근거가 없는데도 성경의 일부 구절들을 과대 추론하여 마치 성경적 교리인 양 강조해 왔다.<br/><br/>첫째, “축복 향유권”이다. 류광수 목사는 성경의 진리들을 깨달으면 기도하게 되고, 기도하면 어마어마한 “영권”이 생긴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정치, 사업 등 모든 것을 능가하는 굉장한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만 하면 받을 수 있는 이 축복을 놓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능력에 따라 복음을 위하여 고난의 동참자가 되라.』`(딤후 1:8)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위하여 고난의 동참자가 된 사람들이지 정치나 사업에서 복을 향유하기 위해 기도하여 영권을 받는 사람들이 아니다.<br/><br/>둘째, “천사 동원권”이다. 류광수 목사는 주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이 가서 “기도”하는 곳마다 주님의 천사를 보내시고 불말과 불병거를 동원시키신 것처럼, 주님께서 보내신 다락방 전도인들이 가서 기도하는 곳마다 천사를 보내신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는 내가 지금이라도 나의 아버지께 간구하여 나에게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즉시 보내 달라고 할 수 없는 줄로 생각하느냐?』`(마 26:53)라고 말씀하신 적은 있지만, 기도하면 천사를 보내 주신다고 하신 말씀은 성경에 없다. 또한 복음 전파를 통해 사람의 혼을 구원하는 것은 천사의 역사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능력을 받으리니 그러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게 증인이 되리라』`(행 1:8).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영광의 풍요함을 따라 그분의 성령을 통하여 속 사람 안에서 능력으로 우리를 강건케 하시어(엡 3:16)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는 것이다. <br/><br/>셋째, “사탄 결박권”이다. 류광수 목사는 복음을 전파할 때 마귀들의 방해를 막기 위해 기도를 통해 마귀들을 쫓아내거나 결박하는 권한이 전도인들에게 주어졌다고 주장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사탄을 이기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사탄을 이길 수 있는 근거이기 때문에 그분의 이름으로 나아가면 “기도”를 통해 사탄과 마귀들을 결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류 목사의 “기도로 사탄을 결박한다”는 표현은 요한계시록 20:1,2의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의 손에는 끝없이 깊은 구렁의 열쇠와 큰 사슬을 가졌더라. 그가 그 용을 잡으니, 곧 마귀요 사탄인 옛 뱀이라. 그를 천 년 동안 묶어 두니』`라는 말씀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언뜻 성경적인 표현인 듯한 인상을 주지만, 사탄을 결박하는 것은 재림 때에 있을 일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사탄을 결박하라고 명령하지 않으며, 다만 “마귀를 대적하라”고 말씀할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복종하라.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로부터 도망하리라』`(약 4:7). <br/><br/>사람이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으면 지옥의 영원한 형벌로부터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것이 성경적인 복음이요, 올바른 구원론이다. 그리고 이것을 알리는 것이 올바른 복음 전파이다. 『네가 네 입으로 주 예수를 시인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 자기 죄에 대한 정확한 자백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에서 빗나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리스도 되심을 깨달으면 사탄을 굴복시키고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다락방의 주장은 “바른 복음”이 아니라 “다른 복음”이다. 다락방의 복음은 “복음”이라는 가면을 쓴, 사도 바울이 저주한 “다른 복음”(갈 1:8,9)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BB <br/><br/>각주 1) “다락방 전도 운동”을 주도하는 “세계복음화전도협회”와 명칭상 혼동의 여지가 있는 “다락방전도협회”가 있는데,이 둘은서로 다른 기관이다. “다락방전도협회”는 1960년에 설립된 기독교 선교 봉사 단체로, 당시 이화여자대학교총장이던김활란이 중심이 되어 설립하였다. 초기 명칭은 “금란전도협회”였으나 1966년에 “다락방전도협회”로 명칭을바꾸었다.2001년에 와서 이화여자대학교의 부속 기관이 되었으며, 2008년부터 이화여자대학교 교목실에 편입되었다.]]></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5 Nov 2025 01:41:13 +0900</dc:date>
</item>


<item>
<title>구령의 열정을 없애 버린 칼빈주의</title>
<link>https://www.biblemaster.co.kr/bb15/%EA%B5%AC%EB%A0%B9%EC%9D%98-%EC%97%B4%EC%A0%95%EC%9D%84-%EC%97%86%EC%95%A0-%EB%B2%84%EB%A6%B0-%EC%B9%BC%EB%B9%88%EC%A3%BC%EC%9D%98/</link>
<description><![CDATA[칼빈주의의 예정론에 의문을 품고, 인간의 자유의지와 조건적 예정을 강조하며 네덜란드 라이덴 대학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던 야곱 알미니우스(1560-1609)가 죽자, 1610년에 그의 제자들이 칼빈의 가르침에 반대하는 “항론서”를 네덜란드 국회에 제출했다. 그들은 칼빈주의를 가장 잘 표현한 고백이라고 칭송받는 &lt;벨기에 신앙고백&gt;과 칼빈주의와 루터주의를 적절히 조화시켜 만든 &lt;하이델베르크 신앙문답서&gt;를 수정해 줄 것을 요구했는데, 이에 네덜란드 국회는 돌트에서 약 7개월간(1618-1619) 154회의 종교회의를 열었다. 종교회의 참석자들은 항론파가 제시한 5대 주장, 곧 부분적 타락, 조건적 예정, 일반 속죄, 성령의 역사에 대한 저항 가능성, 구원 상실 가능성을 성경에 비추어 논의했다. 회의 결과, 항론파의 주장은 비성경적인 이단이라는 결론에 이르렀고 칼빈주의가 성경에 입각한 참된 교리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로써 오늘날 칼빈주의 5대 강령의 전신인 &lt;돌트 신경&gt;이 확립되어 공표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칼빈주의 교리는 어거스틴이 숨겨 놓고 칼빈이 전체를 부풀게 한 누룩에 불과하며, 지금까지 한국 교회를 가장 치명적으로 망친 이단 교리이다. 한국 교회는 이러한 칼빈주의 5대 강령(TULIP)을 올바로 분별하여 반드시 떼어내 버려야 한다. <br/><br/>1.<br/>전적 타락(Total Depravity)<br/><br/>칼빈주의 5대 강령의 첫 번째 항목은 “전적 타락”인데, 이에 관해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인간은 타락하여 죄의 상태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수반하는 영적 선을 행하고자 하는 모든 의지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래서 자연인은 영적 선을 전적으로 싫어하고, 죄로 죽어 있기 때문에 그 자신의 힘으로는 자신을 회개시키거나, 또는 회개에 이르도록 준비할 수가 없다.”(&lt;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강해&gt;, 개혁주의신행협회, p.140). 칼빈주의에서 말하는 “전적 타락”의 교리는, 아담이 타락한 결과로 인해 허물과 죄들 가운데서 죽은 채로 태어나는(엡 2:1) 죄인은 스스로 회개할 수 없고 복음을 믿거나 그리스도께로 올 수 없다고 가르친다. 즉 죄인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그리스도를 위한 결단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인데,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만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br/><br/>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한 것은 사실이지만, 칼빈이 가르쳤던 것처럼 그 타락이 인간의 “의지”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다. 칼빈은 영의 죽음(엡 2:1)을 혼의 죽음으로 오해하여 인간을 의지가 무능력한 존재로 해석한 것이다. 우리는 그와 반대되는 경우를 구약 시대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 시대에 거듭난 사람이 아무도 없었음에도 구약 성도들은 자신의 “타락”을 초월하여 하나님을 사랑했고, 하나님의 뜻대로 그분의 계명들을 지켰다(출 35:5,22). 하지만 사탄은 칼빈주의의 “전적 타락”이라는 거짓 교리를 만들어 내어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유의지로 영접할 수 없다고 가르치게 했다. 이로써 순수한 복음 전파의 길이 막혔고, 지금껏 셀 수 없이 많은 죄인들이 지옥에 떨어졌다. 죄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을 때 구원받는다(롬 10:9). 마음으로 믿는 것은 자신의 의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를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즉 그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니라』(요 1:12). 죄인이 복음을 들을 때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그가 영원한 정죄에 이르는 죄인임을 깨닫게 해 주시고, 그런 죄인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혼의 속죄제물로 드려지신 사실을 알려 주심에 감사하면서, 자신의 의지를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는 전체 과정이 “마음”으로 믿는 것이다. 모든 죄인은 하나님의 구원으로의 초청(계 22:17)에 반응하여 자신의 자유의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할 수 있다. 인간이 총체적으로 타락하여 마음의 의지까지 타락해 무능력해졌다는 칼빈주의 교리는 성경을 배격하는 사탄의 교리이다. <br/><br/>2.<br/>무조건적인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br/><br/>칼빈은 그의 &lt;기독교강요&gt;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예정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라고 부르며 이 작정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어떻게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스스로 예정하셨다. 이는 모든 사람이 같은 상태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영생이 예정되며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영원한 저주가 예정되기 때문이다. 각 사람이 이 중의 어느 한 쪽 결말에 이르도록 창조되므로, 우리는 그를 생명 또는 사망에 예정되었다고 한다.”(&lt;기독교강요&gt; 제3권 21.5). “즉 유기된 자들(버림받은 자들)도 그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하기 위하여 파멸에 내맡겨진 것이라고 하였다”(제3권 22.11). 칼빈은 하나님께서 타락의 결과로 의지를 쓸 수 없는 죄인들 중 일부를 “조건 없이 택하여”(무조건적인 선택) 창세전에 구원으로 예정하셨으며, 버림받은 나머지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영원한 저주로 예정하셨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누군가가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고서는 그 사람을 택하신 적이 없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기초를 놓으시기 이전에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분 앞에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어』(엡 1:4).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뜻이며, 이 일은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성령께서 그 사람을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넣으심으로써 이뤄진다(고전 12:13, 벧전 1:2). 즉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받을” 수 없는 것이다.<br/><br/>또한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지 않으신 자는 예정하지 않으신다(엡 1:5, 롬 8:29). “선택”이 먼저고 “예정”이 그 다음인데, “예정” 역시 구원을 위한 예정이 아니라 “구원의 목적과 결과”에 대한 예정이다. “예정”은 신약성경에서 단 네 번 등장하는 단어로, 에베소서 1:5,11과 로마서 8:29,30에서 나온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자신의 자녀로 입양할 것을 예정하셨으니... 모든 것을 그 자신이 의도한 대로 행하시는 이의 목적을 따라 우리가 예정되어 그분 안에서 유업을 받았으니』(엡 1:5,11). 『그분께서는 미리 아신 자들을 자기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게 하시려고 또한 예정하셨으니 이는 그를 많은 형제 가운데서 첫태생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하여 예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시고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 이 중 그 어떤 경우에도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 에베소서 1:5의 예정은 자녀로 “입양”할 것에 대한 예정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을 자신의 자녀가 되는(입양) 운명으로 미리 정해 놓으셨다(요 1:12). 로마서 8:29에서는 에베소서 1:11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의 형상과 일치되도록 그리스도인들의 운명을 정해 놓으신다. 말하자면 두 구절 모두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br/><br/>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때 성령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은, 믿은 그 사람이 “입양되는 것”(엡 1:5)과 그가 “아들의 형상과 일치되는”(롬 8:29) 것이다. 이러한 “입양,” 즉 “양자 됨”을 성경은 “몸의 구속”이라고 부른다. 『그들뿐만 아니라 성령의 첫열매들을 가진 우리까지도 속으로 신음하며 양자 되는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느니라』(롬 8:23). 그리스도인들이 휴거될 때 경험하는 “몸의 변화”는 “아들의 형상과 일치되는 것”이며, 성경은 이것을 가리켜서 “입양”(“양자 됨”)이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몸의 변화”를 “예정”하셨다. 휴거 때의 몸의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모든 사람들에게 “예정”되어 있으며, 칼빈의 “무조건적 선택”과는 관계가 없다.<br/><br/>3.<br/>제한적 속죄(Limited Atonement)<br/><br/>“칼빈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범위에 관하여 그것은 제한적이라고 말하였다. 요한일서 2:1의 석의에서 ‘그리스도께서 충족적으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으나 효능적으로는 피택자만을 위하여 죽으셨다.’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효능을 적용하는 범위를 하나님이 결정하신 것을 말하므로 그의 은혜로우심과 함께 그의 주권의 절대적임을 강조한다.”(박형룡, &lt;저작 전집: 신학논문&gt;, 개혁주의신행협회, p.263).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자체도 하나님의 주권과 영원한 판결에 따라 오직 “선택받은 자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칼빈의 하나님은 자신이 타락하도록 만들고 전적으로 무능하게 한 “버림받은 자들”을 위해서는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칼빈은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어 놓으나』(요 10:11)라는 말씀을 “양들만을 위한 속죄”로 해석하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것같이』(엡 5:25)라는 말씀을 “교회만을 위한 속죄”로 해석하는데, 이처럼 칼빈주의는 특정 구절의 참 의미를 무시한 채 자신들의 교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 말씀을 오용하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인자도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몸값으로 주려고 온 것이라.』(마 20:28)에서 “많은”이 “모든”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속죄가 택함받은 “많은” 사람들에게만 제한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많은”이 “모든”을 의미한다는 것은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몸값으로 내어주셨으니』(딤전 2:6)라는 말씀이 증명한다. 이 말씀의 “모든 사람”은 문맥상 2절의 『왕들과 권세 있는 모든 사람』도 포함되는데, 이렇게 되면 모든 “왕들”과 “권세자들”이 구원받은 것은 아니므로, 그리스도께서는 “택함받은 사람들”을 위해서만 제한적으로 속죄하신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모든 사람”을 위해서 속죄하신 것이다. 베드로후서 2:1은 주님께서 거짓 교사들을 위해서도 속죄하셨음을 천명하고 있다. 이처럼 성경에서 말씀하는 속죄는 “무제한적인 속죄”이다. 『주의 약속은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어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벧후 3:9). <br/><br/>4.<br/>저항할 수 없는 은혜(Irresistible Grace)<br/><br/>“하나님께서는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하신 모든 사람들을, 그리고 그들만을 자신이 정하시고 적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때에, 효과적으로 부르시되... 또한 그들의 마음을 영적으로 그리고 구원에 관하여 깨우쳐서 하나님의 일들을 이해하게 하시며... 그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들이 선한 것을 결심하게 하시며 그리고 효과적으로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끄신다.”(G.I. 윌리엄슨 저, 나용화 역, &lt;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gt;, p.145). “저항할 수 없는(불가항력적) 은혜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구원하기로 택하실 때... 아무도 하나님을 대적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의사와는 반대로... 천국에 들어가게 하신다. 억지로 강요하여 인간의 뜻을 거슬러 역사하신다.”(&lt;칼빈주의 5대 교리&gt;, 개혁주의신행협회, p.149). 칼빈주의자들은 성령님께서 택함받은 자들의 동의 없이 “강제로 거듭나게 하여 새로운 출생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을 예로 들어 저항할 수 없는 은혜를 주장한다. 일례로, 칼빈주의자들은 『그들은 혈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또한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였고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라.』(요 1:13)에서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들』이 성령님께서 강제로 거듭나게 하신 사람들인 것처럼 해석하지만, 그 말씀에는 『그[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 즉 그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요 1:12)이라는 “조건”이 달려 있다. 또한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였으므로 내가 자애로 다가섰노라.』(렘 31:3)를 “저항할 수 없는 은혜”에 적용하는데, 이 말씀은 문맥상 『이스라엘 모든 족속』(렘 31:1), 『이스라엘』(렘 31:2), 『처녀 이스라엘』(렘 31:4)에 관한 말씀이다. 즉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애를 언급한 구절인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교리를 가져오지 않고, 자신들의 교리에 말씀을 꿰어 맞추는 아주 못된 습성이 있다. “저항할 수 없는 은혜”는 이단적 교리이며, 인간은 언제든지 구원으로의 초청(사 45:22; 55:6,7, 막 1:15, 요 7:37, 행 17:30)을 자신의 의지로 거부할 수 있다. 『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며 너에게 보낸 사람들을 돌로 치는 자야, 마치 암탉이 자기 병아리들을 날개 아래 함께 모으듯이 내가 얼마나 자주 네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 23:37) 『너희는 생명을 얻으려고 내게 오기를 원치 아니하는도다』(요 5:40). 『너희 목이 굳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 조상이 한 것과 같이 너희도 늘 성령을 거역하는도다』(행 7:51). <br/><br/>5.<br/>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br/><br/>이 교리는 모든 택함받은 사람들은 자신의 구원을 끝까지 견뎌 내야 한다는 말이다. &lt;돌트 신경&gt;이 처음 작성되었을 때 “구원의 영원한 보장”과 “성도의 견인”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오늘날은 이 다섯 번째 강령이 변하여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으로 바뀌었는데, 본래 “성도의 견인”이라는 것은 “끝까지 견뎌서 구원을 입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지금까지 잘 믿다가 실족하면 본래 구원받지 못한 것이고, 지금까지 잘 믿고 타락하지 않아야 택함받은 사람이라는 증거가 된다는 교리이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이 “영원한 구원”을 말할 때조차 그것은 “택함받은 사람들”에 대한 언급일 뿐이다. 끝까지 견뎌야 구원받은 사람의 증거가 된다는 “성도의 견인”은 성경적인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끝까지 견디기”(마 10:22) 때문에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죄를 제거해 주신(요 1:29) 그 성도를 그분의 몸 안으로 넣어 주셨기 때문에(고전 12:13) 영원히 보장되는(롬 8:38,39) 것이 신약 교회 시대의 구원이다. <br/><br/>누구라도 칼빈주의를 신봉하는 한 구원받을 수 없다. 지난 2천 년간의 신약교회사에 등장한 이 거대한 누룩은 사탄에 의해 교회들 안에 넣어져 구원의 확신을 없애 버렸고, 잃어버린 혼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자 하는 구령의 열정 또한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빼앗아 버렸다. 복음을 가림으로써 구원을 받지도 못하게 하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도 못하게 하는 칼빈주의야말로 한국 교회를 가장 치명적으로 망친 이단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Fri, 27 Jun 2025 10:02:57 +0900</dc:date>
</item>


<item>
<title>“은사를 가장 모르는” 은사주의의 미혹</title>
<link>https://www.biblemaster.co.kr/bb15/%EC%9D%80%EC%82%AC%EB%A5%BC-%EA%B0%80%EC%9E%A5-%EB%AA%A8%EB%A5%B4%EB%8A%94-%EC%9D%80%EC%82%AC%EC%A3%BC%EC%9D%98%EC%9D%98-%EB%AF%B8%ED%98%B9/</link>
<description><![CDATA[한국의 기독교계를 가장 크게 망가뜨린 사탄의 거짓 교리 두 가지는 칼빈주의와 은사주의다. 특히 그 중에서도 은사주의는 교인들의 헛된 욕망과 물질만능주의를 공략함으로써, 배교한 현대 교회들 속에 깊이 뿌리내렸다. 은사주의는 이제 “교회 성장”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수단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마귀의 강력한 미혹에 속아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br/><br/>사실 은사주의의 유래는 고대 바빌론 종교에 있다. 거기서 나온 “신비적 체험”에 대한 강조는 중세 암흑시대에 수도원으로 흘러들어 갔다. 11세기 초에 시작된 십자군 전쟁의 비극의 중심에 있었던 신비주의자들의 미혹과 선동도 은사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br/><br/>은사주의는 교회들이 종교 개혁 성경인 &lt;킹제임스성경&gt;(1611)을 버림으로써 배교의 시대가 닥친 후 본격화되었다. 은사주의 운동의 발원은 찰스 파함이 캔자스 주 토피카에 성서 대학을 설립했던 19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운동은 1906년 “아주사 거리 사역”을 통해 가속화되었고, 1900년대 후반에는 순복음 친교회가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960년대 초부터는 로마 교황청이 이 운동에 협조하기 시작함으로써, 은사주의 운동은 에큐메니즘과 뉴에이지 운동에서도 중심 역할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br/><br/>은사주의 운동에서 나타났던 “은사들”은 신약 교회의 사역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들뿐이었다. 이에 대해 논하려면 먼저 “은사”가 무엇인지부터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은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카리스마”(charisma)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재능”(gift)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때로 “선물”(gift)로도 번역된다. 『이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선물[gift]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말미암은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라』(롬 6:23).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보배로운 피로 사신 교회의 성도들에게 다양한 은사들을 선물로 나눠 주신 것인데, 이 일은 성도들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하신다. 성령님께서 행하시는 내적 역사가 성령의 열매를 통한 인격의 형성이라면, 성령님의 외적 역사는 은사들의 분배를 통한 섬김과 사역의 위임이다(고전 12:4-11).<br/><br/>하지만 은사주의자들이 자신들에게만 특별하게 주어졌다고 주장하는 “은사”들을 보면, 대개 병을 고친다거나 귀신(?)을 내쫓는다거나 방언을 한다는 것들에만 국한된다. 그들은 교회를 세우는 데 필요한 다른 성경적 은사들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관심하다. 이는 성경이 은사에 대해 주시는 권면에 역행하는 작태이다. 『알지 못하는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자신을 세우나 예언하는 사람은 교회를 세우느니라... 너희도 마찬가지라. 너희가 영적인 은사들을 열망한 이상 교회를 세우는 데 풍성하기를 구하라...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일만 마디의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말하기보다는 차라리 나의 지각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여 나의 말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기를 원하노라』(고전 14:4,12,19).<br/><br/>은사주의자들은 “신사도 운동,” “사도권 계승” 등을 운운하지만, 그들의 사역은 사도들의 그것과 닮은 데가 없다. 사도들의 사역 가운데 병을 고쳐 주거나 악령들을 내쫓는 것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사도들이 주로 했던 일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파하고 성경적 진리들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목회를 맡은 디모데에게 네 안에 있는 은사를 소홀히 여기지 말라고 이야기하면서 『네 자신과 교리에 주의하고 이 일들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써 네 자신과 네 말을 듣는 사람들을 구원하리라.』(딤전 4:16)라고는 했으되, 병을 고치고 축사(逐邪)하고 방언을 하라고 한 적은 없다.<br/><br/>은사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은사들은 사실 오늘날 유효하지 않은 것들이다. 성경을 구성하는 66권의 책들 가운데 은사에 대해 가장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고린도전서”인데, 이 서신에 열거된 은사들 가운데는 현재의 그리스도인들과 무관한 것들도 있다. 현대 교회들이 은사주의의 이단성을 분별하지 못하는 까닭은 바로 이러한 진리에 무지하기 때문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성경을 올바로 나눠서 공부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br/><br/>은사주의자들 중에는 “그 말씀은 현 시대에 적용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믿음으로 주장한다 해도 소용이 없어요.”라고 가르치는 성경 교사가 없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말씀은 신기할 만큼 잘 “나눈다.” 그들은 『병든 자들을 고쳐 주고, 문둥병자들을 깨끗게 하며, 죽은 자들을 살리고, 마귀들을 내어쫓으라.』(마 10:8)라는 말씀은 도용하면서도, 어째선지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너희가 값없이 받았으니 값없이 주라. 너희의 돈주머니에 금이나 은이나 놋을 가지고 다니지 말라. 여행을 위하여 자루나 두 벌의 겉옷이나 신들이나 지팡이들도 지니지 말라. 일꾼이 자기 음식을 받는 것은 합당하니라.』(마 10:8-10)라는 말씀은 못 본 체한다.<br/><br/>성경은 자신의 감정이나 유불리에 따라 나누어 보는 책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이 기록된 대상과 시기에 따라 나누어 적용해야 한다. 성경은 인류를 세 부류, 곧 “유대인”과 “이방인”과 “하나님의 교회”로 구분한다(고전 10:32). 따라서 어떤 말씀은 유대인들을, 어떤 말씀은 구원받지 못한 이방인들을, 어떤 말씀은 교회 시대에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한다. 예컨대 『네가 율법을 지킨다면 할례가 정녕 유익하지만 네가 율법을 위반하는 자가 되면 네 할례가 무할례로 되느니라.』(롬 2:25)라는 말씀은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라 불리는 “그리스도인들”이 거듭날 때 받은 『그리스도의 할례』는 그들의 혼이 성령님에 의해 『육신의 죄들의 몸을 벗어 버린 것』을 말하며(골 2:11), 이 할례는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무할례가 되는 법이 없다. 또한 “음행하는 자들과 사귀지 말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교회” 안에 적용되는 규칙이다. 그것은 이방인들이 지켜야 할 규칙이 아니다(고전 5:9-13).<br/><br/>“은사”에 대해 논하는 고린도전서는 A.D. 57년경이라는 아주 독특한 시간적 배경 속에 기록되었다. 그때는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이 유대인에서 이방인으로 이동하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유대인들을 향한 사역의 문이 완전히 닫힌 상태는 아니었다. 적어도 사도 바울이 자신의 설교를 거부하는 로마의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이방인들에게 보낸 것과 그들이 그것을 들을 것을 너희가 알라.”라고 선포했던 A.D. 63년경까지는 그랬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는 민족이므로(고전 1:22), 그맘때까지는 “방언”과 “신유” 같은 표적으로서의 은사가 유효했다. 그러나 그러한 은사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취를 감추고 만다. A.D. 68년경 기록된 디모데후서에는 바울이 트로피모를 고쳐 주지 못해 밀레토에 남겨 뒀다는 내용이 나온다.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자에게 대기만 해도 질병이 떠나던(행 19:11,12) 시절은 이제 다 가고, 본격적으로 “보지 않고 믿는 자들”(요 20:29)의 시대, 곧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하는”(고후 5:7) 시대로의 전환이 일어난 것이었다.<br/><br/>따라서 고린도전서(A.D. 57-59)를 통해 계시되는 은사들 가운데는, 과도기적 상황까지만 허용되었던 것들도 있었다. “방언”이 그 대표 격이며,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위해 주어진 표적”으로서의 은사였다(고전 1:22; 14:22). 이 점을 받아들이지 못하겠거든 사도행전에서 “방언”이란 말을 모조리 찾아보라. 사도행전에서 “방언”은 총 세 번, 곧 2장과 10장과 19장에서 나온다. “사도행전 2장”에서 방언이 주어진 까닭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아버지께로부터 성령의 약속을 받으셨다는 사실을(행 2:32,33) 당시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머물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증거하기 위함이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이방인인 코넬료가 성령을 받은 후 방언을 했던 이유도 유사하다. 하나님께서 코넬료에게 눈에 보이는 “선물”을 주셨던 까닭은 이방인이 성령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 자리에 있던 “유대인들”에게 깨우쳐 주시기 위함이었다. “사도행전 19장”에서 바울이 에베소에서 요한의 침례만 알고 있던 유대인 제자들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성령께서는 바울의 복음이 요한의 침례만 알고 있던 아폴로의 복음을 폐한다는 사실을 유대인 제자들에게 증거하기 위해 방언으로 말하게 하셨다.<br/><br/>은사주의자들이 자랑하는 병 고치고 귀신을 쫓는다는 “신유”와 “축사”의 은사도 이 시대에는 유효하지 않은 표적이다(진정한 축사는 귀신이 아니라 마귀를 내쫓는 것을 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복음교회나 성락교회(베뢰아아카데미) 등에서는 이러한 은사들을 사역의 중심에 둔다. 그래도 “교회”라는 간판을 걸려면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면 그 즉시 성령님께서 그 사람 안으로 들어가 영원히 내주하신다는 복음적 진리를 그 중심에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사랑하시는 이 안에서 우리가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보혈을 통하여 구속, 곧 죄들의 용서함을 받았느니라...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 구원의 복음을 듣고서 그분을 신뢰하였으니 또 너희가 그분을 믿고서 약속의 그 성령으로 인침을 받은 것이니라』(엡 1:7,13). 그들은 이와 같은 진리 대신 “순복음”과 “베뢰아 복음”을 전한다. 구원받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은 별개의 일이며, 성령을 받은 증거가 방언이나 축사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의 영께서 자신 안에 계신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하는 사람은 버림받은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고후 13:5),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방언이나 축사를 못하면 성령을 받지 못한 것이므로, 그런 사람은 여전히 버림받은 상태에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들이 가르치는 것은 사실상 행위 구원이자 저주받을 “다른 복음”(갈 1:6-8)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br/><br/>은사주의자들이 바른 복음과는 멀찍이 떨어져 “신유”와 “축사” 같은 은사들에 목을 매는 이유는 성경과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생의 여정 가운데 찾아오는 고난과 역경과 질병 등은 대개 죄에 대한 징계요, 하나님을 찾고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일 수 있다. 그러나 은사주의자들은 모든 상황이 “회복”되고 “긍정적”으로 바뀌는 데만 집착하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믿음”이 부족한 탓으로만 여긴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신의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했지만 치유받지 못하고 의사인 누가를 대동해야 했던 사도 바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고후 12:1-10). 사도 바울도 “믿음”이 부족했던 것인가? 백 번 양보해서 그렇다손 치더라도, 바울이 소유한 믿음으로도 해내지 못한 일을, 전도지 한 장 똑바로 만들 줄 모르는 자들의 믿음으로 어떻게 해낼 수 있겠는가?<br/><br/>수년 전, 제도권 교회에 출석하던 필자의 친구의 아내가 암 진단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녀의 암은 초기였기에, 현대 의학으로도 충분히 치료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의사의 도움을 거부했다. 자신에게 기도를 받으면 낫는다는 은사주의 목사의 말을 굳게 신뢰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제발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라고 수차례 권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독자들이 짐작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 결과는 비참할 수밖에 없었다.<br/><br/>거짓말의 아비인 마귀는 에덴에서 최초의 인류를 속여 이 세상의 지배권을 찬탈한 뒤로, 지금까지 “이 세상의 신”(고후 4:4)으로 군림하면서 온 세상을 미혹하고 있다(계 12:9). 마귀는 이브를 미혹했을 때도, 거짓 선지자들을 통해 주님의 백성을 속였을 때도 “새로운 거짓말”을 지어내지 않았다. 그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하여 거기에 조금씩 더하고 빼서 자신의 목적을 이뤘다. 은사주의자 같은 이단들도 동일한 방법을 사용한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운운한다고 해서 “저들도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겠거니” 하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br/><br/>은사주의자들이 뭐라고 떠들건 간에, 당신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죄인인 당신을 위해 보혈을 흘려 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받는 것이다(롬 10:9,10). 이미 그렇게 하여 지옥의 형벌에서 벗어났다면, 이제는 바른 말씀과 건전한 교리를 가르치는 성경대로 믿는 지역 교회를 찾아가서 그곳에서 침례를 받고, 주님을 바르게 섬겨야 한다. 은사주의의 이단 교리가 판을 치는 교회에 몸을 담고 있다면, 어서 그곳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 울부짖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니는 마귀에게 삼켜지기 전에(벧전 5:8) 속히 그 억센 입에서 자신을 빼내야 하는 것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Fri, 27 Jun 2025 10:01:55 +0900</dc:date>
</item>


<item>
<title>교인들을 지옥으로 보내는 저주받은 신천지</title>
<link>https://www.biblemaster.co.kr/bb15/%EA%B5%90%EC%9D%B8%EB%93%A4%EC%9D%84-%EC%A7%80%EC%98%A5%EC%9C%BC%EB%A1%9C-%EB%B3%B4%EB%82%B4%EB%8A%94-%EC%A0%80%EC%A3%BC%EB%B0%9B%EC%9D%80-%EC%8B%A0%EC%B2%9C%EC%A7%80/</link>
<description><![CDATA[일제 강점기와 6ㆍ25 전쟁의 참화에서 비롯된 극심한 빈곤 속에서 우리나라 개신교 교회들 안에는 변개된 성경의 선지서와 요한계시록에 관한 잘못된 해석과 샤머니즘이 결합한 신비주의가 만연했다. 그 신비주의에 빠져든 사람들 중 한 사람이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의 총회장 이만희이다. 이만희는 1931년 음력 7월 13일에 경상북도 청도군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할아버지와 기도하다가 하늘에서 “큰 별”이 3일간 계속 보였고, 하늘로부터 온 천인(영인)을 만나 하나님께 충성을 맹세하고 혈서를 썼다고 한다. 이것이 그의 구원(?) 간증인 것으로 보아, 이만희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으로 거듭나지 않은 죄인에 불과하다.<br/><br/>이만희는 1957년에 박태선이 운영하던 천부교 신앙촌에서 신앙생활을 잠시 하다가 1969년 장막성전 유재열의 집회에 참석한 후, 장막성전에서 몇 년 동안 신앙생활을 했다. 그리고 1970년 초에 백만봉이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자 이에 동조하여 장막성전을 이탈했다. 백만봉이 세운 재창조교회의 12사도 중 하나로 있던 이만희는 “1980년 3월 13일에 천국이 이루어진다.”라는 백만봉의 주장과 달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백만봉의 교회에서도 이탈했다. 그러다가 1980년 말 오평호 목사에게서 장막성전을 인수하고 잠적한 유재열을 비난하다가 명예 훼손죄로 구속됐는데, 출소 후 그는 그동안 배운 잘못된 성경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1984년 3월 14일에 홍종효와 함께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을 창립하고 전국적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마귀의 교리들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이만희와 홍종효는 자신들을 “두 증인”으로 칭하면서 신천지를 이끌다가, 1987년 3월 홍종효가 이만희와의 사소한 다툼으로 결별했다. 그 후 이만희는 1990년에 신천지 교육원(현 시온 기독교 선교센터)을 개원했고, 1995년 3월 14일 수원 공설 운동장에서 신천지 12지파 보좌 계열 조직을 구성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br/><br/>이만희에게 “이 시대의 구원자,” “약속의 목자,” “인간 보혜사,” “이긴 자,” “재림 주,” “구주,” “사명자,” “예언의 사자,” “알파와 오메가,” “일곱 인을 떼는 자,” “새 요한”과 같은 온갖 호칭을 붙여 가며 그를 신격화하는 신천지는 이만희가 저술했다는 &lt;천국 비밀 요한계시록의 실상&gt;을 성경보다도 신뢰한다. 본 글에서는 성경 지식의 부족과 사사로운 해석으로 생긴 신천지의 잘못된 교리들을 몇 가지 비평하고자 한다.<br/><br/>1.<br/>신천지의 “사탄의 추수꾼들”<br/><br/>신천지는 거짓 교리들로 세뇌된 “추수꾼들”을 씨가 뿌려진 기성 교회에 보내 추수의 말씀을 “낫”으로 삼아 “알곡”을 추수하여 “곳간”인 신천지로 모으는데, 그러면 신천지가 곧 영계의 천국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신천지 교도들은 정신없이 교회들에 침투하고 사람들을 유혹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꾀어서 “무료 성경 공부”로 세뇌해 신천지의 종으로 만든다. <br/><br/>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가르치는 신천지는, 시편 78:2의 『한 비유로 난해한 옛 말들을 말하리니』라는 말씀과 마태복음 13:34의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셨으며, 비유를 들지 않고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시더라.』라는 말씀을 근거로 성경 대부분을 비유로 해석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시 완악한 유대인들이 깨닫지 못하도록 비유를 사용하셨을 뿐이지(마 13:13-15), 제자들만 있을 때는 비유로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모든 것을 풀어서 설명해 주셨다(막 4:34, 요 16:29,30). 주님께서 항상 모든 비유를 그 세부 사항까지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음에도(마 13:36-53), 신천지는 잘못된 비유 해석으로 거짓 교리를 전파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어리석은 자들의 입에 있는 비유담은 동일하지 않으며, 술취한 자의 손에 든 가시나무 같다고 말씀하시고 있다(잠 26:7,9).<br/><br/>2.<br/>자신을 “영적 새 이스라엘”이라고 주장하는 신천지 <br/><br/>신천지는 유대인이 “육적 이스라엘”이고, 교회들은 “영적 이스라엘”이며, 신천지가 “영적 새 이스라엘”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왕이 이방 신을 섬기며 말씀을 지키지 않자 침례인 요한 때 이후로 육적 이스라엘과 관계를 끝내셨다고 가르친다. “영적 이스라엘”은 교단 교회들인데, 예수님께서 2,000년 동안 천국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씨 뿌리는 것)하셨다가, 추수 때인 지금은 “영적 이스라엘”(교회)도 부패하여 끝내셨다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영적 새 이스라엘,” 곧 “신천지”를 지금 대한민국에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br/><br/>위와 같은 신천지가 모르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끊지 않으셨으며 그들을 반드시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느니라...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롬 11:1,2,26). 이 일은 이스라엘이 『야곱의 고난의 때』(렘 30:7)라 불리는 『대환란』(마 24:21)의 징계를 겪고 난 뒤에 있게 되는데, 대환란 때 이스라엘은 완전히 멸망하지 않고(암 9:8) 그 남은 자들이 회복될 것이다(사 10:22; 11:11, 암 9:14,15, 렘 23:3; 30:10,11). 바로 이 진리를 모르기에 신천지 자신에 관해서도 엉뚱한 소리를 한 것이다. <br/><br/>3.<br/>교회 시대에 “왕국 복음”이 전파된다(?)<br/><br/>신천지는 2,000년(현 교회 시대) 동안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왕국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셨다고 주장하며, 그것을 “씨를 뿌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성경은 『이 왕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런 후에야 끝이 오리라.』(마 24:14)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은 대환란 때 전파될 왕국 복음에 관한 것으로, 왕국 복음은 초림 당시 전파되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또 왕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가운데 모든 질병과 모든 허약함을 고쳐 주시더라』(마 4:23). 초림 때 왕국 복음을 전파하신 왕국의 왕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심으로 주님의 왕국은 미래의 재림 때로 연기되었고, 그 왕국을 다시 가져오시기 위해 대환란 때 왕국 복음이 다시 전파되게 하실 것이다. 이것이 위의 마태복음 24:14의 예언의 의미이다. <br/>따라서 왕국 복음은 교회 시대에 전파되는 것이 아니다. 마태복음 24:14의 『끝』은 대환란 기간의 끝을 말하며, 왕국 복음은 그 기간의 끝까지 전파된다. 신천지는 초림과 대환란 기간과 관련된 왕국 복음을 교회 시대에 적용하는 우를 범했다. 교회 시대에 은혜의 복음이 아닌 왕국 복음을 전파하면 저주를 받는다(갈 1:8).<br/><br/>4.<br/>신천지에게 약속되었다는 “새 언약”(new covenant)<br/><br/>신천지는 “새 언약”이 신약성경의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새 하늘과 새 땅”(신천지)에 대한 약속이며, 그렇기에 구약의 언약과 달리 완전하고 영원한 언약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 새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다고 하면서 “죄를 씻는 어린양의 피를 통해 이루어진 영원한 구원”을 의미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면서 새 언약의 근거를 예레미야 31:31과 히브리서 8:8,10의 “새 언약,” 곧 “new covenant”에서 찾고, 또한 그것을 마태복음 26:28과 누가복음 22:20의 “새 언약,” 곧 “new testament”와 연계시킨다. 그들은 “new covenant”와 “new testament”를 동일한 언약으로 여긴 것인데, “new covenant”는 주 하나님께서 미래의 천년왕국에서 유대인들과 맺으실 새 언약이고, “new testament”는 신약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그리스도인들과 맺은 새 언약이다. 신천지는 서로 다른 “새 언약들”을 혼동하여 적용함으로써 성경의 “언약들”에 대한 그들의 무지를 철저하게 드러내었다.<br/><br/>5.<br/>신천지의 가짜 “12지파”와 “144,000명”<br/><br/>신천지는 주님께서 마태복음 19:28에서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라고 말씀하신 대로(cf. 눅 22:28-30) 재림 때 열두 사도가 열두 지파의 장이 되어 다스리는 나라가 “영적 새 이스라엘”(신천지)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들은 “이긴 자”요 “약속의 목자”인 “보혜사” 이만희를 찾아가 그의 말을 듣고 인침을 받으면 “144,000명”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데, 요한계시록에서 144,000명이 인침을 받는 때는 현 교회 시대가 아니라 교회가 휴거된 후 있게 될 대환란 기간이다. 이 대환란 때에 인장으로 표시받을 사람들은 이만희의 한국 사람들이 아닌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서 나올, 『여자들과 더불어 더럽혀지지 아니한 자들』(계 14:4), 곧 “남자 동정들”이다. 『또 내가 인장으로 표시를 받은 자들의 숫자를 들었는데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지파에서 십사만 사천 명이 인장으로 표시를 받았더라』(계 7:4). 교회 시대가 아닌 대환란 때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지파”에 속한 『십사만 사천 명』의 “유대인 남자 동정들”이라면, 현 교회 시대에 신천지에 소속된 “한국”의 “남녀” 사이비 종교인들은 결코 144,000명에 포함될 수 없다.<br/><br/>6.<br/>“신천지”(新天地) - 엉터리 “새 하늘과 새 땅”<br/><br/>이만희는 요한계시록 21장에 기록된 “새 하늘과 새 땅”이 곧 “신천지”이며, 이것은 거룩한 새 예루살렘과 함께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한다고 가르친다. 그가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은 “현재의 세상을 개벽하여 신천지를 이루는 것”이며, 기존의 질서가 끝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계의 천국”인 거룩한 새 예루살렘이 임하면 사망과 슬픔과 애통함이 없는 천국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되고, 이로써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성취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br/><br/>“새 하늘과 새 땅”과 관련된 이만희의 교리는 “144,000명”에 대한 것만큼이나 오류투성이다.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새 하늘과 새 땅”은 현재의 세상을 개벽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우주를 불태운 뒤 새로운 영원 세계가 창조되는 것”을 뜻한다. 『또 내가 큰 백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보니, 그의 면전에서 땅과 하늘이 사라졌고 그들의 설 자리도 보이지 않더라...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있지 아니하더라. 나 요한은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는데 마치 신부가 자기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같이 예비되었더라』(계 20:11; 21:1,2). 이처럼 “신천지”와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새 예루살렘은 교회 시대에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원히 거주할 곳이지(갈 4:26, 계 21:2), 영이 거듭나지도 않은 신천지 교도들이 거주할 곳이 아니다.<br/><br/>『그때 내가 말씀드리기를 “아, 주 하나님이여! 그들이 나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는 비유를 말하지 아니하는가?’ 하나이다.” 하였더라』(겔 20:29). 선지자 에스겔을 통해 전파된 하나님의 말씀을 당대의 죄인들은 “비유”로 여기다가 멸망하고 말았다. 신천지 교도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비유적으로 또는 영적으로 잘못 해석한 이만희의 엉터리 성경 교리를 받아들임으로써 구원도 받지 못한 채 마귀에게 완전히 관장되어 있다.<br/><br/>신천지는 바른 하나님의 말씀인 &lt;한글킹제임스성경&gt;을 믿고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변개된 개역성경이나 개역개정판을 사용하고, 유대인에게 적용되는 말씀을 모두 신천지 교도들에게 잘못 적용함으로써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성경적 진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신천지 교도들이 지금처럼 신천지에 계속 머물러 있다면, 그들은 새 예루살렘이 아닌 “지옥”에 가게 된다. 하루속히 이만희에게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부활하신 사실을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안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이렇게 믿고서 구원받은 뒤에 &lt;한글킹제임스성경&gt;을 읽으며 하나님과 교제하고, 또 성경대로 믿고 실행하는 지역 교회에 출석하여 하나님께 올바른 경배로 나아간다면 결코 후회하지 않을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Fri, 27 Jun 2025 09:59:43 +0900</dc:date>
</item>


<item>
<title>“안식”을 영원히 누리지 못하는 안식교</title>
<link>https://www.biblemaster.co.kr/bb15/%EC%95%88%EC%8B%9D%EC%9D%84-%EC%98%81%EC%9B%90%ED%9E%88-%EB%88%84%EB%A6%AC%EC%A7%80-%EB%AA%BB%ED%95%98%EB%8A%94-%EC%95%88%EC%8B%9D%EA%B5%90/</link>
<description><![CDATA[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이하 안식교)는 1800년대 초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했던 윌리엄 밀러의 교리를 계승 및 발전시켜 1863년에 설립한 교파다. 이 교파는 자칭 “선지자”요 공동 설립자이기도 했던 엘렌 G. 화이트라는 여인에 의해 널리 확산되어 현재 전 세계 216개국에 퍼져 있고, 1,850만 명의 교인과 148,000개의 교회 수를 자랑하는 수준으로 교세가 확장되었다.<br/><br/>안식교는 그 공식 명칭에 “안식일”과 “재림”을 넣은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안식일과 재림에 관해 특이한 교리를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적 잣대로 재어 보면, 그들의 교리는 허점투성이일 뿐 아니라, 어떤 죄인도 구원받지 못하게 만드는 오류가 드러난다.<br/><br/>안식교인들은 안식일을 정확히 지키는가?<br/><br/>안식교인들은 “선지자 화이트”의 가르침에 따라 한 주의 첫날인 일요일이 아니라 “안식일,” 즉 한 주의 일곱째 날인 토요일에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다. 그러한 실행의 근거는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은 안식일을 지킬지니, 그들 대대에 걸쳐 안식일을 지켜서 영속하는 언약을 삼을 것이며 그것이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히 표적이 되리라. 이는 엿새 동안에 주께서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일곱째 날에는 쉬시어 숨을 돌리셨음이라.’ 하라.” 하시니라.』(출 31:16,17)라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과연 토요일은 안식일인가?”라는 질문을 던져 보지 않을 수 없다.<br/><br/>안식일은 팔레스타인의 시간을 기준으로, 그것도 0시가 아닌 일몰 시점을 하루의 시작으로 보는 성경의 날짜 계산법에 따라 지켜져야 하는 날이었다. 만일 일몰 시간이 저녁 6시라면, 미국의 경우에 “안식일”은 미국 동부 시간을 기준으로 금요일 오전 11시부터 토요일 오전 11시까지가 된다. 그들이 “미국의 토요일”에 교회에 도착해서 자리에 앉을 때쯤이면 이미 그날은 이스라엘 땅의 유대인에게는 “일요일”이 된다. 따라서 엘렌 G. 화이트처럼 미국에 사는 안식교인들은 사실 “유대인들의 토요일 안식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다. <br/><br/>게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은 한 주의 일곱째 날에만 오는 날도 아니었다. 성경에는 절기마다 요일에 관계없이 지켜지는 “특별한 안식일”이 나온다. 가령 “무교절 기간의 첫째 날”이 그랬다(레 23:7, 요 19:31). 그러나 안식교인들은 안식일을 그렇게나 중요시하면서도 이런 안식일은 전혀 지키지 않는다.<br/><br/>율법에 따르면 안식일에는 어떤 종류의 일이라도 삼가야 했다. 심지어는 처소에서 취사를 비롯한 “불을 피우는” 행위조차 금지될 정도였다(출 16:23; 35:2,3), 이동할 수 있는 거리도 도보로 가깝게 여길 만한 반경 안으로 제한되었다(행 1:12). 이런 지침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극형을 내려야 했다(민 15:35,36). 그러나 안식교인들은 “안식일”에 자동차에 시동을 걸고(이때 엔진 룸에서 불꽃이 튄다!) 먼 거리를 운전해서 교회로 온 사람들을 돌로 쳐서 죽이지 않는다.<br/><br/>위와 같은 지적을 받으면 안식교인들은 “주님께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제정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느냐.”(막 2:27)라고 항변하곤 하지만, 궁색하기 그지없다. 주님과 제자들이 “안식일을 위반”했던 것은, 누군가가 치유받는 상황이나, 생명 유지를 위해 꼭 필요했던 상황에서만 일어났던 일이 아닌가?<br/>이런 점을 보면 안식교인들의 안식일 준수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겠다는 열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님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것은 남들이 지키지 않는 날을 임의로 정해서 지킴으로 자기만족감을 느끼려는 욕구로부터 나온 종교적 실행에 불과한 것이다.<br/><br/>이 시대에도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가?<br/><br/>안식교인들은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성경적 구원관을 제시하는가 싶다가도,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분을 최우선으로 둔다는 것입니다.”라고 덧붙임으로써 그들이 행위 구원론자들임을 무심결에 자백하고 만다. 그들은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두는 것”을 자연스럽게 “십계명”의 첫 네 계명,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연결시키는데, 네 번째 계명인 “안식일 준수”도 이러한 맥락에서 강조된다.<br/><br/>안식교인들은 처음에는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을 포함해서 십계명을 모두 지켜야만 구원받는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엘렌 G. 화이트는 일곱째 날의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의 첫날을 지키는 것은 짐승의 표라고까지 이야기했다. 후일 안식교의 교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지만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을 잃는다는 것으로 변화했고, 그러다가 “나의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요 15:10-14)을 들먹이며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안식일을 지킨다고 교묘하게 말을 바꿨다. 이단들이 으레 그렇듯이, 그들도 여기서는 이 말을 저기서는 저 말을 한다.<br/><br/>일례로, 안식교인들은 구약 시대처럼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리는 일과 같은 “의식법”을 지키지 않는다. 갈보리 십자가에서 의식법이 모두 폐기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골 2:14). 그래서 엘렌 G. 화이트는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은 의식법이 아니라 도덕법이라고 우긴다. 그래야 그들의 안식일 교리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십계명 중 도덕법을 열거하는 로마서 13:9은 『너는 간음하지 말지니라, 너는 살인하지 말지니라, 너는 도둑질하지 말지니라, 너는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너는 탐내지 말지니라.』라고는 말하지만, 안식일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킨다. 성경적으로 보나 상식적으로 보나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은 “의식법”인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성경은 이미 폐해진 안식일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그러므로 음식으로나 마시는 것으로나 거룩한 날이나 새 달이나 안식일들에 관해서는 아무도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골 2:16).<br/><br/>이처럼 안식일 준수는 교회 시대 성도들의 구원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왜냐하면 안식일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표적이었기 때문이다(겔 20:12, 20). “표적”이란 기본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이지만, 이 교회 시대는 “보지 않고 믿는” 시대이지 않은가?(요 20:29, 고후 5:7) 그런데 교회 시대만 안식일과 구원이 서로 관련 없는 것이 아니다. 아담 이후로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기까지 약 2,500년의 기간 동안에도 그랬다. 그 기간 동안에 안식일은 그 존재조차 계시된 적이 없다! 요컨대, 지금까지의 전체 인류 역사를 놓고 보면, 안식일을 지켜야 구원받는다는 것은 오히려 “예외적인” 기간에만 한정되며, 그렇지 않았던 기간이 훨씬 길었다.<br/><br/>안식일 준수는 교회 시대의 성도들에게 권장 사항 정도조차 되지 못한다. 개신교인들 가운데도 주일을 “안식일”로 여기면서 지키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는데, 그런 인식은 비성경적이다. 그들은 구약의 안식일이 신약에서는 주일로 바뀌었고, 구약의 할례가 신약의 침례로 바뀌었다고 말하지만, 그런 주장은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다. 유대인이 아니면서 유대인 흉내를 내려는 “자칭 유대인들”의 행위를 주님께서는 “모독”이라고 말씀하셨다(계 2:9).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원받은 사람들인데(갈 3:13), 왜 그 저주를 형태만 바꿔서 다시 취하려고 하는 것인가?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이 토요일에 교회에 모여 경배를 드렸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다. 신약 성도들은 토요일이 아니라 “안식 후 첫날인 주의 첫날”에 모여 설교를 들으며 예배를 드렸고(행 20:7), 헌금을 드렸다(고전 16:2). 왜냐하면 이 날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이다(마 28:1, 막 16:1,2, 눅 23:56; 24:1, 요 20:1).<br/><br/>이런 말을 들으면 안식교인들은 “그렇지만 사도 바울이 안식일에 회당에 가곤 하지 않았는가?”라고 따지고 싶을지도 모른다(행 13:14; 17:1,2; 18:4). 그러나 회당은 교회가 아니다! 그곳은 신약 성도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라, 구약성경을 믿는 유대인들이 모이던 장소였다. 바울이 그곳을 찾았던 것은 스스로 유대인같이 됨으로써 더 많은 유대인들을 주님께로 이겨오기 위함이었지(고전 9:20), 교회 시대의 성도로서 예배를 드리고자 간 것이 아니었다.<br/><br/>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신의 방법대로 그분을 섬기고자 하는 시도를 싫어하신다. 안식일 문제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만일 네가 안식일로부터, 내 거룩한 날에 네 즐거움 행하는 데서 네 발을 돌이키고... 네 자신의 방법대로 행하지도 아니하고 네 자신의 즐거움을 찾지도 아니하며 네 자신의 말로 말하지 아니하면 그때에 네가 주 안에서 즐거워할 것이요』(사 58:13,14). 안식일을 지켜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혹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여긴다면, 원하는 대로 되기는커녕, 역효과만 날 뿐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카인에게 주어졌던 이 말씀이 제격이다. 『네가 바르게 행하면 받아들여지지 않겠느냐?』(창 4:7)<br/><br/>안식교인들은 성경적 재림을 믿는가?<br/><br/>안식교인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이 왔다고 믿는데, 이는 엘렌 G. 화이트가 “1844년”에 하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가르친 데서 기인한다. 1844년은 원래 윌리엄 밀러가 지목한 재림의 시점이었다. 그때 재림은 일어나지 않았고, 화이트를 포함한 밀러의 추종자들은 모두 실의에 빠졌었다. 그러나 이내 화이트는 비록 재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도 특별한 일이 일어났음에는 틀림없다는 망상을 품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히브리서 9:23-26을 바탕으로 “1844년경에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있는 성소의 가장 거룩한 부분에 들어가셨다.”라는 결론을 도출해 냈다. 그런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재림이 곧 일어날 것임을 알리는 표식이라는 게 안식교인들의 설명이다.<br/><br/>물론 화이트의 주장은 궤변이다. 히브리서 9장은 하늘에 있는 성막의 성소가 아니라(계 15:5) “하늘 자체”(히 9:24)에 들어가신 예수님에 대한 설명이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셋째 하늘로 들어가셔서 행하신 구속 사역을, 주의 명절 가운데 하나였던 속죄일의 모형을 통해 계시하는 것이다(히 9:24,25). 이어지는 10장에서 성경은 주님께서 (바울이 히브리서를 기록하던 때를 기준으로) 이미 “과거”에 속죄제를 드리고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셨다고 말씀한다(히 10:12). 그뿐 아니라 바울은 우리도 “지성소”(히 10:19)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바울도 들어갈 수 있었던 곳을 예수님께서 1,800년 후에나 들어가셨다는 게 말이 되는가?<br/><br/>또한 안식교인들은 자신들이 기다리는 “재림”이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 마가복음 13장 등에서 설명하는 전쟁이나 지진을 비롯한 재난들 끝에 있을 일이라고 말하며, 교회가 대환란을 통과해서 휴거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더해 안식교는 “1844년” 이후 기간을 “조사 심판” 기간이라고 가르침으로써, 현 교회 시대와 앞으로 있을 대환란 시대를 뒤섞는다. 그들이 말하는 “조사 심판”이란, 주님께서 누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며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가졌는지(계 12:17)를 심사함으로써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 자들을 정하시는 일이다. (그들은 이 대목에서도 자신들이 행위 구원론자들임을 실토한다.) 그러나 현 교회 시대에 “계명들”을 지켜서 구원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갈 2:16).<br/><br/>안식교인들이 위와 같은 오류에 빠진 것은, 주님께서 앞으로 두 번에 걸쳐 오신다는 사실을 모르고, 두 번의 오심을 같게 봤기 때문이다. 즉 주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이 악한 현 세상으로부터 데려가기 위해 공중으로 먼저 오실 것이고(공중 재림), 그 뒤 죄의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지상에 내려오실 것이다(지상 재림). 주님께서 승천하실 때 구름 속으로 사라지셨는데, 성경은 그때 제자들이 본 그대로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행 1:9-11). 이러한 공중 재림이 있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공중으로 내려오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 구름 속으로 끌려 올라갈 것이다(살전 4:17). 반면 주님께서 지상에 내려오실 때는 승천하실 때와 달리 흰 말을 타고 오시는데, 그때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에 있는 군대들로서 셋째 하늘에서 주님과 함께 흰 말들을 타고 내려올 것이다(계 19:14).<br/><br/>말하자면 그리스도인들은 대환란을 통과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대환란 기간 동안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며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가질 필요도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대환란이 닥치기 전에 휴거되기에 대환란 때는 지상에서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대환란이라고 불리는 다가올 진노로부터 구해 내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이지(살전 1:10), 적그리스도의 미혹과 고통을 끝까지 견디며 대환란을 통과해야 구원받는 사람들이 아니다.<br/><br/>성경은 히브리서 3,4장에서 “네 종류의 안식”을 소개한다. 즉 카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이 민족적으로 누렸던 안식(히 3:11)과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을 끝내시고 스스로 쉬신 안식(히 4:4), 앞으로 있을 천 년 동안의 안식(히 4:5-9), 구원받은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안식(히 4:10, 마 11:28)이 바로 그것이다. 명색이 “안식교인”이라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이와 같은 “안식들”에 대해 정확히 알고, 그중 현 시대에 누릴 수 있는 안식이 무엇인지도 마땅히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br/><br/>안식교인들은 히브리서 4:4의 “창조 사역 끝의 안식”에만 집착하여 토요일이면 일에서 안식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는 참된 안식을 얻을 수가 없다. “안식”을 누리고 싶다면 “안식일”을 버리라! 이 시대에 어울리는 안식은 “구원받은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안식”(히 4:10)이다. 어떤 행위도 덧붙이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써 지옥의 저주로부터 구원받으라. 그러면 주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누릴 뿐만 아니라, 장차 천년왕국에서의 안식에도 참여할 수가 있다. 하나를 버리고 둘을 얻는 셈이니 유익이 아주 큰 것이다. 거듭나지 않은 안식교인들의 안식일 준수는 겸손과 금욕에는 지혜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골 2:23) 결코 그리스도인의 쉼에는 이르지 못함을 알아야 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Fri, 27 Jun 2025 09:58:42 +0900</dc:date>
</item>


<item>
<title>속임수의 명수, 여호와의 “가짜” 증인들</title>
<link>https://www.biblemaster.co.kr/bb15/%EC%86%8D%EC%9E%84%EC%88%98%EC%9D%98-%EB%AA%85%EC%88%98-%EC%97%AC%ED%98%B8%EC%99%80%EC%9D%98-%EA%B0%80%EC%A7%9C-%EC%A6%9D%EC%9D%B8%EB%93%A4/</link>
<description><![CDATA[여호와의 증인은 1870년대 초 미국의 찰스 러셀 목사가 시작한 소규모 성서 연구 집단에서 발전했다. 여호와의 증인은 1881년에 “시온의 워치타워책자협회”(Zion’s Watch Tower Tract Society)를 설립하면서 조직되었는데, 현재는 “워치타워성서책자협회”(Watch Tower Bible and Tract Society)로 바뀌었다. 모든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들이 이 워치타워성서책자협회에서 채택되고 정해진다. 현재의 명칭인 “여호와의 증인”은 찰스 러셀이 죽은 지 15년이 지난 1931년에 그의 후계자 러더포드 판사에 의해 채택되었다. <br/><br/>한국에서 여호와의 증인은 1912년에 홀리스터 선교사가 들어오면서 시작되었으며, 현재는 약 10만 명이 넘는 신도들이 있다고 한다. 여호와의 증인은 그들의 신도들을 “회중”이라 하고, 모임은 “집회”라고 하며, 일주일에 두 번 “왕국회관”에서 모인다. 집회 요일은 여러 회중이 한 왕국회관을 사용하기 때문에 각 회중마다 다르며, 이 두 번의 집회 참석은 여호와의 증인의 의무다. 여호와의 증인은 목사가 없고 보통 회중의 장로들이 집회를 인도하는데, 주로 워치타워성서책자협회에서 발간한 &lt;파수대&gt;를 보고 토의한다. <br/><br/>여호와의 증인은 자체적으로 성경을 재번역하여 &lt;신세계역&gt;(New World Translation)이라 불리는 성서를 만들어 냈지만, 이 역본은 뱀의 서기관인 웨스트코트와 홀트가 만든 헬라어 원문에서 나온 변개된 성서이다.<br/>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은 &lt;신세계역&gt;을 사용해도 믿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증인의 모든 교리는 워치타워성서책자협회가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워치타워성서책자협회가 정기적으로 발간하는 &lt;파수대&gt;(The Watchtower)는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서와 같은 권위를 가진 책이다. 워치타워성서책자협회의 지도부는 여호와의 증인 집단 내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권한을 지닌 유일한 부서이다. 다시 말해 여호와의 증인 집단의 모든 교리는 그들의 성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들의 최종권위인 워치타워성서책자협회의 지도부의 마음과 입에서 나온 것이라는 뜻이다. 여호와의 증인은 이렇게 처음부터 성경과 다른 거짓말로 시작되었고 지금도 거짓말로 회중을 속이고 있으며, 그들의 종말은 그들의 행위대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br/><br/>1.<br/>여호와의 증인은 “과거에” 사람들을 어떻게 속였는가? <br/><br/>“여호와의 증인”(Jehovah’s Witnesses)이란 용어는 원래 성경에 없는 용어이다. 그들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주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들이요 내가 택한 나의 종이니 이는 너희가 나를 알고 나를 믿고 내가 그인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라. 내 앞에 지음을 받은 하나님이 없었으며, 내 뒤에도 없으리라. 나, 곧 나는 주요, 나 외에는 구주가 없느니라.』(사 43:10,11)라는 구절을 붙들고 자기들이 여호와의 증인들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신 그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나의 증인들이요”라고 말씀하신 것이지 18세기의 미국인들에게 하신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여호와의 증인은 그 존재조차도 없었다.<br/><br/>러셀 목사와 러더포드 판사는 요한계시록 7장의 144,000명의 유대인 환란 성도들이 현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는 교리 체계를 확립했다.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에 따르면, “하늘 왕국”에서 예수와 함께 땅을 통치할 권세를 가진 사람은 “적은 무리”로 불리며 그 수는 정확히 144,000명인데, 출신이 유대인이냐 아니냐는 전혀 상관이 없다. 러셀은 이 144,000명만이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왕이 되어 지상을 다스리는 역할을 하며, 나머지 “큰 무리”는 낙원으로 회복된 지상에서 산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누가 “적은 무리”에 속하고 누가 “큰 무리”에 속하는가에 대해 의문이 들 텐데, 이처럼 여호와의 증인에는 두 부류가 있어서 각각 다른 구원의 희망을 가지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은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또 나에게 이 양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있어 내가 그들도 데려와야 하리니, 그들도 나의 음성을 듣게 되리라. 그리하여 한 양떼에 한 목자만 있으리라.』(요 10:16)라는 구절을 이용하지만, 이 말씀에 언급된 양무리는 교리적으로 이방인이나 여호와의 증인들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여호와의 증인을 창설한 자들은 자신들의 허망한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성경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죄를 짓고 거짓말로 사람들을 미혹한 것이다.<br/><br/>또한 여호와의 증인은 “수혈”을 거부해 왔는데, 그 근거는 창세기 9:4의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과 더불어, 즉 그 피째 먹지 말지니라.』라는 말씀과 기타 피를 금지하는 성경의 여러 가지 말씀들이다(레 17:10, 신 12:23, 행 15:28,29). 물론 “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은 모세의 율법이 있기 훨씬 전부터 주어진 명령이며, 모세의 율법하에서도, 율법 이후에도 금지된 일이다. 이것은 유대인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명령이다. 그러나 고기를 피째 먹는 것과 수혈은 다르다. <br/><br/>여호와의 증인은 “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피를 아예 받아들이지 말라”로 해석하여 수혈을 금지하고, 녹용이나 순대 등 동물의 피가 들어간 음식을 먹는 것도 금지하고 있다. 그로 인해 무수혈 수술, 수혈 금지 등의 문제를 야기했고, 수혈을 거부하다가 죽은 사람도 한둘이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수혈을 거부하는 환자를 인정한 의사에 대해선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대법원 판결도 있다.<br/><br/>그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증인은 1931년부터 백신을 금지했고, 어린아이들에게까지도 백신을 금하면서 “백신은 하나님이 만드신 영원한 언약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다가 1952년부터는 백신을 허용했다.<br/><br/>여호와의 증인은 1967년에 장기 이식도 금지했다. 각막 이식을 하느니 차라리 소경으로 살겠다고 했고, 신장이식 수술을 받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했다. 그러다가 1980년에 와서 이를 변경하고 장기 이식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교리는 그야말로 “엿장수 마음대로”인 것이다.<br/><br/>러셀 목사는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성경처럼 하나님의 영감으로 만들어졌다고 가르쳤다. 그는 피라미드를 측정한 값으로 계산하여 미래의 사건들을 예언하려고 시도했는데, 1874년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게 재림했으며, 1914년에 아마겟돈 전쟁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정치 세력이 멸망하고 천년왕국의 시작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사람들을 끌어들여 세력화했다. 그런데 1914년에 세상이 멸망한다는 예언은 거짓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러셀의 주장대로 세상이 멸망하지는 않았어도 제1차 세계대전과 시기가 일치함으로써 종교적 위세는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랬던 러셀은 약 2년 뒤인 1916년 10월 31일에 캘리포니아에서 설교하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열차 안에서 객사했다. 그의 허망한 꿈과 함께 몸은 무덤으로, 혼은 지옥으로 가고 만 것이다.<br/><br/>워치타워성서책자협회는 1925년에 이 땅에서 부활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들은 앞서 죽었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구약의 신실한 선지자들과 성도들이 완전한 사람들로 부활하여 땅에서 통치자들이나 지배 세력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분의 몸을 완전히 소멸시키신 후 천사장 미카엘이라는 새로운 영적 존재로 재창조하셨다거나, 죽은 사람들은 육신이 아닌 하늘에 있는 영적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는 등의 헛소리를 지껄이는데, 성경을 모르는 자들이 성경에 대해 말하려 하면 모순투성이의 거짓말만을 하게 된다.<br/><br/>여호와의 증인은 1975년에 종말이 올 것이라고 예언했지만, 그들이 말한 종말은 오지 않았다. 여호와의 증인은 거짓말을 해야 그들의 체제를 유지할 수 있으며, 미혹되고 세뇌된 자들은 그런 타성을 원하고 있다. 거짓된 것에라도 소망을 두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워치타워성서책자협회는 여러 거짓말들로 신도들을 속이고 세상을 속였지만 어떤 사과도 하지 않았다.<br/><br/>2.<br/>여호와의 증인은 “현재” 사람들을 어떻게 속이는가? <br/><br/>여호와의 증인은 『너는 살인하지 말지니라.』(출 20:13)라는 말씀만을 강조하며 어릴 적부터 군대 복무를 거부하도록 세뇌시킨다. 따라서 그들의 남자 청년들은 군대 징집에 반대하는데, 이 병역거부는 병역의 의무가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범법이 된다. 여호와의 증인 청년들은 계속해서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하며 병역을 이행하지 않겠다고 징병 소집에 불응했고 오히려 감옥에 가는 일을 자원했으며 전과자로 살기를 선호했다. 이에 따라 한국의 여호와의 증인 남자 청년들은 교도소 수감과 출소 이후의 사회적 불이익을 고스란히 안고 살아가야 한다. 최근에 종교적인 양심적 병역거부가 일부 받아들여져 대체복무로 전환시키고 있지만 여호와의 증인의 병역거부는 여전히 한국 사회와 군필자들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 주고 있다.<br/><br/>여호와의 증인은 자신들이 보는 성서 몇 구절을 예로 들어 병역거부를 정당화하지만, 성경은 정당방위로 야기된 살인이나 고의성이 없는 살인과 전쟁에서의 살인은 문제 삼거나 처벌하지 않는다. 워치타워성서책자협회는 여호와의 증인 가정과 청년들을 거짓말로 속여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마귀에게 미혹당하거나 세뇌당한 자들에게는 말씀의 능력도 소용이 없다.<br/><br/>여호와의 증인 여자 청년들도 워치타워 본부의 거짓말에 속기는 마찬가지이다. 여호와의 증인 여자들 가운데는 많은 사람들이 혼자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결혼은 반드시 침례받은 여호와의 증인 남자와 해야 한다는 것이 교리이기 때문인데, 침례받은 여호와의 증인 남자들이 상대적으로 적은 탓에 결혼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br/><br/>말하자면 결혼 적령기가 된 여자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나 정상적이지만, 여호와의 증인 여자들에게는 결혼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결혼 생활 자체가 너무 어렵고 무거운 짐이다. 어떻게 결혼한다 해도 여호와의 증인 남자들은 대부분 가난한 편이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애초부터 물질적인 궁핍에 적응되어 있고 군대에도 가지 않으며 사회생활보다는 포교 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자들이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게 된다.<br/><br/>여호와의 증인 남편들은 회중 사이에서는 장로로 일하고, 순회대회와 지역대회에서 연설하여 다른 신도들에게 존경과 대접을 받기 위해 집안 경제를 뒷전에 둔다. 여호와의 증인 아내들 역시 집안일을 뒷전에 두고 매월 최소 30시간에서 최대 70시간의 포교 봉사 활동 시간을 채워야 한다. 곧 임한다는 지상낙원을 기대하면서 학교를 중퇴하기까지 하는 자녀들, 병역거부를 위해 전과자까지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청년들, 포교 봉사 활동을 위해 아르바이트나 비정규직으로 생계를 꾸려야 하는 가장들과 그들의 아내들, 이것이 여호와의 증인의 현실이다. 모두 그렇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스스로 선택했건 부모에게서 물려받았건 여호와의 증인으로 살아야 하는 험악한 인생인 것이다. 누가 이런 인생을 좋아하겠는가? 그들이 한평생을 그렇게 사는 것은, 자신들이 물질적으로는 궁핍해도 영적으로 풍성한 복을 누리고 있는 조직이라고 끊임없이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워치타워 본부는 지금도 여호와의 증인 온 가족을 이렇게 거짓말로 속여서 비참한 삶을 살도록 강요하고 있다.<br/><br/>3.<br/>여호와의 증인은 “미래”에 관해 사람들을 어떻게 속이는가? <br/><br/>워치타워성서책자협회가 자기 신도들을 속이는 데 사용하는 가장 가증한 교리는 “지옥이 없다”는 것이며,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혼은 소멸한다고 가르친다. 그렇기에 그들이 보는 &lt;신세계역&gt;에는 “지옥”이라는 단어가 하나도 없다. &lt;한글킹제임스성경&gt;에 무려 54번이나 언급되어 있는 “지옥”이라는 단어를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삭제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lt;신세계역&gt; 부록에 “지옥은 문자적으로 불타는 장소가 아니다.”라고 기록해 놓았다. 부록에서 그들은, 사람은 영혼이며 사람이 죽는 것도 영혼이 죽는 것이고,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 무의식 상태에서 부활을 기다리며 잠들어 있다고 말한다.<br/><br/>워치타워 본부는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영원히 불타는 고통의 장소인 지옥은 잘못된 것이며,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피조물들에게 영원한 고통을 줄 수 있겠느냐면서, 죽은 사람은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무(無)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거짓말로 신도들을 세뇌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거짓말에 속은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들이 죽는 즉시 문자 그대로 불타는 고통의 장소인 지옥에 떨어질 것이고, 자신들이 지금까지 얼마나 속고 살아 왔는지 뼈저리게 깨닫게 될 것이며 그 『불타는 용광로』(마 13:50) 속에서 『울며 이를 갈고』(마 25:30)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죄인들이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 속』(마 25:41)에서 당할 고통은 영원무궁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곳에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9:44,46,48). 워치타워 본부의 거짓 교리에 자신들의 영원한 미래까지 완전하게 속임당한 여호와의 증인보다 더 비참한 자들은 이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귀가 주선한 잘못된 만남으로 인해, 그들의 눈은 소경의 눈이 되었고, 귀는 들을 수 없는 귀가 되어 성경의 외침에 눈과 귀를 완전히 닫아 버렸기 때문이다. <br/><br/>신약 교회 시대의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여호와의 증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능력을 받으리니 그러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게 증인이 되리라.』(행 1:8)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성령님께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오셨다(요 15:26). 그리스도인은 여호와의 증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세상의 참 구주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오직 그분만을 증거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하루라도 빨리 그 허망한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Fri, 27 Jun 2025 09:57:49 +0900</dc:date>
</item>


<item>
<title>명백한 이단! 그리스도의 교회!</title>
<link>https://www.biblemaster.co.kr/bb15/%EB%AA%85%EB%B0%B1%ED%95%9C-%EC%9D%B4%EB%8B%A8-%EA%B7%B8%EB%A6%AC%EC%8A%A4%EB%8F%84%EC%9D%98-%EA%B5%90%ED%9A%8C/</link>
<description><![CDATA[“그리스도의 교회”는 1800-1830년 사이 미국 켄터키주에서 컴벌랜드 밸리 부흥회 기간에 “바톤 스톤”(1772-1844)과 “알렉산더 캠벨”(1788-1866)이 장로교회에서 나오면서 시작되었다. 알렉산더 캠벨을 추종했다고 하여 “캠벨파”라고 불리기도 한다. 한국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정통”으로 인정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교회는 결코 정통이 아닐 뿐만 아니라 비성경적 교리들을 실행하는 명백한 이단이다. 그들은 매 주일 아침 로마카톨릭처럼 “성체”를 먹고 있으며, 교회에서 악기를 사용하는 것조차 비성경적이라며 초대 교회의 찬송 방식인 무반주 찬송을 고수하고 있는 자들이다. 그런 그들이 한국의 제도권 교회들과 교리가 다름에도 그동안 제도권에 들어가서 행동을 같이함으로써 그들의 이단 교리를 비난하지 못하게 꼼수를 편 것이 성공을 거둔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 글을 통해 그리스도의 교회가 얼마나 “명백한 이단”인지 “성경”으로 밝히고자 한다. <br/><br/>첫째, 그리스도의 교회가 주장하는 것 중에 하나는 교회가 원래의 초대 교회로 회복돼야 한다는 것인데, 이 같은 회복 운동을 “환원 운동”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환원 운동”은 초대 교회로의 환원이 아니라 “로마카톨릭”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일 뿐이다. 그래서인지 그들이 행하는 “침례”와 “주의 만찬”은 로마카톨릭과 거의 일치한다. 그들은 “로마카톨릭”처럼 자신들의 교회만이 “참된 교회”인 양 행세하고자 교회 이름도 “그리스도의 교회”(Church of Christ)라 칭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로마카톨릭의 교황이 자칭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자처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그 교회의 창시자인 바톤 스톤과 알렉산더 캠벨에 의해 “그리스도의 교회”가 회복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19세기 초에 출현한 “그리스도의 교회”만이 참된 교회라는 주장이다. 그렇게 되면 그때까지의 신약교회사 기간인 약 1,800년 동안 참된 교회가 없었다는 얘기인데, 이것이 말이 되는 주장인 것인가!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1,800년 동안 지옥의 문들이 주님의 교회를 이겨(마 16:18) 사탄에게 완전히 패배한 채로 있었다는 말인데, 이처럼 편협하고 배타적인 주장은 로마카톨릭이나 몰몬교, 안식교, 지방교회의 주장과 다를 바 없다. 그들의 교회 이름부터가 비성경적인 것은,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용어가 하나의 지역 교회의 “명칭”으로 사용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딱 한 번, 그것도 복수 형태로 『그리스도의 교회들』(롬 16:16)이라는 표현이 나오지만, 이것은 신약성경이 기록되던 당시에 있던 “여러 지역 교회들”을 의미할 뿐이다.<br/><br/>둘째, 그리스도의 교회는 일요일 아침마다 로마카톨릭의 “미사”처럼 “성찬식”을 행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근거로 “사도행전 20:7”을 제시한다. 『그 주의 첫날 제자들이 빵을 떼고자 함께 모였을 때 바울이 그들에게 설교하되 다음 날 떠날 준비를 하고 한밤중까지 설교를 계속하더라.』 그들은 이 구절의 “빵을 떼는 것”이 고린도전서 10,11장의 『주의 만찬』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말씀에서 “빵을 떼는 것”(행 20:7)은 주의 만찬이 아니었다. 사도행전 2:46에도 보면 제자들이 빵을 떼고 있던 것을 보는데 그것은 “날마다” 행하는 일이었다. 그것도 교회 건물에서 행한 것이 아니라 “집집마다 돌아가며” 교제를 위해 행한 것이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빵을 떼신” 적이 있는데(마 14:19) 이 역시 주의 만찬과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이처럼 빵을 떼던 일을 다 주의 만찬을 행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에서 침례라는 말만 나오면 다 물침례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어리석은 주장일 뿐이다. <br/>셋째, 그리스도의 교회는 “침례”와 관련해서 명백히 이단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 가장 경계해야 할 이단 교리는 “구원”에 관한 교리인데, 대부분의 이단들이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잘못된 “구원론”으로, 특히 “침례에 의한 구원”으로 사람들을 지옥에 보낸다. “침례에 의한 구원” 교리는 교부들의 시대부터 존재할 정도로 그 뿌리가 깊다. 로마카톨릭의 공식적인 교리이며, 그것을 그리스도의 교회 역시 믿고 있다.<br/><br/>그리스도의 교회는 “침례가 구원의 표”라고 말한다. 물론 그들도 믿음을 전혀 부정하지는 않는다. 침례의 효력은 “물”에 있지 아니하고 고백하는 “믿음”에 있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의 교리 안으로 조금만 들어가 보면 그들이 얼마나 겉 다르고 속 다른 집단인지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처음 믿을 때의 믿음보다 침례받을 때의 믿음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이다.”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특히 그들은 “믿음과 침례의 관계”에 대하여 아주 해괴한 주장을 하는데, 즉 믿음은 “새 생명의 시작”이며 침례는 “새 생명의 탄생”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믿음은 “수정란”이 생기는 것과 같고 침례는 “출생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들은 믿음에서 침례까지를 하나의 과정, 즉 “구원을 얻는 공식적인 시간”이라고 한다. <br/><br/>그렇기에 누군가가 침례를 받지 못했다면 구원에 이르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괴한 주장은 사도행전 2:38을 잘못 해석한 데서 비롯되었다. 『죄들을 사함받은 것으로 인하여 너희 각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행 2:38). 그들은 “죄들을 사함받은 것으로 인하여”(for the remission of sins)에서 “인하여”를 의미하는 “for”를 “위하여”로, 즉 “죄사함 받기 위하여” 침례받으라는 말로 잘못 해석한 것이다. 그들의 교리들 중 그 어떤 것보다 바로 이 부분이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단이라는 명백한 증거이다. 그들은 구원론에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성경 어디에도 죄사함을 받기 위해 침례를 받아야 한다는 교리를 뒷받침하는 구절이 없다. 만일 침례가 죄사함의 필수 조건이라면 침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침례를 받을 수 없는 환경이나 여건에 있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br/><br/>그리스도의 교회를 포함한 “침례에 의한 구원”을 주장하는 자들의 문제는, 성경에서 “물”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구절들을 읽을 때, 문맥상으로 “침례”라는 단어가 없음에도 그것을 “침례”로 해석한다는 데 있다. 특히 그들은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신으로 난 것은 육이요, 또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요 3:5,6)라는 말씀의 “물”이 침례와 전혀 상관없는데도 불구하고 “침례”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물”은 『육신으로 난 것』, 곧 육적 출생을 의미할 뿐이다. 성경에 무지한 이단들은 성경에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꾸며 대며 자신들의 거짓 교리를 정당화하는 아주 고약한 습성이 있다.<br/><br/>물론 성경이 신약 성도의 구원과 연관해서 침례를 말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너희가 침례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도 그와 함께 살아났느니라』(골 2:12).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받은 우리가 그의 죽으심 안으로 침례받은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아 그와 함께 장사되었으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지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생명의 새로움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6:3,4). 『한 분 주요, 한 믿음이며, 한 침례이고』(엡 4:5). 『너희 가운데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갈 3:27). 그러나 이 구절들이 말하는 침례는 물로 받는 침례가 아니라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 안의 한 지체로 만들어 주는 영적 침례를 말하는 것이다. 모든 믿는 자들을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은 “성령 침례”(고전 12:13)인데, 바로 이것이 에베소서 4장에서 말하는 “한 침례”이다. 이 침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게 되며, 이것은 결코 물에 잠기는 침례 예식이 아니다. 물침례는 성령으로 먼저 침례를 받은 사람이 그 뒤 자신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의식일 뿐이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이제 우리를 구원하는 모형이니, 곧 침례라. (이것은 육체의 더러움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응답이라.)』(벧전 3:21).<br/><br/>그런데 이처럼 침례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고 가르치면 그들은 다시 히브리서 5:9로 달려가서 『온전하게 되심으로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고』라는 구절을 들이민다. 즉 예수님께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님께서 구원의 근원이 되셨으니 침례가 곧 “순종”을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본문에 따라 “순종”할 때까지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말이 되는데, 결국 “침례에 대한 순종”이 구원의 필수 조건이라는 교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행위 구원으로서 명백한 이단 교리이다. 그들이 모르는 것은 히브리서 5:9의 “순종”은 로마서 6:17,18의 “순종”과 같은 개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너희가 죄의 종이었으나 너희에게 전하여 준 교리의 본을 마음으로부터 순종하여 죄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음이라.』 이 말씀은 죄인이 “복음의 교리”를 마음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순종을 통해 구원받는 것을 보여 준다. <br/>이와 같이 사도 바울은 죄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분명하게 선포했다.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8,9). 또한 신약의 지역 교회들을 세운 사도 바울은 “침례의 행위”가 “구원”에 필수 요소라는 거짓 교리를 정죄하고 있다. 『우리가 행한 의로운 행위에 의하지 않고 그의 자비하심에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으니』(딛 3:5).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되는 줄 알고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의로워지고자 함이라. 이는 율법의 행위로는 아무 육체도 의롭게 될 수 없음이라』(갈 2:16).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한 교인들은 자신이 여전히 잃어버린 죄인이라는 사실에 눈을 떠야 하는 것이다. <br/><br/>그리고 그들은 분별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전하는 “복음”은 사도 바울이 전한 “은혜의 복음”이 아니다. 죄인의 죄들은 물침례를 받음으로써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써”(행 22:16)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계 1:5) 씻기기 때문이다. 침례에 의한 구원을 믿는 그들은 자기들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죽어서 가는 곳을 알고 있었고(딤후 1:12) 요한도 알고 있었으며(요일 5:13) 베드로도 알고 있었다(벧후 1:14, 벧전 1:4,5). 더 이상 그리스도의 교회의 거짓 교리에 속아 마귀의 올무에 걸려들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아 지옥의 대기자 열에서 빠져나오도록 하라.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Fri, 27 Jun 2025 09:53:24 +0900</dc:date>
</item>


<item>
<title>“집총”과 “수혈”을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title>
<link>https://www.biblemaster.co.kr/bb15/%EC%A7%91%EC%B4%9D%EA%B3%BC-%EC%88%98%ED%98%88%EC%9D%84-%EA%B1%B0%EB%B6%80%ED%95%98%EB%8A%94-%EC%97%AC%ED%98%B8%EC%99%80%EC%9D%98-%EC%A6%9D%EC%9D%B8/</link>
<description><![CDATA[여호와의 증인들은 하나님의 신격, 즉 “삼위일체”를 믿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버지 하나님보다 열등한 “피조된 신”으로 여기고, 성령 하나님을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의 활동력”으로 여겨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또한 지옥의 존재를 부정하여 성경에 나와 있는 지옥을 모두 “무덤”으로 변개하였으며,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지옥의 영원한 형벌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죽음 이후에 어떤 종류의 고통도 느끼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믿음에 의한 구원을 거부하고 “행위 구원론자”로서 정결을 강조하며, 백보좌 심판 때까지는 구원받았는지의 여부를 알 수 없다고 믿는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는지를 모르는 무지한 종교 집단에 불과하다.<br/><br/>여호와의 증인들은 또한 전쟁과 군대에 관한 성경 말씀을 왜곡하여 “집총”을 거부하고, 피에 관한 교리를 왜곡하여 “수혈”을 거부한다. 인류의 평화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집총 거부와 같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다. 하물며 사고나 질병에 의한 출혈로부터 생명을 구할 뿐 아니라 다양한 수술을 집도할 때 요구되는 수혈을 거부함으로써, 수혈을 통해 살릴 수 있는 사람들의 생명을 외면하는 살인 행위를 행하면서도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그들의 잘못된 교리들 중에서 집총 거부와 수혈 거부에 관한 교리를 살펴보고자 한다.<br/><br/>여호와의 증인들이 전쟁과 집총을 거부하는 근거로 인용하는 구절은 “이사야 2:4”이다. 『그가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심판하시며, 많은 백성을 책망하시리니 그들이 자기 칼들을 두들겨서 보습을 만들며, 자기 창들을 두들겨서 낫을 만들 것이요, 민족이 민족을 대적하여 칼을 들어올리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이 더 이상 전쟁을 배우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 구절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민족이 민족을 대적하여 칼, 즉 무기를 들어올리지 않기를 바라시며, 전쟁 연습, 즉 군사 훈련을 하지 않기를 바라신다.”라고 주장하며, 집총과 군사 훈련을 거부한다. 이와 같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모르는 것은, 성경의 말씀을 “적용”할 때에는 “시대”와 “대상”을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사야 2:4은 본문 말씀 자체에서 그 시기를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4절의 『그가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심판』하시는 때는 “대환란 시대” 직후에 올 “천년왕국 시대”를 의미한다. 즉 “민족이 민족을 대적하여 칼을 들어올리지 않고, 더 이상 전쟁을 배우지 아니하는 때”는 “천년왕국 시대”를 의미하며, 그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세상 민족들을 통치하시는 때이다. 성경에 무지한 여호와의 증인들은 성경의 시대를 구분할 줄 모르기 때문에 이사야 2:4이 “천년왕국 시대”에 있을 일을 “예언”한 것이 아니라, 현 교회 시대에 자신들이 지켜야 할 “교리”로서 생각하는 것이다. <br/><br/>여호와의 증인들은 또한 “에베소서 6:12”을 집총 거부의 근거로 들기도 한다. 『이는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정사들과 권세들과 이 세상 어두움의 주관자들과 높은 곳들에 있는 영적 악에 대항하는 것이기 때문이니라.』 그러나 이 구절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치르는 영적 전쟁에서 우리를 눈에 보이게 공격하는 자들을 조종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들”이 있음을 알려 주는 말씀이지, 국가 간의 실제 전쟁에서 자국을 수호하기 위한 집총을 포기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집에 강도가 들어와서 칼로 찔러도 저항하지 않고 그냥 찔려서 죽어 주려는가? 여호와의 증인들은 다른 국민들이 피 흘리며 지키는 국가에서 평화를 거저 누리고자 하는 파렴치한들에 불과하다. 자신이 살고 있는 국가에서 지켜야 할 국방의 의무는 신성한 것임을 알라!<br/><br/>성경은 “피”를 먹는 것을 금지한다. 율법 시대 전에는 노아의 홍수 이후에 노아와 그의 가족에게 복을 주시면서 땅을 다시 채우라고 명령하셨을 때 고기를 피째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으며(창 9:3,4), 율법 시대에는 피를 먹는 것을 그에 관한 율법 조항을 만드심으로써 금하셨다(레 17:10-14).<br/><br/>“피”를 먹지 말라는 것은 교회 시대에도 금지되어 있다.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회의 때 사도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약의 율법을 지키도록 요구하지 않기로 결정했지만, 그러한 자유에 몇 가지 예외를 두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도 유대인들 앞에서 “간증”을 위해 “피를 삼가라”는 것이었다. 『다만 그들에게 글을 보내어 우상으로 더럽혀진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삼가게 하자는 것이라. 이는 예로부터 각 성읍에서 모세를 전파하는 자들이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이 읽혔음이라.”고 하더라』(행 15:20, 21). 여기서 『피를 삼가게 하자』는 말씀이 율법에서 말씀하는 『피를 먹지 말라』(레 17:12)는 의미임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증인들의 신세계역에는 「피를 멀리하라」로 교묘하게 변개되어 있다. 이것은 그들의 “수혈 거부 교리”를 정당화하기 위한 의도적 왜곡인데, 그들의 파수대 공식 사이트에서 「구약과 신약 모두에는 피를 멀리하라는 분명한 명령이 들어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피는 생명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그리고 생명의 수여자이신 그분을 존중하기 때문에 수혈을 받지 않습니다.」라고 엉터리 설명을 적고 있다. <br/><br/>여호와의 증인들은 피를 먹는 일을 금지하는 『고기를 그 생명과 더불어, 즉 그 피째 먹지 말지니라』(창 9:4)라는 말씀을 설명할 때 「그분은 노아에게 “다만 고기를 그 영혼 - 그 피 - 있는 채로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라고 설명한다. 또한 『너희는 어떤 종류의 육체의 피도 먹지 말라 하였도다. 이는 모든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음이니, 피를 먹는 자는 끊어지리라.』(레 17:14)라는 말씀에 관해서는 「“너희는 어떤 육체의 피도 먹어서는 안 된다. 모든 부류의 육체의 영혼은 그 피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그것을 먹는 자는 끊어질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영혼 즉 생명이 피에 있으며 자신에게 속한 것으로 보셨습니다.」라고 설명한다. 즉 “생명이 피에 있다.”라는 말씀을 “영혼이 피이다.”로 변개하여, “수혈”을 하면 마치 피를 통해 “영혼”이 옮겨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도록 한 것이다.<br/><br/>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에 어긋나게 안식일을 어기는 행동을 하셨다고 비난받으셨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노라.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타당하냐, 아니면 악을 행하는 것이 타당하냐? 생명을 구하는 것이 타당하냐, 아니면 죽이는 것이 타당하냐?』(눅 6:9) 주님께서는 “율법”을 대표하는 “안식일”과 “선”을 대표하는 “생명을 구하는 것” 사이에서 어떤 것이 옳은가를 질문하셨는데, 무엇이 옳은가? 주님께서는 이에 대해 직접 대답하셨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일은 타당하니라』(마 12:12). 수혈은 피를 먹는 행위도 아니고, 영혼이 옮겨지는 일도 아니다. 주님께서는 “수혈”로 생명을 살리기를 원하신다. 피가 필요할 때 피를 받는 것은 의료적 상식에 속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7 Mar 2025 11:36:40 +0900</dc:date>
</item>


<item>
<title>삼위일체와 지옥을 부인하는 여호와의 증인</title>
<link>https://www.biblemaster.co.kr/bb15/%EC%82%BC%EC%9C%84%EC%9D%BC%EC%B2%B4%EC%99%80-%EC%A7%80%EC%98%A5%EC%9D%84-%EB%B6%80%EC%9D%B8%ED%95%98%EB%8A%94-%EC%97%AC%ED%98%B8%EC%99%80%EC%9D%98-%EC%A6%9D%EC%9D%B8/</link>
<description><![CDATA[삼위일체와 지옥을 부인하는 이단 “여호와의 증인”은 찰스 테이즈 러셀(Charles Taze Russell, 1852-1916)에 의해 시작되었다. 원래 러셀은 펜실베이니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에는 회중교회 신자였다. 그러나 1870년경 자신이 이끄는 성경 공부 모임을 시작했고, 1872년 “국제 성서 연구자 협회”(현재의 “워치타워 성서 책자 협회”)를 설립했다. 찰스 러셀은 지옥을 믿지 않았으며,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의 교리를 공부하면서 시한부 종말론 사상을 받아들였다. 또한 아리우스 이단의 교리를 택하여 성경의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러셀 이후에는 협회의 고문이었던 조세프 프랭클린 러더포드(Joseph Franklin Rutherford, 1869-1942)가 이 집단을 이끌었다.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1931년부터였으며, 그들의 공식 문서인 &lt;파수대&gt;는 뉴욕 브룩클린에 본부를 두고 100여 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로 보급되고 있다. <br/><br/>여호와의 증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버지 하나님보다 열등한 피조된 신으로 여기고, 동시에 성령 하나님을 인격이 아닌 활동력으로 여겨 삼위일체를 부정한다. 또한 지옥의 존재를 부정하여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영원한 형벌을 받지도 않고 어떤 종류의 고통도 느끼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행위 구원론자들”이 늘 주장하듯이, 백보좌 심판 때까지는 “구원”받았는지의 여부를 알 수 없다고 말하며, 구원을 위한 정결의 교리를 강조한다. 이외에도 피에 관한 교리를 왜곡하여 수혈을 거부하고, 전쟁과 군대에 관한 성경 말씀을 왜곡하여 집총을 거부한다. 더더군다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가 아닌 나무 기둥에 못박혀 죽으셨다고 주장한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모르는 무지한 집단에 불과하다. 이번 호에서는 그들의 잘못된 교리들 중에서 삼위일체와 지옥에 관한 교리를 살펴보고자 한다.<br/><br/>여호와의 증인들은 러셀의 가르침에 따라 두 신이 있다고 믿는다. 스스로 존재하는 “태어나지 않은 신”(여호와)이 있고, 그 신이 낳은 “태어난 신”(예수 그리스도)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호와의 증인의 성서인 “신세계역”은 『아무도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아버지의 품 안에 계신 독생자, 그가 하나님을 분명히 밝히셨느니라.』(요 1:18)에서 “독생자”를 “독생하신 하나님”으로 변개시킴으로써 두 하나님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신세계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심을 실제로 믿지 않기 때문에 『경건의 신비는 논쟁의 여지없이 위대하도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으로 나타나셨고』(딤전 3:16)에서 “하나님께서는”이라는 단어를 “그는”으로 변개시켰다. 이것은 신세계역본이 변개된 저본으로부터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br/><br/>여호와의 증인들은 성경에 삼위일체를 증명할 만한 구절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사용하는 변개된 성경인 “신세계역”에는 삼위일체에 관한 강력한 증거인 “요한일서 5:7”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요한일서 5:7 외에도 삼위일체를 증명하는 구절들은 성경 여러 곳에 존재한다. 우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한 분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대로』(창 1:26)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내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창 1:27)대로 창조된 인간도 “몸”과 “혼”과 “영”으로 구성된 “삼중적인 존재”인 것이다(창 2:7, 살전 5:23). 예수 그리스도께서 침례를 받으셨을 때도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마 3:13-17).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마 28:19) 주라고 명령하셨을 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세 분으로 언급되고 있지만, 그 “이름”(name)은 단수로 되어 있어서 세 분이 하나이심을 증명해 준다. 사도 바울 또한 고린도후서 13:14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가 너희 모두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말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br/><br/>특히 여호와의 증인들은 “성령 하나님”을 인격이 아닌 활동력이라고 주장하지만, 성령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고(계 2:7) 가르치시며(요 14:26) 증거하신다(요 15:26). 성경은 성령 하나님에 대해 “그분”이라고 지칭하여 인격을 가지신 분이심을 보여 주고 계시며, 사도행전 5:3,4에서 아나니아와 삽피라가 성령 하나님께 거짓말한 것을 하나님께 거짓말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또한 성령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똑같이 『주』라 불리신다. 『이제 주는 그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 3:17).<br/><br/>여호와의 증인들은 성경에 기록된 “지옥”이 모두 “무덤”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며, “지옥”을 모두 “무덤”이라고 변개했다. 그래서 “신세계역”에는 “지옥”이 없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죽은 후에 “무덤”으로 가고, 의식이 없이 잠을 자다가 마지막 심판 때 깨어 자기들이 새 땅에서 살게 될지 불못에서 소멸될지를 알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여호와의 증인들은 성경의 단어들을 그들의 주장에 맞추어 해석하는데, “멸망시키다”(destroy)와 “멸망하다”(perish)를 “소멸하다”(annihilate, 존재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다)로 해석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멸망하다(perish), 쇠잔하다(consume), 멸망시키다(des- troy), 죽다(die)와 같은 단어들은 사물이나 동물이나 사람이 “소멸하다”(anni- hilate), 즉 “존재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다”의 의미로 쓰인 적이 없다(잠 5:11; 29:18, 신 30:18, 암 3:15). <br/><br/>여호와의 증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의 혼은 의식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죽은 후에 고통 같은 것은 느끼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지옥 같은 것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여 백보좌 심판에 서게 된 이후에도 그 죄인들에게 고통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죄인들이 불못에서 “소멸,” 즉 존재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아무런 근거도 없이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라고 가르친다. 지옥을 한낱 “비유”로 만들어 버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가리는 가장 저주받을 이단들 중 하나인 것이다. <br/><br/>『그가 친히 나무에 달린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담당하셨으니』(벧전 2:24). 이것은 성경의 기본적 진리이다. 죄인들의 죗값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갈보리 십자가에서 온전히 지불되었다. 이 진리를 부정해 버린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들의 죗값을 대신 지불하시기 위해 희생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었다. 이 사실을 끝까지 부인한다면, 그들은 자기들의 죗값을 스스로 지불해야 한다. 그 방법이 무엇인가? 『불과 유황이 타는 못』(계 21:8)에 영원히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죄의 형벌”과 그 집행 장소인 “지옥”을 부인하고 여호와의 증인들의 주장을 따르는 자는 불못에서 영원무궁토록 고통받게 된다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03 Feb 2025 17:39:57 +0900</dc:date>
</item>


<item>
<title>지옥을 부정하는 이단 여호와의 증인</title>
<link>https://www.biblemaster.co.kr/bb15/%EC%A7%80%EC%98%A5%EC%9D%84-%EB%B6%80%EC%A0%95%ED%95%98%EB%8A%94-%EC%9D%B4%EB%8B%A8-%EC%97%AC%ED%98%B8%EC%99%80%EC%9D%98-%EC%A6%9D%EC%9D%B8/</link>
<description><![CDATA[『부자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에 눈을 들어 저 멀리 아브라함을 보았더니 나사로가 그의 품에 있는지라. 그가 소리질러 말하기를...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받고 있나이다』(눅 16:23,24).<br/><br/><br/>지옥을 부정하는 이단 “여호와의 증인”은 찰스 러셀(Charles Taze Russell, 1852-1916)에 의해 창시되었다. 원래 러셀은 펜실베이니아에서 태어나 엄격한 회중교회 신자로 자랐다. 그러나 1870년경 교회를 이탈하여 독자적인 성경공부 모임을 이끌었고, 1872년 국제 성서 연구자 협회(현재의 “워치타워 성서 책자 협회”)를 설립했다. 러셀이 죽자 협회의 고문이었던 러더포드(Joseph Franklin Rutherford, 1869-1942)가 이 집단을 계승했으며,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1931년부터였다. 그들의 공식 문서인 &lt;파수대&gt;는 뉴욕 브룩클린에 본부를 두고 100여 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로 보급되고 있다. <br/><br/><br/>찰스 러셀은 한때 지옥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졌으나 지옥이 없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믿게 되었다. 그 후 안식교 교리를 공부하면서 시한부 종말론 사상을 받아들였고, 또 아리우스 이단의 교리를 택하여 성경의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가 만든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명칭은 이사야 43:10에서 따온 것이다. 『주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들이요 내가 택한 나의 종이니 이는 너희가 나를 알고 나를 믿고 내가 그인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라. 내 앞에 지음을 받은 하나님이 없었으며, 내 뒤에도 없으리라.』 이 말씀에서 언급되는 『너희』는 1절의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의 진짜 증인들인 것이다. 그런데 러셀은 이 말씀을 자신과 같은 이방인들에게 주신 것으로 오해하여 오늘날의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명칭을 만들었던 것이다.<br/><br/>러셀 목사는 러더포드 판사와 함께 요한계시록 7장의 144,000명의 유대인 환란성도들이 현 시대의 실제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는 교리 체계를 확립했다. 그들은 흔히 “올리브산 설교”라 불리는 마태복음 24장을 교회에 적용시키고, 대환란 때의 유대인에게 적용해야 할 교리를 신약의 구원받은 모든 이방인들에게 적용시킴으로써 믿음과 행위에 근거한 구원 체계를 세웠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체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요, 할례는 마음의 할례이니 영에 있고 법문에 있지 않은 것이라. 그들의 찬사는 사람들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니라.』(롬 2:28,29)라는 말씀을 그 근거 구절로 제시한다. 그러면서 이 이단은 하나님께서 실제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완전히 끝내셨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이방인들의 죄가 충만해지기까지 이스라엘의 일부가 완고하게 된 것뿐이라고 하셨다(롬 11:25). 하나님께서는 현 교회 시대에 이스라엘을 잠깐 옆으로 제쳐놓으셨을 뿐 그들과의 관계를 끊으신 적이 없다. 그분은 자기 백성을 버리신 적이 없으며(롬 11:1) 결국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롬 11:26)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br/><br/><br/>러셀 목사의 가르침에 따라 모든 여호와의 증인은 두 신이 있다고 믿는다. 태어나지 않은 신(여호와)이 있고, 태어난 신(예수 그리스도)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호와의 증인의 성서인 “신세계역본”(New World Translation)은 『아무도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아버지의 품 안에 계신 독생자, 그가 하나님을 분명히 밝히셨느니라.』(요 1:18)에서 “독생자”를 “독생하신 하나님”으로 바꿈으로써 두 하나님을 제시하고 있다. 그들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심을 실제로 믿지 않기 때문에 『경건의 신비는 논쟁의 여지없이 위대하도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으로 나타나셨고』(딤전 3:16)에서 “하나님께서는”이라는 단어를 “그는”으로 대체시켰다. 이것은 신세계역본뿐만 아니라 변개된 한글개역성경과 개역개정판도 마찬가지이다.<br/><br/><br/>여호와의 증인들은 성경에 기록된 “지옥”이 모두 “무덤”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이 죽은 후에 “무덤”에 가고, 의식이 없는 잠을 자다가 마지막 심판 때 잠에서 깨어나 자신들이 새 땅에서 살게 될지 불못에서 소멸될지를 알게 된다고 가르친다. 이 반성경적 교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여호와의 증인들은 성경의 단어들을 그들 마음대로 해석하는데, “지옥”을 “무덤”이라고 해석할 뿐만 아니라, “멸망시키다”(destroy)나 “멸망하다”(perish)를 “소멸하다”(annihilate, 존재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다)로 해석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멸망하다(perish), 쇠잔하다(consume), 멸망시키다(destroy), 죽다(die) 같은 단어는 사물이나 사람이 “소멸하다”(annihilate), 즉 “존재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다”의 의미로 쓰인 적이 없다(잠 5:11; 29:18, 신 30:18, 암 3:15). <br/>상황이 위와 같은데도 여호와의 증인들은 성경에 분명히 제시된 “지옥”을 부인한다. 그들은 성경을 믿는 것이 아니라, “지옥”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자기들의 마음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성경에 나오는 “지옥”이 “무덤”을 뜻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지옥을 “무덤”과 동일시함으로써 신약성경에 기록된 일곱 가지 성경적 기본 진리들을 무시해 버린다. <br/><br/><br/>1. 무덤에는 불이 없지만, 지옥에는 있다(눅 16장, 마 25장).<br/><br/><br/>2. 무덤에서는 울고, 통곡하고, 이를 가는 일이 없지만, 지옥에는 있다(마 13,22장).<br/><br/><br/>3. 무덤에서는 기도하는 사람이 없지만, 지옥에는 있다(눅 16장).<br/><br/><br/>4. 무덤은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지만, 지옥은 그들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마 25장).<br/><br/><br/>5. 무덤이 “지옥”이든지 그렇지 않든지 그리스도인의 혼은 죽어서 무덤에 가지 않는다(빌 1:21-23, 고후 5:1-10, 살전 5:10).<br/><br/><br/>6. 지옥이 “무덤”이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보이며 거짓 교사로서 가장 어리석은 교훈을 죄인들에게 준 것이다. 왜냐하면 건강한 상태로 지옥에 가는 것보다 절름발이나 불구자나 소경으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 18:8). 지옥이 “무덤”이라면, 육신의 형체가 어떠하든지 지옥에 갈 것이며, 육신에서 어떤 부분을 제거한다 해도 그것은 구원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br/><br/><br/>7. 영원한 수치와 영원한 고통(계 14장)과 영원한 불(마 25장)로 이루어지는 영원한 형벌(단 12장)은 죽은 몸이나 소멸된 “시체”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시체에게는 그 무엇으로도 벌이나 고통을 줄 수 없다.<br/>위의 위대한 일곱 가지 진리들은 “워치타워 성서 책자 협회”(Watch Tower Bible and Tract Society)와 그들을 따르는 자들의 본성을 잘 보여 준다. 이들은 마귀 들린 무리들로서, 하나님께서 영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의 죄들에도 영원한 형벌이 요구된다는 성경의 부정적인 진리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즉 그들은 죄를 짓고도 그 죄의 대가를 치르고 싶지 않기에 성경적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br/><br/><br/>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리스도를 거부한 죄인이 죽으면, 그 죄인의 혼은 의식 없는 상태로 무덤에 누워 있기 때문에 죽은 후에 고통 같은 것은 느끼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를 거부하여 백보좌 심판에 서게 될 죄인들에게도 고통이 없다고 가르치는데, 이는 죄인들이 불못에서 “소멸,” 즉 존재 자체가 사라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로 이것이 여호와의 증인들의 가르침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6장에서 지옥의 실상을 선명하게 제시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아무런 근거도 없이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라고 가르친다. 지옥을 한낱 비유로 만들어 버린 그들은 구원받지 못한 인류를 지옥의 실제적인 멸망으로 몰고 가는 가장 저주받은 이단들 중 하나인 것이다. <br/><br/><br/>죄인들의 죗값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갈보리 십자가에서 온전히 지불되었다. 『그가 친히 나무에 달린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담당하셨으니』(벧전 2:24). 이것은 성경의 기본적 진리이다. 이 기본적인 진리를 부정해 버린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들의 죗값을 대신 지불하시려고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었다. 이 사실을 끝까지 부인한다면, 그들은 자기들의 죗값을 스스로 지불해야 한다. 그 방법이 무엇인가? 『불과 유황이 타는 못』(계 21:8)에 영원히 참여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지옥을 부인하고 싶어서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동조하는 자는 그 영원한 불의 형벌로 영원무궁토록 고통받게 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Wed, 17 Apr 2024 18:18:09 +0900</dc:date>
</item>


<item>
<title>“침례로 구원받는다”는 그리스도의 교회</title>
<link>https://www.biblemaster.co.kr/bb15/%EC%B9%A8%EB%A1%80%EB%A1%9C-%EA%B5%AC%EC%9B%90%EB%B0%9B%EB%8A%94%EB%8B%A4%EB%8A%94-%EA%B7%B8%EB%A6%AC%EC%8A%A4%EB%8F%84%EC%9D%98-%EA%B5%90%ED%9A%8C/</link>
<description><![CDATA[장준익 / 성경대로믿는사람들 기자<br/><br/>『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이제 우리를 구원하는 모형이니, 곧 침례라. (이것은 육체의 더러움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응답이라.)』(벧전 3:21).<br/><br/>많은 이단 교리들 중에서도 특히 경계해야 할 교리는 바로 “구원”에 관한 이단 교리이다. 구원에 관한 교리가 잘못되면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가기 때문에 잘못된 구원론은 사람들의 혼을 파멸시키는 사악한 교리임을 알아야 한다. 거의 대부분의 이단들이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잘못된 “구원론”으로 사람들을 지옥에 보내고 있는데, 특히 “침례에 의한 구원”을 말하는 이단들이 그러하다. “침례에 의한 구원” 교리는 교부들의 시대부터 존재할 정도로 그 뿌리가 깊다. 그것은 로마카톨릭의 공식적인 교리이면서도 오늘날 이 교리를 신봉하는 교파나 개인이 너무나 많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교리는 “죄인은 침례(혹은 세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는 주장이다. 침례가 구원의 수단이라는 것인데, 성경은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라고 말씀하신다. 또 『은혜로 된 것이면 더 이상 행위가 아니니 그렇지 아니하면 은혜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라. 그러나 행위로 된 것이면 그것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 그렇지 아니하면 행위는 더 이상 행위가 아니니라.』(롬 11:6)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침례 구원론”을 소각장에서 불태워야 할 쓰레기로 취급하신다. “침례에 의한 구원” 같은 사악한 교리를 말하는 이단들에는 로마카톨릭과 그리스도의 교회, 몰몬교, 루터교, 안식교, 여호와의 증인 등이 있는데, 이번 호에서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정통”으로 수용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교회”가 결코 성경적인 교리를 가르치는 교회가 아님을 본 글을 통해 알게 될 것이다.<br/><br/>침례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1800년과 1830년 사이에 미국 켄터키에서 시작되었다. “컴벌랜드 밸리 부흥회”(Cum- berland Valley Revival) 기간 동안에 바톤 스톤(Barton Stone) 장로와 알렉산더 캠벨(Alexander Campbell)이 장로교회에서 빠져나오면서 시작된 것이다. 물침례가 물을 뿌리는 것이 아니라 물에 잠기는 것이라는 진리는 알고 있었지만,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침례교회의 정통적인 믿음과 일치하지 않았던 스톤과 캠벨은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초교파 교회를 세웠다. 말이 좋아 초교파이지 그들의 사상과 실행은 로마카톨릭을 닮아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교회”만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된 교회이며 다른 교회들은 교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생각은 전적으로 로마카톨릭을 흉내 낸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교회”는 로마카톨릭에서 행하는 성경에서 벗어난 관행을 실행한다. 일요일 아침마다 로마카톨릭의 “미사”처럼 “성찬식”을 행하는데, 성경적 증거로 사도행전 20:7을 제시한다. 『그 주의 첫날 제자들이 빵을 떼고자 함께 모였을 때 바울이 그들에게 설교하되 다음 날 떠날 준비를 하고 한밤중까지 설교를 계속하더라.』 그들이 이 말씀을 제시하는 것은 그 구절의 “빵을 떼는 것”이 고린도전서 10,11장의 『주의 만찬』이라고 잘못 해석한 결과이다. 그러나 빵을 떼는 것(행 20:7)은 주의 만찬이 아니었다. 사도행전 2:46을 보면 제자들이 빵을 떼는 것은 “매일” 행하는 일이었고 교회 건물 안에서 행한 것이 아니라 집집마다 다니면서 교제를 위해 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br/><br/>또한 “그리스도의 교회”는 “믿음은 생명의 시작이고 침례는 새 생명의 탄생”이라며 침례 구원론을 가르친다. 침례 구원론자들의 특징은 성경에서 “물”이 언급되는 구절들을 읽을 때 그 말씀에 “침례”라는 단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침례와 연관 지어 해석한다는 데 있다. 특히 그들은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신으로 난 것은 육이요, 또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요 3:5,6)라는 말씀의 “물”이 침례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도 그것을 “침례”라고 한다. 여기서 물은 사람이 자기 어머니의 태에서 태어날 때 물로 된 몸을 지니고 태어나는 것을 뜻한다. 성경에 무지한 이단들은 성경에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꾸며대며 자신들의 거짓 교리를 정당화하는 매우 나쁜 습성이 있는 것이다.<br/><br/>믿는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연합시키는 것은 물침례가 아니라 성령 침례이며 이것을 “한 침례”라고 부른다. 『너희가 너희를 부르시는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것처럼 한 몸과 한 분 성령이 계시니 한 분 주요, 한 믿음이며, 한 침례이고 한 분 하나님, 곧 모든 것의 아버지시니 그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시며 모든 것을 통하여 너희 모두 안에 계시느니라』(엡 4:4-6).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죄인이 성령님에 의해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성령 침례”요(고전 12:13) 또 “한 침례”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이 물침례가 아닌 성령 침례임을 알게 해 준다.<br/><br/>교회 시대의 구원의 복음은 바울 서신 곳곳에서 제시된다. 『만일 너희가 내가 전한 복음을 굳게 잡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다면 복음을 통하여 너희도 구원받은 것이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달하였나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성경대로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나셔서』(고전 15:2-4). 『네가 네 입으로 주 예수를 시인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이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에 이르기 때문이라』(롬 10:9,10).<br/><br/>&nbsp;<br/><br/>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는 사도행전 2장의 베드로의 설교가 이 시대를 위한 “구원의 복음”이라고 가르친다. 당시 베드로는 『회개하라. 그리고 죄들을 사함받은 것으로 인하여 너희 각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행 2:38)라고 설교했는데, 이처럼 “물침례를 통해 성령을 받는 것”은 자신들의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박은 『이스라엘 사람들』(행 2:22)에게 주는 메시지였다. 사도 바울 역시 자신이 침례가 아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보냄을 받았다고 했다(고전 1:17). 바울은 물침례가 아닌 복음을 통해서 영적 자녀들을 낳았던 것이다(고전 4:15). 교회 시대에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음으로써 성령을 받는 것”(행 2:38)이 아니다. 사도행전 2장 이후에 이방인들은 물침례가 아닌 믿음을 통해서 성령을 받았다. 『베드로가 아직 이런 말을 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그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시더라... “이 사람들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성령을 받았으니 어느 누가 물로 침례받는 것을 금하리요?” 하며 주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고 그들에게 명하더라』(행 10:44,47,48). 그들은 성령을 먼저 받고 침례를 받은 것이다.<br/><br/>위와 같이 “그리스도의 교회”는 교회 시대에 맞는 올바른 성경적 교리로서 바울의 계시(갈 1:8-12)를 택하지 않고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구원의 복음으로 택했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성경 이해 수준은 이처럼 매우 저급한 것이다. 베드로는 이방인인 코넬료(행 10장)를 만난 후에 사도행전 15장에서 예루살렘 회의 때 은혜의 교리를 확정하게 되었고(11절), 그 뒤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면 성령을 받는다”는 말을 두 번 다시 꺼내지 않았다. 그러므로 바울의 교리를 따르지 않고 베드로의 설교에 머무르며 시간을 허비하는 자들은 영락없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지옥 대기자들에 지나지 않는다.<br/><br/>이 교회 시대에 물침례는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 구원의 “모형”이다(벧전 3:21). 사람의 죄가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행 22:16) 씻겨지는 것이지, 물침례로 씻겨지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오순절 이후로는 물침례를 통해 성령을 받은 사람은 없었다. 이 교회 시대에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행 2:38)에 의지해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 곧 침례를 통해 구원받고자 하는 사람들은 마귀의 뜻대로 마귀의 올무에 걸려든 것이다(딤후 2:26, 딤전 4:1).<br/><br/>“그리스도의 교회” 교인들은 그들이 모이는 건물을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부르지만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다. 그 이름 자체가 성경적이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의 “교회들”(복수)은 성경에 있어도(롬 16:16),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단수)는 신구약 어디서도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불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름도 교리도 잘못되었다. 침례를 통한 구원은 인간 자신의 걸레 같은 자기 의를 드러낼 뿐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받게 됨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 『곧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한 것으로 모든 자와 믿는 모든 자에게 미치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07 Feb 2023 17:05:11 +0900</dc:date>
</item>


<item>
<title>다른 복음을 전파하는 박형룡의 "회심과 신앙 교리"</title>
<link>https://www.biblemaster.co.kr/bb15/%EB%8B%A4%EB%A5%B8-%EB%B3%B5%EC%9D%8C%EC%9D%84-%EC%A0%84%ED%8C%8C%ED%95%98%EB%8A%94-%EB%B0%95%ED%98%95%EB%A3%A1%EC%9D%98-%ED%9A%8C%EC%8B%AC%EA%B3%BC-%EC%8B%A0%EC%95%99-%EA%B5%90%EB%A6%AC/</link>
<description><![CDATA[&nbsp; 이제 우리는 박형룡의 &#034;회심&#034;과 &#034;신앙&#034;의 교리를 비평할 것이다. 지금까지 박형룡의 구원론이 극단적 칼빈주의에 물든 것으로 비성경적임을 증명해 왔다. 이번 호에서 논할 부분은 죄인의 구원 자체가 어떻게 일어나는가에 대한 부분으로 역사적으로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등 서로 대립되는 주장들이 상존해 왔다. 죄인의 혼의 구원을 다루는 가장 첨예한 부분이기 때문에 그 실제적인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없다.<br/>&nbsp;<br/>박형룡의 회심과 신앙 교리<br/>&nbsp; 『바로 내소에서 사람은 자기 안에 하나님이 회심을 공작하시는 사실을 의식하게 된다. 진정으로 회심된 사람은 자기의 회심이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것을 느껴 안다... 하나님만이 능히 회심의 조성자로 칭호되실 것을 성경이 분명히 가르친다... 그러나 명심해야 될 것은 인생의 동작은 항상 사람의 속에 이미 있는 하나님의 사역의 결과라는 것이다... 구원하는 신앙은 선택받고 부름받은 중생한 죄인 안에 하나님의 사역이니 이것으로 죄인이 그리스도에게 접합되고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혜택들을 받아들이고 충용하며 시간과 영원에서 그에게 의지한다.』1) <br/>&nbsp; 박형룡은 하나님의 역사와 인간의 책임을 뒤섞어 버림으로써 죄인의 구원을 혼란스럽게 한다. 이것은 모든 칼빈주의자들의 오류이기도 하다. 쉽게 말해서 선택받은 죄인을 먼저 거듭나게 하시고 그 다음에 회개케 하시고 믿게 하신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죄인 안에서 그의 의지의 동의 없이 강제적으로 죄에서 돌이키게 하시고 복음을 믿게 하신다는 것이다. 박형룡이 이렇게 가르치는 것은 칼빈주의의 &#034;전적 타락&#034;의 교리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이 죄인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복음과 말씀에 반응할 수 있는 의지력을 상실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 거듭난 후에야 하나님의 역사로 회개할 수 있고 믿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죄인의 편에서는 회개할 필요도 믿을 필요도 없으며 설사 그렇게 하고 싶다 해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br/>&nbsp; 그렇다면 논쟁의 핵심은 아담의 타락 이후로 참으로 죄인들의 의지까지도 훼손당했느냐는 것이다. 박형룡과 그의 동료들은 죄인들이 의지를 행사할 수 없으며 &#034;하나님의 공작&#034;으로만 죄인이 회개할 수 있고 믿을 수 있다는 교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일종의 논리상의 술수를 쓴다. 다음은 박형룡의 이해에 따른 알미니안주의의 교리다.<br/>&nbsp; 『알미니안주의는 신앙을 하나의 행위로 만든다... 그리고 신앙은 갱신되지 아니하였으되 죄를 회오한 사람에 의해 창시된다고 해설한다. 하나님은 신앙을 창시하기로 작정하지 않으시고 오직 그것을 상주기로 작정하신다.』2)&nbsp; <br/>&nbsp; 박형룡은 알미니안주의가 믿음을 행위로 만들고 이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칭의가 주어진다고 믿는다고 주장한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주장이다. 박형룡은 자신의 교리가 옳게 보이게 하기 위해 알미니안주의를 자기 마음대로 왜곡하고 음해한 것이다. 그리고는 이러한 알미니안주의가 틀렸으니 그의 칼빈주의 교리가 맞다고 주장하는 허수아비의 오류를 범한다. <br/>&nbsp; 정말 알미니우스는 믿음이 행위이며 그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쳤는가?<br/><br/>알미니안주의의 회심과 신앙의 교리<br/>&nbsp; 다음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회개를 다루는 알미니우스(Jacob Arminius, A.D. 1560-1609)의 저작을 인용한 것이다. <br/>&nbsp;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일종의 언약의 방식으로 다루기를 기뻐하셨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조건 혹은 요구를 만족시켜 약속의 성취를 받는 것이다... 이러한 부르심을 받아들이는 모든 것 중에 가장 우선하는 것은 명백하게 믿음이다. 이 믿음으로 한 사람은 그것을 믿어 그가 그 조건을 충족시키면 그 약속을 누리게 되며, 만약 충족하지 않으면(믿지 않으면) 그는 약속된 것들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반대되는 악들이 그에게 미치게 되는 것이다.』3)<br/>&nbsp; 회개와 믿음의 부분에 관한 알미니우스의 주장은 평이하고 성경적이다. 즉 하나님께서 구원으로 죄인을 부르실 때 죄인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구원의 약속을 받는다는 것이다. 박형룡과 칼빈주의자들의 비방과 달리 알미니우스는 믿음이 행위이며 그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신다고 가르치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칼빈주의자들의 비난을 촉발하였는가? 계속 알미니우스의 주장을 들어보자.<br/>&nbsp; 『그렇다면 자유의지는 무엇을 하는가? 간단하게 답하자면 그것은 구원하는 일을 한다. 자유의지를 제거하면 구원받을 대상이 없어진다. 은혜를 제거하면 구원의 근원이 없어진다. 이 구원의 역사는 이 두 가지가 없으면 효력을 낼 수가 없다... 하나님은 구원의 창시자시며, 자유의지만이 구원받을 수 있게 한다.』4) <br/>&nbsp; 그렇다. 칼빈주의자들이 알미니안주의자들을 증오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죄인은 복음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는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는 칼빈주의자들에게는 거의 신성모독 행위에 가깝다. 왜냐하면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와 영광을 위해서는 인간은 전적 무능력과 의지력 상실 상태에 있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죄인이 감히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수 없다고 믿는다. <br/>&nbsp; 그러면 무엇인가? 박형룡이 주장하듯 회개와 믿음은 하나님의 &#034;공작&#034;인가, 아니면 알미니우스가 주장하듯 죄인의 선택인가?<br/>&nbsp; 먼저 자유 의지에 관해 성경이 말씀하시는 진리들을 살펴보자.<br/><br/>성경적 자유 의지<br/>&nbsp; 1) 인간의 의지는 본성이 아니라, 선택과 결정을 관장하는 혼의 기능이며, 인간을 하나의 인격체로 만드는 핵심적인 정신적 기능이다. 『이제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너희가 자원하고 순종하면... 너희가 거절하고 반역하면...』(사 1:18-20).<br/>&nbsp; 2) 아담의 타락으로 모든 사람은 죄성을 가진 죄인으로 태어나며 자신의 행위로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롬 3:9-20).<br/>&nbsp; 3) 죄인의 의지가 죄성에 의해 크게 영향받지만(시 51:5), 타락이 죄인을 무의지 혹은 선택 불능의 비인격체로 만든 것은 아니다(신 30:19, 요 7:17).<br/>&nbsp; 4) 하나님께서는 죄인으로 태어난 카인에게 올바르게 행할 것을 촉구하시며 『죄의 욕망이 네게 있으니,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명령하셨다(창 4:7).<br/>&nbsp; 5) 또한 하나님께서는 거듭남이 없는 구약에서도 노아, 아브라함, 모세, 이스라엘 백성, 여호수아, 다윗 등의 죄인들을 선택의 능력이 있는 인격체로 다루셨다.<br/>&nbsp; 6) 이는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결정과 결단을 촉구하신 사실에서 명백하게 알 수 있다.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날 너희가 택하라』(수 24:15), 『주가 하나님이시면 그를 따르라. 그러나 만일 바알이면 그를 따르라』(왕상 18:21).<br/>&nbsp; 7) 성경의 모든 명령과 권면과 초청과 조건적 언약들과 약속들과 축복과 저주는 수용과 거절, 믿음과 불신, 순종과 불순종 사이를 선택하는 자유 의지를 전제로 한다.<br/>&nbsp; 8) 인간의 자유 의지는 사람에게 주신 고유 권한이며(마 22:3; 23:37), 하나님께서는 동시에 사람이 의지를 사용한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물으신다(눅 14:24, 마 23:38).<br/>&nbsp; 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의지를 올바로 사용하여 하나님께 적극적인 믿음과 순종으로 나아오길 원하시며(대상 28:9), 의지가 사용 불능 상태에 있는 것은 마귀 들림의 직접적인 결과이다(마 17:15,18).<br/>&nbsp; 박형룡이 자유 의지를 부정했을 때 성경에 대한 무지를 자인한 셈이다.<br/><br/>성경적 회개와 믿음<br/>&nbsp; 이제 어떻게 죄인이 회개하고 믿어 구원에 이르는지 성경으로 살펴보자.<br/>&nbsp; 1)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복음으로 부르실 때 성령께서는 그에게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신다(요 12:32; 16:8).<br/>&nbsp; 2) 하나님께서는 죄인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들을 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을 주신다(엡 2:8, 롬 10:17).<br/>&nbsp; 3) 하나님께서는 죄인에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것을 명령하신다(행 20:21). 『이제는 어디에 살고 있는 어떤 사람에게도 회개하라고 명령하고 계시니라』(행 17:30).<br/>&nbsp; 4)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정하면 전능하신 주 하나님께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근거로 그를 구원하신다(행 13:39, 딛 3:5).<br/>&nbsp; 5) 믿음은 대가를 요구하는 공로가 아니며,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이 적용되는 방법 혹은 통로이다. 『은혜를 따라 되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되거니와』(롬 4:16).<br/>&nbsp; 6) 죄인의 구원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속죄 사역에 근거하며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위대하고 영원한 구원이다(요 10:28, 롬 6:23, 히 2:3; 5:9).<br/>&nbsp; 7) 그러나 그가 원하지 않고(요 5:40) 성령의 역사를 거역하며(행 7:51)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는다면 그는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살후 1:8,9).<br/>&nbsp; 8) 그러므로 죄인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지 거부할지의 결정은 그의 의지에 달려 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 『너희는 생명을 얻으려고 내게 오기를 원치 아니하는도다』(요 5:40).<br/><br/>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오류들<br/>&nbsp; 우리가 살펴본 성경 교리로 박형룡의 오류들과 알미니안주의의 오류를 지적하자면 다음과 같다.<br/>&nbsp; 1) 박형룡의 회개와 믿음에 관한 교리는 하나님을 절대주권의 신으로 만들어 영광을 돌린다는 미명 아래 죄인의 자유 의지를 박탈하여 인격성 자체를 말살한다. <br/>&nbsp; 2) 박형룡은 죄인이 자신의 의지로 회개하고 믿는 것을 하나의 &#034;행위&#034;라고 규정지음으로써 죄인들이 자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지 못하게 했다.<br/>&nbsp; 3) 박형룡은 이 나라의 장로교인들을 자신의 의지로 회개하고 믿지 않았으면서도&nbsp; 저항할 수 없는 은혜의 역사로 거듭났다고 착각하게 함으로써 &#034;창세 전에 택함받은 사람&#034;으로 여기다가 영원한 지옥으로 내던져지게 만들었다.<br/>&nbsp; 반면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자유 의지의 사용에 관해 올바른 견해를 취했다.<br/>&nbsp; 4) 그러나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일면 인간의 역할을 과도하게 강조하여 &#034;끝까지 견디고&#034; 행위가 있어야 구원이 보존된다는 거짓 교리를 유포했다.5)<br/>&nbsp; 요컨대 박형룡과 그의 동료들은 자유 의지로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통로임을 보지 못했고,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자유 의지로 받은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보존됨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br/><br/>결론<br/>&nbsp;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인들을 위하여 영생의 빵과 물을 예비해 놓으시고,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초청하신다. 그러나 박형룡은 영생의 식탁은 창세 전에 택함 받은 자들만을 위한 것이며, 불가항력적 은혜로만 그 식탁에 앉을 수 있으며, 강제적인 회개와 믿음으로 그 빵과 물을 입에 넣어주셔야 비로소 영생을 맛볼 수 있다고 가르쳤다. 박형룡은 자신의 교리의 맹독성은 보지 못하고 알미니안주의만을 &#034;마귀의 복음&#034;이라고 정죄했다. 성경적으로 판단할 때, 죄인들이 자원하여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수 없다고 가르치는 박형룡의 교리야말로 모든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를 모욕하고 지옥을 확장하기 위해 마귀가 교사한 &#034;다른 복음&#034;이다. 『그러나 우리뿐만 아니라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것 외에 어떤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으리라』(갈 1:8).&nbsp; BB<br/><br/>------------------------------------------------------------------------------------------------<br/>1) 박형룡, 『박형룡박사 저작전집 제5권』 (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2006), pp.219,216,217,245.<br/>2) 박형룡, pp.267,268.<br/>3) DISPUTATION #43 : ON THE REPENTANCE BY WHICH MEN ANSWER TO THE DIVINE VOCATION), &lt;Works of Arminius&gt;, Vol.2.(괄호 부분은 필자의 해설이다.) p.118.<br/>4) DISPUTATION #11 : &#034;ON THE FREE WILL OF MAN AND ITS POWERS RESPONDENT: PAUL LEONARDS&#034;, &lt;Works of Arminius&gt;, Vol.1, p.496.<br/>5) 예를 들어 존 웨슬리는 영접 당시에는 &#034;하나님의 종&#034;이 되어 하나님의 진노는 피할 수 있으나 끝까지 견디고 의를 행해야만 &#034;하나님의 아들&#034;이 된다고 설교했다. John Wesley, Sermon #106 &#034;On Faith,&#034; &lt;The Sermons of John Wesley&gt;, edited by Thomas Jackson.<br/>]]></description>
<dc:creator>지식뱅크 관리자</dc:creator>
<dc:date>Sat, 09 Apr 2016 20:10:45 +0900</dc:date>
</item>


<item>
<title>비성경적인 "신비적 연합"의 교리</title>
<link>https://www.biblemaster.co.kr/bb15/%EB%B9%84%EC%84%B1%EA%B2%BD%EC%A0%81%EC%9D%B8-%EC%8B%A0%EB%B9%84%EC%A0%81-%EC%97%B0%ED%95%A9%EC%9D%98-%EA%B5%90%EB%A6%AC/</link>
<description><![CDATA[&nbsp; 지난 호에서 우리는 박형룡의 &#034;구원의 서정&#034;을 검증하고 성경적으로 비평했다. 박형룡은 구원의 서정의 각 단계를 설명하기 전에 &#034;신비적 연합&#034;(unio mystica)의 교리를 가르친다. 즉 이 &#034;연합&#034;을 전제로 구원의 모든 역사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박형룡은 루이스 벌코프의 조직신학의 논의를 전제하다시피 했다. 따라서 우리는 박형룡과 벌코프의 교리를 함께 검증하고 비평할 것이다.<br/><br/>박형룡의 &#034;신비적 연합&#034;의 교리<br/>&nbsp; 먼저 &#034;신비적 연합&#034;이 무엇인가? 박형룡과 벌코프의 설명을 들어보자.<br/>&nbsp; 『심지어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구원 은혜의 첫 번째 복 자체도 중보자의 인격과의 연합을 이미 전제로 한다』(박형룡, p.97, 벌코프, p.694).1)<br/>&nbsp; 즉 죄인들이 구원받기 전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의 모종의 &#034;연합&#034;이 있다고 주장하며, 이 &#034;연합&#034;으로 인해 모든 구원의 &#034;영적 행복&#034;들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어질 논의에서 박형룡과 벌코프가 사용하는 &#034;백성,&#034; &#034;교회,&#034; &#034;몸&#034; 등은 모두 선택받은 죄인들을 지칭한다.2)<br/><br/>박형룡의 &#034;신비적 연합&#034;의 네 가지 방면<br/>&nbsp; 우리는 박형룡과 벌코프가 &#034;신비적 연합&#034;의 교리를 네 단계로 가르치는 것을 인용하여 간략히 비평하고, 이에 대한 성경적 교리를 제시할 것이다.<br/><br/>&nbsp; 1) 구속의 도모에서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의 언약적 연합<br/>&nbsp; 『영원계의 구속의 도모에서 그리스도와 그에게 성부께서 주신 백성들과의 언약적 연합이 있었다』(박형룡, p.100). 『평화의 의논 속에서 그리스도는, ... 자발적으로 선택받은 자의 머리와 보증이 되셨다』(벌코프, p.694). 『구속의 경륜에서 이렇게 그리스도의 의가 그의 백성에게 전가되는 것을 때때로 영원 전의 칭의라고 서술하기도 한다. 이 영원한 언약에서 그의 백성의 죄는 그리스도에게 전가되었고, 그의 의는 그의 백성에게 전가되었다』(벌코프, p.695).<br/><br/>&nbsp; 미국 칼빈신학교의 교수였던 루이스 벌코프와 총신대학교의 교장이었던 박형룡은 둘 다 자신의 교리를 증명하기 위해서 단 하나의 성경 구절도 인용하지 못했다. 창세전에는 그 어떤 선택받은 &#034;백성&#034;도 그리스도의 &#034;몸&#034;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거룩하신 그리스도와 선택받은 죄인들이 맺은 &#034;언약적 연합&#034;은 그 성경적 근거가 전무하다. 성경은 동일한 맥락에서의 &#034;평화의 의논,&#034;3)&nbsp; &#034;영원 전의 칭의,&#034;4)&nbsp; &#034;영원한 언약&#034;5)&nbsp; 등도 전적으로 부정한다. 『그들 가운데서 우리 모두가 이전에는 우리 육신의 정욕들 가운데서 행하였으며 육신과 마음의 욕망들을 이루어 다른 자들과 마찬가지로 본래 진노의 자녀였느니라』(엡 2:3).<br/>&nbsp;<br/>&nbsp; 2) 구속의 도모에서 관념적으로 성립된 유기적 연합<br/>&nbsp; 『첫 번째 아담처럼 마지막 아담은, 서로 아무 관련 없는 개인들의 연합이 아니라 그로부터 생명을 받고 영적인 유대로 연합되어 있으며 따라서 영적인 유기체를 구성하고 있는 남녀 모든 사람들의 몸을 대표했다. 교회인 이 몸은 관념적으로 이미 구원의 언약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형성되었으며, 이 연합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한 모든 복들이 그리스도가 대표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유기적 방식으로 전해질 수 있게 되었다』(박형룡, p.101, 벌코프, p.695).<br/>&nbsp;<br/>&nbsp; 무슨 말인가? 아담과 그의 후손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선택받은 죄인들 사이에도 &#034;유기적 연합&#034;이 있어서, 이들이 대표자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의 복들을 받았다는 것이다. 즉 박형룡과 벌코프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 죄인들이 구원받기 전부터 들어가 그분의 생명에 동참해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죄인들이 구원받아 성결하게 되지 않고 거룩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034;유기적 연합&#034;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일종의 신성모독이다. 『너희는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되어 있었고... 소망도 없고 세상에서 하나님도 없었느니라』(엡 2:12).<br/><br/>&nbsp; 3) 그리스도 안에서 객관적으로 실현된 생명의 연합<br/>&nbsp; 『그리스도는 이미 그의 백성들과, 보증인과 중보자, 머리와 대리자로 관계를 맺으셨기 때문에, 그들을 위한 구원의 공로를 세울 수 있었다. 모든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 포함되었다., 객관적으로 의미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였고, 그리스도와 함께 천상에 앉게 되었다』(박형룡, p.101, 벌코프, p.696).<br/><br/>&nbsp; 쉽게 말해서 선택받은 죄인들이 이미 그분과 연합한 그의 &#034;백성&#034;이며 그의 &#034;몸&#034;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구원의 공로를 이루셨다는 것이다. 벌코프도 박형룡도 지성과 영적 지각이 고장난 자들이다. 이들은 선택받은 백성을 위한 &#034;유기적 연합&#034;과 &#034;생명의 연합&#034;을 증명하기 위해 히브리서 2:13-15을 인용했다. 박형룡은 벌코프와 호형호제하며 어울리다가 그가 영적 소경임을 모르고 그의 논의와 증명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여 오류를 범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공로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보라. 『그러나 우리가 죽음의 고난 때문에 천사들보다 조금 낮아지신 예수를 보니,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도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기 위함이더라』(히 2:9).<br/><br/>&nbsp; 4) 성령의 사역에 의해 주관적으로 실현된 생명의 연합 <br/>&nbsp; 『신비적 연합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신앙적으로 영접한 결과라고 말하여 신앙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생적 관계에 들어가기 위하여 자기 자신의 힘으로 응수하여야 되는 조건인 듯이 표현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박형룡, p.102, 벌코프, p.696). 『보통 은혜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지 못한 사람들 따라서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향유될 수 있는 것이라면, 특별 은혜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에게만 부여되며 향유될 수 있는 것이다』(벌코프, p.694).<br/>&nbsp; <br/>&nbsp; 정리해 보자. 박형룡과 벌코프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선택받은 죄인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창세전부터 거룩하신 그리스도와 그들을 &#034;언약적 연합&#034;으로 유대를 맺으셨다. 더 나아가 선택받은 죄인들은 &#034;유기적 연합&#034;으로 그의 몸의 일부가 되었다.6)&nbsp; 이제 그리스도는 선택받은 죄인들을 위해서 구원의 공로를 이루시며, 이것이 객관적인 &#034;생명의 연합&#034;으로 그들에게 적용된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역사로 선택받은 죄인들은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 거듭나고 &#034;신앙&#034;을 부여받아 이 &#034;생명의 연합&#034;을 주관적으로 체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 전 과정을 &#034;신비적 연합&#034;이라 명명한 것이다. <br/>&nbsp; 이는 다만 박형룡과 벌코프의 교리일 뿐만 아니라, 찰스 핫지(Charles Hodge), 혹세마(Hoeksema), 존 질(John Gill), 아더 핑크(Pink), 칵크럴(Cockrell) 등의 칼<br/>빈주의자들이 공유하는 오류이기도 하다.7)&nbsp; <br/><br/>박형룡과 루이스 벌코프의 모순<br/>&nbsp; &#034;신비적 연합&#034;의 교리에서 창세전에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들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약을 맺으셨다는 대목부터가 칼빈주의자들의 순전한 상상에 불과하다. 박형룡과 벌코프의 교리는 성경과 대비해 볼 때 그 거짓됨이 여실히 드러난다.<br/>&nbsp; 1) 창세전에 그리스도와 선택받은 죄인들이 &#034;언약적 연합&#034;으로 연합하였다면 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는 말이다.<br/>&nbsp; 2) 이들은 아담이 타락할 때 아담 안에서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된다.<br/>&nbsp; 3) &#034;유기적 연합&#034;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공로에 있어서 다시 그분과 결합했다는 뜻이다.<br/>&nbsp; 4) 모든 사람이 죄 가운데 태어나기 때문에 이들 또한 진노의 자녀로서 다시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br/>&nbsp; 5) 마침내 성령의 저항할 수 없는 은혜의 역사로 이들은 다시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서 구원의 복들에 참여하게 된다.<br/><br/>&nbsp; 첫째, 이처럼 자주 택함받은 자들이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져 나갔다가 다시 결합하기를 반복한다면 어떻게 박형룡과 벌코프는 &#034;성도의 견인&#034;을 주장할 수 있는가?<br/>&nbsp; 둘째, 하나님께서 사탄의 영을 지닌 불결한 죄인들을 거룩하신 그리스도 안에 넣으셨다는 말이 되는데, 그렇다면 박형룡은 그의 신학 속에서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게 된 불결한 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br/>&nbsp; 셋째, 죽은 영을 가지고 태어난 죄인들이 거듭남이 있기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일원이 된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루이스 벌코프는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영적 사망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br/><br/>&nbsp; 박형룡과 벌코프 등이 알아야 할 것은 거짓 교리들을 체계적으로 기술하고 번호를 매겼다고 해서 &#034;조직신학&#034;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br/><br/>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<br/>&nbsp; 박형룡과 루이스 벌코프의 거짓 교리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바로잡아 보자.<br/>&nbsp; 1. 아담의 타락 이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까지 그리스도와 연합한 죄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롬 5:12, 고전 15:22, 엡 4:18; 2:1).<br/>&nbsp; 2. 영적 유기체로서의 그리스도의 몸의 기반은 십자가에서 마련되었다(엡 2:16).<br/>&nbsp; 3. 그리스도의 몸의 형성은 오순절부터 시작되었다(고전 12:13, 행 1:5; 2:1-4).<br/>&nbsp; 4.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들어가는 침례는 개별적으로 일어난다(롬 16:7, 갈 1:22).<br/>&nbsp; 5. 아담 안에 있는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을 때(갈 3:26), 성령의 역사로 그리스도의 몸 안에 들어오게 된다(갈 3:27).<br/>&nbsp; 6.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성도는 주님과 한 영이 되며(고전 6:17), 그 안에는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시며, 이것을 성경은 『신비』라고 부른다(골 1:27).<br/>&nbsp; 7. 이방인들이 복음을 통하여 유대인들과 더불어 그리스도 안에서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이 되며, 이것을 성경은 『신비』라고 부른다(엡 3:1-6).<br/>&nbsp; 8.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는 남편과 아내로 또한 머리와 몸으로 한 몸이 되며, 이것을 성경은 『신비』라 부른다(엡 5:28-32).8)<br/>&nbsp; 9.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은 들림받아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있게 되며, 이것을 성경은 『신비』라 부른다(고전 15:51-58).<br/>&nbsp; 위에서 논증한 것처럼 거룩하신 그리스도와 구원받은 성도들 간에는 거룩한 영적인 연합이 있다. 그러나 선택받은 죄인들과 연합한 그리스도는 없으며, 이러한 의미에서의 &#034;신비적 연합&#034;은 그 자체로 비성경적이며 비속하고 신성모독적이다.<br/><br/>결론<br/>&nbsp; 박형룡과 루이스 벌코프는 칼빈주의식 예정론과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 인한 중생의 교리를 이어주는 오류의 징검다리로서 &#034;신비적 연합&#034;의 교리를 발전시킨 것이다. 이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영적 하나 됨을 창세전으로 가져간 후, 단계별로 각색하여 그리스도와 소위 선택받은 죄인들 사이의 연합이 있었던 것처럼 신학적 알리바이를 만든 것이다. 얼마나 많은 한국의 장로교인들이 이 신학적 농간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자발적인 믿음 없이 짐짓 자신이 &#034;하나님의 백성&#034;이라 여기다가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졌는지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 <br/>&nbsp; 박형룡은 준엄하신 하나님의 심판에서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nbsp; BB<br/><br/>--------------------------------------------------------------------------------------------------------------<br/>1) 본 연구의 인용은 각각 『박형룡박사저작전집』(제5권) (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2006)과 『벌코프조직신학』 (서울: 크리스찬다이제스트사, 2005)에서 발췌했다.<br/>2) 박형룡의 &#034;신비적 연합&#034;의 기반은 철학적 결정론인 칼빈주의의 예정의 교리다. 성경적 예정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는 자는 누구나 자녀로 입양하시고 그분의 아들의 형상과 일치시키며 유업을 얻게 하실 것을 미리 정하셨다는 의미이다(롬 8:29,30, 엡 1:5,11).<br/>3) 『화평의 의논』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천년왕국 통치와 관련된 것이다(&#49852; 6:13). 벌코프는 다른 칼빈주의자들이 이 용어를 남용했음을 시인한 후 동일한 오류를 보란 듯이 반복한다(p.490,695).<br/>4) 『의롭게 하심』과 관련된 표현은 신약에서 41회 사용되었지만, 칭의는 &#034;보혈&#034;과(롬 5:9) &#034;믿음&#034;의 시기와 연결된다(롬 5:1). &#034;영원 전의 칭의&#034;는 성경교리도 신학도 아니며 허구일 뿐이다.<br/>5) 『영원한 언약』은 14회 이스라엘과의 언약을 말하며(창 17:7, 겔 37:26), 나머지 2회의 용례도 노아와의 언약(창 9:16)과 구원받은 교회에 적용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언약이다(히 13:20). 박형룡과 벌코프는 성경용어 남용으로 성경학자 혹은 성경교사로서의 자격 미달이다.<br/>6) 주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과 몸 된 교회와의 하나 됨을 말하는 모든 본문은&nbsp; 항상 구원을 전제로 한다(갈 3:26). 즉 구원받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죄인은 있을 수 없다(고전 12:12-27, 갈 3:26-28, 엡 1:15-23; 2:14-22; 3:1-6; 4:4-16; 5:23-32, 골 1:15-23; 2:9-19; 3:10,11,15).<br/>7) Laurence M. Vance, The Other Side of Calvinism (Pensacola, FL: Vance Publications, 1999), pp.360,363,364.<br/>8) 피터 럭크만, 『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에베소서』 (서울 : 말씀보존학회, 1997), pp.69-73,142.]]></description>
<dc:creator>지식뱅크 관리자</dc:creator>
<dc:date>Wed, 24 Feb 2016 08:57:41 +0900</dc:date>
</item>


<item>
<title>신유가 신약 교회의 “의식(儀式)”인가?</title>
<link>https://www.biblemaster.co.kr/bb15/%EC%8B%A0%EC%9C%A0%EA%B0%80-%EC%8B%A0%EC%95%BD-%EA%B5%90%ED%9A%8C%EC%9D%98-%EC%9D%98%EC%8B%9D%E5%84%80%E5%BC%8F%EC%9D%B8%EA%B0%80/</link>
<description><![CDATA[성경에 따르면, 주님이 신약 지역 교회에 부여하신 의식은 “주의 만찬”(고전 11:26)과 “침례”(벧전 3:21) 두 가지이다. 그러나 조용기 목사는 여기에 “신유”를 자의적으로 교회 의식의 범주에 포함시킨다.1)<br/><br/>&nbsp; 『교회에는 침례와 성찬과 신유 등의 의식이 있는데 이것은 교회가 끝 날까지 계속해야 할 의식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교회는 침례를 약식 수세로 바꾸고, 성찬은 1년에 한두 번으로 그치고, 병 고치는 신유의 의식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상태는 현대의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br/><br/>&nbsp; 신유를 신약 지역 교회의 핵심사역으로 보는 조목사는 신유에 ‘의식’의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조목사는 이어서 ‘신유 의식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br/><br/>&nbsp;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교회에 사도와 선지자와 교사와 능력과 병 고치는 은사 등을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고전 12:28). 정상적인 교회 안에서는 신유의 역사가 마땅히 나타나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지도자들은 적극적으로 이 임무를 완수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약 5:14). 당시의 장로는 오늘날 회중의 인도자가 되는 목사나 장로, 또는 성령과 말씀으로 충만한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이러므로 지상에서 교회가 존재하는 한 위와 같은 직분을 가진 자들은 병 고침의 은사를 받아 행할 수 있는 성경적인 권위와 이를 행해야 하는 성경적인 의무를 부여받은 자들입니다. 병 고침의 은사는 초대 교회 이후로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말세로 접어든 오늘날의 교회에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사모하는 자들에게 병 고침의 은사를 특별히 나타내고 계십니다. 교회는 이러한 은사가 충만히 나타나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며 그럼으로써 교회에 맡겨진 치료의 임무를 열심과 성실로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2)<br/><br/>&nbsp; 조목사가 지역 교회의 병 고치는 은사에 대한 근거로 삼은 고린도전서 12:28은 &lt;한글킹제임스성경&gt;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들이요, 둘째는 선지자들이요, 셋째는 교사들이요, 그 다음은 기적들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들이며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여러 가지 방언들이라.』 성령께서 이 구절에서 ‘교회’를 언급하신 것은 성도들이 모임을 갖는 교회건물을 지칭하신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바로 앞 27절에서 그 답을 얻을 수 있다. 『이제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개별적으로는 그 지체들이라.』 28절은 27절을 근거로 전개된 구절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 개별적인 지체들에게 각자의 역할이 분담되어 있다는 것이 28절의 논지이다. 즉 사도들과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세워지고, 기적들과 ‘병 고치는 은사들’이 주어지는 “교회”(28절)가 “그리스도의 몸”(27절)이라는 뜻이다.<br/>&nbsp; 그리스도인들이 지체를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에 관해서는 에베소서 5장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사람마다 항상 자기 육신을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육성하고 아끼기를, 주께서 교회에게 하심같이 하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몸과 그의 살과 그의 뼈의 지체임이라. 이런 까닭에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결합하여 그 둘이서 한 몸이 될지니라. 이것은 위대한 신비라.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에 관하여 말하노라』(29-32절).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것을 성경은 ‘교회’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과 살과 뼈의 지체로서 총체적인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 “교회”가 곧 그리스도의 몸인 것이다. 이 ‘교회’는, 흔히들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가시적인 교회건물이 아니라 거듭난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영적인 유기체이다. 고린도전서 12:28의 병 고치는 은사들이란 바로 이 영적인 유기체인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에게 주어졌던 은사를 일컫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 모든 것을 채우시는 분의 충만이니라.』(엡 1:23)는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으로서의 우주적인 교회에 주어진 은사들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br/>&nbsp; 그러나 조목사는 이것이 가시적인 지역 교회에 주어지는 은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병자에게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라고 명하는 야고보서 5:14을 인용하면서, 정상적인 교회라면 신유의 역사가 마땅히 나타나야 하고, 교회의 지도자들은 신유의 임무를 적극적으로 완수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조목사는 고린도전서 12:28에 나타나는 ‘교회’를 우주적인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 영적인 유기체로 보지 않고, 단지 개신교계에서 교회건물을 가리켜 남발되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라는 상투적인 표현을 답습하며 가시적인 지역 교회로 언급하였으며, 그 가시적인 지역 교회 내에 병 고치는 은사들이 주어진다는 식으로 고린도전서 12:28을 그릇 해석함으로 중대한 오류를 범한 것이다. <br/>&nbsp; 병 고치는 은사들을 가진 신유의 치유자들(divine healers)은 전체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사도들”뿐이었으며, 이들은 초대 교회 시대에만 존재했었다. 현 시대에 자신이 신유의 은사를 지녔다고 주장하며 기도원이나 각종 신유 은사 집회에서 병자들에게 안수하는 은사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몸과 무관한 이들이다. 그들의 신유의 은사가 성경적인 것이라면, 그들은 그런 곳들에만 머물지 말고 전국 종합병원들을 찾아다니며 환자들을 병상에서 일으켜서 우리 주님의 피흘리신 복음이 진리임을 확고히 하고 자신들이 “사도적 믿음”(apostolic faith)을 지녔음을 반대하는 자들에게 증명해야 할 것이나, 그들은 약 2천 년 전의 사도들과 같이 행하지 못한다.&nbsp; <br/><br/>&nbsp; 또한 위의 두 번째 인용부분에서 보는 것처럼, 조목사는 신약 지역 교회의 신유의식을 주장하기 위해 야고보서 5:14-16을 근거로 삼고 있다. 그는 위의 인용부분과 매우 유사한 내용을 그의 다른 책에도 기록하고 있다. <br/><br/>&nbsp;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교회에 사도와 선지자와 교사와 능력과 병 고치는 은사 등을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다(고전 12:28). 교회 안에서는 신유의 역사가 마땅히 나타나야 한다. 병 고침의 은사는 초대 교회 이후로 사라진 것이 아니다. 말세로 접어든 오늘날의 교회에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사모하는 자들에게 병 고침의 은사를 특별히 나타내고 계신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중간 생략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4-16). 당시의 장로는 오늘날 회중의 인도자가 되는 주의 종을 가리킨다. 그렇기 때문에 지상에서 교회가 존재하는 한 주의 종은 병 고침의 은사를 받아 행할 수 있는 성경적인 권위와 이를 행해야 하는 성경적인 의무를 부여받은 자들인 것이다.』3)<br/><br/>&nbsp; 위에서 보는 것처럼 조목사는 야고보서 5:14-16을 가시적인 지역 교회 내의 병 고치는 은사들에 대한 근거 구절로 삼고 있다. 그 근거 구절을 바른 성경인 &lt;한글킹제임스성경&gt;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장로들은 주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붓고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그가 죄들을 범했어도 그것들을 용서해 주시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서로 잘못들을 자백하고 치유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효과적이고 열렬한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br/>&nbsp; 위의 야고보서 구절들이 말씀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지역 교회 내에 병든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교회의 장로들(즉 목사들)을 청해야 한다(14절). 청함 받은 자리에 모인 장로들은 효과적인 기도를 위해서 서로 간에 있는 잘못을 낱낱이 자백하여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 한다(16절). 그리고 몸이 아파 누워 있는 성도를 위해 서로 열렬히 기도한다(16절). 교회의 장로들이 와서 서로 잘못을 자백하고 치유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면 그 믿음의 기도를 들으신 주님께서 병든 자를 일으키실 것이다(15절).<br/>&nbsp; 조목사는 이와 같은 내용의 야고보서 5:14-16을 근거로 하여 신유를 지역 교회가 실행해야 할 의식으로 가르치고, 또 자신도 그것이 ‘교회가 끝날까지 계속해야 할 의식’이기에 매주일 신유를 선포하고 있지만,4)&nbsp;  우리는 야고보서의 이 구절들이 “교회의 장로들이 병든 자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들은 그곳이 교회가 되었든 병원이 되었든 병자의 집이 되었든 청함을 받은 곳으로 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약의 지역 교회들이 성경의 명령을 근거로 하여 그들이 교회의 전통으로 정한 방식을 따라 정기적(定期的)으로 실행하는 주의 만찬과 침례와 같은 의식(儀式)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것으로, 그것은 시·공간적 임의성이 전제되어 있어 결코 신약 지역 교회의 의식(儀式)의 범주에 들 수 없는 실행인 것이다. <br/>&nbsp; 또한 야고보서 5장에 등장하는 신적 치유는 조목사가 주장하는 ‘신유의 은사’의 결과가 아니라, 서로의 잘못들을 자백하고 치유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는 장로들의 효과적이고 열렬한 “기도”에 주님이 응답하시는 것을 말하고 있다. 조목사가 현 교회 시대의 신유의 은사의 근거로 든 야고보서 5장의 그 구절들에는 교회의 장로들에게 신유의 은사가 주어진다거나, 그것을 갖도록 구해야 한다는 것을 언급하는 내용이 전혀 없다. 그 구절들은 병든 성도가 취해야 할 방법을 말하고 있을 뿐이며, 그의 청함을 받은 교회 장로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가르치고 있을 뿐이다. 주님이 치유하시기 때문에 신유인 것은 확실하지만, 결코 조목사가 주장하는 것처럼 ‘주의 종은 병 고침의 은사를 받아 행할 수 있는 성경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은 이를 행해야 하는 성경적인 의무를 부여받은 자들’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설령, 교회 장로들에게 신유의 의무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조목사처럼 자의적으로 매주일 의무감을 갖고 신유를 선포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병든 자에게서 청을 받는다면 성도의 요청에 거절하지 말고 가서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의무이다. 따라서 야고보서 5:14-16의 병 고침은 은사가 아닌 타 성도를 위한 기도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올바른 성경 해석이다. [필자는 성도들의 기도에 응답하시어 병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치유(Divine healing)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질병뿐만 아니라 다른 성도들의 질병을 위해서 기도하면 주님의 뜻 가운데서 치유해 주심을 믿는다. 하지만 질병을 얻게 되는 데에는 직간접적인 원인이 있다. 어떤 질병은 성도에게 주는 경고용도 있고, 어떤 것은 징계용도 있다. 본인의 부주의나 주변 환경 때문에 걸리는 병도 있다. 그러나 어떤 목사가 기도한다고 해서 모든 질병이 다 낫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도 시대가 끝난 현 신약 교회 시대에는 신유의 치유자(divine healer)가 존재하지 않는다.]<br/>&nbsp; 여기서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조목사가 야고보서 5장에 등장하는 ‘교회의 장로들’을 정의하는 부분이다. 그는 교회의 장로들이라는 동일 대상에 대해 서로 다른 두 책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br/><br/>&nbsp; 『당시의 장로는 오늘날 회중의 인도자가 되는 주의 종을 가리킨다.』5)<br/>&nbsp; 『당시의 장로는 오늘날 회중의 인도자가 되는 목사나 장로, 또는 성령과 말씀으로 충만한 성도들을 가리킵니다.』6)<br/><br/>&nbsp; 2001년에 출판된 첫 번째 인용문에서는 야고보서 5장 당시의 장로가 ‘오늘날 회중의 인도자가 되는 주의 종’이라고 한 반면, 그 후년도인 2002년에 출판된 두 번째 인용문에서는 ‘오늘날 회중의 인도자가 되는 목사나 장로, 또는 성령과 말씀으로 충만한 성도들’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조목사가 주장하는 신유의 은사를 받을 수 있는 대상을 ‘회중의 인도자가 되는 주의 종,’ 곧 목사에서 ‘성령과 말씀으로 충만한 성도들’로 확대했음을 보여 주는데, 이는 첫 번째 인용부분만을 가지고는 조목사가 주장하는 그 신유의 은사를 지역 교회 내에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br/>&nbsp; 그러나 목사는 성경에서 ‘장로’(elder) 또는 ‘감독’(bishop)으로 불리며, &lt;스코필드주석성경&gt;을 집필한 C.I. 스코필드는 이 직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br/>&nbsp; 『장로(프레스뷔테로스)와 감독(에피스코포스=감독자)이라는 말은 같은 직분을 나타내는데... 전자는 그 사람을 언급하는 것이고 후자는 그 직분의 임무를 언급하는 것이다.』7)<br/><br/>&nbsp; 성경에서 목사를 부르는 명칭은 감독(bishop, 딤전 3:1), 장로(elder, 딤전 5:17), 목사(pastor, 엡 4:11) 세 가지이다. 사도 요한도 자신을 장로라 불렀고(요이 1, 요삼 1), 베드로도 자신을 장로라 불렀다(벧전 5:1).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장로 직분은 에베소서 4:11의 “목사”이다. 그러나 개신 교회의 직책으로서의 장로는 교회에서 어른으로 대접받는 사람들일 뿐이다. 성경대로 믿는 침례교회에는 그런 장로 직분이 없다. 목사가 곧 장로이기 때문이다. 다만 감독과 장로와 목사라는 칭호 중에 목사라는 칭호를 쓰는 것이다. 조목사는 장로에 관한 올바른 성경적 개념을 정립하지 못한 채 야고보서 5장의 ‘교회의 장로들’을 정의하려다 오류를 범한 것이다.<br/><br/>&nbsp; 지금까지 성경을 통해 살펴본 것처럼, 신약 교회 시대에는 신유가 교회의 ‘의식’이 될 수 없다. 교회와 무관한 일을 교회의 의식이라며 행하는 곳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교회가 아님을 알도록 하자.&nbsp; BB<br/>주석)---------------<br/>1)&nbsp; 조용기, 『오중복음과 삼중축복』 (서울: 서울말씀사, 2002), p.164.<br/>2) 위의 책, pp.164-165.<br/>3) 조용기, 『신유론』 (서울: 서울말씀사, 2001), pp.51-52.<br/>4) 위의 책, p.49.<br/>5) 위의 책, p.51.<br/>6) 조용기, 『오중복음과 삼중축복』, p.164.<br/>7) 『스코필드주석성경』 (서울: 말씀보존학회, 1994), “신약,” p.351.]]></description>
<dc:creator>지식뱅크 관리자</dc:creator>
<dc:date>Tue, 02 Feb 2016 10:51:03 +0900</dc:date>
</item>


<item>
<title>성찬식과 침례식에  "신유의 효과” 가  있는가?</title>
<link>https://www.biblemaster.co.kr/bb15/%EC%84%B1%EC%B0%AC%EC%8B%9D%EA%B3%BC-%EC%B9%A8%EB%A1%80%EC%8B%9D%EC%97%90-%EC%8B%A0%EC%9C%A0%EC%9D%98-%ED%9A%A8%EA%B3%BC-%EA%B0%80-%EC%9E%88%EB%8A%94%EA%B0%80/</link>
<description><![CDATA[신약 교회에 주어진 두 가지 의식은 주의 만찬과 침례식이다. 주의 만찬은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침례식은 베드로전서 3장에서 발견되며, 이 두 의식은 교회가 휴거될 때까지(살전 4:16,17)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신약 교회의 이 두 가지 의식에 “신유의 효과”가 있다는 말은 많은 이들에게 무척 생소한 개념으로 들릴 것인데,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는 두 의식에 신유의 효과가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br/><br/>1. “성찬식의 신유 효과”에 대한 반론<br/>&nbsp; 조목사는 &lt;신유론&gt;의 ‘4) 교회 의식’ 편에서 성찬식과 침례식에 신유의 효과가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우선 성찬식(이하 주의 만찬)에 관한 그의 글을 보도록 하자. <br/><br/>&nbsp; &#65378;성찬 예식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내어 주신 예수님의 몸과 흘려 주신 피를 통해서 죄사함과 치료를 실제적으로 체험하는 놀라운 은혜의 사건이다. 우리는 죄인들을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하신 주님을 기념할 때 주님의 사랑과 치유의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 따라서 성찬식은 우리에게 죄용서라는 영적 치유와 더불어 죄의 영향으로 말미암은 마음의 상처와 육체적 질병을 치유하는 장이 된다. <br/>&nbsp; 성찬 예식은 모든 믿는 자에게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게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체험케 한다. 즉 성찬을 통해 성도는 영적인 새로움과 회복 그리고 온전함에 대한 믿음과 기대를 얻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성찬 예식을 통해 치유함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찬 예식은 하나님의 구원과 치유의 은혜가 흐르는 가장 중심적이고 풍요로운 예식이기 때문이다.&#65379;1)<br/><br/>&nbsp; 조목사가 성찬 의식에 관해 가지고 있는 기본 개념은 그것이 주님을 기념하는 의식이라는 것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의 만찬을 행하여 주님을 기억하라고 하셨기 때문에(눅 22:19)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성찬 의식의 기념적 의미에 덧붙여진 죄사함과 치유의 교리이다. 조목사는 성찬 의식을 ‘죄사함과 치료를 실제적으로 체험하는 놀라운 은혜의 사건’으로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성찬 의식을 ‘죄용서라는 영적 치유와 더불어 죄의 영향으로 말미암은 마음의 상처와 육체적 질병을 치유하는 장’으로 가르치는 것이다.<br/>&nbsp; 성찬 의식이 죄용서라는 영적 치유의 장이라는 주장은 성도가 그 의식에 참여하기에 앞서 주님께 죄를 자백함으로 스스로를 의식에 참여하기에 합당한 거룩한 상태로 만드는 개념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조목사가 그것을 죄사함을 ‘실제적으로 경험하는’ 동시적 사건으로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것은 성도가 성찬 의식에 ‘참여함으로써’ 죄사함을 얻게 된다는 것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조목사가 성찬 의식을 통해 치유를 받는 것을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을 통해 우리는 그가 성찬 의식의 물리적 치유 효과를 믿고 있음을 알 수 있다. <br/>&nbsp; 또한 조목사는 성찬 의식을 통한 죄용서로 영적 치유가 일어난다면, 그 죄의 영향으로 생겨난 마음의 상처와 육체적 질병 또한 치유된다고 한다. 이것은 죄인이 죄에서 구원을 받을 때 ‘육체의 치유’까지도 보장을 받는다(몸의 구속이 일어난다)는 그의 ‘전인구원론’의 밑바탕이 되는 사상이다. 2)&nbsp; 그러나 전인구원론이 비성경적인 교리이며 죄인의 구원과 육체의 치유가 필수적으로 동반되는 사건이 아니라는 것은 이전에 이미 살펴보았으므로, 여기서는 성찬 의식이 죄사함을 실제적으로 경험하는 은혜의 사건이라는 주장을 성경을 통해 분석하는 일만 남아 있을 뿐이다. 성찬 의식에 죄사함의 효과가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밝혀진다면, 그 교리를 바탕으로 한 성찬 의식의 후속적 신유 효과 또한 비성경적이라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br/>&nbsp; 성경은 성찬 의식에서 떼는 빵과 마시는 잔에 죄사함이 아닌 “선포”의 의미가 있다고 말씀한다. 『너희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분이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이라』(고전 11:26). 선포의 내용은 바로 “주님의 죽으심”이다. 떼는 빵은 주님의 찢겨진 육체를 의미하고, 마시는 잔은 그분이 죄인들을 위해 흘리신 피를 상징한다. 육체가 찢겨지고 피를 흘리셨다는 것은 주님의 죽으심을 뜻하는 것으로, 신약 교회 시대의 성도들은 주님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이 두 가지 상징물로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br/>&nbsp; 주님의 경우로 보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떼어 주시던 빵에 대해서는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쪼개진 나의 몸』(고전 11:24)이라고 하셨고, 식후 제자들에게 주신 잔에 대해서는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새 언약의 피』(막 14:24)라고 하셨다. 따라서 성찬 의식을 통해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한다는 것은 그분이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몸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셨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br/>&nbsp; 신약 교회의 “의식”으로서의 성찬에 대한 언급은 위의 고린도전서 11장에서만 발견되는데, 이처럼 성경은 성찬 의식에 대해 죄사함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고 있으며, 오로지 그 의식이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것을 “선포”하는 의식이라는 것만을 말씀하고 있을 뿐이다. <br/>&nbsp; 다만 성찬 의식이 육체의 질병과 가지는 유일한 관계는 그것에 참여하는 자가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합당치 않게 먹고 마셨을 때”이다. 『사람이 자신을 살펴보고 나서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셔야 하리니 이는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의 저주를 먹고 마시는 것이기 때문이라. 이 때문에 너희 가운데 많은 사람이 약하고 병들었으며 상당수가 잠들었느니라』(고전 11:28-30). 29절의 “주의 몸”이란 성찬 의식에서 쓰는 빵이 실제적인 주님의 몸이라는 뜻이 아니라, 모든 구원받은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형성하는 한 몸, 즉 교회를 말한다.3)&nbsp;  이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만찬을 통하여 교제를 나눌 때, 이에 참여하는 자들 모두는 그것이 주님의 거룩한 몸임을 분별하여 죄로부터 정결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br/>&nbsp; 즉, 의식에 참여하기 위해 모인 성도들로 말하자면, 그들은 주님의 죽으심으로 구원받은, “주님의 몸”을 구성하는 거룩한 지체들인데, 바로 그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찢겨진 주님의 몸과 흘리신 피를 기억하는 소중한 의식에 죄를 가진 채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치 못한 상태에서 참여하면 “주님의 몸”에 모독을 가하는 일이라는 것이며, 성경은 그러한 자들이 성찬 의식에 참여하면 자신의 저주를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일상 삶 가운데 죄를 짓고도 스스로를 살피고 회개하여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징계를 받는데, 하물며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신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라고 주님께서 친히 정하신 교회의 의식에 참여하면서 죄를 숨기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실 것이다. 성경은 주님의 몸 된 성도들의 거룩한 모임을 분별하지 못하고 죄를 지닌 상태로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약하고 병들기도 하며, 심지어는 죽기도 한다고 말씀한다. 성찬 의식에 대해 “성경은” 질병의 치유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하면 병들고 죽는다는 것만을 말씀하고 있다. <br/><br/>2. “침례식의 신유 효과”에 대한 반론&nbsp; &nbsp; &nbsp;  <br/>&nbsp; 조목사가 교회의 의식의 신유 효과를 주장하기 위해 내세운 두 번째 의식은 침례이다. <br/><br/>&nbsp; &#65378;성도는 침례를 통해 죄에 대해 죽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서 새 생명을 소유하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성도는 이제 그리스도의 생명감으로 충만하게 되며 건강과 치유의 은혜를 누리게 된다. 침례는 그 자체에 죄사함이나 구원의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단순한 의식이나 예식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침례를 통해 성도는 죄책감을 치유 받고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게 됨을 확인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침례 받은 성도는 영적인 건강은 물론 정신적, 육체적으로도 건강을 얻게 된다.&#65379;4)<br/><br/>&nbsp; 위의 인용된 글은 ‘침례’라는 동일 대상에 대하여 내용상 상호 불일치를 보이고 있기에 글 자체로 커다란 모순을 지니고 있다. 조목사는 “성도는 침례를 통해 죄에 대해 죽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서 새 생명을 소유하게 된다.”고 하면서도 “침례는 그 자체에 죄사함이나 구원의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성경적으로 보면, 전자는 침례로 구원을 받는다는 내용인 반면, 후자는 침례에 죄사함이나 구원의 능력이 없다고 말하고 있어 조목사가 무엇을 말하려고 한 것인지 독자로 하여금 혼동을 일으키게 한다. 전자가 침례 구원론에 해당한다고 단언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다”는 표현이 죄인의 구원에 관한 직접적인 서술이기 때문이다. <br/>&nbsp; 하지만 조목사가 “침례는 그 자체에 죄사함이나 구원의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침례를 통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려 한 것은 아님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결론은 성경적인 용어들에 대한 개념이 정립되어 있지 않다는 데에 이를 수밖에 없다. 조목사는 신유에 있어서 침례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죄인의 변화됨과 관련된 성경적 용어들을 무분별하게 나열한 탓에 침례를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전체 내용상 모순을 일으키는 글을 쓰고 만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침례와 관련하여 어떤 용어를 썼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가 침례가 인간의 죄 문제에 모종의 영향을 끼치고 거기에 신유의 효과가 동반된다고 말했다는 데 있다.<br/>&nbsp; 성경은 침례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이제 우리를 구원하는 모형이니, 곧 침례라. (이것은 육체의 더러움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응답이라)』(벧전 3:21). 실제적인 물침례와 관련된 이 구절은 침례를 단순히 “모형”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육체의 더러움조차 제거할 수 없는 “모형”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근거가 되는 모형으로서 그분이 우리의 죄로 인해 죽고 장사되고 삼 일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믿고 있음을 침례라는 “모형”으로 하나님께 보여드리는 것이다. <br/>&nbsp; 베드로전서의 그 구절에 따르면, 이 침례 행위는 “선한 양심”이 없는 사람은 결코 행할 수 없는 의식임을 알 수 있다. 이유인즉, 선한 양심은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후에 생기는 양심이기 때문이다. 『정결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정결하나 더럽혀진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정결한 것이 없고, 도리어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다 더럽혀져 있느니라』(딛 1:15).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을 통하여 흠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죽은 행실에서 너희 양심을 정결케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죄인의 더럽혀진 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케 된다. 이로써 죄인의 악한 양심이 선한 양심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선한 양심을 갖게 된 사람은 이미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되고 부활했음을 침례라는 “모형”을 통해 하나님께 보여드리는 것이다. 이처럼 구원받은 성도의 선한 양심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침례는 그것을 죄인이 구원받은 후에만 실행할 수 있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죄인이 침례를 통해서 구원받는다는 교리는 결코 성립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모형에 불과한 침례에는 구원의 본질도 실체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구원하는 실질적 기능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침례가 죄인의 구원과 관련하여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죄에 대해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침례는 조목사의 주장과는 달리 죄책감을 치유 받는 기능도,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게 됨을 확인하는 기능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는 결코 영적인 건강과 정신적, 육체적 건강도 얻을 수 없다.&nbsp; BB<br/>주석)--------------------<br/>1) 조용기, 『신유론』 (서울: 서울말씀사, 2001), pp.90-91.<br/>2) 위의 책, pp.70-71; 조용기, 『오중복음과 삼중축복』 (서울: 서울말씀사, 2002), p.143.<br/>3) Peter S. Ruckman, 『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고린도전서』 (서울: 말씀보존학회, 1999), p.263.<br/>4) 조용기, 『신유론』, p.91.]]></description>
<dc:creator>지식뱅크 관리자</dc:creator>
<dc:date>Sun, 31 Jan 2016 18:06:11 +0900</dc:date>
</item>


<item>
<title>늦은 비가 20세기 성령운동인가?</title>
<link>https://www.biblemaster.co.kr/bb15/%EB%8A%A6%EC%9D%80-%EB%B9%84%EA%B0%80-20%EC%84%B8%EA%B8%B0-%EC%84%B1%EB%A0%B9%EC%9A%B4%EB%8F%99%EC%9D%B8%EA%B0%80/</link>
<description><![CDATA[지난 호에 이어서 조용기 목사가 20세기 성령의 운동의 근거로 제시하는 “늦은 비” 사역에 대해 알아 보고, 사도 바울이 로마서 15장에서 그의 사역에 함께했다고 증거하는 “하나님의 영의 능력”에 대한 조목사의 신유 해석을 성경적으로 짚어 보기로 하자.<br/>&nbsp;<br/>1.&nbsp; “늦은 비”가 오순절 은사주의자들의 20세기 성령의 운동인가? <br/>&nbsp; 순복음 교단의 국제신학연구원이 편저한 &lt;하나님의 성회 교회사&gt;의 1998년 초판 인쇄 당시 동신학연구원 원장이었던 이영훈 목사는 책의 발간사에서, 20세기 초 미국을 중심으로 해서 일어난 늦은 비 성령의 운동의 역사는 오늘날 전 세계에 파급되어 초대 교회 오순절 성령 강림과 종교 개혁 운동을 뒤이은 ‘제3의 종교 혁명’이라고 불릴 정도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기술했다. 1)&nbsp; 그가 발간사에서 처음부터 강조한 것은 ‘늦은 비’ 성령의 운동의 역사라는 것인데, 동서(同書)의 격려사에서 조용기 목사는, 늦은 비 성령의 역사는 오늘날 전 세계 곳곳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는데, 이러한 성령의 운동은 과거 기독교회사에서 잠시 나타났다 사라진 수많은 운동들처럼 신앙 생활의 어느 한 면만을 강조하다가 그친 일시적인 운동이 아니라면서 2)&nbsp; ‘늦은 비’에 해당한다는 20세기 오순절 성령의 운동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br/>&nbsp; 조목사를 위시한 순복음 오순절주의자들이 위와 같이 그들의 성령의 운동의 ‘성경적’ 근거로 즐겨 사용하는 ‘늦은 비’라는 표현은 야고보서 5:7, 요엘 2:23, 호세아 6:3, 신명기 11:13,14, 예레미야 3:3에 등장한다. 특히 그들이 20세기 성령의 운동의 주요 교리적 근거로 삼는 구절은 야고보서 5:7인데,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오실 때까지 인내하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받을 때까지 오래 참나니』 이 구절은, 『주께서 오실 때까지 인내하라.』는 말씀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듯, 명백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된 구절이다. 이어지는 8절에서도 『너희도 인내하며 마음을 견고케 하라. 주의 오심이 가까움이라.』며 문맥이 재림과 관련되어 있음을 확증해 주고 있다. 여기서 언급되는 ‘늦은 비’는 동일 구절 내의 ‘이른 비’와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것이다. <br/>&nbsp; 그러나 오순절주의자들은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따로 분리하여, ‘이른 비’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고, ‘늦은 비’는 조용기 목사가 말하듯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전 세계 곳곳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는 성령의 운동’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이 오순절주의자들은 야고보서 5:7을 요엘 2장과 연결시켜 교회 시대의 성도들이 성령의 능력을 받는 것으로 해석하지만, 요엘 2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있게 될 이스라엘의 회복과 관련된 구절이며, 3)&nbsp; 야고보서의 그 구절 역시 그들이 교회 시대에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하는 성령의 운동을 지칭하고 있지 않다.<br/>&nbsp; 말하자면, 야고보서의 ‘이른 비’와 ‘늦은 비’는 명백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만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하여 “비”를 언급하고 있으며, 주님의 재림을 예언하는 사무엘하 23:4은 그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그리하면 그가 해 돋을 때의 아침 빛같이 되리니, 곧 구름 없는 아침 같겠고, 비 온 후에 맑게 반짝임으로 땅에서 돋아나는 연한 풀잎 같으리라.』 예수 그리스도는 ‘태양’이시다(말 4:2). 그리고 교회 시대는 밤이므로(막 13:35, 롬 13:12) 교회 시대가 막을 내린 뒤 오시는 주님의 재림은 천년왕국을 시작하는 새로운 아침이다. 따라서 사무엘하 23:4의 “해 돋을 때의 아침 빛”은 온 세상을 의로 통치하기 위해 7년 대환란 후 지상에 재림하시는 우리 주님의 찬란하신 모습을 묘사하는데, 이 구절에서 천년왕국이 시작되는 아침에 대해 “구름 없는 아침”이라고 한다는 점과, 천년왕국을 수립하기 위해 재림하시는 주님을 “비 온 후에 맑게 반짝임으로 땅에서 돋아나는 연한 풀잎”이라고 묘사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즉 이 “비”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선행되는 문자적인 “비”를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br/>&nbsp; 또한 전체 서른다섯 구절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언하고 있는 시편 68편4)&nbsp; 역시나 주님의 재림과 관련하여 “비”를 언급하고 있다. 『오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흡족한 비를 내리시어 주의 유업이 곤비할 때에 주의 유업을 견고하게 하셨나이다』(9절). 이 구절은 교회 시대가 끝난 후인 7년 대환란 기간에 적그리스도의 박해로 곤비함 가운데 놓여 있던 이스라엘에게 그들의 고난이 끝났음을 알리는 표적으로서의 비를 말씀하는 것이다. 5)<br/>&nbsp; 오순절주의자들은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시간적 간격이 약 2천 년이 된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이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성령 사역을 뒷받침하기 위해 즐겨 사용하는 요엘은 두 계절에 내리는 이 비들이 같은 달에 한꺼번에 내린다고 말씀한다. 『...또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려 주시되,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첫달에 내리게 하실 것임이라』(욜 2:23).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아마겟돈 전쟁과 천년왕국을 다루는 요엘에 속한 이 구절이 뜻하는 것은, 대환란이 곧 끝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것이라는 것이 한 달 동안 내리는 상당량의 비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표적으로 주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특히 호세아 6:3은, 『그의 나오심은 아침처럼 마련되어 있으며 그는 우리에게 비처럼 오시리니, 땅에 내리는 늦은 비와 이른 비처럼 오리시라.』에서 보는 것처럼, 주님의 재림과 관련하여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순서를 바꿔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재림에 선행되는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순서와 관계없이 한 달 동안 한꺼번에 내릴 것임을 말해 준다. <br/>&nbsp; 따라서 야고보서나 요엘 등에서 언급하는 ‘이른 비’와 ‘늦은 비’는 교회 시대의 성령 사역과는 무관한 것이며, 그것이 대환란이 끝났음을 알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선행하는 많은 양의 문자적인 비라는 것이 오순절 은사주의자들의 ‘늦은 비’와 관련하여 성경이 스스로 해석해 주는 내용이다. 조용기 목사를 위시한 오순절주의자들의 20세기 성령의 운동은 ‘늦은 비’와 관련하여 그 성경적인 근거가 전무한 비성경적인 운동이며, 근본이 비성경적인 조목사의 신유론은 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br/>2. 사도 바울이 복음 증거를 위해 사용했다는 신유의 은사<br/>&nbsp; 조목사는 사도 바울이 복음과 관련해 사용한 신유의 은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br/>&nbsp; 우리는 구원과 신유의 은사를 동시에 받아들이기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이면 병 고침도 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주장합니다... 사도 바울도 복음 증거와 함께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오히려 그 일로 인하여 복음 증거를 성공적으로 할 수 있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롬 15:17-19). 이러므로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이 병 고침의 은사를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마땅히 사용하여야 할 것입니다.6)<br/>조목사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성령의 능력”이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분명 그것은 그가 인용한 로마서 15:18에 등장하는 다음의 내용을 두고 하는 이야기일 것이다.&nbsp; <br/>&nbsp;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시려고 나를 통하여 이룩하신 것들 외에는 어떤 것도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겠노라. 그것들은 말과 행위로, 능력있는 표적들과 이적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의 능력으로 이룩하신 것이니라』(롬 5:18).<br/>&nbsp; 조목사의 강조점은 개역성경에 기록된 “성령의 능력”에 있는데, 즉 “표적들과 이적들”과 “하나님의 영의 능력”을 말하고자 함이 분명하다. 그는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여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는 일에 성령의 능력을 통한 표적들이 행해졌음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여 순복음 은사주의에서 나타나는 비성경적인 신유나 방언 현상을 정당화하려는 것이다. 사실 바울이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려고 표적들과 이적들을 사용했다는 내용은 순복음을 신약 교회 시대의 교리로 내세우기에 매우 합리적이고 적합한 근거가 아닐 수 없다. 이 구절을 바울의 사역과 관련된 전체 맥락에서 보지 않는다면 그런 오류에 빠지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 순복음 신유론은 바울의 사역 대상이 유대인에서 이방인으로 옮겨간 것을 적용할 줄을 모른다. <br/>&nbsp; 바울이 18절에서 자랑스럽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것』, 즉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통하여 행하신 『말과 행위』, 『표적들과 이적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의 능력으로 이룩하신 것』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통하여 행하신 이 모든 것들은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시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 물론 바울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능력있는 표적들과 이적들』은 유대인들을 위한 표적들과 이적들이다. 바울은 비록 이방인들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어도 그의 사역 초기에는 유대인의 사도로서 이러한 표적들과 이적들을 행하였다. 그가 그리스도의 복음과 관련하여 『첫째는 유대인에게요』(롬 1:16)라고 말한 것은 바울 자신의 복음 전파 사역의 처음 대상이 유대인들이었음을 뜻한다.<br/>&nbsp; 적어도 사도행전 기간 중에는 하나님께서 주로 유대인들을 다루고 계셨기 때문에 유대인 사도들에게는 표적들과 이적들이 주어진 것이며, 바울 역시 유대인 사도였기 때문에 이러한 표적들과 이적들을 한시적으로 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더 이상 상대하시지 않게 되었을 때 유대인 사도들에게 주어졌던 표적들과 이적들은 모두 철회되고 말았다.7)<br/>&nbsp; 바울이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는 일에 표적들과 이적들을 언급하는 것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것들을 사용했다는 말이 아니라, 그의 사역 초기에 대유대인 사역에 쓰였던 표적들과 이적들이 궁극적으로는 이방인들을 복음에 순종하게 하는 복음 전파 사역에 전초가 되었다는 뜻이다. 주님이 바울을 통하여 이룩하신 모든 것은 “말과 행위”로 이룩되기도 했고(행 9:20-22; 13:14-43; 14:21, 고전 15:10, 빌 4:8,9), “표적들과 이적들”로 이룩되기도 했으며(행 14:3,8-10; 20:6-12, 고후 12:12), “하나님의 영의 능력”으로 이룩되기도 했다(고후 13:4, 살전 1:5). 바울은 주님이 그를 통하여 이룩하신 그러한 모든 일이 궁극적으로는 이방인들의 순종을 가져왔음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br/>&nbsp; 이 사실은 그가 로마서 15:18의 다음 구절인 19절에서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루리쿰 근방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전히 전파하였노라.』고 한 데서 더 밝히 드러난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 범위를 언급하기 위해서 대유대인 사역의 본거지인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이 흩어져 살고 있던 소아시아의 마케도니아 지역까지 포괄하고 있다. 로마서의 기록 연대는 바울이 로마로 끌려가기 전인 A.D. 60년으로, 그는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들에게로 보내지기 전에(행 28:28) 로마서 15:18,19에서 자신의 복음 전파 사역을 짧지만 총괄적으로 회고하고 있는 것이며, 그 모든 사역 가운데 주님께서 『말과 행위』와 『표적들과 이적들』과 『하나님의 영의 능력』으로 바울을 통해 이룩하신 것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가운데 표적들과 이적들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br/>&nbsp; 또한 조목사는 『하나님의 영의 능력』, 곧 성령의 능력을 『표적들과 이적들』에만 국한시켜 순복음의 병 고침 현상을 뒷받침하려 했지만, 로마서의 그 본문은 『말과 행위』와 더불어 이 셋을 따로 분리시키고 있다. <br/>&nbsp; “성령의 능력”과 병 고침을 습관적으로 결부시키는 것은 성령의 능력을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은 주님을 증거하는 일에 나타나며(행 1:8), 병 고침의 은사들이 중단된 현 교회 시대에는 주님이 증거되는 곳에서 치유의 표적 없이 나타난다.&nbsp; <br/>&nbsp; 따라서 로마서 15:18에서 바울이 언급한 “표적들과 이적들”은 사도행전의 과도기가 끝나고 사도의 표적들이 중단된 후의 현 교회 시대 복음 전파 사역과는 무관한 것들로서, 이것을 순복음식 신유론처럼 현재의 복음 전파에 적용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일이다.&nbsp; BB<br/>주석)-----------------------<br/>1) 이영훈, 『발간사』, 『하나님의 성회 교회사』 (서울: 서울말씀사, 2005).<br/>2) 위의 책.<br/>3) 오순절주의자들이 행 2:17-21과 더불어 그들의 성령의 운동의 근거로 삼고 있는 욜 2:28-32은 7년 대환란이 끝나기 직전 “피와 불과 연기 기둥들과 같은 하늘들과 땅의 이적들”이 있고(30절), “해가 흑암으로, 달이 피로 변하고 주의 위대하고 두려운 날이 이른”(31절) 뒤 있게 될 이스라엘의 구속과 회복과 관련 있는 구절들이다. 요엘의 이 두려운 현상은 사도행전 2장에서 조금도 성취되지 않았다. 그러나 오순절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직결된 요엘 2장의 전체 문맥을 무시하고 그것을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과 직접 연결시킴으로써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들은 요엘 2장의 그 일들이 사도행전 2장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가 “이것”(행 2:16)이라고 말한 것은 앞선 1-6절의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 요엘이 예언한 “마지막 날들에 있을 일들”(17-20절)에 대해 말하려고 한 것인데, 그들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소선지서(말씀보존학회, 2004)와 사도행전(말씀보존학회, 1997)을 참조하기 바란다. <br/>4) 피터 S. 럭크만, 『피터럭크만의 주석서 시편』, 박종률 역, (서울: 말씀보존학회, 2002), p.322.<br/>5) 피터 S. 럭크만, 『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히브리서』, 김기준 역, (서울: 말씀보존학회, 2000), p.123.<br/>6)&nbsp; 조용기, 『오중복음과 삼중축복』 (서울: 서울말씀사, 2002), p.134.<br/>7) 피터 S. 럭크만, 『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사도행전』 (서울: 말씀보존학회, 2003), pp.422-423.]]></description>
<dc:creator>지식뱅크 관리자</dc:creator>
<dc:date>Fri, 29 Jan 2016 10:46:58 +0900</dc:date>
</item>


<item>
<title>마가복음 16장을 “불발탄” 표적으로 만드는 순복음 신유론</title>
<link>https://www.biblemaster.co.kr/bb15/%EB%A7%88%EA%B0%80%EB%B3%B5%EC%9D%8C-16%EC%9E%A5%EC%9D%84-%EB%B6%88%EB%B0%9C%ED%83%84-%ED%91%9C%EC%A0%81%EC%9C%BC%EB%A1%9C-%EB%A7%8C%EB%93%9C%EB%8A%94-%EC%88%9C%EB%B3%B5%EC%9D%8C-%EC%8B%A0%EC%9C%A0%EB%A1%A0/</link>
<description><![CDATA[지난 호에 이어서 순복음의 신유론을 계속 살펴보도록 하자. 조용기 목사는 마가복음 16장을 예로 들며 신약의 구원의 메시지가 항상 신유와 함께함을 주장한다.<br/>&nbsp;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 제자들에게 주신 중요한 명령을 기록하고 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 16:15-18). 구원을 받기 위해 신유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구원의 메시지는 항상 신유와 함께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유는 초대 교회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1)<br/>&nbsp; 조목사는 마가복음 16:15-18을 주님께서 신약의 교회들에게 주신 명령이라고 주장하며 신유를 강조한다. 그 구절들은 바른 성경인 &lt;한글킹제임스성경&gt;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또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침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나 믿지 않는 자는 정죄함을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표적들이 따르리니, 즉 내 이름으로 그들이 마귀들을 쫓아내고 또 새 방언들로 말하리라. 그들은 뱀들을 집을 것이요, 어떤 독을 마실지라도 결코 해를 입지 않을 것이며, 병자에게 안수하면 그들이 회복되리라.”고 하시더라.』<br/>&nbsp; 조목사가 신약 교회 시대의 사역을 위한 명령으로 알고 있는 마가복음 16장의 위임사항들은 현 교회 시대와는 무관한 명령이다. 거기에 제시된 능력은 ‘왕국 복음’의 표적들이기 때문인데, 말하자면 그것들은 지상에 천년왕국이 세워지기 전에 실행될 것들이었다. <br/>&nbsp; 성경에 따르면, 주님이 승천하시기 전까지도 제자들은 지상에 임할 왕국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함께 모였을 때에 주께 물어 말씀드리기를 “주여, 이 때에 이스라엘에 그 왕국을 다시 회복하시겠나이까?』(행 1:6) 제자들이 이런 질문을 했을 때는 그들이 이미 주님으로부터 문제의 “마가복음 16:14-18”과 마태복음 28:19,20, 누가복음 24:45-49의 명령을 들은 뒤였다. 이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주님이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의 지각을 열어 주시므로 성경을 깨달은 상태에서(눅 24:45) 지상명령을 받은 제자들이 ‘그 왕국의 회복’에 관하여 주님께 질문했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마가복음 16장을 비롯하여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지상명령들은 제자들이 사도행전 1장에서 한 질문에서처럼 “그 왕국”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br/>&nbsp; “그 왕국”과 관련된 지상명령들<br/>&nbsp; 조목사의 지상명령 왜곡을 다루기 위해서 먼저 마태복음 28장을 살펴보도록 하자. 배교한 신학자들과 그들에게서 배운 목사들은 흔히 마태복음 28장의 지상명령을 교회에게 주시는 명령으로 여기고 있지만, 그것은 왕국 복음의 전파와 관련하여 제자들에게 주신 명령이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20절)고 말씀하신다. ‘주님이 명령하신 모든 것’에는 마태복음에 전반적으로 흐르고 있는 천국 복음과 관련된 모든 사항이 포함되어 있다. 즉 병든 자를 치유하고, 문둥병자를 고치고, 마귀들을 내어 쫓고, 죽은 자들을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만 가고, 산상설교의 내용들을 지키는 것 등 신약 교회 시대에는 결코 적용시킬 수 없는 왕국 복음에 속한 모든 것들이 포함되는 것이다. 또한 주님은 같은 절에서 『내가 세상 끝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세상’은 헬라어 ‘아이온’에 해당하는 “시대”(age)를 뜻한다. 주님이 말씀하신 세상 끝이란 특정 시대의 끝을 말하는데, 성경이 말씀하는 “끝”(the end)의 의미는 마태복음 24장이 밝혀 준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 왕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런 후에야 끝이 오리라』(13,14절). 여기서 말씀하는 ‘끝’은 ‘왕국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된 후에 오는 끝’이다. 특정 시대의 끝이란 교회 시대가 끝나고 도래할 ‘대환란 시대의 끝’인 것이다. 교회가 휴거되고 지상에 전무후무한 대환란이 임하면 그때 다시 전 세계적으로 왕국 복음이 전파되며, 그 날들에는 대환란이 끝날 때까지 믿음과 행위로 끝까지 견뎌야만 구원을 받아 천년왕국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br/>&nbsp; 그러나 이처럼 마태복음 28장의 지상명령이 근본적으로는 7년 대환란의 유대인들과 관련이 있음에도 오늘날의 교회 시대를 향한 지상명령으로도 믿는 데는 이유가 있다. 첫째, 구약과 신약의 과도기에 있는 마태복음이 은혜의 복음을 향해 나아가면서 마무리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관점은 사도행전 7장에서 유대인들이 주님을 민족적으로 거부한 것을 기점으로 하여 왕국 복음이 이방인들을 향한 은혜의 복음으로 서서히 그 방향을 전환한 것에서 기인한다. 둘째, 주님으로부터 제자들에게 위임되었던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가 주님의 영으로 거듭난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위임되었기 때문이다. 땅 위에서 죄들을 용서하는 권세는 본시 주님이 가지신 것이었으나(마 9:6), 그 영적인 권세는 베드로(마 16:19)와 다른 제자들(마 18:18)에게도 주어졌다. 그들은 주님을 그들의 “왕”으로 받아들이는 유대인들에게는 죄사함을 선포하고,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저주를 선포할 권세를 지니게 되었으며, 받은 그 권세를 바탕으로 왕국 복음을 전파한 것이다. 한편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대신한 대사들』(고후 5:20)이라고 불린다. 그들 역시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주님의 대사로서의 직분을 지니고 있다. 제자들에게 위임되었던 그 영적인 권세는 신약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위임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제자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 권세를 통해 “은혜의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죄를 대속해 주신 구주로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죄사함을 선포하고,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저주를 선포할 권세를 지닌다.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제시하느냐 구주로 제시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주님을 증거의 기준으로 하여 죄사함과 저주를 선포할 수 있는 권세를 지녔다는 점에 있어서는 제자들이나 신약 그리스도인들이나 서로 동일한 것이다.<br/>&nbsp; 이처럼 마태복음 28장의 지상명령은 문제의 마가복음 16장의 명령과 마찬가지로 근본적으로 왕국 복음과 관련이 있다. 제자들은 이와 같은 지상명령들을 이미 들은 상태에서 주님께 “이 때에(at this time),” 즉 주님이 아직 지상에 계신 “이 때에” 왕국을 회복시키시겠느냐고 여쭙고 있는 것이다. 제자들은 마가복음 16장에서 주님으로부터 받은 표적의 능력을 행사하여 왕국 복음을 증거하면 왕국이 당장이라도 회복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자들의 이 기대가 무효하지 않은 것은 이스라엘의 왕국의 회복이 구약성경에서 500구절 이상이나 다뤄지고 있으며,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그의 누가복음에서 “가장 높으신 분의 아들의 왕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주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의 조상 다윗의 보좌를 주실 것이며 그는 야곱의 집안을 영원히 통치할 것이요 그의 왕국은 무궁하리라』(눅 1:32,33). 그만큼 왕국의 회복에 대한 제자들의 기대는 가장 성경적이고 논리적인 기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늘의 아버지께 맡겨 드린다. 『너희에게는 그 때나 시기를 알게 하신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자신의 권한에 두셨느니라』(행 1:7). 제자들의 질문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왕국의 회복이 하나님 아버지의 권한에 따라 얼마든지 유동적으로 일어날 수 있음을 암시하신 것이다. 십자가 이전에라도 그것은 회복될 수 있었지만 유대인은 그들의 왕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다. 그러나 이후라도 그들이 왕국 복음을 받아들이면 왕국은 회복될 수 있었던 것이다. 단 그 때나 시기는 아버지의 권한에 속한 일이라고 주님은 못박고 계신다. 주님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성령의 영감을 받아 예언하고도 그 예언이 무슨 내용인지 깨닫지 못했던 시대(벧전 1:10-12), 즉 교회 시대를 염두에 두고 계셨음이 분명하다. <br/>&nbsp; 주님이 마가복음 16장에서 ‘마귀를 내쫓음, 새 방언들로 말함, 뱀들을 집음,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음, 병자 안수를 통한 신유의 표적들’을 능력으로 주신 것은 전적으로 이스라엘 왕국의 회복과 관련이 있었으며, 그 능력을 받은 제자들은 왕국의 회복을 주님께 여쭌 것이다. 만일 위의 표적들을 통해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왕으로 믿고 영접하면 주님은 천년왕국을 가져오실 계획이셨으나, 그들은 스테판을 통한 주님의 최후 통첩을 거부하고 그를 죽였고, 그들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민족적으로 끝까지 거부해 버렸다. 그리하여 왕국 복음은 사도 바울에게 계시된 은혜의 복음에 서서히 자리를 내주어 초림과 재림 사이에 감추어져 있던 “교회 시대”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마가복음 16장의 표적들”을 동반하는 왕국 복음은 교회 시대가 끝나는 약 2천 년 뒤로 연기되었으며, 은혜의 복음이 전파되는 현 교회 시대가 막을 내리고 대환란 시대가 임하면 다시 전파되게 된다. 그때에야 비로소 아버지의 권한에 두신 왕국의 회복을 다시 준비하게 되는 것이다. <br/>&nbsp; 조목사가 마가복음 16장의 왕국 복음의 표적을 신약 교회 시대의 신유에 적용한 것은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지상명령이 왕국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목사는 또한 마가복음 16장의 명령과 관련하여 스스로 혼란을 겪고 있는데, 그는 17,18절을 근거로 주님이 치료에 대한 “유언”까지 남기셨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질병의 치료를 복음 전도와 함께 중요한 과제로 맡겨 주셨으며(마 10:1, 눅 10:8,9) 마지막 승천하실 때에는 치료에 대한 유언까지 남기셨다고 말하고 있다(막 16:17,18).2)&nbsp; &nbsp; ‘유언’이란 죽을 자가 살아남아 있는 이들에게 남기는 말이다. 그런데 마가복음 16장에서 주님은 이미 죽었다가 부활하신 상태이다. 조목사의 말대로라면 주님은 마가복음 16장 이후로 또 죽으실 예정이시다. 신유만을 너무 강조하려다 보니 단어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혼란을 빚어 진리를 또 한 번 가린 것이다. 이는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br/>&nbsp; 조목사를 포함한 오순절 은사주의자들은 마가복음 16장의 신유의 표적을 재차, 삼차 강조하면서도 뱀들을 집거나 독을 마실 엄두는 내지 못한다. 그들이 신유 은사의 증거구절로 삼는 마가복음 16장의 표적들은 그들 비성경적인 은사주의자들은 물론, 신약 교회 시대의 그리스도인들과는 무관한 표적들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3에서 『내가 할례받은 모든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온 율법을 행할 의무가 있는 자라.』고 했다. 마가복음 16장의 표적들 가운데 있는 치유의 표적을 신약 교회 시대로 가져오는 은사주의자들에게는 나머지 표적들도 행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일을 결코 실행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들의 비성경성을 입증하고 있다.&nbsp; <br/>&nbsp; 나을 수도 있고 낫지 않을 수도 있다는 ‘신유의 은사’<br/>&nbsp; 조목사는 성령의 은사 중 하나인 신유의 은사로 병이 나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br/>&nbsp; 『또한 신유는 성령의 은사 중 하나입니다. 보편적으로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으로서 특별히 성령으로 신유의 은사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유의 은사를 받으면 전격적인 신유가 나타나게 됩니다... 또한 신유는 복음 증거의 좋은 방법입니다... 1000번 설교 듣는 것보다 한 번의 신유 체험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확실하게 느끼는 데 더욱더 효과적입니다. 물론 그 중에는 낫는 사람도 있고 낫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낫지 않는 사람을 보고 염려할 것이 아니라, 낫는 사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3)<br/>&nbsp; 조목사는 신유의 은사에 대한 근거로 마가복음 16장을 몹시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는 그것을 인용한 지 불과 한 페이지도 지나지 않아서4)&nbsp; &nbsp; 위와 같이 자신의 근거구절과 모순되는 주장을 한다. 그는 “물론 그 중에는 낫는 사람도 있고 낫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라고 했지만, 마가복음 16장의 근거 구절은 그와 다르게 말씀하기 때문이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표적들이 따르리니, 즉... 병자에게 안수하면 그들이 회복되리라』(17,18절). 표적들이 따르는 “믿는 자들”이란, 표적을 행하는 당사자를 지칭한다. 이 구절의 신유의 표적의 경우로 들자면, 믿는 자들은 피안수자가 아닌 “안수자”를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자가 “병자에게 안수하면 그들이 회복되리라”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피안수자의 믿음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방적인 표적으로, 믿는 자가 안수하면 “낫는 사람도 있고 낫지 않는 사람도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고침을 받는 표적이었다. 이 사실은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치유한 사건에서 볼 수 있다. 그들은 물질을 원하는 그를 일방적으로 일으켜 세웠던 것이다(3-8절). 심지어 그들은 주님의 경우처럼(마 8:13, 요 4:50) 안수하지 않고도 그 병자를 치유했는데, 주님이 사도들에게 주신 권세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또한 사도행전 5장에서도 보면 “사도들의 손을 통해” 많은 표적과 이적이 백성 가운데 일어났으며(12절), 무리가 예루살렘 근처 성읍에서 병든 자들과 더러운 영들에게 괴로움 당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왔는데 낫는 사람도 있고 낫지 않는 사람도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치유되더라”고 말씀하고 있다(16절). 한마디로 사도들의 신유에는 조목사와는 달리 “불발탄”이 없었던 것이다.<br/>&nbsp; “믿는 자들”이 ‘안수하는 자들’이라는 것은 조목사도 알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손을 얹는 것은 예수님의 치료의 능력이 나타날 것을 믿는 신앙의 표현이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자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 16:17,18)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믿는 자가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을 때 치유의 은혜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5)&nbsp;  그러나 안수를 통한 병 고침의 표적은 신약 시대의 교회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사도들에게 주신 표적이다. 앞서 인용했듯이 “사도들의 손을 통해” 많은 표적과 이적이 일어났으며, 또 성경은 “사도의 표적들”이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서 “지극히 위대한 사도들보다 아무것도 뒤질 것이 없는” 사도 바울을 통해 모든 인내와 표적들과 이적들과 능력 행함으로 판명되었다고 고린도후서 12:11,12에서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 시대의 사도들에게 신유의 표적이 주어졌던 것은 당시 교회 내에 표적을 필요로 했던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고전 1:22; 14:22). 그 표적은 사도들의 것이었으며, 사도들 가운데 마지막 사도인 바울이 죽음으로써 사라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사라져 버린 사도의 표적들 가운데 하나인 병 고침의 안수를 “모든 믿는 자들에게 하신 약속이며 오늘날도 계속되는 약속”이라고 하거나,6)&nbsp;  “오늘날에도 성도가 예수의 이름으로 병자에게 안수할 때 신유의 역사가 나타나게 된다.”7)&nbsp; 고 가르치는 것은 비성경적인 일이다. 오늘날 거짓 은사를 자랑하며 병자를 위해 안수하는 모든 은사주의자들은 성경을 명백하게 거스르고 있는 것이다.&nbsp; BB<br/>주석)-----------------<br/>1) 조용기, &lt;신유론&gt;, (서울: 서울말씀사, 2001), p.47.<br/>2) 조용기, &lt;오중복음과 삼중축복&gt;, (서울: 서울말씀사, 2002), p.165.<br/>3) 조용기, &lt;아들아, 네가 험한 길을 살았구나!&gt;, (서울: 서울말씀사, 2005), pp.151-152.<br/>4) 위의 책, p.150.<br/>5) 조용기, &lt;신유론&gt;, p.88.<br/>6) 위의 책, p.88.<br/>7) 조용기, &lt;오중복음과 삼중축복&gt;, p.158.]]></description>
<dc:creator>지식뱅크 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8 Jan 2016 09:40:58 +0900</dc:date>
</item>

</channel>
</rs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