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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령의 열정을 없애 버린 칼빈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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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5년 07월호>
칼빈주의의 예정론에 의문을 품고, 인간의 자유의지와 조건적 예정을 강조하며 네덜란드 라이덴 대학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던 야곱 알미니우스(1560-1609)가 죽자, 1610년에 그의 제자들이 칼빈의 가르침에 반대하는 “항론서”를 네덜란드 국회에 제출했다. 그들은 칼빈주의를 가장 잘 표현한 고백이라고 칭송받는 <벨기에 신앙고백>과 칼빈주의와 루터주의를 적절히 조화시켜 만든 <하이델베르크 신앙문답서>를 수정해 줄 것을 요구했는데, 이에 네덜란드 국회는 돌트에서 약 7개월간(1618-1619) 154회의 종교회의를 열었다. 종교회의 참석자들은 항론파가 제시한 5대 주장, 곧 부분적 타락, 조건적 예정, 일반 속죄, 성령의 역사에 대한 저항 가능성, 구원 상실 가능성을 성경에 비추어 논의했다. 회의 결과, 항론파의 주장은 비성경적인 이단이라는 결론에 이르렀고 칼빈주의가 성경에 입각한 참된 교리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로써 오늘날 칼빈주의 5대 강령의 전신인 <돌트 신경>이 확립되어 공표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칼빈주의 교리는 어거스틴이 숨겨 놓고 칼빈이 전체를 부풀게 한 누룩에 불과하며, 지금까지 한국 교회를 가장 치명적으로 망친 이단 교리이다. 한국 교회는 이러한 칼빈주의 5대 강령(TULIP)을 올바로 분별하여 반드시 떼어내 버려야 한다.1.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칼빈주의 5대 강령의 첫 번째 항목은 “전적 타락”인데, 이에 관해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인간은 타락하여 죄의 상태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수반하는 영적 선을 행하고자 하는 모든 의지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래서 자연인은 영적 선을 전적으로 싫어하고, 죄로 죽어 있기 때문에 그 자신의 힘으로는 자신을 회개시키거나, 또는 회개에 이르도록 준비할 수가 없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강해>, 개혁주의신행협회, p.140). 칼빈주의에서 말하는 “전적 타락”의 교리는, 아담이 타락한 결과로 인해 허물과 죄들 가운데서 죽은 채로 태어나는(엡 2:1) 죄인은 스스로 회개할 수 없고 복음을 믿거나 그리스도께로 올 수 없다고 가르친다. 즉 죄인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그리스도를 위한 결단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인데,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만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한 것은 사실이지만, 칼빈이 가르쳤던 것처럼 그 타락이 인간의 “의지”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다. 칼빈은 영의 죽음(엡 2:1)을 혼의 죽음으로 오해하여 인간을 의지가 무능력한 존재로 해석한 것이다. 우리는 그와 반대되는 경우를 구약 시대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 시대에 거듭난 사람이 아무도 없었음에도 구약 성도들은 자신의 “타락”을 초월하여 하나님을 사랑했고, 하나님의 뜻대로 그분의 계명들을 지켰다(출 35:5,22). 하지만 사탄은 칼빈주의의 “전적 타락”이라는 거짓 교리를 만들어 내어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유의지로 영접할 수 없다고 가르치게 했다. 이로써 순수한 복음 전파의 길이 막혔고, 지금껏 셀 수 없이 많은 죄인들이 지옥에 떨어졌다. 죄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을 때 구원받는다(롬 10:9). 마음으로 믿는 것은 자신의 의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를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즉 그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니라』(요 1:12). 죄인이 복음을 들을 때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그가 영원한 정죄에 이르는 죄인임을 깨닫게 해 주시고, 그런 죄인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혼의 속죄제물로 드려지신 사실을 알려 주심에 감사하면서, 자신의 의지를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는 전체 과정이 “마음”으로 믿는 것이다. 모든 죄인은 하나님의 구원으로의 초청(계 22:17)에 반응하여 자신의 자유의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할 수 있다. 인간이 총체적으로 타락하여 마음의 의지까지 타락해 무능력해졌다는 칼빈주의 교리는 성경을 배격하는 사탄의 교리이다.
2.
무조건적인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예정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라고 부르며 이 작정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어떻게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스스로 예정하셨다. 이는 모든 사람이 같은 상태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영생이 예정되며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영원한 저주가 예정되기 때문이다. 각 사람이 이 중의 어느 한 쪽 결말에 이르도록 창조되므로, 우리는 그를 생명 또는 사망에 예정되었다고 한다.”(<기독교강요> 제3권 21.5). “즉 유기된 자들(버림받은 자들)도 그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하기 위하여 파멸에 내맡겨진 것이라고 하였다”(제3권 22.11). 칼빈은 하나님께서 타락의 결과로 의지를 쓸 수 없는 죄인들 중 일부를 “조건 없이 택하여”(무조건적인 선택) 창세전에 구원으로 예정하셨으며, 버림받은 나머지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영원한 저주로 예정하셨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누군가가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고서는 그 사람을 택하신 적이 없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기초를 놓으시기 이전에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분 앞에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어』(엡 1:4).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뜻이며, 이 일은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성령께서 그 사람을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넣으심으로써 이뤄진다(고전 12:13, 벧전 1:2). 즉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받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지 않으신 자는 예정하지 않으신다(엡 1:5, 롬 8:29). “선택”이 먼저고 “예정”이 그 다음인데, “예정” 역시 구원을 위한 예정이 아니라 “구원의 목적과 결과”에 대한 예정이다. “예정”은 신약성경에서 단 네 번 등장하는 단어로, 에베소서 1:5,11과 로마서 8:29,30에서 나온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자신의 자녀로 입양할 것을 예정하셨으니... 모든 것을 그 자신이 의도한 대로 행하시는 이의 목적을 따라 우리가 예정되어 그분 안에서 유업을 받았으니』(엡 1:5,11). 『그분께서는 미리 아신 자들을 자기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게 하시려고 또한 예정하셨으니 이는 그를 많은 형제 가운데서 첫태생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하여 예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시고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 이 중 그 어떤 경우에도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 에베소서 1:5의 예정은 자녀로 “입양”할 것에 대한 예정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을 자신의 자녀가 되는(입양) 운명으로 미리 정해 놓으셨다(요 1:12). 로마서 8:29에서는 에베소서 1:11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의 형상과 일치되도록 그리스도인들의 운명을 정해 놓으신다. 말하자면 두 구절 모두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때 성령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은, 믿은 그 사람이 “입양되는 것”(엡 1:5)과 그가 “아들의 형상과 일치되는”(롬 8:29) 것이다. 이러한 “입양,” 즉 “양자 됨”을 성경은 “몸의 구속”이라고 부른다. 『그들뿐만 아니라 성령의 첫열매들을 가진 우리까지도 속으로 신음하며 양자 되는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느니라』(롬 8:23). 그리스도인들이 휴거될 때 경험하는 “몸의 변화”는 “아들의 형상과 일치되는 것”이며, 성경은 이것을 가리켜서 “입양”(“양자 됨”)이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몸의 변화”를 “예정”하셨다. 휴거 때의 몸의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모든 사람들에게 “예정”되어 있으며, 칼빈의 “무조건적 선택”과는 관계가 없다.
3.
제한적 속죄(Limited Atonement)
“칼빈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범위에 관하여 그것은 제한적이라고 말하였다. 요한일서 2:1의 석의에서 ‘그리스도께서 충족적으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으나 효능적으로는 피택자만을 위하여 죽으셨다.’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효능을 적용하는 범위를 하나님이 결정하신 것을 말하므로 그의 은혜로우심과 함께 그의 주권의 절대적임을 강조한다.”(박형룡, <저작 전집: 신학논문>, 개혁주의신행협회, p.263).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자체도 하나님의 주권과 영원한 판결에 따라 오직 “선택받은 자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칼빈의 하나님은 자신이 타락하도록 만들고 전적으로 무능하게 한 “버림받은 자들”을 위해서는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칼빈은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어 놓으나』(요 10:11)라는 말씀을 “양들만을 위한 속죄”로 해석하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것같이』(엡 5:25)라는 말씀을 “교회만을 위한 속죄”로 해석하는데, 이처럼 칼빈주의는 특정 구절의 참 의미를 무시한 채 자신들의 교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 말씀을 오용하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인자도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몸값으로 주려고 온 것이라.』(마 20:28)에서 “많은”이 “모든”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속죄가 택함받은 “많은” 사람들에게만 제한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많은”이 “모든”을 의미한다는 것은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몸값으로 내어주셨으니』(딤전 2:6)라는 말씀이 증명한다. 이 말씀의 “모든 사람”은 문맥상 2절의 『왕들과 권세 있는 모든 사람』도 포함되는데, 이렇게 되면 모든 “왕들”과 “권세자들”이 구원받은 것은 아니므로, 그리스도께서는 “택함받은 사람들”을 위해서만 제한적으로 속죄하신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모든 사람”을 위해서 속죄하신 것이다. 베드로후서 2:1은 주님께서 거짓 교사들을 위해서도 속죄하셨음을 천명하고 있다. 이처럼 성경에서 말씀하는 속죄는 “무제한적인 속죄”이다. 『주의 약속은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어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벧후 3:9).
4.
저항할 수 없는 은혜(Irresistible Grace)
“하나님께서는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하신 모든 사람들을, 그리고 그들만을 자신이 정하시고 적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때에, 효과적으로 부르시되... 또한 그들의 마음을 영적으로 그리고 구원에 관하여 깨우쳐서 하나님의 일들을 이해하게 하시며... 그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들이 선한 것을 결심하게 하시며 그리고 효과적으로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끄신다.”(G.I. 윌리엄슨 저, 나용화 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p.145). “저항할 수 없는(불가항력적) 은혜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구원하기로 택하실 때... 아무도 하나님을 대적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의사와는 반대로... 천국에 들어가게 하신다. 억지로 강요하여 인간의 뜻을 거슬러 역사하신다.”(<칼빈주의 5대 교리>, 개혁주의신행협회, p.149). 칼빈주의자들은 성령님께서 택함받은 자들의 동의 없이 “강제로 거듭나게 하여 새로운 출생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을 예로 들어 저항할 수 없는 은혜를 주장한다. 일례로, 칼빈주의자들은 『그들은 혈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또한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였고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라.』(요 1:13)에서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들』이 성령님께서 강제로 거듭나게 하신 사람들인 것처럼 해석하지만, 그 말씀에는 『그[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 즉 그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요 1:12)이라는 “조건”이 달려 있다. 또한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였으므로 내가 자애로 다가섰노라.』(렘 31:3)를 “저항할 수 없는 은혜”에 적용하는데, 이 말씀은 문맥상 『이스라엘 모든 족속』(렘 31:1), 『이스라엘』(렘 31:2), 『처녀 이스라엘』(렘 31:4)에 관한 말씀이다. 즉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애를 언급한 구절인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교리를 가져오지 않고, 자신들의 교리에 말씀을 꿰어 맞추는 아주 못된 습성이 있다. “저항할 수 없는 은혜”는 이단적 교리이며, 인간은 언제든지 구원으로의 초청(사 45:22; 55:6,7, 막 1:15, 요 7:37, 행 17:30)을 자신의 의지로 거부할 수 있다. 『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며 너에게 보낸 사람들을 돌로 치는 자야, 마치 암탉이 자기 병아리들을 날개 아래 함께 모으듯이 내가 얼마나 자주 네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 23:37) 『너희는 생명을 얻으려고 내게 오기를 원치 아니하는도다』(요 5:40). 『너희 목이 굳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 조상이 한 것과 같이 너희도 늘 성령을 거역하는도다』(행 7:51).
5.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이 교리는 모든 택함받은 사람들은 자신의 구원을 끝까지 견뎌 내야 한다는 말이다. <돌트 신경>이 처음 작성되었을 때 “구원의 영원한 보장”과 “성도의 견인”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오늘날은 이 다섯 번째 강령이 변하여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으로 바뀌었는데, 본래 “성도의 견인”이라는 것은 “끝까지 견뎌서 구원을 입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지금까지 잘 믿다가 실족하면 본래 구원받지 못한 것이고, 지금까지 잘 믿고 타락하지 않아야 택함받은 사람이라는 증거가 된다는 교리이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이 “영원한 구원”을 말할 때조차 그것은 “택함받은 사람들”에 대한 언급일 뿐이다. 끝까지 견뎌야 구원받은 사람의 증거가 된다는 “성도의 견인”은 성경적인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끝까지 견디기”(마 10:22) 때문에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죄를 제거해 주신(요 1:29) 그 성도를 그분의 몸 안으로 넣어 주셨기 때문에(고전 12:13) 영원히 보장되는(롬 8:38,39) 것이 신약 교회 시대의 구원이다.
누구라도 칼빈주의를 신봉하는 한 구원받을 수 없다. 지난 2천 년간의 신약교회사에 등장한 이 거대한 누룩은 사탄에 의해 교회들 안에 넣어져 구원의 확신을 없애 버렸고, 잃어버린 혼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자 하는 구령의 열정 또한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빼앗아 버렸다. 복음을 가림으로써 구원을 받지도 못하게 하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도 못하게 하는 칼빈주의야말로 한국 교회를 가장 치명적으로 망친 이단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