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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신앙의 “티” 빼겠다는 ”들보“ 박힌 은사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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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5년 05월호>
지난 4월, 윤석열 전 대통령의 임기가 그의 파면을 끝으로 일단락되었다. 윤 전 대통령은 임기 내내 끊임없이 “무속 논란”에 휘말렸는데, 탄핵 국면에까지 해당 논란이 불거지면서 국내뿐만 아니라 외신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프랑스의 르몽드지(紙)는 “남한의 대통령 윤석열과 그의 아내가 무속인들에게 조언 구하기를 즐긴다는 사실을 보면, 무속인들이 비상 계엄령 선포 과정에 개입되었다는 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라면서, 계엄에 가담했던 “안산 보살” 노상원 전 국군정보사령관으로부터, 김건희 여사의 고문으로 활동했던 “건진 법사” 전성배 씨, 대통령의 “멘토”라는 소문이 무성한 “역술인” 천공에 이르기까지 여러 무속인들과의 관계를 지난 2월 자세히 보도하기도 했다.위와 같은 무속 논란에 대해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이영훈 목사도 한마디 거들었다. 조선일보는 이 목사가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계엄 사태의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인 노상원 전 국군정보사령관이 무속인이었다는 점은 기독교 입장에서 심히 유감”이라고 말했다고 지난 3월 보도했는데, 이 목사는 무속신앙과의 “영적 전쟁”의 차원에서, “무속신앙에 빠지면 현실을 무시하고 판단력을 잃게 되기 때문에 교회는 계속 경고해 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영훈 목사의 말에 대해서는 주님께서 주셨던 이 조언이 유효하겠다. 『그들이 너희에게 지키라고 한 모든 것을 지키고 행하라.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 이는 그들이 말만 하고 행하지 않음이라』(마 23:3). 이 목사가 담임하는 여의도순복음교회도 “무속적”이기는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적어도 “기독교”의 테두리 안에 있는 그들을 “무속적”이라고 비판하는 게 너무한 처사라고 여길지 모르겠으나, 성경에 비추어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는 것이 지체되었을 때, 아론은 금으로 주조한 송아지를 만들고는 『내일은 주께 명절이니라.』(출 32:5)라고 공표했다. 아론은 금송아지 숭배를 조장하면서도 『주』의 이름을 댔던 것이다. 여로보암왕도 마찬가지였다. 그 또한 금송아지를 만들어 백성들 앞에 신들로서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 하나님』(왕상 13:6)을 운운했다. 결국 북왕국은 그 죄를 뿌리 뽑지 못해 멸망했는데, 이 분야에서 으뜸가는 인물은 사울왕이다. 그는 부리는 영을 지닌 여자를 찾아가서 강신술을 요청했다. 그런데 그 여인이 “당국의 단속”이 겁난다면서 주저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때 사울은 『주께서 살아 계시는 한, 이 일로 인하여 네가 어떤 벌도 받지 아니하리라.』(삼상 28:10)라고 말하면서 그녀를 설득했다. 요컨대 혹자가 제아무리 『주』를 운운한다고 해도, 그가 무속과 마귀들을 향한 제사와 우상 숭배 따위와 관계없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어떤 것이 “무속적”인지를, 즉 “무당들의 풍속”에 속한 것인지의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그때에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부리는 영들을 지닌 자들과, 엿보고 중얼거리는 마법사들에게 구하라.” 하리라. 백성이 자기들의 하나님께 구해야 되지 않겠느냐? 산 자들을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 구하겠느냐? 율법과 증거에게라. 만일 그들이 이 말씀에 따라 말하지 아니하면 이는 그들 안에 빛이 없기 때문이라』(사 8:19,20).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그 근거를 두지 않은 채로,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영적이거나 초월적인 도움을 힘입고자 하는 행위라면 그 무엇이라도 “무속적”이라고 함이 옳은 것이다.
한편 이영훈 목사는 2022년 출간된 그의 책 <오직 성령으로>에 이렇게 썼다. “세례(침례)를 받는 것은 주님의 명령이다. ‘성령으로 세례(침례)를 받으라’는 말씀은 성령세례를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받으라’는 명령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난 후 반드시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 성령세례는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우리 삶의 전환점이 되는 매우 중요한 영적인 체험이다. 성령으로 세례(침례)를 받고 방언이 터져 나오면, 그때부터 깊은 영적 차원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그렇다면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성령세례’는 일회성이며 ‘성령충만’은 반복되는 영적 체험이다.” 그는 이러한 “성령충만”을 통해 누구에게라도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는 주장을 입에 달고 산다.
먼저 짚고 넘어갈 점은, 성경 어디에도(개역성경이나 개역개정판을 포함해서) “성령으로 세례(침례)를 받으라.”라는 명령은 없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여러 날이 지나지 않아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행 1:5)라고 말씀하셨을 뿐이다. 『받으리라』는 말씀은 “예언”이지, “명령”이 아니었다. 이 말씀이 있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자들은 “성령 침례”를 받았는데, 스스로의 의지로 실행한 것이 아니라 갑자기 성령님께서 임하심으로써 그렇게 되었다(행 2:1-4). 이 목사는 자기가 원하는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성경을 제멋대로 변개해서 인용한 것인데, 그것은 전형적인 마귀의 수법이다(마 4:6 vs. 시 91:11,12).
이 목사는 예수님을 믿는 것과 성령 침례를 분리해서 설명하지만, 이 시대에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은 사람 중 성령 침례를 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러 경륜들이 과도기적으로 섞여 있었던 사도행전 초중반부까지는 예외가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나, 지금은 누군가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는 즉시 그 의사와는 관계없이 성령 침례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즉 “성령 침례”란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령님에 의해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침례를 받아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한 성령에 의하여 우리 모두가 한 몸 안으로 침례를 받았으며 또 모두가 한 성령 안으로 마시게 되었느니라』(고전 12:13). 이렇게 성령 침례를 받은 성도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고 구속받음과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다(엡 1:7). 이뿐 아니라 그 순간 성령님께서도 그 성도 안에 영원히 내주하시고(엡 1:13), 성령님과 성도는 불가분의 관계가 된다(고전 6:17). 바울 서신을 찬찬히 읽어 보면, 이상 언급된 예수님을 믿는 것, 구속, 구원, 성령 침례, 성령으로 인침을 받음, 성령님과의 연합 등의 사건들은 서로 시간 간격이 없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누구라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목사가 받았다고 하는, 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성령”은 과연 어떤 영이겠는가? 악령임에 틀림없다. (만일 그가 구원받았다면) 성령님께서는 이미 그 안에 들어가 계실 터이므로 다시 들어오실 필요도 없고 그러실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악령들이 때로는 그 자신이나 교인들을 거품 물게도 하고(막 9:20), 방언이랍시고 괴상한 소리를 지르게 했던 것이다(막 9:26). 어쩌면 심지어는 예언의 은사랍시고 미래에 대한 “점”도 치게 했을지도 모른다(행 16:16). 실제로 “용하다는 목사들”이나 “용하다는 권사들”이 활동하면서 돈을 받고 “운세”를 봐주기도 한다는 것은 제도권 교회들 안에서는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 아니던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로마카톨릭교도들이 로마에 있는 “산타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을 바라보면서 진지하게 “마리아님이 교황님의 꿈에 나타나셔서 성당을 지으라고 하셨다”라고 하면 피식 하고 웃음이 터져 나오기 마련이다. 동방정교회 회원들이 소위 “주현절”(예수님께서 요단 강에서 침례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에 “물에 빠진 십자가를 건져 오면 특별한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하면서 다이빙하는 것을 볼 때도 실소가 터지기는 마찬가지다. 성경적 근거가 없는 미신적인 실행이고, 이교적 전통으로부터 유래된 “무속”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령 세례”를 구하고, 그 어느 나라 말도 아닌 괴상한 방언을 하고, 거품 물고, 데굴데굴 구르고, 쓰러지고, 날아가고, 그러다 보면 어떤 병이든 낫고 어떤 소원이든 이루어진다면서 집회를 여는 은사주의자들의 행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야 하지 않겠는가? 신약 지역 교회의 교리들을 담고 있는 바울 서신 가운데 어디에서 그런 짓들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이 나라의 제도권 교회들은 무속신앙을 척결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기 전에, 먼저 그들 안에 뿌리내린 “은사주의”가 바로 “무속신앙” 그 자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무속신앙”에 대해 경고하는 일이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밖에는 되지 않는다. 『너 위선자여, 먼저 네 자신의 눈에서 들보를 뽑아 내라. 그러면 네가 밝히 보고 네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리라』(마 7:5).
하나님을 섬긴다고 주장하지만 그 실체는 “무속인”에 가까운, 거짓 사도요 기만하는 일꾼으로 스스로 전락해 버리지 않기를 원하는가?(고후 11:13) 또 그런 자들에게 속지 않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단순함”에서 떠나지 말고(고후 11:3), 이브가 뱀에게 속을 때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간수하는 일에 실패하지 말라. 기록된 말씀 그대로를 신뢰하고, 거기에 더하거나 빼지 말라. 은사주의자들처럼 “감각,” “경험,” “신비한 체험” 따위를 따라가지 말고, 기록된 바른 말씀만을 신뢰하라. 그렇지 못하면 어느새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용납하는(고후 11:4) “무속”에 심취했으면서도, 자신이 “잘 믿고”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