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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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성서공회의 “새 상품” <새한글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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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5년 06월호>

<개역한글판성경>(1961), <공동번역>(1977), <표준새번역>(1993), <개역개정판성경>(1998), <새번역>(2001), <새한글성경>(2024)을 주요 상품으로 출시해 온 대한성서공회가 지난 4월 8일 “새한글성경 학술 심포지움”을 개최했다. 대한성서공회는 작년 12월 “성경 원문에 충실하면서도 쉽고 간결한 문체로, 디지털 매체에 친숙한 교회 학교와 젊은이들을 위한 맞춤형 성경”이라는 취지를 앞세우며 <새한글성경>을 출시한 바 있는데, 이번 심포지움은 “다음 세대가 성경을 보다 친숙하게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새한글성경>의 보급과 활용 방안을 모색”하는 데 그 목적을 둔 행사였다.

대한성서공회의 “현대어 성경” 출간 역사를 보면, <개역한글판성경>(1961)의 고어체에 익숙하지 않은 젊은 세대들의 “현대어 성경”에 관한 수요를 수익으로 전환하기 위해 <표준새번역>(1993)을 출시했으나, 앞서 출시된 생명의말씀사의 <현대인의성경>(1985)이나 성서원의 <현대어성경>(1991)을 넘어서는 관심을 받지 못했다. <개역개정판성경>(1998) 출시 이후에도 다시 <개역개정판성경>의 고어체에 익숙하지 않은 젊은 세대들의 “현대어 성경”에 관한 수요를 수익으로 전환하기 위해 <표준새번역>의 개정판인 <새번역>(2001)을 출시했으나,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아가페출판사의 <쉬운성경>(2001), 복있는사람의 <메시지성경>(2002), 두란노서원의 <우리말성경>(2004), 또 <현대어성경>의 개정판인 성서원의 <쉬운말성경>(2012) 등이 출간되자 잊힌 성경이 되었다.

대한성서공회가 지난 4월 8일 개최한 “새한글성경 학술 심포지움”도 “학술”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나, 사실은 <새한글성경>을 “광고”하기 위한 판매 전략의 일환인 행사였다. 기독교 관련 신문사의 기사 내용이 학술적 평가라기보다는 대한성서공회의 기존 광고 문구를 그대로 적고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대한성서공회가 <새한글성경>에 대해 “대한성서공회가 다음 세대를 위해 내놓은 공인역 성경”이라는 광고 문구를 사용한 것은 바른 성경을 보존해 오신 하나님에 대한 큰 모독이다. “공인역”(Authorized Version)이라는 표현은 오직 <킹제임스성경>에만 부여될 수 있는 명칭이기 때문이다. <킹제임스성경>은 판권 장인 속표지에 “교회들에서 읽히도록 지정됨”(Appointed to be read in Churches)이라고 명시되어 있고, 이에 따라 “공인역”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기 시작했으며, <킹제임스성경>만을 의미하는 명칭으로 고유명사화 되었다. 그런데 이 “공인역”이라는 명칭을 다른 성경도 아닌 “변개된 성경”에 함부로 붙인 것이다. 대한성서공회가 “공인역”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공인”된 번역본인가? 대한성서공회가 누구로부터 어떠한 “권위”를 받았기에 “공인”이라는 용어를 함부로 붙였는가?

대한성서공회의 모든 역본이 그러하듯이 <새한글성경> 또한 신구약 모두 변개된 저본을 사용하였다. 그런데도 그들은 국제 표준에 부합하는 신뢰성 높은 번역 저본을 선택한 것이라고 거짓말한다. 그들이 말하는 “국제 표준”은 항상 달라진다. 구약은 변개된 슈투트가르트 히브리어 성경(BHS)을 계속 저본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신약 저본은 계속 바뀌었다. <개역한글판성경>의 개정에는 네슬 14판, <표준새번역>의 저본으로는 세계성서공회연합회 3판(UBS 3판, 1983), <개역개정판성경>의 저본으로는 세계성서공회연합회 4판(UBS 4판, 1993), <새한글성경>의 저본으로는 네슬-알란드 28판(NA28, 2012)과 세계성서공회연합회의 헬라어 성경(UBS 5판, 2014)을 사용함으로써, 네슬-알란드와 세계성서공회연합회가 정해 주는 대로 정처 없이 떠돌고 있는 실정이다. 무엇이 올바른 저본인지도 모른 채, 그저 돈을 벌기 위해 새로운 성서들을 만드는 것이 그들의 목적인 것이다. 바른 원문은 모세 벤 아세르의 히브리어 <마소라원문>과 헬라어 <표준원문>이다. 그리고 이 원문들로부터 번역된 <킹제임스성경>과, 이 <킹제임스성경>으로부터 번역된 <한글킹제임스성경>만이 바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인 것이다.

<새한글성경>이 고어체에 익숙하지 않은 젊은 세대들에게 “현대어”로 된 성경을 제공한다는 취지에 적합한 번역을 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몇 부분을 인용해 알아보겠다.

<한글킹제임스성경>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더라』(창 1:3).

<새한글성경>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빛이 생기기를!” 그러자 빛이 생겼다.」

창세기 1:3에서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라고 말씀하신 히브리어 원문은 “예히 오르”(rAa-yhiy>)이다. “예히”는 “있게 하라.”라는 뜻이고, “오르”는 “빛”이라는 뜻이다. 이 문장은 히브리어 문법책에 예문으로 자주 등장하는 전형적인 “간접 명령문”이며, 말하는 이의 “의지”를 반영하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빛이 있으라.』라는 명령문이 가장 적합한 번역이다. 그런데 <새한글성경>은 「빛이 생기기를!」로 번역하여 말하는 이의 “의지”와 무관하게 “생기기를 바란다”는 식의 “기원문”처럼 만들었다. 하물며 『있으라.』가 고어체여서 젊은 세대가 이해하기 좋도록 현대어로 전환한 것이 「생기기를!」이란 말인가? 뭔가 달라 보이게 하려고 억지로 문장을 변형해서 더 어색하게 만든 엉터리 번역일 뿐이다.

<한글킹제임스성경>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물들 가운데 창공이 있으라. 창공으로 물들에서 물들을 나누게 하라.” 하시니라』(창 1:6).

<새한글성경>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물 한가운데에 둥근지붕(궁창)이 생겨 물과 물 사이가 나누어지기를!”」

창세기 1:6에서 하나님께서 『물들 가운데 창공이 있으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새한글성경>은 이 『창공』을 「둥근지붕(궁창)」이라고 번역하였다. <개역한글판성경>과 <개역개정판성경>에서는 「궁창」이라고 번역했었고, <새번역>에서는 「창공」이라고 번역했었는데, 이번에는 「둥근지붕」이라고 번역한 뒤 잘 이해 못할까 봐 설명으로 괄호 안에 「궁창」을 넣었다. 올바르고 적절한 현대어 “창공”이 있는데, 「둥근지붕」이라고 번역한 것은 어원 분석을 잘못한 오역일 뿐만 아니라, 젊은 세대를 위한 “현대어”는 더더욱 아니다. 뭔가 달라 보이게 하려고 무척 애를 썼으나 더 조악하게 만들고 말았다.

<한글킹제임스성경>
『그런데, 보라,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서』(마 8:2).
『내가 너희의 소유의 땅에 있는 한 집에 문둥병을 두거든』(레 14:34).

<새한글성경>
「그런데, 보라, 심한피부병 앓는 사람이 다가와」
「너희가 차지한 땅에 있는 집에 내가 두드러진 자국이 생기게 했다고 하자.」

<새한글성경>은 성경에서 『문둥병자』를 없애고 모두 「심한피부병 앓는 사람」으로 바꾸었다. 문둥병은 출애굽기 4:6에 처음 언급되며, 모세에게 보여 주신 첫 치유의 표적이다. 레위기 13-15장에서도 다른 피부병과 달리 취급하도록 명령하고 계신다. 그냥 피부병은 “불결하다”고 선언하지 않지만, 문둥병은 “불결하다”고 선언해야 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문둥병자”가 고어체라 그 뜻을 모르는가? 그래서 굳이 현대어로 “심한피부병 앓는 사람”이라고 해야 “문둥병자”인 것을 이해하는가?

레위기 13,14장에서는 “의복의 문둥병과 집의 문둥병”이 언급되는데, <새한글성경>은 이 『문둥병』을 「두드러진 자국」이라고 번역하였다. 요즘 젊은 세대는 “두드러진 자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그것이 “의복이나 집에 생기는 문둥병”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을 성경이라고 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아무런 조명도 주시지 않음을 알라.

<한글킹제임스성경>
『곧 물 속에서 올라오시자, 하늘들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자기 위에 내려오는 것을 보시더라』(막 1:10).

<새한글성경>
「곧바로 예수님이 물속에서 솟아오를 때에 보시니, 하늘이 찢어지고 성령님이 비둘기처럼 예수님에게 내려오셨다.」

마가복음 1:10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침례인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신 후 하늘들이 열리고 성령께서 내려오시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새한글성경>은 하늘들이 열리는 장면을 「하늘이 찢어지고」라고 번역하였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하늘이 열렸다”는 표현을 “하늘이 찢어졌다”고 하는가? 아니면 “하늘이 찢어졌다”고 해야 “하늘이 열렸다”는 뜻으로 이해하는가? 더욱 의문스러운 것은 같은 내용을 설명하고 있는 마태복음 3:16에서는 <새한글성경>에서도 “하늘이 열렸다”는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잘못된 원어 분석으로 오역을 하고 젊은 세대들이 더 잘 이해하는 성경이라고 광고하는 대한성서공회는 아무렇게나 “새 상품”을 만들어 돈을 벌려는 파렴치한 장사꾼들임을 명심하라!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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