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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과 세대적 진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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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6년 04월호>
“요한복음”은 요한계시록을 방불케 할 만큼 깊이 있는 계시와 예언을 담고 있는 복음서이다. 두 책 모두 사도 요한이 기록했으며, “교회 시대부터 영원까지” 이어지는 하나님의 경륜을 공통적으로 포괄한다. 구조적인 측면에서 볼 때, 요한계시록이 사건의 흐름을 세대주의적 순서에 따라 직관적으로 기술했다면, 요한복음은 그와 동일한 진리들을 책 곳곳에 산재시켜 놓았다. 그러나 요한복음 전체에 흩어져 있는 이 진리들을 하나로 취합하면, 결과적으로 요한계시록이 제시하는 “전천년주의적 세대주의 구도”가 명확히 잡힌다. [“요한계시록”의 세대주의적 구도에 관해서는 본지 406호의 “85페이지”에 게재한 「요한계시록 요약」 도표를 참고하기 바란다.]2. 요한복음에 계시된 “대환란”
대환란은 교회가 휴거되면 시작되는, 『그와 같은 것은 세상이 시작된 이후로 지금까지 없었으며, 또 결코 없을』(마 24:21) “전무후무”한 대재앙이다. 요한복음에는 『야곱의 고난의 때』(렘 30:7)라고 불리는 이 “7년 대환란”에 관한 계시가 담겨 있다.
1) 요한복음 16:16-19 - “7번의 잠시 후면” vs. “7년 대환란”
『잠시 후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할 것이요, 또 잠시 후면 너희가 나를 볼 것이라.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라.”고 하시더라. 그때 제자 중에 몇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잠시 후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할 것이요, 또 잠시 후면 나를 볼 것이라.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라.’고 주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 무슨 뜻이냐?”고 하더라. 그러므로 그들이 말하기를 “‘잠시 후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무슨 뜻이냐? 우리는 주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모르겠노라.” 하니 그때 예수께서 그들이 자기에게 묻고자 하는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잠시 후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할 것이요, 또 잠시 후면 너희가 나를 볼 것이라.’고 말한 이것에 관하여 서로 묻고 있느냐?』(요 16:16-19)
본문 16절의 『잠시 후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할 것이요[죽음], 또 잠시 후면 너희가 나를 볼 것이라[부활].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라[승천].』라는 말씀의 기본 의미는, 『잠시 후면』 주님께서 붙잡히셔서 십자가에 처형되실 것이고, 또 『잠시 후면』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지셔서 제자들이 주님을 다시 뵐 것이며, 주님께서는 아버지께로 가실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동일한 본문을 “역방향으로” 읽는다면, 주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실 것이기 때문에(『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라.』) 잠시 후면 주님을 다시 뵐 것이라는(『잠시 후면 너희가 나를 볼 것이라.』) 또 하나의 의미가 생긴다. 즉 아버지께로 가신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제자들을 다시 만나실 것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요한복음 16:16-19은 “잠시 후에” 있게 될 주님의 “재림”을 암시하는 위대한 말씀이다. 그것도 『잠시 후면』이 “19절”까지 총 “7번” 언급됨으로써, 주님께서 『잠시 후』, 곧 “7년” 대환란 후에 재림하실 것을 계시하는 것이다. “19절” 다음으로 이어지는 “20절 이하”의 “대환란” 관련 내용 또한 문맥상의 상호연관성을 고려할 때 그 점을 강력히 뒷받침해 준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울고 애통할 것이나 세상은 기뻐할 것이며, 너희는 슬퍼하겠으나 너희의 슬픔은 기쁨이 되리라. 여인이 해산할 때면 그 때가 다가오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고 나면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기쁨 때문에 더 이상 그 고통을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요 16:20,21). 이 구절에서 “해산하는 여인”은 요한계시록 12장의 “해로 옷입고 달을 밟고 서 있는, 머리에 열두 별이 있는 면류관을 쓴 여인”(계 12:1)으로, “대환란 때의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아이를 밴 여인이 산고로 울부짖으며 출산하려 함으로 아파하는 상황(계 12:2)은, 기본적으로 요한계시록 6-18장에서 “대환란”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언급된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6장에서 이야기된 “해산하는 여인”이 바로 그 “대환란 때의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은, 예수님께서 “7번”의 『잠시 후면』을 통해서 “7년 대환란”을 암시하신 뒤에 그 “해산하는 여인”을 언급하신 까닭이다. 말하자면 주님께서는 『잠시 후면』 있게 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대해 말씀하심과 동시에, 장차 있게 될 “7년 대환란”과 그 후의 “재림”을 암시하심으로써 “이중 계시”를 하셨던 것이다.
2) “대환란” 기간에 유대인들이 영접할 “멸망의 아들”에 관한 계시
『내가 나의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나 너희가 나를 영접하지 아니하는도다. 만일 다른 자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그를 영접하리라』(요 5:43).
유대인들이 그들의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서 영접하게 될 자는 스스로를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며 역사의 전면에 등장할 “멸망의 아들”이다. 『아무도 어떤 모양으로든지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이는 먼저 배교하는 일이 이르지 않고, 또 그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지 않고서는 그 날이 오지 아니함이라. 그는 대적하는 자며, 또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받는 대상 위에 자신을 높여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하나님처럼 보여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하느니라』(살후 2:3,4).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유다 이스카리옷”을 지목하여 “멸망의 아들”이라고 하셨는데(『내가 그들과 함께 세상에 있었을 때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켰나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그들을 내가 지키었고 멸망의 아들[유다 이스카리옷] 외에는 그들 중 아무도 잃어버리지 아니하였으니 이로써 성경이 이루어지게 한 것이옵니다.』 - 요 17:12), 성경은 이 “멸망의 아들”이 또다시 출현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으며(살후 2:3), 요한계시록에서 그 정체를 추가적으로 계시한다. 『또 그들[초자연적인 메뚜기들]에게는 자기들을 다스리는 왕이 있으니 끝없이 깊은 구렁의 천사요, 그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아바돈이며 헬라어로 그의 이름은 아폴루온이더라』(계 9:11).
“멸망의 아들”의 “멸망”이란 단어는 위의 요한계시록 9:11에서 말씀하는, “멸망, 멸망시키는 자”라는 뜻의 “아바돈”(“아폴루온”)과 같은 단어이다. 주님께서 『마귀』(요 6:70)라고 하셨던 “유다 이스카리옷”이 주님에 의해 『멸망의 아들』(요 17:12)이라고 불린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육화한 “마귀”이자 “멸망의 아들” 자신이었던 것이다!
“멸망의 아들”인 “유다 이스카리옷”이 주님을 배반한 대가로 받은 은 삼십 개를 성전에 내던지고 나가 목매어 죽은 뒤(마 27:4,5) 간 곳을 제자들은 『그 자신의 거처』(행 1:25)라고 불렀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현재 『그 자신의 거처』인 『끝없이 깊은 구렁』(계 9:11)에 가 있는 것이다. 장차 그 『끝없이 깊은 구렁에서 올라오는 짐승』(계 11:7, cf. 계 17:8)으로 언급되는 이 “멸망의 아들”은 말씀 그대로 땅 속 거처에서 “올라올” 것인데, 초림 때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유대인들은 대환란 때 자기 이름으로 올 이 “멸망의 아들”을 그들의 하나님으로서 영접할 것이다(요 5:43). 그러나 “멸망의 아들”은 결국 멸망으로 들어가게 된다(계 17:8). 그가 들어갈 실제적인 멸망의 장소는 “영원한 불못”이며, 이 엄청난 사건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짐승[멸망의 아들]이 잡히고, 짐승 앞에서 기적들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그와 함께 잡혔으니 그는 짐승과 더불어 그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과 그의 형상에 경배한 자들을 속이던 자라. 이 둘이 유황으로 불타오르는 불못에 산 채로 던져지더라』(계 19:20).
3. 요한복음에 계시된 “재림”
요한복음에는 “요한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계시된다. 『그때 베드로가 돌아보니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따라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는 또한 저녁 먹는 자리에서 주의 가슴에 기대어 ‘주여, 주를 배반할 자가 누구니이까?’ 하고 묻던 자더라.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말씀드리기를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나이까?”라고 하니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라오라.”고 하시니라』(요 21:20-22). 이 구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로 엄청난 사실을 예고하신다. 즉 『내가 올 때까지』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명백히 주님의 “재림”에 관한 예언이다. 요한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죽지 않고 머물러 있을 것이라는 얘기인즉, 분명 그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살아서 머물러 있었다. 요한은 그 자신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때 “미래로 이동하여” 주님의 재림을 보았던 것이다!
요한계시록 1장에서 사도 요한은 “팟모라고 하는 섬”에 있었고(계 1:9), 그때 그는 성령님에 의해 “미래의 재림 시점”까지 옮겨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보았다. 『내가 주의 날에 성령 안에 있었으며』(계 1:10)와 『내가 즉시 영 안에 있게 되었는데』(계 4:2)와 같은 표현은 사도 요한이 어떤 특수한 변형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미래의 주의 날”로 “초자연적인 이동”을 한 것을 말한다. A.D. 90년경 팟모 섬에 “살아 있던” 요한은 기적적인 방법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로 이동했던 것이고, 그래서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도 요한은 주님의 말씀 그대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죽지 않고” 머물러 있었다. 『또 내[요한]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흰 말이 보이더라. 그 위에 앉으신 분은 신실과 진실이라 불리며 의로 심판하고 싸우시더라. 그의 눈은 불꽃 같고 머리에는 많은 왕관이 있고 또 한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자신 외에는 아무도 모르며 피에 적신 옷을 입었는데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불리더라. 또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정결한 세마포를 입고 흰 말들을 타고 그를 따르더라』(계 19:11-14). 이렇게 해서 요한은, 하늘이 열리면서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모습을 “살아서” 목도했던 것이다. “요한복음”은 이처럼 “요한의 운명”에 관한 계시를 통해 미래에 있을 재림을 다루고 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냐?』(요 21:22) B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