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논단 분류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죽음을 모독한 목사들
컨텐츠 정보
- 2,775 조회
- 목록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9년 08월호>
목회자들의 시국선언. 이것은 자칭 양무리를 친다는 목자들이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부정하고 세상 정치에 대해 비성경적인 간섭을 하는 일이다. 한국 교회에서는 지난 6월 한 달 동안 목사들의 정치적 선언들이 줄을 이었는데, 그중 정치적 선언을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모독했던 선언이 있었기에 이렇게 펜을 들 수밖에 없게 되었다.문제의 시국선언은 지난 6월 18일, 서울 종로에 위치한 기독교회관에서 목회자 1,024인이 현 정부를 규탄한 선언이었다. 7월 2일부터는 7,80년대의 독재정권에 맞선 목요기도회의 전통을 이어 시국기도회를 시작할 것이고, 8월부터는 인천, 대전, 부산, 대구 등 전국을 돌며 기도회가 이어질 것이라며 그들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이기라도 하실 것처럼 호언장담하던 그들의 선언문에는 대체 어떤 내용이 들어 있었던 것일까? 한국 기독교의 정치적 좌파에 해당하는 이 목회자들은 선언문의 맨 상단을 <개역성경>의 이사야 53:5(『그러나 그는 우리의 허물로 인하여 상처를 입었고, 그는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상하였도다.』 - <한글킹제임스성경>)로 장식한 선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누구를 탓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처참하게 무너지는 민주주의와 평화의 현실에서 우리의 죄악을 봅니다. 우리는 시커멓게 타 버린 용산의 주검 앞에서 우리 스스로 최소한의 공생의 원칙조차 지켜내지 못했던 타 버린 양심을 목도합니다. 부엉이 바위에 묻어 있는 핏자국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진 예수의 죽음을 봅니다. 하나님의 양떼를 돌보라는 하늘의 명령 앞에서 한없이 게으르고 무능했던 우리의 죄악이 너무 큽니다. 정권의 잘못 때문에 억울하게 찔리고 상처입은 모든 이들에게 대신 용서를 빌고 싶습니다.”
[필자는 그들 1,024인이 현 정부에 대해 어떤 진보적 독설을 퍼부었는가에는 관심이 없다. 자살자의 드러난 죄가 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망각의 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오히려 그 죄인에게 동정심을 보이며 그가 억울하게 찔리고 상처입었다는 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연결시킨 것에 오늘의 초점을 맞출 뿐이다. 소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는 목회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이 실로 무지하고 반성경적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그들을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양떼를 돌보라는 하늘의 명령 앞에서 한없이 게으르고 무능했던 그들의 죄악이 너무 크다는 말은 사실이다. 주님은 삯꾼에 대해서 『그가 삯꾼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양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느니라.』(요 10:13)고 하셨다. 양떼에는 관심이 없이 세상에 기웃거리는 그들은 말 그대로 한없이 게으르고 무능한 삯꾼들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삯꾼일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전혀 알지 못한 채 양들을 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의 자발적인 죽음이었다.
성경은 『이는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할 수 없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기 때문이라.』(히 4:15)고 말씀한다. 죄 없으신 주님께서 죄인들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그분의 생명을 내어 놓으신 것은 죄를 반드시 심판하셔야 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내어 놓으신 것이다. 『아무도 생명을 내게서 빼앗을 자가 없으나 내 스스로 그것을 내어 놓느니라. 나에게는 생명을 내어 놓을 권세도 있고, 또 그것을 다시 얻을 권세도 있노라. 이 계명은 내가 내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것이니라』(요 10:18). 세상의 구주께서 죄인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생명을 내어 놓으신 것과 전 대통령이 자신의 죄에 대한 형사처벌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자살을 택한 것을 동일선상에 놓을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죽음인 반면, 그 자살자의 죽음은 자신의 죄마저도 감당할 수 없었던 극단적인 선택이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여 그들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기 위한 죽음이었다.
성경은 『그는 우리의 죄들을 위한 화목제물이시니, 우리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들을 위한 것이니라.』(요일 2:2)고 말씀한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제물이셨다. 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믿음으로써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도 그의 아들의 죽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으니 더욱더 화해하게 된 우리는 그의 생명으로 인하여 구원받게 되리라』(롬 5:10).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분을 믿는 자들을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여 구원받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현재 그들에게 주어진 주님의 생명으로 인하여 오는 미래에도 그들의 몸을 구원받게 한다(롬 8:23).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담당하시고 죽으심으로써 그분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현재와 미래에 있어 생명을 보장하고 계시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땅에 떨어져 죽은 한 알의 밀로서 지금에 이르도록 많은 영생의 열매를 맺으셨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그러나 부엉이 바위에서의 죽음은 어떤 열매를 맺었는가? 그 죽음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여 하나님과 화해하게 한 죽음이었는가, 자신의 죄와 수치에서 벗어나기 위한 도피 행위였는가? 그것은 그 죽음을 추모하고 신화화하는 이들에게 현재와 미래에 있어 생명을 보장하고 있는 것인가? 1,024인의 목회자들은 마치 갈보리의 십자가가 아닌 부엉이 바위 위에서 하나님과 화해하려는 듯 죄인의 자살 장소를 애달프게 미화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피가 흘려진 죽음이었다.
성경은 『그러므로 너희 자신을 조심하고 모든 양떼에게도 그리하라. 이들을 위하여 성령께서는 너희를 감독자들로 세우셨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게 하셨느니라.』(행 20:28)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교회인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하나님의 피로 죄씻음을 받은 거룩한 존재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는 우리의 죄사함을 위해 흘려진 “하나님의 피”였다! 『그 사랑하시는 이 안에서 우리가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보혈을 통하여 구속, 곧 죄들의 용서함을 받았느니라』(엡 1:7). 『이는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너희가... 구속된 것이...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기 때문이니라』(벧전 1:18,19). 흠 없으신 주님의 보혈은 죄인의 양심을 정결케 하여 지금까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고 있다(히 9:14).
그러나 부엉이 바위의 핏자국은 한 거듭나지 못한 죄인의 피가 흘려진 것이다. 그의 피로는 누구의 죄도 씻을 수 없다. 심지어 자신의 죄조차도 씻지 못했다. 그 피는 죄인들의 양심을 정결케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했다. 그 피로 죄사함받고 하나님을 섬기게 된 사람이 누구인가? 죄인의 핏자국에는 죄사함의 능력이 전무한 것이다.
1,024인의 목회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보인 무지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 아닌 역사적 예수, 곧 한 인간의 죽음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다(딤후 3:16). 그들은 무신론자들이다. 그들의 평소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인간의 죽음으로 보기 때문에 그런 감상적인 헛소리들을 목회자들의 시국선언이라며 발표하기에 이른 것이다.
필자는 그들을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들이라고 보지 않는다. 자살자의 핏자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보는 그들이 과연 하나님의 종들인 것인가? 그들은 주님의 죽음과 무관한 사람들이다. 죽은 자들로부터 사흘 만에 부활하시어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신(롬 1:4)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무덤에 묻혀 있는 그 죄인의 죽음과 감히 비교한다는 것은 그들이 주님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무척 대범한 죄인들이라는 증거이다.
주님은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셨다. 『경건의 신비는 논쟁의 여지없이 위대하도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으로 나타나셨고 성령으로 의롭게 되셨으며, 천사들에게 보이셨고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셨으며, 세상에서 믿은 바 되셨고 영광 가운데로 들려 올라가셨음이라』(딤전 3:16).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려 죽으신 주님! 부활하시고 승천하시어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으신 그 하나님의 어린양을 모독하지 말라. 『구원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계 7:10).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은 권세와 부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다. 보좌에 앉으신 분과 어린양께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토록 돌려짐이 마땅한 것이다(계 5:12,13).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