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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은 능력으로도 말씀을 지킨 필라델피아 교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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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6년 10월호>
- 바른 헬라어 본문의 편수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촉발된 “헬라어 필사본”의 유입은 비잔티움의 멸망(A.D. 1453)을 전후하여 서쪽으로 망명한 학자들에 의해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 즈음 근대 역사 문헌학 및 원문비평학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로렌초 발라”가 등장했는데, 일찍이 “사도신경”이 열두 사도와 관련이 없음을 밝혀내는 업적을 달성했던 그는, 말년에 <각 언어로 쓰인 다양한 사본들에서 수집한 신약 주석>이라는 위대한 저술을 남겼다. 내용인즉, 바르게 보존된 헬라어 본문과 비교해 보니, 라틴 벌게이트의 “고해성사를 행하라”라는 표현은 본래 “회개하라”(마 4:17)로, “(혼인) 성사”라는 표현은 “신비”(엡 5:32)로 번역되어야 했다는 것이었다. (후일 그의 책이 로마카톨릭의 “금서목록”에 들었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로마카톨릭 체계의 근간을 뒤흔드는 내용이 담긴 <각 언어로 쓰인 다양한 사본들에서 수집한 신약 주석>은 발라가 책을 출간하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하마터면 사장될 뻔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섭리적으로 그 원고를 “다음 주자”에게 넘겨 세상에 나오도록 하셨다. 그 원고를 입수한 이는 바로 최초의 “표준원문” 편수자 에라스무스였다. 당시 에라스무스는 이미 성경을 알레고리적, 철학적으로 해석하던 암흑시대의 전통이 얼마나 비성경적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이는 영국 옥스퍼드에서 바울 서신을 가르치던 존 콜렛으로부터 배운 것이었는데, 콜렛은 헬라어로 쓰인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저작을 연구하여 성경을 문자적, 역사적(문맥적)으로 해석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교회의 전통”임을 밝힌 학자였다. 콜렛은 번역자의 사견과 미흡한 본문 이해가 반영된 라틴 벌게이트로는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며, 헬라어 본문을 직접 연구할 것을 에라스무스에게 권했다.
콜렛의 조언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의 진의를 탐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헬라어 자료들을 찾아 유럽 곳곳을 다니던 에라스무스는, 벨기에의 한 수도원에서 운명적으로 발라의 저작을 발견하게 되었다. 발라의 저작을 읽으며 라틴 벌게이트의 오류를 바로잡을 신약 헬라어 본문 전체의 편수가 필수적임을 절감한 에라스무스는 곧바로 그 작업에 돌입했다. 이윽고 그는 비잔틴 계열의 사본들이 일관되게 진술하는 내용을 담은 헬라어 신약 본문을 완성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라틴 벌게이트를 수백 곳 이상 바로잡은 헬라어-라틴어 대역 신약 성경을 펴내기에 이르렀는데, 오늘날에 흔히 “에라스무스 제1판” (A.D. 1516)이라 불리는 성경이 바로 그것이었다.
- 모국어 성경의 번역 -
에라스무스의 성경은 면죄부 판매로 대표되었던 로마카톨릭의 만행에 대한 성토를 끌어내는 확실한 촉매제가 되었다. 그러한 흐름은 그간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에 의해 주장되었던 “만인제사장직”(Priesthood of all believers)의 교리가 시나브로 보편화된 것과 맞물려 더더욱 폭발력을 얻었다. 부패한 교황이나 사제들의 가르침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청할 필요 없이, 누구나 직접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을 올바로 섬길 수 있다는 사상이 유럽 전역을 강타한 것이었다. “라틴어 카르텔,” 즉 변개된 라틴 벌게이트와 그 해석 및 번역에 대한 독점권을 기반으로 세상을 지배하던 로마카톨릭으로서는 악재도 그만한 악재가 없었다.
그 일에 가장 먼저 뛰어들었던 사람은 루터와 틴데일 같은 개혁자들이었다. 툴루즈 공회(A.D. 1229) 이후로 성경 번역은 화형을 감수해야 하는 일임이 이미 널리 알려진 바 있었으나, “바른 성경이 모든 인간의 손에 들려지게 해서 직접 성경의 빛을 따라가게 하자”는, 그리고 “(사제들조차 잘 이해하지 못하는 라틴어가 아니라) 평범한 백성들에게 성경을 모국어로 명확하게 제시해서 본문의 구성, 순서, 의미를 이해하도록 함으로써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전통으로 진리를 왜곡하지 못하게 하자”는 루터와 틴데일의 열정은 꺾일 줄 몰랐다. 그들은 결국 각각 “에라스무스 제2판”과 “에라스무스 제3판”을 대본으로 하여 독일어와 영어 성경을 번역하는 위업을 달성하고야 말았다(신약 기준으로 A.D. 1522년과 A.D. 1526년). 덧붙이자면, 킹제임스성경의 번역자들은 틴데일이 번역한 본문에서 구약은 75%를, 신약은 84%를 그대로 채택했다.
루터와 틴데일의 번역본은 문자 그대로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는데, 영어 성경의 경우 번역자 틴데일이 화형당하고 그 성경의 유통 및 소유를 금지하는 법적 조치가 내려졌음에도, 처음 출간된 수천 부에 더해 암시장에서 생산된 해적판까지 성행할 정도였다. 합법적 경로로 구할 수 있는 루터 성경의 인기는 당연히 훨씬 대단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루터의 대적조차 “제화공, 여성, 모든 종류의 못 배운 자들 등 그들 가운데 누구라도... 어떻게든지 독일 글을 배워 모든 진리의 원천인 양 여기며 눈에 불을 켜고 읽는다.”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 모국어 성경의 보급 -
모국어 성경의 보급 때문에 백성들 사이에서 “로마카톨릭의 교권”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는 것은, 그간 성무금지령이나 파문이 내려질까 두려워 “라틴어 카르텔”의 비위를 맞춰야 했던 영주들 입장에서는 퍽 달가운 일이었다. 당시 영주들은 신성로마제국 전체 농지의 3분의 1에 달하는 로마카톨릭의 장원을 지켜 주면서도, 거기에서 생산되는 농작물로부터 세금을 거두지 못하는 불합리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는 바꿔 말해 “개혁파”에 가담하면 그 땅을 영주 자신이 차지하고 막대한 세수를 더 거둘 수 있게 된다는 뜻이었다. 따라서 로마카톨릭과 깊은 관계에 있지 않은 영주들로서는 “개혁 신학”에 대한 믿음과 관계없이 “개혁파”가 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암흑시대 말 급속도로 발전한 상공업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던 자유 도시들도, “개혁 신학”을 반기기는 마찬가지였다. 지난 연재에서 언급한 바대로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의 비교적 자유로운 활동, 그리고 도시민들의 높은 성경 구매력이 그 주요한 이유였지만, 로마카톨릭이 상공업 및 금융업 종사자를 대상으로 내린 정죄에 대한 반작용도 그에 한몫했다. 로마카톨릭은 “상업적 이윤”의 창출과 “이자” 수취를 “교리적으로” 제약했는데, 의도적이었든 아니었든 이는 신흥 세력의 형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여 “라틴어 카르텔”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이었다. 절대적 빈곤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탐구하는 일이란 먼 나라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반면 개혁자들은 사람에게 각자의 부르심이 있을 뿐 직업 자체에 의한 영적 우월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가르침으로써, 결과적으로 “상업의 발전”을 장려하고 자유 도시들의 지지를 얻었는데, 이 일은 “라틴어 카르텔”의 붕괴를 더욱 앞당기는 요인이 되었다.
그런데 영주들과 자유 도시들의 선택은 갈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랑스 국왕, 스페인 국왕 등 소위 “큰 그림”을 보는 통치자들의 입장에서는 영주들의 그와 같은 선택이 “분열을 초래하는 것” 혹은 “기득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제1,2차 슈말칼덴 전쟁, 30년 전쟁, 위그노 전쟁, 80년 전쟁 등이 잇따라 발발했고, 이와 같은 일련의 무력 충돌은 사실상 개혁파가 승리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이로써 영주들과 자유 도시들의 백성들에게 로마카톨릭이 아닌 개혁주의자들을 따를 “신앙의 자유”가 허락되었던 것이며, 스코틀랜드나 잉글랜드의 사정도 이와 비슷했다. 말하자면 피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과정 끝에 개혁주의를 받아들인 의회가 기득권 세력에 대항하여 승리를 거머쥔 것이다.
- 참된 신앙의 자유를 찾아 -
통쾌한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치권력을 등에 업고 승리를 쟁취했다는 점은 개혁주의자들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 준다. 메노 시몬스가 이끈 재침례교도나 존 후스의 후예인 모라비안 등의 “진짜”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그런 투쟁에 함께하지 않았다. 제아무리 의도가 선하더라도 국가 권력과 결탁한 신앙은 반드시 “강제된 신앙 고백”을 수반하기에, 스스로에게서 우러나온 “순수한 믿음”의 고백을 중시했던 그들로서는 타협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까닭에 “제도권 안”으로 편입될 기회를 거부한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종교 개혁이 완수된 이후에도 한동안 로마카톨릭으로부터, 또 때로는 개신교도들로부터 박해를 받아야 했다. 그렇게 영원히 정처 없이 네덜란드, 벨기에, 동유럽 등지를 전전할 것만 같았던 그들의 삶에 전환 국면을 가져온 것은, “신대륙의 발견”이라는 뜻밖의 사건이었다. “신대륙으로의 이주”라는 선택지가 제도권 안에서 나름대로의 안정을 영위하던 이들보다는 정처 없이 떠돌던 그들에게 훨씬 더 매력적으로 보였으리라는 점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물론 신대륙에서도 박해는 있었다. 그곳의 “주류”인 회중교인, 장로교인, 영국 국교도 등은 “허가받지 않은 집회”를 열거나 “교회 운영을 위한 세금을 내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의 재산을 압류하고, 그들을 때리고, 가두고, 추방했다. 그러나 그 정도의 텃세는 저 유럽 대륙에서 벌어지는 일과 비교하면 새 발의 피 수준이었기에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신대륙인 아메리카로 몰려들었다. 그리하여 메노파 출신 목사 존 클라크가 “미국 최초의 침례교회”를 세웠고(A.D. 1638), 개신교도들의 율법주의적 정부 운영에 환멸을 느낀 청교도 목사 로저 윌리엄스 역시 양심의 자유를 주장하며 침례교회를 세우기에 이르렀다(A.D. 1639). 그렇게 해서 약 150년쯤 흘렀을 때, 미국이라는 나라는, 정부로부터 어떤 간섭도 받지 않고 “무엇이든 자유롭게 믿을” 권리를 주장하는 침례교도들의 목소리를 “수정헌법 제1조”에 반영하는 국가가 되어 있었다(A.D. 1791). B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