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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칭 여선지자 이세벨을 용납한 두아티라 교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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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6년 04월호>
두아티라 교회는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게 한 것”과 “음행하게 한 것”으로 인해 책망을 받았다. 세속적, 이교적 요소들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여서 “숱한 결혼”을 일삼았던 퍼가모 교회와 동일한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계 2:14,20). 주님께서는 그런 일이 벌어진 원인으로 퍼가모 교회에게는 “발라암의 교리를 가르친 것”을, 두아티라 교회에게는 “이세벨을 용납한 것”을 각각 지적하셨다. 그런데 “이세벨”은 “발라암”과는 “스케일”이 완전히 다른 인물이었다는 점을 우리는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발라암은 잔꾀를 내어 고작해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잠깐 바알프올에 가담하게 했을 뿐이었지만, 이세벨은 남편 아합의 권력을 등에 업고 아예 북왕국 전체에 바알을 숭배하는 체계를 구축했기 때문이다(왕상 18,19장).마찬가지로 두아티라 교회 시대에 나타난 배교의 실상은 퍼가모 교회 시대에도 발견되는 것들이었지만, 그것들이 훨씬 체계적으로 일어났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로마카톨릭이 퍼가모 교회 시대에도 에큐메니컬 공회들을 통해, 또 국가 교회로서의 강제력을 동원하여 어느 정도 수준의 체계화나 표준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 그러나 스머나 교회 시대에 이미 지나가 버린 오현제(五賢帝) 시대 이후로 제국은 이미 국운이 기운 상태였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중앙집권적인 행정 기능은 전처럼 수월하게 작동하질 않았고, 따라서 구석구석에까지 로마 교회의 입김이 닿기란 퍽 어려웠다. 이런 배경 속에 지역마다 교리나 실행의 편차가 발생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게다가 이때까지만 해도 로마 이외에 “총대주교좌”가 있는 다른 교회들(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옥, 예루살렘)도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 교회를 중심으로 한) 국가 교회의 표준화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 로마가 동과 서로 완전히 분열되고(A.D. 395), 두아티라 교회 시대로 접어들며 교황 절대권까지 확보한 뒤의 로마 교회의 위상은 전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앞서 언급한 다른 유력한 교회의 수장들이 “황제의 신하”의 신분에 매여 일정한 수준 이상으로 기를 펴지 못하는 데 반해, 유일하게 멸망한 서로마의 영토에 본거지를 두었던 교황은, (명목상으로는 그 또한 동로마 황제의 신하였을지언정) 상대적으로 훨씬 자유롭게 종교적 주도권을 확보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로마 교회에게 부족했던 것은 세속 권력이 가진 물리적인 강제력이었다. 만일 그러한 힘을 확보한다면, 그 오랜 숙원대로 다른 모든 교회들을 “머리”인 로마 교회 아래 “일치”시킬 수 있을 터였다.
- 황제 대관식 -
로마카톨릭의 숙원을 이룰 “백마 탄 왕자님”은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대제였다(A.D. 748-814). 그는 이베리아 반도를 거쳐 무서운 기세로 진군하던 이슬람 세력을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막아 낸 “기독교의 영웅” 카를 마르텔의 손자요, 프랑크 왕국의 메로빙거 왕조를 끝장내고 카롤링거 왕조를 개창한 피핀 3세의 아들로, 왕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함으로써 “대제”의 칭호를 획득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통치하였던 프랑크 왕국은 클로비스 1세의 개종(A.D. 496) 이래 로마카톨릭을 표방하고 있었던 전통적인 친로마 세력으로, 대부분 “아리우스파”였던 게르만족 국가들 틈바구니에서 늘 불안에 떨던 로마카톨릭에게는 참 고마운 존재였다.
로마카톨릭과 프랑크 왕국의 관계는 샤를마뉴의 아버지 피핀 3세가 왕위를 찬탈하는 과정에서 더더욱 끈끈해졌다. 허수아비 왕을 끌어내리겠다는 뜻을 품었을 때, 피핀은 교황에게 이렇게 물었다. “왕으로서의 권력을 실제로 갖고 있지 못한 자가 왕으로 있는 것이 옳습니까?” 교황은 “아니다”는 취지의 답변을 함으로써 왕조 교체를 승인했다. 이것은 “거래”였는데, 이는 교황이 피핀에게 그의 행위가 사리사욕에 의한 찬탈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것이라는 명분을 제공해 준 대가로 “아리우스파”의 침략으로부터의 보호를 약속받았기 때문이다. 로마 주변의 땅도 덤으로 따라왔다. 교황은 코앞까지 닥친 외세, 즉 랑고바르드(롬바르드)의 위협 앞에 “왕에게 복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위하는 것”(벧전 2:13, 14)이라는, 그야말로 말씀을 팔아치우는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그와 같은 정교유착 관계는 뒤이어 왕이 된 샤를마뉴 때 정점에 이르렀다. 그가 정복 전쟁을 벌이며 교황 레오 3세에게 보냈던 편지를 보면 그 관계가 어떠했는지 대번에 알 수가 있다. “저는 언제나 거룩한 로마 교회의 지극히 거룩한 보좌를 지킬 것입니다. 바깥의 이교도들과 불신자들의 공격으로부터 그리스도의 거룩한 교회를 지키고 내부 사람들에게 카톨릭 신앙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거룩한 아버지시여, 아버지의 몫은 마치 모세가 했던 것처럼 손을 들어 선한 싸움을 싸우는 우리를 돕는 것입니다.” 이 편지를 받고서 몇 해 후에 교황은 자신의 “사도적인 권위”를 사용하여 그동안 주인이 없던 “로마 황제”의 관을 샤를마뉴에게 수여했는데(A.D. 800), 그것은 계시록의 창녀 교회를 국가 교회로 둔 “로마”가 마침내 “부활”한 것이었다!
- 가짜 성경의 표준화 -
샤를마뉴는 제국 내의 모든 수도원과 주교가 있는 성당에 학교를 세우라 명하고 인재를 등용했다. 역사가들은 이때 일어났던 일을 “문예부흥”으로 평하면서 “카롤링거 르네상스”라는 매우 거창한 이름으로 부른다. 그러나 “문예부흥”은 이때 벌어졌던 일의 부산물에 불과했다. 정책의 본래 의도는 제국 내 교회들에서 “오류들,” 즉 “로마”와의 불일치를 제거하겠다는 것이었다. 지역마다 달랐던 기도하는 방법, 성가를 부르는 방법,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을 일원화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게 하겠다는 것이 왕의 뜻이었다. 모든 문학적, 예술적 연구의 방향은 이러한 목적하에 정렬되었다.
그 과정에서 프랑크 왕국 내의 교회들에서는 그나마 남아 있던 올바른 실행들마저 자취를 감추고 말았는데, 그 가운데 최악을 꼽으라면 바로 “바르게 보존된 <구라틴어 역본>의 본문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제롬이 교황의 명을 받아 <라틴벌게이트>를 완역했던 것이 벌써 수세기 전의 일(A.D. 405)이었으므로, 당시의 “공식적인” 라틴어 성경은 <구라틴어 역본>이 아닌 <라틴벌게이트>였다. 그러나 “실제로” 각 지역 교회에서 사용되었던 본문이 꼭 제롬의 결과물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구라틴어 역본>을 성경으로 믿고 있었던 각 지역 교회의 필사자들이 “새로운 번역본”을 마주했을 때,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 부패한 본문을 거부하고 원래의 본문을 고수한 결과였다. 그러나 “카롤링거 르네상스” 때 알쿠인이라는 학자가 그와 같은 “오류들”을 바로잡고 표준화된 <라틴벌게이트>를 제시함에 따라(A.D. 801), 이제 그것과 일치하지 않는 순수하게 보존된 라틴어 본문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 바알에게 꿇지 않은 무릎들 -
유럽 대륙 중서부에서 로마카톨릭이 강력한 돌풍을 일으키며 진리의 빛을 꺼뜨리는 동안에도, 동쪽에서는 그 빛이 미약하게나마 전파되고 있었다. 그 일에 동참한 사람들 가운데 두아티라 교회 시대를 대표하는 그룹은 7세기경 아르메니아를 중심으로 뻗어나갔던 “폴리시안”이었다. “사료”(史料)란 “승자의 기록”에 불과하므로 그것들을 샅샅이 뒤지더라도 “대세”를 거슬렀던 이 사람들의 실체를 정확히 규명하기란 어렵다. 그럼에도 이들이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고 믿는 성인들에게만 침례를 주었다는 것, 그리고 로마식 예배나 성직위계제도(니콜라파의 교리)나 유물 숭배 따위를 배격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폴리시안에게는 종종 “마니교도”라는 꼬리표가 따라붙곤 하는데, 그들이 삼위일체와 바울 서신의 교리를 매우 강조했다는 여러 증언과는 배치되는 내용이므로 적들의 편의(혹은 악의)에 의해 씌워진 오명임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동방 교회 출신의 키릴 형제(키릴과 메토디우스)도 이런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가 없다. 동방이라고 해서 서방보다 배교의 정도가 덜한 것은 아니었으되, 바르게 보존된 비잔틴 계열의 필사본이 있었다는 점과 체계적인 “배교 프로세스”를 강요하는 로마 교회의 마수가 뻗치는 데 상대적으로 어려웠다는 점으로 인해 약간의 희망의 불씨가 남아 있었다(중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는 “성상 숭배 문제”에 있어서도 동방 교회가 좀 나았다고 가르치지만, 그것은 아주 잠깐의 기간에만 들어맞는 이야기다).
선교사인 키릴 형제는 슬라브족의 언어를 직접 배워 그들에게 복음과 진리를 전파했는데, 당대에 있어서는 헬라어나 라틴어가 아닌 언어로 사역을 하는 것은 거센 반발을 감수해야 하는 혁신적인 일이었다. 게다가 이 일에는 “성경 번역”이 필수적이었는데, 슬라브족에게는 고유의 문자조차 없었다. 그러나 키릴 형제는 그러한 슬라브족에게 말씀을 전하겠다는 일념으로 “문자 발명”과 “성경 번역”이라는 두 가지 위업 모두를 달성했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글라골 문자”(오늘날까지도 사용되는 “키릴 문자”의 모체)와 “키릴 성경”이다. 바로 이런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암흑시대에도 진리의 빛이 완전히 꺼지지 않고 이어져 갔던 것이다. B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