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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의 경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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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4년 04월호>
1:17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늘의 창공에 두시고 땅 위를 비추게 하시며,1:18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두움을 나뉘게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
하나님께서 “빛들”을 설치하신 목적은 “표적과, 계절과, 날들과, 연수 그리고 빛을 내기 위해서”라고 되어있다(14절을 보시오). 성령님께서는 태양과 달을 거주지로 주신 것이 아니라 다른 목적으로 주셨음이 윗 구절에 분명히 나와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인간의 통치는 독수리가 날 수 있는 그 높이까지인 것이다(창1:26; 시115:16). 이 범위를 벗어나는 것은 거듭나지 못한 인간들에게는 ”진보“라고 불리우나(창3:17 -19 주석을 보시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침입”이거나 “경계를 벗어난” 행위인 것이다(창10:10-14). 비록 인간이 달에 다녀오기는 했어도 휴거가 있기 전에 그곳에 인간을 정착시키지는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태양은 낮을 달은 밤을 다스리도록 하셨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경륜(dispensationalism)에 있어 위대한 진리를 열어준다. 창세기로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에 펼쳐진 하나님의 경륜에 따르면,
1. 하나님께서는 “일곱”에 의해 움직이신다(레위기 23,25장).
2. 지구는 이곳에 7000년 동안 있게 될 것인데, 마지막 1000년은 안식의 기간이다(계20:1-6).
3. 달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예표로서(아6:10) 항상 여성으로 사용된다(에베소서 5장, 창세기 2장 및 고린도후서 11:1-4을 비교해 보시오).
4. 태양은 항상 “그(His)”로 되어 있고 그리스도이신 “신랑”으로 언급된다(말라기 4:2; 시편 19:4,5; 마태복음 13:43을 보시오).
5. 7000년의 기간은 마지막 천년이 “안식”(계20:1-6)의 기간이며, 나머지 6000년은 B.C. 4000년과 A.D. 2000년으로 나누어진다.
6. 이 두번째 기간은(A.D.33-2000)은 성경에서 “밤”으로 불리운다(살전5:1-5).
7. 마지막 1000년은 천년왕국으로 안식의 기간이며 “아침 해가 떠오르는 시기”로 묘사되고 있다(말4:1-4; 마13:43 등을 보시오).
이로써 우리는 왜 그리스도인들이 이 시대, 즉 “밤”의 기간 동안 그리스도의 빛을 반사하게 되는가를 알 수 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빛”이신 그 분을 반사할 뿐 우리 자신은 빛이 없다. 주님은 마태복음 5:14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지만 동시에 요한복음 9:5에서 『나는 빛』이라고 하셨다. 우리는 이제 왜 이 세상이 그토록 달을 정복하고 싶어하는지를 알게 됐다. 달은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의 예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태양이 떠오르고 질 때마다 붉게 물드는 이유를 알게 됐다. 그것은 바로 갈릴리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에 있어서의 피흘림과 재림시 “피에 적셔진” 옷을 입고 오심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계14:20 주석을 보시오). 우리는 또한 왜 지구는 태양과 반대 방향으로 돌고 있으며, 왜 태양(Sun, “Son”)은 세상과 반대로 움직이는가를 깨닫게 된다. 동시에 동쪽에서 서쪽으로 나아가는 것이 왜 올바른 방향 선택인가를 알게 된다(창3:24 주석을 보시오). 심지어 우리는 왜 이 세상 그 어느 곳에 있는 어떤 이교도일지라도(시19:1-8) 과학과 교육과 종교의 모든 방해에도 불구하고 개종될 수 있을만큼 성경 말씀에 관해 충분히 알고 있는 그 이유를 이제야 알게된 셈이다.
태양과 달의 주요한 기능은 “어둠으로부터 빛을 나누는” 것이다(1: 18). (창세기 1:3-4에서 빛과 어두움이 나뉘는 것을 참조하시오. 그리고 성경 기자가 1-4절의 세째 하늘로부터 17,18절의 태양계 즉 둘째 하늘로 기록을 전개해 가고 있음을 주목하시오). 태양과 달의 주요 목적이 단합(Unity)이 아니고 나눔(Division)이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 인류에게는 성경은 또 한 번 인기 없는 책이 되어 버리는 셈이다. 왜냐하면 이 지구상에 있는 그 어떤 종교지도자(혹은 정치지도자)라도 “모든 사람을 하나의 거대한 가족으로 뭉치도록 하는 것”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창11:1-3 주석을 보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지상에 살았던 모든 이들 중 가장 잘 나누시는 분이셨으며, 그 분께서는 말씀의 원수들을 심판을 위해 하나로 묶으신 것과(눅23:1,12) “거듭난” 믿는 자들을 한 몸으로 연합시키신 것 이외에는(고전12:13 -25) 그 어떤 종류의 연합 에큐메니칼 프로그램도 제시한 바 없다. “현대인”은 예수님을 “도와” 그분의 기도를 성취시키고 싶어한다(요17:21의 경우). 이들은 흑인들, 백인들, 공산당원, 스페인계, 히피들, 감리교인, 유도전문가, 이태리인, 불교도, 보이스카웃, 민주당원들, 인도인들, 중국인, 교황들, 기술자들, 유대인들, 투우사들, 유치원 교사, GMAC 임원들, 인간 사냥꾼, 러시아인, 요리사, 마약 중독자, 사회주의자, 크리스챤, 만화가, 잠수부, 모델, 그리고 카톨릭신자들을 몽땅 하나로 뭉뚱그려 보려고 한다. 그러나 태양은 밤으로부터 낮을 나누고, 달은 (그리스도의 몸의 예표로서) 어두움을 밝히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어두움으로 분리되어서 그 어두움을 밝히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은 성경적인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셈이다(엡5:7-17, 골1:13, 살전5:1-6을 보시오).
1:19 저녁과 아침이 되니 넷째 날이더라.
하나님의 경륜에서 볼 때 이 시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이 있기 전 4000년의 막을 내리는 시기이다. 그 분은 “의의 태양”(말라기 4장)으로서 그랜드 캐년 위로 내리비치는 햇빛처럼 이스라엘에게 처음으로 자신을 나타내시게 된다.
왜냐하면 그가 초림하실 때에는 이스라엘은 병들어 있었고, 무려 4000년 간 참된 선지자도 정직하게 성경을 풀어주지 못하였다. 그들은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소경을 인도하는 소경”의 인도를 받고 있을 따름이었다(마태복음 1, 2장에 대한 주석에서 초림과 재림시의 유사점에 관해 살펴 보시오).
“물로부터의 출생”
1:20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를 “물들은 생명이 있는 생물들을 풍성히 내고, 땅 위 하늘의 넓은
창공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며,
1:21 하나님께서 큰 고래들과 물들에서 풍성하게 나온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모든 날개 있는 새들을 그 종류
대로 창조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
1:22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다산하고 번식하여 바다의 물들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1:23 저녁과 아침이 되니 다섯째 날이더라.
『물들은 ‧‧‧ 풍성히 내고 ‧‧‧』 최초의 동물의 생명은 물로부터 나왔고 이 물로부터의 출생은 항상 첫번째 출생, 즉 육체적 출생과 관련이 있게 된다. 구약과 신약 두 곳에서 모두 이 첫번째 출생을 “물로부터의 출생”(Water birth), 즉 신체적 출생으로 간주하고 있음은 자명하다. 이 출생은 한번도 침례라는 영적의식과 연관되어진 적이 없다. [침례 대신 성례전 혹은 성사로 부르는 그 어떤 종류의 의식과도 관계가 없다(사48:1; 23:4, 잠5:15-18 참조). 니코데모는 성사주의자 어거스틴(A.D.354-430)이나 “물개”(사도행전 2:38을 근거로 물침례받지 않은 사람은 성령을 받지 못했고 따라서 구원받지 못했다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빈정거리는 명칭-역자주)인 알렉산더 캠벨(1805)보다 훨씬 앞서서 창세기에서 의미하는 물의 의미를 분명히 깨닫고 있었다. 니코데모는 예수님께서 질문할 때(요3:4) 물침례를 출생과 혼동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답변하실 때 “침례”를 언급하신 적이 없다(요3:5). 예수 그리스도와 니코데모는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으며 카톨릭이나 캠벨주의자들이 아무리 성경을 왜곡하려고 해도 하나님의 호흡으로 된 그 분의 말씀을 변개시킬 수는 없다. 로마 교회는 요한복음 3:3-5을 근거 구절로 해서 “침례받은 자”(즉 물뿌림 받은 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 의 관주를 보면 비교적 성례제도와 똑같이 이 구절을 해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땅에 최초로 나타난 생명은 “물로부터의 출생”에 의한 것으로 이것은 육체적 물리적 출생이었지 영적 출생이 아니었다. 이 출생은 거듭나지 못한 죄인들의 천연적인 상태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들이 “거듭나야”함을 보여주고 있다(요3:3-7).
본문에 나타난 “생명”(Life)이란 단어가 넷째날 이후에 나타나고 있음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생명이란 단어는 성경에서 본문에 처음 나타나고 있다. 성경에서 처음 언급되는 사항은 꼭 기도하는 마음으로 되새겨 보아야 한다). 생명이란 단어가 이 시기에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성경 해석에 있어 전천년주의 해석이 정확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으로 모든 믿는 자들이 꼭 붙들어야 할 진리이다. 『그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요일5:12).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요3:36). 『하나님의 선물은 ... 영생이기 때문이라』(롬6:23). 여기까지는 예수 그리스도가 단지 태양으로만 묘사되어 있다. 즉 그는 이 지구 상의 물리적 빛과 물리적 생명을 창조하신 분이신 것이다. 그러나 오 내 영혼이여 주님을 찬송할지어다! 20절에 보니 그 분은 제 5일째 되는 날[“죽음”(death)이란 말이 창세기 5:5에 나와있음을 보시오.] 내 죄 때문에 죽으러 오셔서 생명을 주시는 것이다. 비록 소위 사신 신학자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매장하려는 짓을 저지르긴 했어도 말이다(A.D.1880, 니체; A.D.1969, 알티저). 창세기 1:3-4에 수립된 “1000년을 하루로 간주하는 체계”에 의해 어셔(Ussher) 대주교의 연대 측정은 분명히 확인되고 있으며, 이 지구상에는 창세기 1:3-27에 묘사된 재창조 이후 4000년(4일간)이 될 때까지 참 『생명』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새들은 바다 동물과 동시에 창조되었으며 식도락가들은 새와 생선은 “육류”와 대조되는 별미로 치고 있다. 새와 물고기는 새끼를 낳는 대신 알을 낳으며 둘다 이동에 있어서 꼬리를 사용하고, 매년 수천 마일씩 이동하는 습관을 갖고 있다. 이둘은 너무 흡사한 점이 많아서 일부 진화론자들 중에는 “최초의 새는 변이된 파충류 알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자도 있다고 한다(Scindewolf, 1950). 이러한 이론은 사실을 밝히기 보다 모든 과학 연구가 늘 그러하듯이 혼란만 가져다 줄 뿐이다. 깃털은 따뜻한 피를 갖고 있지 않은 냉혈동물로부터 나와야만 하는데(그런데 새들은 따뜻한 피를 갖고 있다), 어떻게 비늘로부터 깃털을 얻어낸단 말인가? 어떤 독자들이 이 주석의 내용을 비판하기 위해 극단적이 되는 것처럼 우리도 조금 밀어부쳐 본다면 이렇게 질문해 볼 수 있겠다. “대 자연”(mother nature)이 새와 물고기로 하여금 새끼를 낳는 대신 알을 낳도록 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가? 사실 과학은 너무도 자기 자신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과학대로라면 어린 독수리 새끼의 무게 때문에 어미가 비행중 땅에 떨어져야만 하고 숭어 암컷은 산소를 얻지 못하는 곳에서는 바닥으로 가라 앉아야만 되지 않는가? 또한 어미가 50만 마리의 새끼를 한번에 잉태할 수 있는가?(레위기 11:20-21에서는 메뚜기와 황충들은 칠면조, 조류 및 닭들과 같이 분류된다).
< 20절의 “하늘의 창공”에 대해서는 1:9,10의 주석을 보시오. >
생선은 인류에게 기본적인 동물성 음식이다. 물고기가 “생명”으로는 처음 언급된 것이므로 생명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인”을 제공해 준다. 정원을 가꾸는 사람이라면 해초라든가 죽은 물고기가 얼마나 유용한가를 알 것이다. 이것들은 인간의 배설물 이외의 그 어떤 비료보다도 우수하다. 대구간유(기타 생선기름)는 동화작용시 사람의 뼈의 구조 속에 들어가서 관절염 예방에 큰 효과를 나타낸다. 구운 생선은 부활하신 구세주의 즐겨 드시는 음식으로(누가복음 24장, 요한복음 21장) 생선을 주식으로 하는 일본과 중국사람들은 관절염 환자가 거의 없다. 사실 이들은 미국 사람들보다도 세 배 이상 그들의 뼈에 압력을 가하는 방식으로 살고 있다.
비늘과 지느러미가 없는 생선은 모세의 율법에서는 깨끗하지 못한 음식으로 간주된다(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그렇다.) - 레위기 11장. 그러나 그밖의 모든 생선은 무엇이든지 다 먹어도 좋다.
“그 종류대로”
1:24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어다니는 것과 땅의 짐승 그 종류대로 내라.” 하시 그대로 되니라.
1:25 하나님께서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라. 하나님께서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
이 본문에서도 여전히 “그 종류대로”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이 말은 다윈의 이론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입증하는 것으로 창세기 1:1과 더불어 유럽과 미국의 교육받은 지식인들이 성경을 미워하고 거부하도록 만드는 구절이다. 진화론에서 말하는 유인원으로부터 인간이 나왔다는 가설은 쥐가 박쥐로부터 나왔다는 것만큼 비논리적이다. 소위 말하는 “있는 것같지 않은 창조”는 (비록 그러한 창조가 있었다손치더라도) 하나의 “괴물”에 지나지 않거나 (예를들어 자바인을 보시오.) 혹은 인간이 기계적으로 움직여서 자연의 과정에 의도적으로 개입한 결과인 것이다. 자연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늘 종류대로 생명은 번식되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좀 더 부연하자면 자연과 우주에는 주어진 법칙의 체계가 있으며, 이는 음악과 미술에도 반영되어 있다. (적어도 1900년까지는 말이다.) 이 법칙의 파괴는 인간이 자신의 타락한 형상대로 하나님처럼 혹은 그보다 더 나은 “생활방식”을 만들어 내려고 시도했을 때 저지른 인간의 행위이다(전7:29). 이러한 무정부상태(욥21: 15)는 현대의 미술, 음악, 문학 등에 잘 나타나 있으며 현대 사회학 이론에 생생히 반영되어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적자생존”에 의해 “하늘 나라”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도덕적 행위와 종교적 행위에 의한 구원) 이를 위해서는 인간은 무질서와 비이성(그리고 자연법칙의 파괴)이 용납되고 권면될 수 있음과 아울러 심지어는 “예술적”일 수도 있음을 입증해야만 된다. 따라서 20세기는 “연합”(Union)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이질적 요소들을 억지로 하나로 묶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연합”(Union)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완성하신 것이다. 그 분께서는 이를 위해 이질적 요소를 “나누셨다.” 인간은 나눔으로써 연합을 이루지 못한다. 이는 나눔이 분열과 당파와 파벌과 파당과 전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로써 인간은 이질적인 요소들을 하나로 연합시키고자 억지로 하나님을 흉내내는 행위를 시작한 셈이다. 20세기에 있어 교황에서부터 정치가에 이르기까지 (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우리 모두에게 들리는 것이라고는 연합이야 말로 최고의 선이요, 이를 위해서는 어떤 방법도 상관없고 그 어떤 것을 포함시키더라도 상관없다는 선언뿐이다. 이러한 종교적 신념이 피카소, 클라인, 쿠닝, 플락 등의 그림과, 코프랜드, 스트라우스, 스트라빈스키 등의 음악과 그리고 정신과에서 사용하는 “감각훈련”(sensitibity exercises) 등을 이끌어 가는 주된 사상이요, 기독교 협의회 및 바티칸의 주요 정책 역시 이 신념에 따르고 있는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