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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말씀보존학회 - 한글킹제임스성경 및 진리의 지식을 전파합니다 &amp;gt; 바이블마스터 &amp;gt; 지식뱅크 - 성경 주석</title>
<link>https://www.biblemaster.co.kr/bb2</link>
<description>테스트 버전 0.2 (2004-04-26)</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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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다섯’- 죽음의 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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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8:12,13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 삼분의 일이 강타를 당하여 그것들의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이 그 삼분의 일을 비추지 못하고 또 밤도 마찬가지더라. 내가 보고 들으니, 하늘 한 가운데로 날아가는 한 천사가 큰 음성으로 말하기를 “땅에 사는 자들에게 화 있으리라, 화 있으리라, 화 있으리라. 이는 세 천사가 이제 불려고 하는 다른 나팔 소리들 때문이라.”고 하더라.』 <br/>이 모든 일의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일곱 나팔이 환란 중간에 비로소 울리기 시작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성도들이 구하던 복수도 환란 중간이나 중간을 바로 지나서 시작된다. 그들에게 “잠시만 더 쉬라”(6:11)는 말은 이 나팔 재앙들이 환란 중간에 일어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8:12의 하늘의 현상들은 6:12에서 일어나는 하늘의 현상들과 어울리는 구절이다. 따라서 계시록 7장은 삽입장임을 알 수 있다). 이 현상들은 환란 끝에 일어난다.<br/><br/><br/>9:1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내가 보니, 하늘에서 별 하나가 땅에 떨어지는데 그가 끝없이 깊은 구렁의 열쇠를 받더라.』<br/>이 별이 “그”로 지칭되는 인격임을 주목하라(계시록 1:20에서 우리는 별이 천사라는 사실을 알았다).<br/>『끝없이 깊은 구렁의 열쇠』. 이 구절은 학자들로 하여금 고민에 빠지게 하는 구절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엉터리이며 동화나 전설 또는 허구라고 일축해 버린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끝없이 깊은 구렁은 간단하게 설명될 수 있다. 성경은 사탄이 바닥이 없는 특별한 구덩이같은 “구덩이 사면”에까지 내려갔다고 말한다(사14:15). 바닥이 없는 구덩이는 땅을 파내려 가면 가운데가 빈 도우넛과 같은 모양이다. 성경은 땅의 중심에 그러한 구덩이가 있다고 말한다(지구의 중심을 나타내는 지리부도와 지질도를 보면 알 것이다!). 섭씨 235도를 훨씬 웃도는 이 “끝없이 깊은 구렁”에서 마귀의 세력들(6장에서 언급된 것처럼)이 환란기간 동안에 쏟아져 나온다. 마귀의 세력들은 나올 때에 “바닥”이 없는 구렁에서 나오는데, 이 구렁은 문자 그대로 “사면” 뿐이다. <br/><br/><br/>9:2,3 『그가 끝없이 깊은 구렁을 여니, 큰 풀무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는데 해와 공기가 그 구렁의 연기로 말미암아 어두워지더라. 또 그 연기에서 메뚜기들이 땅 위로 나왔는데 땅의 전갈들이 지닌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았더라.』<br/>이것들은 초자연적인 “메뚜기들”이다. 보통 메뚜기들이라면 연기에 질식할 것이고 “왕이 없다”(잠30:27). 이 메뚜기들에게는 왕이 있지만(11절), 보통 메뚜기들은 “지도자” 없이 떼지어 다닌다. 이 메뚜기들은 흉폭한 괴물들, 즉 반인반마(半人半魔)의 형상이다. 중국, 몽고, 타타르, 독일, 이태리의 오랜 전통에 따르면 이러한 것들이 땅의 중심에서 나온다고 한다. 〔징기스칸이 땅에서 올라와 언젠가 미래에 “나타나서” 그의 군대가 유럽을 다시 격퇴할 것이라는 전설이 있다. 물론 이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9장의 이 군대들은 동쪽에서 오고(14-16절), “기병대”(16절)이며, “동방의 왕들”(계16:12)이라 불린다. 그러므로 몽고 군대에 관한 이야기는 신화나 허구가 아니며 실제적으로 곧 일어날 어떤 사실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 구렁에서 흉폭한 “메뚜기들”이 나온다. 마치 그리이스 신화에서 아폴로가 지옥에서 나오듯이, 유대 전통의 신화가 담긴 조하르(Zohar)에 “구세주”는 이스라엘 구원을 기다리며 지하 낙원에 있다는 것과 비슷하다. 바빌론 탈무드에서 바빌론 산헤드린 98 A난에는 “구세주가 로마의 문들에 나타날 것이다!”고 써 있다. 이것은 믿음이 없는 이스라엘이 미래 기간에 로마 교황을 구세주로 인정할 것을 의미한다［요한복음 19:15과 『짐승의 표』(말씀보존학회 근간)를 보라．］<br/><br/><br/>9:4 『그들에게 명령이 내려지기를 땅의 풀이나 또 어떤 푸른 것이나 어떤 나무도 해치지 말고 다만 그들의 이마에 하나님의 인장으로 표시하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치라고 하더라.』<br/>이 짐승들(계 9장)이 7:3,4 후에 구렁에서 나오는 이유는 땅과 바다와 나무들이 7:3,4이 지나서야 비로소 손상시키도록 허락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계시록 8:7의 일들이 7:3,4 뒤에 일어남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것은 앞서도 말했듯이 계시록 7장이 삽입 장임을 뜻하는데 8:7,12과 9:4 전에 일어나는 일을 다룬다.<br/><br/><br/>9:5 『또 그들에게 명령이 내려지기를 그 사람들을 죽이지는 말고 다섯 달 동안 고통만 주라고 하는데, 그 고통은 마치 전갈이 사람을 쏠 때의 고통과 같은 것이라.』<br/>여기서 고통이 다섯 달이나 계속되는 것은 대학살을 시작하는 자가 다섯번째 천사이기 때문이다. “다섯”이라는 숫자는 매우 흥미로운 숫자이다. 구렁을 여는 자는 “다섯번째” 천사이며, 5절에서 사람들은 다섯 달 동안 고통을 받는다. 그들은 죽기를 찾으나 죽지 않는다(6절). 구약을 연구해 볼 때 “다섯”이라는 숫자는 항상 “죽음”을 나타내지(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을 다섯째 달의 다섯째 날에 멸망시켰다), 결코 은혜를 뜻하지 않는다(때때로 어떤 설교자들은 ‘다섯’이 “은혜”의 수를 가리킨다고 말한다. 이것은 “다섯”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관되었기 때문에 은혜의 수로 보는 가정에서 나온 실수이다. 다섯은 모든 사람의 죽음에 적용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숫자 “5”가 은혜의 수단으로 성도들과 죄로 저주받은 세상에 흐르도록 열린 것을 뜻함은 사실이다. 하지만 한 사람의 죽음에 한 번 나타났다고 해서 그 숫자의 의미를 성경에 고정할 수는 없다). 구약과 신약에서 “다섯”이라는 숫자를 연구해보면 한 가지로 뜻이 명백해지는데 그것은 “죽음”이다. 확실히 성경은 “다양한 해석”에 대한 어떤 여지도 남기지 않는다.<br/>“그룹들”에 관한 연구(계 4장)에서 우리는 그룹이 다섯이었음을 알았다. 보좌 주위에 네 그룹이 있고 “보좌 위에” “기름부음 받은” 다섯번째 그룹이 있었다. 이 그룹은 보좌를 “덮는” 특별한 그룹이었다. 성경은 이 다섯번째 그룹이 두 뿔 달린 소의 얼굴로 나타나는 “루시퍼” 또는 “사탄”인 “빛의 천사”임을 수십 개의 관련 구절들에서 제시한다. 이 그룹은 다섯번째 그룹이었기에 히브리서 2:14에서 우리가 읽듯이 『자녀들은 피와 살을 함께 나누는 자가 되는 것같이 그 역시 같은 모양으로 동일한 것을 함께 나누는 자가 <br/><br/><br/>되심은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제거하시며』인데, 마귀는 그가 “다섯째” 그룹이기 때문에 “죽음의 세력”을 갖는다. 그는 “마귀”(Devil)라고 불리며, “죽음”(death)의 세력을 가졌고, “다섯째” 그룹이었기 때문에 “다섯”(fifth)이 죽음과 관계있음을 재확인한다.<br/>창세기 5:5 『아담이 살았던 모든 날 수는 구백삼십 년이었고 그가 죽으니라.』 우연의 일치로 이 땅의 처음 사람은 성경에서 오장 오절에서 죽는다! 죽음은 다섯 번째 그룹이고 죽음의 세력을 가진 마귀와 관련이 있다. 사도행전 5:5에서 한 사람이 쓰러져 죽는다. 계시록 9:5에서 다섯째 천사는 이 메뚜기들이 쏘는 고통을 알리며, 메뚜기들은 다섯 달을 고통주고 사람들은 죽음을 찾는다. <br/>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예를 들어 “메이 데이”(May Day)는 전투 조종사들에게 공중 전에서의 경보 신호이다. “메이”(May)는 다섯째 달이다. 해상에서 조난 신호는 다섯이다(즉 다섯은 배가 해상에서 침몰될 때 부여된 숫자이다). 국제 조난 주파수는 500킬로 싸이클이며 S.O.S.를 발한다. 해군에서는 사람이 배 밖으로 떨어지면 호각을 다섯 번 분다.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br/>창세기 35:18 『그녀의 혼이 떠나려할 때 (그녀가 죽을 때) 그녀가 그 아이의 <br/>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베냐민이 태어날 때 그의 어미가 죽는다. 자, 어떤 일이 이어서 일어나는지 보라. 여러분이 단지 읽음으로써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요셉이 자기 앞에서부터 그들에게 음식을 집어 주는데 베냐민의 음식은 그들 중 누구보다 다섯 배나 되더라. 그들이 요셉과 함께 마시고 즐거워하더라』(창43:34). 『그들 모두에게 그가 옷 한 벌씩을 각자에게 주더라. 그러나 베냐민에게는 은 삼백 개와 옷 다섯 벌을 주더라.』 (창45:22). 어떤 사람이 “당신은 구절들을 짜맞추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것이 문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구절들이 짝이 되는지 안되는지를 알기 위해 구절들을 찾아보려는 수고조차 해보지 않았다. 성막을 만들 때 제물을 드리는 번제단의 가로 세로는 오 규빗씩이다(출27: 1). 구약의 예배 때에 피를 뿌리는 모든 번제단은 가로 세로가 각각 “오 규빗”이었던 것이다.〕 <br/>사무엘하에서 뜻밖에 우리는 죽음에 관련하여 언급된 사람들의 다섯째 갈빗뼈를, (세 번) 보는데 심지어 아담의 다섯째 갈빗뼈도 그의 죽음의 원인이었다. 아담은 아내를 얻기 위하여 죽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옆으로 돌이키기를 싫어하니 아브넬이 창 뒤 끝으로 그를 다섯번째 갈비뼈 아래를 치니 창이 그 뒤로 나온지라. 그가 거기 쓰러져 그 자리에서 죽으니라. 아사헬이 쓰러져 죽은 곳까지 왔던 자들이 멈춰 섰더라』(삼하2:33). 『그들이 밀을 가지러 온 체 하고 집 안으로 들어와서 그의 다섯번째 갈비뼈 밑을 찌르고 레갑과 그의 아우 바아나는 도주하니라』(삼하4:6). 『아마사는 요압의 손에 있는 칼에 주의하지 아니한지라 요압이 칼로 그의 다섯번째 갈비뼈를 찌르니 그의 창자가 땅에 쏟아져 나와 다시 찌르지 아니<br/>하여도 그가 죽으니라. 그리하여 요압과 그의 아우 아비새가 비기리의 아들 세바를 추격하니라』(삼하20:17).&lt;개역성경에는 ‘다섯번째 갈비뼈’에서 ‘다섯번째’라는 말이 삭제되어 있다&gt;<br/>창세기에서 아담이 죽음같은 무의식의 깊은 잠이 들었을 때(마지막 아담의 죽음의 모형), 하나님께서 그의 옆구리에서 한 갈비뼈를 취해 여자로 만드셨다. 아담은 그리스도처럼 그의 신부를 얻기 위해 죽어야 했다. 그리스도의 몸이 그 분의 신부이듯이 아담의 아내는 그의 몸에서 나왔으며 그녀가 나온 부분은 다섯째 갈비뼈이다. <br/>『남편들아, 너희는 자기 아내를 사랑하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것같이 하라』(엡5:25). 첫 남편과 아내는 아담과 이브였는데, 여기서 한 가지를 확실히 정리하면 여러분의 아내는 여러분의 다섯번째 갈비뼈이며, 그녀는 죽음과 연관된다! 아담은 그녀를 얻기 위해 죽어야 했다. <br/>그리스도의 경우 그것은 “은혜”이다. 그러나 이것은 유일한 은혜의 경우로 여기서도 죽음이 여전히 내재한다. 옛날 노래에도 “그 분은 다섯 군데나 피흐르는 상처를 지니셨네”라고 되어 있다. 다섯 군데의 상처이다! 한 군데는 이 손에, 두번째는 저 손에, 세번째는 오른 발에, 네번째 상처는 왼 발에, 그리고 다섯번째 상처는 심장 아래이다. 하나, 둘, 셋, 넷, 다섯이다! <br/><br/><br/>.........................그리스도께서 <br/>.....................우리의 죄를 위해 <br/>...........죽음(DEATH)을 당하셨다. BB]]></description>
<dc:creator>관리자</dc:creator>
<dc:date>Fri, 26 Mar 2010 01:07:32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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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나팔 재앙</title>
<link>https://www.biblemaster.co.kr/bb2/%EB%82%98%ED%8C%94-%EC%9E%AC%EC%95%99/</link>
<description><![CDATA[8:1 『그가 일곱째 봉인을 여실 때 하늘에 약 반 시간쯤 정적이 있더라.』<br/>8장부터는 환란에 대한 두번째 설명이 시작된다(일곱 나팔). 이 본문에 대한 만족할 만한 해석이 없는 이유는 다른 관련구절이 성경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일곱째 봉인이 환란 끝에 열린다고 하며 “하늘에 정적이 있는 것”은 그리스도가 천군 천사들과 함께 땅에 내려오는 중이기 때문이라고(계19:11-15)한다. 하지만 이것은 주관적인 견해에 불과하다. 이 봉인이 환란의 시작에 위치하는지 끝에 위치하는 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계시록 6장과 7장에서 환란의 첫번째 설명이 끝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일곱째 봉인이 어느 시점에서 열리든지 간에 여기서는 환란에 대한 설명이 두번째로 다시 시작된다.<br/><br/>8:2,3 『그때 내가 보니, 일곱 천사가 하나님 앞에 섰고 그들이 일곱 나팔을 받았더라. 다른 한 천사가 나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함께 그것을 보좌 앞에 있는 금제단 위에 드리고자 함이더라.』<br/>본문은 분명히 하늘에 있는 성전을 가리킨다. 계시록 7:17의 보좌와 7:15의 성전과 관련하여 여기 8:3에는 보좌 앞의 제단이 언급되어 있다. 이것은 모세에게 보여준 모형인 성막이나 성전이 하늘에 있음을 나타낸다(히8:5). 이 하늘의 성전은 계시록 11:19에 다시 나오는 것으로 영원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하늘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원이 시작되면 새예루살렘(1200마일 면적)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게 되지만 이 도성에는 성전이 없다. 『내가 보니, 성안에는 성전이 없더라. 이는 전능하신 주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이 그 곳의 성전임이라』(계21:22).<br/>본문의 금제단은 향을 피우는 제단으로 놋제단과는 다르다. 이 제단에는 금향로와 전체를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다(히9:4). 본문에서 성도들의 “기도”가 “금향로”에 드려진다. 구약에서 놋제단은 성<br/><br/>소 밖에 놓여지고 놋으로 두른다. 놋제단에는 희생 제물을 드리고 금제단에는 향을 피운다. 『다른 한 천사가 나와서 제단 곁에 서서(금 제단) 금향로를 가지고(향을 피우는)... 보좌 앞에 있는(여기서 “보좌”는 땅의 성막에서 지성소에 있는 “언약궤”의 위치이다)...』<br/><br/>8:4,5 『그 향의 연기가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 그 천사의 손에서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더라. 그 천사가 향로를 가져다가 제단 불을 담아서 땅에 쏟으니 거기에서 소리와 천둥과 번개와 지진이 일어나더라.』<br/>성도들의 기도는 하나님께 향처럼 올라간다(시141:2; 눅1:10). 이들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기억되고”(행10:2-4) 그에 대한 응답으로 땅에 앙갚음이 내려진다. 이것은 계시록 6:9,10에서 제단 아래에 하나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 때문에 죽임당한 혼들의 복수의 기도이다. 환란 중에 사탄에게 희생제물로 바쳐졌던 앙갚음이 이때 이루어진다.<br/><br/>8:6,7 『그때 일곱 나팔을 가진 일곱 천사가 나팔을 불려고 준비하더라.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가 섞인 우박과 불이 나서 그것을 땅에 쏟으니 나무의 삼분의 일이 타버리고 모든 푸른 풀도 타버리더라.』<br/>첫째 재앙은 나무와 풀들이 타버리는 것이다. 과거에 설교자가 이런 식의 설교를 하면 사람들은 비웃었다. 그러나 지금은 원자폭탄이나 수소폭탄으로 이런 재앙이 쉽게 일어날 수 있다. <br/><br/>백 년 전에 설교자들이 세상에 종말이 오고 있다고 설교하면 과학자들이 비웃었다. 지금은 과학자들이 세상에 종말이 오고 있다고 말하면 설교자들이 비웃는다. 지금은 설교자들이 미래에 대해서 과학자들보다 더 무지한 시대인 것이다. 설교자들은 후천년주의의 수단인 “바티칸 공의회”나 “유엔”, “초교파 운동” 등이나 말하면서 살기 좋은 환경이나 인간성 향상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<br/><br/>8:8,9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거대한 산이 불에 타서 바다로 던져지는 것같더니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더라. 또 바다에 있는 생명을 가진 피조물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파괴되더라.』<br/>역시 원자폭탄이나 수소폭탄의 사용으로 이런 재앙은 쉽게 일어날 수 있다. 여기서 “바다”는 문자적인 바다인데 성경에서 바다는 궁창 위의 물(great deep)을 가리키지 않는 한 대개는 지중해나 갈릴리 바다 내지는 사해를 말한다. 본문의 “바다”는 계시록 13:1에 다시 나오는데 적그리스도가 바다에서 출현하는 대목으로 여기서는 분명이 지중해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본문의 바다도 지중해로 추측할 수 있다.<br/><br/>8:10,11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하늘에서 횃불처럼 타는 큰 별이 떨어졌는데 그것이 강들의 삼분의 일과 물들의 원천에 떨어지더라. 그 별의 이름은 쑥이라 하고 물의 삼분의 일이 쑥이 되니 그 물이 쓰게 됨을 인하여 많은 사람이 그 물로 죽더라.』<br/>관련구절은 직접적으로는 예레미야 9:15이고 간접적으로는 예레미야 51:25이다. 물들이 쓰게 되어서 마시는 사람들이 죽는 이유는 물이 독이 되기 때문이다. 이 물을 마시고서 죽지 않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마가복음 16:17,18의 사도들에게 부여된 약속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 사도들에게 주어진 표적들과 이적들은(사도행전 초기에도 나타났지만) 하나님이 대환란에서 이스라엘을 돌보시는 때에도 나타난다.<br/>이 진리를 “성결교인들”이나 “그리스도의 교회 교인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카톨릭처럼 그들도 후천년과 무천년주의를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표적이나 이적, 또 신유의 기적들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이고 그것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관여하실 때에만 적용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들에게 주어진 표적과 이적들은 사도들과 함께 사도행전에서 사라지고 계속해서 교회가 휴거될 때까지는 다시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br/>교회시대의 거의 모든 이단론은 환란 때의 진리이다. 오늘날 “신유”나 “성령침례”, “방언”, “침례로 인한 중생”에 대한 가르침들이 모두 거짓인 것은 하나님 말씀을 기록된대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환란 때에 적용될 진리들을 교회시대에 잘못 적용하기 때문이다. 성경은(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고 섭리로 보존된 삭제되지 않은 전통원문 계열의 성경) 전천년 해석체계로 해석해야 한다. 그럴 때만이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표적”과 “이적”, “기적”이 초림 때에 일어난 것처럼 재림 때에도 나타남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br/>제칠일 예수재림교도들이 환란 때의 진리를 교리로 삼았다는 것은 환란 때에 사람들은 제칠일(안식일)을 지키고(마24:20), 성전에서 예배드리며(마24:15), 성전에 희생제물을 바치고, “죄사함 받기 위해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아 성령이 임하고, 또한 성령이 “그 날들에 모든 육체 위에 부어지기”(행2:17,18; 욜 2장)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방언자들”, “몰몬교”, “성결교”, “체칠일 예수 재림교”, “신유자들”, “여호와의 증인들”과 “그리스도의 교인”들이 오늘날 이 교회시대에서 진리를 가졌지만 잘못 적용함으로써 말씀을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이들 모두가 문자적이고 물리적이며 눈에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 분이 통치하실 문자적이고 물질적이며 눈에 보이는 지상의 천년 왕국을 믿지 않는데 있다.<br/>환란 때의 성도들은 “쑥”이 된 물을 마셔도 죽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물을 마시면 죽는다. BB]]></description>
<dc:creator>관리자</dc:creator>
<dc:date>Fri, 26 Mar 2010 01:06:5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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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흰 옷 입은 사람들</title>
<link>https://www.biblemaster.co.kr/bb2/%ED%9D%B0-%EC%98%B7-%EC%9E%85%EC%9D%80-%EC%82%AC%EB%9E%8C%EB%93%A4/</link>
<description><![CDATA[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보라, 모든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언어에서 온 아무도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그들의 손에는 종려나무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br/>여기서 일인칭으로 말하는 “나”는 요한이며, 셋째 하늘에서 말하고 있다. 주목할 것은 그가 본 첫번째 무리는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들이고(계7:5-8), 두번째 『모든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언어에서 온』 무리들은 이방인이라는 점이다. 본문의 보좌나 어린 양은 계시록 5장과 6장에서처럼 셋째 하늘에 있다.<br/>“흰 옷”을 입은 무리는 계시록 6:11에 언급된 사람들이며, 계시록 3:4,18의 내용과 연결된다. 따라서 이 흰 옷은 순교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계시록 19:8에서 흰 옷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실』이라고 하였으므로 이것은 “사람들의 의”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흰 옷은 구원받은 후의 “행위”와 관계있으며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의와는 관련이 없다. 한편 계시록 6장에 등장한 “제단” 아래 죽임당한 혼들이 7장에서는 셋째 하늘에 올라가 있는 큰 무리로 묘사된다.<br/><br/>7:13,14 『그때 장로 가운데 한 사람이 대답하여 나에게 말하기를 “흰 옷을 입은 이 사람들이 누구이며 어디서 온 사람들이냐?” 하기에 내가 그에게 말씀드리기를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들은 대 환란에서 나온 사람들이며 자기들의 옷을 어린 양의 피로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br/>이 구절을 영적으로는 교회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할 수 있지만 교리적으로는 적용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의는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흰 옷”이란 자기가 구원받은 후에 행위로 얻는 자기 “자신의 의”이지만, 그의 구원 자체는 행위에 근거하지 않는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자기들의 옷을 어린 양의 피로 씻어 희게 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통해 그리스도의 의를 얻어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구원받는다. 계시록 1: 5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어린 양의 피로 씻겼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들의 옷이 “어린 양의 피로 씻어 희게” 된 것이 아니다.<br/>“대 환란에서 나온 사람들”을 주목하라. 이것은 어떠한 특정한 때를 가리킨다. 바울은 『우리가 많은 환난을 거쳐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행14:22)고 말했는데, 본문의 “대 환란”은 교회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일어나는 환난이나 시험, 고난이 아니다. 이것은 항상 이스라엘(144,000명)이 구원받는 특정한 기간을 가리킨다. 마태복음 24:21의 『이 는 그 때에 대 환란이 있으리니, 그와 같은 것은 세상이 시작된 이후로 지금까지 없었으며, 또 결코 없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구절을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이 환란을 통과한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그 때”는 바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24:29의 『그 날의 환란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또 하늘들의 권능들이 흔들릴 것이라』는 구절은 계시록 6:12-14에 일어나는 하늘의 현상들이지 교회시대에 일어나는 일을 설명한 것이 아니다. 『그 후에 하늘에 계신 인자의 표적이 나타나리니 세상의 모든 족속이 통곡할 것이며 또 그들은 인자가 권세와 큰 영광으로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마태복음 24:30). 마태복음 24장의 문맥은 계시록 7장과 연결된다. 『모든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언어에서 온 큰 무리』와 이스라엘 『지파들』은 “대 환란”으로 불리는 기간에 구원받는 사람들이며, 묘사된 사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앞서 일어난다. 이것은 전천년 해석체계가 유일하게 올바른 관점임을 보여준다.<br/><br/>7: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으며 그의 성전에서 그를 밤낮 섬기고, 보좌에 앉으신 분께서 그들 가운데 거하시리라.』<br/>본문은 이 무리들이 교회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는 데 대한 또 하나의 증거를 제시한다. 이 성도들은 하나님을 『그의 성전에서 그를 밤낮 섬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몸은 이 시대에 성령께서 거하시는 전이고, 하늘에 올라가면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다.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고후11:1-4; 엡 5장)는 계시록 21장에서 “새 예루살렘”으로 불리는데, 이 도성에는 성전이 없다(계21:22). 그러므로 계시록 7:14,15에서 구원받은 이 무리는 교회시대 그리스도인일 수 없으며 환란 때 구원받은 성도들을 말하는 것이다.<br/><br/>7:16 『그들이 다시는 굶주리지 아니하고 다시는 목마르지도 아니할 것이며, 해나 어떤 열기도 그들 위에 내리쬐지 못할 것이라.』<br/>본문의 관련구절은 이사야 25:10과 49: 9,10인데, 이 두 구절 다 문맥상 천년왕국 때의 이스라엘을 언급한 것이지 영원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을 언급한 것이 아니다.<br/><br/>7:17 『이는 그 보좌 가운데 <br/>계신 어린 양이 그들을 먹이시고 생수의 샘들로 인도하시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더라.』<br/>본문은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이들의 눈물을 “씻어 주신다”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 곳이다. 그 다음은 계시록 21:4에 다시 등장한다. 주목할 것은 눈물을 “씻어 주신다”는 표현이 두 번 나오는데, 그것의 시제는 둘 다 교회시대가 끝난 다음이라는 점이다. 영원에 이르러서야 눈물이 없다. 영원은 계시록 21장에서 시작되며 계시록 7장에서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계시록 21:4에서 하나님이 눈물을 씻어주실 때는 문맥상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자들의 심판 때이다(계20:12-15 ). 즉 하나님께서는 흰보좌 심판이 끝날 때까지는 모든 눈물을 씻어주시지 않으신다.<br/>눈물은 환란이 끝날 때까지 씻겨지지 않는다. 교회시대의 끝에 그리스도의 몸은 들림받고 땅에서는 환란이 일어날 것이다. 이때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서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서 있게 된다.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는 거듭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야 할 일들을 하지 않고 낭비한 기회들, 잃어버린 시간들때문에 마땅한 보상이나 면류관을 받지 못하며 우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 다음에 그들은 흰보좌 심판에서 구원받지 못하여 불못에 떨어질 사랑하는 가족, 친구들, 친지들, 이웃들을 보며 이들을 구령하는 데 최선을 다하지 못한 까닭에 우는 일이 또 한 번 있게 될 것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관리자</dc:creator>
<dc:date>Fri, 26 Mar 2010 01:06:19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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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사라진 두 지파 - 2</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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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재판관기 18장에서 단 지파는 시돈 부근으로 올라가서 페니키아의 바알 숭배 배자들 주위를 배회한다. 열왕기상에 보면실제로 그들은 그때 영광의 전성기에 있었다. 이제 단이 요한계시록에서 빠져야 했던 분명한 이유를 살펴 보자. 『유다 아사왕 삼십팔 년에 오므리의 아들인 아합이 이스라엘을 통치하기 시작하는데, 오므리의 아들 아합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을 이십이 년 간 통치하였더라.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여호와 보시기에 그 분 앞의 이스라엘 왕들 가운데 가장 악하더라. 그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 행하는 것은 가벼운 것처럼 그의 행위가 악하게 되었던 것은, 그가 시돈 왕 에드발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취하여 바알을 섬겼고 그것을 숭배하기에 이른 까닭이라. 그는 사마리아에 지은 바알의 처소에다 바알을 위해 제단을 세웠고 신당을 만들었으며,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을 그 분 앞의 이스라엘 모든 왕들보다 더 화나게 하였도다』(왕상16: 29-33). <br/>이전에는 열 개 북쪽 지파 중 단 지파만 바알 숭배를 채택했던 것이 이 구절에 나타난 것처럼 그것은 모든 이스라엘에 확산된다. 이스라엘은 시돈의 바알 숭배자인 이세벨과 결혼한 바알 숭배자 왕과 한 패가 된다. 바알 숭배는 성경 전체에서 경계하고 있다. 아합이 만든 “신당”(the grove)을 주목하라. 이것은 신명기 16:21-22에서 금하했던 것이다. 이 바알 숭배의 특징은 특히 작은 조상(彫像)들을 숲가지들과 관목들 주변에 쌓아 두는 것이다. <br/>열왕기상 18장에서 바알 숭배의 다른 특징을 살펴보자. 열왕기상 18:18에서 바알 선지자들인 “아버지”라고 불리는 검은 제의의 제사장들이 왕, 여왕과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주목하라. 그들은 근본적으로 정치집단이다(반면 엘리야는 참된 선지자였을 뿐 당시의 정치세력과는 전혀 연관이 없었다). 이렇게 바알 숭배자들은 왕, 여왕과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다(왕상 18장). 다시말해서 그들은 제사장이 근본적으로 종죠적이기보다는 정치적이었다.그들의 종교는 단지 “파멸에 이르는 수단”일 뿐이다. 주목할 것은 그들이 바알을 숭배하며(왕상18:25)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것으로 “하나님의 참된 교회”임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알은 “불의 신”(god of fire)으로,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태양신(the sun god)으로 일컬어진다. “바알”(Baal)의 영어 단어는 “황소”(Bull)이다. 열왕기상 18:26에서 바알 숭배자들의 숭배의식은 정오 12시까지 지속된다. 바알의 제사장들은 기도응답을 받기 위해 몸에 상처를 내며 고해하고, 몸의 일부를 절단한다(이것은 오늘날까지 필리핀, 스페인, 이태리에서 흔히 행해지고 있으며 마가복음 5:1-5의 귀신들린 자의 특징이기도 하다).<br/>성경이 밝히고 있는 바알 숭배자들의 신분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들은 “아버지”라 불리는 제사장들로서 일요일(Sunday)에 태양신(the sun god)을 정오 12시까지 숭배하며 “제의”라는 특별한 옷을 입는다(왕하10:22).<br/>『네게 응답해 줄 누가 있으면 지금 불러 보아라. 네가 거룩한 자들(the saints)<br/>가운데 누구에게로 돌이키겠느냐?』(욥5:1).<br/>위의 구절은 고대 사람들이 이미 죽은 거룩한 자들에게 기도했음을 보여준다. 카톨릭 신자들 또한 “거룩한 자들”(the saints)에게 기도한다.<br/>『보라, 하나님은 그의 거룩한 자들을 신뢰하지 아니하시나니 정녕 하늘들도 그분 보시기에는 깨끗하지 아니하시거늘』(욥15:15).<br/>이 구절은 모든 카톨릭 신자가 유의해서 보아야 할 구절이다. 하나님은 그의 거룩한 자들(the saints)을 아무도 신뢰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시몬 베드로를 신뢰했더라면 그가 예수님을 저주하는 모습에 실망하셨을 것이다. 하나님이 바울을 신뢰했더라면 그가 예루살렘에 감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것으로 인하여 실망하셨을 것이다. 하나님이 노아를 신뢰했더라면 노아의 술 취한 모습에 실망하셨을 것이다. 하나님이 마태, 마가, 누가를 신뢰했더라면 그 분을 버리고 도망했던 모습에 실망하셨을 것이다. 하나님이 요셉을 신뢰했더라면 요셉이 잔에 대해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실망하셨을 것이다. 하나님은 아무도 신뢰하지 않으신다.<br/>성경은 바알 숭배를 다루는 수십 개의 구절들을 담고 있다. 물론 그 구절들은 주로 구약에 있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구약은 신약에서 성취되었고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적으로 해석된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아무도 더 이상 구약을 읽지 않는다. 하지만 “카톨릭” 교회의 시작은 구약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br/>바알 의식은 예레미야 10:1-5에도 나타나는데 여기서 크리스마스 트리를 볼 수 있다! [매 12월 25일에 선물을 주는 것은 물론 로마 교회의 이교도 의식인 “농신제”(農神祭)에서 유래하는데, 이것은 그 해의 첫 수확을 기념하여 진탕 마시며 법석대는 의식이었다 -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93년 1월호 18페이지 참고.] 드루이족(The Druids)은 크리스마스에 사용되는 나뭇가지를 들고 “히틀러 만세”나 “시이저를 환호하라”같은 “만세”를 외치고 “환호”를 불렀다. 성 프란시스(St. Francis)는 1223년 첫 “크리스마스”를 기념했고, 아일랜드의 한 카톨릭 주교로서 “성 니콜라스”(St. Nicolas)로 명명되었던 “산트 클라스”(Sante Klass)는 12월 25일 경에 가난한 자들에게 선물을 주었는데 이 날짜를 태양신 탄생일에 맞추기 위해 12월 25일로 옮겼다.<br/>이 바알 숭배는 남신 뿐만 아니라 여신도 포함한다. 예레미야 44:18,19,25에서 이 여신은 “하늘의 여왕”이라 불린다. 로마인들은 그녀를 “비너스”로 부른다. 희랍인들은 “다이아나”로 부른다. 페니키아인들은 “아스다롯”으로 부른다. 앗시리아인들은 “아스타르트”로 부른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녀를 “미네르바”, “쥬노” 또는 “허마”로 부르는데, 성경은 그녀를 “창녀”,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부른다(계 17장). 로마 “교황들”은 그녀를 “마리아”로 부르며 계시록 12:1,2의 여인과 동일시하는데, 사실상 그 여인은 전혀 마리아와는 상관이 없고, 단지 이스라엘인 것이다.<br/>뉴욕 78공원가 벤싱어 형제회에서 1931년에 펴낸 로마 카톨릭 신부인 콘즈(A.B.Koonz)의 &lt;마리아의 위엄&gt;에서 저자는 32페이지에 “모든 은혜는 마리아가 베푸신다. 그녀는 죄인들과 하나님 사이에 평화의 중보자이다. 죄인들은 오직 마리아의 중보로 용서받는다. 마리아의 명령에 모든 이가, 심지어 하나님까지 복종한다. 마리아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으며 그녀는 천국에 이르는 문이다.”라고 썼다(pp.169, 160, 83, 81). 그러나 마리아는 구세주가 필요했던 여인으로(눅1:47) 재물을 드려야 했고(눅2:42), 그럼으로써 자신의 죄를 정결케 했던 여인일 뿐이다(눅2:32).<br/>지난호에 이어서 지금까지 단 지파가 계시록 7장의 환란 때에 인장으로 표시받지 못하는 이유를 살펴 보았다. 이제 그 명단을 다시 읽어 보면, 단과 에브라임을 제외한 모든 지파가 다 있음을 볼 수 있다. 요셉이 에브라임을 대신하며, 레위가 단을 대신한다. 결국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지파에서 144.000명이 나온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계시록 7:4-8의 사람들이 기명된 문자적인 열두 지파인 144,000명의 이스라엘 자손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제칠일 예수 재림교인들이 아니며, 여호와의 증인들도 아니고, 말일성도들도 아니며, 몰몬이나 그리스도인들도 아니다. BB]]></description>
<dc:creator>관리자</dc:creator>
<dc:date>Fri, 26 Mar 2010 01:05:41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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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사라진 두 지파 - 1</title>
<link>https://www.biblemaster.co.kr/bb2/%EC%82%AC%EB%9D%BC%EC%A7%84-%EB%91%90-%EC%A7%80%ED%8C%8C-1/</link>
<description><![CDATA[성경에서 단 지파에 대한 첫 언급은 창세기 14:14에 나온다. 그 구절에 단 도성의 위치가 나온다[창세기 14:14은 모세가 창세기의 저자임을 의심케 하는 구절 중 하나이다. 그 까닭은 이렇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는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서가 기록될 때에나 팔레스타인 땅에 정착한다. 따라서 모세는 단 도성의 위치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창세기 14:14에서 보면 단 도성의 위치는 팔레스타인 북쪽인 다마스커스 근처이다. 학자들은 모세가 그 위치를 몰랐을 것이기에 창세기의 저자가 아닐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두 가지를 간과한 것이다. 첫째, 여호수아는 모세의 사역을 계승한 자로 그와 같은 성령이 임했고, 모세가 했던 일을 지속하도록 같은 임무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모세가 죽기 전에 요단 동쪽에 있는 비스가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을 모두 보았는데 그 땅은 “단 지경까지”였다는 사실이다. 『모세가 모압 평지로부터 느보 산에 올라 여리코 맞은편 피스가 산 꼭대기에 이르니 주께서 그에게 길르앗의 온 따을 단까지 보여 주시고』(신34:1). 그러므로 모세는 단의 위치를 알았던 것이다. 그 다음에 제기되는 문제라면 그가 창세기 14:14을 하나님이 비스가 산에서 그에게 보여주신 후 기록했느냐 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가 죽기 직전에 쓴 것이다. 모세의 저작임이 창세기의 구절 하나 낱말 하나까지 다 포함하느냐 마느냐 할지라도 모세는 분명 창세기의 저자인데 첨가사항들은 여호수아가 세심하게 살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도 같은 임무를 받았기 때문이다. 신명기 34:9에서 그의 사역이 인수되는 것을 보며 여호수아서에도 잘 나타나 있다].<br/>단의 출생에 대해서는 창세기 30:6에 언급되어 있다. 단은 라헬이 “대리모”를 통해 얻은 첫 아들이다. 그녀는 몸종을 통해서 이 아들을 얻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단은 “심판”을 뜻한다(창30:6).<br/>단에 대한 첫번째 예언은 야곱이 죽을 때인데, 말하기를 『단은 이스라엘 지파의 하나로서 자기 백성을 심판하리라』(창49:16)고 했다. “그가 지파 중의 하나이다”로 말하지 않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 하나로서 심판하리라”고 했다. 『단은 길가에 뱀이 되고 작은 길에 독사가 되어 말의 뒷굽을 물어서 말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창49:17).<br/>단 지파에게는 거친 미래가 전개되는데, 창세기 49:17에서 “뱀”으로 불리고 신명기 33:22에서는 “사자”로 불린다. 성경에서 사자와 뱀으로 불리는 존재는 사탄이다(예수님은 “유다 지파의 사자”이시지만, 요한복음 3:14에서 그 분의 십자가의 죽음을 언급하신 것 외에 결코 뱀같은 분은 아니셨다). 사탄은 베드로전서 5:8에서 “울부짖는 사자”로 요한계시록 12:9에서는 “뱀”으로 불린다. 단 지파는 사탄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br/>레위기는 제사장의 의식과 규례를 기록한 것인데 부수적으로 하나님을 모독해서 정죄받는 어떤 사람의 일이 언급되어진다. 『그때 아비가 이집트인인, 어떤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이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로 나갔는데, 이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과 어떤 이스라엘 사람이 진영 안에서 싸워 그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이 주의 이름을 모독하고 저주하니 그들이 그를 모세에게로 데려가니라. (그의 어미의 이름은 셀로밋으로 단 지파 디브리의 딸이더라.)』(레24:10-11).<br/>이것이 성경에서 하나님을 모독하고 저주하는 첫번째 경우이다. 모세의 율법 아래서 하나님을 저주한 첫번째 사람은 단 지파 사람이었던 것이다(요한계시록 13장에는 적그리스도가 하늘에 거하는 이들을 “모독한다”).<br/>삼손은 이스라엘의 한 재판관으로 그의 행위가 “방탕하나” 나중에 자살하는데, 그도 단 지파였다(판13:2).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재판관기 17:1에는 에프라임 지파가 갑자기 나타난다(요한계시록 7장에서 에프라임이 요셉으로 대치되고 단이 레위로 대치된 것을 기억하라). 재판관기 17, 18장에 보면 레위, 에프라임, 단이 한꺼번에 등장한다.<br/>『에프라임 산지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이 이름은 미카더라』(판17:1). 그의 어미는 그가 한 서원에 저주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3절에서 돈을 바쳐 “숭배도구”로 “우상들”을 만든다. 따라서 미카의 집은 “신들의 집”이 되는데, 『유다 족속에 속하는 베들레헴유다에 한 젊은이가 있었는데 그는 레위인으로 거기에 기거하더라. 그 사람이 기거할 곳을 찾으려고 베들레헴유다로부터 그 성읍을 떠나 여행하다가 에프라임 산지 미카의 집에 이르렀더라. 미카가 그에게 말하기를 “너는 어디서 오느냐?” 하니 그가 미카에게 말하기를 “나는 베들레헴유다의 레위인으로, 내가 기거할 장소를 찾으러 가노라.” 하니 미카가 그에게 말하기를 “나와 함께 있어 내게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그리하면 내가 해마다 은 열 세켈과 옷 한 벌과 네 양식을 주리라.” 하니 그 레위인이 들어가더라』(판17:7-10).<br/>그리스도가 초림하시기 1200년 훨씬 전에 갑자기 로마 카톨릭 체계가 나타난다. 재판관기 17:10에서 미카는 『나와 함께 있어 내게 아버지(father)와 제사장(priest)이 되라』고 말한다. 말씀이 분명히 그렇게 기록되었는가? 그렇다.<br/><br/>제사장이 “아버지”로 불린 것이 첫번째이고 “아버지”가 제사장으로 불린 것이 첫번째이며, 어떤 사람이 자기를 위해 “아버지”가 되라고 요청한 것이 첫번째이고 사람이 제사장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최초의 일이 재판관기 17:10에 기록되었다.<br/><br/>이런 일은 성경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데, 단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땅에 있는 사람을 너희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 이는 너희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한 분이시기 때문이라』(마23:9).<br/>단 지파를 더 살펴보자.<br/>『그들이 그에게 말하기를 “잠잠하라. 네 손을 네 입에 대고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에게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네가 한 사람의 집 제사장이 되느니 이스라엘 한 지파와 한 족속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 더 낫지 않느냐?” 하자』(판18:19). 단 지파 사람들이 북쪽으로 올라가다가 미카의 집을 지나간다. 그들은 “아버지”라 하는 그 제사장과 이야기하고 계속 길을 가다가 시돈 지경에 이른다(판18:7). 그들이 돌아가서 (판18:11) 싸울 준비를 갖추고(18;13) 다시 올라갈 때 미카의 집에 이르러 그 제사장을 다시 만나는데, 그들은 그에게 그들과 함께 가서 자신들의 아비와 제사장이 되어 달라고 한다. 결국 한 사람 집의 제사장이 되느니 이스라엘 한 지파와 가문의 제사장이 되라는 것이었다(판18:19).<br/>그래서 그 제사장은 단 지파를 따라간다. 그들은 “라이스로”라는 도성에 거하는데(18:27), “단”으로 그 이름을 바꾼다(18:29). 단 지파는 이 때부터(B.C.1300)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의 포로가 되는 B.C.800년까지 완전히 배교한다. 400년이상 단 지파는 배교하여 시돈의 바알 숭배자들과 연합하면서 “미카 종교”를 행하는 것이다. 『미카가 말하기를 “너희는 내가 만든 내 신들과 제사장을 취하여 멀리 갔으니 내게 무엇이 남아 있느냐? 그런데 너희가 ‘네가 어찌하여 이리하느냐?’고 함이 어찐 일이냐?” 하더라』(판18:24). BB]]></description>
<dc:creator>관리자</dc:creator>
<dc:date>Fri, 26 Mar 2010 01:05:06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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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대제사장과 새 언약</title>
<link>https://www.biblemaster.co.kr/bb2/%EB%8C%80%EC%A0%9C%EC%82%AC%EC%9E%A5%EA%B3%BC-%EC%83%88-%EC%96%B8%EC%95%BD/</link>
<description><![CDATA[히브리서 8장<br/><br/><br/><br/>8:1-6 『지금까지 말한 것들의 요점은 그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계시다는 것이라. 그분은 하늘들에 계신 위엄 있는 분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성막에서 섬기는 분이시라. 그 성막은 주께서 세우신 것이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니라. 모든 대제사장은 예물과 희생제물을 드리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나니, 그러므로 이분 역시 그 무엇인가를 드려야 할 필요가 있느니라. 만일 그가 땅 위에 계신다면 제사장이 되실 수 없으시리니, 거기에는 율법을 따라 예물들을 드리는 제사장들이 있음이라.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들의 본보기와 그림자라. 모세가 성막을 지으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 지시를 받은 것과 같으니,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너는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여 준 모형을 따라 지으라.”고 하셨느니라.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좋은 약속들 위에 제정된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이신 만큼 더욱 훌륭한 직분을 얻으셨느니라.』<br/><br/>“지금까지 말한 것들의 요점은”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히브리서 8장은 서술한 그대로, 4,5,6,7장에서 설명한 내용의 핵심을 요약하여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대제사장이 있다는 것이다. 8장에서 10장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과 관련해서 그분이 맺으신 언약의 우월하심을 다루고 있다. <br/><br/>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<br/>7장에서 멜키세덱을 중심으로 설명한 이후로, 8장부터 10장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에 관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예수께서 단번에 드리신 속죄, 성막에서 지켜지던 규례를 대신하는 새로운 규례, 그분의 중보 사역 등의 기본적인 교리가 이 세 장에서 자세히 설명된다. 이러한 내용들은 우리의 구원에 관해서 중요하고 기본적인 교리가 되기에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젖”으로 섭취할 수 있는 말씀들이다. <br/>하지만 히브리서의 특수한 위치 속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교리들이 유대인들에게 적용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질긴 “고기”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히브리서는 교리적으로 환란기의 유대인들에게 적용되는 부분이 많다. 이 책이 교회시대와 환란시대의 과도기적인 책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이 교회시대의 성도들에게 분명히 적용되지만(예수님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신다는 점에서), 환란기의 히브리인들에게도 그 사역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br/><br/>『그분은 하늘들에 계신 위엄 있는 분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으니』(1절).<br/>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하늘에 “앉아” 계신다. 과거에 그분은 한 번 “서 계신” 적이 있다. 사도행전 7장에서 스테판이 예수님을 보았을 때이다(행 7:56의 주석을 참조하라). <br/>이 “일어서심”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그분이 내려오시려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분이 내려오시면 성도들을 공중으로 취해가실 것이고, 땅에는 대환란이 시작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일어서심”은 다니엘의 70째 주가 시작된다는 하나의 신호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그분을 공식적으로 거부하자 주님은 대환란기가 올 때까지 약 2000년 동안 그의 “일어서심”을 연기하시고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다”. 그리고 그곳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우리를 위해 대제사장의 사역을 수행하고 계신다. <br/><br/>『모든 대제사장은 예물과 희생제물을 드리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나니』(3절)<br/>레위의 직분과는 다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제사장이시라면 반드시 무엇인가를 드려야 한다. 왜냐하면 제사장이란 하나님과 백성 사이를 중보하기 위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드리는 제물은 레위의 제사장들이 드리는 제물들보다 월등히 뛰어난데, 그것은 그들이 하지 못했던 “죄의 제거”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br/><br/>단번에 드리심으로 죄들을 제거하심<br/>지상의 어떠한 제사장들도 죄들을 “제거”하지는 못했다. 율례에 따라 드리는 제사로 백성들의 죄들이 “덮어지고”, “사해지고”, “용서”되기는 했지만, 그 죄들 자체가 “제거”되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드러난 죄들을 감추기 위해서 계속 예물과 제물을 드려야 했으나, 그리스도의 드리심은 완전하고 영원하기에 한 번 드리심으로 죄를 제거하실 수 있었다. <br/><br/>『만일 그가 땅 위에 계신다면 제사장이 되실 수 없으시리니, 거기에는 율법을 따라 예물들을 드리는 제사장들이 있음이라.』(4절)<br/>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시므로 땅 위에 있는 제사장들과 같지 않은 “더 위대한” 대제사장이 되실 수 있다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과거에 이 땅에 계셨을 때는 제사장이 아니셨다. 그때는 율법에 따른 제사장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초림 때 “선지자”로서 사역하셨다(막 6:4, 요 9:17).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선물이셨으며(요 3:16), 하나님의 제물이셨으나(히 10:5), 제사장으로 사역하시지는 않았다.<br/><br/>『그러나 이제 그는 더 좋은 약속들 위에 제정된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이신 만큼 더욱 훌륭한 직분을 얻으셨느니라.』(6절)<br/>땅에서 사역하는 제사장들은 하늘에 있는 것에 대한 “모형”으로서 사역하고 있을 뿐이다. 이 사실을 본문은 출애굽기 25:40을 인용하며 설명한다(5절).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사역하시는 곳은 땅에 있는 성막의 “원형”이 되는 곳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더 우월한” 대제사장이심을 보여 주는 것이다. <br/>이 사실을 6절에서는 “더 좋은 약속들”과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와 “더욱 훌륭한 직분”이라는 세 가지 말로 설명한다. “더 좋은 약속들”은 요한복음 5:24과 8:51, 로마서 10:9,10, 고린도전서 15:40-58 등과 같은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고 부활과 영생을 보장받는다는 약속이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정죄에 이르지 아니할 것이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느니라』(요 5:24). <br/>예수님께서는 이 약속들을 이루시기 위해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가 되셔야 했다. 예수님 외에 다른 중보자는 필요없다. 그분은 유일하신 중보자이신데(딤전 2:5), 이는 그분의 중보자로서의 직분이 어떤 다른 제사장들의 직분보다 “더욱 훌륭한” 직분이기 때문이다. 그분의 직분이 얼마나 훌륭한지, 단 한 번 희생제물을 드림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br/><br/><br/>새 언약<br/><br/>8:7-13 『만일 그 첫 번째 언약이 흠이 없었더라면, 두 번째 것이 요구될 여지가 없었으리라. 그들에게서 허물을 발견하고, 그가 말씀하시기를 “보라, 그 날들이 오리라. 주가 말하노라.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 그것은 내가 그들의 조상의 손을 잡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니, 이는 그들이 내 언약 속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아보지 아니하였음이라. 주가 말하노라. 그 날들 이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주가 말하노라. 내가 내 율법들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그것들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그들이 자기 이웃이나 형제에게 일일이 가르쳐 주를 알라고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가장 큰 자에 이르기까지 다 나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불의에 대하여 자비를 베풀며, 그들의 죄들과 불법들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셨느니라. 그가 말씀하시기를 “새 언약이라.”고 하셨으니, 그가 먼저 것은 옛 것이 되게 하신 것이라. 이제 낡아지고 오래 된 것은 사라져 가느니라.』<br/><br/>예수 그리스도께서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이심을 말하기 위해서 본문은 “새 언약”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7절의 “첫 번째 언약”과 구약의 율법에 대조되는 신약의 복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렇게 보는 것은 구약의 레위 제사장들이 여러 번 드림으로써 할 수 없었던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영원히 드리심으로 그분의 몸된 교회에 속한 성도들을 위한 대제사장으로서의 사역을 완성하셨다는 것으로, 수용할 만한 견해이다. <br/>히브리서는 지금까지 계속 예수 그리스도께서 레위의 제사장들보다 우월한 새로운 대제사장이시라는 것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우리는 앞에서 그분이 교회시대의 성도들만을 위한 제사장이 아니라, 먼저 유대인들의 대제사장이 되어야 함을 충분히 보았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새 언약”도 이 시대를 향한 “신약”의 의미 이상의, 유대인들을 위한 더 특별한 의미로 사용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br/>물론 구약의 율법과 대조되는 것은 신약의 복음이다. 하지만 그 경우에 사용되는 단어는 “testament”로서의 언약이다. 이 단어는 우리가 흔히 “구약”(Old Testament), “신약”(New Testament)이라고 말할 때 쓰는 단어로서, 그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새로운 백성과 맺으신 새 언약이며, 바로 신약시대를 이끄는 언약이다.<br/>그렇지만 본문에서 사용되는 단어는 “covenant”로서의 언약이다. 이 언약은 교회시대를 다루는 언약과는 거리가 멀고, 하나님께서 원래부터 왕국을 계획하시고 그것을 이루려고 진행시키시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그분의 경륜들과 관계되는 언약이다. 성경에서 “testament”로서의 언약은 두 가지가 있으나(이 말은 “유언”이라는 의미를 포함한 언약으로서, 언약을 세운 사람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 “covenant”로서의 언약은 일곱 가지가 등장하며, 이것들은 모두 왕국(“천국”)과 관련이 있다. (“왕국” 또는 “천국”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주석의 &#65378;천국&#65379; 부분을 참조할 것.)<br/><br/>일곱 언약<br/><br/>첫째는 “에덴의 언약”(창 1:28-30; 2:15 -17)이다. 이것은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땅을 다시 채우고” “땅을 정복하라”는 명령을 주신, 아담에게 주어진 왕권위임사항이다. <br/>둘째는 “아담의 언약”(창 3:14-19)이다. 아담이 땅에 대한 통치권을 잃었다는 것을 보여주며(왕국을 잃었다.), “여인의 씨”만이 찬탈자인 사탄을 물리치고 왕국을 회복하는 진정한 왕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br/>세째는 “노아의 언약”(창 8:20-9:17)인데, 이것은 “에덴의 언약”과 비슷한, 역시 왕국위임의 언약이다. <br/>네째는 “아브라함의 언약”(창 12:1-3)인데, 이것은 아브라함과 그 씨를 축복하신 언약이다. 이 언약은 부분적으로 교회에게 적용되기도 하나, 전체적으로는 유대인과 그들이 차지할 팔레스타인 땅에 적용된다. 이스라엘에게 유업으로 주신 그 땅은 천년왕국 때에 메시야 왕국으로 완성된다. <br/>다섯째는 “모세의 언약”(출 20장, 신 28-30장)이다. 이것은 모세에게 준 “율법”과 더불어, 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면 그 “땅”에서 번성케 하신다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다. [학자들에 따라서 땅에 관한 언약을 “팔레스타인의 언약”이라고 따로 분리하기도 한다.]<br/>여섯째는 “다윗의 언약”이라고 불리는데(삼하 7:4-17), 이것은 메시야 왕께서 다윗의 씨로 오신다는 것과, 그의 왕국과 그의 보좌를 영원히 세우시겠다고 하신 “메시야의 언약”이다. <br/>일곱째가 바로 우리가 히브리서 8장에서 다루려고 하는 “새 언약”(New Covenant)이다. 이 언약은 예레미야 31:31-37에 약속되어 있는데,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을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맺으신다고 하셨다. <br/><br/>유대인과 맺으실 “새 언약”<br/><br/>그러므로 이 “새 언약”의 대상은 분명히 유대인이 된다. 교회를 영적인 유대인이라고 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으나, 이스라엘 민족을 다루는 “집”이라는 단어가 분명히 제시되어 있는 이상 이 언약은 이방인들이나 신약교회와는 무관한 언약임을 알 수 있다. <br/>또한 이 언약은 아직 맺어지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미래에 이 언약을 “맺으실” 것이다. 『보라, 그 날들이 오리라. 주가 말하노라.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히 8:8). “그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이 날은 주께서 그분의 백성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실 때이다(렘 31:34). 지금은 그들의 죄가 없어지지 않았다. 그들의 죄는 대환란을 겪은 이후 천년왕국에서 지워질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br/>과거에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그 민족의 마음에서 제거되었고, 현재에도 그들은 복음을 거절하지만, 그때는 하나님의 법이 그들의 생각과 마음에 있게 될 것이다. 또한 이때는 예수님께서 실제적인 땅의 보좌에 앉아 눈에 보이도록 다스리시기 때문에 아무도 “주를 알라”고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렘 31:34, 히 8:11). 구원의 계획이나 복음이나 그 외의 주님에 대해 가르치는 모든 예언들은 멈추게 된다. 만약 그들이 예언을 하게 되면 저주를 받게 된다(&#49852; 13:3). 증거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금해질 것이다(히 8:11). <br/>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나타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임하시는 그때에 이스라엘 민족과 이 “새 언약”을 맺으시게 된다. 그러므로 이 새 언약은 “그리스도의 몸”, 심지어 교회시대에 구원받은 히브리 그리스도인들과도 관계가 없다. 오직 아브라함의 육신적인 씨인 유대인들, 그것도 환란을 통과한 유대인들과만 맺어지게 되는 언약이다. <br/>유대인들이 민족적으로 회복될 것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교회시대의 교리를 다루는 로마서에서조차 이 진리는 분명히 제시된다. 로마서 11장은 미래에 이스라엘이 회복되어 새 언약을 맺게 되는 것을 하나의 “신비”라고 말한다. <br/>『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현명하다고 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차기까지는 이스라엘의 일부가 완고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와 같이 “구원자가 시온에서 와서 야곱에게서 경건치 아니한 것을 제거하리라. 이는 내가 그들의 죄들을 없앨 때, 그들에 대한 나의 언약이 이것임이니라.” 함과 같으니라』(롬 11:25-27). <br/>이 시대에 이스라엘은 반역하여 나갔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일부”가 완고하게 되었다고 말하며, 결국은 온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br/>[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새 언약”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맺으시는 새 언약이고, 두 번째는 영적으로 교회에게 적용되는데,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이다. 이 두 번째 의미는 9장과 10장에서 다시 설명되는데, 9장에서는 특별히 이 두 번째 의미의 새 언약을 “new testament”라고 따로 분리시킨다. 하지만 8장에서 말하는 것은 분명히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맺은(7절) “새 언약”이다.]<br/>이 일곱 가지 언약은 세대주의 신학의 기초가 된다. 사실 “언약신학”(Covenant Theology)이라고 말하는 것은 단 두 개의 언약밖에 제시하지 않는다. 그 두 개는 “옛 언약”(구악)과 “새 언약”(신약)인데, 성경은 이것도 “covenant”가 아니라 “testament”라는 용어를 써서 따로 분리시키고 있다. 하지만 8장에서 말하는 것은 분명히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맺을(7절) &#034;새 언약&#034;이다.]<br/>히브리서 8장 본문은 이 언약을 이스라엘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날 맺어진 언약과 대조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 언약은 “모세의 언약”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언약 속에서도 온전히 행하지 않았기에 결국 배도하여 이방 가운데 흩어졌다. 그 언약은 조건적인 언약이고 일시적인 언약이었다. 그러나 앞으로 하나님께서 그들과 맺으실 언약은 조건적이지도 않고 일시적이지도 않다. 이 언약은 영원한 언약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 언약의 대조는 구약과 신약의 대조와는 다른 관점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description>
<dc:creator>관리자</dc:creator>
<dc:date>Fri, 26 Mar 2010 01:04:0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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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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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히브리서 7장<br/><br/><br/><br/>7:1-3 『이 멜키세덱은 살렘 왕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여러 왕들을 무찌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서 그를 축복해 주었던 이라. 아브라함이 전체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드렸더니, 그의 이름을 해석하면 첫째로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화평의 왕이라.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으며, 계보도 없고, 시작한 날과 생의 끝도 없으니, 하나님의 아들과 같이 되어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br/><br/>“멜키세덱”이라는 단어의 히브리어를 분석하면 “왕”이라는 의미를 지닌 “멜키”와 “의”라는 의미의 “세덱”으로 나뉘기 때문에, 그 이름의 뜻은 “의의 왕”이 된다. 뿐만 아니라 그가 왕으로 있었던 성읍의 이름이 “평화”를 의미하는 “살렘”이었으니, 그에게는 또한 “화평의 왕”이라는 칭호가 붙는다. <br/><br/>전쟁과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<br/>이 지역은 바로 예루살렘인데, 역사의 아이러니 중 하나는 “평화의 도시”라는 이름을 지닌 살렘이 지구상의 어느<br/>곳보다 더 많은 전쟁을 겪은 지역이라는 것이다. 다윗은 사무엘하 5:6-9에서 전쟁을 치르고 이곳을 차지하였다. 파라오 느코는 B.C. 607년에 이곳을 치러 올라왔으며, B.C. 586년에는 느부캇넷살이 이곳을 멸망시켰다. 코레스가 B.C. 536년에 이 성읍을 재건했지만, 마카비의 반란 때 이곳은 다시 찢겼으며(B.C. 70), 헤롯에 의해 재건되었지만(B.C. 30), 다시 A.D. 70년에 로마의 티투스에 의해 멸망했다. <br/>이 도시는 다시 A.D. 100년에 하드리안에 의해 재건된다. 하지만 A.D. 637년에 로마에 의해 다시 무너지고, 1099년에는 십자군들이 회복하지만, 얼마 못 가서 1187년에 살라딘에 의해 함락된다. 그리고 1918년의 해방운동 이후로 이 도시는 아랍국가들과 이집트와 PLO 등으로 인해 계속 전쟁을 겪고 있다. <br/>이러한 점으로 볼 때, 이 도시가 왜 “평화”라는 이름과 연관되어 있는지 의아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이러한 궁금증은 다음 구절들을 읽을 때 곧 사라지게 된다.<br/>『살렘에도 그의 성막이 있고, 그의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 거기서 그가 화살들과, 방패와, 칼과, 싸움을 부수셨도다. 셀라』(시 76:2,3). <br/>『이곳에 내가 화평을 주리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학 2:9). <br/>답은 간단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평화의 왕으로 오실 때까지 그곳에는 전쟁이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여호수아처럼(합 3:11), 또 기드온처럼(사 9:4) 예루살렘을 위해 싸우실 때까지는(&#49852; 14:1-3) 예루살렘뿐 아니라 이 땅 어디에도 영원한 평화가 없을 것이다.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은 계속 전쟁을 겪을 것이고, 의의 왕께서 모든 전쟁을 끝내시고 그 땅을 차지하셔서 평화의 왕으로 다스리실 때에야, 비로소 그 도시는 “평화의 도시”라는 이름에 걸맞게 완전한 평화를 누릴 것이다. <br/>예루살렘이 평화의 도시라 불리는 또 다른 이유는 모든 전쟁이 그 도시에서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천년왕국 끝의 마지막 전쟁도 그 도시에서 이루어진다. 이 도시에서 일어나는 마지막 전쟁 이후에는 어떠한 전쟁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br/><br/>의와 화평의 통치자 그리스도<br/>멜키세덱은 예수 그리스도의 분명한 모형이다(창 14:18의 주석을 보라). 그의 이름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갖는데, 이 두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때의 사역과 재림 때의 사역의 성격과도 같다. 첫 번째는 “의”이고 다음으로는 “화평”인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초림 때 “의”를 이루시려고 오셨고(마 5:20; 6:33, 롬 10:1-5), 재림 때는 “화평”을 이루시려고 오실 것이다. <br/>이 화평은 모든 철학자와 신학자들과 인본주의자들이 이루려고 노력한 것이지만 그들의 노력은 전쟁만을 가중시켰을 뿐이고, 예수님의 재림 때에야 비로소 온전한 화평이 있게 된다. <br/>특히 이것은 하나님의 모든 원칙에서 화평보다 의가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진리를 보여 주며, 우리가 행하는 모든 사역도 화평보다 의를 먼저 전파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 평화를 외친다. <br/>우리가 당연히 행해야 할 사역은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아 그의 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인데, 많은 사람들, 특히 교회일치 운동을 하는 후천년, 무천년주의자들은 이러한 “의의 전파”보다 오히려 “하나됨”, “형제애”, “세계 평화”, “교파간의 화합”, “교회일치” 등을 주장한다. <br/>예수 그리스도의 의보다 세상과 하나 되는 “평화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평의 왕이 되시기 이전에 먼저 의의 왕이 되셔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화평이 강조되는 “천국”을 구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의가 강조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마 6:33과 그 주석을 보라). <br/>예루살렘도 의를 이룬 다음에야 화평을 이룰 것이다. 이 순서는 성경에서 항상 중요한 원칙으로 제시된다. <br/>『그러나 위로부터 오는 지혜는 첫째, 순수하고 그 다음은 화평하며』(약 3:17). <br/>『의의 행위는 화평이 되며』(사 32:17). 그러므로 사람들은 평화를 사랑하기 이전에 진리를 사랑해야 한다(&#49852; 8:19). <br/><br/>이방인 제사장<br/>『이 멜키세덱은 살렘 왕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1절).<br/>여기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는 용어는 다니엘서에서 여러 번 사용되었듯이 이방인들이 유대인의 하나님을 이방 민족들의 모든 신들보다 뛰어난, 모든 신들의 머리와 같은 신으로 인식할 때 사용한 용어이다(단 3:26; 4:17; 5:18; 7:25, 신 32:8, 행 16:17). 그러므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이방인들이 부르는 이름과 관계 되며, 이 이름은 모든 피조물의 창조주로서 민족들을 다루시는 하나님과 관계된, 전우주적인 이름이다. <br/>멜키세덱은 이러한 점에서 이방인 제사장이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히브리서가 환란기의 유대인들을 위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책이 되는 것이다. <br/>[히브리서에서 발견되는 “단단한 음식”은 교리적으로 교회 시대에 적용할 수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영적으로 교회 시대를 사는 성도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며,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에 관한 부분에서만큼은 교회에게 직접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경우에도 유대인들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br/>본문에 제시되는 사건은 창세기 14장의 사건으로서, 크돌라오멜과 동맹한 왕들이 소돔과 고모라 왕과 동맹한 왕들과 싸워 이겨 롯을 사로잡아 갔을 때, 아브라함이 자기의 군사들을 이끌고 가서 그들을 치고 돌아 오던 날, 살렘 왕 멜키세덱이 아브라함을 맞이하여 빵과 포도주를 주고 아브라함을 축복한 내용이다. 이때 아브라함은 멜키세덱에게 탈취물의 십분의 일을 주었다. <br/>[이 사건은 율법 이전에 십일조가 행해진 예이다. 어떤 사람들은 십일조가 율법 아래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교회 시대의 성도들은 십일조의 의무가 없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율법 이전에 주어진 것은 율법이 지난 이후에도 여전히 존재한다(갈 3:17). 십일조는 율법 아래서 행해지기 전에 아브라함에게서 이미 행해졌다.]<br/><br/>7:5-11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서 제사장 직분을 받은 자들은, 자기들의 형제인 백성들이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나왔을지라도 율법에 따라 그들에게서 십일조를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그들의 계보에 들지 않은 그는 아브라함에게서 십일조를 취하고, 그약속들을 받은 그를 축복하였느니라. 다 아는 바대로 축복이란 낮은 자가 더 나은 자로부터 받는 것이라. 또 여기서는 죽을 사람들이 십일조를 받으나, 거기서는 살아 계시다고 증거되신 분이 받는 것이로다. 말하자면, 십일조를 받는 레위까지도 아브라함 안에서 십일조를 바친 것이라. 이는 멜키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났을 때에, 레위는 아직 조상의 허리에 있었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만일 레위 계열의 제사장 직분으로 온전해질 수 있었다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음이라.) 굳이 아론의 계열에 따라 부르심을 받지 않고, 멜키세덱의 계열에 따라 다른 제사장이 일어날 필요가 있었겠느냐?』<br/><br/>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이방인 제사장<br/>여기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한 이방인 제사장을 제시하면서 히브리 독자들의 주의를 끌고 있다. 이것은 그들에게 충격적인 일일 것이다. 이 이방인 제사장은 선택받은 민족인 유대인의 모든 제사장보다, 심지어 아론보다 우월하다. 그가 얼마나 위대한지는 4절에서 설명되어 있다. 『심지어는 족장 아브라함까지도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드렸느니라』(4절). 물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에게 드린 것이다. <br/>멜키세덱이 레위보다 우월한 것은 아브라함이 그에게 십일조를 드릴 때 레위는 아직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레위는 아브라함 안에서 십일조를 드린 것이고, 레위에게 십일조를 드린 모든 유대인들도 아브라함 안에서 한 이방인 제사장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이다. <br/>또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은 백성들을 재판하거나 축복하기도 한다(민 6:22-23). 이것은 레위의 제사장들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우월함을 뜻한다. 왜냐하면 “축복이란 낮은 자가 더 나은 자로부터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7절). 그런데 이 이방인 제사장은 아브라함을 축복했다(6절). 그러므로 모든 유대인들은 자기들보다 “더 나은” 자에게 십일조를 드렸고, 바로 그 “더 나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았다. <br/>물론 이것은 단순히 한 이방인이 모든 유대인보다 낫다는 뜻은 아니다. 이 인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기에 이것이 가능한 것이다. 8절은 『또 여기서는 죽을 사람들이 십일조를 받으나, 거기서는 살아 계시다고 증거되신 분이 받는 것이로다.』라고 말한다. 이 구절에서 “여기서는”은 죽을 레위 지파의 제사장 직분을 가리키는 말이고, “저기서는”은 멜키세덱을 가리키는 말이다. <br/>하지만 이것은 교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항상 제사장으로 있으신 그분은 “영원한 제사장”이신(17절)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누구에게도 적용될 수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멜키세덱이 누구냐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으나, 분명한 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확실한 예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역사적으로는 창세기 14장에 나오는 멜키세덱에 적용되는 부분이지만, 교리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되는 부분이다. <br/>히브리서가 교회 시대의 성도들에게도 유용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따르신 제사장 계열이 이방인 멜키세덱의 계열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서에서 제시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은 유대인만을 위하지 않고 이방인들도 위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히브리서에는 환란시대의 유대인을 위한 교리가 나오지만 교회 시대의 성도들을 위한 영적 교훈과 교리적 진리까지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br/>하지만 바로 그 이방인 제사장이 누구를 축복하는지를 주목해야 한다. 그는 이<br/>방인을 축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을 축복하였다(6절). 이 축복은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나온 씨들을 통하여 “약속의 상속자들”인 유대인에게 이어진다. 그는 유대인들을 축복한 것이고, 따라서 멜키세덱의 계열을 따른 예수 그리스도는 일차적으로 유대인들의 대제사장이시다.<br/><br/>7:22-28 『예수는 이처럼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그들이 실로 많은 제사장이 된 것은 죽음으로 인하여 직무를 계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나, 이분은 영원히 계시기 때문에 불변의 제사장 직분을 가지셨도다. 이러므로 그는 또한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끝까지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 그들을 위하여 중보하심이라. 그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적합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으며, 더러움이 없고 죄인들에게서 성별되시며, 하늘들보다 더 높이 되심이라. 그는 대제사장들처럼 먼저 자신의 죄들을 위하고, 그 다음에는 백성들의 죄들을 위하여 제사드리는 일을 매일 할 필요가 없으시니, 이는 그가 자신을 제물로 드림으로 단번에 이루셨음이라. 율법은 연약한 사람들을 대제사장들로 세웠으나, 율법 이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아들을 세웠으니, 이분은 영원히 드려지셨느니라.』<br/><br/>우리의 대제사장<br/>본문에서 제시되는 우리의 영원하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이렇다. <br/>1. 우리의 대제사장은 『거룩하고 악이 없으며, 더러움이 없고 죄인들에게서 성별되시며, 하늘들보다 더 높이 되심이라』(26절).<br/>2. 우리의 대제사장은 영원히 사신다(25절).<br/>3.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를 위해 중보하신다(25절).<br/>4. 우리의 대제사장은 자신을 제물로 드려 단번에 속죄를 이루셨다(27절).<br/>5. 우리의 대제사장께서 자신을 드리심은 영원하다(28절).<br/>6. 우리의 대제사장은 연약하지 않으시다(28절). 과거에 그분은 연약한 모습으로 나타나셨지만, 이제 그분은 영원히 영화롭게 되셨으며, 더 이상 시험이나 더위나 추위나 목마름이나 외로움이나 고통이나 죽음이 그분을 괴롭힐 수 없다. <br/><br/>끝까지 구원하시는 그리스도<br/>『이러므로 그는 또한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끝까지 구원하실 수 있으니』(25절)<br/>“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구원”을 말하는 것처럼 우리의 대제사장께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시다. 그분은 그렇게 하실 수 있고, 또 그렇게 하셨다. 주님이 잃어버린 단 한 명의 예외가 있었는데(요 17:12), 그는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br/>하지만 그는 원래 “마귀”였다(요 6:70-71).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니면서 주님이 베푸시는 많은 이적을 목격했고, 직접 이적을 행하기도 했다(마 10장). 하지만 그는 마귀였으므로 결국 제 갈 길로 갔다. 이처럼 원래 마귀였던 유다를 제외하고는 주님께서는 자신에게 나아오는 자를 결코 잃어버리지 않으셨다. <br/>주님은 “끝까지” 잃어버리지 않으시는데, 이 말씀은 교회 시대의 성도에게는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확증해 주는 말씀이기도 하다. 물론 환란 성도에게는 구원의 영원한 보장이 없다. 하지만 그들이 그들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붙들고, 대제사장이신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기만 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그들을 낙심시키지 않으시고 끝까지 구원하실 것이다. <br/><br/>유대인의 구원의 대장<br/>우리는 본 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만의 제사장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제사장도 되신다는 사실을 멜키세덱의 예를 통해서 보았다. 이것은 그분이 율법에 한정되지 않으신다는 것이며, 그분이 새롭게 제정하신 법은 율법보다 더 온전하고, 그 능력에 있어서도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br/>참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방인인 우리들의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위해 중보하신다. 이 사실이 바로 교회 시대의 성도들이 히브리서를 바울서신 못지않게 사랑할 수 있는 이유이다. 하지만 절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만의 제사장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분은 먼저 유대인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고(마 1:21), 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파하셨으며, 그들이 메시야를 못박은 이후에도 여전히 그들의 회개를 촉구했다(행 2,7장).<br/>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갖는 관계와는 좀 다르지만, 유대인들도 예수 그리스도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의 왕이고, 그들은 그분의 백성이다. 그들은 침례를 받을 때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다. 대환란이라는 극심한 고난 가운데에 있을 때, 그들은 자기들을 구원해 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데, 그 도움을 주시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끝까지 견딜 수 있도록 도우실 것이다. <br/>그들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그들을 동정할 수 있는 분이시고(4:15),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를 그들에게 주시는 분이시며(4:16), 혼의 닻 같은 그들의 소망이요(6:19), 결국은 그들의 구원의 대장으로서(2:10) 그들을 천년왕국이라는 안식의 땅으로 인도하실 분이시다(4:8).]]></description>
<dc:creator>관리자</dc:creator>
<dc:date>Fri, 26 Mar 2010 01:03:34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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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다시 새롭게하여 회개시킬 수 없나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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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 히브리서 6:1-20 ◀<br/><br/><br/><br/>6:1-6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의 기초를 떠나 온전함을 향해 나아가야 하리니, 죽은 행실들에서 회개함과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침례들과 안수함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리의 기초를 다시 놓지 말지니라. 실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한 번 깨우침을 받고, 하늘의 선물을 맛보며, 성령의 동참자가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오는 세상의 능력을 맛본 자들이, 만약 떨어져 나간다면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시킬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공개적으로 조롱함이라.』<br/><br/>본문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히브리서에서 가장 많이 걸려 넘어지는 부분이다. 많은 사람들이 본문에서 휘청거리는 이유는 이 부분을 교회시대의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성경의 모든 구절들은 교회시대를 향해서만 기록되지는 않았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경륜은 결코 교회만이 아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성경 전체에서 볼 때 교회의 경륜은 일부라는 것이다. 교회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의 전부를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br/>본문을 영적으로 교회에 적용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의 헌신도와 성숙에 맞추어 설교도 하고 거울로 삼을 수도 있지만 “교리적”인 면에 있어서는 문자적으로 한 가지 해석만을 취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본문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적용하면 많은 문제점들이 생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구절들은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말하는 바울 서신과 정면으로 대치되기 때문이다. <br/>이 구절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로마 카톨릭이나 감리교도들이 취하는 해석, 즉 구원받은 사람도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해석이다. 본문을 통해 볼 때 구원받은 누군가가 구원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너무나도 확실하다. 이것이 얼마나 확실한지 요한 웨슬레마저도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이 성경적인 교리인 줄 알았다. 로마 카톨릭의 경우는 카톨릭 교회 안에 있는 것이 “은혜의 상태”에 있다고 말하여, 이 은혜의 상태에서 떨어져 나가면 구원을 잃어버린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여러 경우에 있어서 구원을 잃어버린 사람들에 대해서 성경은 다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6절) 그들은 다시 영접시켜 구원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br/>반면에 칼빈주의자들이나 근본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구원을 잃어버린다는 교리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교리이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말하고 있는 바울서신과 “모순”되는 이 구절들을 억지로 해석하곤 한다. 우리가 잘 아는 M.R. 디한(M.R. DeHaan)은 본문을 8절의 “불타는 것”과 연결시켜 해석하면서(『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서,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기 때문이라』 8절), 불타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단지 그들의 “일들”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일들을 고린도전서 3장과 연결시켜,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성도들의 공력이 그 지은 것에 따라 불에 타버리는 것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그는 누군가가 마지막에 불타 버리게 된다는 구약의 마지막 말씀을 완전히 간과해 버린 것이다(말 4:1-4). 사무엘하 23장에는 재림과 “불타 버림”에 대한 다윗의 시가 기록되어 있는데, 사무엘하 23:4의 “해 돋을 때의 아침 빛”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모습을 나타내고, 6,7절은 재림 때 악인이 받을 형벌을 묘사한다. 『그러나 벨리알의 아들들은 모두 내다 버린 가시나무 같으리니... 그것들이 그 자리에서 완전히 불태워지리라』(삼하 23:6,7). 이때 불태워지는 것은 그 사람이 행한 “일들”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다. <br/>올리버 그린(Oliver Greene)이라는 사람은 본문을 하나의 “가상의 상황”으로 설정해 버린다. 사실 어떤 침례교도들도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세운 가상의 상황은 이렇다. 즉, “본문에서 말하는 이러한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잃어버린다면, 절대로 그러한 일은 벌어지지 않으나, 만약, 정말로 만약 그러한 일이 벌어진다면, 그때는 절대로 다시 구원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br/>대표적인 칼빈주의자인 아더 핑크(Arthur W. Pink)는 어떠한가? 그가 세운 상황은, 본문에 제시된 사람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성령의 동참자”일 수는 있으나 여전히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상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 핑크는 “동참자”(partakers)라는 말을 “동료”(companions)라는 말로 대체한다. 즉 그들은 진정한 “내적인 동참자”가 아니라 “외적인 동참자”일 뿐이라는 말이다. 결국 핑크에 따르면, 이 사람들은 원래부터 택함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니었기에, 교회는 다니고 입으로는 고백할지라도 결국은 떨어져 나가 지옥에 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4절이나 5절에서 하늘의 선물과 오는 세상의 능력을 “맛봤다”는 것도 실제로 하늘의 선물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맛만 봤다”는 말로 이해한다. 결국 그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교회나 기독교 공동체 속에서 “맛만 봤을 뿐” 실제적으로 참여한 것은 아니기에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맛본다”라는 말은 실제적으로 참여하고 경험한 것을 가리킨다. 만약 이 “맛보다”는 말을 핑크 식으로 해석한다면 히브리서 2:9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죽으신 것이 아니다. 단지 죽음을 살짝 “맛만 보셨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죽음의 고난 때문에 천사들보다 조금 낮아지신 예수를 보니,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도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기 위함이더라』(히 2:9).<br/><br/>자, 그렇다면 본문에 대한 올바른 해석은 무엇인가? 자기들의 교리에 맞추기 위해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는 학자들을 뒤로 하고 성경이 말하는 바를 그대로 보자.<br/>1. 이 책의 독자는 히브리인들이다. <br/>2. 그는 구원받은 히브리인이다. <br/>3. 하지만 그는 “끝까지 견디지” 못하면 구원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해 있다. <br/>4. 그가 비록 “성령의 동참자”가 되었을지라도 끝까지 견딤으로써만 “그리스도의 동참자”가 될 수 있다. <br/>5. 그는 오는 세상의 능력을 맛본 자인데, 그 세상이 오는 것은 사도들의 표적과 이적으로 특징지워진다. 성경에서 “오는 세상”은 항상 “천년왕국”을 가리킨다. <br/>6. 그는 멸망으로 떨어질 위험에 처해있다. 이것은 마치 약속의 땅을 향하여 출애굽한 많은 백성들이 광야에서 멸망한 것과, 또 카나안 땅에 들어간 많은 백성들이 배도해 나간 것과 같다. <br/>7. 그는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고, 그러면 다시 구원받을 수 없게 된다. <br/>8. 그렇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불타는 심판이 그를 기다리게 될 것이다. 이것은 히브리서 10:26-31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심판을 받는 심판과 마찬가지이다. <br/>그러므로 히브리서 6장의 본문은 교회시대를 뛰어넘어 환란시대에 적용된다. 우리가 이미 여러 번 고찰한 바 있지만 환란시대에는 믿음만으로 구원받지 못한다. 그 시대는 교회 시대와는 여러 모로 다르다. 교회 시대에는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접하는 순간 성령께서 그 안에 들어가셔서 영원히 떠나지 않으시지만 환란시대에는 구약시대와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떠나실 수 있다. 교회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이 땅에 있지만 환란시대에는 교회가 휴거되고 없다. 이에 따라 교회시대에는 역사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이지만 환란시대에는 구약시대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이 역사의 중심이 된다.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다루시는 경륜 속에서는 반드시 표적과 이적이 수반된다. 이 표적과 이적은 왕국복음과 직결되는데, 이 복음은 교회시대에 전파되는 은혜의 복음과는 거리가 멀다. 은혜의 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묻히심과 부활이 중요하게 다루어지지만 왕국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왕되심이 주로 다루어진다. 이 왕되심은 영적으로 성도들을 다스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왕되심은 구약에서 누누이 예언되었던 대로 팔레스타인에 있는 다윗의 보좌에서 왕되신 예수님께서 직접 몸을 입고 정치적으로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실제적인 왕되심이다. 이 왕국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왕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말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제시된 것은 유대인들에게이고, 이 왕국 역시 아브라함 때부터 유대인에게 제시되었다. 환란시대는 왕국복음이 전파되는 때로, 교회가 휴거되어 없기 때문에 구약과 연속선상에 있는 시대이다. 그러므로 환란시대는 구약시대와 여러 모로 비슷하다.<br/>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끝까지 견디는 그들의 행위를 유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떨어져 나갈 수 있고, 그렇게 되면 결코 회복될 수 없다. 이러한 분명한 성경적 진리가 히브리서 3,4,6,10장, 마태복음 24,25장, 요한계시록 2,3,12,13,14,22장, 야고보서 5장, 유다서와 데살로니가후서 2장 등에서 명확히 제시된다. 성경을 성경대로 믿는다면 이 진리를 명확히 나타내 주는 본문들에서 결코 피할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진리를 헬라어 지식에서나 학자들의 궤변에서나 로마 카톨릭의 사적인 해석에서는 절대로 얻을 수 없다. 우리는 성경 한 구절 한 구절, 한 단어 한 단어를 그대로 믿음으로써 이 진리를 얻는다. 이 모든 본문들은 교회시대에 해당되지 않는다. 사도행전 7장에서 왕국복음이 멈췄다가 2000년 간의 교회시대를 뛰어넘어 환란시대에 적용되는 본문들이다. <br/>물론 아무리 환란기간을 다룬 본문일지라도 영적으로 그리스도인에게 거울이 될 수는 있다. 1절에서 “온전함”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에게 영적으로 적용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성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5장에서도 다루었지만, 새로 태어난 아기가 젖을 먹고 그 다음에는 이유식과 밥과 채소를 먹고 자라며 성인이 되어서는 질긴 고기를 먹을 수 있듯이, 새로 거듭난 성도들도 처음에는 우유같은 말씀으로 양육받다가 점차로 빵 같은 말씀, 꿀 같은 말씀, 그리고 장성해서는 고기 같은 질긴 말씀으로 양육을 받아야 한다. 6:1-2은 바로 이런 것들을 말해 주고 있다. 죄인이 거듭났다면 그는 먼저 그리스도에 대한 기초 교리들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더 온전한 것들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권면받는다. 그는 침례나 죽은 자들의 부활이나 심판에 관한 교리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 이런 것들은 어린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젖”이다. 이제 그는 더 질긴 말씀으로 양육받으며 그리스도의 군사, 영적 전쟁의 전사로 우뚝 서야 한다. 이것이 “온전함”을 향해 나아가는 성도의 모습이다. <br/><br/>6:13-20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두고 맹세할 이가 자기보다 더 큰 자가 없으므로, 자신을 두고 맹세하며, 말씀하시기를 “반드시 내가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또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하셨더니, 그가 그처럼 끈기 있게 견딘 후에, 그 약속을 받았느니라. 실로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위대한 이를 두고 맹세하나니, 확정을 위한 맹세는 그들에게 모든 다투는 일의 종결임이라. 이 점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상속자들에게 자기의 뜻이 불변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확정하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로 인하여, 우리 앞에 놓여진 소망을 붙잡기 위해 피난처를 찾아 나온 우리로 든든한 위로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 소망을 혼의 닻같이 가졌으니, 확실하고 견고한 소망이라. 이로써 우리 혼이 휘장 안에서 그 안으로 들어가나니, 선두주자이신 예수께서도 우리를 위하여 그곳으로 들어가시어, 멜키세덱의 계열에 따른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느니라.<br/><br/>마지막은 다시 히브리서의 큰 주제인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에 관한 주제로 넘어간다. 이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 이방인 셈족 제사장인 멜키세덱을 등장시켰고, 이와 관련해서 이방인이며 히브리인인 아브라함을 등장시킨다. (아직 아브라함은 유대인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하나님의 맹세로 확정받은 “약속의 상속자”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을 아브라함에게 이루시기 위해 자신을 두고 맹세하셨다. 왜냐하면 맹세를 할 만한 더 큰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br/><br/>『약속의 상속자들』(17절)은 두 가지 부류로 적용될 수 있다. 첫 번째는 믿음으로 성령을 받은 사람들인데(갈 3:14),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형인 이삭의 영적인 씨로서,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된 그리스도인들이다. 두 번째는 아브라함의 육체적인 자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맺으신 언약에 따라 팔레스타인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다(창 15:18-21). 영적인 자손들도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은 갈라디아서에서 아브라함의 씨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녀가 된다고 말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러나 이 경우에 이방인들로 구성된 그의 영적인 자녀들은 아브라함의 자녀들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진다는 그 약속과 아브라함이 누리는 영적인 언약에 대해서만 참여할 수 있을 뿐, 그에게 주어진 “땅”에 관한 언약에는 참여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팔레스타인 땅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지만 아브라함의 육체적인 자손인 유대인들은 메시야 왕께서 통치하실 때 그 땅을 회복할 것이다. 이것은 다윗에게 이르러 그 땅에서 다윗의 보좌를 영원히 세우시겠다는 언약으로 이어진다. 다윗의 보좌에 앉으시는 메시야 왕의 왕국은 팔레스타인 땅에서 유대인들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육체적인 자손들인 “약속의 상속자들”이 누릴 실제적인 축복이다. <br/>이 사실은 『자기의 뜻이 불변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확정하셨으니』(17절)라는 말로 분명해진다. 하나님께서 불변하겠다고 하시면 그것은 변하지 않는다.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그 땅이 약속되었다면(창 17:8) 그 땅은 여전히 아브라함과 그 씨에게 속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율법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율법 이전의 약속으로 주어진 것이다. 중간에 끼어든 율법은 이 약속을 바꿀 수 없으며(갈 3:17-21)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팔레스타인 땅을 유업으로 주신다는 그 약속은(유업이라는 말이 기본적으로 “땅”과 관계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중간에 어떠한 세대가 어떻게 바뀌었든지 간에 그대로 성취될 것이다. <br/><br/>『거짓말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로 인하여』(18절)<br/>“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은 약속과 맹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가지가 변치 않는다는 것을 거짓말하실 수 없는 그분의 속성으로 분명하게 확정지으셨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다면 그것은 선하신 것이다(민 23:19). 그분의 약속은 속이거나 잘못 인도하도록 고안되지 않았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을 거절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을 그릇되이 인도하실 것이다(미 2:11).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학자들 또한 잘못된 해석으로 인도할 것이다(겔 14:1-10).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죽음에 던져 넣기 위해 거짓말하는 영을 허락하시기도 했다(왕상 13장). 그분은 “불의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강한 미혹의 역사를 보내실 것이다(살후 2:11,12). 하지만 그분은 “약속”에서 만큼은 결코 거짓말하지 않으실 것이다. <br/><br/>『우리 앞에 놓여진 소망을 붙잡기 위해』(18절)<br/>이 “소망”도 두 가지 적용이 가능한데, 이 소망은 그리스도인의 소망이자 또한 환란 성도들의 소망이다. 우리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새로운 몸을 입는 것이다(빌 3:20,21, 요일 3:1-4). 물론 이것은 환란 이전에 휴거될 때 있을 것이다. 우리는 “눈깜짝하는 순간”에 변화되어 새로운 몸을 입는 부활을 경험하게 된다(고전 15:49-55). 마찬가지로 환란성도들도 “더 좋은 부활”을 소망한다(히 11:35). 물론 이것은 대환란 이후에 있을 것이고, 땅을 유업으로 받는, 왕국을 상속받는 사건과 직결될 것이다.]]></description>
<dc:creator>관리자</dc:creator>
<dc:date>Fri, 26 Mar 2010 01:02:58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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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하나님에게서 떨어지다</title>
<link>https://www.biblemaster.co.kr/bb2/%ED%95%98%EB%82%98%EB%8B%98%EC%97%90%EA%B2%8C%EC%84%9C-%EB%96%A8%EC%96%B4%EC%A7%80%EB%8B%A4/</link>
<description><![CDATA[&lt;본문 : 히브리서 3장 7-19절&gt;<br/><br/><br/><br/>3:7-19 『그러므로 (성령께서 말씀하시기를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의 때, 곧 광야에서의 시험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라... 내가 내 진노 가운데서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셨느니라.) 형제들아, 너희 중에 아무도 믿음 없는 악한 마음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오직 오늘이라고 부르는 동안 매일 서로 권면하여 너희 중 아무도 죄의 속임수에 빠져 완악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는 우리가 처음의 확신을 끝까지 확고하게 붙들면 그리스도께 참여한 자가 되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보건대 그들이 들어가지 못한 것은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니라.』<br/><br/>여기서 히브리서의 기자는 일정 기간을 견디는 약속에 대해 구약에 있던 한 사건을 예로 들면서 설명하고 있다. 그 사건은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을 하여 광야에서 40년 동안 지냈던 사건인데, 과거에 약속의 땅에 들어 가기 전의 일정 기간은 미래에 천년왕국에 들어 가기 전의 일정 기간의 모형이다. 많은 신학자들은 출애굽하여 광야 생활하는 것을 죄인의 구원과 성도의 생활에 적용하여, 홍해를 건넌 것은 죄인이 구원받은 것이고, 광야 생활을 한 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할 때 여러 가지 고난과 시험을 당하며 영적 전쟁을 겪는 것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교리적으로 옳지 않다. 우리가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광야에서 지낸 40년 동안 유대인들은 많은 수가 하나님을 대적했으며,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끝까지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나갔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안식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이 시대의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도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나갈 수 없다. 그들이 비록 시험을 받고 그들의 신앙생활에서 퇴보할지라도 그들은 결코 구원을 잃지 않는다. <br/>출애굽의 여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천년왕국의 안식의 땅으로 들어가는 미래의 사건의 모형이다. 과거에도 유대인들은 일정 기간을 광야에서 시험받았듯이 미래에도 일정 기간을 시험받는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끝까지 견디는 사람들은 구원받을 것이지만 도중에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은 지옥으로 갈 것이다. 이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동참자”가 되기까지 구원의 영원한 보장은 없다. 그들은 구원받았지만 언제든지 잃어버릴 수 있는 상태이다. <br/><br/>『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7절)<br/>본문은 시편 95:7-11의 인용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과거의 사건을 언급하시면서 미래에 행해야 할 일에 대해서 예언하고 계신 것이다. 여기서 “오늘”(To day)이란 바로 미래에 있을 일정 기간의 때를 말한다. 이와 비슷하게 고린도후서 6:2에서는 “지금”(now)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구원의 날을 설명하고 있다. 이 표현이 어떤 날을 가리키든 간에 어떤 일정한 기간을 말하는 것이지 개인의 삶의 기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는 미래에 있을 고난의 때, 즉 대환란 기간을 말한다. <br/><br/>『격노의 때, 곧 광야에서의 시험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라. 그때에 너희 조상이 나를 시험하였고, 나를 증명하였으며, 또 내가 한 일들을 사십 년 동안 보았느니라.』(8-9절)<br/>그 분의 음성을 다시 듣게될 바로 그 “오늘” 그들은 과거 그들의 조상들이 했던 것처럼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라고 경고받는다. 그들의 조상들은 하나님을 시험했고(신 1:26; 6:16), 또 모세를 격노케하여 그의 입으로 경솔한 말을 하게 했다(시 106:33). 본문에서 제시되는 것은 주를 거역하는 히브리인의 모습이다. <br/>히브리서에서 강조하는 것은 “비교”이다. 예수님의 우월하심도 천사와 아담과 아론과 모세와 비교하여 증명하였다. 이번에도 히브리서는 또 하나의 비교를 시도한다. 그것은 과거에 안식의 땅으로 들어가는 모습과 미래에 안식의 천년으로 들어가는 모습이다. 히브리서 3장과 4장에서는 “안식”이라는 주제로 이 두 사건을 계속 비교하여 설명하는데, 히브리서의 독자들이 받는 경고는 과거에 조상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고 그 시험의 기간을 견뎌내라는 것이다. 그때 그들에게 주어지는 안식은 과거에 주어졌던 안식보다 “더 큰 안식”이다. <br/><br/>『그러므로 내가 그 세대에 대해 노여워하여 말하기를 ‘그들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들을 깨닫지 못하였느니라.’ 하였으며 내가 내 진노 가운데서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셨느니라.』(10-11절)<br/>카네스 바네아에서 주를 거역함으로 말미암아 40년을 방황하게 된 이 저주받은 세대는, 당시 20살 이상의 사람들 중 여호수아와 칼렙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 <br/>이 안식은 영적인 안식이 아니다. 이 안식은 실제적인 안식으로, 육체를 입고 카나안 땅에 들어가는 안식이다. 그러므로 이 안식을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영적 안식으로 해석해서는 안되며, 출애굽기간을 신약적인 구원이나 이방인의 구원계획과 연관시켜 설명해서도 안된다. 성경에는 여러 종류의 안식이 제시되는데,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쉬신 것(히 4:4)과 그로 말미암은 안식일, 여호수아가 팔레스타인 땅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한 안식(히 3:11,18), 천년왕국(히 4:9-11), 그리고 영적 안식(히 4:10) 등이다. 이 영적 안식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끝내신 일을 신뢰함으로 말미암아 그분 안에서 쉬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안식은 우리의 행위와는 전혀 무관한, 믿음만으로 얻는 안식이다. 죄인은 쉼을 얻기 위해서 어떠한 행위를 할 필요가 없다. 죄인이 혼의 쉼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 가기만 하면 된다(마 11:28).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모두 해결해 놓으셨기에 우리는 그 분의 피를 신뢰하기만 하면 영적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서 본문에서 제시하는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함으로 그분 안에서 쉬는 영적 안식이 아니다. 그들은 이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 믿음과 더불어(민수기 14장에서 그들은 믿음이 없음으로 카나안 땅을 침범하지 못했다) 모종의 행위를 해야만 한다. 만약 그들이 끝까지 견디지 못하면 이 안식을 얻을 수 없다. 이 안식은 결코 영적인 것이 아니며, 실제적이고 물리적인 안식인 것이다. (네 가지 안식에 대해서는 &#65378;성경용어 코너&#65379;를 참조할 것)<br/><br/>『형제들아, 너희 중에 아무도 믿음 없는 악한 마음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라.』(12절)<br/>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진다는 이 표현은 구원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강력히 지적하는 표현이다. 요한 웨슬레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통하여 구원의 “불안전성”에 대한 교리를 정립하고 있다. 만일 죄인들이 히브리서 3장의 이 안식에 의존한다면 그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안식을 얻을 수 없다. 그는 믿음 없는 본에 빠지지 않기 위해 지속적으로 행위를 해야 한다. <br/>물론 이런 일들이 교회시대를 사는 신약 성도들에게 본으로 제시되는 것은 사실이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출애굽 사건을 예로 들면서 성도들에게 그들처럼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죽은 사람들을 말하면서 성도들에게 경고하고 있다(고전 10:8-12). 그러나 바울이 구약의 유대인들을 언급하여 그리스도인의 타락을 말할 때면 그는 단순히 “육체적 죽음”을 말하고 있는 것 뿐이다. 즉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출애굽 때 그들이 반역하여 죽임을 당한 것처럼 너희도 그렇게 하면 죽을 수도 있다.”라는 것이지 “그들이 구원에서 떨어져나간 것처럼 너희도 구원에서 떨어져나갈 수 있다.”라는 것은 아니다. 고린도전서 11:30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죄 때문에 병들기도 하고 육체적인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죄 때문에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진다”는 것은 바울 서신과는 다른 관점으로 구약을 제시한 것이고, 그들은 실제적으로 구원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히브리서 3,4,6,10장은 구원을 잃어버리는 교리를 제시하고 있다.<br/><br/>“믿음 없는 악한 마음”에 대해서는 구약성도들이나 신약성도들이나 환란성도들에게 모두 해당되는 경고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신약성도들은 이러한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에게서 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환란성도들 중에는 과거 출애굽 때 그들의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불신 때문에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긴다(19절). 그들에게 있어서는 약속의 땅, 즉 유대인들에게 약속된 천년왕국의 팔레스타인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곧 지옥의 저주를 의미한다. 민수기 14장에서 그들은 여호수아와 칼렙이 말한 그 땅에 대한 “좋은 소식”을 들었다. 즉 그들은 “복음”을 들었으나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전해들은 “복음”이 지금 우리가 전해들은 “은혜의 복음”이 아닌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들이 들은 복음은 “주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데려다 주시리라.”는 것이다(민 14:8). 그러나 그들은 이 복음을 믿지 않고 떨어져 나갔다. 이와 똑같은 상황이 마지막 대환란 때 다시 나타날 것이다. <br/>그러나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도 한 번은 분명히 믿었던 적이 있었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떠나오기 직전 유월절 양의 피를 믿었던 것이다. 이것은 신약성도들에게 중요한 모형이 된다. 이것은 율법(행위) 이전에 주어진 은혜(믿음으로 말미암는)의 역사이다.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유월절 양의 피를 믿음으로써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얻었다. 하지만 그들은 율법 이전에 주어진 은혜의 역사를 믿고도 떨어져 나간 사람들이다. 여기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히브리서의 독자들에게 실패한 그들의 조상들처럼 떨어져나가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들이 실패한 그 믿음을 이들은 가져야 한다. <br/><br/>『오직 오늘이라고 부르는 동안 매일 서로 권면하여 너희 중 아무도 죄의 속임수에 빠져 완악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13절)<br/>이 “오늘”이라고 부르는 기간은 매우 중요하다. 그 때에는 죄의 속임수에 절대 빠져서는 안된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에서 이러한 상황을 대비해서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시고, 악에서 구하여 주옵소서』(마 6:13)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구체적인 악의 실체인 적그리스도가 등장해 있고, 죄를 짓게 되면 구원에서 떨어져나가 다시 회복될 수 없는 이 상황에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그들에게 매우 힘이 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삶을 성결케 유지하기 위해 이러한 기도로써 끊임없이 주님께 의지하며 주님의 왕국이 이 땅 위에 하루 빨리 임하도록 기다리며 기도해야 한다.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마 6:10). 이때 그들에겐 천국복음이 다시 전파될 것이고(“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표적과 이적이 다시 등장할 것이며(막 16:17-18), 그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부양받을 것이고(계 12:14), 그들 중에는 과거 출애굽 때처럼 떨어져 나갈 자들이 있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참여자들이 되어(히 3:14) 구원받아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팔레스타인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다(창 15:18-21). 이 모든 일들은 “오늘”이라고 불리는 기간 동안 일어날 것이다. <br/><br/>『이는 어떤 자들이 말씀을 들을 때에 격노케 하였음이라. 그러나 모세에 의하여 이집트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그리한 것은 아니었느니라.』(16절)<br/>이 부분은 대부분의 역본들이 변개시킨 부분이다. 성경은 분명히 이집트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반역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 사실은 민수기 14:29에서 20세 이상된 자들만이 멸망했다는 기사로 증명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변개된 성경들은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쫓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Who were they who heard and rebelled? Were they not all those Moses led out of Egypt? - NIV)라고 말한다. (한글개역성경도 똑같은 번역을 취했다.) 이 부분은 “마지막 날들”을 사는 히브리인들에게 경고를 주는 가운데 그들에게 위로와 확신을 주는 부분이다. “모세에 의하여 이집트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다 멸망한 것은 아니므로 너희 중에서도 믿음과 인내로 끝까지 지키는 사람들은 구원받을 것이다. 확신을 가지고 끝까지 견뎌라.”라고 말하는 부분이다. 만약 여기에서 다른 성경들처럼 “모든 사람”이 반역했다고 기록했다면 히브리서를 읽는 환란기 때의 독자들은 희망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주님은 항상 경고와 더불어 희망과 약속을 주신다. 이러한 내용은 히브리서 10장에서도 다시 한 번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는 뒤로 물러나서 멸망하게 될 자들에게 속하지 아니하였고, 오히려 혼의 구원에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속하였느니라』(히 10:39). 이것은 믿음을 가졌으나 언제라도 떨어져나갈 위험에 처한 사람들에게 위로와 확신을 심어주는 강력한 구절이다.]]></description>
<dc:creator>관리자</dc:creator>
<dc:date>Fri, 26 Mar 2010 01:01:36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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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끝까지 붙잡으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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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lt;본문 : 히브리서 3장 1-6절&gt;<br/><br/><br/><br/>3:1-6 그러므로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하는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고백하는 바 사도이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그는 자기를 세우신 분에게 신실하기를 마치 모세가 그분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 그가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아 마땅함은 마치 집을 지은 사람이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한 것과 같으니라. 어떤 집이든 누군가가 지었으나 만물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시니라. 또 모세는 실로 장차 말하여질 것들에 대한 증거를 위해 그분의 온 집에서 종으로 신실하였으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의 집을 맡은 아들이니, 만일 우리가 확신과 소망의 기쁨을 끝까지 견고하게 붙잡으면 우리가 그의 집이라.<br/><br/><br/>3장에서 우리는 모세와 비교하여 월등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 (1장과 2장에서는 천사보다, 아담보다 더 월등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제시되었다.) <br/><br/>『그러므로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하는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고백하는 바 사도이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1절).<br/>“참여하는 자”(partaker)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6장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br/>성경에서 “사도이며 대제사장”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된다. 예수님 당시에 사도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지만 “바로 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시다. 로마 카톨릭은 베드로를 “사도들의 왕”이라고 부르는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셔야 할 칭호를 자기들의 교리에 따라서 베드로에게 주고 있다. <br/>“대제사장”도 마찬가지다. 구약에 많은 대제사장들이 있었으나 “바로 그 대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구약의 대제사장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일 뿐이다. 로마 카톨릭은 여기서도 예수님께서 받으실 칭호를 찬탈하고 있는데, 그들은 자기들의 성직자들을 제사장(priest)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이며 대제사장”이라고 한다. <br/><br/>『그는 자기를 세우신 분에게 신실하기를 마치 모세가 그분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2절)<br/>성경에서 “집”(house)이라는 말은 몇 가지 의미로 설명될 수 있다. 먼저 사람의 몸을 집이라고 표현한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5:1에서 몸을 땅에 있는 장막 집으로 묘사한다. 또한 “집”이라는 말은 구약에서 성전을 묘사할 때 사용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시는 그분의 집이라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br/>또한 성경에서 “집”이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집”을 가리키기도 한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이라는 표현을 종종 볼 수 있다. 여기서의 집은 “가족”(household)이라는 의미로서 사용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핏줄과 한 민족으로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한 가족으로 여기시는 것이다. <br/>특히 본문에서 이 “집”은 이스라엘의 집을 가리킨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이라는 집안을 신실하게 관리했다. 또한 이 집은 그분의 집, 즉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린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집안을 관리하라고 세우셨을 때 신실함으로 사역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모세는 주인(하나님)의 집을 맡은 종으로서 신실하였던 반면,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의 집에서 “아들”로서 신실하셨다(5,6절).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 면에서 비교되는데, 특별히 여기서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종과 자기 자신의 집을 맡은 아들로 비교가 된다. <br/>물론 모세는 모든 면에서 신실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생애에서 나타난 가장 큰 오점은 백성들에게 분노하여 바위를 두 번 친 일이다(민 20:11). 그리고 이 일로 인해 모세는 카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보통 실수가 아니라,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번 치심을 받아야 할 것을 두 번 치심을 받을 것으로 그 모형을 잘못 제시한 큰 실수였기 때문이다. <br/>모세는 이처럼 큰 실수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집에서 신실하다고 여겨진다. 그는 성막과 율법에 대해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시하신 모든 일에 대해 신실하였다. 우리는 성경에서 “주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였더라.”와 같은 표현들을 자주 읽게 된다(출 39:32; 40:19, 레 8:4 등).<br/>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에서 신실한 자이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를 신실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민 12:7). 그러나 민수기 20장에서 모세가 실수하여 안식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히브리서 3장에서 그를 신실하다고 말씀하신 것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큰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신실하다고 여기시는 그 판단 앞에서 모세의 잘못은 간과된 것이다. 이와 같은 예들은 신약성경에서 여러 번 등장한다.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사라의 잘못이 간과되며, 마태복음 12장에서는 위대한 표적으로서 요나를 제시하며, 야고보서 2장에서는 창녀 라합에게 큰 점수를 준다(약 2:25).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삼손의 부도덕성이 간과되어 있고, 로마서 9:13에서는 야곱의 거짓말이 간과되어 있다. 특별히 믿음의 사람들을 다루고 있는 히브리서 11장의 인물들을 볼 때 그들에게서 많은 실수들을 찾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등도 포함시키는데(히 11:32), 성경은 이들을 모두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평하고 있다. 그들의 잘못들이 하나님의 판단 앞에서 간과된 것이다. 신약성경은 구약에서의 죄들을 없애 버리고 있다.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위대한 은혜의 교리이다. <br/><br/>『그가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아 마땅함은 마치 집을 지은 사람이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한 것과 같으니라』(3절).<br/>여기서 모세와 비교되는 예수 그리스도는 4절에서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신성과 연계되어 설명된다. 이 “집”을 구원받은 사람들, 즉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 본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시니 교회를 지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더욱 존귀하다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다루고 있는 부분이다(골 1:13-19).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집을 “자기 자신의 집”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사역을 수행함에 있어서 종의 위치로 사역하시기도 했지만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되심이 아니라 아들되심이다. 그리고 그분을 아들이라고 부를 때는 항상 그 분의 신성을 말하는 것이다(요 10:29-30). <br/><br/>『또 모세는 실로 장차 말하여질 것들에 대한 증거를 위해 그분의 온 집에서 종으로 신실하였으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의 집을 맡은 아들이니』(5-6절).<br/>모세의 역할은 장차 말하여질 일들을 증거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장차 되어질 일들의 모형이라는 것이다.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제시된다. 그가 하는 사역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있다. 요한복음 6:32-33에서 주님은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모세가 하늘에서 빵을 내려 너희에게 준 것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께서 하늘에서 참된 빵을 내려 너희에게 주시나니 이는 하나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그분이기 때문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먹게 한 그 빵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그 빵의 모형이 되었으며, 그것은 또한 생명의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서 제시되셨다 (신 18:18). 모세가 책망받은 유일한 곳은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를 다루는 부분과 연관되어 있다(민 20:7-13).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바위에다가 단지 말하라고 하셨을 뿐인데 모세는 바위를 두 번이나 친 것이다. 바위는 두말할 나위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고전 10:4).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한 번만 치심을 받게 된다(히 10:8-12). <br/><br/>『만일 우리가 확신과 소망의 기쁨을 끝까지 견고하게 붙잡으면 우리가 그의 집이라』(6절).<br/>본문은 교회시대에 적용될 수 없는 구절이다. 왜냐하면 이 시대의 “하나님의 집”은 신격의 모든 충만함이 몸의 형태로 거하시는 그분의 몸(골 2:9), 그분의 살과 뼈인 예수 그리스도의 몸(엡 1:23; 4:15-16; 5:30), 바로 그 몸에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 몸에 속한 사람들은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받았다(롬 8:28-32). 그러므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집(가족)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 “만일”이라는 부사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사람들은 “끝까지 견고하게 붙잡으면” 그분의 집(가족)이 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의 집이 되기 위해 이러한 조건을 지킬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미 그분의 몸이요 집이기 때문이다. <br/>히브리서는 처음부터 “마지막 날들”을 겨냥해서 기록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히 1:2). 또한 “유업”이라는 말이 등장하고(히 1:4), 보좌와 홀이 언급된다(히 1:8). 그리고 그 분의 통치가 있은 후에는 하늘들과 땅이 사라져 버릴 것이며(히 1:10 -13), 이 때에 구원을 “유업”으로 받는 사람들이 등장한다(히 1:14). 이 기간은 “장차 임할 세상”(world to come)과 연관되어 있으며(히 2:5), 아담에게 주어진 약속이 성취된다(히 2:7-8). <br/>여기에 “끝까지”라는 말이 상당히 부각되는데, 바로 이 “끝까지 견디는 것”은 구원을 받는 조건이 된다(히 3:6). 이 기간에는 성령의 동참자가 되었을지라도(히 6:4) 안식에 이르지 못할 자들이 있고(히 4:1) 뒤로 물러나 멸망하게 될 자들이 있다(히 10:39). 다시 말해서 구원을 받았으나 다시 잃어버릴 자들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을 교회시대에 적용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이들은 믿을 때에 우리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병합되지 않는다. <br/>4장과 6장에서도 계속 언급되겠지만 이 사람들은 구원받은 사람들로서 “끝까지” 견디지 않으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다. 여기서 “끝”(the end)은 마태복음 24:13,14에서 제시된 “끝”이며, 끝까지 견디지 못해 거부되는 사람들은 마태복음 25장의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참여자가 되기 위해 끝까지 견디라는 명령을 받은 적이 없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을 끝까지 지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고전 1:8). <br/>대부분의 이단들은 교리적으로 교회시대에 관계없는 부분을 취해서 자기들의 전체 교리로 삼으려는 데 문제가 있다. 히브리서 3:6과 3:14은 교회시대에 사는 어느 누구에게도 결코 교리적으로 적용되어서는 안된다. 본문에서 “끝”은 어느 일정 기간의 끝이다. 이 “끝”이 개인의 삶의 끝이 아니라는 것은 마태복음 24:13,14의 문맥에서 자연스럽게 증명된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 왕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런 후에야 끝이 오리라』(마 24:13,14). <br/>만일 “끝”이 각 성도 개인의 삶의 끝이라면 그 각각의 “끝”들이 임하기 전에 온 세상에 왕국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우리는 문맥 속에서 이 “끝”이 왕국복음이 전파되는 일정 기간의 끝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기간은 교회시대가 아니다. 교회시대에는 결코 왕국복음이 전파되지 않고 은혜의 복음이 전파된다. 왕국복음이 전파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당시 사도행전 7장에서 스테판이 마지막으로 유대인들에게 설교한 때까지의 기간이며,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직전인 대환란 기간이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히브리서 1:2의 “마지막 날들”(last days)의 기간과 일치된다. 이 “끝”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끝날 것이다. <br/>특별히 히브리서 3:14에서는 처음의 확신을 끝까지 확고하게 붙들면 “그리스도께 참여한 자”(partakers of Christ)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끝까지 견딘 자에게 약속된 구원의 보장에 관한 말씀이다. 그러나 히브리서 6:4-6에서는 “성령의 동참자”(partakers of the Holy Ghost)가 된 사람 중에 떨어져 나가는 자들이 있게 된다고 말한다. 이것 또한 교회시대와는 다른 환란시대의 교리를 분명히 제시해 준다. <br/>교회시대에는 성령의 동참자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동참자이다. 이 시대에 누군가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아 성령으로 거듭났다면 그는 그 즉시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어 그리스도의 동참자가 된다. 그리고 그에게는 성령께서 영원히 내주하시기에 성령의 동참자가 된다.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난다. <br/>그러나 환란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다르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 두 가지 사건은 시간적인 간격을 두고 일어난다. 먼저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가지게 되면 그는 히브리서 6장에 나와있는 것처럼 “성령의 동참자”가 된다. 그는 하늘의 선물을 맛본 사람이며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오는 세상의 능력을 맛본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떨어져 나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고 지옥에 갈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인내하며 그의 행위로 끝까지 견디게 되면 그는 “그리스도의 동참자”가 되어 구원받게 된다(히 3:14).]]></description>
<dc:creator>관리자</dc:creator>
<dc:date>Fri, 26 Mar 2010 01:00:52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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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히브리서 2:14-18)</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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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2:14 자녀들이 피와 살에 참여하는 자인 것같이 그 역시 같은 모양으로 동일한 것에 참여하신 것은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망시키며 또 죽음을 두려워하므로 평생을 노예로 속박되어 있는 자들을 놓아 주시려 함이니라. 이는 주께서 진실로 천사들의 본성을 입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의 씨를 입으셨음이라. 그러므로 그가 모든 일에 마땅히 자기 형제들과 같이 되셔야 했으니, 이는 하나님과 관련된 일들에 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백성의 죄들을 위해 화해를 이루려 하심이라. 그가 이 일에 친히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와주실 수 있느니라.<br/><br/><br/>이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다루는 위대한 구절들이다. 히브리서 2:5-8에서 우리는 아담에게 주신 땅의 유업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을 유업으로 받기 위해서는 아담처럼 인간의 모습을 입고 오셔야 함을 보았다. 이 땅은 인간에게 차지하도록 주신 것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인자로 오셔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가리켜 “인자”라고 부를 때는 그 분의 왕되심이 강조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왕이 되시기 이전에 먼저 인간으로서 죽으셔야 했다. 그 분이 아담처럼 땅의 유업을 차지하려고 오신 것은 아담이 죄로 인하여 죽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담의 입장으로 땅을 차지하시기 위해서는 아담이 실패했던 것을 먼저 회복하셔야 했다. 우리가 로마서 5장에서 본 것처럼 아담 안에서는 모두가 죽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두가 살게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담의 입장으로 죽으셨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인자”라는 말로 그 분의 인성을 다룰 때 우리는 그 분의 왕되심을 말하기 전에 그 분의 고난과 죽음과 대속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br/>8절까지의 본문이 아담에게 주어진 왕권위임이기 때문에 9절부터 펼쳐지는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차지하시는 땅의 유업을 다루어야 당연한 것 같으나 9절부터의 본문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다루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 분은 영광을 얻기 이전에 아담이 실패한 일을 죽음으로 이루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이다. 그래서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다루는 위대한 본문이다. 히브리서에는 본문과 같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다루는 부분이 여럿 등장하는데, 예를 들면 5:7-9과 13:10-14 등이다.<br/><br/>『자녀들이 피와 살에 참여하는 자인 것같이』(14절). 피와 살은 인성(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왜냐하면 완전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피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성육신하시기 전, 그리고 부활하신 후의 예수 그리스도는 피가 없으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이 되실 때 자녀들과 똑같이 “피와 살”에 참여하셨는데, 그것은 죽음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멸망시키기 위함이다. [누가복음 24:39에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자신의 몸을 언급하셨을 때 “살과 뼈”만 말씀하셨지 피는 언급하지 않으셨다. 이것은 또한 아담이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어 타락하기 전의 몸의 상태였다. 그래서 아담은 이브를 보고 피를 언급하지 않고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고만 말했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부활하면 얻게 될 육체이다(빌 3:21).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피와 살”에 참여했다는 것은 그 분이 인간의 육체를 입으셨다는 것을 말하며, 따라서 그 분의 인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br/>피를 가진 자는 죽게 되어 있다. 예수님은 죽게 되어 있는 인간들을 그 속박에서 풀어주시기 위해서 죽는 몸을 가진 인간이 되셨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멸망시키시는 방법은 죽음에 참여하심을 통해서다. 그래서 예수님은 피와 살에 참여하신 것이다. <br/><br/>『죽음의 세력을 가진 자, 곧 마귀』(14절). 사실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 나는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고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건져낼 수 있는 자가 없도다』(신 32:39).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죽이는 권세를 허용하셨다. 사탄은 악한 일이나 재앙을 내리는 일을 수행하기 위한 하나님의 종이다. 사무엘하 24:1에는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인구조사를 하도록 말하게 하셨다고 되어 있는데, 역대상 21:1에는 사탄이 다윗을 충동하여 인구조사를 하게 했다고 되어 있다. 이 두 가지 진술은 모순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사탄을 시켜서 하신 것이다. 사탄은 재앙을 가져오기 위한 하나님의 종으로 등장한다. <br/>그러므로 그는 죽음의 권세를 가진 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욥기 1:12에서 사탄의 권세를 인정하신 다음 욥의 생명을 건드리지 말라고 특별히 명령하시는 것이다. 주님께서 욥의 생명에 대해 특별히 명령하시지 않았다면 사탄은 그 죽음의 권세로 말미암아 욥을 죽였을 수도 있다.<br/>사탄은 죽음의 권세를 가진 자이다. 아담이 타락하여 죽게 되었을 때 그는 사탄의 수하에 들어갔다. 아담 안에서는 모두가 죽게 되었는데, 그들은 모두 사탄에게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에 죽어도 다시 사는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게 된다. 그리고 이 사탄은 결국 멸망당하게 되고, 죽음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로 말미암아 멸망당하게 된다. 『멸망받게 될 마지막 원수는 사망이라』(고전 15:26).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그 분 안에 들어온 자는 누구나 살게 된다. <br/><br/>『또 죽음을 두려워하므로 평생을 노예로 속박되어 있는 자들을 놓아 주시려 함이니라』(15절).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죽게 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이 15절에서 분명해진다. 예수님은 마귀를 멸망시키신 것 뿐 아니라 죽음을 두려워함으로 평생을 노예로 속박되어 있는 인간들을 풀어주셨다. <br/>모든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구약성도들은 죽음을 두려워했다. 왜냐하면 구원을 영원히 잃어 버리지 않고 또 하나님께서 받아 주신다는 보장이 그들에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확실한 자비”(행 13:34)를 받은 다윗마저도 죽음을 두려워했다. 그는 성령께서 그를 떠나갈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시 51:11). 그러나 십자가 이후에는 상황이 바뀌었다. 그리스도인은 죽은 다음에 어디에 가는지 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일로 인해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요한일서 4:17-18에는 최후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온전한 사랑에 대해서 강조한다. 우리는 죄를 처리하신 분이 계시기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탄을 심판하신 분을 모시고 있기에 두려워하지 않는다(요 16:11). 우리는 죽은 다음에 즉시로 전능하신 분의 임재 앞으로 가게 된다(빌 1:21-23, 고후 5:1-10).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의 속박에 놓여 있지 않다. 우리는 자유다. 비록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많은 문제와 고난을 당할지라도 결코 죽음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주께서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이다(고전 15:50-56). <br/><br/>『이는 주께서 진실로 천사들의 본성을 입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의 씨를 입으셨음이라』(16절). 천사들은 영이다(히 1:7).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천사들의 본성을 입으시고 오셨다면 그 분은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같이 영으로만 오셨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주님은 “아브라함의 씨”를 입으셨다. 다시 말해서 육체를 입으시고 아브라함의 후손인 마리아를 통해 인간으로 오셨다는 말이다. 로마서 1:3에서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다윗의 씨”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이것은 “육체를 따라서”만 그렇다는 말이다. 『그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씨에서 나셨으며』(롬 1:3). 그 분의 진정한 씨는 하나님의 씨이다. 『주의 거룩하신 아들 예수』(행 4:27).<br/>이것은 신약에서 매우 강조되어 있는 “경건의 신비”이다. 『경건의 신비는 논쟁의 여지없이 위대하도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으로 나타나셨고...』(딤전 3:16). 이 말씀에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시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 교리를 가리기 위해서 이 구절에서 “하나님”을 빼버리고 “그는 육신으로 나타나셨고”라고 변개시켜 육신으로 나타나신 그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게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그 분이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다. (&lt;한글 개역성경&gt;을 비롯한 대부분의 변개된 성경들은 이 부분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의 성경과 정확히 일치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격하시키는데 동참하고 있다.)<br/><br/>『그러므로 그가 모든 일에 마땅히 자기 형제들과 같이 되셔야 했으니』(17절). 여기에서 “형제들”이란 기본적으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육체적인 후손인 히브리인들을 가리킨다. 16절에서 예수님이 천사와 대조되는 모습으로 인간의 육체를 입으셨다고 설명하는 부분에서 특별히 “아브라함의 씨”를 강조했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곧바로 창세기 12장과 17장에 있는 아브라함의 언약을 생각나게 한다. 아브라함의 씨는 갈라디아서에서 보는 것처럼 영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지만, 육신적으로는 여전히 유대인에게 한정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씨인 유대인들을 축복하는 자들을 복 주시고 유대인들을 저주하는 자들을 저주하신다(창 12:3).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것처럼 팔레스타인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며(창 13:14-15; 15:18-21), 하나님은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어 영원히 그들의 하나님이 되신다(창 17:7). 그러므로 본문의 “형제들”은 일차적으로 육체를 따른 유대인들이다. 예수님께서도 육체로는 이스라엘에게서 나셨다(롬 1:3). <br/>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형제들”이란 이방인들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본문의 문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순히 육체를 입으시고 오신 것을 말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백성의 죄들을 위해 화해를 이루려 하신다고 말한다. 마태복음 1:21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백성, 유대인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러 오셨다고 말하고 있으나, 또한 요한복음 1:12에서는 영접하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다고 말하고 있으며, 고린도후서 5:18-21에서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형제들”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유대인이요, 둘째는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백성이다. <br/><br/>『이는 하나님과 관련된 일들에 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백성의 죄들을 위해 화해를 이루려 하심이라』(17절). 예수님은 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이시다. 그 분은 아론을 포함한 구약의 대제사장들과 같지 않고, 로마 카톨릭의 사제들과도 같지 않다. 제사장이란 기본적으로 죄를 지은 백성들이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는 직분을 가진 사람이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러한 일을 하셨는데, 구약의 대제사장들이 하지 못했던 완전한 구원을 이루신 것이다. <br/>“화해”라는 말은 적대관계에 있던 사람들이 그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좋은 관계가 된 것을 말한다. 하나님과 인간은 서로 적대 관계에 있었다. 우리의 죄가 필연적으로 그의 거룩하심에 반응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히 2:17)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적의가 존재하게 되는 것인데(엡 2:15-16), 하나님의 호의로 말미암아 이제는 화해를 통해 서로 친구가 될 수 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도 그의 아들의 죽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으니, 더욱더 화해하게 된 우리는 그의 생명으로 인하여 구원받게 되리라』고 말한다(롬 5:10). 『그의 십자가의 보혈을 통하여 화평을 이루고 땅에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이나 그에 의하여 모든 것이 자신과 화해하는 것이라』(골 1:20). 많은 사람들은 죄에 대한 개념을 무시한 채 단순하게 사랑이나 평화, 화해를 말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죄와 저주, 적대관계 등에 대한 전제하에서 하나님의 피로 인한 화해를 제시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한 개념이 없이 “믿음을 나눕시다”, “그리스도를 당신의 생활에 모시라”, “사랑”, “평화”, “하나됨” 등의 말은 모두 인본주의적인 발상에서 나오는 것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죄를 지적하지 않으며, 강단에서는 지옥 설교가 사라져간다. 이것은 라오디케아 교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br/><br/>『그가 이 일에 친히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와 주실 수 있느니라』(18절). 이 구절은 우리의 실제적인 신앙생활에서 굳게 붙들 수 있는 말씀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순간 순간 시험과 고난을 당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시험을 능히 도우실 수 있기에 이 말씀은 고난과 시험을 당할 때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큰 힘이 된다. <br/>주님께서 우리의 시험과 고난을 도우실 수 있다는 것은 단지 그 분의 능력이 크시기 때문에 도우실 수 있다는 말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시험을 당하셨기 때문에 고난 받는 자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고 또 도우실 수 있다는 말이다. 누군가가 고난받는 자를 상담할 때 그의 위치가 되어보지 않았다면 그의 마음을 참으로 헤아릴수 없을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험받고 고난받는 우리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모든 시험을 다 받으셨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4장에서도 재차 설명된다. 『이는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할 수 없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기 때문이라』(히 4:15).<br/>Bible Believers / 79<br/><br/>주님은 그의 생활 중에 많은 고난을 당하셨다. 그 분의 백성들로부터 거절당했으며 때때로 주님은 누우실 만한 집도 없었다. 주님이 당하신 대표적인 시험은 누가복음 4장에서 제시된, 광야에서 마귀에게 받으신 세 가지 시험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시험은 인간이 당할 만한 모든 시험을 다 포함한다. 이 세 가지 시험은 요한일서 2:16에서도 제시되며, 창세기 3장에서 인류가 최초로 겪은 시험과도 연결된다. 돌로 빵을 만들라는 것은 육신의 정욕에 대한 시험으로, “먹음직하고”에 해당한다. 세상의 왕국들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사탄에게 절하라는 것은 안목의 정욕에 대한 시험으로, “보기에도 즐겁고”에 해당한다. 성전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은 생의 자랑에 대한 시험으로, “현명하게 할 만큼 탐스러운”에 해당된다. 인간이 당하는 시험 중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생의 자랑 가운데 포함되지 않는 것은 없다. 이 모든 시험은 인간이 당하는 모든 시험의 기초가 된다. 그리고 이것들은 주님께서 사랑하지 말라고 하신 “세상”으로부터 나온 것들이다. 중요한 것은 최초의 인류는 이 세 가지 시험을 당할 때 이기지 못했으나 주님은 이 세가지 시험에서 승리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4:15에서는 예수님께서 모든 시험을 당하셨으나 죄는 없으시다고 말한다. 주님은 우리가 받으시는 모든 시험을 당하셨으므로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할 수 있으시다. 또한 그 시험들을 다 이기셨으므로 우리가 시험당할 때 도우실 수 있다. 만일 그 분이 시험을 이기지 못하셨다면 우리를 동정하실 수는 있을지 몰라도 결코 도우실 능력은 없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것을 승리하셨다. 혹자는 “주님은 결혼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결혼생활에서 발생되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동정하실 수 없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 또한 위에서 말한 세 가지 시험에 포함된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생의 자랑, 또는 재물과 쾌락과 명예와 관계되지 않은 시험은 없다. <br/>주님은 시험 뿐 아니라 모든 고난에서도 우리를 도우실 수 있다. 그 분이 당하신 많은 박해가 이를 증명하며,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은 가장 큰 고통이셨다. 이 죽음은 히브리서 2장의 본문이 직접적으로 말하는 시험과 고난이다. 그러나 주님은 죽음의 속박 아래 놓여있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인간의 육체를 입으시고 죽음에까지 순종하셔서 이 고난과 시험을 승리하셨다. 우리가 어찌 모든 시험과 고난 앞에서 능히 도우실 수 있는 그 분을 신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description>
<dc:creator>관리자</dc:creator>
<dc:date>Fri, 26 Mar 2010 01:00:18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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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낮아지신 예수</title>
<link>https://www.biblemaster.co.kr/bb2/%EB%82%AE%EC%95%84%EC%A7%80%EC%8B%A0-%EC%98%88%EC%88%98/</link>
<description><![CDATA[히브리서 2:1-4 『이로 인하여 우리가 들은 것들에 대해 보다 간절한 마음으로 주의를 기울여야 하리니, 이는 언제라도 우리가 그것들로 미끄러져 떨어지지 않게 하려 함이로다. 만일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확고하여 모든 범죄와 불순종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다면 우리가 이처럼 큰 구원을 소홀히 여기고서야 어떻게 피할 수 있으리요? 이 구원은 맨 먼저 주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신 것이요, 그분께 들은 자들에 의해서 우리들에게 확증되었으니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뜻에 따라 표적들과 이적들, 다양한 기적들과 성령의 선물들로써 그들에게 증거하셨느니라.』 <br/><br/><br/><br/>『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2절)<br/>이것은 율법이다. 율법은 천사를 통해서 제정되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날 때인 출애굽기 3장에서는 “주의 천사”가 가시덤불의 불길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셨고(출 3:2-4, 행 7:30-32), 갈라디아서에서는 율법이 주어진 것이 천사들을 통하여 중보자를 통해 제정되었다고 말한다. 『한 중보자의 손에서 천사들을 통하여 제정된 것인데 약속하신 그 씨가 오실 때까지라』(갈 3:19). <br/>여기서 중보자는 율법을 전달해 준 모세를 말한다. 출애굽기 32:34에서는 천사가 이스라엘을 인도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며 인도하신 것은 천사를 통해서였다. <br/>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천사들을 통해 제정하신 율법도 권위가 있다면 하물며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은 더욱 권위가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여기서도 역시 천사들보다 월등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묘사된다. <br/>『모든 범죄와 불순종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다면』(2절)<br/>이것은 하나의 자연법칙이다. 죄를 지으면 대가를 받는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진리이다. 특히 이스라엘에게는 이것이 엄격한 율법으로 제시되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출 21:23-25). <br/>율법 아래 있던 자들이나 양심 아래 있던 자들이나 기본적으로 죄의 개념은 동일했다. 도둑질이나 살인이나 간음이나 동성연애 같은 것들은 양심에 화인을 맞지 않은 이상 이방인들에게도 양심의 법으로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대의 “진보된” 인본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이 죄의 개념은 파괴된다. 교육을 받을수록 죄는 더 이상 죄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들을 죄에 던져 놓으셔서 심판받게 하신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수치스러운 욕정에 내버려 두셨으니, 심지어 여자들까지도 순리대로 쓰는 것에서 순리를 거역하는 것으로 바꾸었음이라. 마찬가지로 남자들도 여자들을 순리대로 쓰는 것에서 벗어나 서로 음욕이 불일듯하니, 남자들이 남자들과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자기 자신들에게 받았느니라.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기들의 지식 가운데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림받은 마음에 내버려 두시어 온당치 아니한 일을 하게 하셨도다』(롬 1:26-28). <br/>『우리가 이처럼 큰 구원을 소홀히 여기고서야 어떻게 피할 수 있으리요?』(3절)<br/>본문은 교리적으로 마지막 날들을 사는 “구원받지 않은 히브리인들”에게 적용된다. 물론 이 시대에도 구원의 복음을 전할 때 그 구원을 소홀히 여겨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지옥의 심판에서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말이 대환란기를 사는 유대인에게 적용될 때에는 구원을 받았어도 그들의 행위로 끝까지 지키지 않고 떨어져나가는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그들은 그들이 받은 구원을 소홀히 여겨서 떨어져나가는 것이다.<br/>본문은 이 구원이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가르쳐졌다고 말하고 있다(3절). 그리고 그 구원은 열두 제자들을 통해서 전파되었으며, 이제 그들에게 주어졌다. 이 구원의 복음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은혜의 복음이 아니다. 만일 이것이 은혜의 복음이었다면 사도들에게 맡겨졌다는 말 대신에 바울에게 맡겨졌다는 말로 설명되었어야 할 것이다. 이방인에게 전파되는 은혜의 복음은 바울에게 맡겨졌는데, 바울은 이 복음을 다른 사도들에게서 받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직접 받았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분께 들은 자들”, 즉 사도들을 통해서 전달된 복음은 “천국복음”을 말하는 것이다(마 4:17; 10:7 주석 참조). 여기서 강조할 것은 열두 사도들의 사역에서 대환란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열두 사도들은 환란 때에 대한 경고를 받는다(마 10장, 24장).<br/>마지막 날들, 특히 대환란시대와 관련해서 이 복음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천년왕국으로 이끄는 복음인데, 이들은 구원을 받았어도 끝까지 견디지 않으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마 24:13, 히 6:4-6). 그러므로 이 구원은 소홀히 여김받을 수도 있고, 그렇게 될 경우 그는 미끄러져 나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1절). 교회시대의 이미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구원을 소홀히 여길지라도 결코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들은 구원을 영원히 안전하게 보장받았기 때문이다. <br/><br/>『하나님께서도 자신의 뜻에 따라 표적들과 이적들, 다양한 기적들과 성령의 선물들로써 그들에게 증거하셨느니라』(4절).<br/>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4장에서부터 유대인들을 항상 표적으로 인도하셨다. 그러므로 이 표적은 “유대인의 표적” (Jewish Sign, 막 16:17-19, 고전 1:22)이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다양한 기적들(예를 들면 행 5:15-16; 3:1-6 등)과 성령의 선물들(Apostolic gifts, 고후 12:12, 고전 14:22)로도 인도하셨다. [“성령의 선물들”은 지금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br/>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은 이 책이 교회시대와는 관련이 없다는 것을 설명한다. 이 책은 “장차 임할 세상”을 준비해야 하는 환란 시대의 히브리인들에게 쓰여졌다. 그들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<br/><br/><br/>2:5-10 『그 분께서는 우리가 말하는 바 장차 임할 세상을 천사들의 지배에 맡기지 아니하셨으니 누군가가 어느 곳에선가 증거하여 하기를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주께서 그를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지으셨고 그를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으며, 주의 손으로 하신 일들을 그에게 넘겨 주셨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복종케 하셨나이다.”라고 하였느니라. 이는 만물을 그에게 복종케 하심에 있어서 그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셨음이라. 그러나 지금 우리는 아직 만물이 그에게 복종하는 것을 보지 못하노라. 그러나 우리가 죽음의 고난 때문에 천사들보다 조금 낮아지신 예수를 보니,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도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기 위함이더라. 만물을 자신을 위하여 또 자신에 의하여 존재하게 하신 그분께서 많은 아들들을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려고 고난들을 통하여 그들의 구원의 대장을 온전하게 하신 것은 당연하도다.』<br/><br/>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세상의 통치자로 위임하신 것을 말한다. <br/><br/>『장차 임할 세상』(world to come, 5절)<br/>이것은 천년왕국을 지칭한다. 따라서 이 말은 다시 한 번 본문의 상황을 환란 가운데로 설정해 주는 말이다. 4절에서는 “표적들”이 언급됐고, 5절에서는 “장차 임할 세상”이 나오며, 6-8절에서는 아담에게 주신 왕국 위임권에 관한 구약의 구절이 인용되었다. 따라서 본문은 환란시대의 한 가운데에 서서 천년왕국을 바라보는 상황이다. <br/>여기서 인용된 구약의 구절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땅을 유업으로 주신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가 예수님에 의해 천년왕국에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다루고 있다. 장차 임할 천년왕국은 천사들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이 땅은 천사들에게 주어지지 않았고, 인간에게 맡겨졌다. “천국”은 인간에게 주어진 왕국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담과 같이 인간의 모습을 입고 이 땅을 유업을 받으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br/><br/>『누군가가 어느 곳에선가 증거하여 말하기를』(6절)<br/>이것은 다윗이 시편 8:4-6과 시편 144:3에서 말한 부분이다. 욥기 7:17-18에도 비슷한 말이 나오는데, 거기서는 욥이 괴로워하면서 하는 말이다. 인간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하는 부분은 성경에서 여러 곳 있다. 실로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며 호흡 같고, 진흙일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높이셔서 왕국의 유업을 받을 자로 만드시는 것이다. <br/><br/>『주께서 그를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지으셨고 그를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으며, 주의 손으로 하신 일들을 그에게 넘겨 주셨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복종케 하셨나이다』(7-8절).<br/>인간이 천사들보다 항상 낮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인간은 일시적으로만 천사들보다 낮다. 이것은 창세기 1:28에서의 아담의 모습인데, 우리는 아담의 원래의 모습을 여기서 본다(창 1:26). 여기서 그는 왕국을 유업으로 받는데, 인간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쓸 것이다. <br/>아담이 타락하자 이 위임사항은 노아에게 넘어갔다(창 9장). 그래도 이 왕국의 위임은 사람에게 주어진다. 『하늘, 곧 하늘들까지도 주의 것이나, 그가 땅을 사람의 자손들에게 주셨도다』(시 115:16). <br/><br/>『그러나 지금 우리는 아직 만물이 그에게 복종하는 것을 보지 못하노라』(8절).<br/>아담이 타락한 이후에 인간은 사탄의 통치 하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만물은 아직 인간에게 복종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왕국은 아직 인간의 것이 아니다. <br/>하나님은 아담에게 약속하셨다. 그러나 아담은 그것을 차지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는 “다산하고 번성하며 땅을 다시 채우라.”고 하셨다. 그래서 이브는 고통 없이 아이들을 낳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브는 고통없이 아이를 낳지 못했다. [만약 이브가 5년 마다 한 명의 아이를 낳고 또 그 아이들이 5년 마다 한 명씩만 낳는다면 노아 때까지 지구상의 인구는 약 5천억(500,000,000,000)은 되었을 것이다. 만약 홍수가 나지 않았다면 지구는 인구폭발로 인해 우주로 나가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땅을 통치하도록 하셨다. 그러나 아담은 그 땅에 묻히고 말았다. <br/>그래서 이 약속은 “마지막 아담”에게 넘어간다. 그분은 누가복음 1:30-33대로 다윗의 보좌에 앉아 이 약속을 차지하실 것이다. 그 분의 이름 “인자”는 인간에게 주신 땅에 대한 약속을 성취하시는 이름이다. 그 분은 “인자”(인간)로서 아담에게 약속되었던 대로 땅을 차지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그러나 인간으로 오신 그 분은 땅을 차지하지 못하고 인자로서 죽으신 것이다. 대신 그 분은 인자로서 인간이 겪어야 할 모든 고통과 시험들을 겪으셨다. 그리고 그 분은 인자로서 다시 오셔서 인간(인자)에게 주어진 이 왕국을 차지하실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아담이 오실 때까지 만물은 “아직” 인간(인자)에게 복종하지 않는다.<br/><br/>『그러나 우리가 죽음의 고난 때문에 천사들보다 조금 낮아지신 예수를 보니』(9절)<br/>8절까지는 아담을 다루었다. 9절부터 펼쳐지는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과 같은 모습으로 다가오셨다는 것을 설명한다. 7절은 아담이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지음받았다고 말하는데, 9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천사들보다 조금 낮아지셨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과 같은 모습으로 제시되셨는데, 로마서 5장에서는 아담이 오실 분의 모형이라는 말로 이 사실을 잘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군림하였으니, 아담은 오실 분의 모형이라』(롬 5:14).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신 예수, 즉 인자로 제시되는 것이다.<br/>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특히 “죽음”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아담과 같이 되셨다. 로마서 5장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그 분의 본질은 생명이시지만(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사람이 산다. 롬 5:12-17), 그 분은 인자로서의 사명을 완수하시기 위해서 죽으신다. 그러나 그 일을 완수하신 이후에 주님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다(9절).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하늘에서 하나님의 보좌 오른 편에 영광 가운데 앉아 계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직 다윗의 보좌에 앉지 않으셨다. <br/><br/>『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기 위함이더라』(9절).<br/>주님께서 죽으신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이다. 칼빈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선택된 모든 사람”이 아니다. 디모데전서 2:1-6에 따라서 “모든 사람”은 문자 그대로 모든 사람이다. “제한된 속죄” 같은 것은 없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몸값으로 내어 주셨으니 때가 이르면 증거되리라』(딤전 2:6). <br/><br/>『만물을 자신을 위하여 또 자신에 의하여 존재하게 하신 그분께서 많은 아들들을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려고』(10절).<br/>주님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영광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많은 아들들”만이 영광에 들어간다. 본문은 “모든 사람”과 “많은 아들들”을 대비시킨다. 왜냐하면 “많은 아들들”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원의 대장으로 신뢰하기 때문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피흘리셨지만 그 분을 구주로 믿는 사람만이 구원받는다. 구원은 자신의 의지로 주님을 영접할 때만이 가능하다. <br/>본문은 영광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아들들”로 묘사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아들들”로 삼으신 후에(요 1:12) 그들을 영광으로 들어가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 원하시고 또 모든 사람들이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딤전 2:4). 그러나 사람들이 거부함으로 많은 사람들은 구원을 받지 못하고, 또 구원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한다. <br/><br/>『고난들을 통하여 그들의 구원의 대장을 온전하게 하신 것은 당연하도다』(10절).<br/>예수께서 온전하게 되신 것은 고난을 통해서이다. 여기서 “온전하다”(perfect)라는 단어는 “죄없는”이라는 말이 아니다. 만약 “온전하다”라는 말이 “죄없는 상태의 완전함”을 말한다면, 본문은 예수께서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되셨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예수님이 원래는 죄가 있었으나 고난을 통하여 죄없는 상태가 되셨다는 말이 된다. 이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원래부터 죄가 없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온전하다”라는 말은 문맥 속에서 살펴봐야 한다. 왜냐하면 이 말은 각 문맥 속에서 각각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br/>본문에서 예수님이 온전하게 되셨다는 것은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구원을 완성하셨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고난을 통하여 순종을 배워서 이루신 일이다. 『그가 아들이면서도 고난받은 일들로 순종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심으로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고』(히 5:8,9). <br/>예수께서는 “온전하게” 되시기 위해 “배워야” 했다. 이것은 그 분이 단지 죽으신 것뿐만이 아니라 모든 고난, 모든 유혹 등 인간적인 모든 시험을 이기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BB]]></description>
<dc:creator>관리자</dc:creator>
<dc:date>Fri, 26 Mar 2010 00:59:38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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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훨씬 뛰어난 이름</title>
<link>https://www.biblemaster.co.kr/bb2/%ED%9B%A8%EC%94%AC-%EB%9B%B0%EC%96%B4%EB%82%9C-%EC%9D%B4%EB%A6%84/</link>
<description><![CDATA[1:4-9 『그는 이처럼 천사들보다 더 월등하게 되셔서 그들보다 훨씬 뛰어난 이름을 유업으로 받으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들 중 어느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노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에게 아들이 되리라.”고 하신 적이 있느뇨? 또 다시, 그 분께서 첫째로 나신 이를 세상으로 데려오실 때에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하라.”고 하셨으며 또 그 천사들에 관해서는 말씀하시기를 “그는 자기 천사들을 영들로, 자기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고 하셨느니라. 그러나 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오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 무궁하며 주의 왕국의 홀은 의의 홀이니이다. 주께서는 의를 사랑하고 죄악을 미워하셨나이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 곧 주의 하나님께서 주께 기쁨의 기름을 부어 주의 동료들보다 우위에 두셨나이다.”라고 하셨느니라.』 <br/><br/><br/>히브리서 1:4부터 펼쳐지는 본문은 히브리서의 주제에 걸맞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들보다 우월하시다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4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들보다 그 이름에 있어서 월등하시다는 것을 설명한다. <br/>『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들 중 어느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노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며』(5절).<br/>없다. 결코 없다. 천사들은 아무도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지” 않았다. <br/>이 말씀은 시편 2:7의 인용인데, 시편 2편의 문맥은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것이다. <br/>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언제 예수 그리스도를 낳으셨느냐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의 시기를 놓고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 이론을 제시한다. <br/>먼저 존 칼빈이나 개혁신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세기 1장 이전에, 즉 영원 전에 나셨다고 말한다. 이것은 영원 전에 구원받을 자를 택하셨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비성경적인 철학에 근거한 것인데, 그렇다면 예수님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피조된” 신이 된다. 그들은 시편 2:7을 창세기 1장 이전의 사건으로 놓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깎아내리고 있다. <br/>다음으로 가드너 테드(Gardner Ted)나 허버트 암스트롱(Herbert Armstrong) 같은 근본주의자들은 이 “낳았다”는 시기인 “오늘”을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부활에 적용한다. 그러나 부활을 탄생이라고 말하는 성경구절은 하나도 없다. <br/>그러나 “오늘”에 대한 유일한 성경적인 해석은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으로 보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이시며, 성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계셨듯이 성자 하나님도 영원 전부터 계셨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셨다면 그것은 육체로 태어나신 것 외에는 적용할 길이 없다. 예수님께선 하나님이시지만 인간과 같은 몸으로 세상에 오실 때 성령으로 “태어나셨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5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말하는 것이다. <br/>『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에게 아들이 되리라.”고 하신 적이 있느뇨?』(5절)<br/>이 구절은 사무엘하 7:14의 인용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하 7장에서 다윗과 언약을 세우실 때 그에게 영원한 왕국과 그 보좌를 약속하셨다. 이 언약은 솔로몬을 통해 부분적으로 성취되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하게 성취된다. 사무엘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재림하실 때 다스릴 왕국에 대해 말하고 있다. <br/>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그 부분에서 예수님의 탄생 부분만을 인용해 온 것이다. 물론 히브리서 1장의 내용도 8절에 나오는 그 분의 재림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히브리서에서 말하고 있는 바는 그 분이 초림과 재림에 있어서도 천사들보다 “월등하다”는 것이다. <br/><br/>『그러나 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오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 무궁하며 주의 왕국의 홀은 의의 홀이니이다』(8절).<br/>예수님께서는 통치에 있어서도 천사들보다 우월하시다. 7절에서 천사들은 “사역자”로 등장한다. 그들에게는 섬김만 있을 뿐 통치권은 없다. <br/>본문의 인용은 시편 45:6의 인용이다. 이것은 아들 하나님께 주어지는 왕국에 대한 영원한 언약인데, 이 언약은 또한 앞에서 언급되었던 사무엘하 7장의 “다윗의 언약”과 일치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의 아들로 오셔서 다윗의 보좌에 앉아 영원히 통치하신다는 것이다. 통치권을 뜻하는 이 “홀”(scepter)은 이미 창세기 49장에서 등장한다. 『홀이 유다에게서 떠나지 않을 것이며 실로가 올 때까지 입법자가 그의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니 그에게 백성의 모임이 있을지어다』(창 49:10). 예수 그리스도는 유다 지파에서 나오시는 통치자시다. 그분은 영적인 통치권 뿐 아니라 실제적인 땅의 통치권을 가지셨다. 그 분이 재림하실 때 그 분은 팔레스타인에 있는 다윗의 보좌에 앉으셔서 온 땅을 의로 통치하실 것이다. <br/><br/>『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오 하나님이여』(8절).<br/>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장 강력하게 증명한다. 아들이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아들을 하나님이라고 직접적으로 부르는 것은 디모데전서 3:16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경건의 신비는 논쟁의 여지없이 위대하도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으로 나타나셨고』(딤전 3:16). 육신으로 나타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시며, 성경은 그 분을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변개된 성경들은 “... 그는 육신으로 나타나셨고...”라고 변개시킴으로 그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가려버린다.)<br/><br/>『이로 인하여 하나님, 곧 주의 하나님께서 주께 기쁨의 기름을 부어 주의 동료들보다 우위에 두셨나이다』(9절).<br/>이 구절에는 삼위의 하나님께서 모두 나타나신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성부), 곧 주의 하나님께서 주께(성자) 기쁨의 기름(성령)을 부어 주의 동료들보다 우위에 두셨나이다』. “기쁨의 기름”은 성령을 지칭하는 말이다. 성령이 기름으로 유형화된 것은 구약에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기름을 붓는 장면에서 확인될 수 있다(시 133:2). “주의 동료들”은 문맥적으로 주님과 마찬가지로 기름 부음 받은 사람들을 말하는데, 곧 아론이나 그의 아들들 같은 제사장들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주의 동료들보다 우위에” 계신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받으신 성령의 기름이 다른 모든 제사장들이 받은 기름보다 월등하다는 말이다. 다른 모든 제사장들은 예수님께서 받으신 것과 같은 방법으로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지 못했다. <br/>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잉태되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사들보다 월등하실 뿐 아니라 모든 제사장들보다 월등하시다. 또한 시편 133편에서 기름이 아론의 머리 위에 부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머리라는 사실을 분명히 증거해 준다. 왜냐하면 그 분은 성령으로 잉태되셨기 때문이다. <br/><br/><br/>1:10-14 『또 “주여, 주께서 태초에 땅의 기초를 놓으셨고 하늘들도 주의 손으로 만드신 작품이니이다. 그것들은 멸망할 터이나 주께서는 영존하시오니 그것들은 모두 겉옷처럼 낡아지리이다. 주께서 그것들을 옷처럼 말아 버리시리니, 그리하면 그것들은 바꿔질 것이나 주는 동일하시며, 주의 연대는 끝이 없으리이다.” 하셨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들 중 어느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느냐? 천사들은 모두 구원의 상속자가 될 자들을 위하여 섬기도록 보내심을 받은 섬기는 영들이 아니냐?』<br/><br/>13,14절에서는 9절에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들보다 우월하시다는 내용이 계속되는데, 문맥 중간에 창조주로서의 능력과 영원성을 다루는 세 구절이 삽입된 것이다(10-12절).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가 영원하다는 것과 그 분의 보좌 또한 하나님께서 영원하신 것만큼이나 영원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br/><br/>『그것들은 멸망할 터이나 주께서는 영존하시오니 그것들은 모두 겉옷처럼 낡아지리이다. 주께서 그것들을 옷처럼 말아 버리시리니』(11,12절).<br/>11절에서는 우주가 낡아진다(waxed)고 말하고 12절에서는 우주를 옷처럼 말아버린다(fold up)고 말한다. 진화론은 모든 것은 점진적으로 발전(진화)한다고 하나 성경은 멸망한다고 한다. 성경에 따르면 우주는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멸망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 우주는 옷처럼 낡아질 것이다. 이 사실은 이사야 51:6에서도 제시되어 있으며, 성경의 여러 곳에서 증거하고 있는 바이다(마 5:18, 막 13:31, 시 102:26, 벧후 3:7, 계 20:11). 『너희 눈을 하늘들로 들어올리고, 그 아래로 땅을 살펴보라. 이는 하늘들이 연기같이 사라져 버릴 것이요, 땅이 옷처럼 낡아지며 거기에 거하는 자들은 같은 모양으로 죽으리라. 그러나 나의 구원은 영원할 것이며 나의 의는 폐기되지 아니하리라』(사 51:6). <br/>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옷”으로 비유하시는데, 이것은 우주가 소멸된 다음 새 옷으로 갈아입듯이 새 우주를 창조하신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거하는 새 하늘들과 새 땅을 기다리도다』(벧후 3:13).<br/>우주는 하나님의 옷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옷을 벗으시는 장면이 두 번 나오는데, 한 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실 때 군사들에 의해 벗겨진 것이고, 다른 한 번은 하나님께서 그 분의 옷인 현재의 우주를 벗어버리시는 것이다. 첫 번째의 벗겨짐은 “수치스러운 벗겨짐”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로 인해 죄가 되시고(고후 5:21) 저주가 되셔서(갈 3:13) 수치스럽게 옷 벗김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 분이 받으신 수치는 사실상 우리가 받아야 할 수치였다. 우리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가되고 그 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됨으로 우리의 수치는 면해졌으나 대신 주님께서 그 모든 수치를 지고 죽으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 그 분의 의를 받기를 거부한 자들은 마지막 심판의 날에 벌거벗은 채로 수치를 당할 것이다(히 4:13).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우리는 벌거벗었을지라도 그 분의 의를 입었으므로 책망을 면할 것이나, 그 분의 의를 입지 않은 죄인들은 그 벌거벗음으로 수치를 당할 것이다. <br/>그러나 하나님께서 두 번째로 벗으시는 그 날, 즉 하늘과 땅을 불로 소멸하시는 그 날에 주님께서는 결코 수치를 당하지 않으실 것이다. 오히려 그 분은 큰 위엄과 권능으로 우주와 죄인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이때에 그 분의 영광은 크게 드러날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의 벗으심은 “영광의 벗으심”이다. 첫 번째 벗겨지심은 죄를 정결케 하는 벗겨지심이고, 두 번째 벗으심은 심판의 벗으심이다. <br/><br/>『천사들은 모두 구원의 상속자가 될 자들을 위하여 섬기도록 보내심을 받은 섬기는 영들이 아니냐?』(14절)<br/>여기서 천사들은 “섬기는 영들” (ministering spirits)이라고 불린다. 그들은 하나님의 어떠한 일들을 맡아 사역하는 존재들이다. 어떤 천사들은 “전달자”의 역할을 하나 대부분의 천사들은 그렇지 않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섬기는 영들”이다. <br/>우리는 보통 “수호천사”라는 말을 듣는다. 어린이들이라든지 선교사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 천사들이 돕는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이것은 본문에서 천사들이 “섬기는 영들”이라고 말하는 것과 마태복음 18:10을 근거로 한 생각이다. 물론 특별한 경우에 천사들은 우리들을 도울 수 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도 한 천사가 도왔고(눅 22:43), 광야에서 시험받으셨을 때도 천사들이 힘을 돋워 드렸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을 특별한 경우로서, 천사들이 예수님을 섬긴다는 것은 이미 구약에 예언되어 있던 부분이다(시 91:11). 바울도 풍랑을 만났을 때 배 안에서 천사와 함께 있었다(행 27:23). <br/>그러나 본문에서 천사들은 “구원의 상속자가 될 자들”을 섬기는 영들이다. 그러면 누가 구원의 상속자들인가? 누가 구원을 유업으로 받는 자들인가? 분명한 것은 이 시대, 즉 교회시대에는 아무도 구원을 “유업으로”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업이라는 말은 단순히 아들이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성경에서 유업은 대부분 어떠한 행위에 대한 보상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받도록 수고했을 때 유업을 받는다(롬 8:17, 골 3:24). 산상설교에서는 온유한 자들이 땅을 유업으로 받는다고 했다(마 5:5). <br/>그러나 이 시대에는 아무도 구원을 유업으로 받지 않는다. 이 시대에 구원은 거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지 결코 행위로 얻는 유업이 아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천사들이 “구원의 상속자들”, 즉 구원을 유업으로 받는 자들을 섬긴다는 말은 교리적으로 교회시대와는 상관 없는, 어떤 다른 시대로 설정되어야 한다. 그것은 왕국복음이 다시 전파되는 “마지막 날들”(히 1:2), 즉 대환란 기간이 된다. 그 기간에 왕국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왕국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다. 대환란 직전에 교회는 이미 휴거되어 올라갔기에 그때 남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왕국을 유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구원을 유업으로 받는다는 것과 동일하게 취급된다. 또 왕국의 상속자들이라는 말은 “왕국의 자녀들”이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마 8:12).<br/>그러므로 이들은 일차적으로 왕국복음의 대상자들인 유대인들이다. 대환란 기간 중에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행위”를 해야 한다(계 12:17). 천사들은 바로 이렇게 수고를 하여 왕국을 상속받는 자들을 돕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섬기는 영들이다. <br/>그러나 이들은 유대인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마태복음 8:11,12에서는 원래의 왕국의 자녀들 중 많은 사람들이 떨어져나가고 이방인들이 그 왕국을 유업으로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사람들이 동과 서에서 와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왕국의 자녀들은 바깥 흑암에 던져져서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고 있을 것이라』(마 8:11,12). 분명 이때에 많은 유대인들이 구원에서 떨어져나갈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히브리서 3,4장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br/>환란 때 행위로 왕국을 유업으로 받는 사람들 외에도 구원의 상속자들이 또 한 부류 있는데, 그들은 천년왕국 때에 구원받은 부모에게서 원래부터 구원을 받은 채로 태어난 사람들이다. 지금 교회시대에는 모든 사람이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후에 구원을 받아야 하나, 천년왕국 때에는 사람들이 구원을 상속받고 태어난다. 왜냐하면 천년왕국 자체가 구원받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때의 구원은 지금 신약시대의 구원과는 의미가 다르다.) 그들이 특별한 죄로 인해 저주받지 않고는 구원을 유지한다(사 65:20). 천사들은 바로 이러한 자들, 즉 계시록 20장 이후에 천년왕국에 있는 부모들로부터 구원을 상속받아 태어난 자들을 섬기도록 보내심을 받은 “섬기는 영들”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관리자</dc:creator>
<dc:date>Fri, 26 Mar 2010 00:59:06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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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이 마지막 날들</title>
<link>https://www.biblemaster.co.kr/bb2/%EC%9D%B4-%EB%A7%88%EC%A7%80%EB%A7%89-%EB%82%A0%EB%93%A4/</link>
<description><![CDATA[히브리서의 주제는 “더 나은” (better)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이 단어는 말 그대로 비교급으로서, 어떤 것보다 더 나은, 혹은 더 좋은 어떤 것을 소개하는 말인데, 히브리서에서 이 비교급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사용된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것들과 비교해서 더 월등한 분이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시는 것도 이전이나 이후의 어떤 것들보다 월등히 더 좋은 것이라는 사실이다. <br/>1장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천사들보다 더 월등한 분이시라는 것을 설명하며, 3장에서는 모세와 비교하여 더 월등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5장에서는 구약의 대제사장의 직분보다 더 월등한 대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고 6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더 좋은 일들을 설명한다. 또한 6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들보다도 더 위대한 분이라고 말하며, 7장에서는 더 좋은 소망(7:19)과 더 좋은 언약의 보증(7:22)을 말하고, 8장에서는 더 좋은 약속들(8:6)을 통하여 그분이 구약의 제사장들보다 더 월등한 제사장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증한다. 이어서 9장에서는 구약의 성막과 희생제물보다 더 크고 더 온전한 성막과 희생제사를 언급한다. 그 외에도 더 심한 형벌(10:29), 더 좋고 영구한 재산(10:34), 더 나은 제사(11:4), 더 좋은 본향(11:15), 더 큰 재물(11:26), 더 좋은 부활(11:35), 더욱 좋은 것을 말하는 뿌리는 피(12:24) 등 비교하는 말이 많이 등장한다.<br/>그런데 이 모든 것은 하나로, 즉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하심이라는 교리로 모아진다. 그리고 그분의 우월하심은 다른 모든 것보다 그분의 대제사장직에서 더욱 강조되고 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은 히브리서의 또 하나의 커다란 주제가 되는 것이다. <br/>그러면 본문을 보면서 이 모든 사실들을 하나씩 관찰해 보자. <br/><br/>『여러 번에 걸쳐 다양한 방법으로』(1절)<br/><br/><br/><br/><br/>1:1 전에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우리 조상들에게 여러 번에 걸쳐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br/>2 이 마지막 날들에 그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물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를 통하여 그 분께서 세상들을 지으셨느니라.<br/>3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며 그 분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이시고,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시며, 친히 우리의 죄들을 정결케 하시고 높은 곳에 위엄 있는 분의 오른편에 앉으셨으니<br/><br/><br/><br/><br/>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것은 한 번 계시하신 후 멈추지 않고 지속적으로 계시하신 것이 아니라, 때때로 그 계시를 중단하기도 하셨다. “여러 번”이라는 말은 분리된 기간이 여러 번 있었다는 의미이다. 예를들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처음에 나타나신 후 여러 해 동안 나타나시지 않았다가 다시 나타나셨다. 제사장 엘리의 시대에도 수십 년 동안 계시가 끊겨 있었다(삼상 1-2장). 말라키의 예언 후에는 적어도 390년 동안 아무런 계시도 없었다. <br/>“다양한 방법”은 때로는 천사를 통하여, 때로는 선지자를 통하여, 때로는 제사장을 통하여 계시하셨다는 말이다. 특히 본문에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br/><br/>『이 마지막 날들에 그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2절)<br/>“마지막 날들”(last days)이라는 말을 주목하라. 이 말은 히브리서에서 매우 중요한데, 이는 히브리서의 교리적 위치를 정확히 제시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많은 주석가들은 이 “마지막 날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때부터 재림 때까지 이르는 전체 기간, 즉 2000년 교회시대 전체로 해석한다. 그래서 그들은 히브리서의 교리적 위치를 교회시대에 놓는 것이다. <br/>그러나 “마지막 날들”은 교회시대와는 관계없는 어떤 특정한 날이다. 이것은 히브리서의 많은 본문이 교회시대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지만, 특별히 2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속자”라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상속자”라는 말은 “유업”, 특히 땅에 속한 유업을 말할 때 쓰이는 말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을 상속받아 통치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교회시대에는 이 땅을 통치하시지 않는다. 이 땅은 여전히 사탄의 지배하에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여 천년왕국을 세우시기 전까지 그분은 아직 유업을 받지 않으신 상태이다.<br/>특별히 이 용어는 이스라엘과 관련된 용어이다. “마지막 날들”이라는 용어는 문자 그대로 “어떤 새로운 날들이 이르기 전까지의 시대의 마지막”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새로운 날들”이란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롭게 되고, 땅과 다른 피조물들도 구속을 받는(롬 8:19-21) 날들, 즉 천년왕국을 의미한다. <br/>또한 이 용어는 “끝”(the end)이라는 말과 연관해서 이해해야 하는데, 우리는 마태복음 24장에서 이 “끝”이라는 것이 개인의 삶의 끝이 아니라, 어떤 일정한 기간의 끝, 구체적으로 말하면 대환란의 끝이라는 사실을 이미 보았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 왕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런 후에야 끝이 오리라』(마 24:13-14, &lt;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마태복음&gt; 24장 주석 참조). 그러므로 “마지막 날들”이나 “끝”이나 “장차 임할” 어떤 세상(world to come)과 연관해서 생각해야 하는데, “장차 임할 세상”은 성도가 죽은 후에 펼쳐지는 내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땅이 새롭게 변하는 새로운 세상, 즉 천년왕국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실제적인 미래의 세상이라는 것은 히브리서 2:5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 분께서는 우리가 말하는 바 장차 임할 세상을 천사들의 지배에 맡기지 아니하셨으니』(히 2:5). 그러므로 “마지막 날들”은 “끝”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에게 예언된 대환란기간과 연결된다. 이것은 미래에 있을 기간이다. <br/>그런데 본문은 “이 마지막 날들”에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다”고 과거형으로 말하고 있다. 이 말 때문에 학자들은 이 기간을 미래의 기간으로 인식하지 않고 과거 초림의 때로 인식하여, 그 기간이 2000년 동안 연장되었다고 생각한다. <br/>분명히 본문은 “이 마지막 날들”을 과거로 말하고 있으며, 그것이 예수님의 초림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말 때문에 이 기간이 교회시대 전체를 포함한다고 봐서는 안된다. 오히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때, 그 당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업으로 받으시는 왕국이 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상 생애 동안 왕국복음을 전파하셨다(마 4:17,23). 그 왕국은 구약시대에 유대인에게 약속되었던, “다윗의 보좌”로 대표되는 신정통치국가이다. 유대인들은 이 왕국을 기다렸고(왜냐하면 사무엘하 7:12-16에서 약속된 다윗의 언약은 영원한 언약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도 이 왕국의 계획을 취소하신 적이 없으시다. 지금 우리는 이 왕국을 계시록 20장에 따라서 “천년왕국”이라고 부른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때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하지 않고 그들의 왕과 그 왕이 전파하시는 왕국을 받아들였다면, 적어도 사도행전 7장에서 스테판이 마지막으로 전한 그 메시지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면 그 당시에 왕국이 임했을 것이다. <br/>그러므로 이 “마지막 날들”은 초림과 재림을 동시에 가리키는데, 과거나 미래에 있어서 왕국복음이 전파되는 기간으로 정리될 수 있다. 즉, 마태복음 3장에서 침례인 요한이 왕국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한 때부터 사도행전 7장에서 스테판이 죽을 때까지의 기간과, 2000년을 넘어서 교회시대의 끝부분부터 대환란 기간의 끝까지의 기간이다. 이 두 기간은 같은 속성을 지니는데, 둘 다 왕국복음이 전파된다는 것과, 둘 다 율법, 혹은 행위가 유효하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이라는 과도기를 지나 교회시대가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전까지는 아직 구약적인 요소가 많이 남아 있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기 전까지는 아직 구약에 속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영으로 거듭나지 못했고, 아무도 신약성도와 같이 구원받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미래의 “마지막 날들”에도 여전히 믿음과 더불어 행위가 강조되는 기간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가 1세기의 히브리인들에게 이 서신을 썼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왕국이 임하기 직전의 마지막 날들에 살고 있다고 인식했던 것이다. <br/>계속해서 히브리서 4장은 과거 여호수아와 함께 유대인들이 안식에 들어갔던 것과 비교하면서 미래에 있을 천년왕국의 안식을 말하고 있는데, 그때 모세와 함께 광야에서 방황하던 백성들과 비교하여 미래의 대환란 때 그들이 안식을 위해 수고하고 인내해야 한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는 땅을 뒤흔들며 산에서 백성들에게 말씀하셨다(출 19장). 그러나 마지막 날들에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뒤흔들며 하늘에서 말씀하실 것이라고 말한다(히 12:25-26).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히브리서를 읽을 때 우리는 이 책의 교리적 위치를 미래에 있을 대환란에 놓아야 한다. 이렇게 위치를 설정하고 이 책을 본다면 히브리서에 나오는 여러 가지 난해구절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br/><br/>『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며 그 분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이시고,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시며』(3절).<br/>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을 말하고 있는 부분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유업으로 받으시는 분인데(2절), 이것은 원래 그분의 것이었다. 왜냐하면 아들께서는 세상을 지으신 분이시며,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고, 그분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이시기 때문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 그러나 아들께서는 하나님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이시다. <br/>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창조주이시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말씀이신 그분을 통하여 만물이 창조되었다고 말하고 있으며(요 1:3), 히브리서 1장의 본문에서는 그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신다고 말하고 있다. 태초에 “빛이 있으라”고 위엄있는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고 계신 것이다. <br/>실로 모든 만물은 그분에 의해서 보존된다. 태양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제 위치에 있으며, 달과 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기의 궤도를 돈다. 이 말씀은 “능력의” 말씀이다. 그래서 그 말씀은 권위가 있다. 일월성신, 산천초목 모든 것이 그분의 섭리대로 움직이며, 새 한 마리도 그분의 허락이 없으면 떨어지지 않는 것이 말씀으로 다스리시는 그분의 섭리이다. <br/>그런데 이 섭리에 불복종하는 존재가 하나 있다. 그것은 인간이다. 인간만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 의지로 하나님을 거부한다. 하나님께서 개에게 짖으라고 말씀하시면 개는 짖는다. 하나님께서 제비에게 남쪽으로 날아가라고 하시면 제비는 남쪽으로 날아간다(시 148:1-10).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무엇인가를 명령하시면 인간은 하나님과 논쟁하려고 하고 하나님을 거부한다(잠 1-2장).<br/>인간만이 불순종의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인간들이 아무리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려고 발버둥쳐도 결국 하나님의 크신 섭리 안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 그들도 역시 하나님의 섭리대로 역사를 진행시키고 있을 뿐이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기타 모든 자연만물은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붙잡힌 바 되어 유지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만물을 보존하신다는 이 말은 또한 하나님께서 만물을 없애 버리실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12절에서는 『주께서 그것들을 옷처럼 말아 버리시리니, 그리하면 그것들은 바꿔질 것이나』라고 말하고 있다.]]></description>
<dc:creator>관리자</dc:creator>
<dc:date>Fri, 26 Mar 2010 00:58:33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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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히브리서』는 어떤 책인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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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신약성경에는 특별히 어려운 세 개 의 책이 있다. 그것은 마태복음과 사도행전과 히브리서이다. 보통 요한계시록을 어렵다고들 하는데, 사실 요한계시록은 믿기에 어려울 뿐이지 기록되어 있는 대로 믿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어려운 책이 아니다. 계시록의 모든 예언들은 사실이며 성경에서 해석해 주고 있기에 그 예언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오는 “천 년”이라는 말을 예로 들어 보자. 그것을 있는 그대로 믿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에 “천 년”이 문자적인 천 년이 아니라 하나의 완전한 기간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무천년주의 이단 이론이 등장하는 것이다. 기록된 그대로 믿으려는 마음만 있다면 그 “천 년”은 문자적인 천 년의 기간으로 받아들이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되는 것이다. <br/>그러나 문자적 해석으로도 잘 해결되지 않는 책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마태복음과 사도행전과 히브리서이다. 대부분의 이단들은 이 세 책에서 걸려 넘어진다. 그 이유는 이러한 책들이 하나의 “경륜”(시대에 따른 하나님의 경영 방침)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경륜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시대면 율법시대, 은혜시대면 은혜시대, 이렇게 하나의 경륜에만 맞추어져 있지 않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모세오경, 특히 레위기에서 신명기까지의 율법들은 구약 율법시대에 해당하는 책들이다. 따라서 거기에 나오는 제사법이나 의식법들을 신약시대의 규례로 가져오지 않고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주신 규례라고 생각하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또 로마서에서 빌레몬서에 이르는 13권의 바울서신은 교회시대를 향한 서신이다. 따라서 거기에 나온 교리들과 명령들은 현 교회시대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이다. <br/>반면에 앞서 말한 세 권의 책들은 각각 두 개의 경륜이 한 데 섞여 있다. 마태복음은 구약과 신약 사이에 있고, 사도행전은 유대인의 경륜과 교회의 경륜 사이에 있으며, 히브리서는 교회와 대환란 사이에 있다. 그래서 이러한 책들을 가리켜 “과도기적 책”이라 부른다.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성경 66권의 모든 내용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처한 상황, 즉 교회시대에 맞추려는 성향이 강하다. 구약의 율법까지도 교회에다 적용하려고 한다.<br/>어느 정도 세대 구분을 한다는 사람들은 구약과 신약의 기본적인 구분은 한다. 그래서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복음을 나눌 줄 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은 “신약 안에 있는” 구약적인 책들을 대하면 곧바로 넘어지고 만다. 특히 사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대하면 그 말씀을 그대로 지키려고 하는데, 문제는 그 말씀이 사도 바울이 기록한 말씀과 상반될 때 발생한다. 로마서는 분명히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하지만 마태복음에서 우리는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마 24:13)는 말씀을 대하며, 히브리서에서도 그와 같은 말씀을 보게 된다(히 6:4-6). <br/>이같이 서로 상반되는 구절들이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가 대립하는 곳이다. 일면으로는 오히려 알미니안주의자들이 마태복음이나 히브리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한 번 받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알미니안주의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오류를 범한 이유는 바로 시대에 따른 하나님의 경륜의 차이를 모르기 &#46468;문이다. 바로 이러한 부분이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해도 쉽게 풀리지 않는 부분이다. <br/>그렇다고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을 수는 없다. 오히려 그 부분은 더 철저히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우리는 한 구절을 떼어 내서 그 부분만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문자적인 해석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진정한 문자적 해석이란 그 말씀이 어떤 시대에 사는 누구에게 주신 말씀이냐 하는 것까지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에게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책이다. 따라서 마태복음은 유대인의 관점에서 해석해야 한다(&lt;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마태복음&gt; 참조). 히브리서는 “마지막 날들”(last days, 히 1:2)을 사는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날들을 사는 사람들에게 교리적으로 적용해야 한다. (“마지막 날들”이 언제인가는 히브리서 1장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다만 여기서 분명히 할 것은 이 기간이 교회시대는 아니라는 점이다.)<br/><br/>앞서 말한 것처럼 히브리서는 교회시대와 대환란의 과도기적인 책이다. 그래서 어떤 구절들은 교회시대의 성도들이 받아들이기에 매우 어렵다.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을 강조하는 한편, 과거 출애굽 당시 여호수아를 대장으로 안식의 땅으로 들어갔듯이 미래에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장으로 삼아 안식의 땅으로 들어가는 히브리인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히 3,4장). 모세의 인도를 받아 출애굽한 과거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안식의 땅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견디지 못함으로 인해 광야에서 떨어져나갔듯이, 미래에 안식의 땅으로 들어가는 유대인들도 많은 사람들이 떨어져나갈 것이다. 끝까지 견디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바로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말이다. <br/>히브리서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기록되었다. 이 책이 “유대인서”가 아니라 “히브리서”라고 되어 있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히브리인들은 “믿는 유대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며(히 5:12-14; 6:1-3), “성령의 동참자”들이다(히 6:4).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믿음은 아직 불완전하여 언제든지 믿음에서 떨어지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들에게 과거 출애굽 때에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이 떨어져나간 것처럼 떨어져나가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br/>이들에게는 믿음과 더불어 행위가 필요하다. 따라서 믿음에 관해 자세하게 기록한 히브리서 11장에 이어 12장에서는 인내라는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 이들이 믿음과 행위를 온전히 행사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이 필수적이다. 주님께서 그들을 도와 주시지 않는다면 그들은 끝까지 견디지 못할 것이다. 주님께서 환란 때의 성도들을 돌봐 주시리라는 것은 천년왕국으로 들어가는 백성들에게 하신 산상설교에서도 강조된다 (마 6:25-26). <br/>히브리서가 교회시대와 환란시대의 “과도기적” 책이라는 말은 환란시대뿐 아니라 교회시대에도 적용되는 말씀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태복음에서도 그랬듯이 이 책에서도 교회시대에 적용시킬 수 있는 말씀이 많이 발견되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을 설명하는 9,10장과, 믿음을 강조하는 11장, 그리고 성도의 행실을 강조하는 13장 등이다. 특히 9,10장에서 발견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피의 속죄는 교회시대의 성도들인 우리가 든든히 붙들 수 있는 부분이다. 율법이 할 수 없었던 단번 속죄와 양심의 정결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성도들의 믿음과 생활에 있어 근원적인 힘이 된다. 또 대제사장이신 주님께서 친히 고난을 받으셨기에 고난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다는 말씀은(히 2:17,18; 4:15,16) 고난에 처한 성도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준다. <br/>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서는 안식의 땅으로 들어가는 유대인에게 초점을 맞춘다. 교회시대에 해당되는 구절들조차 유대인들에게 적용이 가능하며, 12장에 이르기까지 그렇다. 따라서 히브리서의 본문들은 하나님의 경륜들을 구분하는, 세대적인 지식이 없으면 이해할 수 없는 구절들을 많이 담고 있다. <br/><br/>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다루어야 할 것은 저자에 관한 문제이다. 문제시 되는 것은 히브리서의 저자가 바울이냐 아니냐 하는 것인데, 많은 학자들이 이에 대해 의견을 달리한다. 바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근거는 히브리서 13장의 결말이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 문체가 같다는 것이고(『...은혜가 너희 모두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히 13:25), 바울이 저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근거는 12장까지의 내용이 다른 서신들과 문체나 내용면에서 상이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바울을 대신해서 누가나 아폴로나 심지어 프리스킬라까지 그 저자로 제시하곤 하는데, 이러한 대안들을 증거할 만한 구절들은 없다. 오히려 1611년 &lt;킹제임스성경&gt;은 이 책의 제목을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사도 바울의 편지”(The Epistle Of Paul The Apostle To The Hebrews)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전통원문을 보존하고 있던 동방정교회는 처음부터 이 책이 바울서신이라고 믿었으나 서방교회는 이 사실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은 전통적으로 바울이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후대의 신학자들이 그 사실을 비평하는 것일 뿐이다. <br/>우리는 이 책이 사도 바울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믿는다. 단 이 책의 대부분이(13장을 제외하고) 바울서신과 내용이나 형식에서 다른 것은 그 기록 시기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믿어진다. 갈라디아서 1:16-17에 보면, 그는 회심한 후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사도들을 만나지 않고 아라비아 광야로 갔다. 그는 사도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얻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다(갈 1:12). 그래서 히브리서 1장에서 12장까지는 초기에, 13장은 후에 기록된 것으로 여겨진다. 1장에서 12장까지는 야고보서와 마찬가지로 다른 서신서들보다 먼저 기록되었다. 따라서 아직까지 유대적인 요소가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교회시대의 교리로 가득 찬 다른 13권의 서신서를 기록한 후에 기록된 13장은 그 서신서들과 동일한 관점과 형식으로 기록된 것이다. <br/>히브리서는 저자에 관한 문제로부터 본문 각 구절들에 이르기까지 학자들로부터 많은 비평을 받아올 뿐만 아니라 많은 오류를 자아내게 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실로, 하나님은 참되시나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라』는 말씀을 기억하게 된다(롬 3:4).]]></description>
<dc:creator>관리자</dc:creator>
<dc:date>Fri, 26 Mar 2010 00:57:5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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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생명의 면류관을 얻은 순교자</title>
<link>https://www.biblemaster.co.kr/bb2/%EC%83%9D%EB%AA%85%EC%9D%98-%EB%A9%B4%EB%A5%98%EA%B4%80%EC%9D%84-%EC%96%BB%EC%9D%80-%EC%88%9C%EA%B5%90%EC%9E%90/</link>
<description><![CDATA[▶ 사도행전 7:1-60 ◀<br/><br/><br/><br/>7:1-7 『그때 대제사장이 말하기를 “이런 일들이 정녕 그런가?” 하니 스테판이 말하기를 “부형 여러분, 들으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거하기 전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 영광의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들을 노예로 부리는 그 민족을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야 그들이 나와서 이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셨느니라.』<br/><br/>공회와 대제사장과 맞선 스테판은 메시지를 시작한다. 청중은 4,7,8,10,34절에서는 박수갈채를 보내다가 9,25,35절에서는 침울해 한다. 그러다가 스테판이 결론(48-50절)에 도달할 즈음에 그들은 너무나 분노해서 산 채로 그의 가죽을 벗길 기세였다. 메시지를 전한 스테판에게 남은 것은 돌무더기 속의 이름 없는 무덤 하나, 그리고 생명의 면류관이었다. 그에게 돌아온 가시적인 결과는 분노와 격분과 증오와 분개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 바리새인으로 하여금 양심의 가책을 갖게 했으며(행 7:58), 후에 그 바리새인은 신약의 거의 3분의 1을 썼다.<br/>좌석은 청중으로 가득 찼다. 스테판의 대적들은 맨 앞 자리에 앉아 숨을 죽이고 지켜보면서, 그들이 바라던 대로 스테판이 말하기를 기다린다(렘 14:13,20!!). 설교가 시작된다.<br/><br/>『부형 여러분, 들으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2절).<br/><br/>“스테판, 바로 그거야! 그런 걸 설교해야 하는 거야! 아브라함 만세! 하나님께 영광을!”(아직까지 공회는 스테판 편이다.)<br/><br/>6절, 14절에서 학자들은 스테판이 규칙적으로 70인역(LXX)을 인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보수주의 학자들은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에게 연설을 하고 있는 스테판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역된 헬라어 성경”으로 그들에게 설교하고 있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에는 증거가 없다. 스테판이 인용했다고 그들이 주장하는, 그리스도 이전에 있었던 칠십인역 필사본은 단 한 개도 이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다. 사도행전 7장의 인용이 오리겐 이전에 기록된 것으로 확인될 길은 전혀 없는 것이다(F.F. Bruce, Ibid., p.145 각주 3번 참고). 사도행전 7:6,14과 창세기의 그 구절들을 일치시키기 위해 인용된 칠십인역 필사본은 모두 바울 이후에 기록된 것이다. 스테판이 산헤드린을 향해 연설하기 위해 알렉산드리아의 “모조품”을 이용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br/><br/>7:8-17 『그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할례의 언약을 주시니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아 팔 일 만에 그에게 할례를 행하고, 또 이삭은 야곱을, 야곱은 열두 족장을 낳았느니라. 그런데 그 족장들이 요셉을 시기하여 그를 이집트에 팔았으나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하셔서 그를 모든 재난에서 구해 내시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약속의 때가 가까우니 백성이 이집트에서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졌더라.』<br/><br/>아직까지 스테판은 청중에게 반감을 사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그는 족장 아브라함을 칭송하고,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를 자랑하며, 이스라엘의 원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했다. <br/><br/>『그 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할례의 언약을 주시니... 열두 족장을』(8절).<br/><br/>“하나님을 찬양하라! 우리는 선택받은 백성이다! 우리는 약속의 백성이다! 주께 영광, 찬양! 우리에게는 말씀이 있다! 우리에게는 ‘조상들’이 있다! 우리 만세!”<br/><br/>『그런데 그 족장들이...시기하여...』(9절). <br/><br/>“어! 스테판, 잘 나가다가 찬물 끼얹지 말라구. ‘시기’는 강단에서 설교하기에는 적절한 주제가 아니야. 술취함? 그건 괜찮지. 간음? 좋아. 노출? 그것도 괜찮아. 미니 스커트? 좋아. 도둑질? 헤어 스타일? 좋아. 하지만 ‘시기’라구? 글쎄...”(&lt;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잠언&gt; 27:4 주석 참조)<br/>즐거운 “아멘!” 소리가 갑자기 “아, 저런”으로 바뀌고 ‘심령대부흥회’로 시작한 것이 종교적인 재난이 될 위험에 처해 있다. 요셉(9절)이 ‘은’(마 27:5 참조)에 팔렸고 요셉이 이집트로 내려갔다(마 2:14,15 참조). 스테판은 비의도적으로 성경 전체에서 가장 강력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요셉을 언급한 것이다. <br/>사도행전 7:14에 보이는 분명한 모순은 창세기 46:7 주석에서 설명한 바 있다. 15절은 창세기 49,50장에서 설명했다. 학자들은 사도행전 7:16과 창세기 23:3,10,17과 창세기 33:19 사이의 분명한 차이(수 24:32을 볼 것)를 “실수”라는 편리한 말로 처리한다. “여기서 ‘아브라함’이라는 말을 쓴 것은 명백한 실수이다...”라는 등등. 존 R. 라이스(John R. Rice)도 그런 식으로 계시록 22:14을 처리했다.<br/><br/>7:37-43 『‘주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한 선지자를 너희에게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한 그가 이 모세라... 우리 조상은 그에게 복종하기를 원치 않아서 그를 거부하고 오히려 그들의 마음이 이집트로 다시 돌아서서... 참으로 너희가 몰록의 장막과 너희의 신 렘판의 별을 택하여 경배하고자 모형들을 만들었으니, 내가 너희를 바빌론 너머로 옮겨 버리리라.’고 하였느니라.』<br/><br/>38절에 “교회”라고 한 것은 절대적으로 옳은 번역이며, 신약에서 “교회”가 어떤 의미에서 사용되었는지를 이해하게 해 준다. 여기서 (그리고 사도행전 14:27에서) “교회”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그 단어 자체가 단순히 “불러냄을 받은 집단”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어떤 집단, 심지어 프리메이슨 단원의 집단이나 요트 클럽, “그리스도의 교회”, “몰몬교회”, “로마 카톨릭 교회”도 될 수 있다. UN “모임”(Assembly)은 완벽한 예이다. 거기서 “정책”은 “교리”로 불리며, 대사들이 “사역자들”(ministers)(롬 13:1-4)로 불리기 때문이다.<br/>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엡 1:22,23)인 교회는 살아 있는 유기체이다. 그 구성원이 지역적인 모임(행 9:31; 11:22; 15:3,4, 22 등)에 속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단순한 조직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교회는 “유기체”(organism, 엡 4:13-16)인 것이다. 38절에서 언급된 구약의 “교회”는 불러냄을 받은 구약 성도의 모임이지만, 그 가운데는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함께 속해 있다(히 3:16-19). 이것은 오늘날의 지역교회 회중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은 모두가 거듭난 구성원들이며, 피의 속죄가 없이는 셋째 하늘에 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듭나지 않고서는 그 몸에 합류할 수 없다. <br/><br/>『...몰록의 장막과 너희의 신 렘판의 별을...』(43절). <br/><br/>보통 “다윗의 별”이라고 불리는 이 “렘판의 별”은 성령께서 국가적인 상징으로서 인정하지 않으신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불타는 가시덤불(출애굽기), 무화과나무(예레미야)와 올리브 나무(로마서)를 제외하고는 국가를 상징하는 어떤 형상도 받지 않았다. 브루스, 샤프, 엘리콧, 랜지, 클라크, 더멜로우, 헨리 등의 주석가들이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다윗의 별”은 부당하며 비성경적이다. 다윗에게는 별이 없었으며, 지금까지 다윗과 관련되어 나타난 유일한 별은 그의 “아들”이 태어나던 날 밤(마 1:1, 눅 2:9) 그가 태어난 마을(베들레헴)에서 빛나던 별이었다. 야곱의 “별”(민 24:17)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지 이스라엘 국가의 상징이 결코 아니다. 성경에서 “별들”은 “천사들”(계 1:20; 6:13)을 말하거나 문자 그대로 빛을 발하는 별들이다(행 27:20). 하나님께서는 신구약 어디에서도 어떤 나라에게 무엇인가를 상징하기 위해 국기에 별을 넣으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천사는 “별”이지만 ‘그의’ 이름은 미카엘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전히 팔레스타인과 UN과 해외에서 “렘판의 별”(행 7:43)을 그들의 공식적인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다. <br/>광야에는 두 개의 성막(tabernacles)이 있었다. 하나가 아니다(민 16:24,27, 출 33:7,10,11). 출애굽기 35-39장의 성막이 “산에서 보여 준 모형에 따라” 만들어지기 전에 한 성막이 세워져 있었다. 좋은 것이 왜곡되면 나쁜 것이 될 수 있듯이(왕하 18:4의 놋뱀처럼) 이 첫 번째 성막은 열왕기상 11:7에 있는 신들의 상징이 되었다. 이 “신”(고전 8:5)은 지금까지 살았던 가장 현명한 사람에 의해 계속해서 숭배되었다(왕상 11:7). 이 “신”은 카나안의 신(Bruce, Ibid., p.155)이었다는 것과, 보수주의 번역자들이 “성막”(히브리어 ‘시쿠드’)을 번역하지 않음으로써 “너희 왕 시쿠드”가 되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보수주의자들이 무신론자들과 자유주의자에게 합세했음을 의미할 뿐이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할 때 왜 카나안인들이 숭배하던 바빌론 신에게 돌이키지 않았겠는가? 열왕기상 11:1-7에 열거된 <br/>모든 거짓 신들은 함족에게서 나왔다. 왜냐하면 바빌론의 초기 통치자들이었던 아카드, 아술, 시날은 이집트인들이나 카나안인들과 마찬가지로 함족이었기 때문이다(창 10:1-30 주석 참조).<br/><br/>7:44-53 『광야에서 우리 조상에게는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는 모세에게 말씀하신 분의 명령에 따라 그가 본 모형대로 만든 것이며...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분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전들에는 거하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것과 같이 ‘주가 말하노라.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내 발판이니... 이제 너희는 그 의로우신 분을 배반한 자요 살인한 자가 되었으니 너희가 천사들을 통해 지시하신 율법을 받고서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<br/><br/>『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분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전에 거하지 아니하시나니...』(48절). <br/>“스테판! 그런 말은 하지 말았어야 해!”<br/><br/>『이 모든 것을 나의 손으로 만들지 아니하였느냐?』(50절). <br/><br/>그렇다. 해, 달, 별들(시 19:1-6; 119:73; 143:5; 8:3).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개집이나 돼지우리나 병아리우리를 만들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롬 11:36). 하나님께서는 희생제를 요구하시기 전에(렘 7:22) 순종을 요구하셨다(삼상 15:22). 이스라엘이 변덕스런 생각과 반역하는 마음과 목이 곧은 태도로(51절) “짐승을 잡아서 희생제물로 바치는 것”(42절)은 결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했다. 그러한 태도로 바친 수소나 숫양(사 1:11-16)은 “일천 산 위의 목축들”(시 50:10)처럼 하나님께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br/><br/>이제 스테판은 설교를 마치려한다. 산헤드린의 화난 얼굴들이 이 설교자를 쏘아본다. 그리고 추수감사절 오후의 칠면조 농장 같은 침묵이 장내를 엄습한다.<br/>『너희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너희도 늘 성령을 거역하는도다』(51절). <br/>주 예수 그리스도(마 23:33)께서 스테판의 뒤에 서서 그를 격려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들릴 것만 같다. “그렇게 하는 거야. 스테판, 맹렬하게 퍼 부으라구! 있는 그대로 그들에게 말해!”<br/><br/>『...박해...죽였고... 배반한 자요...살인한 자...율법...지키지 아니하였도다』(52,53). <br/><br/>스테판은 A.D. 34년의 산헤드린을 B.C. 800-100년의 서기관들과 연결시켰으며(마 23:23-36을 볼 것), 그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을 불순종하고 율법을 어기는 살인자들의 무리라고 비난했다. 하나님을 향한 그의 열심으로 그는 가장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자가 되었으며, 종교적 위선자들에게 소리높여 고함을 지르고 부정적으로 말함으로써 “상냥한 그리스도의 영”을 완전히 상실했다. 자유주의자들이나 근본주의자들은 스테판을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으로 생각할 수가 없을 것이다! <br/>스테판의 설교는 끝났다. 순간 장내는 평정을 잃게 된다.<br/><br/>7:54-60 『그들이 이런 말을 듣고 격분하여 그를 향해 이를 갈더라. 그러나 그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늘을 주시하더니,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기를 “보라, 하늘들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하니...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는 이 말을 하고 잠<br/>드니라.』<br/><br/>첫 번째 순교자인 스테판의 이름은 “면류관”(헬라어 ‘스테파노스’)을 의미하며, 그는 생명의 면류관(계 2:10)을 얻게 된다.<br/>스테판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신 것”(55절)을 보았다.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오순절에 설교할 때는 앉아 계셨으며(행 2:34), 지금도 앉아 계신다(히 8:1).<br/>무엇 때문에 스테판의 메시지가 끝났을 때 그가 일어나셨을까?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스테판의 혼을 받으시기 위해 일어나신 것이 아니었다.<br/>재림 때까지는 일어나지 않으실(마 26:64) “인자”(56절)께서 왜 일어나셨는가? 초림 때 즉 마태복음 3:16에서 하늘들이 열렸고, 재림과 연관해서 계시록 4:1-3과 계시록 9:11에서 하늘들이 열리는데, 여기서 하늘들이 열린 이유는 무엇인가? 이 사건 후 즉시로 이방인들에게로 복음이 전파되는 것은(행 8:1)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사도들이 그들의 “사도들의 표적과 이적”을 여전히 가지고(행 5:12 참조)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장면 이후로 예루살렘에서 단 한 번의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br/>여기서 우리는 재림이 예비되는 상황을 목격한다. 만일 이스라엘이 국가적으로 회개하고(행 3:19) 스테판의 설교를 받아들였다면 다니엘의 “70째 주”가 도래했을 것이다. 신명기 21:1-9가 일어났을 것이며 휴거가 일어나고(시 50:4, 솔 2:10, 사 26:19) 유다가 구렁에서 나오고(행 1:25과 그 주석 참조) 로마와 이스라엘 사이에 언약이 체결되었을 것이다(단 9:27; 11:27,30).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계시하시기를 원하시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감추어진 신비로 남게 되었을 것이다. 그 몸은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몸이라는 사실은 사도행전 2:10, 6:1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<br/>스테판은 “큰 바빌론”을 취하게 만들 기나긴 순교자들의 피의 목록에서 첫 번째 자리를 차지했다(계 17:6). 곧이어 야고보가 그의 뒤를 따르고(행 12장) 여러 해 지나지 않아 바울이 그 뒤를 따른다. A.D. 100-313년 사이에 일어났던 열 번의 박해 때 스테판과 같은 증인들은 원형경기장에서 도살당했고, 지하 감옥에서 굶어 죽었으며,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고, 빙원에서 얼어 죽었으며, 산 채로 불에 탔고, 고문대에 엎드려서 못과 갈고리에 박혔으며,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지고, 야수들의 밥이 되었다.<br/><br/>『주 예수여, 나의 영을 받아 주소서』(59절). <br/><br/>성령충만했던 위대한 스테판조차도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는 못했다는 사실에 주목하기 바란다. 그의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벧전 2:21) 스테판은 선으로 악을 극복하기는 한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60절) 그러나 이 기도는 자기 보존의 기도인 “주 예수여, 나의 영을 받아 주소서.” 다음에 왔다. 하지만 주님은 원수들을 위해 먼저 기도하셨고(“아버지시여,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 눅 23:34), 그 다음에 자신을 위해 기도하셨다(“아버지시여, 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의탁하나이다”, 눅 23:46).<br/>4피트 높이의 돌 무더기에 파묻혀 그는 사라져간다. 15-20분 동안 뼈가 부러지고 살이 찢기는 일제사격을 참아 내면서...이 “소일거리”에 사용된 돌들은 골프공만한 크기에서부터 배구공 크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수 7:25).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죽음인지는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바울이나(행 14:19) 예수님을(요 8:59) 그런 식으로 죽일 수 있는 그들이었다면, 스테판을 그렇게 죽이는 것 역시 그들에게는 아무 문제도 아니었을 것이다.]]></description>
<dc:creator>관리자</dc:creator>
<dc:date>Fri, 26 Mar 2010 00:57:11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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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성경대로 믿는 집사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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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8226;사도행전 6:1-15 &#8226;<br/><br/><br/><br/>6:1-4 『그 당시에 제자들의 수가 늘어나고, 그리스인들이 히브리인들에 대하여 불평이 일어나니, 이는 그들의 과부가 매일의 구제에서 소외됨이라. 그러자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서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버려 두고 식단을 돌보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로 충만하여 칭찬 듣는 일곱 사람을 찾아서 택하여, 이 일을 맡기고, 우리는 계속해서 기도하는 일과 말씀의 사역에 전념하리라.”고 하더라.』<br/><br/>지역교회 내의 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차들의 행렬에는 일산화탄소가 뒤따르는 것처럼, 부흥 뒤에는 문제가 따르게 되어 있다. 사도행전 5:42은 어떤 문제가 일어날 전조가 되는데, 이런 형태는 사도행전 6:7,8과 8:40에서 다시 반복된다.<br/>“집사들”이란 단어(헬라어 ‘디아코논’)는 “식탁을 돌보기 위해 맨땅 위를 두루 다니는 사람”을 뜻한다. (헬라어 어원학자들이 해 놓은 확대된 설명에 의하면 그렇다.) “집사”라는 단어가 여기에는 없다 하더라도 “일곱 명”(행 21:8)이 집사들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런데 디모데전서 3장에서 다시 나오는 등장하는 집사의 자격에는 다음 세 가지가 있다(3절). <br/>1. 지혜<br/>2. 정직한 평판<br/>3. 성령 충만<br/><br/>“식탁을 차리는 사람들”이 여기서는 “사역”에 부름받은 영적인 사람들로 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사역”은 교회를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회중을 섬기는 일이다. 성경에서 “집사”는 현대의 많은 교회의 재직들처럼 재정 위원회를통제하거나 운영하지 않았다. 목사나 이사진에게 명령하지도 않았으며, 설교자들을 고용하거나 해고하는 일을 하지도 않았다. <br/>집사들은 “영적인 사역자들”로서(딤전 3장) 회중을 섬김으로써 그들에게 봉사한다(롬 12:7). 그들은 목사와 함께 교회의 영적 뼈대를 형성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기도와 심방을 돕고, 가난한 이들을 섬기고, 교회 건물과 기물을 깨끗이 유지하고, 분열과 다툼과 박해 시에 목사와 의논하는 일을 한다. <br/>이들 집사들의 임명으로 말미암아 이 최초의 교회의 열두 목사들(2절)은 세상 일에 그들을 연루시킬 수 있는(딤전 2:4) 모든 거추장스러운 것과 방해물에서 해방되어 “말씀과 교리”(딤전 5:17)에 전념하며, 그들의 가르침과 설교를 통해 ‘영적인’ 권세와 권위를 가진 ‘영적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성령께서는 신약에서 영적 권위 외에 어떤 다른 지배권도 인정하지 않으신다(벧전 5:1-6, 행 20:28)]. <br/><br/>『...말씀의 사역』(4절)은 바울이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정진했던 사역이다. 사실 극단적 세대주의자들은 바울의 사역을 사도행전 2-6장의 사역과 분리시키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도행전 2장에서 교회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 바울에 의해서 교회가 시작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에 따르면 아직 교회시대가 시작되지 않은 사도행전 2-6장의 사역은 바울의 사역과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옳지 않다. 사도행전이 교회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다루는 것은 사실이기에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가 설교했던 것과 13장 이후에 바울이 설교했던 것에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바울의 사역이 사도들의 사역과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다. 바울은 심지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한 몸”에 대해서 쓴 후에도 회중에게 여전히 구약을 설명하기까지 한다. “한 몸”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바울과 마찬가지로 구약성경을 읽어야 하며(고전 10:1-6) 그것들로부터 위로를 얻는다(롬 15:4). 우리는 “모든 성경”(딤후 3:16)을 공부해야 한다. 신약의 일부나 절반만 공부하지 않는다(행 1:8 주석 참조).<br/>말씀의 사역을 할 때는 말씀이 자신을 붙들게 될 때까지 말씀에 달라붙어야 한다(삼하 23:10)! 그리고는 피가 날 때까지(판 3:21) 말씀을 적용시킨다(렘 48:10). 그 결과는 말씀에 대항하는 자가 죽든지(히 4:12) 아니면 썩어가는 육신이 절단되든지(시 119:67) 둘 중의 하나다. 『말씀의 사역』을 하는 것은 마음의 상처에 말씀을 붓고, 심란해하는 사람에게 기름이나 포도주처럼 말씀을 쏟아붓는 것을 말한다(눅 10:34). 진리를 찾기에 갈급한 죄인에게 말씀의 사역은 오랜 기갈 끝에 마시는 깨끗하고 신선하며 차갑고 맑은 샘물과 같고(잠 25:25) 한 모금의 꿀과 같다(시 119:103).<br/><br/>6:5-8 『그 말이 온 무리를 기쁘게 하니라. 그리하여 그들이 믿음과 성령으로 충만한 스테판과 빌립, 프로코로, 니카놀, 티몬, 파메나와, 유대교로 개종한 안티옥 사람 니콜라오를 뽑아서, 사도들 앞에 세우니, 기도한 후에 그들에게 안수하더라. 하나님의 말씀이 널리 전파되니,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었으며, 제사장의 큰 무리도 이 믿음에 순종하더라. 스테판이 믿음과 능력이 충만하여, 백성 가운데서 큰 이적들과 기적들을 행하더라.』<br/><br/>돈 문제와 관련해서 지역교회 안에서 행해진 첫번째 업무 처리는 『온 무리』(5절)의 뜻에 따라 이루어졌다. 그럼으로써 지역교회의 선례를 세우고, 목사와 집사들이 영적 권위를 행사하지만 제반 문제들을 결정하고 집사들을 “선출”하는 것은 회중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그들이... 뽑아서, 사도들 앞에 세우니』(5,6절).<br/>사도행전 6장의 지역교회는 모든 일에 질서가 있으며 순조롭게 운영되어 가고 있다. 온 무리는 기뻐했고(5절) 기도했으며(6절), 하나님의 말씀은 전파되었고(7절), 더 많은 무리가 교회로 모여들고 있다(7절).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교회”다.<br/>대부분의 학자들, 즉 브루스, 벌링거, 로버트슨, 빈센트, 메이어, 제미에슨, 래드, 퍼셋, 브라운, 클라크, 웨스트, 디엠, 윌리엄, 래드 박사, 램, 얼 등은 『그리스인들』(1절)이 실제로 『그리스인들』을 뜻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즉 “헬라파 유대인”이라는 것이다. 즉 본문의 “그리스인들”을 “헬라파 유대인들” 또는 “그리스화된 유대인들”이라고 말한다. 빈센트는 이들이 &lt;칠십인역&gt;을 사용했던, 헬라어를 쓰는 유대인들이라고 말한다(빈센트, Ibid., p.473). 이에 대한 증거로 그가 제시하는 것은, 로마서 1:14에서 “헬라인과 야만인”이라고 말할 때의 “헬라인”은 “헬레시”라고 되어 있는 반면 사도행전 6:1에서는 “헬레니스톤”이라고 되어 있어 두 단어가 서로 다르게 제시된다는 것이다. <br/>하지만 사도행전 6장의 “헬레니스톤”이라는 말은 단순히 “헬라어를 말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파생되었을 뿐, 결코 “헬라어를 말하는 히브리인”만을 가리켜야 할 이유가 없다. 이 단어는 “헬라어를 말하는 헬라인들”에게도 사용되었다(Cadbury, The Hellenists, Bauer, Griechisch-Deutsches Worter Buch zum New Testment, 1952). 이 단어에 대해 학자들이 틀렸다는 증거는 또 있다. 사도행전 21:27에도 “헬라어를 말하는 유대인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을 가리켜서는 “헬레니스톤”이라고 말하지 않고 “유다이오이”, 즉 “유대인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헬레니스톤”이라는 단어가 “그리스인들”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단어와는 조금 다르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헬라어를 말하는 유대인들”에게 한정시킬 수는 없다. <br/><br/>『...기도한 후에 그들에게 안수하더라』(6절). 사도행전 8:17과 13:3로 볼 때 여전히 안수함으로 무엇인가가 전이된다는 것이 분명하다(레 1:4). 또한 “안수”에는 치유하는 능력과 나름대로의 권위가 있음이 분명한데(히 6:2, 딤전 5:22, 행 8:19; 14:3; 9:17; 28:8), 사도들이 사역을 수행했을 때에 그러했다(고후 12:12). <br/><br/>우리는 본문에서 또 하나의 “고기”(어려운 교리)를 맛보게 되는데, 이 “고기”는 『안티옥』(5절)과 『알렉산드리아인』(9절)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처음으로 나온다는 사실에 있다. 『안티옥』은 사도적 권위를 가지고 성령 충만한 집사들과 관련되어 언급되는 반면, 『알렉산드리아인들』(9절)은 성령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박해하는 데 전문인 살인적인 산헤드린과 관련되어 있다.<br/>제자들이 알렉산드리아가 아니라 안티옥에서(행 11:26) 처음으로 『그리스도인들』이라 불렸다는 사실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lt;킹제임스성경&gt;이 번역된 비잔틴 원문은 알렉산드리아가 아니라 안티옥에서 왔다. 이방인들에게로 최초의 선교여행을 떠난 진정한 구령자들은 알렉산드리아가 아니라 안티옥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학자들은 정작 A.D.40-90의 안티옥 원문은 학생들에게 제시해 주지 않고, 대신 예수회 성경(1582)의 저본이 되었던 알렉산드리아 원문을 복구하는 데 평생을 바친 것이다. <br/>성경이 로마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형에 처했으며 바울을 로마 감옥에 가두었다고 말씀한다면, 우리는 로마에서 성경적 기독교를 찾아보는 것을 결코 기대할 수 없다. 성경이 이집트를 세상의 한 유형으로 정의할 때, 성경은 우리가 그 정보를 근거로 행동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며, 성경 필사본들을 얻기 위해 스핑크스나 피라미드에는 가지 않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우리는 성경을 더욱 정확하게 설명해 주어야 했던(행 18:26) 한 구원받지 않은 연설가를 본다(행 18:24). 또 알렉산드리아에서 우리는 성령과 성경과 진리의 전파와 사도의 권세에 심하게 분개했던 리버티노와 쿠레네인을 본다. 우리는 그 정보를 근거로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br/><br/>6:9-15 『그때에 리버티노와, 쿠레네인과, 알렉산드리아인의 회당이라고 불리는 회당에 속한 어떤 사람들과, 킬리키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서, 스테판과 더불어 변론하더라. 그러나 그들은 지혜와 영으로 말하는 그를 당해 내지 못하더라. 그러자 그들이 은밀히 사람들을 매수하여 “우리는 그가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여 말하는 것을 들었노라.”고 말하게 하더라. 그리하여 그들은 백성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을 선동하고, 그에게 달려들어 그를 붙잡아 공회로 데리고 와서,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그들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모독하는 말을 끊임없이 하였으니, 우리는 그가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 것이며, 또 모세가 우리에게 준 관례를 변경시킬 것이라.’고 하는 것을 들었도다.”라고 하더라. 공회에 앉은 모든 사람이 그를 주시하여 보니,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br/><br/>부흥이 있은(행 5:16, 5:42 참고) 후에는 반드시 반대가 일어난다. 뒤이어 벌어지는 상황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히시고 재판받는 것과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에 그가 죽는 순간에 주 예수께서 나타나심을 보게 된 것에 대해 아무도 놀라지 않으리라(행 7:56).<br/>1. 그리스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의 적들은 그의 주장에 답변할 수 없었다(행 6:10, 마 22:46).<br/>2. 그리스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거짓 증인들을 고용해서 그를 죽였다(행 6:11, 마 26:60).<br/>3. 그리스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그를 하나님을 모욕한다고 고소했다(행 6:11, 마 26:65).<br/>4. 그리스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사람들을 선동해서 그를 대적하게 했다(행 6:12, 마 27:20).<br/>5. 그리스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그가 율법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고소했다(행 6:13, 마 12:2).<br/>6. 그리스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그가 성전이 멸망할 것을 예견했다고 고소했다(행 6:14, 마 26:61).<br/>7. 두 경우 모두 카이파(Caiphas)가 제사장이었다. <br/>사도행전 21-26장의 바울의 사역에도 이와 동일한 일들이 뒤따른다. 이것은 어느 시대에나 종교적 박해를 가하는 전형적인 절차이다. 왈덴스, 알비겐스, 보도, 폴리시안, 롤라즈, 후스파, 형제파, 보고밀즈 등을 살해하는 데는 항상 거짓 고소, 안정된 생활이 파괴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진리에 대한 분개, 군중의 혼란, 신성모독을 빙자한 고소, 그리고 “공회”(12절)가 동반된다. 공회는 참으로 대단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신약에서 “공회”(Council)는 성경을 거부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모임이며, 그들의 일이란 성령의 역사를 막는 것이었다. 역사상 그러한 규칙에 예외가 존재했다 하더라도 그들과 교제하는 것은 조심하는 것이 좋다. 성경은 실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br/><br/>『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여...』(11절). 단어의 순서를 눈여겨 보기 바란다. 하나님은 뒷전이다(마 23:16-22를 볼 것). 자기 의를 내세우는 의식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법보다 인간의 법을(요 8:5; 9:29 참조) 더 염려한다. 13절에도 똑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즉 물질적인 건물이 먼저 오고 하늘에서 온 율법(히 12:25)은 그 다음에 온다. [칼 막스 같지 않은가? 그는 항상 하나님에 앞서 “이웃”을 먼저 두었다(마 22:38,39).] 그뿐 아니다. 그들은 『모세가 우리에게 준 관례』(14절)에만 신경을 쓴다.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들은 어떻단 말인가(신 5:22)? 그들은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행 7:43).<br/>사실 그들이 “모세”를 들고 나오는 것도 하나의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요한복음 8:39에서는 자신들의 마귀적 성품에 “아브라함”을 끌어들이고 있다. 그들은 모세를 믿지도(요 7:19) 모세에게 복종하지도 않았다(행 7:39). 반대로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선지자들을 이용한 것처럼(마 23:29), “모세”와 “아브라함”을 이용할 뿐이었다. <br/><br/>『그를 주시하여 보니,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15절). 출애굽기 32-35장을 공부한 성경대로 믿는 사람이라면 이 장면을 깨달을 것이다. 그들이 “주시하여” 그를 보고 있는(15절) 동안, 그는 그의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히 12:1-3) 예수를 “주시하여”(7:55) 보고 있다.<br/>성령충만한 증인의 빛나는 얼굴은 살인을 더욱 고무시킨다. 진정한 거룩함에 대한 거듭나지 않은 종교인의 반응은 ‘분노’이다. 바울과 야고보와 베드로는 후스, 사보나롤라, 크랜머, 라티머, 리들리, 그리고 러시아에서 만 명의 그리스도인이 사형당했던 것처럼 그렇게 처형되었다. 스테판은 재정위원회 위원으로서 가만히 앉아 교회나 운영하고 있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살해되었다. 그는 계속해서 전파했던 것이다(딤전 3:2).]]></description>
<dc:creator>관리자</dc:creator>
<dc:date>Fri, 26 Mar 2010 00:56:34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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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주의 증인들</title>
<link>https://www.biblemaster.co.kr/bb2/%EC%A3%BC%EC%9D%98-%EC%A6%9D%EC%9D%B8%EB%93%A4/</link>
<description><![CDATA[&#8226;사도행전 5:1-42&#8226;<br/><br/><br/><br/>5:1-11 『한편 아나니아라고 하는 어떤 사람은 자기 아내 삽피라와 함께 자기 소유를 팔아, 그 대금의 일부를 감추니, 그의 아내도 그 일을 알더라. 그런데 얼마를 가져와 사도들의 발 앞에 놓더라.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기를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너의 마음을 가득 채워 성령께 거짓말하게 하며, 또 토지 대금 일부를 감추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도 네 것이 아니었느냐? 또 팔린 뒤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하려고 마음을 먹었느냐? 네가 사람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였느니라.”고 하니... 큰 두려움이 온 교회와 이 사실을 들은 모든 사람에게 임하니라.』<br/><br/>사도행전 5장은 바나바를 흉내내고자 한 아나니아 부부의 사건으로 시작된다. 아나니아와 삽피라는 자기 소유를 팔아 그 중 얼마를 숨기고 속여 최후를 맞는다. 이 사건이 있은 후 큰 두려움이 온 교회와 이 사실을 들은 모든 사람에게 임했다(11절). 디모데전서 5:20이 본문에 적합한 구절이다(『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들 앞에서 책망하여 다른 사람들도 두려워하게 하라』).<br/>『아나니아』는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이며 『삽피라』는 “아름답다”라는 뜻이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의 이름이 의미있는 것이라면, “많이 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한다”는 원칙에 의해 그들은 무서운 심판을 받은 것이다. 그 부부는 바나바처럼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서(행 4:37) 바나바가 했던 것처럼 (행 4:37) “얼마를 가져와 사도들의 발 앞에”(2절) 놓았다.<br/>그러나 이번에는 과정이 약간 다르다. 바나바는 “그 대금을”(4:37) 가져 왔다. 이것은 그가 판 돈 모두를 가져왔음을 나타낸다. 반면에 가져온 양과는 상관없이 아나니아와 삽피라는 그 대금의 일부를 감추었다(2절). 사실 아나니아는 그가 원하는 만큼을 가져올 완전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만약 그가 원했다면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그의 땅은 그가 그것을 팔기 전에도 그의 것이었으며 그것을 판 후에 그 돈도 그의 것이었기 때문이다(4절). 그 누구도 그에게 어떤 것을 주라고 강요하지 않았으며(고후 6-11장), 그 자리에 있던 어느 누구도 얼마를 가져오라도 요구받지 않았다. 그는 소량만을 줄 수도 있었다. 그렇게 했어도 그것은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더욱 깊어진다.<br/>그 교회에는 성령(Holy Ghost)께서 활동하고 계셨다(행 4:8; 4:31; 2:4을 볼 것). 3절과 4절을 비교해 볼 때 성령(Holy Ghost)은 하나님이시다. 『... 성령(Holy Ghost)께 거짓말하게 하며... 거짓말을... 하나님께 하였느니라』(3,4절). [고린도후서 3:17에서는 성령(Holy Spirit)이 “주”(Lord)로 불리고 있다]. 성령은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位)시다(마 28:19, 20 참고). 그는 요한복음 15:26에서처럼 위로자이실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14:17에서처럼 진리의 영이시다. 아나니아와 삽피라는 “성령으로 충만”했었으나(행 4:31) 이 충만함은 “사탄으로 충만한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어찌하여 사탄이 너의 마음을 가득 채워...』(3절). <br/>한편 은사주의자들은 위의 본문을 들어 구원을 잃어버릴까봐 걱정한다.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 가장 많이 걱정하는 사람들은 요한일서 3:9을 인용하며(『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그리스도인은 죄가 하나도 없이 완전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그들 중 누구도 위의 본문이나 고린도전서 5:1-8에서처럼 사탄이 믿는 자를 조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br/>아나니아와 삽피라는 영적 위선자들이다. 그들이 구원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라든지 구원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단지 주님 대신 마귀가 자신들을 다스리게 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은 것과 같이(고전 11:30, 요일 5:17) 그들도 죽은 것일 뿐이다(롬 8:13). 이들이 구원받지 않은 유대인으로서 지역교회에 돈을 줌으로 믿는 사람인 체 행세할 만한 가능성은 전혀 없다(13절을 볼 것). 아나니아와 삽피라는 오늘날 근본주의 교회 구성원들의 약 20%를 대표한다. 그들은 “교회의 경영자들”로 영적인 성도들이 자신들을 세속적이지 않고 하늘의 마음을 가진 자로 여겨 주기를 바라는 자들이다. 그들은 주일 아침에 엄청난 금액을 헌금으로 드리는 수천 명의 구원받은 기독 실업인들이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위대한 그리스도인 행세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십일조는 저울에 달았을 때 과부의 동전 두 닢보다 더 무겁지 않다. 불구자가 그리스도께 드리는 적은 돈이 건강한 의학박사가 연보함에 넣는 큰 돈보다 더 귀한 것이다(막 12:42,44).<br/>아나니아와 삽피라는 “십자가를 짊어진 자들”이라는 명성을 얻기 원했다(막 8:34). 그들은 회중이 생각하기를 그들이 자신들의 모든 것을 다 드렸다고 여기기를 원했다. 아나니아와 삽피라 같은 사람들도 영적인 사람들과 함께 계수되었으며 그들 사역의 일부를 담당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못된다. ‘마귀’도 그렇게 할 수 있는데(행 1:17) 성도가 왜 못하겠는가?<br/>『사탄이 너의 마음을 가득 채워...』(3절). 죄는 “마음”(4절)에서 구상된다(&lt;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잠언&gt; 4:23 주석 참조, 1972). 사도 야고보는 야고보서 4:1-4에서 죄를 짓는 과정의 아우트라인을 잡아 주는데, 죄는 명백한 행동이 범해지기 오래 전에 나타나는 것이다. 아나니아는 그가 돈을 교회에 가져오기 오래 전에 하나님께 거짓말을 한다. 심지어는 부동산을 팔기 전에 하나님께 거짓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와 그의 아내는 “주의 영을 시험하려고 공모”했다(9절). 그래서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세부 계획이 세워졌다. 그들의 죄는 다음의 것들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br/>1. 하나님께 거짓말하는 것(4절)<br/>2. 성령께 거짓말하는 것(3절)<br/>3. 주의 영을 시험하는 것(9절)<br/>4. 사람들에게 거짓말하는 것(8절)<br/><br/>아나니아와 삽피라는 간음이나 살인, 도둑질, 교회를 떠나는 일, 이혼, 자살 등을 하지 않고서도 “죽을 죄”를 저질렀다. 만약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위선을 부리는 그리스도인들을 오늘 모두 치신다면 여러분들은 장례식에 참석하느라고 성경을 가르칠 시간조차 없을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관 속에서 쭉 펴지기 전까지는 결코 바로 잡혀지지 않는다.<br/><br/>5:12-16 『또 사도들의 손으로 많은 표적과 이적이 백성 가운데서 일어나니,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솔로몬의 행각에 모이더라. 그 나머지 사람들 중에는 아무도 감히 그들에게 동참하지 아니하였으나, 백성은 그들을 칭찬하더라... 무리가 예루살렘 근처 성읍에서 병든 자들과, 더러운 영들에게 괴로움 당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왔는데, 모두 치유되더라.』<br/><br/>이 구절은 사도적 권위로서 주어진 표적과 이적을 완벽하게 요약해 주고 있는데, 그들의 표적과 이적은 은사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은사주의자들은 안수나 아픈 곳에 손을 댄다든지 하는 “접촉점”을 중요시하나,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4:50이나 마태복음 8:13에서 어떤 “접촉점”도 필요로 하지 않으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접촉점”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 “사도들의 표적”은 “천사들의 방언”이나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말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으며, 또한 사도들의 치유에는 불발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치유하실 때와 마찬가지로 ‘모든’ 병자가 치유되었다. 사도들은 텐트나 교회로 사람들을 데려오지도 않았고, 그들에게서 헌금을 걷지도 않았다. 회중을 수동적인 상태로 만들기 위한 오르간 연주도 없었으며 그들 중 누구에게도 “믿기만 하라!”는 노래를 부르며 “나을 만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하지도 않았다.<br/><br/>5:17-28 『그러자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한 모든 자, 곧 사두개파가 분노로 가득 차서 일어나, 사도들을 잡아다가 감옥에 넣더라. 그러나 주의 천사가 밤중에 감옥문들을 열고... 경비원들이 거기에 갔으나, 감옥 안에 그들이 없는지라... 그때 어떤 사람이 와서 그들에게 보고하여 말하기를 “보소서, 당신들이 감옥에 넣은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고 있나이다.”라고 하더라... 그들을 데리고 와서 공회 앞에 세워 놓고, 대제사장이 물어 말하기를 “이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너희에게 엄하게 명령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런데, 보라, 너희가 예루살렘을 너희의 교리로 가득 채워서,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 돌리려 하는도다.”라고 하니라.』<br/><br/>부흥 뒤에는 반대가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법이다(마 14:1-15, 행 13:45). 제자들은 성령으로 충만했고 사두개인들은 분노로 가득찼다(17절). <br/>“파”(sect, 17절)는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분파이다(행 24:5 주석 참조).<br/>『이 모든 생명의 말씀』(20절)은 부활하신 구세주의 부활한 생명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지며, 이는 마지막 심판과 마지막 부활 이전에 몸의 부활이 있음을 확증해 주는 것이다(행 4:2 주석 참조).<br/>『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원로(senate)』(21절). 이것은 산헤드린(행 22:5)보다 훨씬 큰 종교 거물들의 단체를 언급하는 것이다. 로버트슨은 “원로”를 산헤드린의 한 부분인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그 단어의 헬라어는 노인들, 즉 장로들의 모임을 의미한다. <br/>22,23절의 내용은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 “죄수들”이 감옥을 빠져나갔다. 그들은 잠겨진 문을 통과해서 나갔거나 벽을 통해서 나간 것이 분명하다. 경비병들은 밖에서 문 앞을 지키고 서 있었으나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br/>다시 잡혀온 제자들에게 입을 다물라는 심한 압력이 가해진다(행 4:18,21). 그들은 단순히 “이 모든 생명의 말씀” 때문에 제자들을 박해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군중들을 선동해서 마태복음 27:25을 외치도록 했던 자들이다. 그랬던 그들이 이제 “피값”에 대해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는 이미 그들 위에 있었으며 그것은 누가 무슨 교리를 설교하고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었다. 대제사장은 구약의 진리를 “너희 교리”(28절)라고 부른다. 우리는 여기서 예레미야 시대에 있었던 에큐메니칼 공회가 성경을 바룩의 교리(렘 43:3)라고 불렀으며 유대인들은 그것을 바울의 교리(행 24:5)라고 부른 것과 마찬가지로, 성경의 무오성을 경멸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떤 교리가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를 알아내는 데(요 7:17)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는 무엇을 해야할 지를 말씀해 주셨다. 정직한 사람 치고 어떤 교리가 성경적 교리인지 아닌지를 24시간 내로 발견할 수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br/><br/>5:29-32 『그때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너희가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서 살리셨느니라. 이분을 하나님께서 오른손으로 높이셔서 왕과 구주가 되게 하셨으니, 이는 이스라엘에게 회개와 죄사함을 주시기 위함이라. 우리는 이런 일에 대한 그의 증인들이요, 또 하나님께서 그분께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고 하더라.』<br/><br/>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도다』(29절)(출 1:22, 마 22:17 주석 참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하늘로부터의 능력을 입을 수 없다. 예수께서는 사도행전 1:8에서 제자들에게 한 명령을 주셨으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로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힘을 주셨다(마 28:18-20). 그렇기 때문에 산헤드린과 원로가 대적하더라도 그들은 그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br/>『우리 조상의 하나님께서 살리셨느니라』(30절). 사도행전 5:17을 보라. 시몬 베드로는 서두도 없이 말씀의 칼로 그들을 베고 찌르고 있다.<br/>검사가 범죄자에게 말한다. “지난 달에 송달된 법원 명령을 받았는가?” 피고가 대답한다. “읽어 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이 더러운 죄인들아, 이제 내 말을 들으라.”<br/>『너희가 나무에 매달아 죽인』(30절). 베드로는 그들을 1급 살인죄로 고소한다(행 4:10). 그리고 그는 성령께 이끌림을 받아서 다니엘이 말했던 “왕”(Prince 단 9:25)이라는 말을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시킨다. 그리고 침례인 요한의 메시지였던 회개와 죄들의 사함을 반복한다(행 2:38 주석 참조).<br/>『우리는 이런 일에 대한 그의 증인들이요』(32절, 사도행전 1:8 주석 참조). 이것은 오직 진리만을 말하기를 맹세한 피고의 말이다. 뿐만 아니라 『성령도 그러하니라』(32절)는 말로써 진리를 확증하는 데 필요한 두 번째 증인(신 19:15)도 제시된다(히 2:4 참조). 그러나 그들은 성령께 순종하지 않았던 것이다.<br/>사도행전 2:38에서의 “순종”은 물침례였다. 그 이유 때문에 오늘날까지 구원받지 못한 캠벨파 목사들은 그 장을 떠나지 못한다. 율법 아래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어진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그들은 성령을 받고자 한다. 그러나 성령은 오직 믿음(행 10:44)으로 받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롬 1:5; 16:26) 신뢰함으로써 오직 믿음만으로(롬 4:5) 받는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를 그 어리석음에서 분리시킬 수 없는 것처럼(잠 27:22) 캠벨 추종자를 그 마술 물웅덩이에서 분리시킬 수 없다.<br/><br/>5:33-42 『그러나 그들이 이 말을 듣고 격분하여, 사도들을 죽이려고 의논하니라. 그때 가말리엘이라고 하는 한 바리새인이 공회 중에서 일어서니... 그러자 그들이 가말리엘에게 설득되어, 사도들을 불러서 때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못하도록 명령한 후에 놓아주니라... 그들이 성전에서나 각 집안에서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전파하는 것을 쉬지 않더라.』<br/><br/>여기 존경받는 “율법 박사”가 등장한다. &lt;미쉬나&gt;(Mishna)는 라반 가말리엘이 죽었을 때 순결과 절제와 율법에 대한 경외심도 함께 죽었다고 말하고 있다. 더멜로우는 그가 할렐의 손자이며 “라반”(랍비보다 더 우위의 직책)이란 칭호를 받은 일곱 교사 중 첫째인 랍비 시므온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반면 누가복음 5:17은 그를 구원받지 못한 랍비로 제시하고 있다. 그의 위대한 지혜의 “설교”는 필로와 공자 중간쯤에 있다. 여기가 그가 했던 충고는 “정의가 승리한다”, “계속 두고 보자”, “앞으로 될 일이 말해 줄 것이다”라는 정도의 깊이밖에 없다. 모든 사람들 사이에 퍼진 가말리엘의 명성은 현혹시키는 행위에 근거한 과장된 칭찬인 것이다.<br/>하지만 가말리엘의 충고는 효과적이었다. 가말리엘은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내버려 두라”(38절)고 말했다. 즉 이 율법 박사는 그런 제안을 하는 데 대한 논리적 이유도 없이 적절한 제안을 한 것이다. <br/>『사도들은 그분의 이름을 위해 모욕을 받기에 합당한 자로 여겨짐을 기뻐하며』(41절). 이것은 누가복음 6:23의 지시사항에 대한 실제적인 적용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 시기, 이기심, 신뢰의 부족, 기질, 수다스러운 입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는 사실(벧전 2:20)을 아신다. 그렇다면 가치 있는 어떤 것을 위해 고난받을 기회를 영광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어떻게든 우리가 고난을 받게 되어 있다면(요 16:33) 옳은 것을 위해 고난받아야 하지 않겠는가?(벧전 2:19-21)<br/>5장 마지막에는 가가호호 방문해서 가르치고 설교하면서 “그들의 아버지의 일” (눅 2:49)을 하는 사도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당시에 그와 같은 모습은 성전 경배와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가호호 다니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며 전파하는 것은 역사가 입증하는 훌륭한 구령 방법으로,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은 지금까지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description>
<dc:creator>관리자</dc:creator>
<dc:date>Fri, 26 Mar 2010 00:56:03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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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주의 거룩하신 아들 예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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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lt;본문 : 사도행전 4장 25-37절&gt;<br/><br/><br/><br/>4:25-30 『“... 주의 종 다윗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셨으니 ‘어찌하여 이방이 분노하며 백성들은 헛된 일들을 꾀하는고? 땅의 왕들이 일어서고, 또 다스리는 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였도다.’ 라고 하셨나이다. 그들이 과연 주께서 기름 부으신 주의 거룩하신 아들 예수를 대적하여 헤롯과 폰티오 빌라도가 이방인들과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모였으니 이는 주의 손과 주의 계획대로 이루기로 예정된 온갖 일을 행하려 함이니이다. 이제 주여, 그들의 위협함을 살피시어 주의 종들로 담대하게 주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시고 주의 손을 펴시어 병을 낫게 하시며, 또 표적들과 이적들이 주의 거룩하신 아들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게 하소서.”』<br/><br/>『주의 종 다윗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셨으니...』(25절). 본문은 시편 2:1,2이 인용됨으로써 초림과 재림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시편 2편에서 “거룩한 산”에 계신 왕은 갈보리 산에 있던 “그 선지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땅의 재판관들”(시 2:6,10)이 “그 발의 먼지를 핥는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시 72:9).<br/>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그밖의 다른 사도들)는 이스라엘을 위한 구약 예언의 문자적 성취와 더불어 환란을 향하고 있다(다니엘의 칠십째 주). 마태복음 1장부터 여기까지 모든 진로는 그 방향을 향해 일방통행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런 약속들은 초림에 적용될 수 있지만, 그것 하나하나에는 재림이 포함되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대다수의 보수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보좌에 앉으시고 천 년 동안 유대인의 왕국이 이 세계의 수도가 되는 일은 없다고 가르친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어떤 구절은 문자적으로 해석하고(초림 : 사 53장, 시편 22,16편 등) 어떤 구절은 비유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재림 : 사 2,11,65장, &#49852; 14장 등).<br/>한델(Handel)은 이 구절과 계시록 11:15을 “크리스마스” 때인 누가복음 2:11에 맞추었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대다수의 “보수주의 복음주의자들”은 예수님께서 영원무궁토록 통치하는 것이 사도행전 1장에서 시작하여 계시록 20장까지 그런 식으로 계속되리라고 생각한다.<br/>26절의 『땅의 왕들... 다스리는 자들』은 계시록 17,18장의 열 왕들이며, 계시록 13장에 따르면 그들은 적그리스도의 치하에 있게 될 것이다. 헤롯과 빌라도가 이 통치자들의 모형은 될 수 있으나 그것이 그들에 관한 성경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뜻은 아니다. (마태복음 17:10-12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1980-2000년의 “왕들과 다스리는 자들”이 로마라는 것을 독자에게 분명히 경고하고 있다.<br/>[“대다수(majority)의 보수주의 학자들”은 27절을 조심스럽게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주의 거룩하신 아들 예수를 대적하는” 이들도 “다수”(majority)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편에 섰던 사람은 누구였는가? 마지막에는 그의 어머니와 한 제자와(요 19:27), 정죄받은 도둑(눅 23:40)뿐이었다. 바울의 경우에는 한 명의 의사뿐이었다(딤후 4:11). 바울은 그의 글에서 “양심”을 중시한다(행 23:1, 딛 1:15, 딤전 4:2). 오래 전 한 청교도는 사람들이 그에게 양심을 내버리라고 말할 때 이렇게 대답했다. “미안합니다만 그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루터는 그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묶여 있다고 말했다. 이 끈은 “자유의 법”(갈 5:13)과 함께하는 노예상태이다.]<br/>대부분의 지역 교회 안에서 “다수”는 ‘성경적인’ 문제 대신 ‘개인적인’ 문제 때문에 함께 모인다. 그 문제는 대개 소수로 시작해서(요 11:47) 다수에게 영향을 끼치다가(눅 23:23) 결국에는 다수가 그 문제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즉 그들이 소수의 입장을 취하지 않으면 그들은 “미혹된” 것이라는 말이다. 헤롯과 빌라도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공동의 ‘두려움’이 있기 전까지는 “함께 모일”(27절) 수 없었다. 많은 “교제”가 대개는 세상이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독재자”의 학대를 받은 후에 서로 위로하기 위해 쫓기는 토끼들이 함께 구멍을 파는 것과 같다. 교제의 근거가 간접적으로라도 설교나 진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지역교회들이 미국에는 많이 있다. 그들이 함께하는 동기는 많은 경우에 어떤 문제에 관해 자신들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거나, 선전을 하거나, 자신들이 (그들의 적들의 눈에) 영적임을 증명하거나, 명성을 얻거나, 다른 교회에 되갚음을 하거나, 다른 교제권의 능력과 권위를 시기해서 그들과 떨어져 있기 위한 데 있다.<br/>『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였도다』(26절)라는 말씀은 여러 그리스도들이 있음을 암시한다(눅 2:26 참조). 마귀는 “기름 부음”을 받았으며(겔 28:14), 신약에서 그 단어는 헬라어로 ‘크리스토스’ 즉 “그리스도”에 사용되는 단어이다. 사도행전 4:26이 기록된 뒤 여러 해가 지나서 기록된 70인역이 마귀에게 가해질 이런 위협을 미리 보고서, 히브리 구약 성경 에스겔 28:14에서 “기름부음 받은”이란 단어를 번역하지 않음으로써 사탄의 발자국을 조심스럽게 감추었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있는 일이다. 사탄도 하나의 “그리스도”라고 생각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이다(살후 2:1-6 참조).<br/>『주의 거룩하신 아들 예수를 대적하여...』(27절). 그들은 예수님의 아버지가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것은 어느 구절이라도 없애 버려야 했다. 그래서 (바로 다윗을 종으로 언급하는 문맥에서) “아들”(child)이란 단어를 “종”으로 변개시킨 것이다(ASV, NASV, RV, NRSV 등). 그리고는 25절의 “종”이란 단어를 “아버지”로 바꾸었다. 이 본문(알렙, E, A, B에서 발견되는)에서 그들은 ‘파이다’(27절)를 “종”으로 번역했다. 왜냐하면 “아들”(child, KJV)로 번역하면 틀린 아버지, 즉 다윗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메시야로서 그리스도는 “다윗의 아들”(마 1:1 참고)일 수 있으며, 마태복음 1:20; 9:27; 15:22; 21:9에서는 그렇게 여겨졌다. 그러나 여기서의 기도는 하늘과 땅을 만드신 주 하나님께 하는 것이다(24절). 그리고 여기서 “주께서”(Thou, 27절)와 “주의”(Thy, 28절)는 다윗을 일컫는 말이 아니다. NASV, RV, RSV, PDQ, NRA, NRSV, RFD 등은 다윗을 “우리 아버지”라고 했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해 “아들”을 “종”으로 변개시켜야만 했다. 이것이 칠십인역을 기록하고 “정통학자”라는 거짓 고백 하에 ASV(1901)를 지지했던 학자들의 배후에 있는 생각이다. <br/>그러나 아처 웨니거, 글리슨 아처, 윌버 스미스, 케네스 웨스트, A.T. 로버트슨, 그리스바흐, J.G. 메이첸, 더멜로우, F.F. 브루스, 래드, 노울링(그밖의 “유명한 권위자들”)의 변개된 본문을 성령께서 반대하신다는 가장 큰 증거는, 성경 어디에도 다윗이 “우리 아버지”로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윗은 <br/>1. 족장(행 2:29)<br/>2. 하나님의 종(시 132:10)<br/>3. “나의 아버지”(대하 2:3 - 솔로몬이 한 말)<br/>4. “그의 아버지”(대하 28:1 - 솔로몬의 아버지)로 불린다.<br/>“우리 아버지”라는 표현이 있는 곳에서(행 7:2,38) 다윗은 그 표현에서 분리된다. 이스라엘이 “우리 아버지”라 부른 인간은 다윗이 아니라 아브라함이었다(요 8:56; 8:33, 마 3:9, 눅 3:8; 16:24, 행 7:2,32, 롬 4:1,2,3,4,9, 갈 3:6,7,8,9 등 참조). 그러므로 NASV는 카톨릭 성경인 예수회의 &lt;림즈 듀웨이&gt;(1582)와 함께 무시해야 할 것이다. &lt;킹제임스성경&gt;이 옳다. <br/>뿐만 아니라 모든 “근본주의자들”은 1880년 이후로 베드로가 방금 인용한 구절의 문맥을 거부했다. 시편 2편을 읽어 보라. 그 문맥이 여호와의 고통받는 종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낳으신 누군가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시 2:1-12) <br/>아직도 사도행전 4:27이 “아들”이 아니라 “종”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문맥을 벗어난 본문은 그럴싸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거룩한 아들 예수”(행 4:27)는 문맥상 시편 2편과 연결된다. 거기서 하늘과 땅의 주 하나님(행 4:24)께서는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노라』고 말씀하신다. 그의 “거룩한 산”에 있는 하나님의 왕(시 52:6), 통치자들이 멸망하지 않기 위해 입맞추어야 하는 그분이 “종”이란 말인가?<br/>『...주의 종들로 담대하게 주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시고』(29절)[13절 주석 참조]. “아들”을 “종”으로 바꾸어 버렸기 때문에 다음에 나오는 “종”은 설 자리가 없어졌다. 왜냐하면 그 단어는 인간 죄인들을 언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ASV에서는 반 세기가 넘도록 “종들”로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NASV에서는 “노예”(bond servant; 급료가 없는 고용인)로 바꾸어야만 했다.<br/>30절은 우리가 이제까지 강조해 온 가르침을 다시 한 번 확증시켜 준다. 즉 이 지점까지 사도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최고 지도자인) 모세에게 주어진 표적과 이적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두 번째 모세”인 주 예수께로 전해졌고, 그분에게서 다시 열 한 제자에게로 전해졌다.<br/>이단적인 NASV 본문을 완전히 끝장내려는 듯 “아들 예수”가 다시 등장한다. 누가는 그의 첫 번째 저술(눅 2:27)에서 “주의 그리스도”(눅 2:26)를 언급하는 문맥 속에서 똑같은 표현을 썼다. 그것이 누가가 말한(눅 2:34,40,43) “아이”(child)이며 마지막 참조 구절인 누가복음 2:43은 사도행전 4:27의 “아들 예수”(child Jesus)와 일치한다. 그러므로 1611년 &lt;킹제임스성경&gt; 본문은 <br/>1.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나타난 누가의 문체와 일치한다.<br/>2. “고난받는 종”이 아니라 왕이라는 문맥과 일치한다.<br/>3. 다른 단어로 대체된다면 그리스도의 신성이 손상을 입을 것이다.<br/><br/>4:31-37 『그들이 기도를 마치자 그들이 함께 모여 있는 곳이 진동하더니 그들이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여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더라.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의 무리가 한 마음과 한 혼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주장하는 자가 없고... 쿠프로 태생의 레위인 요세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도들은 그를 바나바라고 부르니 (이를 해석하면 “위로의 아들” 이라.) 그에게는 토지가 있어 그것을 팔아 그 대금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놓더라.』<br/>타당한 동기를 가진 타당한 기도는 대개 응답된다. 그들이 모여 있던 장소는 경미한 지진으로 흔들렸고,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했다(31절). 섭리적으로, 이 성령으로 충만한 담대한 성도들 중 아무도 방언을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 아니기 때문이다(고전 14:22). 그들이 “성령으로 충만”할 때 그들의 개심자들은 “기쁨”(행 8장)으로 가득찼고 “사두개파”는 “분노”로 가득찼다(행 5:17). <br/>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분명히 성령으로 충만한 것보다 더 쉽다. 왜냐하면 “자신의 덕”을 세우고(고전 14:4,5) 방언으로 하나님께 기도했던 고린도교인들은 “술취함”(고전 11:21)과 “음행”(고전 5:11; 6:18; 5:1,2)과 “시기와 다툼”(고전 3:3), 지식으로 인한 “교만”(고전 8:1)으로 책망받았기 때문이다.<br/>32절에서는 기독교적 공산주의가 행해지고 있는데, 그것은 국제 사회주의와는 현격하게 다르다. 찰스 다윈은 요한복음 8:32을 이용했고 칼 막스는 사도행전 4:32을 이용했다. 초대교회의 공동생활과 UN이 추천하는 사회주의는 완전히 다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두 거듭난 사람들이며, 그들이 아직 알지 못하는 가운데 형성된 한 몸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 모두는 구약의 약속들을 문자 그대로 믿었으며 그것을 그리스도의 재림에 적용시키고 있다. 그들의 지도자들은 사유재산제도를 믿는(행 5:4 참조) 성령충만한 사람들이다. 물건을 함께 쓰는 것은 전적으로 자원해서 이루어지는 일이며, 분배를 지시하는 정부 요원도 없고 분배를 감시하는 경찰세력도 없다. 더구나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예수께서 여러 날이 지나지 않아 재림하실 것을 고대하고 있다(행 1:6; 3:19,20). 그러다가 그들은 마침내 큰 능력과 큰 은혜(33절)를 얻게 된다.<br/>그들의 설교의 주제는 죽은 자들‘로부터’(from) 부활하신(행 2:30,31) 메시야이다(33절). 그들의 적들은 시체가 사라진 동안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이 어떻게 계속되고 있는가를 설명해야 했다. 새로운 “교회”는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움직이고 있다. 교회는 꿀이 교제를 더 달콤하게 할 수는 있지만 가스 탱크를 꿀로 채울 수는 없다는 사실을 배운다. 당밀은 끈끈하게 해 주며 후추는 더 맵게 해 주지만, 교제를 부드럽게 해 주고 성도들을 “한 마음과 한 혼이” 되게 하는 것은 하늘로부터 온 “기름부음”이다(엡 5:18).<br/>그들은 ‘기도하기’ 위해 함께 모였다(31절). 교회를 분열시키거나 초신자들을 목사에게 반대하는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의 기도가 응답되었음은 그들의 “사교적인 친절함”이 아니라 영적 담대함으로 증명되었다. 초대 교회는 진정한 교제를 가졌으며, 그것은 그들이 한 마음이었기에 가능했다(암 3:3을 볼 것). 그들은 하나님께 전부를 드렸다. <br/>용기있는 드림은 삶을 행복하게 만든다. 용기있는 드림은 순종의 증거요 사역에 대한 관심의 표명이며 더 고상한 동기로 나아가게 하는 도전이다. 그것은 우주의 자연적, 물리적, 도덕적, 영적 법칙을 이해했음을 보여 주는 행동이다. 요한복음 12장에서 우리는 마리아와 유다가 이루는 대조를 볼 수 있다. 마리아는 “주는 자”였고 유다는 “얻는 자”였다. 그리스도인이 그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가 할 수 없는 것을 그를 위해 해 주신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주는 자들”이었다. <br/>사도행전 4장의 성도들처럼 기쁨으로 드리는 자들은(고후 9:7) 그들 자신의 영적 생활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다른 책임들을 수행하는 것도 쉬워지며, 주는 데서 큰 기쁨을 얻는다. 또한 십일조 이상을 드리는 것도 쉬워진다(&lt;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창세기&gt; 14:20 주석 참조, 1970).<br/>『레위인 요세...바나바...“위로의 아들”』(36절). 사도행전 11:23은 바나바가 “위로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심하게 변개된 대문자 필사본 알렙, A, B, D, E에는 “요세” 대신 “요셉”으로 되어 있다. 1982년에 나온 예수회 성경, 즉 로마 카톨릭에서 펴낸 성경에도 그렇게 되어 있다. <br/>여기서 우리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한다.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의 제사장 지파인데, 본문에서는 한 레위인이 어떤 제사장적인 지위나 호의를 요구하지 않고 다른 족속들과 같이 자신의 재산을 내어놓고 있는 것이다.<br/>여기 제사장(priest) 지파 출신의 진짜 제자가 있다. 그는 “미사”를 집전하지도 않고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지도 않는다. 그가 바울을 따랐을 때에는 옳았으나(행 15:2) 베드로를 따랐을 때에는 잘못을 범했다(갈 2:13)! 그는 묵주를 가지고 다니지도 않았으며, 묵주기도를 반복하지도, 물을 뿌리지도, 초에 불을 붙이지도 않았으며, 9일기도를 하지도 않았고, 오가는 길에 마리아에게 인사하지도 않았다!<br/>이 구절은 과도기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사도 요한은 계시록 7:7에서 레위 지파를 열 두 지파에 포함시킴으로써 과도기를 완전히 마무리짓는다. 회심한 레위인은 “대제사장”이 누구인지를 잘 안다(행 23:5 주석 참조). 회심한 레위인은 그분께 희생제를 드릴 때 인간 제사장을 신뢰하지 않는다.<br/>쿠프로는 중요한 곳인데, 왜냐하면 사도 바울과 함께 바나바가 사도행전 13장에서 이 섬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br/>『...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놓더라』(37절). 사도행전 4장은 회중을 부양하고 사역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헌금을 지역교회로 가져오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고전 9:6-10, 롬 15:26, 행 11:29 참조).]]></description>
<dc:creator>관리자</dc:creator>
<dc:date>Fri, 26 Mar 2010 00:55:28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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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담대한 증인들</title>
<link>https://www.biblemaster.co.kr/bb2/%EB%8B%B4%EB%8C%80%ED%95%9C-%EC%A6%9D%EC%9D%B8%EB%93%A4/</link>
<description><![CDATA[사도행전 4:1-22<br/><br/><br/>4:1-4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하고 있을 때 제사장들과 성전 책임자들로부터 사두개인들이 그들에게 와서 그들이 백성을 가르치며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을 예수를 통하여 전파하는 데 격분하여서 그들을 체포하여 그 다음 날까지 가두었으니, 이는 그 때가 이미 저녁이었기 때문이라. 그러나 그 말씀을 들은 많은 사람이 믿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 명이나 되더라.』<br/><br/>『그들이 백성을 가르치며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을...전파하는 데 격분하여서』(2절).<br/>디도서 1:12의 “악한 짐승들”과 “게으른 탐식가들”, 사도행전 20:29의 “이리들”이 그와 같은 반응을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15세기 동안 바티칸에 경의를 표하지 말도록 가르치는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으로 정죄해 왔다. “이단”들이 무엇을 가르치는가가 중요하다. 벌링거 추종자들은 침례교회에서 교인들을 빼내오기 위해 “물침례는 없다”라고 가르친다. 캠벨 추종자들은 “침례에 의한 거듭남”을 가르침으로써 행위로 인한 구원을 믿게 한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지옥이 없다”고 가르침으로써 구원의 확신이 없는 감리교인들과 침례교인들을 끌어들인다. 순복음 교단은 감독교인들과 카톨릭 교인들에게 “방언과 치유”를 가르침으로써 그들을 성경의 권위 대신 경험을 기초로 한 에큐메니칼 운동에 끌어들인다.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가 중요하다. 사도들은 “죽은 자들로부터의(from) 부활을 예수를 통하여 전파”했다(2절).<br/>문제는 바로 그 전치사(from)에 있다. 사두개인들이 어떤 형태의 부활도, 심지어 죽은 자들의 부활(행 23:8)까지도 강력히 반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원로”(행 5:21)가 사도들의 가르침에 “격분”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바리새인들도 포함되었다. 바리새인들은 모든 무천년주의 해석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마르다와 마찬가지로(요 11:24) 마지막 때의 전체적인 부활과 심판을 믿었다. 그러나 그들이 증오했던 것은 마지막 심판(계 20:1-6) 이전에 죽은 자들“로부터”(from) 어떤 이들이 살아나리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천년적 가르침이었다.<br/>전천년주의는 하나의 성경 해석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19세기 동안 증오되고 무시되어 온(막 9:9,10을 볼 것) 진리이다. 그것을 마지막 심판 전에 두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그 심판대에 모습을 드러내야만 하는 사람들보다 더 의로운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자기 의를 주장하는 사람은 누구도 이 교리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런 사람에게는 총체적인 죄들이 총체적으로 심판받는 총체적인 부활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런 심판에서 그는 다른 사람들과 동등하게 보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br/>그러나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롬 3:25,26; 10:1-4).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행 17:31)은 그 의가 심판 때에 있을 어떤 죄인의 의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사람들은 마지막 심판보다 먼저 부활할 것이다(롬 10:9,10을 볼 것).<br/>이것이 바로 사도들과 제자들이 붙잡혀서(3절) 감옥에 갇히게 된 이유이다. 관찰력 있는 독자라면 베드로가 2시간 동안 설교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3:1과 4:3 비교). 그는 청중의 죄와 무책임, 무지, 살인(행 3:13-16)을 강력히 지적하면서 메시지를 시작했다. <br/>믿는 자들의 수는 이제 5,000명으로 늘어났다. 이것은 2시간의 메시지 후에 약 2,000명이 개심했음을 나타낸다. 여기서 개심한 사람 중 아무도 방언을 했다거나 즉석에서 침례를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br/><br/><br/>4:5-12 『그 이튿날 예루살렘에는 그들의 관원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함께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카야파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또 대제사장의 친족이 모두 참석하여 두 사도를 가운데 세워 놓고 그들이 묻기를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하였느냐?”고 하더라. 그때 베드로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들에게 말하기를 “백성의 관원들과 이스라엘의 장로들이여, 오늘 우리가 불구자에게 선한 일을 행한 것에 관해서 그가 어떻게 낫게 되었느냐고 심문을 받는다면 너희 모두와 이스라엘 모든 백성은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처형하였고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나사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온전하여져서 너희 앞에 서게 되었느니라. 이 분은 너희 건축자들이 쓸 데 없다고 제쳐 놓은 돌이었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느니라. 그러므로 다른 이에게는 구원이 없나니, 이는 하늘 아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을 인간에게 주신 적이 없음이라.”고 하더라.』<br/><br/>반대하는 자들도 증가하고 있다.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과 성전 책임자들에서 시작되었던 것이 이제는 “관원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까지 포함되었다. <br/>『...대제사장의 친족이 모두 참석하여...』(6절). <br/>피는 물보다 진하다. 이제 안나스, 카야파, 요한, 알렉산더 대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안드레이다. 누가복음 3:2은 이 구절에 있는 무리 중 두 명을 언급하고 있다. 카야파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킨다”고 믿었던 요한복음 11:49의 선지자이다. [이 같은 믿음은 공민권법(1964)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러나 “손에 손을 잡을지라도” 사악한 자는 벌을 받는다. 사도 시대의 에큐메니칼 공회가 의지했던 “숫자 상의 안전성”은 결코 불못에서 그들을 보호해 주지 못했다.<br/>『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하였느냐?』(7절). <br/>이 위선자들이 나타날 때마다(마 21:23, 막 11:28, 눅 20:8, 요 5:27) 그들은 항상 권세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결과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수천 명을 먹이고(마 14:21), 수십 명이 치유되고(마 8:16) 죽은 자들이 살아났음에도(요 11:20-50), 그들이 알고자 하는 것은 오직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행하느뇨?”(마 21:23)이다. 학위를 어디서 얻었지? 서명을 좀 보자구! 어떤 교단에 속하지? 어디서 위임을 받았지? 출판사는 유명한가? 누가 임명했지? 무슨 학교를 나왔지? 누가 파송했지? 목사는 누구지? 사역은 얼마 동안 했는가? 인가받은 신학교겠지? 협회에는 소속이 돼 있나? 주교가 추천을 할까?... “너희가 무슨 권세로... 이 일을 하였느냐?”<br/>카야파와 안나스, 요한, 알렉산더는 이번에는 사슴 대신 회색곰을 잡았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을 때의 베드로는 너무나 우둔했다(요 13:8, 마 16:22).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한”(8절) 그의 대답은 질서정연하다.<br/>『백성의 관원들과 이스라엘의 장로들이여』(8절)<br/>이번에는 머뭇거리거나 불평하는 것도 없으며(마 26:70) 분노에서 터져나온 저주도 없다(마 26:74). 베드로는 큰 소리로 정연하고도 공식적인 입장에서 반대파를 정면으로 겨냥하여 그들의 영적 눈멈과 직무 태만, 성경에 대한 무지와 살인(10절)을 비난하고 있다. 베드로의 대답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일을 했다”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시편 118:22을 인용한 것이다. 그 구절은 산헤드린이 자신들이 죽였던 사람의 입에서 들었던 바로 그 구절이다. 마태복음 21:42-45를 보라.<br/>직업 어부인 베드로가 그들을 사정없이 해치웠으며, 그들이 “숨겨진 손길”이 그와 함께 했다는 것을 즉시 인지했다는 사실은 13절을 통해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누구도 시편 118:22를 인용해서 그들을 살인자로 고소한 사람이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옛 친구 시몬 베드로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br/>11절은 &lt;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마태복음&gt;에(마 21:42-44) 설명되어 있다. 이 머릿돌은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 놓여지는 돌을 말한다. 그것이 피라미드 꼭대기에 놓여 있지 않다는 사실은, 그 돌이 와서 놓여지는 때와(마 21:42) 와서 피라미드를 세우는 자들을 부숴뜨리는 때(마 21:44) 사이에 하나의 중간 시대가 있음을 보여 준다. 이스라엘에게 왕국이 연기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학설이 아니다. 그것은 과학적 자료를 통해 입증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다(11절). 그러나 그 ‘돌’은 다니엘 2장 이후에야 다시 내려올 것이다. 그때 그 ‘돌’은 유럽에 세워지고 있는 열 개의 실제적이고 눈에 보이며 정치적인 로마 카톨릭 왕국들을 칠 것이다. <br/>『그러므로 다른 이에게는 구원이 없나니, 이는 하늘 아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을 인간에게 주신 적이 없음이라』(12절). <br/>이것은 신약적인 구원에 대한 위대한 선포이다. 12절에서 “우리”는 직접적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을 말하는 것이지만 여기에 “하늘 아래서...다른 이름을...주신 적이 없음이라”는 말씀이 덧붙여진 것은 로마서 10:14-16의 전조가 된다. 이것은 마태복음에서 중간중간에 삽입되는 내용과도 유사하다(마 1:3,5; 13:14; 6:33 주석 참조). 이러한 삽입구들은 유대인들을 향한 감추어진 경고이다.<br/><br/>“배우지 못한 무식한 사람들”(13절)이라는 &lt;킹제임스성경&gt;의 번역이 부적절하다고 처음으로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아담 클라크(Adam Clark)이다. 빈센트(Vincent)와 로버트슨(Robertson)도 그 말을 몹시 싫어했고, 브루스(Bruce), 얼(Earle), 카터(Carter), 웨스트(Wuest), 래드(Ladd)도 이 단어들이 적절치 않으며 NASV처럼 “교육받지 못하고 훈련되지 못한”으로 돼야 한다고 말한다. <br/>산헤드린의 눈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배우지 못한 무식한 사람들”이었다. 교육받은 사람들은 직업 어부들은 배우지 못했고 무식하기 때문에 누구에게 성경을 가르치거나 설교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오늘날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생각하는 바는 하나님께서는 기독 대학에서 교육받은 산뜻하고 교양있는 젊은이들만을 사역에 부르시며, 고등학교 졸업장을 가지고 대학 입학이 보장된 사람들만을 부르신다는 것이다. <br/>하나님께서는 아모스나 요한, 예레미야, 베드로, 느헤미야, 미카 같은 사람들은 더 이상 부르시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바울만이 자격을 갖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랍비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바울의 언변은 “서툴고” “약했다”(고후 10:10). 더구나 구원받은 후 그는 학교를 그만두었고 다시 복학하지 않았다.]<br/>베드로와 요한은 이사야 29:21을 문자 그대로 실행하고 있던 그들의 고소자들의 눈에는 “배우지 못한 무식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 촌뜨기들한테 생각이 있다면 공개적으로 설교하지는 않을텐데, 그들은 무식한 사람들이야.”라고 생각했다. 물론 베드로의 갈릴리 사투리(마 26:73)는 그가 촌뜨기임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배우지 못한” 자였다. 그는 연설 중에 호흡을 가다듬을 줄도 몰랐고, 글을 쓸 때면 알아보기 힘들게 썼다. 그는 “분노한 사람”이었다. 그의 말은 오싹할 정도였다. 그는 속어를 썼다(로마서 16:18을 볼 것!!). 그는 사람들에게 모욕을 주었다. 분명히 그는 “배우지 못한” 자였다. 그러나 그는 성령으로 충만했다. 죽은 정통주의의 상투어구는 “하나님은 무지를 존중하시지 않는다”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하나님은 교육을 높이시는 분도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어떤 일을 시키기를 원하실 때 교육받은 것을 내세우고자 하는 사람을 결코 축복하지 않으셨다.<br/>『그때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보자』(13절). <br/>서로에 대한 사랑도 아니고, 그들의 재치나 상냥함도 아니다. 원어에 대한 지식도, 그들의 훌륭한 인격도 아니다. 그들이 놀란 것은 “그들이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보자”였다. <br/>예수 그리스도는 나비 수집가가 아니었다. 그분은 사자를 길들이는 분이셨다(딤전 1:13). 그분은 남을 저주하는 시몬 베드로, 살인자 모세, 간음자 다윗, 신성모독자 바울, 개심한 갱 두목(킬러 벅 Burke), 개심한 마약 우두머리(프레디 게지 Freddie Gage), 구원받은 창녀(라합), 설교하는 노예 밀수업자(존 뉴톤 John Newton), 포효하는 엘리야, 야만적인 입다, 잔인한 아모스, 말다툼하는 느헤미야, 개심한 레슬링 선수(스트랭글러 루이스 Lewis), 복음전파자 야구선수(빌리 선데이 Billy Sunday), 그밖에 피를 보고 살았던 다른 많은 사람들(낙스, 사이클론 맥, 휫필드, 먼스터, 테넌트 등), 즉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방울뱀에게 침을 &#48183;을 수 있는 사람들을 “길들이셔서” 그들을 사용하신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담대함”이다. 바울은 에베소서 6:19,20에서 이 위대한 신약의 진리를 잘 말해 주고 있다. <br/>15절에 나오는 회의는 “분리를 일으키는 일들”(잠 18:1,2)로서, 요한복음 11:47과 마가복음 3:6에서 진행되었던 비밀스런 일과 연관된다. 그들은 항상 그런 식으로 일한다. 진리와 의의 가시적 증거는(요 11:20-46 참조) 고의적으로 거부하고(16절) “편의주의”(17절)를 표방하는 것이다. 그것이 “모두의 유익을 위하여”라는 실용주의 철학이며, 그것이 바로 예루살렘의 멸망(A.D. 70)을 가져온 원인이었다. 15절에서는 “공회”(15절)가 다시 나타나는데(행 23:1,6,15,28 참조), 공회의 역할은 마귀가 맡긴 일을 수행하는 것, 즉 성경의 진리가 전파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다.<br/>이 “비밀스런 회합”에서 그들은 사도들의 사역에 주께서 함께하심을 인정한다. 그리고 이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명백함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대로 믿는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하려고 그를 위협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천국의 문을 닫아서 자신들도 들어가지 못할 뿐 아니라 들어가고 있는 사람들도 막는다(17절 참고).<br/>데살로니가전서 2:14-16에서 바울이 한 말은 사도행전 4:18에서 우리가 읽은 것이 나중에 어떻게 발전되었는가를 보여 준다. 그들이 걱정했던 것은 바로 그 “이름”이었음을 다시 한 번 주의해야 한다(17,18절, 5:42).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이 이름이 우리의 기도를 응답받게 해 주는 서명이다(요 14:14). 그 이름은 유대인 사회주의자들과 산헤드린에 의해 공격당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호흡을 불어 넣으신 최초의 원본”을 믿는 전천년주의 “근본주의자들”에 의해서도 공격받고 있다. 케네스 웨스트(Kenneth Wuest)와 로크만 재단은 어떠한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 못지 않게 “그 이름”에 손상을 입힌다[&lt;확대번역, An Expanded Translation&gt; 웨스트, 빌립보서 2:9-10 참조].<br/>『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이...대답하여 말하기를...우리는 보고 들은 일들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노라』(19,20절). <br/>이것은 결코 돈으로 매수할 수 없는(행 4:21,24,34) 나무랄 데 없는 증인들의 명백한 증언이다. 한편 산헤드린은 진리가 폭로되지 않게 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위협할 뿐만 아니라 바리새인들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마 21:26) 사람들을 두려워했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통해 영광을 취하시는 것에 분개했다(21절).]]></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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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date>Fri, 26 Mar 2010 00:54:48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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