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주석 분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 -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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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4년 11월호>
3:1 주 하나님께서 지으신 들의 어떤 짐승들 보다도 뱀은 더욱 간교하더라. 그가 여자에게 말하기를 “참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동산의 모든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지 말라.’ 하시더냐?” 하니창세기 삼장을 여는 첫 구절은 인류에게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지성인 그룹 사이에서 가장 미움받는 성경부분이 있다면 바로 이 창세기 3장이라고 단언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창세기 3장은 2, 3세기의 포프리, 셀수스 및 그 무리들에게도 증오의 대상이었던 것처럼 20세기의 인텔리겐챠에게도 정확히 그러하다). 신학자, 철학자, 과학자 및 교육자들이 창세기 3장이 시사하는 바 그것으로부터 자신들을 숨기려고 얼마만큼 노력했는가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이와 같은 극렬한 반대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는바 그것은 창세기 3장이 기록된 그대로를 의미하고 의미하는바 그대로를 말하고 있다면 상아탑(대학)의 근거를 뒤흔들어 버릴 다 섯가지의 가장 고약하고 반발을 불러 일으키게 될 진리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1. 성경을 의심하고 성경에 의문을 제기하는 모든 근원은 사탄에게 있다.
2. 지구상의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삭제하고 덧붙임으로써 시작되었다.
3. 지식이 있어 신처럼 되고 싶다던가 “신과 같이”(godlike) 되고 싶은 인간의 현재 욕망은 사탄에서 유래되었다.
4. 사탄이야말로 지성세계에 있어서 반드시 고려애햐 할 실제적인 세력이다.
5. 인간의 현재의 상태는 타락하고, 미혹되고, 속았으며, 자기의 의를 내세우며,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존재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숨긴 채 말씀에 불복종하면서도 “종교”(religions)를 그 핑계로 삼는 그러한 상태인 것이다.
“뱀은 더욱 간교하더라”
간교하다(subtle)는 단어는 매우 적합하다. 유혹은 늘 긍정적인 모습으로 다가오게 마련이며 그 유혹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에게 유익하게 보인다. “먹음직 하고, 보기에도 즐겁고, 현명하게 할 만큼 탐스럽다”고 한 것을 주목하라. 이처럼 성경대로 믿는 사람은 처음부터 그의 대적은 그가 알고있는 그 어떤 사람보다 최소한 10배 이상 간교하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구원받지 못한 자는 말하기를 “담배, 술, 춤이 뭐가 나쁘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성경은 자기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도 상당히 잘못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누가복음 12:49-53절을 보라.
처음부터 우리는 성경의 관점에 우리 자신을 맞추어야만 한다. 성경은 “들의 어떤 짐승들 보다도 뱀은 더욱 간교하더라”라고 말하고 있음을 주목하라. 자세히 살펴보면 그 다음 귀절들은 뱀의 간교가 너무도 교묘해서 프로이드, 메닝거, 니체, 융, 파블로프, 라이프니츠, 혹은 스피노자 같은 성경비평가들은 뱀과 논리적 추론에 있어 전혀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쩌면 뱀은 이들을 상대조차 해주지 않을 것 같다.
뱀에 해당하는 히브리 단어 “Nahash”를 해석하기 위해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보면 우리는 이 뱀은 그가 나타날 때에는 전혀 뱀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빛의 천사”로서 나타난다(고후 11:12-14). 성경에 등장하는 천사는 모두 33세의 남성이므로(마태복음 22:30 주석과 창세기 6:1-6을 보시오) 이브가 대하게 된 자는 멋진, 잘생긴 신사로 후광과 빛의 구름을 대동하고 등장했을 것이다. 이 뱀(Serpent)은 뱀(Snake)이 아니었다. 동물 중 그에게 상응하는 그 무엇이 뱀(snake)으로 나타나도록 저주를 받았을 때 이 뱀은 모든 “가축”들 위에 저주를 받았다(3:14). 어째서 “가축”(Cattle)이라고 했을까?
최대한 간략하게 그 이유를 성경으로 찾아 성경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사탄은 그룹이었다. 그룹은 송아지 혹은 황소로 정의 되어있다(겔 1, 10장).
2. 이 그룹은 다섯번째 그룹으로 파충류를 대표한다(계 4장, 겔 28장).
3. 두 뿔을 갖춘 발굽이 갈라진 짐승으로서(계 4:7, 겔 1:7) 사탄은 이집트에서는 양뿔사이에 태양을 상징하는 둥근원을 달고있는 금송아지로 대표되었고(출 32장) 따라서 “가축”(Cattle)으로 분류되었다.
4. 따라서 바알 숭배자들은 황소와 뱀을 신성한 것으로 인정한다(호 13:2; 왕상 17-19장). (더 자세한 내용은 계시록 주석 2:20절과 “Mark of Beast”란 책을 참조할 것)
창세기 3:1에 나오는 짐승은 계시록 4:7의 짐승이다. 모세가 그를 “뱀”(Serpent)이라고 부른 것은 계시록 12:9에 따르면 정확한 호칭이었다. 이 짐승은 “어머니 이브”에게 나타날때 “빛의 전달자”(Lux-fero! Lucifer)로서 나타난 것이 틀림없다.
“그가 여자에게 말하기를”
사탄이 여자에게 먼저 접근한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것은 이브는 창세기 2:16, 17의 명령을 남편으로부터 간접적으로 들었으며 그녀는 이 명령에 대한 준수의무에 있어 남자보다는 한 단계 멀리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여자는 하나님께서 직접 창조하신 것이 아니었다. 여자는 흙에서 만들어지지 않은 유일한 존재로 매우 특이한 존재였던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말씀이 제공하는 계시는 실로 무궁무진하다. 그 어떤 성경기자도 이처럼 간단한 질문이 갖고있는 영원한 의미를 짐작할 수 없었으리라. 우리는 이 말씀이 지난 600여년간 산출해낸 그 열매로 인해 이 말씀이 영감받았음을 알고 있다. 어떻게 평범한 기록자가 (혹은 뛰어난 기록자) 이러한 걸잘품을 쓸 만큼 영적세계에 대한 본질적인 진리들을 붙잡을 수 있었겠는가? 다음 사실들을 주목해 보라.
1. 성경에 등장하는 첫번째 “예” (yes)는 진리의 파괴에 모든 것을 바치게 되는 그 자에 의해 발설되었다(우리말 성경은 번역상 ‘참으로’로 번역되었음-역자주). (어떻게 해서 창세기 기록자는 인간과 역사를 대함에 있어 긍정적인 접근방법은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분별할 수 있었는가? 오늘날 주요한 작가들은 창세기 기자와 같은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2. 창세기 3장 이후 “뱀”이 무슨 말을 하려 할 때면 그는 꼭 질문으로 시작한다(욥기 1장, 마태복음 4장, 누가복음 4장). (어떻게 해서 창세기 기자(혹은 기자들)는 향후 1000년 동안 그의 뒤를 이어 성경을 기록할 사람들이 그가 채택한 방식을 택할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는가? 그당시 그는 “뱀”에 대해 완전한 계시도 갖고 있지 않았음을 염두에 둘때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3. 이후 6000여년간 이땅에 사는 그 어떤 자도 (남자, 여자, 어린아이) 그 어느지역에 살든, 그 어느 시대에 살든, 한결같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것은 거부하고 자신들의 “종교”를 의지했을때 자신들의 죽음 후의 삶에 대해서 아무런 확신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인가?(창세기 3:1에 나와 있듯이 말씀에 대한 첫번째 공격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더냐?”였다) 실로 그 어느 시대, 그 어느 인종, 그 어느 곳에 있어서든지 누구에게나 다 해당되는 문제요 영원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무슨 종교든지간에 “참으로 하나님께서 그렇다고 하셨느냐”라는 물음은 종교를 시작하기에 꼭 알맞은 질문이다. 공자도, 부처도, 사탄만큼 멋진 출발은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더냐”
이 질문은 오늘날도 여전히 “과학적 연구” “성숙을 향한 도약” “심리연구” 등으로 탈을 쓴채 진리로부터 도피할 알리바이를 구하는 자들에게 50달러씩 받고 그럴싸한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는 “Y.H.G.S. Soci- ety” 사람들을 특징짓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까지 존재해온 모든 작가, 예술가, 음악가, 시인, 과학자, 교육자 그리고 철학자들의 90%는 이 사회에서 매우 적극적 활동가이다. 이는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육신을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않고, 권력있는 자도 많지 않으며,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자도 많지 아니하기 때문이라”(고전 1:26-28). “Y.H.G.S. Society” (Yea.Has.God. Said의 첫글자를 따서 만든 용어임)에서 “아카데미상”을 받은 자들은 사탄, 이브, 카인, 님롯, 아합, 파라오, 요나, 시몬 베드로, 모세, 벨사살, 이세벨, 사울, 삼손, 시드키야, 및 코냐이며 명예훈장을 사후 추서받은 사람으로는 죠세푸스, 플리니, 필로, 오리겐, 셀루스, 포피리, 어거스틴, 교황 이노센트, 교황 그레고리, 교황 레오, 토마스 아퀴나스, 아벨라드, 안셀무스, 칼빈, 피의 메리, 아르미니우스, 볼테르, 루소, 톰 페인, 클레런스 다로우, 에머슨, 홉스, 훕, 헉슬리, 다윈, 아인슈타인, 기본, 듀이, 럿셀, 바르트, 브루너, 틸리히, 니버, 교황 요한 23세(원래의 교황 23세는 1410년에 이미 교황이었음) 등등이 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더냐?” 정말 하나님께서 빌립보서 4:13을 말씀하셨느냐? 실로 하나님게서 빌립보서 4:19도 말씀하셨느냐? 로마서 8:28을 정말로 믿을 수 있는 것이냐? 하나님께서 계시록 20:1-7에서 1000년이라는 말을 6번 말씀하셨다고 해서 그것이 정말 1000년을 의미하는 것이냐?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냐? 그 말씀은 조금 불투명하고, 애매모호하며, 상징적이지 않은가? 푸라나, 샤스트라, 바가바드 기타, 어록집 등도 영감받은 것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정말 마태복음 23장을 말씀하셨을까? “참으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일부러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필요가 있을까? 창세기 3장은 모세가 쓰지 않았는가? J문서 혹은 E문서 아닐까? “참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단 말인가?”
사탄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나 혹은 말씀하시지 않은 것, 그것 자체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사실을 의심하도록 만드는데 온갖 관심을 갖고 있다. 요한복음에서 보면(18:38) 사탄의 자식 중의 하나인 어떤 자가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물은 것이 아니고 다만 “진리가 무엇이냐?”로 말하고서는 답변도 듣지 않은 채 나가버렸던 것이다. 빌라도는 미국의 대법원처럼 모든 진리는 상대적이요 정의 문제에 있어 결정적인 요소는 정치적 편의주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만약 모든 진리가 상대적이라면,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의 재판관과 자기자신의 하나님이 되든지, 아니면 자기에게 하나님 노릇을 하게 될 종교조직에 복종하게 될 것이다. 계 13, 17장).
사탄은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인가에 관심이 없는 만큼이나 관심이 없다. 이것은 콜롬비아나 하바드 대학 교수진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이 추구하고 있는 것은 “인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모든 성공적인 방책을 얻는 것이요 모든 인간으로 인간의 비인간성을 종식시킬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과학과 연구를 총동원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들은 “진리”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사 59:14).
“너희는 동산의 모든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지 말라” 하시더냐?
이 귀절에서 여자의 본능에 호소하는 듯한 시사적 표현을 주목해 보라. “하나님께서 동산에 있는 그 어떤 것도 먹지말라 하더냐?” (오늘날 방식으로 표현해 보자면 “아니, 저런 구식 전제군주가 어디있어? 아니 이 정도 것도 먹지 말라구, 너무하다, 너무해!”) 이브는 포도를 씹기 오래 전에 벌서 사탄의 미끼를 물어 버린 것이다. 이브가 먹은 열매는 포도나무 열매였음을 잊지 말라(창 2:6-9).
3:2,3 여자가 그 뱀에게 말하기를 동산의 나무들의 열매는 먹을 수 있으나 동산 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에 관해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그것을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혹 죽을까 함이라.’ 하셨느니라.” 하더라.
드
디어 지상에서 저질러진 최초의 죄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그 죄는 중세 신학자들이 가르쳤던 것같이 “간음”이 아니었으며 보수적 전천년주의자들의 책에서 주장되는 것같이 “말씀에 더한” 행위도 아니었다. 그 죄는 분명히 말씀으로부터 삭제시켜 버린 것이었다. 이브는 창세기 2:16을 인용하면서 “마음대로”(freely)라는 단어를 생략해 버렸다. 하나님의 말씀들(Words) - (사상이 아니고, 가르침도 아니고 교리도 아니다), 주의 말씀들은(the words of the Lord) 순수한 말씀들로서 흙도가니에서 단련되어 일곱 번 정화된 은과 같다(시12:6).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날의 미국,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사람들에게는 이브와 뱀과의 대화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기껏해야 어리석은 “우화”에 불과할 것이다. 오늘날 “현대적 사고”(혹은 이교적 사고)는 자기 중심적 입장을 무너뜨릴지도 모르는 그 어떤 것도 거부하고자 한다. 그러나 창세기 3장의 이브의 짤막한 대화에 등장하는 “뭔가 못마땅하고” “불만에 찬” 피심문자의 태도가 너무도 선명히 묘사되어 있어 20세기의 심리학 텍스트 중 그 어느 것도 이 보다 더 개선된 것이 없다.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라고 이브가 말했지만 이것은 잘못된 인용이었다. 원본에는 “네가 마음대로 먹을 수 있으나”라고 되어 있다. 무슨 차이가 있는가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이 둘사이의 차이는 너무도 커서 1200페이지를 넘겨보면 성경에서 구원을 위해 초청하는 장면에서 이 마음대로(freely)라는 단어가 또 등장하는 것을 보게된다.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생명수를 값없이 마실지어다.” 이 생명수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불린다(창 2:15 -17과 그 주석참조).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나무 중에는 생명의 나무도 있었다(창 2:9, 16). 아담과 이브는 먹기만 하면 되었다. 그들이 생명나무를 먹었었더라면 창조주와 모든 피조물들과 죄없는 천진난만한 상태에서 교제하며 영원토록 살았을 것이다. “나무열매가 영원한 생명을 가져올 수 있다는 말이냐?”고 혹자는 묻겠지만 성경은 그렇다고 말한다. 에스겔 47:12과 계시록 22장에서 나무들이 “약”과 “치료”에 사용된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미국의학협회와 대학연구소 및 핵물리학자들은 생명을 만들어내고자 혹은 생명을 유지하는 물질을 만들어내려고 수없이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는가? 영생과 완전한 건강을 잃어버린 인간이 이것들을 되찾기 위해 적어도 생애의 4분의 1을 사용한다는 것이 무엇이 이상한가? 지난 500여년간 과학과 의학이 성경에서 말한대로 잃어버린 생명과 건강을 되찾으려고 애쓴 것 말고 뭐 특별한 일을 한 것이 있는가? 창세기 3장은 이 모든 것들의 뒷배경을 보여준다. 이들 열매들은 분명 “초자연적 나무”임에 틀림없다. 오늘날의 과수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능력을 갖춘 나무들이었다. 그러니까 오늘날도 이런 것을 만들려고 L.S.D.(환각제)같은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동산 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에 관해서는...”
이 나무는 지식의 나무이다. 오늘날 미국의 부모들이 그렇게도 열열히 찾아나서는 나무인 것이다. “읽는 자는 지도자가 된다”(Readers are leaders), “아는 것이 힘이다”(Knewledge is power), “계몽된 사람은 노예가 될 수 없다”(An enlighted people cannot be an ensl- aved people) 등등의 격언들이 지식의 위대성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더 현명하고 정확한 평은 밥 죤스 시니어 박사(복음증거자요 교육자)가 내린 것이다. “구원없는 교육은 저주이다”(Education without Salvation is Damnation).
교육은 현재 돈과 섹스 다음으로 미국인들에게는 제 3의 우상이 되었다. 따라서 교육자들이 성경의 다음 귀절들을 없애려고 애쓰는 것은 놀랄일이 못된다(창 3:3; 고전 1장; 사 28:9, 29:11-16; 눅10:21-22; 약 3:13 -16).
1. 지식은 당신의 머리 속에 집어넣는 것이다(고전 8:1).
2. 지혜는 지식을 머리 속에 쌓아 놓은 후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는 것이다(대하 1:10; 욥 28:28).
3. 명철(Understanding)은 지식과 지혜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아는 것이다(잠 9:10; 단 1:20).
현대의 교육제도에 있어서는 지식의 나무야말로 모두가 관심을 보이는 유일할 나무이다(지혜와 명철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는 것같다). 이와 같은 이유로 세상적 관점에서 볼때 가장 부유하고 성공한 많은 사람들은 고등학교 혹은 그 이하의 학력만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지식은 없어도 세상적인 지혜에 있어서는 뛰어난 자들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기치하에 코카사스인(백인)들은 도덕과 예언에 있어서의 진리는 제거해 버리고 진리를(요 8:32) 물리적 심리적 발견(소위 “과학”을 통해)에만 한정시켜버렸다. 오늘날의 교육자들이 “너희가 진리를 알찌니...”라고 말할 때는 실상은 “여러분이 자기확신을 포기하고(자기확신 이래야 편견에 불과하니까) 열린 마음으로 우리에게 온다면 우리는 당신의 사고방식을 바꾸어서 나머지 생애동안 죄로 시달림 당하지 않고 살게 해주겠다”는 뜻이다 (여러분 생각에는 이런 표현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생각하겠지만 여러분이 읽고 있는 책은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을 위한 주석서이지 베스트셀러나부랭이가 아님을 잊지말라).
동산 가운데 있는 나무
여기에 언급된 “동산가운데 있는 나무”는 포도나무임이 틀림없다. 요즘도 AP. UPI. INS등과 같은 유수의 통신사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위해 “이브가 먹은 열매는 사과가 아니었다”든가 “그것은 동양에서 나는 살구”였다고 센세이셜한 뉴스를 배포하고 있다. 이러한 어리석은 정보를 제공해 주는 자들은 다름아닌 유명대학 박사들인 것이다. 우리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창세기 3장에서 전혀 다른 사실을 발견하다(창 2:8-10절 주석을 보시오). 창세기 3장에서 이름으로 불리는 나무는 올리브, 무화과, 포도, 가시 및 엉겅퀴이며 이들은 재판관기 9장에 나오는 나무들과 상응된다. 또한 복음서에도 이들에 관한 언급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1. 올리브나무 : 겟세마네, 올리브 기름짜는 틀, 생명나무
2. 무화과나무 : 복음서에서 저주받음, 자신의 의를 예표함(렘 24)
3. 포도나무 : 민수기 6장에서 금지된 열매이며 포도가 예표하고 있는 피는 성경 전체에서 금지되어 있다(창 9; 레 17; 행 25장).
4. 가시나무 : 피조세계와 피조물의 속죄를 상징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 머리위에 씌여졌음(이사야 11장과 로마서 8장에서 두 가지 것이 어떻게 회복되는가를 자세히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성경에서 살펴본 결과 “생명나무”는 분명 올리브였으며, 포도나무가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겔 15장을 볼것)임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이로써 우리는 인류역사의 시작부터 발효된 음료가 “지혜를 사랑하는 자들”을 사로잡은 “잔”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들 술을 마시고 자라난 박카스신의 추종자들인 철학자들은 그 어느시대에나 하나님의 계시를 거부해 왔다. 바빌론은 계시록 17장에서 이 잔을 높이 들고 있으며 이 음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만찬”을 드시기 500여년 전에 바빌론 주화에 잔을 높이 들고 있는 모습으로 새겨져 있었다.
“너희는 그것을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혹 죽을까 함이라”
이미 말씀에서 마음대로(freely)라는 말을 삭제시켜버린 이브는 [그런데 이 행위는 율법하에서도 범죄이며(신 4:2), 은혜시대에서도 범법행위이다(계 22:19)], 여유만만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없는 말을 덧붙여 버린다. 이 행위야말로 오늘날 을 만들어 낸 자들이 취하는 태도이다. “만지지도 말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하신 적이 없다 이것은 마리아는 영원토록 처녀로 있었다가 첫번째 부활 전에 하늘로 승천하였다고 주장하는 교황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짓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완전히 무시한 행위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알아내려는 의도도 없고 다만 그 분이 결코 말씀하신 적도 없고 결코 말씀하지도 않으실 그러한 말을 그 분께서 하신 것이라고 거짓 인용하는 행위일 뿐이다. 이브는 말씀에 더하였고 반드시 죽으리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도 “혹 죽을까 함이라”로 변개시켰다. 어쩌면 그녀는 히브리어휘 사전이나 히브리어 학자들과 의논한 후에 그렇게 고쳤을 것이다(물론 당시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면 말이다). 오늘날 근대 “보수주의자”들이 하고 있는 짓과 이브가 한 짓이 어찌 그리도 정확히 똑같은지! 그녀는 “근본적인 사항들” (fundamentals)은 믿었으나 그것들을 가르쳐주는 말씀들(Words)은 믿지 않은 것이다.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은 정확한 하나님 말씀이요 “혹 죽을까 함이라”는 이 말씀을 느슨하게 풀어놓은 것이다. 이 두 말씀의 차이는 정확히 말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과 인간이 하나님께서 하시기를 원하는 말씀과의 차이이다. “반드시 죽으리라”는 절대적이고, 무오하고, 오류없는, 교리적 진리인 반면 “혹 죽을까 함이라”는 양가죽을 쓴 이리 박사님들에게나 어울리는 말로써 “기회의 법”(laws of chance)과 “통계적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브는 모든 불가지론자를 대변해서 말했던 것이다. “혹 죽을까 함이라” 여인이여 하나님 말씀에 언제 혹이란 말이 있었는가. 그대는 절대적으로 “반드시” 죽게 될 것이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