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주석 분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컨텐츠 정보
- 12,805 조회
- 목록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7년 03월호>
히브리서 7장7:1-3 『이 멜키세덱은 살렘 왕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여러 왕들을 무찌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서 그를 축복해 주었던 이라. 아브라함이 전체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드렸더니, 그의 이름을 해석하면 첫째로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화평의 왕이라.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으며, 계보도 없고, 시작한 날과 생의 끝도 없으니, 하나님의 아들과 같이 되어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멜키세덱”이라는 단어의 히브리어를 분석하면 “왕”이라는 의미를 지닌 “멜키”와 “의”라는 의미의 “세덱”으로 나뉘기 때문에, 그 이름의 뜻은 “의의 왕”이 된다. 뿐만 아니라 그가 왕으로 있었던 성읍의 이름이 “평화”를 의미하는 “살렘”이었으니, 그에게는 또한 “화평의 왕”이라는 칭호가 붙는다.
전쟁과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
이 지역은 바로 예루살렘인데, 역사의 아이러니 중 하나는 “평화의 도시”라는 이름을 지닌 살렘이 지구상의 어느
곳보다 더 많은 전쟁을 겪은 지역이라는 것이다. 다윗은 사무엘하 5:6-9에서 전쟁을 치르고 이곳을 차지하였다. 파라오 느코는 B.C. 607년에 이곳을 치러 올라왔으며, B.C. 586년에는 느부캇넷살이 이곳을 멸망시켰다. 코레스가 B.C. 536년에 이 성읍을 재건했지만, 마카비의 반란 때 이곳은 다시 찢겼으며(B.C. 70), 헤롯에 의해 재건되었지만(B.C. 30), 다시 A.D. 70년에 로마의 티투스에 의해 멸망했다.
이 도시는 다시 A.D. 100년에 하드리안에 의해 재건된다. 하지만 A.D. 637년에 로마에 의해 다시 무너지고, 1099년에는 십자군들이 회복하지만, 얼마 못 가서 1187년에 살라딘에 의해 함락된다. 그리고 1918년의 해방운동 이후로 이 도시는 아랍국가들과 이집트와 PLO 등으로 인해 계속 전쟁을 겪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이 도시가 왜 “평화”라는 이름과 연관되어 있는지 의아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이러한 궁금증은 다음 구절들을 읽을 때 곧 사라지게 된다.
『살렘에도 그의 성막이 있고, 그의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 거기서 그가 화살들과, 방패와, 칼과, 싸움을 부수셨도다. 셀라』(시 76:2,3).
『이곳에 내가 화평을 주리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학 2:9).
답은 간단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평화의 왕으로 오실 때까지 그곳에는 전쟁이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여호수아처럼(합 3:11), 또 기드온처럼(사 9:4) 예루살렘을 위해 싸우실 때까지는(슼 14:1-3) 예루살렘뿐 아니라 이 땅 어디에도 영원한 평화가 없을 것이다.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은 계속 전쟁을 겪을 것이고, 의의 왕께서 모든 전쟁을 끝내시고 그 땅을 차지하셔서 평화의 왕으로 다스리실 때에야, 비로소 그 도시는 “평화의 도시”라는 이름에 걸맞게 완전한 평화를 누릴 것이다.
예루살렘이 평화의 도시라 불리는 또 다른 이유는 모든 전쟁이 그 도시에서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천년왕국 끝의 마지막 전쟁도 그 도시에서 이루어진다. 이 도시에서 일어나는 마지막 전쟁 이후에는 어떠한 전쟁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의와 화평의 통치자 그리스도
멜키세덱은 예수 그리스도의 분명한 모형이다(창 14:18의 주석을 보라). 그의 이름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갖는데, 이 두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때의 사역과 재림 때의 사역의 성격과도 같다. 첫 번째는 “의”이고 다음으로는 “화평”인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초림 때 “의”를 이루시려고 오셨고(마 5:20; 6:33, 롬 10:1-5), 재림 때는 “화평”을 이루시려고 오실 것이다.
이 화평은 모든 철학자와 신학자들과 인본주의자들이 이루려고 노력한 것이지만 그들의 노력은 전쟁만을 가중시켰을 뿐이고, 예수님의 재림 때에야 비로소 온전한 화평이 있게 된다.
특히 이것은 하나님의 모든 원칙에서 화평보다 의가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진리를 보여 주며, 우리가 행하는 모든 사역도 화평보다 의를 먼저 전파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 평화를 외친다.
우리가 당연히 행해야 할 사역은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아 그의 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인데, 많은 사람들, 특히 교회일치 운동을 하는 후천년, 무천년주의자들은 이러한 “의의 전파”보다 오히려 “하나됨”, “형제애”, “세계 평화”, “교파간의 화합”, “교회일치” 등을 주장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보다 세상과 하나 되는 “평화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평의 왕이 되시기 이전에 먼저 의의 왕이 되셔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화평이 강조되는 “천국”을 구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의가 강조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마 6:33과 그 주석을 보라).
예루살렘도 의를 이룬 다음에야 화평을 이룰 것이다. 이 순서는 성경에서 항상 중요한 원칙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위로부터 오는 지혜는 첫째, 순수하고 그 다음은 화평하며』(약 3:17).
『의의 행위는 화평이 되며』(사 32:17). 그러므로 사람들은 평화를 사랑하기 이전에 진리를 사랑해야 한다(슼 8:19).
이방인 제사장
『이 멜키세덱은 살렘 왕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1절).
여기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는 용어는 다니엘서에서 여러 번 사용되었듯이 이방인들이 유대인의 하나님을 이방 민족들의 모든 신들보다 뛰어난, 모든 신들의 머리와 같은 신으로 인식할 때 사용한 용어이다(단 3:26; 4:17; 5:18; 7:25, 신 32:8, 행 16:17). 그러므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이방인들이 부르는 이름과 관계 되며, 이 이름은 모든 피조물의 창조주로서 민족들을 다루시는 하나님과 관계된, 전우주적인 이름이다.
멜키세덱은 이러한 점에서 이방인 제사장이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히브리서가 환란기의 유대인들을 위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책이 되는 것이다.
[히브리서에서 발견되는 “단단한 음식”은 교리적으로 교회 시대에 적용할 수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영적으로 교회 시대를 사는 성도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며,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에 관한 부분에서만큼은 교회에게 직접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경우에도 유대인들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본문에 제시되는 사건은 창세기 14장의 사건으로서, 크돌라오멜과 동맹한 왕들이 소돔과 고모라 왕과 동맹한 왕들과 싸워 이겨 롯을 사로잡아 갔을 때, 아브라함이 자기의 군사들을 이끌고 가서 그들을 치고 돌아 오던 날, 살렘 왕 멜키세덱이 아브라함을 맞이하여 빵과 포도주를 주고 아브라함을 축복한 내용이다. 이때 아브라함은 멜키세덱에게 탈취물의 십분의 일을 주었다.
[이 사건은 율법 이전에 십일조가 행해진 예이다. 어떤 사람들은 십일조가 율법 아래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교회 시대의 성도들은 십일조의 의무가 없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율법 이전에 주어진 것은 율법이 지난 이후에도 여전히 존재한다(갈 3:17). 십일조는 율법 아래서 행해지기 전에 아브라함에게서 이미 행해졌다.]
7:5-11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서 제사장 직분을 받은 자들은, 자기들의 형제인 백성들이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나왔을지라도 율법에 따라 그들에게서 십일조를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그들의 계보에 들지 않은 그는 아브라함에게서 십일조를 취하고, 그약속들을 받은 그를 축복하였느니라. 다 아는 바대로 축복이란 낮은 자가 더 나은 자로부터 받는 것이라. 또 여기서는 죽을 사람들이 십일조를 받으나, 거기서는 살아 계시다고 증거되신 분이 받는 것이로다. 말하자면, 십일조를 받는 레위까지도 아브라함 안에서 십일조를 바친 것이라. 이는 멜키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났을 때에, 레위는 아직 조상의 허리에 있었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만일 레위 계열의 제사장 직분으로 온전해질 수 있었다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음이라.) 굳이 아론의 계열에 따라 부르심을 받지 않고, 멜키세덱의 계열에 따라 다른 제사장이 일어날 필요가 있었겠느냐?』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이방인 제사장
여기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한 이방인 제사장을 제시하면서 히브리 독자들의 주의를 끌고 있다. 이것은 그들에게 충격적인 일일 것이다. 이 이방인 제사장은 선택받은 민족인 유대인의 모든 제사장보다, 심지어 아론보다 우월하다. 그가 얼마나 위대한지는 4절에서 설명되어 있다. 『심지어는 족장 아브라함까지도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드렸느니라』(4절). 물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에게 드린 것이다.
멜키세덱이 레위보다 우월한 것은 아브라함이 그에게 십일조를 드릴 때 레위는 아직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레위는 아브라함 안에서 십일조를 드린 것이고, 레위에게 십일조를 드린 모든 유대인들도 아브라함 안에서 한 이방인 제사장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이다.
또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은 백성들을 재판하거나 축복하기도 한다(민 6:22-23). 이것은 레위의 제사장들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우월함을 뜻한다. 왜냐하면 “축복이란 낮은 자가 더 나은 자로부터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7절). 그런데 이 이방인 제사장은 아브라함을 축복했다(6절). 그러므로 모든 유대인들은 자기들보다 “더 나은” 자에게 십일조를 드렸고, 바로 그 “더 나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았다.
물론 이것은 단순히 한 이방인이 모든 유대인보다 낫다는 뜻은 아니다. 이 인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기에 이것이 가능한 것이다. 8절은 『또 여기서는 죽을 사람들이 십일조를 받으나, 거기서는 살아 계시다고 증거되신 분이 받는 것이로다.』라고 말한다. 이 구절에서 “여기서는”은 죽을 레위 지파의 제사장 직분을 가리키는 말이고, “저기서는”은 멜키세덱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교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항상 제사장으로 있으신 그분은 “영원한 제사장”이신(17절)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누구에게도 적용될 수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멜키세덱이 누구냐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으나, 분명한 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확실한 예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역사적으로는 창세기 14장에 나오는 멜키세덱에 적용되는 부분이지만, 교리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되는 부분이다.
히브리서가 교회 시대의 성도들에게도 유용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따르신 제사장 계열이 이방인 멜키세덱의 계열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서에서 제시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은 유대인만을 위하지 않고 이방인들도 위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히브리서에는 환란시대의 유대인을 위한 교리가 나오지만 교회 시대의 성도들을 위한 영적 교훈과 교리적 진리까지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이방인 제사장이 누구를 축복하는지를 주목해야 한다. 그는 이
방인을 축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을 축복하였다(6절). 이 축복은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나온 씨들을 통하여 “약속의 상속자들”인 유대인에게 이어진다. 그는 유대인들을 축복한 것이고, 따라서 멜키세덱의 계열을 따른 예수 그리스도는 일차적으로 유대인들의 대제사장이시다.
7:22-28 『예수는 이처럼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그들이 실로 많은 제사장이 된 것은 죽음으로 인하여 직무를 계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나, 이분은 영원히 계시기 때문에 불변의 제사장 직분을 가지셨도다. 이러므로 그는 또한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끝까지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 그들을 위하여 중보하심이라. 그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적합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으며, 더러움이 없고 죄인들에게서 성별되시며, 하늘들보다 더 높이 되심이라. 그는 대제사장들처럼 먼저 자신의 죄들을 위하고, 그 다음에는 백성들의 죄들을 위하여 제사드리는 일을 매일 할 필요가 없으시니, 이는 그가 자신을 제물로 드림으로 단번에 이루셨음이라. 율법은 연약한 사람들을 대제사장들로 세웠으나, 율법 이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아들을 세웠으니, 이분은 영원히 드려지셨느니라.』
우리의 대제사장
본문에서 제시되는 우리의 영원하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이렇다.
1. 우리의 대제사장은 『거룩하고 악이 없으며, 더러움이 없고 죄인들에게서 성별되시며, 하늘들보다 더 높이 되심이라』(26절).
2. 우리의 대제사장은 영원히 사신다(25절).
3.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를 위해 중보하신다(25절).
4. 우리의 대제사장은 자신을 제물로 드려 단번에 속죄를 이루셨다(27절).
5. 우리의 대제사장께서 자신을 드리심은 영원하다(28절).
6. 우리의 대제사장은 연약하지 않으시다(28절). 과거에 그분은 연약한 모습으로 나타나셨지만, 이제 그분은 영원히 영화롭게 되셨으며, 더 이상 시험이나 더위나 추위나 목마름이나 외로움이나 고통이나 죽음이 그분을 괴롭힐 수 없다.
끝까지 구원하시는 그리스도
『이러므로 그는 또한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끝까지 구원하실 수 있으니』(25절)
“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구원”을 말하는 것처럼 우리의 대제사장께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시다. 그분은 그렇게 하실 수 있고, 또 그렇게 하셨다. 주님이 잃어버린 단 한 명의 예외가 있었는데(요 17:12), 그는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하지만 그는 원래 “마귀”였다(요 6:70-71).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니면서 주님이 베푸시는 많은 이적을 목격했고, 직접 이적을 행하기도 했다(마 10장). 하지만 그는 마귀였으므로 결국 제 갈 길로 갔다. 이처럼 원래 마귀였던 유다를 제외하고는 주님께서는 자신에게 나아오는 자를 결코 잃어버리지 않으셨다.
주님은 “끝까지” 잃어버리지 않으시는데, 이 말씀은 교회 시대의 성도에게는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확증해 주는 말씀이기도 하다. 물론 환란 성도에게는 구원의 영원한 보장이 없다. 하지만 그들이 그들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붙들고, 대제사장이신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기만 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그들을 낙심시키지 않으시고 끝까지 구원하실 것이다.
유대인의 구원의 대장
우리는 본 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만의 제사장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제사장도 되신다는 사실을 멜키세덱의 예를 통해서 보았다. 이것은 그분이 율법에 한정되지 않으신다는 것이며, 그분이 새롭게 제정하신 법은 율법보다 더 온전하고, 그 능력에 있어서도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방인인 우리들의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위해 중보하신다. 이 사실이 바로 교회 시대의 성도들이 히브리서를 바울서신 못지않게 사랑할 수 있는 이유이다. 하지만 절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만의 제사장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분은 먼저 유대인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고(마 1:21), 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파하셨으며, 그들이 메시야를 못박은 이후에도 여전히 그들의 회개를 촉구했다(행 2,7장).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갖는 관계와는 좀 다르지만, 유대인들도 예수 그리스도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의 왕이고, 그들은 그분의 백성이다. 그들은 침례를 받을 때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다. 대환란이라는 극심한 고난 가운데에 있을 때, 그들은 자기들을 구원해 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데, 그 도움을 주시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끝까지 견딜 수 있도록 도우실 것이다.
그들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그들을 동정할 수 있는 분이시고(4:15),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를 그들에게 주시는 분이시며(4:16), 혼의 닻 같은 그들의 소망이요(6:19), 결국은 그들의 구원의 대장으로서(2:10) 그들을 천년왕국이라는 안식의 땅으로 인도하실 분이시다(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