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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면류관을 얻은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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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7년 01월호>
▶ 사도행전 7:1-60 ◀7:1-7 『그때 대제사장이 말하기를 “이런 일들이 정녕 그런가?” 하니 스테판이 말하기를 “부형 여러분, 들으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거하기 전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 영광의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들을 노예로 부리는 그 민족을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야 그들이 나와서 이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셨느니라.』
공회와 대제사장과 맞선 스테판은 메시지를 시작한다. 청중은 4,7,8,10,34절에서는 박수갈채를 보내다가 9,25,35절에서는 침울해 한다. 그러다가 스테판이 결론(48-50절)에 도달할 즈음에 그들은 너무나 분노해서 산 채로 그의 가죽을 벗길 기세였다. 메시지를 전한 스테판에게 남은 것은 돌무더기 속의 이름 없는 무덤 하나, 그리고 생명의 면류관이었다. 그에게 돌아온 가시적인 결과는 분노와 격분과 증오와 분개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 바리새인으로 하여금 양심의 가책을 갖게 했으며(행 7:58), 후에 그 바리새인은 신약의 거의 3분의 1을 썼다.
좌석은 청중으로 가득 찼다. 스테판의 대적들은 맨 앞 자리에 앉아 숨을 죽이고 지켜보면서, 그들이 바라던 대로 스테판이 말하기를 기다린다(렘 14:13,20!!). 설교가 시작된다.
『부형 여러분, 들으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2절).
“스테판, 바로 그거야! 그런 걸 설교해야 하는 거야! 아브라함 만세! 하나님께 영광을!”(아직까지 공회는 스테판 편이다.)
6절, 14절에서 학자들은 스테판이 규칙적으로 70인역(LXX)을 인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보수주의 학자들은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에게 연설을 하고 있는 스테판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역된 헬라어 성경”으로 그들에게 설교하고 있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에는 증거가 없다. 스테판이 인용했다고 그들이 주장하는, 그리스도 이전에 있었던 칠십인역 필사본은 단 한 개도 이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다. 사도행전 7장의 인용이 오리겐 이전에 기록된 것으로 확인될 길은 전혀 없는 것이다(F.F. Bruce, Ibid., p.145 각주 3번 참고). 사도행전 7:6,14과 창세기의 그 구절들을 일치시키기 위해 인용된 칠십인역 필사본은 모두 바울 이후에 기록된 것이다. 스테판이 산헤드린을 향해 연설하기 위해 알렉산드리아의 “모조품”을 이용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7:8-17 『그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할례의 언약을 주시니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아 팔 일 만에 그에게 할례를 행하고, 또 이삭은 야곱을, 야곱은 열두 족장을 낳았느니라. 그런데 그 족장들이 요셉을 시기하여 그를 이집트에 팔았으나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하셔서 그를 모든 재난에서 구해 내시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약속의 때가 가까우니 백성이 이집트에서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졌더라.』
아직까지 스테판은 청중에게 반감을 사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그는 족장 아브라함을 칭송하고,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를 자랑하며, 이스라엘의 원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할례의 언약을 주시니... 열두 족장을』(8절).
“하나님을 찬양하라! 우리는 선택받은 백성이다! 우리는 약속의 백성이다! 주께 영광, 찬양! 우리에게는 말씀이 있다! 우리에게는 ‘조상들’이 있다! 우리 만세!”
『그런데 그 족장들이...시기하여...』(9절).
“어! 스테판, 잘 나가다가 찬물 끼얹지 말라구. ‘시기’는 강단에서 설교하기에는 적절한 주제가 아니야. 술취함? 그건 괜찮지. 간음? 좋아. 노출? 그것도 괜찮아. 미니 스커트? 좋아. 도둑질? 헤어 스타일? 좋아. 하지만 ‘시기’라구? 글쎄...”(<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잠언> 27:4 주석 참조)
즐거운 “아멘!” 소리가 갑자기 “아, 저런”으로 바뀌고 ‘심령대부흥회’로 시작한 것이 종교적인 재난이 될 위험에 처해 있다. 요셉(9절)이 ‘은’(마 27:5 참조)에 팔렸고 요셉이 이집트로 내려갔다(마 2:14,15 참조). 스테판은 비의도적으로 성경 전체에서 가장 강력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요셉을 언급한 것이다.
사도행전 7:14에 보이는 분명한 모순은 창세기 46:7 주석에서 설명한 바 있다. 15절은 창세기 49,50장에서 설명했다. 학자들은 사도행전 7:16과 창세기 23:3,10,17과 창세기 33:19 사이의 분명한 차이(수 24:32을 볼 것)를 “실수”라는 편리한 말로 처리한다. “여기서 ‘아브라함’이라는 말을 쓴 것은 명백한 실수이다...”라는 등등. 존 R. 라이스(John R. Rice)도 그런 식으로 계시록 22:14을 처리했다.
7:37-43 『‘주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한 선지자를 너희에게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한 그가 이 모세라... 우리 조상은 그에게 복종하기를 원치 않아서 그를 거부하고 오히려 그들의 마음이 이집트로 다시 돌아서서... 참으로 너희가 몰록의 장막과 너희의 신 렘판의 별을 택하여 경배하고자 모형들을 만들었으니, 내가 너희를 바빌론 너머로 옮겨 버리리라.’고 하였느니라.』
38절에 “교회”라고 한 것은 절대적으로 옳은 번역이며, 신약에서 “교회”가 어떤 의미에서 사용되었는지를 이해하게 해 준다. 여기서 (그리고 사도행전 14:27에서) “교회”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그 단어 자체가 단순히 “불러냄을 받은 집단”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어떤 집단, 심지어 프리메이슨 단원의 집단이나 요트 클럽, “그리스도의 교회”, “몰몬교회”, “로마 카톨릭 교회”도 될 수 있다. UN “모임”(Assembly)은 완벽한 예이다. 거기서 “정책”은 “교리”로 불리며, 대사들이 “사역자들”(ministers)(롬 13:1-4)로 불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엡 1:22,23)인 교회는 살아 있는 유기체이다. 그 구성원이 지역적인 모임(행 9:31; 11:22; 15:3,4, 22 등)에 속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단순한 조직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교회는 “유기체”(organism, 엡 4:13-16)인 것이다. 38절에서 언급된 구약의 “교회”는 불러냄을 받은 구약 성도의 모임이지만, 그 가운데는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함께 속해 있다(히 3:16-19). 이것은 오늘날의 지역교회 회중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은 모두가 거듭난 구성원들이며, 피의 속죄가 없이는 셋째 하늘에 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듭나지 않고서는 그 몸에 합류할 수 없다.
『...몰록의 장막과 너희의 신 렘판의 별을...』(43절).
보통 “다윗의 별”이라고 불리는 이 “렘판의 별”은 성령께서 국가적인 상징으로서 인정하지 않으신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불타는 가시덤불(출애굽기), 무화과나무(예레미야)와 올리브 나무(로마서)를 제외하고는 국가를 상징하는 어떤 형상도 받지 않았다. 브루스, 샤프, 엘리콧, 랜지, 클라크, 더멜로우, 헨리 등의 주석가들이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다윗의 별”은 부당하며 비성경적이다. 다윗에게는 별이 없었으며, 지금까지 다윗과 관련되어 나타난 유일한 별은 그의 “아들”이 태어나던 날 밤(마 1:1, 눅 2:9) 그가 태어난 마을(베들레헴)에서 빛나던 별이었다. 야곱의 “별”(민 24:17)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지 이스라엘 국가의 상징이 결코 아니다. 성경에서 “별들”은 “천사들”(계 1:20; 6:13)을 말하거나 문자 그대로 빛을 발하는 별들이다(행 27:20). 하나님께서는 신구약 어디에서도 어떤 나라에게 무엇인가를 상징하기 위해 국기에 별을 넣으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천사는 “별”이지만 ‘그의’ 이름은 미카엘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전히 팔레스타인과 UN과 해외에서 “렘판의 별”(행 7:43)을 그들의 공식적인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다.
광야에는 두 개의 성막(tabernacles)이 있었다. 하나가 아니다(민 16:24,27, 출 33:7,10,11). 출애굽기 35-39장의 성막이 “산에서 보여 준 모형에 따라” 만들어지기 전에 한 성막이 세워져 있었다. 좋은 것이 왜곡되면 나쁜 것이 될 수 있듯이(왕하 18:4의 놋뱀처럼) 이 첫 번째 성막은 열왕기상 11:7에 있는 신들의 상징이 되었다. 이 “신”(고전 8:5)은 지금까지 살았던 가장 현명한 사람에 의해 계속해서 숭배되었다(왕상 11:7). 이 “신”은 카나안의 신(Bruce, Ibid., p.155)이었다는 것과, 보수주의 번역자들이 “성막”(히브리어 ‘시쿠드’)을 번역하지 않음으로써 “너희 왕 시쿠드”가 되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보수주의자들이 무신론자들과 자유주의자에게 합세했음을 의미할 뿐이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할 때 왜 카나안인들이 숭배하던 바빌론 신에게 돌이키지 않았겠는가? 열왕기상 11:1-7에 열거된
모든 거짓 신들은 함족에게서 나왔다. 왜냐하면 바빌론의 초기 통치자들이었던 아카드, 아술, 시날은 이집트인들이나 카나안인들과 마찬가지로 함족이었기 때문이다(창 10:1-30 주석 참조).
7:44-53 『광야에서 우리 조상에게는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는 모세에게 말씀하신 분의 명령에 따라 그가 본 모형대로 만든 것이며...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분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전들에는 거하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것과 같이 ‘주가 말하노라.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내 발판이니... 이제 너희는 그 의로우신 분을 배반한 자요 살인한 자가 되었으니 너희가 천사들을 통해 지시하신 율법을 받고서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분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전에 거하지 아니하시나니...』(48절).
“스테판! 그런 말은 하지 말았어야 해!”
『이 모든 것을 나의 손으로 만들지 아니하였느냐?』(50절).
그렇다. 해, 달, 별들(시 19:1-6; 119:73; 143:5; 8:3).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개집이나 돼지우리나 병아리우리를 만들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롬 11:36). 하나님께서는 희생제를 요구하시기 전에(렘 7:22) 순종을 요구하셨다(삼상 15:22). 이스라엘이 변덕스런 생각과 반역하는 마음과 목이 곧은 태도로(51절) “짐승을 잡아서 희생제물로 바치는 것”(42절)은 결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했다. 그러한 태도로 바친 수소나 숫양(사 1:11-16)은 “일천 산 위의 목축들”(시 50:10)처럼 하나님께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제 스테판은 설교를 마치려한다. 산헤드린의 화난 얼굴들이 이 설교자를 쏘아본다. 그리고 추수감사절 오후의 칠면조 농장 같은 침묵이 장내를 엄습한다.
『너희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너희도 늘 성령을 거역하는도다』(51절).
주 예수 그리스도(마 23:33)께서 스테판의 뒤에 서서 그를 격려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들릴 것만 같다. “그렇게 하는 거야. 스테판, 맹렬하게 퍼 부으라구! 있는 그대로 그들에게 말해!”
『...박해...죽였고... 배반한 자요...살인한 자...율법...지키지 아니하였도다』(52,53).
스테판은 A.D. 34년의 산헤드린을 B.C. 800-100년의 서기관들과 연결시켰으며(마 23:23-36을 볼 것), 그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을 불순종하고 율법을 어기는 살인자들의 무리라고 비난했다. 하나님을 향한 그의 열심으로 그는 가장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자가 되었으며, 종교적 위선자들에게 소리높여 고함을 지르고 부정적으로 말함으로써 “상냥한 그리스도의 영”을 완전히 상실했다. 자유주의자들이나 근본주의자들은 스테판을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으로 생각할 수가 없을 것이다!
스테판의 설교는 끝났다. 순간 장내는 평정을 잃게 된다.
7:54-60 『그들이 이런 말을 듣고 격분하여 그를 향해 이를 갈더라. 그러나 그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늘을 주시하더니,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기를 “보라, 하늘들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하니...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는 이 말을 하고 잠
드니라.』
첫 번째 순교자인 스테판의 이름은 “면류관”(헬라어 ‘스테파노스’)을 의미하며, 그는 생명의 면류관(계 2:10)을 얻게 된다.
스테판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신 것”(55절)을 보았다.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오순절에 설교할 때는 앉아 계셨으며(행 2:34), 지금도 앉아 계신다(히 8:1).
무엇 때문에 스테판의 메시지가 끝났을 때 그가 일어나셨을까?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스테판의 혼을 받으시기 위해 일어나신 것이 아니었다.
재림 때까지는 일어나지 않으실(마 26:64) “인자”(56절)께서 왜 일어나셨는가? 초림 때 즉 마태복음 3:16에서 하늘들이 열렸고, 재림과 연관해서 계시록 4:1-3과 계시록 9:11에서 하늘들이 열리는데, 여기서 하늘들이 열린 이유는 무엇인가? 이 사건 후 즉시로 이방인들에게로 복음이 전파되는 것은(행 8:1)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사도들이 그들의 “사도들의 표적과 이적”을 여전히 가지고(행 5:12 참조)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장면 이후로 예루살렘에서 단 한 번의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재림이 예비되는 상황을 목격한다. 만일 이스라엘이 국가적으로 회개하고(행 3:19) 스테판의 설교를 받아들였다면 다니엘의 “70째 주”가 도래했을 것이다. 신명기 21:1-9가 일어났을 것이며 휴거가 일어나고(시 50:4, 솔 2:10, 사 26:19) 유다가 구렁에서 나오고(행 1:25과 그 주석 참조) 로마와 이스라엘 사이에 언약이 체결되었을 것이다(단 9:27; 11:27,30).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계시하시기를 원하시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감추어진 신비로 남게 되었을 것이다. 그 몸은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몸이라는 사실은 사도행전 2:10, 6:1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
스테판은 “큰 바빌론”을 취하게 만들 기나긴 순교자들의 피의 목록에서 첫 번째 자리를 차지했다(계 17:6). 곧이어 야고보가 그의 뒤를 따르고(행 12장) 여러 해 지나지 않아 바울이 그 뒤를 따른다. A.D. 100-313년 사이에 일어났던 열 번의 박해 때 스테판과 같은 증인들은 원형경기장에서 도살당했고, 지하 감옥에서 굶어 죽었으며,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고, 빙원에서 얼어 죽었으며, 산 채로 불에 탔고, 고문대에 엎드려서 못과 갈고리에 박혔으며,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지고, 야수들의 밥이 되었다.
『주 예수여, 나의 영을 받아 주소서』(59절).
성령충만했던 위대한 스테판조차도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는 못했다는 사실에 주목하기 바란다. 그의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벧전 2:21) 스테판은 선으로 악을 극복하기는 한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60절) 그러나 이 기도는 자기 보존의 기도인 “주 예수여, 나의 영을 받아 주소서.” 다음에 왔다. 하지만 주님은 원수들을 위해 먼저 기도하셨고(“아버지시여,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 눅 23:34), 그 다음에 자신을 위해 기도하셨다(“아버지시여, 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의탁하나이다”, 눅 23:46).
4피트 높이의 돌 무더기에 파묻혀 그는 사라져간다. 15-20분 동안 뼈가 부러지고 살이 찢기는 일제사격을 참아 내면서...이 “소일거리”에 사용된 돌들은 골프공만한 크기에서부터 배구공 크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수 7:25).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죽음인지는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바울이나(행 14:19) 예수님을(요 8:59) 그런 식으로 죽일 수 있는 그들이었다면, 스테판을 그렇게 죽이는 것 역시 그들에게는 아무 문제도 아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