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영원히 보존하신 말씀 분류

어리석은 자들의 “바늘귀 문과 밧줄”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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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6년 10월호>

『자녀들아, 재물을 신뢰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냐!』(막 10:24)라는 말씀에서 『재물을 신뢰하는 자들이』를 삭제해 버린 학자들은, 이어지는 구절에 담긴 예수님의 “과장법”과 “풍자”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이들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쉬우니라.”고 하시니』(막 10:25)라는 말씀의 “바늘귀”를 “바늘귀 문”으로 오해하거나, “낙타”를 “밧줄”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참고로 “바늘귀”에서 “귀”는 바늘 윗부분에 실을 꿰도록 뚫어 놓은 구멍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지 않는 학자들이 “낙타가 어떻게 그 작은 바늘귀로 들어갈 수 있는가!”라며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그러고는 여기서 말하는 “바늘귀”가 문자 그대로의 “바늘구멍”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벽”에 있는 “작은 문”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즉, 야간에 정문이 닫혔을 때 짐을 실은 상인들이 드나들던 “작은 문”이며, 그 크기가 “나귀 한 마리”가 겨우 들어갈 정도라는 “자의적인 해석”을 늘어놓는 것이다. 만일 그들의 해석이 옳다면 “불가능”을 의도하셨던 예수님의 과장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낙타’가 어떻게든 통과할 수 있다”는 식의 궤변이 성립되고 만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벽”이나 “이스라엘 땅” 어디에서도 “바늘귀 문” 같은 문은 고고학적으로도 발견된 적이 없다. 만약 그런 “문”이 실제로 존재했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제자들이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막 10:26)라며 몹시 놀랄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상인들이 낙타를 이끌고 그 “작은 문”을 드나드는 모습은 당대에 꽤 흔한 일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학자들의 주장대로라면,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하나』(막 10:27)라며 인간의 한계를 선언하신 예수님의 말씀조차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된다. 분명 낙타는 “바늘귀”를 통과할 수 없다! 그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이 가능해지려면 오직 “기적”이 필요할 뿐이며, 그러한 기적은 인간의 힘으로는 완전히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하나 하나님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이는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함이라』(막 10:27).

“낙타”가 문자 그대로의 “바늘귀”를 통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그 낙타를 “바늘귀”보다 더 작은 크기로 줄이시는 길뿐이다. 우리는 그것을 기적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재물을 신뢰』(막 10:24)하는 『큰 부자』(눅 18:23)인 “젊은”(마 19:22) 『관원』(눅 18:18)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 역시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뿐이다. 그 기적이란, 하나님께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새로운 출생”(거듭남)을 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가 재물을 신뢰하는 것을 멈추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신뢰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마음속에 이 위대한 “새로운 출생의 기적”을 일으키신다. “성경을 믿지 않는 학자들”처럼 “머리”가 너무 크면 “쓰레기 같은 지식”이 더 많이 들어 있게 된다. 만일 예수님께서 “낙타가 결코 할 수 없는 일”(“바늘귀 통과”)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낙타가 어떻게든 지나갈 수 있는 문”(“바늘귀 문”)을 언급하신 것이라면, 결국 인간이 스스로 구원할 수 있다는 “인본주의적인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한 번 “왜곡하기” 시작하면, 그 해석은 더욱 꼬이고 복잡해져 진리의 말씀을 통째로 무너뜨리는 법이다.

한편 어떤 학자들은 “낙타”가 아니라 “밧줄”이 옳다고 주장한다. 이들 역시 성경 말씀을 『사실 그대로[as it is in truth]』(살전 2:13), 곧 있는 그대로 믿지 않는 자들이기에, “어떻게 낙타가 그토록 작은 바늘귀를 통과할 수 있겠느냐”라는 “인간의 이성적인 한계”에 갇혀 있고, 또 “밧줄”의 경우는 가닥가닥 풀어헤치면 바늘귀에 꿸 수도 있다는 식의 “인간적인 가능성”을 억지로 열어두려 한다. 특히, “헬라어”로 “낙타”(camel)를 의미하는 “카멜로스”(κάμηλος)와 “선박용 밧줄”(mooring rope)을 뜻하는 “카밀로스”(κάμιλος)의 철자가 유사하다는 점을 노려, 고대 필사 과정에서 “오역”이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원본”을 제외하고는 어떤 필사본이나 번역본도 완벽할 수 없다면서, 현재 우리에게 전수된 성경 중에는 “온전히 보존된 성경”이 없다는 망언까지 서슴지 않는다. 그런 자들은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으면서도, 자기 자신이 다음과 같은 말씀을 기록하신 주 하나님보다 똑똑하다는 착각 속에 빠져 산다.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라. 흙 도가니에서 단련되어 일곱 번 정화된 은 같도다. 오 주여, 주께서 이 말씀들을 간수하시리니 주께서 이 세대로부터 영원토록 그것들을 보존하시리이다』(시 12:6,7).

5세기에 “알렉산드리아”의 교부로 활동했던 “시릴”(Cyril, 376-444)은 “마태복음 주석 단편”(Fragments on Matthew, Fragment 219)에서, “낙타(κάμηλος)는 짐을 싣는 동물이 아니라 선원들이 닻을 묶을 때 사용하는 굵은 밧줄(κάμιλος)을 의미한다.”라고 명시함으로써 “낙타”를 “철자 오류”라고 주장하는 자들의 궤변을 정당화시키는 빌미를 제공했고, 특히 11세기 “동로마(비잔틴) 제국”의 “오흐리드”의 대주교였던 “테오필락트”(Theophylact, 1055-1107) 등과 같은 후대 학자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했다. 결국 이러한 가증스러운 누룩에 영향을 받은 자들은 소위 “본문의 난해함을 해소한다는 명분” 아래 성경을 변개시키기 시작했다. 그 결과 5세기 이후의 극소수 “헬라어 필사본들”(9세기 이후의 후기 “소문자 필사본” 일부)과 일부 “라틴어 번역본”에서는 “낙타”가 아닌, “밧줄”로 변개된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계열”이 아닌 “시리아 계열”로서, “하나님의 말씀들”을 올바르게 보존한 “압도적인 수”의 “다수 필사본”과 “성구집”(Lectionaries)은 모두 “낙타”(κάμηλος)로 기록되어 있다. 당대 최고의 설교자였던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347-407)을 위시한 대다수의 교부들도 “낙타”를 지칭하면서 이를 “예수님의 과장법”으로 설명했다. 바르게 보존된 <구라틴역본>과 <구시리아역본> 역시 각각 “낙타”를 의미하는 단어인 “camelum”(혹은 “camelus”)과 “gamla”로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유대교의 구전 율법서인 “탈무드”에도 완전히 불가능한 상황을 비유할 때 “코끼리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라는 표현이 종종 등장한다. 당시 “중동 지역”에서는 그 지역에서 가장 큰 동물인 “낙타” 또는 “코끼리”를 가장 작은 구멍인 “바늘귀”에 집어넣는 식의 과장된 비유가 널리 쓰이던 “관용구”였던 것이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사람들의 뇌리 속에 잘 기억될 수 있도록 “과장법”을 사용하신 것인데,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막 12:24) 몰라서 『크게 오해』(막 12:27)한 자들은 제멋대로 성경을 변개시켜 버렸다. 그렇다면 동일하게 “과장법”이 사용된 다음과 같은 말씀은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너희 눈먼 안내자들아, 너희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구나』(마 23:24). 보존된 성경에 대한 “쓸데없는 시비”는 이쯤에서 그만두는 것이 어떻겠는가!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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