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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이스라엘의 수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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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4년 10월호>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물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아마 “촛대”일 것이다. 그리고 “촛대” 하면 생각나는 이스라엘의 명절이 바로 “빛의 축제”라는 이명으로도 잘 알려진 “하누카”이다. 하누카는 유대력으로 키슬루월(느 1:1 참조) 제25일로부터 8일간 치러지는데,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으로는 보통 12월에 오며, 때로는 “크리스마스”와 겹치기도 한다. 2024년에는 공교롭게도 “크리스마스” 저녁부터 하누카 기간이 시작된다.하누카는 수전절이라는 이름으로 성경에 등장하기는 하지만(요 10:22),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명절은 아니다. 하누카는 성경이 침묵을 지키는 “신구약 중간기”라고 불리는 기간에 있었던 역사에 그 기원을 두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누카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때의 역사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구약성경은 에스라-느헤미야 시대 때 페르시아 땅으로부터 귀환한 유대인들이 성전과 성벽을 세웠던 일을 끝으로 당대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멈춘다. 그 뒤로는 선지자 말라키를 제외하고 계시를 받아 성경을 기록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라키를 읽어 보면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다. 『보라, 내가 너희의 씨를 썩게 하고 너희 얼굴에는 똥, 곧 너희 엄숙한 명절의 똥을 바르리니, 사람이 너희를 그 똥과 함께 치워 버리리라』(말 2:3). 에스라-느헤미야 시대의 위대한 부흥은 얼마 가지 못해 배교로 끝나고 말았고, 그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계시를 닫아 버리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잃어버린 유대인들은 주변 패권국들에게 시달리는 약소민족 공동체에 불과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시리아의 셀레우쿠스 왕조가 그 땅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던 시절에는 정통파 유대인들의 삶이 매우 어려워졌는데, 이전에 그 땅을 점령했던 이집트와 달리 유대교에 대해 강경한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었다. 셀레우쿠스 왕조의 “에피파네스,” 곧 “신의 현현”으로 자처했던 안티오쿠스 4세가 B.C. 167년에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불결한 짐승인 돼지의 피를 뿌렸으며, 유대인들에게 제우스 숭배를 강요했다는 유명한 이야기도 바로 이때의 일이다. 이 일을 계기로 그간 쌓여 있던 유대인들의 분노는 폭발하고 말았다. 이로써 제사장 가문의 일원이었던 마타티아스가 제우스에게 경배하라고 강요하는 군인들과 그 우상 숭배에 참여한 유대인을 죽이고 달아나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그의 사후 “마카비 형제”라고 불리는 그의 다섯 아들들이 반란을 주도했고, 삼 년간의 사투 끝에 그들은 성전을 탈환했다. 외경인 마카베오서에 따르면 (그 내용을 모두 믿을 수는 없지만) 반란에 성공한 그들이 본 광경은 불타 부서진 성전 문, 잡초가 자란 뜰, 다 무너진 제사장들의 방, 더럽혀진 제단 등이었다. 충격을 받은 그들은 옷을 찢고 머리에 재를 쓰고 통곡한 뒤 성전을 정화하여 하나님께 다시 봉헌했다고 한다. “하누카”라는 단어 자체도 “봉헌”(dedica- tion)이라는 뜻이다.
탈무드에 따르면 유대인들이 성전을 정화하려고 했을 때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헬라인들이 성전에 들어가 그곳의 모든 기름을 더럽혔기에, 하스모니안 왕조[마카비 일가를 뜻함]가 그들을 이기고 무찔렀을 때 대제사장의 인장으로 봉해진 기름병을 하나밖에는 찾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 안에는 하루 동안 불을 밝힐 정도의 양만 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 기름병에 기적이 일어났고, 그 안의 기름으로 팔 일 동안이나 불을 밝힐 수 있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을 덧붙이자면 이렇다. 촛대에 불을 밝힐 때 사용해야 하는 기름은 순수한 올리브 기름이어야 했다(레 24:2).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혹 불경한 손길이 기름을 더럽히지 못하도록 그 입구를 인장으로 봉해 두어 안전장치를 마련해 두는 관습이 있었다. 그 인장이 훼손되었다면 누군가가 기름에 손을 댄 것이므로 쓰지 않을 요량으로 말이다. 미국 CBS의 뉴스 8에 출연한 예루켐 아일포트(Yeruchem Eilfort)라는 랍비는 시리아군이 일부러 기름병의 인장을 훼손시켜 두었던 데에는 율법의 비합리성을 조롱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고 설명했다. 조금만 융통성을 발휘하면 쉽게 해결될 문제를 가지고 엄격한 율법에 매여 끙끙거리는 유대인들을 아니꼽게 여겨 그런 짓을 저질렀던 것이다.
결국 유대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새 올리브 기름을 만들어 성전으로 가져오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예루살렘에서 올리브 기름이 생산되고 있지 않았고, 물류 체계도 잘 갖추어져 있지 않은지라 8일이라는 긴 시간이 걸리고 말았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나 촛대의 불이 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유대인들은 “8일”이라는 기간 동안 촛불을 켜며 하누카를 기념한다. 이 기간에 빛나는 촛불은 이방 종교와 동화되지 않고 율법의 성별을 지켜낸 유대인들의 자부심과도 같은 것이다.
하누카에 사용되는 촛대는 “하누카 메노라” 또는 “하누키아”라고 하는데, 자세히 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메노라”와는 차이가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메노라”라고 부르는 촛대는 중앙의 한 줄기를 기점으로 양쪽에 가지가 세 개씩 나와 총 일곱 개의 가지를 가지고 있지만(출 25:31-37), “하누카 메노라”의 가지는 아홉 개이기 때문이다. 가지가 아홉 개인 이유는 하누카의 기간과 관련이 있다.
아홉 개의 가지 가운데 특별히 한 개의 가지에(중앙에 있거나 따로 떨어져 있다) 놓이는 초를 “샤마쉬”라고 부르는데, “도우미” 또는 “종”이라는 뜻으로 이 초는 하누카 초로서 셈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샤마쉬”는 다른 여덟 개의 가지에 놓이는 초에 불을 붙이는 용도로 사용되는 초이기 때문이다. 하누카 기간이 시작되는 날, 유대인들은 “샤마쉬”를 이용하여 하누카 초 한 개에 불을 옮겨 붙인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하나씩 늘려 가서 마지막 여덟째 날에는 모든 가지에 불을 밝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샤마쉬에 문제가 생긴다면 어떻게 될까? 다른 초로 불을 옮겨 붙여도 되는 것일까? 탈무드에는 이 문제에 대해 “라브”와 “슈무엘”이라는 두 위대한 랍비가 의견을 달리하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라브는 한 촛대에서 다른 촛대로 불을 옮겨 붙이는 것을 반대했는데, 그 과정에서 기름이나 왁스가 일부 유실됨에 따라 촛대의 불빛이 줄어든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에 반해 슈무엘은 이를 허용했다. 랍비 조나단 색스는 후자의 의견이 옳다면서, 자신의 기준이 낮아지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토라(율법)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을 도우려 하지 않는 모습이 바로 라브의 의견이라고 했다. 그러나 토라의 빛이란 슈무엘의 의견처럼 나눈다 해도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더 커지는 것이라며 유대교에서 슈무엘의 의견을 채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하누카의 촛불을 통해 토라의 빛을 세상에 발산한다는 그들의 말마따나, 이스라엘은 이방 민족들과는 달리 공의로운 규례들과 명령들을 가진 위대한 민족으로서 방탕과 음란에 빠져 있는 이방 세계를 향해 빛을 비추어야 할 민족이었다(신 4:6-8).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마카비 형제의 반란으로 세워진 하스모니안 왕조 또한 얼마 가지 못하고 쇠락의 길을 걸었는데도, 유대인들은 애써 그 점을 무시하고 승리만을 기억하려는 듯하다.
위의 문제에 관한 진실은 이렇다. 마카비 혁명 당시의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데서 멀어져 장로들의 전통을 따른 “유대교”라는 것을 형성하고 있었다. 게다가 성전을 탈환한 지 약 30년쯤 지나 B.C. 135년경이 되었을 때는 급격히 밀려드는 헬레니즘에 타협해 버린 고위층 제사장 가문을 중심으로 부활도, 천사도, 영도 없다고 하는 사두개파가 형성되었다. 하나님께서 그런 그들을 도와주셔야 할 이유가 있었겠는가? 이런 까닭에 하스모니안 왕국은 그로부터 약 70년이 흐른 뒤에는 로마 제국의 속국으로, 이후에는 속주로 전락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유대인들은 이방인인 카이사를 왕으로 모시고 있었으면서도 수치를 모르는 지경이었다(요 8:33). 타국인을 왕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율법의 말씀조차 그들에게서는 까맣게 잊혔던 것이다(신 17:14,15). 그렇게 율법을 잊었으면서도 종교적 자부심과 형식을 지키는 데만큼은 끔찍했던(마 15:1-9) 유대인들이 수전절에 하려고 했던 일이 무엇이었는지 아는가? 바로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딤전 3:16)께서 신성모독(?)을 저질렀다며 그분을 돌로 치려는 것이었다(요 10:31-33).
그와 같은 모습에서 우리는 경각심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로 실행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면서도 그 말씀을 소유했고 그에 맞는 형식을 갖추고 있다는 이유로 우쭐했다가는, 유대인들처럼 “참 빛”을 거부했으면서도(요 1:9-11) 촛불을 켜 놓고 좋아라하는 꼴이 되어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말로가 “이카봇,” 즉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 버리는 것으로 귀결되리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삼상 4:3-22).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