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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말씀보존학회 - 한글킹제임스성경 및 진리의 지식을 전파합니다 &amp;gt; 바이블마스터 &amp;gt; 지식뱅크 - 이스라엘과 이슬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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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테스트 버전 0.2 (2004-04-26)</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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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현대 이스라엘의 푸림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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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수전절 외에도 하나님께서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 제정하신 명절이 아님에도 성경에 소개되고 있는 유대인들의 명절이 있는데, 바로 에스더서에 나오는 “푸림절”이다. 푸림절이 되면 유대인들은 기본적으로 “축제 분위기”가 된다. 유대인들은 어린 시절부터 술에 취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교육을 받는다지만, 이날만큼은 그렇지가 않다. &lt;탈무드&gt;에는 “푸림절에는 ‘모르드캐는 축복받았다.’라는 말과 ‘하만은 저주받았다.’라는 말을 구분할 수 없을 때까지 술에 취해야 할 의무가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br/><br/>가면을 쓰거나 화려한 의상을 입고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장을 한 아이들은 푸림절의 분위기를 더한다. 이날 자신을 “숨기는” 풍습이 있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에스더서의 “무대 뒤”에서 역사하셨기 때문이다. 에스더서에는 “주”나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지만, 와스티의 폐위, 에스더의 간택, 역모를 저지한 모르드캐의 공, 그 공에 대해 상을 주는 일의 누락, 잠 못 이루던 아하수에로가 모르드캐의 공을 재조명한 일 등, 그 모든 일련의 사건들이 하나님의 섬세한 계획 속에 있었음을 우리는 안다. “에스더”라는 이름 자체도 “숨기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히브리어 “사타르”로부터 왔거니와,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 뒤에 숨어서 섭리적으로 역사하셨던 것이다.<br/><br/>에스더서의 사건을 기념하여, 하만이 유대인들을 죽일 날을 정하려고 제비(“풀, Pur”)를 뽑았던 데서(에 9:24,26) 비롯된 “푸림절”(제비의 명절)은 유대력의 마지막 달인 아달 월의 14일과 15일에 온다.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으론 2월이나 3월에 해당한다. 에스더서에 따른다면 현재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14일에 푸림절을 지키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에스더서에 보면 (지금은 이란 땅인) 수산에 있던 유대인만 15일을 축제날로 삼았고, 성벽이 없는 나머지 고을들의 유대인들은 14일을 축제날로 삼았기 때문이다.<br/><br/>그러나 후일 이스라엘의 선생들이 “여호수아의 카나안 정복 때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던 성읍들에서는 아달 월 15일에 푸림절을 지키는” 규칙을 추가로 정하면서 문제가 복잡해졌다. 과연 내가 살고 있는 성읍이 여호수아의 때에 성벽으로 둘러싸였었는지를 규명해야 하는데, 이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랍비인 나프탈리 실버버그(Naftali Sil- berberg)는 “우리가 오늘날 여호수아 시대에 성벽이 있었던 것으로 확신할 수 있는 성읍은 예루살렘밖에 없다.”라고 설명한다(수 15:63과 삼하 5:6,7을 참조하면 예루살렘이 여호수아의 정복전쟁 때에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는 주장 자체는 매우 신빙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는 자신 있게 15일을 푸림절로 지키지만, 티베랴나 욥파와 같은 “확신이 없는” 곳에서는 푸림절을 이틀에 걸쳐서 지킨다고 한다.<br/><br/>유대교는 푸림절에 네 개의 특별한 “미쯔바”(계명)를 행하라고 가르친다. 그중 첫 번째는 “메길라”를 듣는 것이다. “메길라”는 히브리어로 “두루마리”를 뜻하는데, 당연히 이날 들어야 하는 “메길라”는 에스더서를 가리킨다. 회당에 모인 유대인들은 메길라를 푸림절이 시작된 날 저녁과 다음 날(유대인 시간 개념으로는 여전히 같은 날) 낮에 한 번씩 읽는다. 그러다가 하만의 이름이 나오면 유대인들, 특히 아이들은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장난감 “라아샨”을 흔들든 발을 구르든 해서 그 사악한 이름을 뿌리 뽑는다. “하만의 이름이 나무에도 돌에도 남지 않게 하라.”라는 조상들의 전언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한다.<br/><br/>푸림절에 행해야 할 두 번째 미쯔바는 “마타놋 라에뵤님”이라고 불리는 자선 행위이다. 이는 가진 것이 없어서 푸림절이 왔음에도 풍성한 식탁을 마련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돈을 기부하는 것으로, &lt;탈무드&gt;는 “푸림절에는 서로 다른 두 사람에게 마타놋 라에뵤님을 주라.”라고 규정하고 있다. 권위를 인정받는 옛 랍비 하페츠 하임(Chafetz Chaim)은 “한 사람당 적어도 두 끼를 먹을 수 있을 만큼의 양을 주어야 한다.”라며 거들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한 사람 앞에 10-20달러, 혹은 그 이상씩을 기부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생활이 궁핍한 사람들이나 아이들이라고 해도 “마타놋 라에뵤님”에는 예외가 없다. 비록 양이 적을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br/><br/>세 번째 미쯔바는 “미슐로아흐 마노트”인데, 이것은 에스더 9:19의 “분깃들을 보냈다”라는 부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 그대로이다. 유대교에서는 푸림절의 해가 떠 있는 시간 동안에 적어도 두 종류의 먹을 것을 친구(들)에게 포장해서 보내라고 가르치는데, 통상 직접 친구에게 포장된 음식을 주지 않고 아이들이나 그 외의 제삼자를 메신저로 삼아 보낸다. 이는 “보내다”라는 표현으로부터 기인하는데, “주다”라고 되어 있지 않고 “보내다”라고 되어 있으므로 메신저를 사용하여 보내는 것이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더 바람직하다는 게 랍비들의 설명이다. 이렇게 “미슐로아흐 마노트”를 실행함에 있어서도 예외란 허용되지 않는다. 랍비 엘리제 웽거(Eliezer Wenger)는 “푸림절 동안에 아파서 병원에 있는 사람이라 해도 이 미쯔바를 완수해야 한다. 설령 다른 유대인 환자와 음식을 교환하는 정도에 그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라고 설명한다.<br/><br/>마지막 네 번째 미쯔바는 “수다트 푸림”인데, 가족들이 모여서 고기, 빵, 포도주 등으로 차려진 저녁을 먹는 것이다. 이때에는 한두 명 정도의 손님도 초대할 수 있다. 이 저녁 식사 후에 기도문을 외울 때는 반드시 “알 하니심”(기적에 대하여)이라는 말을 넣어야 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푸림절과 관련하여 베푸셨던 기적을 유대인들이 기억하도록 하려는 장치이다. 또한 식사 자리에서는 푸림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며, 반드시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노래로 불러야 한다.<br/><br/>위와 같이 유대인들은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많은 전통을 지키면서 즐거운 푸림절을 보낸다. 그러나 조상들의 말은 그와 같이 절대적으로 여기면서도, 정작 에스더서의 역사성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대부분 에스더서의 역사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다른 세속 역사의 기록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가령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본명이 “크세르크세스”인 에스더서의 아탁세르세스는 유대인 “에스더”가 아니라 페르시아 장군의 딸인 “아마스트리스”라는 아내를 뒀다는 둥, 페르시아 제국 내에서 한 민족 전체를 말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는 것은 다른 역사 기록들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그 개연성도 떨어진다는 둥 하는 것이다.<br/><br/>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처하면서도 그와 같은 학자들의 견해에 맞서지 않는다. 사무엘 샌드멜(Samuel Sandmel)이라는 랍비는 성경의 에스더서가 “있을 법하지 않은” 세부적 요소를 담고 있는 “허구적 작품”이라고 평했으며, 랍비들이 참여하여 작성된 &lt;유대교 백과사전&gt;의 “에스더”에 대한 설명에는 “모든 증거를 놓고 봤을 때, 에스더서의 역사적 기록으로서의 권위는 분명하게 부정되어야만 한다.”라고 되어 있다. 대부분의 랍비들은 에스더서로부터 영적 교훈만을 강조할 뿐 그 역사성에 대해서는 얼버무린다.<br/><br/>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선생, 가말리엘 아래서 수학했던 한 유대인의 말을 들어 보고 가도록 하자. 『실로, 하나님은 참되시나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라』(롬 3:4). 그리스의 역사가들이 적국이었던 메데-페르시아 역사에 관해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해대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예를 들어 실제 역사에서는 페르시아의 코레스 대왕이 메디아 왕이었던 아스티아게스와 전투를 벌여 그를 포로로 잡고 권력을 찬탈하지만, 그리스의 역사가 크세노폰에 따르면 아스티아게스는 평화롭게 침상에 누워 잠들고 후일 코레스가 왕이 된다. 사정이 이와 같을진대, “상식적인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라면 어떤 세속적 기록과 성경의 기록이 배치될 때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가 명확해지지 않았는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다른 말을 하는 그 기록이 틀린 것이다!<br/><br/>&lt;탈무드&gt;와 랍비들을 추종하는 유대인들은 상식적인 믿음조차 잃어버리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구약성경에 기록된 다음의 말씀을 잊었기 때문이다. 『백성이 자기들의 하나님께 구해야 되지 않겠느냐?... 율법과 증거에게라. 만일 그들이 이 말씀에 따라 말하지 아니하면 이는 그들 안에 빛이 없기 때문이라』(사 8:19,20). <br/><br/>다시 말해,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교리적 문제는 물론 도덕적, 역사적, 과학적 문제에 있어서도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으니, 이것이 옳소!”라고 주장함이 마땅하다. 이 중요한 진리를 잊고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면, 반드시 “종교인”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에게 다가오고, 또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들의 계명들을 교리들로 가르치니, 그들이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라고 하였느니라.”고 하시더라』(마 15:8,9).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7 Mar 2025 10:23:40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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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현대 이스라엘의 수전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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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물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아마 “촛대”일 것이다. 그리고 “촛대” 하면 생각나는 이스라엘의 명절이 바로 “빛의 축제”라는 이명으로도 잘 알려진 “하누카”이다. 하누카는 유대력으로 키슬루월(느 1:1 참조) 제25일로부터 8일간 치러지는데,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으로는 보통 12월에 오며, 때로는 “크리스마스”와 겹치기도 한다. 2024년에는 공교롭게도 “크리스마스” 저녁부터 하누카 기간이 시작된다.<br/><br/>하누카는 수전절이라는 이름으로 성경에 등장하기는 하지만(요 10:22),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명절은 아니다. 하누카는 성경이 침묵을 지키는 “신구약 중간기”라고 불리는 기간에 있었던 역사에 그 기원을 두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누카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때의 역사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br/><br/>구약성경은 에스라-느헤미야 시대 때 페르시아 땅으로부터 귀환한 유대인들이 성전과 성벽을 세웠던 일을 끝으로 당대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멈춘다. 그 뒤로는 선지자 말라키를 제외하고 계시를 받아 성경을 기록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라키를 읽어 보면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다. 『보라, 내가 너희의 씨를 썩게 하고 너희 얼굴에는 똥, 곧 너희 엄숙한 명절의 똥을 바르리니, 사람이 너희를 그 똥과 함께 치워 버리리라』(말 2:3). 에스라-느헤미야 시대의 위대한 부흥은 얼마 가지 못해 배교로 끝나고 말았고, 그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계시를 닫아 버리셨던 것이다.<br/><br/>하나님의 도우심을 잃어버린 유대인들은 주변 패권국들에게 시달리는 약소민족 공동체에 불과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시리아의 셀레우쿠스 왕조가 그 땅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던 시절에는 정통파 유대인들의 삶이 매우 어려워졌는데, 이전에 그 땅을 점령했던 이집트와 달리 유대교에 대해 강경한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었다. 셀레우쿠스 왕조의 “에피파네스,” 곧 “신의 현현”으로 자처했던 안티오쿠스 4세가 B.C. 167년에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불결한 짐승인 돼지의 피를 뿌렸으며, 유대인들에게 제우스 숭배를 강요했다는 유명한 이야기도 바로 이때의 일이다. 이 일을 계기로 그간 쌓여 있던 유대인들의 분노는 폭발하고 말았다. 이로써 제사장 가문의 일원이었던 마타티아스가 제우스에게 경배하라고 강요하는 군인들과 그 우상 숭배에 참여한 유대인을 죽이고 달아나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그의 사후 “마카비 형제”라고 불리는 그의 다섯 아들들이 반란을 주도했고, 삼 년간의 사투 끝에 그들은 성전을 탈환했다. 외경인 마카베오서에 따르면 (그 내용을 모두 믿을 수는 없지만) 반란에 성공한 그들이 본 광경은 불타 부서진 성전 문, 잡초가 자란 뜰, 다 무너진 제사장들의 방, 더럽혀진 제단 등이었다. 충격을 받은 그들은 옷을 찢고 머리에 재를 쓰고 통곡한 뒤 성전을 정화하여 하나님께 다시 봉헌했다고 한다. “하누카”라는 단어 자체도 “봉헌”(dedica- tion)이라는 뜻이다.<br/><br/>탈무드에 따르면 유대인들이 성전을 정화하려고 했을 때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헬라인들이 성전에 들어가 그곳의 모든 기름을 더럽혔기에, 하스모니안 왕조[마카비 일가를 뜻함]가 그들을 이기고 무찔렀을 때 대제사장의 인장으로 봉해진 기름병을 하나밖에는 찾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 안에는 하루 동안 불을 밝힐 정도의 양만 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 기름병에 기적이 일어났고, 그 안의 기름으로 팔 일 동안이나 불을 밝힐 수 있었다.”<br/><br/>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을 덧붙이자면 이렇다. 촛대에 불을 밝힐 때 사용해야 하는 기름은 순수한 올리브 기름이어야 했다(레 24:2).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혹 불경한 손길이 기름을 더럽히지 못하도록 그 입구를 인장으로 봉해 두어 안전장치를 마련해 두는 관습이 있었다. 그 인장이 훼손되었다면 누군가가 기름에 손을 댄 것이므로 쓰지 않을 요량으로 말이다. 미국 CBS의 뉴스 8에 출연한 예루켐 아일포트(Yeruchem Eilfort)라는 랍비는 시리아군이 일부러 기름병의 인장을 훼손시켜 두었던 데에는 율법의 비합리성을 조롱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고 설명했다. 조금만 융통성을 발휘하면 쉽게 해결될 문제를 가지고 엄격한 율법에 매여 끙끙거리는 유대인들을 아니꼽게 여겨 그런 짓을 저질렀던 것이다.<br/><br/>결국 유대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새 올리브 기름을 만들어 성전으로 가져오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예루살렘에서 올리브 기름이 생산되고 있지 않았고, 물류 체계도 잘 갖추어져 있지 않은지라 8일이라는 긴 시간이 걸리고 말았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나 촛대의 불이 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유대인들은 “8일”이라는 기간 동안 촛불을 켜며 하누카를 기념한다. 이 기간에 빛나는 촛불은 이방 종교와 동화되지 않고 율법의 성별을 지켜낸 유대인들의 자부심과도 같은 것이다.<br/><br/>하누카에 사용되는 촛대는 “하누카 메노라” 또는 “하누키아”라고 하는데, 자세히 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메노라”와는 차이가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메노라”라고 부르는 촛대는 중앙의 한 줄기를 기점으로 양쪽에 가지가 세 개씩 나와 총 일곱 개의 가지를 가지고 있지만(출 25:31-37), “하누카 메노라”의 가지는 아홉 개이기 때문이다. 가지가 아홉 개인 이유는 하누카의 기간과 관련이 있다.<br/><br/>아홉 개의 가지 가운데 특별히 한 개의 가지에(중앙에 있거나 따로 떨어져 있다) 놓이는 초를 “샤마쉬”라고 부르는데, “도우미” 또는 “종”이라는 뜻으로 이 초는 하누카 초로서 셈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샤마쉬”는 다른 여덟 개의 가지에 놓이는 초에 불을 붙이는 용도로 사용되는 초이기 때문이다. 하누카 기간이 시작되는 날, 유대인들은 “샤마쉬”를 이용하여 하누카 초 한 개에 불을 옮겨 붙인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하나씩 늘려 가서 마지막 여덟째 날에는 모든 가지에 불을 밝히는 것이다.<br/><br/>그런데 만일 샤마쉬에 문제가 생긴다면 어떻게 될까? 다른 초로 불을 옮겨 붙여도 되는 것일까? 탈무드에는 이 문제에 대해 “라브”와 “슈무엘”이라는 두 위대한 랍비가 의견을 달리하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라브는 한 촛대에서 다른 촛대로 불을 옮겨 붙이는 것을 반대했는데, 그 과정에서 기름이나 왁스가 일부 유실됨에 따라 촛대의 불빛이 줄어든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에 반해 슈무엘은 이를 허용했다. 랍비 조나단 색스는 후자의 의견이 옳다면서, 자신의 기준이 낮아지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토라(율법)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을 도우려 하지 않는 모습이 바로 라브의 의견이라고 했다. 그러나 토라의 빛이란 슈무엘의 의견처럼 나눈다 해도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더 커지는 것이라며 유대교에서 슈무엘의 의견을 채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br/><br/>하누카의 촛불을 통해 토라의 빛을 세상에 발산한다는 그들의 말마따나, 이스라엘은 이방 민족들과는 달리 공의로운 규례들과 명령들을 가진 위대한 민족으로서 방탕과 음란에 빠져 있는 이방 세계를 향해 빛을 비추어야 할 민족이었다(신 4:6-8).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마카비 형제의 반란으로 세워진 하스모니안 왕조 또한 얼마 가지 못하고 쇠락의 길을 걸었는데도, 유대인들은 애써 그 점을 무시하고 승리만을 기억하려는 듯하다.<br/><br/>위의 문제에 관한 진실은 이렇다. 마카비 혁명 당시의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데서 멀어져 장로들의 전통을 따른 “유대교”라는 것을 형성하고 있었다. 게다가 성전을 탈환한 지 약 30년쯤 지나 B.C. 135년경이 되었을 때는 급격히 밀려드는 헬레니즘에 타협해 버린 고위층 제사장 가문을 중심으로 부활도, 천사도, 영도 없다고 하는 사두개파가 형성되었다. 하나님께서 그런 그들을 도와주셔야 할 이유가 있었겠는가? 이런 까닭에 하스모니안 왕국은 그로부터 약 70년이 흐른 뒤에는 로마 제국의 속국으로, 이후에는 속주로 전락했다.<br/><br/>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유대인들은 이방인인 카이사를 왕으로 모시고 있었으면서도 수치를 모르는 지경이었다(요 8:33). 타국인을 왕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율법의 말씀조차 그들에게서는 까맣게 잊혔던 것이다(신 17:14,15). 그렇게 율법을 잊었으면서도 종교적 자부심과 형식을 지키는 데만큼은 끔찍했던(마 15:1-9) 유대인들이 수전절에 하려고 했던 일이 무엇이었는지 아는가? 바로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딤전 3:16)께서 신성모독(?)을 저질렀다며 그분을 돌로 치려는 것이었다(요 10:31-33).<br/><br/>그와 같은 모습에서 우리는 경각심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로 실행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면서도 그 말씀을 소유했고 그에 맞는 형식을 갖추고 있다는 이유로 우쭐했다가는, 유대인들처럼 “참 빛”을 거부했으면서도(요 1:9-11) 촛불을 켜 놓고 좋아라하는 꼴이 되어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말로가 “이카봇,” 즉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 버리는 것으로 귀결되리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삼상 4:3-22).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30 Sep 2024 17:13:16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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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아브람을 부르시기까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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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이스라엘은 성경의 중심이 되는 민족이다. 지리적으로는 지중해 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아시아의 서쪽과 유럽의 남동쪽, 아프리카의 북동쪽에 자리잡고 있어,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 세 대륙이 만나는 대륙 간 교통의 전략적 요충지이다.<br/><br/>이스라엘의 역사는 국가적으로는 율법 수여로 신정통치의 기틀을 확립한 시내 산에서(출 19,20장), 혈통적으로는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창 12장), 곧 셈의 후대에게서 출발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을 우상 숭배자들의 칼데아 우르에서 불러내시기 전의 역사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성경에 기록된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신 창조 역사가 없었더라면 &#034;이스라엘&#034;이라는 이름은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뿐더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그 일(창 12장)은 인류의 타락(창 3장)과 노아의 홍수(창 6-8장), 바벨탑 사건(11장) 등 굵직굵직한 인류 역사 초기 사건들을 그 배경으로 하기 때문이다.<br/><br/>하나님께서는 주님의 보좌를 덮는 그룹, 곧 루시퍼의 대반역으로(사 14:12-15, 겔 28:12-19) 이전의 우주를 물로 심판하시고 창세기 1장에서 재창조의 위대한 사역을 시작하셨다. 재창조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034;사람&#034;의 창조가 있었다. 사람의 창조는 재창조의 절정이었다. 첫 사람 아담을 지으시기 전에는 단순히 &#034;하나님께서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034;(창 1:4,10,12,18,21,25)고 하셨지만, 마침내 그분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라, 그것이 아주 좋았더라.』(창 1:31)고 말씀하셨다.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신 것을 아주 기뻐하셨던 것이다.<br/><br/>그러나 이 기쁨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그만 사라지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을 다스릴 권세를 부여받고(창 1:28), 에덴의 동편에 세우신 동산을 관리하고 지키라는(창 2:15) 책무가 맡겨진 아담이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에서 나는 열매를 먹는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창 2:17).<br/><br/>아담은 창세기 3장에서 뱀에게 속아 버린 아내가 준 열매를 함께 베어 물고 만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죄의 절망 속에 가둬 두지 아니하시고 한 가지 빛나는 희망을 제시하셨는데, 그것은 바로 &#034;여자의 씨&#034;에 대한 약속이었다. 『내가 너와 여자 사이에, 또 네 씨와 그녀의 씨 사이에 적의를 두리니, 그녀의 씨는 너의 머리를 부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부술 것이라』(창 3:15). 이 말씀은 성경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직접적으로 예언하는 첫 번째 &#034;메시아 구절&#034;이다. 여인이 씨를 갖고 있다는 것은 주님의 동정녀 탄생에 관한 예언이며(초림), 그 씨가 뱀의 머리를 부순다는 것은 사탄이 육화된 적그리스도의 머리를 부수실 재림에 관한 예언이다. 타락한 인류에게 주신 하나님의 희망은 &#034;여자의 씨&#034;였다.<br/><br/>금지된 열매를 먹은 뒤로, 아담과 그의 아내는 에덴의 동산 동편으로 쫓겨나 그가 취함을 받은 땅을 갈면서 고통스런 삶을 살아가야 했다(창 3:23,24). 아담이 살던 에덴의 위치는 창세기 2:10-14에 제시되어 있다. 『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가 그 동산을 적시고 그곳으로부터 갈라져서 네 원천이 되었으니, 첫 번째의 이름은 피손인데 금이 있는 하윌라의 온 땅을 둘렀으며 그 땅의 금은 좋고, 그곳에는 델리엄과 얼룩마노도 있더라. 두 번째 강의 이름은 기혼인데, 에디오피아의 온 땅을 둘렀더라. 세 번째 강의 이름은 힛데켈이라. 그것은 앗시리아 동편으로 흐르더라. 네 번째 강은 유프라테스더라』(창 2:10-14).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034;에덴&#034;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그곳은 네 강이 갈라져 나온 페르시아만 끝에 있었다. 성경에 제시된 강들 중 두 강, 곧 유프라테스와 힛데켈(티그리스)은 현재에도 그 강줄기가 보존되어 있어 쉽게 확인 가능하다. 성경에서 힛데켈은 페르시아에 있는 것으로 언급되기 때문에(『페르시아 왕 코레스의 제삼년에 벨트사살이라 이름하는 다니엘에게 한 일이 계시되었으니... 첫째 달 이십사일에 내가 힛데켈이라 하는 큰 강변에 있었는데』 - 단 10:1,4), 힛데켈은 옛 페르시아 영토에 속한 이란 가까이에서 흐르는 티그리스 강인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는 이라크 영토 내에 있으며, 이 가운데 티그리스가 이란을 동북 편에 두고서 흐르고 있다. 나머지 두 강은 &#034;기혼&#034;과 &#034;피손&#034;인데, 이 강들의 예전 흐름은 미국 부시 대통령의 제1차 쿠웨이트 침공 전쟁 동안에 항공 사진사들에 의해 밝혀졌다. 성경에 따르면 그중 하나는 에덴의 서남쪽에 있는 에디오피아의 온 땅으로 흘러 들어갔고, 또 하나는 그 강보다 서쪽으로, 즉 중앙아라비아의 서남쪽으로 흘러갔다.<br/><br/>78.jpg <br/><br/>아담 한 사람의 범죄는 자신뿐 아니라 그의 후손, 곧 온 인류를 죄의 영향력 하에 두었고, 그리하여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 전달되었다(롬 5:12). 아담은 자신이 지은 죄의 영향력으로 자녀들, 곧 카인과 아벨 사이에 일어난 살인을 보아야 했다(창 4:8). 창세기 4장에는 또 다른 살인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청년을 죽인 라멕의 이야기가 그것이다(창 4:23). 이 모든 것이 죄의 결과였다.<br/><br/>아담 한 사람의 죄는 온 세상에 영향을 주어 창세기 6장에까지 이르게 된다. &#034;하나님의 아들들&#034;이라 불리는 천사들이 자기들의 처음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들의 처소를 떠나(유 1:6) 사람들의 딸들, 곧 그들이 택한 모든 여자들을 아내로 삼고 그들과 결합하여 거인들을 낳았으며(창 6:1-4), 온 땅은 그들로 인해 죄로 황폐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사악함이 세상에 창대해짐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상상이 계속해서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사람은 물론 짐승들까지도 음행에 사용되었으며(창 6:7), 이것이 짐승들까지 홍수로 멸망시키신 이유였다. 땅은 죄로 부패하고 폭력으로 가득해졌으며(창 6:11), 하나님께서는 비통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시고 끝내 그들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셨다(창 6:5-13).<br/><br/>이때 노아만이 주님의 눈에서 은혜를 찾았다(창 6:8). 당대의 의인이요 완전한 사람이었던(창 6:9) 노아만이 주님께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실 수 있는 희망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대홍수로 죄의 세상을 쓸어버리셨고, 방주에 탄 노아의 가족 여덟 명만을 구원하셨다. 그리고 그들이 방주에서 나왔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언약을 세우셨다. 『내가 너희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육체가 홍수로 인한 물들로 멸망당하지 않을 것이며, 또 땅을 멸망시킬 홍수가 다시는 있지 아니하리라』(창 9:11). 주님께서는 주님과 노아의 가족, 또 그들과 함께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속하는 세대들을 위해 체결하는 그분의 언약의 표로 구름 속에 주님의 무지개를 두셨다(12,13절). 이렇게 해서 노아의 아들들, 곧 셈, 함, 야펫을 뿌리로 한 세 인종의 인류 역사가 시작된다.<br/><br/>그러나 그 뒤 시간이 흐를수록 인류의 기억 속에서는 이전의 대홍수 심판을 통해 보여 주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지워져 갔다. 대홍수의 심판은 머나 먼 옛 이야기가 되어 버렸고, 노아의 후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던 대홍수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의 이야기를 결국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으로까지 이어간다.<br/><br/>바벨탑의 &#034;국제연합&#034;은 하늘 아래서 자신을 드러내려는 자만으로 가득 찬 죄인들의 모임이었다. 그들의 말에는 온통 『우리』를 드러내고 높이려는 자만만이 배어 있었다. 『가서 우리를 위하여 성읍과 탑을 세우되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도록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내자. 그리하여 우리가 온 지면에 멀리 흩어지지 않게 하자』(창 11:4). 대홍수 이후 인류는 하나님을 완전히 잊어버렸고, 오히려 가장 높은 곳에 계신 분을 대적하여 하늘로, 하늘로 교만의 탑을 쌓아가는 일에 몰두했다.<br/><br/>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언어를 혼란케 하시어 그들을 온 지면에 멀리 흩으셨다. 그리고 갑자기 &#034;셈의 계보&#034;를 등장시키신다. 창세기 3장의 희망이 &#034;여자의 씨&#034;이고, 창세기 6장의 희망이 &#034;노아&#034;라면,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거듭되는 타락과 실패 속에서 다시 한 번 희망을 제시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이 셈의 계보 속에 등장하는 &#034;아브람&#034;이다. 『이것이 셈의 후대라. 셈이 일백 세였을 때, 즉 홍수 후 이 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셈은 아르박삿을 낳은 후 오백 년을 살며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더라... 스룩은 나홀을 낳은 후에 이백 년을 살면서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더라. 나홀은 이십구 년을 살고 테라를 낳았고 나홀은 테라를 낳은 후에 일백십구 년을 살면서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더라. 테라는 칠십 년을 살고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창 11:10-26). 이처럼 창세기 11장은 바벨탑 사건을 통해 대홍수 이후의 인류의 희망 없음을 보여 주었고, 그 뒤 유일한 희망이신 &#034;여자의 씨&#034;께서 오시는 길에 서 있는 아브람을 인류 역사의 중심에 부각시키는 셈의 계보를 소개한 후, 아브람이 카나안 땅으로 가기 위해 칼데아 우르에서 나오는 중 벌어진 그의 가족사에 관한 이야기로 그 장의 끝을 맺는다(창 11:27-32).<br/><br/>아브람은 셈의 후대였다. 셈은 그의 아버지 노아가 『셈의 주 하나님을 송축하리로다.』(창 9:26)라고 한 것처럼 영적이고 정신적인 인종을 낳았다. 신약성경의 모든 저자들은 셈족인 유대인들이며, 그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 셈에게서 나온 사람들이다.<br/><br/>80.jpg <br/><br/>유대인들의 조상 아브람은 창세기 12장에서 『너는 네 고향과 네 친족과 네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1절)는 명령을 듣는다. 그가 떠나온 &#034;칼데아 우르&#034;는 최초의 인류가 살았던 &#034;에덴&#034;이 위치해 있던 곳이다. 아담과 이브는 에덴의 동산 동편으로, 즉 서에서 동으로 쫓겨났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반대 방향, 곧 &#034;에덴&#034;의 서편으로 아브람을 불러내셨다. 주님께서는 &#034;에덴&#034;에 살던 한 사람을 불러내시어 카나안 땅에 정착시키심으로써 그의 허리에서 나올 한 민족의 역사를 시작하신 것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04 Jun 2024 14:33:33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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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현대 이스라엘의 장막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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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지난해 10월 7일 새벽, 이스라엘의 네게브 사막에서 밤새 열렸던 한 음악 축제장에 중무장한 괴한들이 들이닥쳤다. 축제에 참가했던 수백 명의 젊은이들이 실종되었고, 이들이 납치당하는 모습이 영상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이곳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곳곳에서 총성과 포성이 울렸고, 적게 잡아도 1,300명가량이 목숨을 잃었다. 이 일은 팔레스타인의 무장 정파 하마스의 소행으로 드러났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발발한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하마스가 이 날을 공습일로 정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7일간의 장막절 기간이 끝나는 날로서, 이스라엘 각지에서 밤을 세운 축제가 벌어지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br/><br/>“속죄일”(욤 키푸르)이 엄숙한 명절인 반면, 그로부터 5일째 되는 날(일곱째 달 15일) 저녁부터 유대인의 시간 개념으로 7일간 지속되는 “장막절”(숙콧)은 즐거운 축제의 명절이다. 이 기간에는 심심치 않게 거리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이나 악단 등을 만날 수 있는데, 그들이 흥이 올라 있는 이유는 장막절의 주된 정서가 “감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조상들을 불러내셨을 때 초막에서 거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레 23:42,43), 그 여정에서의 보호하심과 약속의 땅으로의 인도하심에 대해 감사를 드리는 것이 이 명절의 목적이다. 감사의 제목은 또 있는데, 이는 이때가 여러 과일과 농산물을 거두는 시기이기 때문이기도 하다(신 16:13). 이런 맥락에서 장막절은 수확절이라고도 불린다(출 23:16). 따라서 원칙적으로 이 기간에는 결코 슬퍼해서는 안 되고(느 8:9-18), “반드시 즐거워해야” 한다(신 16:13-15).<br/><br/>“숙콧” 기간에 사람들은 “아르바 미님”(네 종류의 식물)을 준비해야 하는데, 각각 “에트로그”(이스라엘 유자), “룰라브”(종려나무 잎), “하다심”(도금양나무 가지 최소 세 개), “아라봇”(버드나무 가지 두 개)이라고 불리며, 각각의 식물들은 각계각층의 유대인들을 상징한다(“에트로그”를 빼고는 모두 다 장막절을 언급하는 레위기 23:40, 느헤미야 8:15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식물들이다). “미쯔바”(유대교에서 지키는 613개의 계명)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을 함께 들고 흔들어야 한다. 즉 “에트로그”는 왼손에, 나머지는 오른손에 든 채 두 손을 모으고 동서남북(또는 동서남북과 상하) 방향으로 흔든다. 여러 방향으로 여러 식물을 한데 모아 흔드는 것은 “통합”을 의미한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도 이 명절에는 형편이 좋은 사람들뿐 아니라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까지도 즐거워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으니(신 16:14) 의식에 담긴 정신 자체는 성경적이라 할 여지가 있다. “미쯔바”를 통해 사람들의 계명들을 교리로 가르치는 것을 제외한다면 말이다(막 7:7).<br/><br/>엄밀히 말하자면 장막절 기간은 7일이지만(신 16:13),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제8일 하루를 더해 주셨다(민 29:35). 이스라엘 사람들은 거기에 또 하루를 더하는데, 제8일과 제9일을 각각 “슈미니 아쩨렛”(집회의 여덟째 날), “심핫 토라”(율법의 기쁨)라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제8일을 “엄숙한 집회”의 기간으로 주셨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때를 한 해 중 가장 즐거운 기간으로 삼는다.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바로 작년의 이 시기에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습했다. 이때에 회당 등지에서는 유대인들이 “하카포트”라고 불리는 춤을 추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토라”(율법) 두루마리를 들고 음악에 맞춰 원을 그리면서 돌기도 하고 방방 뛰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은 “토라”를 운반하는 “발”인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상징한다고 한다(롬 3:1,2). “심핫 토라”가 끝나는 아침, 유대인들은 회당에 모여 다시 “하카포트”를 한 뒤 회당에서 율법의 마지막 부분인 신명기의 마지막 부분을 읽고서 창세기의 첫 부분으로 되돌아간다. 이것은 율법 회독을 완료한 것을 기념하고 토라의 연속성이 계승됨을 뜻하는 의식이다.<br/><br/>“숙콧”에 관해서 다양한 일들이 있지만, 그 명절의 가장 큰 특징은 “숙카”라고 불리는 초막이 곳곳에 설치된다는 데 있다. 이때에는 율법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과 전 세계의 유대인 공동체 곳곳에 있는 공터, 회당이나 집 앞, 아파트 옥상 등에 “숙카”라 불리는 초막이 설치된다. CBS New York과의 인터뷰에 응한 요세프 윌헬름(Yosef Wilhelm)이라는 랍비의 설명에 따르면, 초막은 최소 2.5면이 막혀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초막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안아주시는데, 누군가를 팔로 안을 때면 어깨부터 팔꿈치(1면), 팔꿈치부터 손목(1면) 그리고 손바닥(0.5면)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편 “숙카”의 천장은 나뭇잎과 가지를 얹어 만들되 밤하늘의 별이 보이도록 뚫려 있어야 한다. 심지어 비가 들이칠 수도 있지만 초막이 임시적 거처였음과 인간이란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나약한 존재임을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한다고 한다. 이렇게 만든 “숙카”로 손님을 초대하여 함께 먹고 마시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담소를 나누는 것이 장막절의 주된 풍경이다. 어떤 사람들은 “숙카”에서 아예 잠을 청하기도 한다.<br/><br/>“숙카”와 관련된 다소 의아한 의식도 있는데, 바로 매일 밤 그 유대인들 주변의 친구들 외에도 “조상들,” 즉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아론, 요셉, 다윗, 이상의 7인을 그 안으로 초대한다는 것이다. 이를 “우슈피진”(“손님”이라는 뜻의 아람어)이라 하는데, 이에 대해 조나단 색스(Jonathan Sacks)라는 랍비는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여러분은 손님들을 초대하기 위해 거대한 건물을 갖춰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여러분이 하는 일이라고는 헛간(초막)을 짓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는 ‘우슈피진’이 있게 될 것인데,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들이 몸소 여러분을 방문해서 여러분이 준비한 꿀 케이크를 맛보려고 할 것입니다.”<br/><br/>이는 유대 신비종교인 “카발라”의 경전인 “조하르”에서 기원한 것인데, “조하르”에 따르면 장막절에 이 “손님”들은 천상의 거처로부터 유대인들과 “숙카”에 영적으로 거한다고 한다. 물론 실제로 죽은 이들을 초막 안으로 불러들이는 일이 가능할 리도 없지만, 설령 그럴 수 있다 해도 그들로부터 좋은 말을 듣지는 못할 것이 분명하다(cf. 삼상 28:15). 베드로가 변형 산에서 주님과 함께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를 보고 유사한 말을 한 바가 있다 해도, 그것은 무슨 말을 할지 몰라서 그랬던 것이다(막 9:6). 사실 그들을 위한 장막 셋을 짓겠다는 베드로의 말은 주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인간인 모세, 엘리야와 “동급”으로 모시겠다는 어리석은 말이었다. “우슈피진”에 담긴 정신 또한 대동소이하다. 주님의 임재를 구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에 조상들의 임재까지 구하고 있으니 말이다.<br/><br/>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를 “토라”의 전파자로 자신하면서도, 엄숙해야 할 집회에서 “토라” 두루마리를 들고 춤이나 추고, 또 실제로는 “토라”에 나와 있지도 않은 이상한 의식들에 열을 올리는 것은 그들이 “눈 뜬 장님”(막 4:12)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맞아들이기 위해 치신 “장막”을 거절한 까닭에 벌어진 일이다. 말씀 하나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가운데 “거하시려고”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는데(요 1:14), 여기서 “거하신다”는 표현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 “스케노오”(σκην&#038;#972;ω)는 본래 “장막을 치고 거하다”는 뜻이다. 또 성경에서는 육신을 “장막 집”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고후 5:1). 예수님께서는 베들레헴의 목자들이 아직 야외에서 양을 칠 수 있을 만한 계절인 가을(겨울이 아니라)에 태어나셨는데(눅 2:8), 바로 이 계절에 장막절이 있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구약에서 성막에 임재하시던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시려고 치신 “장막”이 바로 주 예수님이셨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다. 유대인들은 이 “장막”을 거부했다.<br/><br/>그렇게 오신 주님께서는 머리 둘 곳조차 없이 열성적으로 사역하시면서 자기 백성인 유대인들을 구원하고자 하셨으나, 정작 그 백성은 그분을 십자가에 내어주고 말았다. 그 대가는 디아스포라, 즉 또 다른 “장막 생활”이었다. 그로부터 약 1,900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정착”하는 듯 보이지만, 메시아를 거부한 일에 대한 근본적 회개가 없기에 대환란 기간에는 반드시 다시 쫓겨나 “장막 생활”로 되돌아갈 것이다(cf. 히 3,4장). 그 때에는 주 예수님이라는 “장막” 안으로 돌이켜 피난처를 찾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있을 것인데, 주님께서는 그들을 모아 창고에 들이실 것이고(환란 성도들의 휴거), 재림하셔서 그들을 다시 약속의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 안식을 주심으로써 그 길고 길었던 이스라엘의 “장막 생활”을 끝내실 것이다.<br/><br/>하나님께서 품어 주시는 장막에 진정으로 들어오려 한다면 “참된 장막”으로 오신 분, 곧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제아무리 정성을 들여 만든 “숙카”에서 “이웃 사랑”과 “종교 행위”를 실천한다 해도, 주 예수께로 나아오지 않는 사람들은 장막에 거하면서 40년을 떠돌았으면서도 결국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던 “낙오자들”처럼 될 뿐이다.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할 권리가 없다. 주님께서는 창조주시요 구속주시며 심판주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30 May 2024 12:54:5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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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현대 이스라엘의 오순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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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도시 생활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은 농업에 대한 지식이 빈약하기 때문에, 대개 수확의 계절이라고 하면 가을만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늦봄에서 초여름 즈음에 수확하는 곡식도 있다. 일례로 “보리”가 그러하다. 하나님께서는 유월절과 무교절 뒤에 오는 일요일에 수확의 첫열매들을 가져오는 절기, 즉 초실절을 제정하셨는데, 이때에 바쳐야 했던 곡식이 바로 “보리”였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말하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거기서 수확을 거두면, 너희는 너희 수확의 첫열매들의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올지니라. 그러면 그가 주 앞에서 그 단을 너희를 위하여 받아들여지도록 흔들지니 안식일 후 다음 날에 제사장은 그것을 흔들지니라』(레 23:10,11). 또 시간이 조금 흘러 5월이나 6월이 오면 지난해의 가을에 뿌렸던 밀을 수확할 수 있다. 이 밀의 첫열매들을 바치는 명절이 바로 “밀 추수”의 초실절인 칠칠절(오순절)이다(출 34:22, 레 23:17).<br/><br/><br/>히브리어로 오순절을 “샤부옷”이라고 하는데, 문자적 의미로 보자면 “주들”(weeks) 혹은 “일곱들”이라는 뜻이다. 초실절로부터 일곱이 일곱 번 지나면, 그러니까 마흔아홉 날들이 지나면 그 다음 날인 50번째 날이 오순절이 된다. 사실“오순절”(Pentecost)이라는 단어는 모세의 율법에는 나오지 않다가, 신약성경에서야 등장한다. 누가와 바울은 각각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를 기록하면서 “오십 번째 날”이라는 뜻의 헬라어 “펜테코스테”(πεντηκοστή)라는 단어로 오순절(칠칠절)을 표현했다(행 2:1; 20:16, 고전 16:8). 우리말 명칭 “오순”도 다섯 오(五)에 열흘순(旬)을 써서 50번째 날이라는 의미를 전달한다.<br/><br/><br/>현대의 유대인들에게 있어 오순절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모세가 율법을 받은 날이 언제였는지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지만, 적어도 오순절이 있는 셋째 달(시완 월)이었다는 것은 명시되어 있다(출 19:1). 유대인들은 유월절부터 오순절까지에 이르는 약 50일의 기간 동안에 있었던, 조상들이 유월절에 이집트를 탈출하여 홍해를 통과하고 율법을 받기까지의 여정을 기억하면서 일종의 애도 기간을 갖는다. 육신을 즐겁게 하는 일을 의도적으로 멀리하면서, 율법을 받은 날을 기억하기 위해 마음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때에는 일반적으로 결혼식과 같은 큰 축하 행사를 갖지 않으며, 머리도 자르지 않고 음악을 듣지 않기도 한다. 다만 제33일절이라고 하는 33번째 날만큼은 예외이다. 제33일절은 축일로, 결혼식을 올리고 음악 등을 즐길 수 있다. 정통 유대인 집안에서는 세 살 된 남자 아이들이 난생 처음으로 이발하는 날이기도하다.<br/><br/><br/>중세 암흑시대의 끝 무렵에 살았던 프라하의 마하랄(Maharal)이라는 랍비는 초실절에 보릿단을 드렸던 것과 오순절에 밀을 드렸던 것을 대조하면서 여기에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 보리는 주로 동물들이 먹는 곡식이므로 출애굽 당시이스라엘 백성들의 낮은 영적 수준을 의미하고, 밀은 율법을 받을 때쯤 되어 높아진 영적 수준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소위 “랍비적 해석”이라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 또 얼마나 성경에 기반을 두지 않은 상상과 추론의 산물인지를 잘 알 수 있다. 마하랄의 말마따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나 “높은 영적 수준”을 가졌던지, 모세가 율법을 받는 동안 그 새를 참지 못하고 세상인 이집트의 방식을 따른 “록 콘서트”를 열어 버리고 말았다(출 32:1-6).<br/><br/><br/>어쨌거나 오순절은 이 애도 기간을 마무리하는 날이다. 이날 전통을 지키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을 받은 것을 기념하기위해 회당에 모여서 밤을 새워 율법을 공부한다. 이를 티쿤 레일 샤부옷(Tikkun Leil Shavuot)이라고 하는데, 그 뜻을 해석해 보면 “오순절 밤의 교정(고침)” 정도가 된다. 이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강론을 듣고 토론하기도하고, 또 연극이나 음악을 감상하기도 하면서,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어긋나 있는 부분을 찾아 고치려고 하는 것이다.<br/><br/><br/>오순절에는 유대인의 식탁 또한 특별해지는데, 여느 다른 명절들과는 달리 오순절에는 치즈 케이크나 블린츠(치즈나 잼 등을넣어 구워 낸 팬케이크) 같은 유제품을 이용한 요리가 주 메뉴가 된다. 랍비들은 “왜 하필 유제품이냐”는 점에 대해 여러 가지 설명을 내놓는다. 어떤 이는 하나님께서 율법(말씀)의 젖을 통해 아이 이스라엘을 양육하셨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또어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대한 약속을 주셨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어떤 이는 코셔(유대인들의 율법과 전통에 의해 마련된 음식)의 기준을 맞추기 위해, 범법의 소지가 없는 유제품을 선택한 것이라고도 한다.<br/><br/><br/>유대인들은 오순절에 특별히 룻기를 읽는다. 룻기의 주된 시간적 배경 또한 유월절부터 오순절에 걸친 기간이다. 여기서 잠깐 룻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되짚어 보자. 모압 여인으로서 이방인 출신이었던 룻은 보리 수확이 시작될 때 베들레헴으로 왔고(룻1:22), 밀 추수 기간, 즉 오순절 즈음까지 보아스의 밭에서 호의를 얻었다(룻 2:23). 얼마 지나지 않아 보아스가 그녀에 대한 값을 치르고 룻을 “구속”해 주었고, 룻은 그의 아내가 되었다(룻 4:8-13). 유대인들은 룻기를 읽는 이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설명하지만, 그들의 말을 들어 보면 모두 어딘가 어색한 부분이 있거나 만족스럽지가 않다. 예컨대 모압 여인이었던 룻이 이스라엘 사람이 되기를 “선택”했듯이, 유대인들의 조상들도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을 때 그 율법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했다는 식이다(이것이 개중에 좀 나은 설명이다). 오순절과 룻기 사이를 연결하는 데 있어 그들의 설명은 어딘가 억지스럽다. 그들이 “발견하지 못한 퍼즐 조각”이 있기 때문이다.<br/><br/><br/>그리스도인이라면 룻이 어떤 존재를 예표하는지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바로 이스라엘 나라에 속하지 않는 타국인이요,약속의 언약들로부터는 생소한 사람이었으며 소망도 없고 세상에서 하나님도 없이 살다가, 주 예수의 대속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교회 시대의 이방인 성도들이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강림하시면서 시작되었다(행2:1-4).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한 알의 밀로 땅에 떨어져 죽으심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셨는데, 바로 이“밀 추수의 초실절”인 오순절(행 2:1)에 그분의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아 생명의 새로움 가운데 살게 된(롬 6:4)사람들이 처음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br/><br/><br/>오순절은 누룩을 넣은 빵 두 덩어리를 음식제사로 드리는 날이었다. 그런데 누룩을 넣은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일은&nbsp; 일반적이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누룩은 죄나 거짓 교리를 상징하기 때문이다(마 16:12, 고전 5:6-8). 따라서 오순절에 누룩을 넣은 빵은 완전무결한 거룩함을 가지고 있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받아들여 주신 존재를 상징한다. 바로 육신의 죄들의 몸을 입고 있는 우리 구원받은 성도들인 것이다. 두 덩어리의 빵이 드려지는 이유는 두 부류의 사람들, 곧 “유대인”과 “이방인”이 구원받을 때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들어와 연합하기 때문이다(엡2:11-19).<br/><br/><br/>오순절이 지나면 나팔절이 오기까지 4개월 동안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명절이 없었다. 다만 각자 흩어져서 바쁘게 농사를 지을 뿐이었다. 이는 이스라엘이 교회 시대에 세계 각지로 흩어지는 것을 예표적으로 보여 준다. 오순절은 어느 모로 보나 교회를 예표하는 명절이다.<br/>그런 까닭에 오순절 만큼은 다른 일곱 명절들과 다르게 그 초점을 교회에 맞춰야 그 의미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현대의 유대인들에게 있어, 특히 그다지 종교적이지 않은 유대인들에게 있어 오순절은 가장 “덜 기념하는”명절이라고 한다. “의식”에 늘 목을 매는 유대인들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다른 명절들과는 달리 특징적인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 까닭도 한몫했을 것이다.<br/><br/><br/>아이러니하게도 오순절을 지키는 당사자들인 유대인들은 그들의 그 명절과 룻기의 연관성을, 그리고 그 의미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오히려 구약의 명절들을 지키는 것과 거리가 먼(갈 4:10, 골 2:16,17) 그리스도인들이 그 명절에 관한 진리를 쉽게 깨닫는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비추시는 진리의 조명을 거부했기 때문에 여전히 그림자만 볼 뿐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골 2:17, 히 10:1). 누구라도 빛을 거부하면 짙은어둠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잠 4:18,19, 요 3:19-21).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Wed, 17 Apr 2024 12:57:26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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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현대 이스라엘의 나팔절과 속죄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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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손주영 / 킹제임스성경신학교 강사<br/><br/><br/><br/>일반적으로 세계 각국의 명절은 그 나라의 역사와 전통에 따라 상이하다. 그러나 어느 나라에서나 빠지지 않고 기념하는 날이 있다. 바로 “설날,” 즉 새해의 첫날이다. 특이하게도 유대인들은 유대력으로는 일곱째 달(티쉬리 월), 즉 성경에서는 “에다님 월”이라고도 하며(왕상 8:2) 우리가 사용하는 태양력으로는 9월이나 10월에 해당하는 달의 첫날과 둘째 날을 “설날”로 지킨다.<br/><br/><br/>하필이면 일곱째 달에 “설날”이 있는 까닭은, 원래 이 달이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지키던 달력(민간력)에서는 새해의 첫째 달이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전통에 따르면 세상은 티쉬리 월에 창조되었다고 하며, 그렇기에 그들은 본래 이 달을 새해의 첫째 달로 삼은 달력 체계를 사용했다. 사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아빕 월(니산 월)”을 첫째 달로 삼는 달력 체계는 하나님께서 출애굽 때 새로 제정하셨던 체계이다(출 12:2).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때 있었던 이스라엘 민족의 “새로운 출생”을 강조하시고자, 기존에는 일곱째 달이었던 아빕 월을 이제부터는 첫째 달로 삼으라고 명령하셨다. 즉 출애굽 이전에 살았던 유대인들의 조상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은 이들은 우리가 흔히 “유대력”이라고 부르는 달력 체계를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br/>그림입니다.&nbsp; 원본 그림의 이름: 나팔절.jpg&nbs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06pixel, 세로 234pixel<br/><br/><br/><br/>위와 같은 이유로 유대인들은 “유대력”이 아닌 “민간력”으로 새해 첫날이 되는 티쉬리 월 첫째 날을 “로쉬 하샤나”라고 부르며 “설날”로 크게 기념한다. “로쉬 하샤나”는 히브리어로 “해의 머리”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 설날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하듯이, 유대인들은 그들의 “설날”인 “로쉬 하샤나”에 “샤나 토바” 혹은 “샤나 토바 우메투카”라고 인사하는 것이 관례이다. 문자 그대로 보자면 “좋은 해,” “좋고 달콤한 해”라는 뜻이다. 이 날에는 “달콤한 것” 하면 곧바로 떠오르는 음식인 꿀과 사과가 식탁에 오른다. 식전에 가장은 기도문에 따라 사과 조각을 꿀에 찍으면서 “하나님, 당신의 뜻대로 우리를 행복하고 즐거운 새해로 인도하소서.”라고 기도한다고 한다.<br/><br/><br/>“로쉬 하샤나”는 유대인들에게는 “설날”이기도 하나 하나님께서 나팔절로 제정하신 날이기도 하므로(레 23:24), 회당들에서는 “쇼파르”라고 불리는 양뿔 나팔이 울린다. 공동체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전통적으로 여섯째 달(엘룰 월)부터 평일 아침에 “쇼파르”를 불면서 이 기간을 예비한다. “쇼파르”의 소리는 졸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심판에 대해 경고하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또한 양뿔 나팔은 “불러 모으는”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민 10:2-4), 양뿔 나팔을 부는 것은 “돌아오라”는 의미를 내포하기도 한다. “쇼파르”를 통해서도 볼 수 있거니와 “로쉬 하샤나”는 단순히 새해를 축하한다는 의미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속죄일을 대비하면서 반성과 성찰로 한 해를 시작한다는 의미까지도 내포하는 명절이다. 이런 맥락에서 유대인들은 “로쉬 하샤나” 첫째 날 오후에 “타슐리크”라는 의식을 치르기도 한다. 이는 흐르는 물을 찾아가서 거기에 “죄를 던져 버리는” 상징적인 의식으로, 주로 조약돌이나 빵을 물에 던진다고 한다.<br/><br/>“로쉬 하샤나”로부터 “욤 키푸르(속죄일)”까지의 10일간의 기간 동안을 유대인들은 “가장 거룩한 날들” 혹은 “경외의 날들”이라고 부른다. 그들의 달력에서 일 년 중 가장 거룩한 날인 “욤 키푸르” 끝 무렵의 회당 경배는 “쇼파르” 소리로 끝을 맺는다. 유대인들은 이 기간 동안 자신을 돌아보면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기도하며 선행을 베푼다. 또 임산부나 노약자, 어린아이들과 같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욤 키푸르”가 시작되는 날 저녁부터 다음 날 저녁까지 금식한다. 먹고 마시는 것만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향수를 쓴다거나 성행위를 한다거나 샤워를 한다거나 라디오, TV, 컴퓨터, 스마트폰을 사용한다거나, 말하자면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하는 일체의 행위들도 하지 않는다. 이 날은 그들에게 “안식일들 중의 안식일”이기 때문에, 당연히 어떤 일도 하지 않으며, 문자 그대로 모든 장소가 문을 닫는다. 심지어 대중교통도 운행하지 않는 데다 사람들이 운전도 하지 않아서 그야말로 도로가 텅텅 빈다. 간간히 “세속적인” 유대인 가정의 아이들이 떼를 지어 자전거를 타고 도로를 누비는 모습이 보일 뿐이다.<br/><br/><br/>유대인들은 “로쉬 하샤나”로부터 “욤 키푸르(속죄일)”까지의 기간 동안 “생명의 책”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탈무드로부터 나온 개념이다. 탈무드에 따르면 세 종류의 책이 “로쉬 하샤나”에 열린다. 각각 완전히 의로운 사람들의 책, 완전히 악한 사람들의 책, 선행과 악행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의 책이다. 완전히 의로운 사람들은 당연히 즉시로 생명의 책에 기록되고 인쳐지며, 완전히 악한 사람들은 죽음에 처해지도록 기록되고 인쳐진다. 나머지 사람들은 “로쉬 하샤나”부터 “욤 키푸르” 사이의 기간 동안 그 판결이 결정된다. 이와 같은 이유로 유대인들은 “욤 키푸르”에 서로에게 “게마르 하티마 토바” 혹은 “하티마 토바”라고 인사하는데, 각각 “당신이 선으로 인쳐졌기를 바랍니다,” “좋은 인침입니다.” 정도의 뜻을 담고 있다. “욤 키푸르”의 종료를 알리는 “쇼파르” 소리가 울리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이름이 생명의 책에 기록되었다고 믿으며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을 상징하는 흰 옷을 입는다. “욤 키푸르”가 끝나면, 금식하던 유대인들은 환희에 차서 금식을 해제하고 성대한 만찬을 즐긴다.<br/><br/>“로쉬 하샤나”로부터 “욤 키푸르”까지 유대인들의 그 “가장 거룩한 날들”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성경에 없는 사람들의 계명들을 교리들로 가르친다는 것도 그렇지만(마 15:9), 더 큰 문제는 이 기간 동안에도 유대인들이 그들의 “죄”에 대해 회개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유대교에서는 “원어”인 히브리어를 운운하면서, 사람들의 “죄”들을 정당화하는 가르침을 제시한다. 유대교의 “성경 교사”들은 “죄를 짓다”라고 흔히 번역되는 히브리어 단어 “차타”()가 사실 “목표를 벗어나다”(miss the mark)라는 뜻이라는 사실을 역설한다. 재판관기 20:16에서 “차타”가 『빗나가는』으로 번역되기도 했으므로 틀린 말은 아니다.<br/><br/><br/>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알았다면, “아하, 하나님께서 정해 두신 목표를 벗어나는 것이라면 특별한 악행이 아니더라도 죄가 되는 것이구나.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사악한 죄인이었던가!” 하고 깨닫는 것이 상식적인 반응이다. 그런데 유대교에서는 이렇게 생각하도록 가르친다. “아하, 사실상 죄라는 것은 없고, 열심히 하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일이 발생할 뿐인 것이구나. 나는 때때로 목표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하려고 노력은 했지. 일 년 동안 참 수고했구나.” 이것은 절대 과장이 아니다. “로쉬 하샤나”로부터 “욤 키푸르” 사이의 기간 동안 거듭나지 못한 유대인들은 그들이 언제 “목표를 벗어났는지”를 찾을 뿐, 언제 “죄”를 지었는지를 찾지 않는다. 모셰 브리스키(Moshe Bryski)라는 랍비는 이 기간에 취해야 할 마음의 자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우리의 삶은 우리 몸 안에 있는 거룩한 혼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혼을 조금 더럽히죠.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으로 돌아가라는 말입니다. 이 점은 우리 모든 사람들의 본성이 거룩하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죄성을 가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글쎄요, 사람들은 약간 방향을 잃었을 뿐입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으십시오.”<br/><br/><br/>여기에서도 유대인들이 예수님과 어떠한 관계도 맺지 못하는 이유가 드러난다. 주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불러 회개에 이르게 하려고 오셨기에(막 2:17), 그들과는 어떤 관계도 맺으실 수 없으신 것이다. 구원을 위한 진정한 회개에 이르려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슬픔”이 있어야 한다(고후 7:10). 이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슬픔”이며, 자신이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스스로는 의로워질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다.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해 낼 것인가?』(롬 7:24) 따라서 사람들에게는 구주가 필요하다. 우리가 스스로 이룰 수 없던 의를 누군가 대신 이뤄 줘야 했던 것이다. 『율법이 육신을 통하여서는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죄 때문에 자신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 그 육신에 죄를 선고하셨으니 이는 율법의 의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육신을 따라 행하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들이라』(롬 8:3,4). 어떤 사람이 잘 이야기했듯이, “승리하는 삶을 위해서 가져야 할 자격 조건은 부러진 날개, 깨어진 본성, 그리고 약함”이다. 세상의 싸구려 동정꾼들이 말하듯이 스스로에게 “괜찮아, 잘했어,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어.” 하고 말하는 사람은 모두 지옥으로 간다. 유대인들도 그러한 속임수에 속은 것이다. 우리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아, 나는 구제불능의 죄인이구나!” 하고 깨닫는 사람만이, 거듭남의 필요성을 스스로 절감하고 구주를 영접하게 되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15 Feb 2024 16:15:2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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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현대 이스라엘의 유월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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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손주영 / 킹제임스성경신학교 강사<br/><br/>폐하, 유대인입니다.” 이것은 프러시아의 어느 왕이 궁정 목사에게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증거에 대해 질문하자 답변으로 돌아온 유명한 말이다. 유대인들은 약 1,900년의 기간 동안 국가가 없이 떠돌았음에도 그 정체성과 문화, 심지어는 언어를 보존한 채 약속의 땅으로 돌아왔다. 비록 완전한 회복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세계에는 늘 반유대주의 정서가 만연했고, 이에 의한 음모, 재산 몰수, 추방, 심지어는 살인 등이 자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꿋꿋이 살아남았다. 실로 계속해서 불타지만 없어지지는 않았던 가시덤불과 같은 민족인 것이다. 『가시덤불이 불로 타나 가시덤불은 소멸되지 않더라... 나는 주이므로 변경하지 아니하노라. 그러므로 너희 야곱의 아들들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출 3:2, 말 3:6). 하나님께서 함께 계셨기 때문이라는 것 외에는 유대인의 보존을 설명할 길이 없다. 이러한 유대인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다. 본 코너에서는 근ㆍ현대의 유대인들을 조명하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섭리적으로 보존하셨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얼마나 변함없는 완고함을 가지고 있는지, 그들의 현재의 삶은 어떠하며 그 연장선상에서 그들이 맞이할 대환란의 양상은 어떠할지 등을 짚어봄으로써,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훈을 얻고자 한다.<br/><br/>유월절은 유대력으로 1월 14일, 그러니까 아빕 월 또는 니산 월이라고 불리는 달의 14일 해질 무렵에 지키는 명절로서, 해가 지면 곧바로 무교절이 칠 일간 지켜진다(출 12:14-20).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태양력을 기준으로 하면 유월절은 주로 3월이나 4월에 오며, 어떤 때는 5월에 온다. 유대력으로 1월 14일에 오는(레 23:5) 유월절은 곧바로 무교절로 이어지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유월절과 무교절을 별 구분 없이 사용하기도 하며(막 14:1), 이 기간을 아예 “무교절 기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행 12:3; 20:6). 성경 시대나 현대의 이스라엘이나 무교절 기간 중 첫째 날과 마지막 날은 공휴일이며 일을 하지 않는다. 이 기간이 다가오면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집안을 청소한다. 누룩을 제거해야 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이때에 곡식이나 곡식으로 만든 식료품 등을 찾아내어 소각한다. 식료품점에서는 누룩이 들어간 음식들을 아예 가려 놓기까지 한다. 유대인들은 시리얼, 피자, 일반적인 빵류나 면류 등은 이 기간에 먹을 수가 없고, 맛짜(matzah)라고 불리는 크래커같이 생긴 누룩 없는 빵으로 탄수화물을 섭취해야 한다.<br/><br/>유월절은 히브리어로 “페사흐”인데, 문자 그대로 “넘어갔다”는 뜻이라고 한다[한국어 명칭 “유월”도 넘을 유(逾), 넘을 월(越)을 쓰며, 영어로도 “넘어가다”는 뜻의 “passover”를 쓴다]. 설령 종교에 관심이 없거나 “절충적인” 유대교인이라고 할지라도 이 단어의 의미를 모르는 유대인은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곧 그들의 조상들이 이집트에서 나오던 그 밤, 주님께서 첫태생을 치는 재앙을 행하실 때 유월절 양의 피가 발라진 집은 “넘어가” 주셨다는 것을 모르는 유대인은 없는 것이다(출 12:12,13). 주님께서는 그 후 그들을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시켜 주셨으며, 민족적으로 낳으셨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식탁에서의 “세데르”라는 의식을 통해 이 의미를 곱십는다. 세데르는 히브리어로 “절차, 질서”라는 뜻을 가진 단어로, 15가지의 절차로 이루어져 있는 유월절 식탁에서의 의식이다(이 가운데는 “손을 씻는 절차”도 두 번이나 포함되어 있다. cf. 눅 11:38). 어느 랍비의 설명에 따르면 그 각각의 절차에는 모두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에 세데르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다 마치 자기 자신이 출애굽한 장본인인 것처럼 느낀다고 한다.<br/><br/>세데르에 참여한 모든 유대인에게는 “하가다”라고 불리는 일종의 “가이드북”이 함께하는데, 별의별 사람들의 주석이 달린 온갖 버전의 하가다가 있다. 하가다를 한 단락씩 읽으며 출애굽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야말로 유월절 세데르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문제는 유대인들이 이 사건을 “너무 잘 안다는 것”이다. 랍비들은 이미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건을 다시금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이를 어떻게 기억해서 현대에 적용해야 할지에 대한 논의에만 집중했다. 그러한 랍비들의 해석이 실려 있는 하가다를 읽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의 논의에만 심취한다. 이는 그리스도인들도 동일하게 맞닥뜨리는 문제인데, 성경보다는 학자들의 “해석”이나 경건 서적에 더 마음이 가고, 영과 진리로 드리는 경배보다는 성도들과의 교제에 더 마음이 감으로써 주객이 전도되는 것이다. 늘 반복되는 “기본기 훈련”에 충실히 임하는 것이 때로 지루할지 모르겠으나, 그것에서 떠나면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빌 3:1).<br/><br/>한편 “식탁”이라는 의미에서 유월절의 세데르를 살펴보자면, 우리가 성경을 통해 이미 잘 알고 있는 누룩 없는 빵과 쓴 나물과 양고기(정강이 뼈 부위) 외에도 몇 가지 음식이 식탁 위에 더 올라온다. 유대인들은 전통에 따라 준비한 몇 가지 음식을 “세데르 플레이트”(seder plate)라는 이름으로 향유하는데, 앞서 언급한 음식들 외에도 하로셋(작게 썬 사과와 대추야자, 견과류를 포도주스나 와인에 버무려 만든 죽이나 양념장 같은 음식이다. 피라미드를 지을 때 조상들이 사용했던 회반죽을 상징한다), 구운<br/><br/>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세데르01.jpg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1575pixel, 세로 880pixel 사진 찍은 날짜: 2023년 01월 10일 오후 13:52 프로그램 이름 : Adobe Photoshop CS5.1 Windows 색 대표 : sRGB<br/><br/>달걀(성전에서 드린 희생제를 의미한다), 카르파스(맛이 쓴 채소로, 소금물에 두 번 찍어 먹는다. 이집트에서 노예였을 때에 흘렸던 눈물을 상징한다) 등이 포함된다. 세데르 동안에는 총 4잔의 포도주 혹은 포도주스를 마셔야 하는데(당연히 성경에는 없는 내용이다), 미쉬나(랍비들의 구전을 집대성한 책)에 따르면 가난한 사람일지라도 반드시 4잔을 마셔야 한다. 세 번째 잔을 마시는 절차를 치르고 나서 네 번째 잔을 마시기 전, 세데르에는 “선지자 엘리야의 잔”이라고 불리는 “다섯 번째 잔”을 채우는 순서가 있다. 이때 유대인들은 선지자 엘리야를 기다리는 기대감으로 잔에 포도주를 따라 놓고, 집 앞문을 열어 놓곤 한다.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마 11:14)를 이미 거부한 것에 대한, 그 엘리야를 통해 전파된 메시아까지도 거부해 버린 데에 대한(마 17:12) 통회는 찾아볼 수 없다. 물론 그들이 기대하는 대로 엘리야는 다시 올 것이다(말 4:5). 그러나 그때에는 지금의 유월절처럼 웃고 노래 부르며 엘리야를 맞이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엘리야는 사탄이 육화한 적그리스도가 등장하여 유대인들을 박해하는 “야곱의 고난의 때”(렘 30:7)라고 불리는 대환란 기간에 두 증인 중 한 사람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계 11:3). 자신들의 메시아를 거부함으로써 분별력을 잃고, 자기가 느껴야 할 감정이 통회인지 기쁨인지도 모른 채 변질된 유월절을 지키며 엘리야를 기다리는 자들이 현대의 유대인들인 것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07 Feb 2023 17:08:03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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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이스라엘의 회복 (3) 성전 재건을 위한 움직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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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이스라엘의 회복과 관련하여 성전이 세워지는 것은 매우 중대한 사건인데, “성전 재건을 위한 움직임”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신호다. 성전 재건과 더불어 모세의 율법과 번제 및 희생제사도 회복될 것이다. 이에 관한 “예표”가, 첫 번째 회복, 곧 유대인들이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왔을 때의 상황을 기록한 에스라 3장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시 그들은 일곱째 달에 제단을 세운 후 번제를 드렸고 장막절을 지켰으며, “성전의 기초”를 다시 놓으면서 주님을 찬양하고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그들 중에는 과거에 영화로웠던 “솔로몬 성전”에 비해 너무나 초라한 성전 기초를 보면서 큰 소리로 우는 사람들도 있었다(12,13절). 그런 가운데 주위의 대적들의 반대로 성전 공사가 잠시 중단되었다가(스 4,5장), 페르시아의 다리오 왕의 칙령으로 공사가 재개되었고(스 6장), 결국 성전은 기초가 놓인 지 약 20년 만에 완공이 되었다(스 6:13-15). “에스라”에서 예표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성전 재건”은 오늘날 이스라엘이 본토로 귀환한 이후 이제 곧 수년 내에 이루어질 역사적인 사건에 해당한다.<br/><br/>성전 재건은 예언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그는 대적하는 자며, 또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받는 대상 위에 자신을 높여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하나님처럼 보여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하느니라』(살후 2:4). 적그리스도가 환란 기간에 하나님의 성전에 앉기 위해서는 성전이 다시 세워져야만 하는 것이다(계 11:1,2). 특히 “멸망의 가증한 것”(적그리스도)이 거룩한 지성소에 서게 될 시점, 곧 7년의 환란 기간 중 “후 3년 반”이 시작되기 전에 성전이 세워져 있어야 한다(단 9:27; 11:31, 마 24:15).<br/><br/>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의 성전 재건을 위한 움직임은 꾸준히 있어 왔다. 1967년 5월 21일 &lt;워싱턴 포스트&gt;는 성전 재건 프로젝트가 시작되었고 하나님의 돌보심과 도우심으로 완공될 것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1967년 8월 4일 영국의 한 잡지에서는 뉴욕 항구 26번 부두에서 “영국”에서 실은 건축 재료가 이스라엘로 운송되었다고 보도했다. 과거에 페르시아가 성전 재건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듯이, 페르시아가 예표하는 “영국” 역시 성전 재건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것이다. 1986년에는 랍비인 슐로모 고렌이 “유대인들은 시온 산의 성소에서 마땅히 기도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성전이 아니라면 회당이라도 성전 언덕 동쪽 벽 위에 지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br/><br/>1989년 10월 6일 &lt;타임&gt;은 “새 성전을 재건할 때인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으면서, 성전을 다시 세우고 희생제사를 회복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믿는 이스라엘인들이 상당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세 가지 문제점을 지적했는데, 첫 번째는 “누가 제사장이 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문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스라엘에서는 현재 성전 예배에 관하여 학생들에게 상세히 가르치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는 학교들이 이미 문을 열었다. 두 번째 문제는 “그 희생제사를 어디에서 드려야 하는지”에 관한 부분이다. 즉 “성전의 본래 위치가 어디인가”에 관한 문제인데, 흔히들 “바위 돔 사원” 북쪽이라고 생각한다. 세 번째 문제에 관해서는 &lt;타임&gt;이 이렇게 기사를 썼다. “한 가지 어려움이 있는데, 민수기 19:1-10의 율법의 규정처럼 ‘흠이 없는 붉은 암송아지’로 죄를 정결케 하는 의식을 수행하려면 붉은 암송아지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최고위 랍비의 실행 명령에 따라 실행 위원들이 이스라엘 목장의 암소들에게 이식할 붉은 암송아지의 유전자를 구하려고 지난 8월 유럽에서 2주일을 지냈다.” 그만큼 유대인들은 희생제사와 성전 복구를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br/><br/>한편 1989년 10월에는 일단의 유대인들이 성전 건축을 위한 “기초석”을 놓으려 했다가 제지당한 적이 있었다. 1991년에는 게르솜 살로몬이 4톤짜리 모퉁잇돌까지 갖추어 놓았다고 말했다. 1999년 7월 22일자 예루살렘 뉴스에서는 성전 건축 기금 마련을 위한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고, 많은 양의 금을 사들여 성전 건축 비용을 마련하는 것이 프로젝트의 주된 목적이라고 보도했다. 성전 산 헤리티지 재단의 예후다 글릭은 “성전 산에 성전을 짓는 것은 이스라엘의 국가를 설립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다.”라고 말하면서, 금향단과 물대야 등 간단한 성전 기물들을 이미 개발하기 시작했고 성전이 건축되기 전에 총 103개의 기물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하프와 솔터리 같은 악기들, 제사장들의 옷, 42kg 무게에 24K 순금으로 제작된 3백만 달러 가치의 금촛대도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성전 재건을 위한 건축 설계팀의 프로젝트가 한창 진행 중이고 모든 준비는 다 끝났다고도 말했다.<br/><br/>성전 재건을 위한 준비에 있어서 풀어야 할 중대한 과제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성전을 건축해야 할 그 자리에 공교롭게도 오마르의 모스크, 곧 “이슬람 사원”이 서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바위 돔 사원”으로, 마호메트가 날개 달린 말을 타고 하늘로 승천했다는 거짓말을 기념하기 위해 모슬렘들이 건축한 사원이다. 그들은 그 바위 돔 위에 마호메트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고 거짓말하면서 마호메트가 남겼다고 하는 수염 몇 가닥을 선반에 비치해 놓기도 했다. 하지만 마호메트는 예루살렘 근처에는 얼씬거린 적도 없었으며, 다만 꿈에서만 한 번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고 한다. 모슬렘들은 예루살렘을 성지 운운하지만, 사실 그들은 날조된 거짓말과 수염 몇 가닥 때문에 그들의 목숨을 걸고 있는 것이다.<br/><br/>성전이 세워져야 할 장소는 “솔로몬 성전”(대하 3:1)과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재건한 “스룹바벨 성전”(스 6:7)이 세워졌던 바로 그 장소다. 이 장소는 시온 산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 B.C. 1048년경 다윗 왕은 이 장소가 포함된 예루살렘을 여부스인들로부터 탈환한 후 그 성읍을 수도로 정했고 “시온의 요새”라고 불렀다. B.C. 1017년에는 한 여부스인에게 값을 지불하고 “성전이 세워져야 할” 그 땅을 매입하기도 했다. 따라서 성전이 세워질 그 장소에 대한 권리가 모슬렘들에게는 전혀 없다. 그들이 그곳에 그들의 “이슬람 사원”을 지어야 할 어떤 명분도 없다. 그들의 성지가 되어야 할 이유도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밸푸어 선언”(1917년)이 선포되었을 무렵, 유대인들을 증오했던 로마카톨릭 교황이 본토로 귀환하는 유대인들을 견제하기 위해 수백만 달러를 지불하여 오마르의 모스크 사원이 포함된 수백만 평의 땅을 사들였다. 오늘날 이곳은 “요단강 서안 지구”로 불리는데, 그 땅을 사서 이슬람 사람들에 넘겨준 것이다.<br/><br/>1967년에 이스라엘은 6일 전쟁의 승리로 로마카톨릭이 모슬렘들에게 넘겨준 이 땅을 다시 탈환했지만, 당시의 바티칸과 미국 내 카톨릭교도들의 압력으로 예루살렘 안에 있는 오마르의 모스크, 곧 이슬람 사원만큼은 이슬람교도들의 성지로 그대로 남겨 두어야만 했다. 그래서 바위 돔 사원이 그곳에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성전 건축이 현실화되면 주변 아랍국들의 반발이 상당히 거세게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장차 등장할 적그리스도는 자기가 그 성전 지성소에 앉아야 하기에 이스라엘과 이슬람 사이에 “중재자”로 나서게 될 것이 분명하다.<br/><br/>어쨌든 이런 이유들 때문에 현재 성전 재건은 지연되고 있다. 그래서 성전을 재건하려면 무력을 사용하여 그 사원을 헐어 내든지, 아니면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로부터 성전 언덕을 매입해야 한다. 다윗이 한 여부스인에게 값을 지불하고 샀던 것처럼 해야 하는데, 실제로 유대인들은 1억 달러를 주고 그 땅을 매입하겠다는 제안을 한 적이 있지만 이슬람교도들이 거부했다. 다른 방법으로는 자연재해가 일어나서 그 사원이 무너질 때까지 기다리거나 다른 장소에 성전을 지어야만 한다. 1983년 히브리 대학교 교수 카프만 박사는 성전의 위치에 관하여 새로운 학설을 제기했는데, 성전의 지성소 자리가 현재 이슬람 사원이 위치한 장소가 아니라 거기에서 26m 떨어진 지점, 곧 예루살렘 동쪽 문에서 직선 길이에 위치한 지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슬람 사원과 관계없이 성전을 세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방법은 그리스 정교 “사원”에서 예배를 드리는 이슬람교도들과 공동 프로젝트를 해서 성전을 재건하는 방법도 있다. 이것은 에스라 4:2에서 반대자들이 유대인들에게 와서 성전을 함께 건축하자고 제안했던 방법과 유사하다. 물론 에스라 당시에는 그들의 제안을 거절했었다. 이 중 어떤 방법으로 일이 진행될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반드시 성전이 세워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br/><br/>또 어떤 이들은 솔로몬 성전의 건축 기간은 7년이고(왕상 6:38), 예수님 당시의 헤롯 성전은 46년이 걸렸으니(요 2:20), 성전이 재건되는 데 오래 걸리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소망하는 휴거도 지체되고 적그리스도의 등장도 더 지체되지 않겠느냐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성전의 용례를 보면, 그것이 반드시 거대한 건축물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천막과 가죽으로 만들어진 “성막”도 “성전”으로 불렸기 때문이다(삼상 1:9; 3:3,15 등). 만일 성전이 어떤 건축물이 아니라 성막이나 장막으로서의 성전이라면 몇 년이 아니라 48시간 이내에도 세워질 수 있다.<br/><br/>한편 현재 이스라엘에서 세우려는 성전은 결국 적그리스도를 위한 성전이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한 랍비는 “성전이 재건되면 ‘메시아’가 오실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의 이스라엘은 회심하지 않은 상태에서 모여 있는 것이기에 그들이 장차 맞이할 메시아는 “적그리스도”가 될 것이다. 성전이 세워지면 다시 희생제사가 드려질 것이고, 적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이 만든 성전에 앉아 자신을 하나님처럼 보이면서 숭배를 받으려 할 것이다. 처음에는 이스라엘과 더불어 7년 동안 화친을 맺을 것이지만, 그 중간에 그들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고 희생제사와 예물을 금지하고 성소를 더럽히면서 가증함을 확산시킬 것이다(단 9:27). 그런 다음 “반유대주의”로 돌변하여 이스라엘을 잔인하게 박해할 것이다.<br/><br/>이와 연관하여 첫 번째 회복 당시 “본토로 귀환한 자들”의 명단에는 “불길한 모습”을 암시해 주는 한 이름이 등장하는데, 곧 적그리스도의 예표가 되는 “아도니캄”(스 2:13)이다. 특히 그의 자손의 수는 “666명”이었다. 이들은 바빌론 포로에서 귀환하는 첫 번째 회복의 행렬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한 가지는, 장차 나타날 “적그리스도”는 두 번째 회복을 통해 이스라엘로 귀환하는 유대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등장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에 의해 성전은 한 번 더 파괴될 것이다. 성전은 역사적으로 세 번 파괴되는데, 두 번은 느부캇넷살과 티투스에 의해서였고, 마지막 한 번은 미래에 적그리스도에 의해서다(계 11:1-4, 단 9:26).<br/><br/>그러나 대환란 끝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적그리스도와 그의 군대를 멸하시고 천년왕국을 세우실 때 성전을 새롭게 세우실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에스겔 40-48장에서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천년왕국 성전”이다. 에스라 5,6장에는 선지자 “학개”가 등장하는데, 이것이 매우 의미가 있는 것은 그가 “천년왕국 성전”을 예언했기 때문이다. 『이 나중 집의 영광이 먼저 집의 영광보다 더 크리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이곳에 내가 화평을 주리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학 2:9). 학개 선지자는 유대인들이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왔을 무렵, 대적들의 반대로 중단되었던 성전 공사를 촉구하고 예언했던 선지자다. 『이 나중 집의 영광이 먼저 집의 영광보다 더 크리라.』라는 구절을 “역사적으로” 보면 『나중 집』은 당시 스룹바벨의 주도하에 세워진 “스룹바벨 성전”이고, 『먼저 집』은 바빌론의 공격으로 황폐하게 된 “솔로몬 성전”을 가리킨다. 그러나 스룹바벨 성전은 솔로몬 성전만큼 영광스럽지 못했다. 그렇다면 학개 선지자가 『이 나중 집의 영광이 먼저 집의 영광보다 더 크리라.』라고 말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나중 집』이 당시의 스룹바벨 성전이 아니라 장차 재림 때 세워질 영광스러운 “천년왕국 성전”이기 때문이다. 문맥상 “하늘들과 땅과 바다와 육지가 흔들릴 것”이고 “모든 민족이 진동할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을 볼 때(학 2:6,7), 이것은 분명 재림 때의 상황으로 주의 날에 이 땅과 모든 민족 위에 임할 진노를 보여 준다. 이렇게 학개 선지자는 재림 때 일어날 일을 예언하는 가운데 천년왕국 성전을 예언한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재림 때 솔로몬 성전보다 더 영광스럽고 더 위대한 성전을 세우시는 것이다.<br/><br/>비록 지금은 그 자리에 모스크 사원이 세워져 있지만,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셔서 그 사원을 부수실 것이다. 입성하실 때 지금은 시멘트로 굳게 막혀 있는 예루살렘 동문으로 입성하신다. 그 문 바깥에는 거대한 모슬렘 공동묘지가 있다. 말하자면 주님께서는 입성하실 때 이슬람교도들이 경건하다고 여기는 자들의 죽은 시신들을 짓밟으시면서 그 동문을 뚫고 들어가시는 것이다. 그때 그 안에 있는 모든 아랍인과 카톨릭교도를 팔레스타인 땅에서 완전히 몰아내실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분의 이름을 두시려고 선정한 그 장소에 천년왕국 성전을 세우실 것이다. 그때가 되면 모세의 율법, 희생제사와 절기들, 제사장 직분, 레위인들 등이 회복될 것이고, 바빌론 포로 기간에 떠났던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돌아와 성전을 가득 채우게 될 것이다. BB [다음 호에 계속]]]></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7 Jun 2022 15:10:1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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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이스라엘의 회복 (1) 밸푸어 선언 (Balfour Declaration)</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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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예언은 “선지서들”에 자주 등장하는 낯익은 주제다. 선지자들은 하나같이 일관되게 이 사건을 예언했다. 일례로 이스라엘이 총체적으로 배교하여 모든 것이 다 무너졌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에 따라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그 어두운 시대에, 선지자 예레미야는 장차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자비에 따른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소망”을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주께서 옛적에 내게 나타나시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였으므로 내가 자애로 다가섰노라. 오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서게 되리라. 네가 다시 네 작은 북으로 단장하여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춤추는 데로 나올 것이라. 너는 사마리아의 산지에 포도나무를 심을 것이며 심는 자들이 심고 평범한 것으로 그 열매들을 먹으리라... 보라, 내가 그들을 북쪽 지방에서 데려올 것이요, 땅의 지경들로부터 모으리니 그들과 함께 소경과 절름발이와 아이 밴 여인과 아이로 산고하는 여인을 모을 것이요, 큰 무리가 그곳으로 돌아오리라. 그들이 울며 올 것이요, 내가 간구함으로 그들을 인도할 것이며 내가 그들로 물 있는 강가에서 바른 길로 걸어가게 하리니 그들이 넘어지지 아니하리라. 이는 내가 이스라엘에게 아버지이며 에프라임은 나의 첫태생임이니라. 오 너희 민족들아, 주의 말을 듣고 먼 섬들에서 그것을 선포하여 말하라. 이스라엘을 흩으셨던 이가 그를 모으시고 지키시리니 마치 목자가 양떼에게 하는 것같이 하시리라』(렘 31:3-5,8-10). <br/><br/>이 예언들은 과거에 바빌론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이 70년 만에 돌아오는 “역사적인 회복”에만 국한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이 땅에 세워질 “메시아 왕국에서의 회복”으로 귀결된다.<br/><br/>그날이 오면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New Covenant, 렘 31:31-34)을 맺으시면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것인데, 이어지는 문맥에 의하면 그 회복이 “영원한 회복”이 될 것이라고 말씀한다.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그가 태양을 낮의 빛으로 주고 달과 별의 법칙들을 밤의 빛으로 주었으며 파도가 소리칠 때 그 바다를 나누었도다. 만군의 주가 그의 이름이라. 주가 말하노라. 만일 그러한 법칙들이 내 앞을 떠난다면 그때는 이스라엘의 씨도 내 앞에서 민족이 되는 것에서 영원히 끊어지리라.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만일 위로 하늘을 측량할 수 있고 아래로 땅의 기초들을 탐지할 수 있다면 나도 이스라엘이 행한 모든 일로 인하여 그들의 씨 모두를 버리리라. 주가 말하노라』(렘 31:35-37). <br/><br/>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영원히 단절하시거나 끝내신 게 아니며 가까운 미래에 반드시 회복하실 것이다. 그것도 “영원히” 말이다!<br/><br/>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은 어떻게 회복되는가? 우선 그들은 “회심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모인다. “모이는 것”이 먼저이고, “회심”은 그다음이다(겔 37:12-14, 렘 30:18,19). 『그들에게 말하라.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이스라엘의 자손을 그들이 간 이방 가운데서 빼어 내어 사면에서 그들을 모아서 그들의 본토로 데려와 이스라엘의 산들 위에 있는 땅에서 그들을 한 민족으로 만들 것이니 한 왕이 그들 모두에게 왕이 될 것이요,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이 결코 다시는 두 왕국으로 나뉘지 아니하리라』(겔 37:21,22). 일단 “모이는 것”이다! 그런 다음 이어지는 문맥에서 보듯이 “회심”하게 된다. 『그들은 그들의 우상들로나 그들의 혐오스러운 것들로나 그들의 범법 중 어떤 것으로도, 그들 자신들을 더 이상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들이 죄를 지은 모든 처소에서 그들을 구원하여 그들을 깨끗게 하리니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겔 37:23).<br/><br/><br/>이스라엘이 회심하지 않은 채 모이는 일은 영국의 “밸푸어 선언”(1917년)으로 본격화되었다.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계속해서 유대인들은 그들의 본토로 돌아오고 있다. “밸푸어 선언”이 발표될 당시만 해도 팔레스타인 땅에는 유대인들이 2만 5천 명 정도 있었고, 1948년 독립 당시에는 약 100만 명, 2022년 현재는 892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살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보면 1,600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지구 곳곳에 살고 있다. 이렇게 이스라엘 민족이 돌아오는 것과 연관해서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했다. 『두려워 말라. 이는 내가 너와 함께 있음이라. 내가 네 씨를 동쪽으로부터 데려오고 서쪽으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내가 북쪽을 향하여 말하기를 “포기하라.” 할 것이며, 남쪽을 향하여 말하기를 “감금하지 말라.” 하리라. 내 아들들을 먼 곳으로부터, 내 딸들을 땅 끝들로부터 데려오라』(사 43:5,6). 이 예언에서 “돌아오는 순서”를 주목해야 하는데, “동쪽, 서쪽, 북쪽, 남쪽”의 순서인 것이다. 수년 전 이스라엘의 한 군사 지도자가 이 예언을 인용하면서 “현재 우리는 마지막 때에 살고 있음이 분명합니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을 이어 갔다. “1948년 이스라엘이 하나의 ‘독립 국가’가 된 이래로 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온 최초의 무리는 ‘동쪽’의 중국에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다음으로 이스라엘 땅에 정착한 사람들은 ‘서쪽,’ 곧 유럽에서 들어온 무리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러시아를 떠나 ‘북쪽’으로부터 와서 그 땅에 정착하는 러시아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몇 년 전 우리가 소위 ‘모세 작전’이라 불렀던 사건을 겪었다시피 에디오피아, 즉 ‘남쪽’으로부터 공수되어 이스라엘에 들어온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이 말을 한 유대인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재규합하는 이스라엘 민족”에 관한 예언이 실제로 성취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목격한 것이다.<br/>한편 이스라엘이 본토로 귀환하기 시작하는 것은 “한 이방인 왕의 칙령”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께서는 “바빌론 포로”로부터의 회복, 곧 “첫 번째 회복”을 위해 “페르시아 왕 코레스”를 사용하셨다. B.C. 536년 “코레스”가 내린 칙령의 요지는(스 1:1-3) “유대인들은 그들의 본토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A.D. 70년 예루살렘 멸망 이후 전 세계로 흩어졌던 이스라엘의 “두 번째 회복”을 위해서는 “영국 왕 조지 5세”를 사용하셨다. 성경에서 “페르시아”는 “영국”의 모형이다. 다니엘 7장에 나오는 환상에는 바빌론 이후에 세계를 제패할 이방 왕국들을 상징하는 “네 짐승”이 나오는데, 그중 첫 번째 짐승은 “독수리의 날개를 지닌 사자”로서 “페르시아”를 상징한다. 고대 페르시아의 강력한 왕권을 상징하는 동물은 사자였다. 페르시아의 유물 중에는 날개 달린 사자 모양의 황금 또는 은으로 만든 뿔로 된 술잔들이 많이 발견된다. 또한 사자는 “영국”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래서 영국의 “문장”(紋章)에는 사자나 독수리 날개를 가진 사자 모양이 많이 발견된다.<br/><br/><br/>영국이 “밸푸어 선언”을 발표할 무렵, 유럽 전역은 “드레퓌스 사건”(Dreyfus Affair)으로 떠들썩했다. 1894년 10월, 프랑스 참모본부의 포병 대위 “드레퓌스”가 독일 대사관에 군사 정보를 팔아넘겼다는 혐의로 종신형 판결을 받았다. 혐의를 받을 만한 확실한 증거가 없었음에도, 드레퓌스는 무죄가 입증되어 석방될 때까지 무려 12년간 감옥에서 썩어야 했다. 그가 그렇게 혐의를 받은 것은 단 한 가지 이유, 곧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당시 이 정의롭지 못한 사건을 보도했던 유대인 저널리스트가 있었으니, 바로 “테오도어 헤르츨”(Theodor Herzl)이었다. 그는 &lt;유대 국가, Jewish State&gt;라는 책을 써서 “독립적인 유대인 국가의 창설만이 유대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라고 역설했는데, 유대인이 유럽 각국에 동화되는 것은 불가능하고, 오직 유대 국가를 건설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안이며, 이스라엘 민족이 팔레스타인 땅에 정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시오니즘”(Zionism)을 천명한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897년 제1차 시오니즘 총회가 스위스 바젤에서 열렸는데, 이 총회의 창시자가 바로 테오도어 헤르츨이었다.<br/>그즈음 “아세톤”을 개발하여 유명해진 유대인 과학자 “하임 바이츠만”(Chaim Weizmann)이 있었다. 그는 영국에 도움을 호소하면서 유대인들은 “시온”으로 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 당시, 하임 바이츠만은 옥수수에서 추출하여 만든 아세톤을 “윈스턴 처칠”이 이끄는 영국 해군에 넘겨주었고, 영국은 이것을 함포 사격에 사용함으로써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런 일련의 일들이 일어나기 전인 1906년부터 하임 바이츠만은 영국의 외무장관 “아서 제임스 밸푸어”(Arthur James Balfour)와 상론하면서 “시온주의”에 관한 구상을 해 오고 있었다. 당시 밸푸어는 국제 정세를 고려하여 유대인들을 위한 국가가 세워지기에 적합한 장소로 팔레스타인 땅이 아니라 아프리카의 “우간다”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밸푸어는 젊은 바이츠만에게 “우간다에 국가를 세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제안했다. 그때 바이츠만은 그 제안을 거절하면서 이렇게 대꾸했다. “만일 내가 당신에게 프랑스의 파리를 제안하면 당신은 런던을 포기하겠습니까?” 그러자 밸푸어는 말했다. “물론 아니죠! 그러나 런던은 영국의 수도가 아닙니까?” 이에 바이츠만이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요? 그런데 예루살렘은 런던이 아직 밭두렁에 불과했을 때부터 유대인들의 것이었습니다.” 실로 옳은 말이었다!<br/><br/><br/>이제 때가 무르익어 가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1년 전인 1917년 11월 2일, 드디어 역사적인 “밸푸어 선언”이 이방인 왕 영국의 조지 5세의 승인 속에 외무장관 밸푸어를 통해 발표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밸푸어는 영국 국적의 저명한 유대인 “로스차일드”(Rothschild)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친애하는 로스차일드 경, 국왕 폐하의 정부를 대표하여 유대 민족의 “시오니즘”의 열망에 찬성하는 내용의 선언문을 전달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아래의 사항은 내각에 제출되어 동의를 얻었습니다. 국왕 폐하께서는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의 유일한 본국을 수립하는 것과 유대인들이 그 목표를 추진하고 성취하는 데 있어서 최상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찬성하시는 바입니다.｣<br/><br/><br/>이 선언이 발표된 지 6주 후인 1917년 12월 11일에 영국의 “알렌비”(Allenby)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이슬람권 국가인 터키가 장악하고 있던 예루살렘을 탈환하게 된다. 이로써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나라로 돌아갈 수 있는 모든 길을 마련해 주신 것이다. 그러나 1921년 3월 27일,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어리석게도 이 선언을 뒤집고 말았다. 국제 여론과 모슬렘들의 폭동을 두려워했기 때문인데, 결국 그는 이스라엘 영토의 “3분의 2”(트랜스 요르단)를 모슬렘들에게 넘겨주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두려워함으로써 내린 이 어리석은 결정 하나가 영국의 “태양”을 지게 했고, 영국을 삼류 국가로 전락시켜 버렸다. 『너를 축복하는 자들에게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리라. 네 안에서 땅의 모든 족속들이 복을 받을 것이라』(창 12:3).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14 Feb 2022 17:35:04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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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이슬람의 베일을 벗기다 10 - 코란의 허구성</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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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경전을 절대적으로 여기는 신앙이 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다. 변질된 기독교인이 많기는 하지만, 정상적인 기독교 신앙은 모든 여타의 종교와 달리 성경을 &#034;믿음과 실행의 최종권위&#034;로 삼는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기록하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br/>&nbsp; 그런데 여기 그들의 경전을 절대적으로 여기는 종교가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이슬람이다. 그들도 자기들의 경전인 코란을 알라의 말씀이라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 생활의 모든 면들을 코란에 나타난 샤리아(율법)에 맞춘다. 그러나 그것은 유대교나 기독교 신앙을 흉내내는 것일 뿐 결코 최종권위로서의 경전을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경전은 전혀 영감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장에 따른다 하더라도, 코란은 가브리엘 천사가 마호메트에게 말하여 준 것을 마호메트의 제자들이 전달받아 기록한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034;직접&#034; 계시해 주신 것이다. 계시의 주체도 다르고 권위도 다르고 기록하는 과정도 다르다. 코란은 그리스도인들이 최종권위로 여기는 성경과 비교 자체가 안 되는 책이다. <br/><br/>1. 코란의 형성<br/>&nbsp; (1) 어설픈 기억력에 의지해 쓰여진 코란<br/>&nbsp; 코란은 마호메트가 610년부터 632년, 그가 죽을 때까지 간헐적으로 받은 예언들을 암송 형태로 전달한 것이다. 가브리엘이 마호메트에게 계시했을 리도 만무하지만, 설사 계시했다 할지라도 그는 그것을 기록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문맹자였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그 &#034;계시&#034;들을 암송할 뿐이었다. <br/>&nbsp; 마호메트는 자기 추종자들에게 그 내용들을 계속 암송하도록 했고, 많은 사람들이 암송하다 보니 서로가 부정확한 암송을 하게 되어 그 원래의 내용이 무엇인지 정확해지지가 않게 되었다. 이 경우 마호메트 자신만이 그 원래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절대적 존재가 되는데, 그 역시 기억력이 부족한 인간인 것을 부정할 수가 없다. 실제로 마호메트는 코란의 내용을 종종 잊었었고, 그래서 다른 사람이 암송하는 것을 들으며 자기가 잊은 구절들을 기억해내곤 했다 한다(&lt;하디스&gt;, 부카리 편, 제6권, no.558). <br/>&nbsp; 이렇게 많은 부정확한 암송들이 이루어지다 보니 심지어 서로 모순되는 암송들도 많아지게 되었다. 그래서 마호메트의 계승자(칼리프)들은 그 구전 코란을 기록할 필요를 느꼈으며, 제1대 칼리프 아부 바크르(Abu Bakr, 632-634)는 마호메트 당시의 계시를 아직도 암송하고 있는 자이드 이븐 타빗에게 그 암송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집, 정리하게 한다. 그리고 제3대 칼리프 오트만(Ottman, 혹은 Uttman, 644-656)은 그 수집된 문서들을 편집하게 했는데, 그 과정에서 마호메트의 13명의 아내들 중 한 명이 갖고 있는 사본만을 인정하여 나머지 코란들은 파기시켜 버렸다. 이렇게 해서 코란은 일차적으로 완성된다. 그러나 그는 이 코란을 여러 사람에게 맡겨 보존케 했는데, 보존 과정에서 각 코란들은 서로 다른 양상을 띠었고, 결국 후대에 학자들을 통해 그 진위를 가릴 수밖에 없는 지경이 되었다. 또한 여러 번에 걸친 교정 작업으로 인해 오늘날의 코란은 원래 7세기에 만들어진 코란과는 많이 다른 모습을 띠고 있다. 그럼에도 무슬림들은 &#034;코란은 처음에도 완벽하고 지금도 완벽하다.&#034;고 주장한다. <br/>&nbsp;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다. 성경은 처음부터 문서의 형태로 존재했었다.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선지자들은 구전으로 전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034;기록&#034;했다. 향후 누군가가 그 기록을 필사하더라도 원기록이 있기 때문에 그 진위 여부를 가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또한 수십세기를 거쳐오는 과정에서 성경의 필사본들은 5천 개 이상이 되는데, 그 중 의도적으로 변개한 사본을 제외하고는 놀라우리 만큼 필사본 상호 간에 일치를 보이고 있다. 무슬림들은 &#034;성경도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지만 지금의 성경은 전수 과정에서 너무나 변질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034;라고 주장하지만, 그렇다면 그 원래의 하나님 말씀이었던 성경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성경과 너무나도 다른 &#034;원래의&#034; 성경 사본이 하나라도 발견되어야 한다. 그들의 주장처럼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번제물로 바쳤다든지, 이스마엘을 데리고 메카로 내려갔다든지 하는 내용이 들어 있는 &#034;원래의 성경&#034;(?)이 하나라도 발견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성경은 처음부터 우리가 믿는 그대로 기록되어 있었다고 믿어야 하지 않겠는가?<br/><br/>&nbsp; (2) 마귀에게 계시받은 코란<br/>&nbsp; 이와 같이 코란의 큰 문제점은 전수 과정, 즉 기록 이전에 구술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불완전한 인간 기억력에 의존한 코란이 영감으로 주어졌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점이 있으니, 그것은 마호메트가 받은 그 계시의 진위 여부이다. 그는 가브리엘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데, 사실 그 기간 중 마호메트는 수시로 간질병에 의해 발작을 일으키곤 했다. 그는 온전치 못한 정신 상태를 갖고 있었고, 좀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그는 마귀에게 이끌림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즉 그에게 계시해 준 존재는 성경의 가브리엘이 아니라 마귀였다. 일단 그는 600개의 날개를 가진 천사가 그에게 계시해 줬다고 말하나, 성경의 가브리엘은 단 한 개의 날개도 갖고 있지 않다. <br/>&nbsp; 그가 첫 계시를 받고 자기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두려워 떨고 있을 때, 그의 아내의 사촌인 와라카는 &#034;당신은 모세에게 나타났던 그 가브리엘 천사를 만난 것이다.&#034;라고 말하며, 마호메트를 &#034;이전에 성경에서 예언한 그 선지자&#034;라고 추켜세우기까지 했다. 말하자면 와라카는 마호메트 계시를 해석해 주는 사람이었다. 그는 구약과 신약의 해박한 필사자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그는 마호메트의 아내 카디자와 더불어 신실한 로마카톨릭 교도였다. 마호메트는 이 두 카톨릭 교도들을 통해 신구약 성경 이야기들을 어느 정도 들었을 터, 그것은 그의 &#034;계시&#034;에 상당히 작용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마호메트는 성경 이야기들을 듣고 그 내용들을 자기 &#034;계시&#034;에 접목시켰는데, 그러는 과정에서 성경 사건들과 인물들이 마구 뒤섞이게 된다. 그리고 그것들이 아내들과 추종자들의 입을 통해 다시 암송되었으니, 결국 코란은 마호메트의 거짓 계시와 아내들과 추종자들의 합작물인 셈이다. <br/><br/>2. 코란의 거짓말들<br/>&nbsp; 코란에는 수많은 오류들이 있지만, 그중에 누가 봐도 웃을 만한 역사적 오류 몇 개를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br/>&nbsp; 코란에서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는 &#034;마리얌&#034;이라고 기록된다. 그런데 이 마리얌은 아론과 모세의 누이 &#034;미리암&#034;에 대한 아랍어이다. 실제로 코란 19:28에서는 그녀를 &#034;아론의 누이&#034;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코란은 1,500년의 시간적 간격이 떨어져 있는 두 여인, 즉 마리아와 미리암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마호메트는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성경 이야기들을 자기의 &#034;계시&#034;에 적용하다 보니 혼동을 일으킨 것이다. <br/>&nbsp; 또 모세의 이야기를 설명함에 있어서 이스라엘을 박해한 파라오를 말할 때, &#034;파라오와 하만&#034;의 군대라 말한다(28:6,8). 이 &#034;하만&#034;은 에스더서에 나오는 그 하만이다. 파라오나 하만의 공통점이란 단지 이스라엘을 미워하여 멸하고자 했다는 것뿐이다. 마호메트는 모세의 이야기와 에스더의 이야기를 각각 듣고 하나님의 백성을 멸하려는 두 원수, 즉 파라오와 하만을 혼동해 버려서, 하만을 파라오의 신하라 말해 버렸다. 모세와 에스더 사이에는 1,000년의 시간적 간격이 존재한다. <br/>&nbsp; 이 두 예는 머리 나쁜 마호메트의 단순한 혼동이라고 치고, 이보다 더 의도적으로 왜곡한 사례가 있으니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에 관한 것이다. 5:111에는 알라가 예수님의 사도들에게 &#034;나와 나의 사도를 믿으라.&#034;고 하였더니, 그들이 믿겠다고 고백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034;나의 사도&#034;는 마호메트를 말하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제자들이 마호메트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1세기 사람들이고 마호메트는 7세기 사람이다. 그러나 이것은 마호메트가 성경 사건들에 대해 일으킨 단순한 혼동이 아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자기가 예수님보다 높은 존재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침례인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 때 그것은 요한이 증거한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듯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마호메트의 제자가 된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증거하신 분이 마호메트라고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무슬림들은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 주신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 &#034;위로자&#034;(요 14:16)를 마호메트라 해석한다. 그들은 마호메트를 모세가 예언한 그 선지자(신 18:18)와 예수님이 예언한 위로자로 여기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에서 모두 예언한 최종 선지자로 여기는 것이다. <br/>&nbsp; 무슬림들은 &#034;우리는 모세와 예수를 모두 믿는다&#034;라고 말하여 성경을 존중하는 것 같은 위선을 부린다. 코란에서도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19:16-36) 기적들(5:110)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에 대해 말할 때면 &#034;마리아의 아들 예수&#034;라고 말하고 있다(5:110,112,116 등).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심하게 격하시키는 것이다. 동시에 마리아를 강조함으로써 그녀를 격상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마호메트의 두 조언자(아내와 그녀의 사촌)가 신실한 로마카톨릭이었음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br/>&nbsp; 그들에게 예수님은 마리아의 아들일 뿐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 반면 마호메트를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신격화시키는데, 그것은 코란에서 알라의 말을 기술할 때 &#034;우리&#034;라는 대명사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코란의 어느 장이라도 펼쳐 보라). 창조를 말할 때도(78:6,8), 심판을 말할 때도(76:4), 그 외 어떠한 것을 말할 때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창세기 1:26에서 하나님께서 &#034;우리의 형상대로&#034;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을 흉내낸 것이다. 물론 이슬람에서는 공식적으로 삼위일체를 부정한다. 하지만 그들이 &#034;우리&#034;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암암리에 마호메트를 그 자리에 집어 넣고 싶어한다는 것을 잘 보여 주는 것이다. 이슬람 학자들은 아랍어에서 &#034;우리&#034;라는 말과 &#034;나&#034;라는 말은 상호교환적이라 변명하지만, 코란이 처음에는 마호메트의 &#034;입&#034;으로 &#034;구술&#034;되었다는 장면을 그려보라. 마호메트는 대중들 앞에서 코란을 읊으면서 &#034;우리...&#034;가 세상을 창조했으며 심판한다고 말한다. 대중들에게 그것은 자신에 대한 신격화가 되지 않겠는가? 반면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과 한 분이라고 직접적으로 선언하셨다(요 10:30). 왜냐하면 그분은 정말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br/>&nbsp; 또한 코란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지 않았으며, &#034;단지 그와 같이 보였을 뿐이다.&#034;(4:157)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분의 구속사역을 부인하는 것이다. 코란은 철저하게 행위구원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구속주의 죽음으로 죄인이 구원받는다는 대속의 교리를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br/>&nbsp; 여기에서 코란의 허구성이 다시 한번 드러난다. 그들은 구약과 신약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듯이 말하면서 코란이 마지막 완성된 계시라 말한다. 그렇다면 구약과 신약이 연속되면서도 신약이 구약보다 향상된 진리를 선포한다는 관점이 그대로 코란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과연 코란이 신약보다 향상된 진리를 선포하는가? 구약은 율법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신약에서 은혜와 자유를 주심으로써 구약보다 향상된 진리를 보여 주셨다. 그렇다면 코란은 은혜와 자유보다 더 향상된 무엇인가를 제시해야 한다. 하지만 코란은 다시 율법으로 돌아간다. 그것도 구약보다 더욱 심한 율법 사회로 이끌어 버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혜로 풀어 놓아준 것을 다시 율법으로 묶어 버린 것이다. 다만 유대인의 율법이 아닌 또 하나의 율법으로 말이다.<br/>&nbsp; 이로써 이슬람은 율법으로 통제받는 신정국가를 추구하는 정치-종교 야합 기구가 되었다. 마호메트와 칼리프들과 수많은 이슬람 지도자들은 바로 그 신정국가를 위해 수많은 피를 뿌린 자들이다. 하지만 분명히 기억하자. 진정한 신정국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만 이루어진다. 재림 이전에 신정국가를 추구하려는 자는 혼란만 야기시킬 뿐이다.&nbsp; BB]]></description>
<dc:creator>지식뱅크 관리자</dc:creator>
<dc:date>Wed, 25 May 2016 11:53:3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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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이슬람의 베일을 벗기다 9 - 테러를 준비하는 "헌신된" 무슬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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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참으로 이상하게도 우리나라는 사건이 난 다음에 분주하게 수습하려는 습성이 강하다. 먼저 깨달은 사람들이 경고함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에 대해 콧방귀만 뀌다가 일이 벌어진 다음에야 왜 그랬느냐고 싸우기만 한다. 이번에 (참으로 안타깝게도) 벌어진 천안함 사건도 그 일이 벌어지고 나서야 북한의 위협에 대해 아웅다웅한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북한의 위협을 경고했었는가? <br/>&nbsp;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 사람들이 감지하지 못하는 중요한 위협이 있다. 바로 이슬람의 위협이다. 그것은 우리나라에서 그 교세의 크기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이슬람은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테러 집단이라는 것을 주지해야 한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 사람들은 그 위협을 감지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감지하려는 의지조차 없다. 오히려 오늘날은 다문화사회를 존중하자는 목소리가 커지는 추세여서, 우리 사회에 있는 소수 민족, 소수 종교에 대해 보호하려는 입장이 강하다. 하지만 바로 그 틈새를 비집고 이슬람은 그 사악한 마수를 뻗치고 있다. <br/><br/>&nbsp; 지난 2007년 탈레반이 한국인들을 억류하고서, 아프간 파병 한국군을 철수하라고 위협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이라크에 파병중이기 때문에 이 위협은 아직도 유효하며, 그들은 지금도 우리나라에 테러를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그 테러는 외부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도 충분히 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br/>&nbsp; 만약 &#034;헌신된&#034; 이슬람교도인 한 군인이 아프간이나 이라크로 파병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치자. 그가 어떻게 할 것 같은가? 단순히 파병에 참여하지 않는 소극적 자세만 취할 것 같은가? 그렇지 않다.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우리 군에 해를 가할 것이다.<br/>&nbsp; 이러한 일은 실제로 미국에서 일어났었다. 지난 2009년 11월에는 아프간 파병을 위한 신체검사장에서 한 미국 장교가 무장 난사해서 12명의 미군이 사망하고 42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평범한 미군 소령이었으며 &#034;헌신된&#034; 무슬림이었다. 그는 평소에 &#034;나는 미국인이기 이전에 무슬림인 것이 더 중요하다.&#034;고 늘 말했었다고 한다. 그러던 그에게 아프간 파병 명령이 떨어졌고, 그는 고민 끝에 신변을 정리하고 신체검사하는 부대로 무장한 채 들어가서 동료 장교와 사병들을 쏴죽인 것이다(크리스찬투데이, 2010.1.25). 이러한 일이 우리나라에서는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br/><br/>&nbsp; 최근 우리나라에는 탈레반 소속 의심자 한 명이 밀입국해 활동하다가 붙잡힌 사건이 있었다. 2월 22일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파키스탄인 A씨(31)는 2001년 입국해 불법체류하다가 2003년 6월에 추방되었으나, 그해 8월 친형의 여권에 자기 사진을 붙이고 재입국해 활동하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단순히 외국인 근로자로 활동한 것이 아니라 이슬람 사원의 &#034;이맘&#034;(이슬람 성직자)으로 활동했다는 것이다. 그가 활동한 대구 성원(모스크)은 지역 파키스탄인들의 모금을 통해 세워진 조직이라 한다. 그렇다면 대구 성원에 소속된 모든 무슬림들은 이 파키스탄 밀입국자를 감싸주었다는 말이 된다. 대구 성원에는 파키스탄 사람들만 있지는 않았을 터, 그외 다수의 한국인 무슬림, 혹은 이슬람에 호의적인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이 탈레반을 선전하고 다녔는지 알 수 없다. <br/>&nbsp; 그는 2007년에 한 번 출입국관리소의 조사를 받았으나, 자신은 형일 뿐이고 조사대상인 동생(실제로는 자기 자신)은 이미 죽었다고, 파키스탄 지방 정부에서 발행한 사망증명서를 보여 주고 풀려 났었다. 그렇다면 이 일에 파키스탄 지방 정부까지 개입되었다는 말이 된다. 그가 이번에 경찰에 붙잡혀 모든 것이 밝혀진 것은, 1,000억 원 상당의 중장비를 해외로 빼돌리려는 혐의 때문이었다. 밀입국뿐 아니라 이러한 국가적 범죄 행위는 도저히 한 종교의 지도자가 행할 일이 아니다. 이슬람이 그래도 &#034;종교&#034;라면 선한 일을 행해야 하는 것 아닌가? 코란에서도 선행을 하라고 말하고 있으며, 선행을 해야 천국 간다고 그들의 교리도 말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도 그는 종교지도자의 이름으로 이러한 일들을 행했다. 왜 그런가? 그것은 그가 바로 탈레반이었기 때문이다. 즉 &#034;헌신된&#034; 무슬림이었다는 것이다. <br/>&nbsp; 헌신된 무슬림은 자기 종교의 전파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한다. 그들이 말하는 바 최고의 선행은 알라를 위해 싸우다 죽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전쟁이 그렇듯이 술수와 거짓말은 정당화되는 것이다. 그들은 항상 말하기를, 진정한 &#034;지하드&#034;는 물리적인 전쟁이 아니라 말과 행동(선행)으로 이슬람교를 전파하는 것이라 한다(마치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하듯이). 하지만 그러한 전파에서마저도 그들은 거짓말을 밥먹듯 한다. 이것은 그들의 지하드가 물리적인 전쟁이든 종교의 전파든 거짓과 술수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그들의 교리 가운데는 비무슬림들을 속여도 된다는 교리가 있다(이것을 &#034;타끼야, Taqiyah&#034;라고 한다). 심지어 코란에서는 이방인들과 맹세를 했어도 그것이 진심이 아니었다면 알라가 용서한다고 말한다(코란 2:225). 반면 성경은, 서원한 것은 손해를 입어도 바꾸지 말라고 말씀한다(시 15:4). 성경 전체에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성품 중 하나는 &#034;신실하심&#034;(faithfulness)이다. 신실하시다는 것은 약속을 지키신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br/>&nbsp; 무슬림들은 지하드를 &#034;악&#034;과 싸우는 것이라 말하는데, 거짓으로 어떻게 악과 싸울 수 있는가? 그러나 성경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딤전 6:12)고 말씀한다.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전쟁은 거짓과 술수로 행해지지 않는다. 더더욱 중장비들을 해외로 빼돌림으로 행해지지는 않는다. <br/>&nbsp; 그 파키스탄 출신의 이맘이 1,000억 상당의 중장비를 빼돌리려 했을 때, 그는 무슨 목적으로 그 일을 하려 했을까? 아마도 개인적인 사리사욕을 채우려 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는 적어도 &#034;이맘&#034;이 아닌가? 그의 목적은 종교적인 것이며, 그가 탈레반임을 감안할 때 그것은 테러 자금이 아니었을까?<br/>&nbsp; 자,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일이 바로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탈레반은 우리나라에 테러를 가하겠다고 벌써 수차례나 경고한 바 있다. 그리고 그 일은 서서히 무르익어가고 있다. 우리나라에 &#034;헌신된&#034; 무슬림은 외국인 근로자라는 신분으로 매우 많이 들어와 있다. 다문화가정으로 포장하여 우리 사회에 정착하고 있는 무슬림들은 또 얼마나 되는가? 그들에 의해서 헌신되어 가고 있는 한국 무슬림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br/>&nbsp; 우리나라는 그들에 대해 너무 안일하고 관리가 너무 허술하다. 여권 사진 위조 하나 잡아내지 못한 것 아닌가? 이제 우리는 행정력을 철저히 동원해서 그들을 잘 관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에 대해 경각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반복해 말하지만 그들은 단순한 종교 집단이 아니다. 그들 종교의 경전 자체가 무력 확장을 주장하는 폭력의 종교, 전쟁의 종교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종교의 자유가 있기에 특정 종교를 박해하거나 제재할 수는 없지만, 그 종교가 국가 정체성을 위협한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존재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평화의 종교, 관용의 종교로 포장해 오는 그들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고, 우리의 믿음을 성경적 지식 안에 굳게 세워야 할 것이다.&nbsp; BB]]></description>
<dc:creator>지식뱅크 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4 May 2016 17:02:29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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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이슬람의 베일을 벗기다 8 - 종교 “의식”을 위해 목숨 바치는 자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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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지난 2월 19일, 아프리카 모로코에 있는 이슬람 사원에서는 첨탑이 붕괴되어 예배를 드리던 무슬림 신도 40여 명이 죽고, 7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얼마 전에는 부두교의 나라 아이티가 대참사를 당하더니, 이번에는 대표적인 마귀의 종교 이슬람 사원에서 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비록 아이티에 비해서 소규모이긴 하지만, 사원 첨탑이 붕괴되었다는 것은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첨탑(미나렛)은 이슬람에게 매우 중요한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이슬람 사원에는 대부분 첨탑이 있는데, 이는 예배 시간을 알리는 자가 높은 데 올라가 외쳤다는 데에서 유래되었다. 그러므로 첨탑이 붕괴되었다는 것은 그들의 예배가 붕괴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아닌게 아니라 그 붕괴의 시간도 예배 시간이어서, 그 가증한 경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의미가 뚜렷이 드러난 것이다. 그들의 예배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바 영과 진리로 드리는(요 4:24) 참된 경배와는 차이가 크다. 그들이 우상에게 경배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들의 경배는 하루 다섯 번이라는 극도의 종교성이 가미된 형식적 예배일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034;형식&#034;을 갖추는 것이 이슬람교의 교리이다. 그들은 종교 행위를 통해 그들의 종교적 정체성을 공고히 한다. <br/>&nbsp; 이슬람교도들은 흔히 자기들 종교가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더 발전된 종교라고 주장한다. 구약과 신약을 바로잡아 완성한 것이 코란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구약이라는 행위의 언약이 신약이라는 은혜의 언약으로 바뀌었는데, 왜 코란이라는 행위의 종교로 돌아가는 것이 발전인 것인가? 그것은 오히려 퇴보가 아닌가? 어떤 종교가 행위, 그것도 형식화된 종교 행위를 강조할 때 그것은 그 행위를 통해 그 종교 공동체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다. 어차피 그들의 신은 참 하나님이 아니므로 가만 놔 두어서는 그 신을 온전히 숭배할 수 없다. 그래서 억지로 종교 행위를 만들어서 그 종교의 명맥을 유지해야만 하는 것이다. 특히 이슬람교는 로마카톨릭이나 그리스정교와 경쟁 상태에서 성장하다 보니 그들 종교의 정체성을 세우는 것이 중요했고, 그래서 백성들을 종교 행위로 단단히 묶어 놓아 버렸다. 필요하다면 그 종교적 정체성을 위해서 전쟁도 불사하게 되는 것이다.<br/><br/>&nbsp; 이와 연관해서 그들 종교를 떠받치고 있는 &#034;다섯 가지 종교 행위들&#034;을 살펴보자. 이 다섯 가지는 보통 &#034;5주&#034;(5柱)라고 하는데, 이는 그들 교리의 근간을 이루는, 말 그대로 &#034;다섯 개의 기둥&#034;을 말한다. 초승달과 별이 이슬람교의 상징물이라면, 초승달이 알라를 상징하고 별이 바로 이 &#034;5주&#034;를 상징한다. 그리고 이 다섯 가지 기둥이 그들 종교의 행위 구원적 요소를 아주 잘 나타내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br/>&nbsp;<br/>&nbsp; 1. 신앙고백(샤하다)<br/>&nbsp; 이것은 &#034;나는 알라 외에 신이 없음을 증언합니다. 또한 나는 무함마드가 알라의 사도임을 증언합니다.&#034;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 종교의 핵심 교리이며 그들 신앙의 근간을 이루는 매우 중요한 고백이지만, 그들은 이 고백을 습관적으로 말한다. 예배드릴 때뿐 아니라 하루에도 수차례씩 습관적으로 반복 암송한다. <br/>&nbsp; 이것은 마치 형식적 기독교에서 사도신경을 무의미하게 반복 암송하는 것과도 같다. 믿음 없는 교인들이 사도신경으로서 자신의 &#034;신앙을 고백&#034;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단지 그가 일요일에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는 것 외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는 자기 자신을 형식화된 종교 행위에 묶어 버림으로써 그리스도인으로 여기고 있는 것뿐이다. 마찬가지로 무슬림들도 이러한 종교적 고백을 형식적으로 반복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이슬람 신자임을 인식한다. 이것을 반복하지 않으면 정체성이 흔들린다. 알라와 무함마드가 마음속에 살아 있지 않기 때문에 억지로, 수시로, 습관적으로 반복하지 않으면 종교적 정체성이 흔들리는 것이다. <br/><br/>&nbsp; 2. 예배(쌀라)<br/>&nbsp; 무슬림들은 매일 다섯 번 정해진 시간(일출 전 새벽, 정오, 오후, 일몰 후, 밤)에 메카를 향해 예배(기도)를 드린다. 이 시간은 정확해야 하며, 메카를 향하는 그 방향도 정확해야 한다. 여자들은 보통 집에서 예배를 드리며, 남자들은 모스크에서 행하도록 권장받지만 여행 중이나 특별한 경우에는 다른 곳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다. 그러나 금요일에는 모스크에서 공동 예배를 드린다. 이번에 모로코에서 일어난 참사도 금요일 예배 중에 있었던 일이다. <br/>&nbsp; 왜 그들은 꼭 메카를 향해서 기도해야 하는가? 구약에서 다니엘은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했었다(단 6:10).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곳에 그분의 이름을 두셨었기 때문이다(대하 6:36-39). 반면 신약 성도들은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약 성도들은 그들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이다(고전 6:19). 그렇다면 메카에는 무엇이 있는가? 거기에는 &#034;카바&#034;라는 성소와 &#034;검은 돌&#034;이 있다. 검은 돌이 있는 곳을 향해 경배한다면, 그 검은 돌이 알라의 임재라도 된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알라가 무소부재하지 않음을 시인하는 것이며, 그들 스스로가 돌을 숭배하는 종교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다. 결국 아무 의미 없는 이 일을 왜 그토록 열심히 하는가? 그것은 바로 그 종교 행위의 형식을 반복함으로써 그들의 종교적 정체성을 세우기 위함인 것이다. <br/><br/>&nbsp; 3. 단식(사움)<br/>&nbsp; 무슬림들은 이슬람력 9월(라마단) 한 달 동안 해가 떠 있는 시간 동안 단식을 한다. 대신 해가 떨어지면 먹는다. 축제처럼 마구 먹는다. 하루 동안 못먹은 것을 보충하듯이 먹는다. 즉 이 일 역시 아무 의미 없는 종교 행위일 뿐이다. 이 한 달 동안 식사 시간이 좀 옮겨졌다고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그들은 이 일로 인하여 자신들이 무슬림임을 강조한다. 반면 그리스도인들은 금식을 하지 않아도 믿음의 정체성을 전혀 잃지 않는다. 다만 간절한 기도가 있을 때 특별한 경우 자원함으로 금식을 할 수 있다(마 17:21).<br/><br/>&nbsp; 4. 희사(喜捨, 자카트)<br/>&nbsp; 쉽게 말하면 &#034;자선 혹은 헌금&#034;이라는 말인데, 수입의 40분의 1을 바치며, 가난한 자들이나 종교 종사자에게 사용된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봉사활동으로 희사를 대신하기도 하는데, 이는 일반 세상에서도 행해지는 &#034;선한 일&#034;이다. 어느 사회,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자선은 선한 일로서 권장된다. 다시 말해서 이는 이슬람교만의 특징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 일을 행함으로 스스로를 참된 무슬림이라고 여긴다. 이 역시 선행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행위 구원적 요소를 잘 보여 주는 것이다.<br/>&nbsp; 또한 희사가 사용되는 중요한 내역 중 하나는 이슬람 선교인데, 여기에는 그들의 테러 활동도 포함된다. 마치 WCC에 가입된 교회들의 헌금 중 일부가 공산주의자들에게 지원되는 것처럼, 이슬람의 희사 역시 테러리스트들에게 지원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희사를 통해 무슬림의 정체성을 세우는 것은 그들로서는 당연한 일인 것이다. <br/><br/>&nbsp; 5. 성지순례(하지)<br/>&nbsp; 이슬람력 12월에 행하는 메카 순례를 말하는데, 모든 성인 무슬림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일생에 한 번은 성지순례를 행해야 한다. 카바 성전 주위를 7번 돌고, 아브라함의 발자국이 있는 곳에서 두 번 허리 굽혀 절하고, &#034;잠잠&#034; 우물(이스마엘이 마셨다는 샘)에서 물을 마시고, &#034;싸파&#034;와 &#034;마르와&#034; 언덕 사이를 7번 돌고(하갈의 방황을 상징), &#034;미나&#034;에서 사탄을 상징하는 세 기둥에 7개의 작은 돌을 던져 사탄을 죽이는 시늉을 한다. 그리고 카바에서 14km 떨어진 &#034;아라파트&#034;에서 하룻밤을 자는데, 이곳은 아담과 하와가 하늘에서 내려와 재결합한 후 경배했다고 주장하는 곳이다. 이 의식의 우스꽝스러운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그 많은 무슬림들이 한 달 동안 메카에 모이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작년에도 250만 명이 운집했다고 하니, 그만한 대규모 집회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런 곳에서 사고가 없겠는가? 아닌게 아니라 각종 사고가 일어나는데, 그들은 순례 중 죽으면 곧장 천국에 간다고 여기기 때문에 힘 없는 노인들은 차라리 이 &#034;하지&#034; 중에 사고당해 죽기를 바라기까지 한다고 한다. <br/><br/>&nbsp; 이처럼 무슬림들은 철저한 종교행위로 자신들의 신앙을 포장하고 있다. 그들은 목숨걸고 믿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자기들의 진리를 전파하기 위한 순교가 아니라 종교행위를 지키기 위해 죽는 광신이다. 이 행위들로 구원받으려 하고, 이 행위들로 스스로를 지키려 하고, 이 행위들을 위하여 수많은 전쟁과 테러를 수행한다. 그것이 이슬람이다. 지구상에 5분의 1이 그러한 삶을 살다가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이다.&nbsp; BB]]></description>
<dc:creator>지식뱅크 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3 May 2016 10:53:49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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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이스라엘을 위한 율법과 교회를 위한 은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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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면서도 율법을 지키거나 계명들에 순종함으로써 구원을 유지하려고 애쓰거나 가르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에게는 율법과 은혜에 관한 진리의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복음의 진리를 아는 것은 단지 은혜의 복음을 아는 것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과 은혜를 성경적으로 분별하는 진리의 지식에 이름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한국 교계에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교리로 적용함으로써 이단 교리들을 확산시키는 자들이 넘쳐난다. 이제 율법과 은혜를 혼란스럽게 하는 이단 교리들을 바로잡고 건전한 교리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br/><br/>1. 율법과 이스라엘<br/><br/>&nbsp; 1) 율법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이다.<br/>&nbsp; 율법은 십계명과 기타 모든 계명들을 포함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규례이다. 이런 율법은 구약성경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율법은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킬 때도 있지만 모세오경(모세가 기록한 구약성경의 처음 다섯 권)만을 지칭하기도 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또 율법은 십계명만을 지칭하기도 한다. 율법의 구체적인 조항들은 출애굽기 20장에 기록된 십계명에서부터 시작하며, 십계명은 율법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한편 율법이란 예수 그리스도 이전의 구약에 나타난 모든 것을 포함하여 이르기도 한다. 구약을 “율법과 선지서들”로 크게 구분하는데(눅 16:16), 구약 시대를 일반적으로 율법 시대라고 한다. 구약 시대 전반에 걸쳐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 전체를 통제하는 것이 율법이었고, 율법하에 선지자들의 사역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br/>&nbsp; 율법을 구분하면, 일반적으로 세 가지, 즉 제사법, 의식법, 도덕법으로 나눈다. 첫째, 제사법은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의 규례이다. 제사에는 기본적으로 “피”가 필요한데, 피가 필요한 모든 제사는 속죄의 의미가 있다. “속죄제”라는 특별한 제사가 있지만, 번제와 속건제도 속죄의 의미가 있다(레 1:4; 5:10). 반면 음식제는 피가 없으므로 속죄의 개념이 포함되지 않으며, 헌신과 서원의 의미가 있다. 둘째, 의식법은 명절에 관한 규례들, 음식에 관한 규례, 제사장들의 성별, 안식일, 할례, 혼인 등 많은 구체적인 규례들을 말한다. 셋째, 도덕법이란,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민족에게는 도덕이 그들의 양심에 기록되어 있지만(롬 2:14-15), 이스라엘에게는 이방 민족들로부터의 성별을 위해 양심 외에 엄격한 도덕률이 기록된 형태의 율법으로 주어진 것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율법은 분명히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다.<br/>&nbsp; 다시 말하지만,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받은 것이며, 아브라함의 육신의 자손인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이다(요 1:17). 율법의 통제를 받는 백성은 오직 “이스라엘”뿐이었다. 이방인들과 교회는 율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이 전혀 무가치하지 않으며, 영적 교훈을 얻고 신약에 나타나게 될 실체에 대한 모형이나 예표를 알려 주는 많은 진리들을 배울 수 있다. <br/>『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것은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이는 성경이 주는 인내와 위로로써 소망을 지니게 하려 함이니라』(롬 15:4). 분명히 율법은 신약 시대의 교회, 즉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안식일을 지키고, 할례를 행하고, 희생제를 드리고, 여러 가지 규례들을 행하는 것은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성경은 여전히 교회에게 가치 있으며, 그 내용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풍성한 영적 진리들을 일깨워 준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br/>&nbsp; 율법이 주어지고 율법을 지키는 이스라엘의 지위는 “독특한 보물”이요 “제사장들의 왕국”이며 “거룩한 민족”으로 이방인들과 구별된다는 사실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씀한다. 『그러므로 이제 만일 너희가 참으로 내 음성에 복종하고 나의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백성보다 나에게 독특한 보물이 되리니, 이는 온 땅이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에게 제사장들의 왕국이 되며 거룩한 민족이 되리라.’ 이것이 네가 이스라엘의 자손에게 고할 말이니라.” 하시니라』(출 19:5-6). 이와 같이 율법을 통해 이스라엘은 이방인들로부터 성별되었다(레 18:1-5).<br/>&nbsp; 한편 구약에서 중요한 두 언약 중에서 “모세의 언약”을 한마디로 말하면 “율법”이다. “아브라함의 언약”이 “은혜의 언약”인 반면, “모세의 언약”인 율법은 지켜야 복을 받는 “행위의 언약”이다. 이는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없으면 저주를 받기 때문이다. 율법의 행위를 하도록 명령받은 것은 이스라엘이다. 아브라함의 언약에는 이방인에 대한 부분도 있으나, 모세의 언약에는 오직 이스라엘을 위한 약속만 있다.<br/><br/>&nbsp; 2) 율법은 모형이며, 은혜는 실체이다.<br/>&nbsp; 율법은 이스라엘의 죄 용서와 성결에 관한 규례들을 포함한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통해서 죄를 판단했으며, 죄들에 대한 치유 방법은 율법의 규례들 중 하나인 제사였다. 여기서 죄는 하나님께 대한 죄와 가족, 이웃, 국가에 대한 모든 죄들을 포함하는데, 그들은 하나님께 범죄했을 때뿐 아니라, 이웃에게 죄를 지었어도 제사를 드려야 했다(레 6:1-7). 율법을 구원과 관련시켜 말하면, 율법은 율법 시대의 구원 방법이기 때문에 율법이 예표하는 미래의 구원, 즉 십자가의 구원과는 엄연히 다르다. 이 둘을 절대 혼동해서는 안 된다.<br/>&nbsp; 율법에 있는 용서의 법은 은혜로 주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보다는 못하지만, 동물들의 피가 구약 시대에 죄들을 정결케 하고 용서했다. 율법 하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nbsp; 동물들의 “피”를 흘림으로써 용서받고 또 구원받았다. 율법 시대에는 율법에 따른 동물의 피가 죄사함을 위한 근거가 되었기 때문이다(히 9:22). 비록 불완전하기는 했지만(히 10:1-4), 동물들의 피도 죄를 용서하는 효력이 있었다(히 9:13). 동물들의 피는 일시적인 효력이 있었으나,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완전하고 영원한 효력이 있다(히 10:12,14). 율법의 제사는 율법 시대에 유효했다. 이것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까지만 지속되었던 것이다.<br/>&nbsp; 모형이란 실체를 반영하는 그림자이다. 그러므로 율법이 모형이라고 말할 때는 반드시 그 실체를 말해야 한다. 그 실체는 십자가의 구속으로 죄들을 제거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유월절 양, 제물들, 제사법, 특히 피흘리는 제사 등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뚜렷이 보여 준다. 모형인 율법은 십자가의 은혜로 완성되었다. 십자가 이후에도 여전히 율법에 의존하는 것은 은혜를 저버리는 저주받을 일이다. <br/>&nbsp; 하지만 율법은 십자가 이후에 구원의 방법으로 가르치고 적용하지 않는 한 결코 무가치한 것이 아니다. 『주의 율법은 완전하여 혼을 개심시키며, 주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매한 자를 현명하게 만들고 주의 규례는 정당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며, 주의 계명은 순수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시 19:7-8). 『그러므로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12). 비록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없을 때에도 율법은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고, 온전하며, 순수하고 옳다. <br/><br/>2. 은혜와 교회<br/><br/>&nbsp; 은혜는 율법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은혜는 자격이 없는데도 주어지는 호의이다. 은혜는 우리를 향한 우리 구주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다.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신약 시대의 교회에게 주어졌다(요 1:17) -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받았지만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것이라.』교회는 율법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엡 2:8). 만약 누군가가 율법적인 삶을 살고자 한다면 그는 분명히 종으로서 속박의 삶을 살게 될 것이며, 누군가가 율법으로 구원을 받으려 한다면 그는 저주를 면치 못할 것이다. 율법하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지위는 그들의 범죄로 인해 파기되었고,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교회가 영적으로 “선택받은 세대”요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민족”이요 “독특한 백성”이 되었다. 『그러나 너희는 선택받은 세대요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민족이요, 독특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움에서 불러내어 그의 놀라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분의 덕을 너희로 선포하게 하려는 것이니라』(벧전 2:9). 율법과 은혜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비교가 필요하며, 그것을 통해 이스라엘과 교회에게 주신 말씀들을 올바로 나누어야 한다.&nbsp; BB&nbsp; &lt;다음호에 계속&gt;]]></description>
<dc:creator>지식뱅크 관리자</dc:creator>
<dc:date>Fri, 20 May 2016 23:17:41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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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이슬람의 베일을 벗기다 7 - 이슬람 테러리즘의 근원 - 국가종교</title>
<link>https://www.biblemaster.co.kr/bb11/%EC%9D%B4%EC%8A%AC%EB%9E%8C%EC%9D%98-%EB%B2%A0%EC%9D%BC%EC%9D%84-%EB%B2%97%EA%B8%B0%EB%8B%A4-7-%EC%9D%B4%EC%8A%AC%EB%9E%8C-%ED%85%8C%EB%9F%AC%EB%A6%AC%EC%A6%98%EC%9D%98-%EA%B7%BC%EC%9B%90/</link>
<description><![CDATA[이슬람교는 국가 종교다. 단순한 개인의 삶과 영혼과 내세와 도덕을 다루는 종교가 아니라 국가 사회를 통제하는 종교 지배 체제다. 통치자도 “샤리아”(율법)대로 통치해야 하고, 헌법도 샤리아에 따라 제정되어야 한다. 샤리아를 어기면 범죄자로 처벌을 받으며, 모든 백성은 샤리아에 따라 통제를 받는다. 무슬림들 스스로도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br/>&nbsp; 한국 이슬람교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자기들 종교를 홍보하는 자료에다가, “이슬람은 신앙체계만이 아니다.”라고 자랑스럽게(?) 선전하고 있다(한국이슬람교중앙회, <A HREF="http://www.koreaislam.org/data/data4.jsp)." TARGET="_blank"  rel="nofollow">http://www.koreaislam.org/data/data4.jsp).</A> 그런데 이러한 선전은 그들이 지금까지 행한 바, 이슬람교를 좋게 포장하는 모든 노력들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슬람교의 국교화를 주장하면서, 은연중에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테러리즘을 정당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 홍보 자료는 이슬람 통치자들의 강압적 통치와 테러리스트들의 그러한 행동들이 사실은 무함마드와 코란의 명령이며 이슬람의 기본정신이라는 것을 독자들에게 이해시키고 있는 것이다. <br/>&nbsp; 그러나 어느 종교에서든지 종교와 정치의 결합은 최악의 모습을 가져온다. 그것은 자기와 종교적 신념이 다른 사람들을 죽일 수 있는 근거를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바이다. 특히 절대화된 종교일수록 그러한 면은 더하기 마련인데, 이는 비단 이슬람뿐 아니라 중세 시대 카톨릭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미개 사회의 무속 신앙이라 할지라도 그 신을 신봉하는 사회에서는 그 신앙과 이질적인 사람은 박해를 당하게 된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유교를 절대화했던 조선 시대 후기에는 성리학적 질서에 어긋나기만 하면 이단시하고 박해하기까지 했다. 이것은 종교가 한 사회에서 절대화되면 어디에서나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다. 이런 점에서 카톨릭이나 이슬람은 동일하다. <br/>&nbsp;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국가와 교회를 엄격히 구분하셨다. 예수님께서도 『카이사의 것은 카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마 22:21)라고 말씀하심으로 이 둘을 엄격히 구분하셨다. 이 세상의 통치자는 사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필요 이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세상은 분명 선교의 대상이긴 하지만, 그것은 복음 전파를 통해서 해야 할 일이지, 국가의 강압적인 정책을 통해서 해야 할 일은 아니다. <br/><br/><br/>&nbsp;  물론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은 어느 정도 국가와 교회가 연결되는 사회였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으로 사회는 통제되었으며, 왕은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했고(신 17:18,19), 그 뜻을 백성에게 펼치는 신정국가를 이뤄야 했다. 이스라엘 신정국가의 왕은 하나님의 백성을 올바로 인도하는 것을 최우선의 과제로 여겨야 했다. 하지만 그때에도 완전한 정교일치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정치와 종교에 해당하는 일들은 각각의 직분이 맡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정치를 위해서는 왕과 재판관들을, 신앙을 위해서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을 주셨다. 이 둘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어야 하나, 서로의 역할을 침범해서는 안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왕은 유다 지파를 통해서, 제사장은 레위 지파를 통해서 엄격히 구분해 놓으셨으며, 이 구분을 깨뜨리는 것은 불경한 것으로 여겨졌다. 일례로 사울왕은 제사를 직접 드리다가 하나님께 버림받기도 했다(삼상 13장).<br/>&nbsp;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 있어야 하는 큰 이유 중 하나는, 이 둘이 힘을 합해 악을 획책하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호세아 5:1은 『오 제사장들아, 너희는 이것을 들으라. 너희 이스라엘 집아, 경청하라. 오 왕의 집아, 너희는 귀를 기울이라. 심판이 너희를 향해 있나니, 이는 너희가 미스파에 올무가 되었으며 타볼 위에 친 그물이 되었음이라.』고 제사장들과 왕들에게 경고하고 있는데, 이는 이 둘이 죄를 위해 야합했기 때문이다. 정치와 종교가 결합하면 반드시 부패한다. 그것은 정치인이나 종교인이나 모두 죄인이기 때문이다. <br/><br/>&nbsp;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종교 체제는 철저하게 정교일치 체제이다. 마호메트 자신이 정치와 종교의 수장이었다. 그는 자신의 종교를 위해서 쿠라이쉬 족과 결탁했고, 그 종교를 전파하기 위해 전쟁을 했다. 보호하기 위해 전쟁한 것이 아니라 전파하기 위해 전쟁을 한 것이다. 그가 만든 “움마”라는 공동체는 신앙 공동체였는데, 그는 그 공동체의 정치적, 종교적 수장이었던 것이다. 그의 뒤를 이은 칼리프들도 역시 종교와 정치의 공동 수장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슬람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정복전쟁을 했다. <br/>&nbsp; 그들의 샤리아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알라의 뜻에 따라야 한다. 물론 이 알라의 뜻이란 마호메트를 통해 계시된 알라의 뜻, 즉 이슬람 신앙을 말한다. 그들의 움마 안에는 절대로 다른 신앙을 가진 자가 존재해서는 안 된다. 사회에 여러 계층이 있고, 여러 역할들이 있을지라도, 그 모든 것든 코란 안에서 이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칼리프는 바로 그러한 일들을 이행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긴다. 이것에 충실할수록 신실한 무슬림이다. 그 “신실한 무슬림”들은 코란에 신실치 못한 자들을 볼 때 그들의 힘을 다해 바로잡아야 한다. 그들의 코란에도 제시된 바와 같으니, 곧 “너희들 중 누구든지 악행을 보는 자는 자신의 손으로 그것을 바꿔 놓아야만 하고,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다면 혀로라도 시도해야만 하고, 만약 그렇게도 할 수 없다면 그때는 신앙의 가장 약한 표현인 마음속으로라도 그것을 행하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br/>&nbsp; 여기서 “악행”이란 단지 도적적 죄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코란에 어긋나는 모든 행위이다. 여기에는 기독교 신앙도 포함된다. 코란을 인정하지 않는 기독교 신앙은 그들에게 분명히 “악행”이다. 이러한 악행을 행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무슬림들은 “자신의 손으로 바꿔 놓아야” 한다. 즉 형벌을 주거나 전쟁이나 테러를 해서라도 바꿔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 국가 내에서 코란에 신실하지 않은 사람들을 마구 형벌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가족 중 누가 코란을 떠나 기독교로 개종하면 가족의 명예를 위해 죽일 수도 있는 것이고, 어떤 여자가 머리에 히잡을 쓰지 않으면 염산을 뿌릴 수도 있는 것이다. “알라의 영광”을 위해서 그 사회의 정치가들이나, 혹은 열성있는 개인이라도 그 “정의”를 실행해야 한다. <br/>&nbsp; 만약 그들이 세력을 잡지 못한 상황이라면, 예를 들어 비이슬람 국가에 사는 무슬림이라면 “혀로라도 시도해야” 한다. 이슬람 신앙을 비평하는 사람들에게 꾸준히 이슬람 신앙을 변호해야 하고, 더 나아가서 반이슬람 정책들을 친이슬람 정책으로 바꿔 놓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의 모든 교과서들, 혹은 교육 관련 책들에서는 이슬람이 평화로운 종교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세력을 얻지 못했을 때 하는 말이고, 세력을 얻게 되면 즉시로 무력을 통해 그 일을 실천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슬람 정교일치 체제에서 코란에 신실한 무슬림은 언제라도 테러리스트가 될 수 있다. <br/><br/><br/>&nbsp;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슬림들은, 기독교 신앙과 비교하여 이슬람이 정교일치 체제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기독교 신앙은 처음부터 정교분리 정책을 취한 것이 마치 잘못된 교리인 것처럼 힐난하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기독교 신앙이 정교일치 체제였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서로 다른 신앙을 고백하는 국가들이 정교일치 체제를 극단적으로 강조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 결과는 두 국가가 무력으로 충돌하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실제로 있었다. 예컨대 십자군 전쟁이 그것이다(11-13세기).<br/>&nbsp; 중세 카톨릭은 국가종교 체제였다. 그리고 교황을 통해 계시되는(성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온 세상에 전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복음 전파라는 선교의 방법이 아닌 세력 확장의 방법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똑같은 방법을 추구하는 세력, 즉 이슬람 제국과 충돌한 것이었다. <br/>&nbsp; 이슬람의 움마 공동체처럼 중세 카톨릭 체제도 교황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국가가 형을 집행했다. (혹은 교회가 국가의 인준 아래 직접 형을 집행했다.) 종교개혁 시대에도 개혁주의를 국가교회로 채택한 국가들은 비슷하게 행했다. 여기에서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 <br/>&nbsp; 하지만 성경은 세속 권력과 영적 권위를 분명히 구분한다. 죄에 대해서도 국가 사회적인 범죄와 하나님께 대한 죄가 구분된다. 국가의 법을 어기는 범죄는 세속 행정관들이 다룬다. 반명 하나님께 대한 죄는 세상이 다룰 수 없다. 그러한 죄들은 하나님 앞에서만 심판받게 된다. 그러한 죄들은 죽을 때까지 심판받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분명히 심판받을 것이다. 예컨대 누군가가 하나님을 모독한다 치자. 우리는 그 모독을 참을 수 없어 그를 권면하거나 말로 책망할 수 있어도 물리적으로, 혹은 국가의 권력을 빌어 형벌을 가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생에서나 그분의 심판석에서 다루실 것이다. 하지만 이슬람 세계에서 누군가가 코란이나 마호메트를 모독한다면 그는 반드시 사형을 당해야 한다. 자기 국가에서 그러한 모독이 행해지면 사형이라는 처벌을 할 것이요, 타국에서 그러한 모독이 행해지면 테러가 자행될 것이다. <br/>&nbsp; 성경은 정교분리를 원칙으로 가르친다. 한편으로 말해서 교회사는 정교일치를 주장하는 교회가 정교분리를 주장하는 교회를 박해한 역사이다. 침례교도들은 카톨릭과 개신교도들에게 박해를 받으면서 정교분리의 원칙을 지켜나갔다. 지금 대부분의 개신교 국가들은 정교분리의 원칙을 지킨다. 이것은 그들이 그동안 박해해온 침례교도들이 남긴 믿음의 유산이다. <br/><br/>&nbsp; 성경에도 진정한 정교일치의 국가가 제시되기는 한다. 하지만 그것은 현재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 미래에 속한 나라이다. 그 나라의 왕은 정치권과 종교권을 함께 갖고 있는데, 모든 이슬람 칼리프들은 바로 이 나라의 왕을 흉내내고 있는 것이다. 그 나라는 다름 아니라 천년왕국이다. 그 나라의 왕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초림 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왕 되시기를 거절하셨으나, 재림 때 그분은 이 세상의 통치자(사탄)를 멸하시고 친히 이 세상의 왕이 되실 것이다. 그때에는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자들을 극심한 형벌로 멸하실 것이다. 그분은 철장으로 다스릴 것이며(시 2:9), 그분을 경배하고 존경하지 않으면 크게 노하실 것이다(시 2:12). <br/><br/>&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br/>&nbsp; 모든 교황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왕국을 흉내냈다. 마찬가지로 마호메트와 모든 칼리프들도 그리스도와 그분의 왕국을 흉내낸다. 그러나 그 일은 분명 재림 때에 있을 것이다. 그 전에는 불완전한 인간 왕들이 다스리기 때문에 그 이상은 실현될 수 없으며, 그분이 직접 왕이 되셔야만 한다. 그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시다. 즉 완벽하신 하나님께서 통치하실 때에만 완전한 신정국가가 건설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신정국가(천년왕국)에서는 그리스도를 거절한다는 것 자체만 가지고도 형벌받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슬람 세계에서 벌어지는 온갖 종교적 독재는 그 자체로 죄악이다. 그러한 신정국가체제는 무고한 사람들을 죽일 수도 있고, 한 국가를 멸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테러를 행하는 데에 뒷받침이 될 수도 있다.<br/>이슬람은 평등의 종교인가?<br/><br/>&nbsp;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왕국을 세우시기 전에 그와 비슷한 왕국을 세우려는 자가 있다면 그는 혼란만 야기시키게 된다. 마호메트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nbsp; BB]]></description>
<dc:creator>지식뱅크 관리자</dc:creator>
<dc:date>Mon, 09 May 2016 23:32:3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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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이슬람의 베일을 벗기다 6 -  이슬람은 평등의 종교인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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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이슬람은 자기 종교가 평등의 종교라는 것을 항상 강조한다. 이슬람의 공식 주장이나, 이슬람을 역사&#8228;문화적으로 소개하는 모든 서적들에서도 이슬람의 평등주의를 강조한다. 이슬람교가 오늘날 세계 종교가 된 가장 큰 원인도 평등주의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오늘날 이슬람교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치고 그들이 평등하다는 것을 인정할 사람이 있을까? 이슬람 국가들에서 보여지는 그들 사회의 모습들, 서구 사회에 자리잡은 이슬람 가정의 모습들을 보노라면 누구라도 그들은 차별의 종교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을 소개하는 모든 주장들은 그들이 평등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우습게도 대중들은 그들이 보는 바대로 믿지 않고, 듣는 선전에 따라 믿는다. 참으로 맹목적 믿음이다. 어떤 면에서는 참으로 대단한 믿음(?)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br/>&nbsp; 이슬람의 평등주의에 대해서 그들은 세 가지 경우에서 거짓말을 한다. 이 세 가지는 이슬람을 믿는 사회나 국가뿐 아니라, 그들 종교 자체가 결코 평등한 종교가 아님을 보여 주고 있다. <br/><br/>1. 종교 계급의 평등<br/>&nbsp; 무슬림들은 자기들 종교를 기독교와 비교하면서, 기독교에는 성직자 계급이 있지만 이슬람에는 성직자 계급이 없기에 평등한 종교라 말한다. 물론 성직자 계급이 없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들은 기독교의 예를 들어 하나님과 신자 간의 중보자의 역할을 하는 성직자 계급을 비판하고 있지만, 그것은 정상적인 기독교가 아니다. 카톨릭의 경우 사제 그룹이 있어서 그들이 평신도를 지배하는 체제가 형성되었지만,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개신교도들도 카톨릭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목자들을 제사장화하려 하지만 이것은 잘못이다. 성경은 모든 성도들이 왕 같은 제사장이라 말씀한다(벧전 2:9). 다만 지역 교회를 이끌기 위해 목자를 두셨으나, 이 목자들은 양들을 지배하지 않고 모범으로 인도해야 한다(벧전 5:3). 그러므로 오히려 정상적 기독교 신앙이 종교적<br/>이슬람은 평등의 종교인가?<br/>&nbsp;평등성이 있다. <br/>&nbsp; 이슬람에서는 어떠한가? 그들에게는 “이맘”과 “울라마”가 있다. 이맘은 종교예식의 인도자이고, 울라마는 샤리아(율법) 학자이다. 그리고 그들의 꼭대기에는 칼리파(칼리프)가 있다. 이들에 대해 설명하면서 무슬림들은, 이들은 결코 계급적으로 평신도 위에 서는 자들이 아니라 말한다. 누구나 이맘이 될 수 있으며, 특별한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울라마도 단지 학자로서의 존경을 받는 자들이라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목사”라는 직책이 종교적 계급이 아니라는 말과 같은 말일 뿐이다. 성경적으로 목사는 사제 계급이 아니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잘못된 기독교 전통에서 그들이 계급화되었듯이, 이슬람에서도 마찬가지다. 원칙적으로는 계급이 아니라 말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그들 종교 내에서 지도층에 포함된 사람들이다. <br/>&nbsp; <br/>&nbsp; 특히 칼리프는 모든 이슬람 세계의 총수다. 무슬림들은 칼리프 역시 샤리아에 어긋나면 안 되며, 샤리아의 준수자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말하지 않는 종교가 어디 있던가? 모두가 말로는 신 앞에서 평등하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는 아니지 않는가? 칼리프는 카톨릭의 교황과 같은 존재이다. 칼리프가 말하면 모두가 복종해야 한다. 물론 칼리프가 코란에 따라 말하는 것이라는 전제가 붙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런 말은 카톨릭 교황들도 하는 말이다. <br/><br/>2. 여성 평등<br/>&nbsp; 이슬람에서 여성이 평등한가? 아마 이 말은 이슬람교도들도 그렇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양심이 있으면 말이다. 이것은 이슬람 국가들에서 여성이 억압당한다는 말이 아니다. 이슬람이라는 종교 자체가 여성을 억압한다는 것이다. 코란에서 여성은 참으로 열등한 존재로 나타난다. 코란은 아내를 구타하는 것을 허용한다(4:34). 마호메트는 “나는 지옥불에 거하는 대부분이 너희들 여자들임을 보았기 때문이라... 나는 지식과 종교에 있어서 너희들보다 부족한 자를 보지 못하였느니라.”고 말했다(하디스 부카리편, 제1권, no.301). <br/>&nbsp; 이슬람에서 여성들은 남자들을 타락시키는 존재이다. 그래서 히잡을 쓴다. 외갓 남자에게 얼굴을 보여서는 안 되며, 아프간 같은 좀 극단적인 곳에서는 몸의 형체도 보이지 않도록 몸 전체를 감싼다. 물론 여성들이 필요 이상으로 몸을 드러내는 것은 남자들로 죄를 짓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남자들이 몸을 드러내는 것도 여성들로 죄를 짓게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죄는 한쪽만 짓는 게 아니다. <br/>&nbsp; 히잡도 종류가 많다. 좁은 의미로는 얼굴만 내놓고 머리와 목까지 완전히 가리는 것을 “히잡”이라 하며, 스카프처럼 머리만 살짝 가리는 것을 “룻싸리”라 하고, 히잡 중에서도 눈만 내놓고 얼굴 전체를 가리는 것을 “니카브,” 얼굴 전체를 덮고 눈부분도 망사로 처리한 것을 “부르카”(질밥), 그리고 전신을 감싸는 여성 복장을 “차도르”라고 한다. 이슬람에서는 이러한 복장을 오히려 여성을 보호하고,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주는 좋은 제도라고 말한다. 누구로부터 여성을 보호한다는 말인가? 남자들이 음란한 눈으로 힐끗힐끗 보는 것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말인가? 차도르를 입지 않은 여자가 죄를 짓는 것인가, 아니면 그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가 죄를 짓는 것인가? 이에 대해 성경은 분명한 답을 주신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그의 마음에 그녀와 더불어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<br/>&nbsp; 이란에서는 1930년대 후반 무함마드 레자샤 왕의 개혁정책으로 여성들의 차도르 자유화가 주어졌었다. 그러다가 1979년 호메이니 옹의 이슬람 혁명 때, “이슬람으로 돌아가자”는 모토 아래 다시금 차도르는 의무화가 되었다. 아프간에서는 탈레반 시절 여자들은 남자 가족 구성원이 함께하지 않으면 외출도 함부로 못했다. 아프간 전쟁으로 탈레반이 물러갔다지만, 아프간에서 여성의 지위는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전히 이슬람 세력 하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터키같이 서구화된 이슬람 국가에서는 룻싸리 정도의 히잡을 착용하며, 여성들에게 많은 자유가 주어지지만, 그것은 그 나라에 비이슬람 교도들이 어느 정도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슬람 교도들로 가득 차 있는 나라들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br/>&nbsp; 이슬람에서는 한 남자당 4명의 아내를 허용한다. 물론 마호메트는 더 많은 여인들과 결혼했고, 그의 신부 중 가장 어린 여자는 9살이었다. 마호메트가 여러 아내를 두었다는 것 자체는 그렇다고 치자. 고대에는 어차피 일부다처제가 행해지던 사회였기 때문에. 하지만 그것이 교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슬람에서는 4명의 아내를 두는 것에 대해서, 과거 전쟁이 많던 시절에 남자들의 숫자가 너무 부족했기에 여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생겨난 법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것은 사실 여성을 보호하고 배려하는 법이었다고 말한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무슬림들이 이렇게 말할 때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인다는 사실이다. 아니, 많은 책이나 선전물들을 통해 사람들이 그렇게 반응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br/>이슬람은 평등의 종교인가?<br/><br/>&nbsp;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과거 전쟁의 시대에만 해당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도 많은 아내를 두는 것이 여성을 보호하는 것이라면 누가 인정할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도 과거 전쟁을 많이 치렀던 민족이다. 그래서 지금도 여성을 보호하는 의미로 일부다처제를 시행하겠는가? 유럽의 그리스도인들도 전쟁을 많이 했었다. 그렇다고 일부다처제를 하는 곳은 없다. 구약성경에서는 일부다처제가 어느 정도 허용되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법 자체는 “한 남자와 한 아내”이다(창 2:21-24). 신약 시대에는 이것이 확실히 지켜졌다. 신약 이후에도 여러 여자를 취하는 남자들이 있었지만, 그것은 “죄”라고 정의되었다. 그러므로 전쟁의 상황을 운운하는 것은 그들의 핑계일 뿐이다. <br/><br/>3. 타종교와의 평등<br/><br/>&nbsp; 7세기에 마호메트에 의해서 이슬람교가 창시되고 칼리프들이 뒤를 이어 통치하던 시절, 이슬람교는 곧 아랍인들을 의미했다. 그래서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중동지역과 북아프리카를 점령했을 때도 아랍 이슬람 교도들은 타민족에게 이슬람을 강요했으면서도 타민족 위에 아랍인 우월 정책을 폈었다. 그러다가 8세기 후반에 아바스 왕조가 시작되었는데, 그때에는 타민족을 어느정도 평등하게 대했다. 타민족에게도 관료와 군인의 신분을 허락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아랍인에 비해 타민족에게 관용을 베푼 것이지, 타종교에게 관용을 베푼 것이 아니다. 타종교는 여전히 금지였다. <br/>&nbsp; 이슬람의 종교차별은 “지즈야”(인두세)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이전 글에서도 몇 번 말한 바 있지만, 이슬람은 정복전쟁을 벌일 때 코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인다. 하지만 그것은 통치자들을 죽이는 것이지 그 민족 전체를 죽일 수 없다. 그래서 대신한 것이 그들에게 인두세를 받는 것이다. 이것은 비무슬림에게는 모두 걷는 세금이다. 시대에 따라 또 장소에 따라 그 금액에는 경중이 있었지만, 이것은 명백한 종교차별이다. 도대체 왜 이슬람이 관용의 종교인가? 비이슬람 교도에게 세금을 거두면서 그래도 죽이지는 않으니까 “관용”이라는 말인가?<br/>&nbsp; 지난 호에서 언급했던 바, 이슬람 교도들은 우리 학생들의 교과서까지 왜곡해시키면서 “이슬람 제국이 팽창할 수 있었던 이유”가 “철저한 평등주의”라고 말한다. 도대체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 그 평등주의 때문에 이슬람이 포교될 수 있었는가? 추측하건대, 오직 한 곳이 그럴 수 있었다. 그곳은 인도였다. 인도는 힌두교의 철저한 카스트 제도 속에서 사회계급적 불평등이 존재한 사회였다. 이러한 인도를 이슬람 국가들이 정복했을 때 일부 힌두교도들은 이슬람의 “평등주의”에 매료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카스트 제도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인도 역시 “정복”당했기 때문에 이슬람 국가가 되었지, 사회제도로 인해 자연스럽게 이슬람 국가로 변화된 것은 아니다. 또한 이슬람 국가가 되었다고 해서 힌두교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정부만 이슬람 정부였지, 대부분의 백성들은 여전히 힌두교를 믿었다. 그래서 일부 이슬람 교도들은 파키스탄이라는 나라로 분리해 있는 것 아니겠는가?<br/>&nbsp; 그렇다고 이슬람 제국에는 노예 제도가 없었는가? 있었다. 과거 전근대 사회에서는 어느 종교에서도 노예 제도가 있었다. 이슬람도 예외가 아니다. 또한 카스트 제도와는 다르지만 여성의 노예화를 가져왔다. 또 공식적 성직자 계급이 없다고는 하나, 이슬람 국가들에서는 국가가 곧 종교단체이고 샤리아가 곧 국법이기에, 국가의 통치자는 곧 종교적 지배자이다. 계급이 없을 리가 없다. 거기다가 타종교의 차별에 이르기까지, 도대체 이슬람에서 평등주의라는 것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다. <br/>&nbsp; 우리가 흔히 보는 과격파 원리주의 무슬림, 그들이 곧 이슬람교의 모습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은 극히 일부일 뿐이고 이슬람 자체는 건전하다고 말하나, 아니다. 그 원리주의자들이 이슬람의 본색이다. 우리에게 비친 이슬람의 모습이 그들이라면, 그들이 곧 이슬람인 것이다.&nbsp; BB]]></description>
<dc:creator>지식뱅크 관리자</dc:creator>
<dc:date>Fri, 29 Apr 2016 22:17:02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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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이슬람의 베일을 벗기다 5 - 이슬람은 어떻게 전파되었는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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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다음은 고등학교 교과서 &lt;세계사&gt;(지학사, 2006) 106쪽에 제시된 『이슬람 제국의 팽창 배경』이라는 제목의 내용이다. <br/>&nbsp; “첫째, 이슬람교의 철저한 평등주의는 이슬람 팽창의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평등주의는... 피정복민의 자발적인 개종을 유도하는 배경이 되었다. 둘째, 정복 지역에 대한 관용적인 정책이 효과를 발휘하였다. 이슬람 제국은 정복지의 이교도에 대해서 인두세(지즈야)와 토지세(하라지)를 납부하면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여 국가 재정을 확보할 수 있었다. 셋째, 이슬람 교도들은 전쟁에서 죽는 것을 가장 거룩한 행위로 여겼으며, 죽은 후에 천국행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br/>&nbsp; 이 말을 언뜻 보게 되면, 이슬람 교도들은 평화롭게 행했으며 이교도들이 이슬람교에 호의를 가지고 자발적으로 개종했다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거짓말이다. 오늘날 교과서들을 비롯한 거의 모든 종류의 이슬람 관련 서적들은 이와 동일하게 가르치며 학생들과 대중들을 세뇌시킨다. 하지만 위 인용문을 가만히 보면, 그들 스스로도 전쟁에 의한 전파라는 사실 자체는 부정하지 못한다. 그들은 분명 정복 전쟁에 의해 이슬람교를 전파했다. 다만 그것이 각 시대와 지역과 문화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날 뿐이다. <br/>&nbsp; 오늘날 이슬람 세계는 중동과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 인도와 동남아 등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지만,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은 아무래도 아라비아를 포함한 중동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이 바로 이슬람의 발상지요, 이슬람 포교가 가장 적극적으로 된 곳이기 때문이다. 이슬람교는 A.D. 622년 아라비아 반도 서쪽 해안에 위치한 메카와 메디나에서 무함마드(마호메트)에 의해 발생했다. 622년이란 무함마드가 메카 귀족들에게 쫓겨나 메디나로 피한 해인데, 이때가 이슬람의 기원년이다. 그가 창시한 이 종교는 당시 부족들 간의 정치적 상황과 맞물린 상황 속에서, 그의 정복활동을 통해 확장되어 나갔다. 마호메트는 죽기 전까지 아라비아 반도를 무력 통일했다(632). 그래서 마호메트 생애 가운데 있었던 이슬람교의 확장 방식은 다음과 같이 몇 단계로 나누어진다.<br/><br/>이슬람은 어떻게 전파되었는가?<br/>&nbsp; 제1단계 - 메카 시대(610-622년) : 이때는 아직 관용의 시대이다. 아직 무함마드를 따르는 사람들은 몇 없었다. 아무런 정치적, 군사적 힘도 없었으므로 이교도들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때의 상황을 보여 주는 코란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종교에 강요는 금물이다. 벌써 옳은 길은 잘못과 구별된다”(코란 2:256). “너희들이 숭배하는 것을 나는 숭배하지 않는다. 내가 숭배하는 것을 너희들은 숭배하지 않는다... 너희들에게는 너희들의 종교가 있고, 내게는 나의 종교가 있다”(109:1-6). “지혜와 선한 권고를 하여 알라의 길에 불러들여라. 가장 좋은 방법으로 그들과 의논을 하라”(16:125).<br/>&nbsp; 제2단계 - 메디나 시대 초기(622-624년) : 이때부터 전쟁이 시작되는데, 아직까지는 방어적 전쟁이다. 구체적인 이슬람 공동체가 형성되었는데, 이 공동체를 공격하는 자들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는 전쟁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때까지 마호메트는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선지자 반열에 놓아 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무법한 일을 해서 싸우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허락되어 있다(침략하는 자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것은 허락되어 있다). 알라께선 이렇게 사람들을 돕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코란22:39). “성전(성경)의 백성(유대인, 그리스도인) 중 많은 사람은 자기 질투심 때문에 이미 믿음을 가진 그대들을 따돌려 배신자로 만들고자 하고 있다. 벌써 진실은 밝혀졌으니, 용서하고 제멋대로 하게 하라”(2:109).<br/>&nbsp; 제3단계 - 메디나 시대 중기(624-630년) : 이때부터 코란은 이슬람의 적들을 공격하라고 명령한다. 메디나의 통치권을 얻은 후 그는 지하드를 무슬림의 의무로 규정한다. 그때부터 자신을 선지자로 인정하지 않는 자들, 특히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게 된다. 그들과 전쟁을 선포하고, 이 전쟁을 회피하는 자들을 저주한다. “알라와 사도를 믿고, 알라의 길에 너희들의 재산이나 생명을 걸고 싸우기에 힘써라. 그것이 너희들에게는 최선의 일인 것이다”(61:11). “믿음을 배반한 성전(성경)의 백성(이슬람을 거역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도 다신교도도 지옥의 불 속에 떨어져 거기서 영원히 유하리라. 이것이야말로 인류 가운데서 가장 악한 자들이다”(98:6).<br/>&nbsp; 제4단계 - 아라비아 반도 점령 후(630년 이후) : 이때부터 이슬람은 세계 점령을 추구한다. 왜냐하면 아라비아를 완전히 장악했기 때문이다. 메카를 장악한 무함마드가 카바 신전 안에 달 신 알라를 제외한 모든 우상들을 없애 버린 것도 이 시기이다. 이제 이슬람은 온 세상으로 나아갈 준비를 한다. 물론 전쟁을 통해서 말이다. “소동이 없어질 때까지 그리고 종교가 모두 알라께로 귀의할 때까지 그들과 싸움을 계속하라”(8:39). “(4개월의) 신성월(神聖月)이 지났으면, 다신교도를 발견하는 즉시 죽여라. 잡아라. 억류하라. 모든 길에 복병을 두고 기다려라. 그러나 만일 그들이 회개하여 예배를 지키고 희사(喜捨)를 한다면 방면해 주라. 알라께서는 관용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이시다”(9:5).<br/>&nbsp; 시기별 코란 구절들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이슬람이 관용의 종교라고 말하는 것은 메카에서 힘없을 당시 만들어진 구절들을 근거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세력이 적을 때는 평화의 종교로 다가오고 세력이 강해지면 포악해지는 그들의 모습은 마호메트 때부터 있었던 일이며, 코란의 특성인 것이다. 물론 코란은 메디나 계시를 더 가치있게 여긴다. 왜냐하면 나중 계시가 먼저 계시보다 우월하다는 논리 때문이다. 이를 “만스크” 교리라 한다. 이슬람교가 전쟁과 상관없다는 말은 명백한 거짓말이다. 이슬람교는 전쟁으로 시작한 종교이다. <br/><br/>&nbsp; 마호메트 사후 그의 계승자들(“칼리프”)은 마호메트의 유지를 받들어 정복활동을 활발히 전개해 나갔다.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이라는 원리는 메디나 시기와 칼리프 시기에 당연한 진리였다. 마호메트가 죽고 후계자 문제로 지도부가 어수선한 사이, 마호메트에 의해 억지로 개종했던 일부 무리가 옛 신앙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일이 있었다. 그때 칼리프로 선출된 아부 바크르는 3개월 동안 그러한 무리들을 색출하여 8만 명을 죽였다. 제4대 칼리프 때까지를 “정통 칼리프” 시대라고 하는데, 이때 칼리프 제국은 사산 왕조 페르시아를 정복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옴미아드 왕조 때에는(8세기) 북아프리키와 이베리아 반도까지 점령하였다. 이것은 분명 제국의 확장이지만, 동시에 종교의 확장이기도 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들은 이때 형성되었다. 이때 정복은 군사력으로 했지만 종교는 자발적인 개종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는가? 결코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br/>&nbsp; 많은 사람들은 무슬림의 거짓말에 속아서 생각한다.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이라는 문구는 코란에는 없는 구절이라고. 이 말은 중세 유럽의 토마스 아퀴나스가 한 말인데, 이 말을 기독교인들이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인 편견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앞에서 인용한 코란 9:5을 보라. “신성월이 지나면” 다신교도를 발견하는 즉시 죽이라고 한다. 여기서 신성월은 “금지된 달”이라고도 하는데, 비이슬람교도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할 때까지의 유예 기간이다. 즉 유예 기간 동안 개종하지 않으면 죽이라는 말이다. 오늘날 이슬람 옹호론자들은, 이것은 단순히 전쟁 상황일 뿐이라고 말한다. 전쟁 상황에서 죽이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앞구절인 2절을 보면 “4개월간을 자유로이 나라 안을 여행할 수 있다.”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전시 상황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미 정복한 후 그 나라를 4개월 동안 샅샅이 뒤져 이교도가 나오면 죽이라는 말이다. <br/><br/>이슬람은 어떻게 전파되었는가?<br/>&nbsp; 서두에서 제시한 바 “관용정책”이라는 것도 없다. 물론 관용적 정책을 취한 왕들도 있었을 것이다. 지난 15세기 동안 여러 지역들을 통치한 이슬람 왕들 중 그러한 왕이 하나도 없겠는가? 하지만 그 몇몇 “선한” 왕들을 예로 들면서 이슬람의 포교 자체가 관용과 평화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명백한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지즈야”(인두세)를 내면 종교의 자유를 주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제국이 커지다 보니 너무나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없어서 내놓은 자구책일 뿐이다. 즉 한 나라를 정복을 하긴 했으나, 그 백성들 모두를 다룰 수 없는 상황에서 세금이라도 내라고 만든 정책이다. 그리고 시기와 장소에 따라서 그 세금이 막중하여 견디기 힘들어 이슬람으로 개종한 사람들도 많다. 지즈야는 그 자체가 종교차별적 제도이며, 17세기 인도의 무굴 제국에서는 이 지즈야 때문에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br/>&nbsp; 아라비아,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 인도까지 거의 모든 나라들에서 이슬람교는 정복활동을 통해 포교되었다. 동남아시아의 중국 등은 이슬람 상인들의 활동으로 전파되었는데, 이는 전체적인 이슬람의 확장에서 볼 때 예외적인 현상이다. 결국 “칼이냐 코란이냐”라는 슬로건은 코란에서 도출된 지극히 정통적인 이슬람 교리이다. 아무리 학자들이 교과서들을 왜곡하면서까지 대중들을 세뇌시키고 있지만 그 종교가 칼의 종교라는 사실은 지울 수가 없다.&nbsp; BB]]></description>
<dc:creator>지식뱅크 관리자</dc:creator>
<dc:date>Sat, 26 Mar 2016 23:15:32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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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이슬람의 베일을 벗기다 4 - 아브라함의 아들은 누구인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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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세상에는 아브라함을 기원으로 삼는 신앙이 세 개 있다.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이다. 유대교는 아브라함을 민족의 기원으로 삼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언약을 통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확정하셨다고 믿는다. 옳다. 기독교 신앙은 아브라함을 영적인 믿음의 조상으로 여기는데, 이는 그리스도인들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고(롬 4:9-11), 무엇보다 아브라함의 약속된 씨가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이신데(갈 3:16,29),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역시 옳다. 반면 이슬람은 아브라함이 이삭이 아닌 이스마엘을 통해 유업을 이었고, 자기들이 그 이스마엘의 후손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한다. 이는 틀리다. 그들은 왜 이처럼 아브라함에 대해서 잘못된 개념을 갖고 있는가? 이번 호에서는 이 문제를 중점으로 다뤄 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이슬람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핵심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br/>&nbsp; 이슬람은 자기 종교를 소개함에 있어서, “이슬람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중시하는 종교”라고 말한다(한국이슬람교중앙회, <A HREF="http://www.koreaislam.org/data/data3.jsp)." TARGET="_blank"  rel="nofollow">http://www.koreaislam.org/data/data3.jsp).</A> 그렇다면 그들이 말하는 바 아브라함의 신앙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들은 아브라함의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슬람에서는 좀 다르다.<br/><br/>&nbsp; 1. “아브라함은 유일신교의 시작이다.”<br/>&nbsp; 아브라함이 부름받은 칼데아 우르는 우상 숭배의 장소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이방 우상들의 땅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한 언약을 맺어 주셨다. 아브라함과 그의 씨를 축복하여 약속의 땅을 주시겠다는 것이다(창 12:1-3; 13:14-17 등).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셨으니, 아브라함은 다른 모든 우상들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 당시 모든 민족, 모든 사람들은 다신교를 믿고 있었는데, 이러한 언약으로 아브라함만이 유일신 신앙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br/>&nbsp; 문제는 이슬람이 아브라함의 신앙을 재건하기 위해 세워졌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슬람에서는 아브라함을 “진정한 무슬림”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세워 유일신 신앙을 확정하셨는데 그후 수세기를 거치면서 이 진리가 왜곡되었고, 다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 신앙을 세우셨으며, 또다시 왜곡되자 예수님을 통해 이 신앙을 되살리셨다고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함마드를 통해 확정하셨으니, 이 이슬람이 아브라함의 신앙을 제대로 계승한 최후의 종교라 주장하는 것이다. <br/>아브라함의 아들은 누구인가?<br/><br/>&nbsp; 만약 그렇다면 계시의 연속성이 있어야 한다. 즉 모세에게는 아브라함을 인정한 상태에서 계시를 주셔야 하고, 예수님께는 모세를 인정한 상태에서 계시를 주셔야 한다. 성경에 따르면 여기까지는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무함마드에게서 그 계시는 단절된다. 이슬람에서는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수님을 다 인정하기는 하지만, 그들과 연관된 계시들, 즉 신구약 성경의 기록들은 철저히 무시한다. 아브라함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아브라함과 관련된 구약성경의 기록을 무시하고, 자기들 나름대로의 경전을 만들어 거기에 기록된 새로운 아브라함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br/>&nbsp; 또 지난 호들에서 논했듯이 이슬람은 유일신 신앙이 아니다. 알라는 이슬람교 이전부터 있었던 달 신의 변형이다. 반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우상들과도 연관되지 않은 그분 자신을 계시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것들로도 형상화되지 않으셨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아브라함의 아버지 테라가 어떤 신들을 섬겼든지, 심지어 아브라함이 부름받기 전에 어떤 신을 섬겼었는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전혀 관계없는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셨다. 모세에게 나타나셨을 때도 이집트의 그 어떤 신들과도 관련없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셨다(출 3:6). 반면 이슬람의 알라는 (자기들은 유일신이라 주장하겠지만) 달 신의 형상에서 가져오고, 또 달 신을 숭배했던 이교도적 전통을 가져왔다. <br/>&nbsp; 이슬람은 자기들이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수의 신앙을 가져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들이 주장하는 바, 유일신 신앙의 전통에만 한정시킨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정말 강조하시는 진리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브라함을 통해서는 약속의 씨의 진리를 받아들여야 하고, 모세를 통해서는 이스라엘 민족과 맺으신 율법의 언약을 받아들여야 하며, 예수님을 통해서는 그분의 신성과 그분을 통해서 받는 구원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진리의 성경을 통해 주어진 핵심적 계시들이다. 하지만 이슬람은 자기 종교에 필요한 내용들만 빼내어 적용한다. <br/><br/>&nbsp; 2. “아브라함의 약속된 씨는 이스마엘이다.”<br/>&nbsp; 이것은 성경과 코란의 확연히 다른 내용 중 하나다. 그들은, 성경은 유대인의 관점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유대인의 조상인 이삭을 강조하지만 사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통해 유업을 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들 주장의 근거는 “독자”(only son)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독자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을 때(창 22:2), 그 독자는 이삭이 아니라 이스마엘이라는 것이다. “독자 이삭”이라는 구약성경의 구절은 왜곡된 기록이라 말한다. 그 이유는 이스마엘이 이삭보다 14살이 많은데, 이삭이 태어날 때까지는 이스마엘이 독자였기 때문이다. 반면 이삭이 태어난 후에도 이스마엘은 계속 살아 있었으니 이삭을 독자라고 부를 수는 없다는 것이 ‘성경을 통해 증명하는’ 이슬람의 논리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은 창세기 22장 사건을 이스마엘의 어린 시절에 적용하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씨를 복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창 22:16-18) 그 약속의 씨는 바로 이스마엘이라는 것이다. <br/>&nbsp; 이처럼 이슬람은 자기들의 주장을 위해서는 때로 성경도 인용한다. 하지만 성경을 인용하려면 제대로 인용해야 할 것이다. 성경이 이삭을 독자라고 말씀하신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br/>&nbsp; 첫째, 아들의 번제를 말하는 상황은 이스마엘이 하갈과 함께 쫓겨난 이후이다. 이스마엘이 쫓겨난 것은 창세기 21장 사건이고 번제를 드리는 장면은 22장 사건인데, 22:1에서 “이 일들 후에”라고 말씀하심으로써 21장과 22장은 연대기적 순서에 따랐다는 것을 보여 준다. <br/>&nbsp; 둘째, 약속의 씨는 이삭이며, 씨에 대한 약속은 이스마엘 탄생 훨씬 전부터 주어졌던 약속이다. 창세기 22:12은 『이는 이삭 안에서 난 자가 네 씨라 불릴 것임이라.』고 말씀한다. 이어지는 13절에서는 『여종의 아들[이스마엘]...도 너의 씨임이라.』고 말씀하시기는 하지만, 이스마엘은 단지 아브라함이 낳은 물리적인 아들일 뿐, 교리적으로 “네 씨”라 불릴 사람은 이삭이라는 것이 문맥을 통해 분명히 제시된다. 씨에 대한 약속은 창세기 13장부터 나왔다(창 13:14-17; 15:5; 17:7,8). 또 씨에 대한 이 약속이 주어질 때마다 그 씨가 차지할 “땅”에 대한 약속이 함께 주어지는데, 그 땅은 바로 카나안 땅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씨가 400년 후에 그 땅을 차지할 것이라 말씀하시고(창 15:13,18),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 그 일을 정확히 이루어 주셨다. 반면 이스마엘의 후손들은 결코 그 땅을 차지하지 못했다. 이스마엘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아랍인들이 그 땅을 차지한 것은 A.D. 7세기 무함마드(마호메트) 때에 이르러서였다. 왜 그들은 그동안 창세기의 약속에 따라 그 땅을 한 번도 주장하지 않았는가?<br/>&nbsp; 사실 아브라함이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은 것은 그의 부족한 믿음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씨를 약속하신 지가 한참인데도 아무 소식이 없기 때문에, 하갈을 통해서라도 낳으라는 사라의 권면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라”를 통해 아들을 낳을 것이라 하셨고, 심지어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이나 축복해 달라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통해 그분의 언약을 세우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다(창 17:15-19). 이스마엘에 대해 말씀하실 때는 반드시, “(이삭이 정상적 아들이지만) 이스마엘에 대해서도...”라는 관점으로 서술하신다(창 17:20). <br/><br/>아브라함의 아들은 누구인가?<br/>&nbsp; 이슬람교도들은 자기들이 필요할 때는 성경을 인용하고, 난관에 부딪치면 성경이 틀렸다 말한다. 이것은 그들의 교주 마호메트의 습관을 따른 행동이다. 그는 자기 종교를 창시할 때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에게 성경 내용을 듣고 자기 종교에 유입시켰다. 일부 유대인들이 마호메트의 의도를 알고, 마호메트에게 도움될 만한 성경 내용을 알려 주지 않자, 마호메트는 유대인들에게 성경을 정확히 말하라고 꾸짖는다. 성경 기록이 정확한데 왜 틀리게 말하려 하느냐는 것이다. 즉 마호메트는 성경 내용이 처음 기록된 그대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만드는 종교에 방해되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감추고 왜곡했다. <br/><br/>&nbsp; 분명히 말하지만 이슬람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잇는 종교도 아니고 선지자들을 존경하는 종교도 아니다. 단지 성경의 진리를 파괴하려고 사탄이 만들어낸 작품 중 하나일 뿐이다. 역사적으로 이슬람이 얼마나 많은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을 죽였는가, 또 지금도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가? 이쯤 되면 이슬람이 사탄의 대단한 걸작품인 것이 증명되지 않는가?&nbsp; BB]]></description>
<dc:creator>지식뱅크 관리자</dc:creator>
<dc:date>Sat, 12 Mar 2016 12:36:32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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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이슬람의 베일을 벗기다 3  - 이슬람이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종교인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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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한국이슬람교중앙회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이슬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슬람은 하나님을 믿는 종교다. 유대교가 모세의 5경(토라 Torah)을 토대로 했고, 기독교가 예수의 복음서를 중심으로 교회를 세웠듯이 이슬람은 무함마드의 ‘꾸란’을 통해 하나님인 ‘알라’에게 귀의하는 종교이다.”(<A HREF="http://www.koreaislam.org/data/data2.jsp)" TARGET="_blank"  rel="nofollow">http://www.koreaislam.org/data/data2.jsp)</A><br/>&nbsp; 사람들이 이 선전 문구를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아마도 이슬람은 유대교나 기독교와 뿌리가 같은 종교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러한 이슬람의 주장은 사람들을 다음과 같은 두 개의 거짓말로 이끈다. 이번 호에서는 이 두 거짓말에 대해 분석해 보도록 하자. <br/>&nbsp; 첫째, “이슬람은 유일신교다. 알라와 하나님은 같다.”<br/>&nbsp; 둘째, “이슬람은 유대교, 기독교와 형제 종교로서, 그들을 존중한다.”<br/><br/>1. “이슬람은 유일신교다.”<br/>&nbsp; 이 거짓말은 전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속고 있는 거짓말이다. 이슬람교가 알라 외의 다른 신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종교가 유일신교라 생각한다. 물론 이슬람에서 다른 신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너무나 엄격해서 그들은 자기들의 마스지드(모스크) 안에다 어떠한 형상이나 그림도 놓지 않는다. <br/>&nbsp; 하지만 유일신교라는 것은 단순하게 한 신만을 섬긴다는 말이 아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선택하고 그와 어떤 특별한 관계를 맺으시어 그에게 하나님이 되셨을 때, 그가 믿는 신앙이 유일신 신앙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수많은 신들 중 한 신을 선택해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누군가에게 자신의 유일하심을 계시해 주시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유대교는 유일신교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나타내 주셔서 당시 메소포타미아의 수많은 우상들로부터 성별시키셨기 때문이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한 언약을 맺으셨다. 그것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를 복주시겠다는 것이었는데(창 12:1-3), 이것은 그의 씨를 번성케 하시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말이다(창 17:8).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셨다(출 3:6). 하나님께서는 세상 어떤 민족에게도 이러한 약속을 하지 않으셨다. <br/>이슬람이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종교인가?<br/><br/>&nbsp; 이것이 구체화된 것이 바로 모세와 맺으신 언약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셨을 때, 그분은 이집트의 모든 다신교 체제로부터 이스라엘을 성별시키셨다.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선언하셨다(출 29:46). 그래서 이스라엘에게는 모든 우상들을 금하셨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게 하셨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한 언약 관계를 맺음으로써 유일신 신앙을 갖게 된 것이다. <br/>&nbsp; 기독교 신앙 역시 하나님의 언약으로 유일신 신앙을 갖게 되었다. 단순히 유대교에서 이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언약으로 교회를 그분의 백성으로 삼아 주셨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맺으신 “새 언약”(New Testament)이다(마 26:28).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 되었다. 그분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다른 모든 우상들과는 단절된 것이다. 심지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제시된다(엡 5:31-32). 이것이 바로 우리가 유일신 신앙을 갖는 이유이다. <br/>&nbsp; 반면 이슬람교에는 이와 같은 언약 관계가 전혀 없다. 그들은 알라만을 섬긴다고 하지만, 그리고 그 알라가 성경의 하나님과 같은 신이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아라비아인들에게 언약을 세우지 않으셨다. 코란을 통해 답해 보라. 알라는 이슬람교도들에게 어떠한 언약으로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를 맺었는가? 그들은 단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이름만으로 아브라함의 언약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한다. 단지 유대교의 연장이기 때문에 유일신교라 주장하는 것이다. <br/>&nbsp;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는 구약성경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신약성경을 그리고 무슬림들에게는 코란을” 주셨다고 한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그들은 코란을 성경의 연장으로 놓는다. 하지만 이 말은 “불교에는 불경, 유교에는 사서삼경, 이슬람교에는 코란”이라는 말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말이다. 즉 서로 관련되지 않은 종교들이 각자 경전이 있듯이 코란도 그럴 뿐, 절대로 구약과 신약의 연장선에 있지 않다. <br/>&nbsp; 하나님께서 신약을 주신 목적은 분명하다. 그것은 율법으로 이끌림받는 구약 시대의 경륜을 마감하고 새로운 은혜의 경륜을 시작하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코란을 주셨을 때 어떤 경륜이 바뀌었는가?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의 하나님이셨다가(구약) 그분을 믿는 온 세상 사람들의 하나님이 되셨다(신약). 그럼 코란을 통해서는 어떻게 무엇이 바뀌었는가? 없다. 아무것도 없다. 단지 무함마드(마호메트)가 새로운 종교를 창시했으니 그럴듯한 경전 하나가 필요했을 뿐이다. <br/>&nbsp; 이슬람의 알라는, 자기 종교에서는 유일신일지 모르나 그것은 그들이 한 신만을 섬긴다는 말일 뿐, 언약을 맺어 백성을 삼으신 성경의 하나님과 어떤 관련도 없는 신이다. 그 신은 무함마드 당시 아라비아 쿠라쉬족의 “달 신”(moon god)의 변형이다. (달 신에 대해서는 본지 208호 『알라와 달 신』을 참조할 것.) 무함마드는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위해서 다른 신들을 버리고 달 신 하나만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신을 아브라함 신앙과 교묘히 접목해서 한 신으로 재탄생시켰다. 그것이 이슬람 교도들이 믿는 알라이다. <br/><br/>&nbsp; 2. “이슬람은 유대교와 기독교를 존중한다.”<br/>&nbsp;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이 자기들의 뿌리를 유대교와 기독교로 가져오는 것은 사람들에게 접근하기 위한 하나의 전략일 뿐이다. 그들 스스로도 유대교와 기독교와 같이 취급당하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그러면서도 앵무새처럼 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우리는 아브라함, 모세, 요한, 예수를 모두 인정한다.”이다. 그들 모두를 선지자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코란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인정은 한다는 것이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는 인정하지 않지만 그래도 선지자로는 인정해 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말들을 들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이들은 모두 형제 종교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바로 무슬림들이 노리는 전략이다. <br/>&nbsp; 이슬람에서 모세나 예수님을 인정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세를 인정하는 것과는 전혀 개념이 다르다. 우리는 구약 유대인들이 아니지만 구약성경을 그대로 믿는다. 신약과 경륜적인 차이가 있어 구약의 율법을 교리로 받아들이지는 않으나, 여전히 구약을 통해서 영적인 교훈들을 받으며 설교단에서는 구약성경 인용이 끊이지 않는다. 즉 구약성경은 신약성경과 더불어 기독교의 경전이다. 하지만 이슬람에게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전혀 경전이 아니다. 그들의 단상에서는 구약이나 신약이 인용되지 않으며, 성경에 계시된 어떤 것도 그들 삶에 지침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구약성경도 영감받은 책으로 여기지만, 그들은 구약이나 신약을 영감받은 것으로 믿지 않는다. 우리는 구약성경에 모순이 없다고 믿지만, 그들은 신구약 성경은 수많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 모든 모순들을 코란이 바로잡았다고 말한다. 반면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의 모순을 신약이 바로잡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br/>이슬람이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종교인가?<br/><br/>&nbsp; 이쯤 되면 이슬람은 자기들 종교를 유대교나 기독교에서 차별화시켜야 할 것이다. 차별화를 강조해야 자기들 종교를 더 제대로 전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들은 현재 차별화보다는 동질화를 전략으로 내세운다. 왜 그럴까? 중동이나 북아프리카 그리고 동남아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이슬람이 약세이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슬람보다는 기독교에 더 익숙해 있고(우리 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기독교와의 연관성을 강조해야 대중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자기들은 이처럼 기독교인들을 존중하는데 오히려 기독교인들이 자기들을 나쁘게 여긴다는 생각을 심어 준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전략은 적중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이슬람을 좋은 종교, 기독교는 나쁜 종교라 인식하고 있다. 그동안 이슬람에 대해 나쁘게 말한 모든 것들은 기독교인들에게서 유래된 “편견”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슬람 종교와 문화에 연관된 시중의 모든 책들은, 심지어 교과서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편견”을 제거해 놓았다. <br/>&nbsp; 바로 이것이 우리가 이슬람을 정확히 알아야 하는 이유이다. 분명히 인식하라. 알라는 하나님이 아니며, 코란은 성경과 어떠한 관련도 없으며, 이슬람은 그리스도인을 절대로 형제로 인식하지 않는다. 이슬람교에 대해 일신교 운운하지 말라. 그것은 우리 하나님을 모독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nbsp; BB]]></description>
<dc:creator>지식뱅크 관리자</dc:creator>
<dc:date>Tue, 01 Mar 2016 15:11:43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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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이슬람의 베일을 벗기다 2 - 알라와 달 신</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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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성경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스라엘 주변 모든 지역은 우상 숭배의 지역이었으며, 오직 이스라엘만 하나님을 믿는 지역이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인데, 성경 시대에 카나안과 그 주변이 모두 바알 숭배 지역이었듯이, 오늘날 그 지역은 모두 알라 숭배 지역이다. 이런 점에서 카나안 고대 종교와 이슬람교는 닮았으며, 이슬람교는 고대 카나안의 바알신을 비롯한 다신교 우상 숭배의 맥을 잇는 또 하나의 우상 종교인 것이다. 이슬람교가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라는 점을 많은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이슬람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우상 숭배를 금하지 않는가? 카톨릭이나 어설픈 기독교보다도 철저하게 형상을 금지하는 것이 이슬람 아닌가? 하지만 이것은 이슬람 교도들의 선전에 속아서 하는 말일 뿐이다. 그들에게는 적어도 두 개의 형상이 있으니, 즉 “초승달”과 “카바의 검은돌”이다. <br/><br/>&nbsp; 1. 달 신 알라(Alla, a moon-god)<br/>&nbsp; 마호메트가 이슬람을 창시하기 전, 아라비아는 온갖 우상 숭배의 장소였다. 메카에 있는 카바(“하나님의 집”)에는 온갖 우상들이 가득 찼는데, 그 중 “달 신”이 최고의 신이었다. 그 달 신을 알라라 불렀고, 그에게는 알랏, 알우자, 마낫이라는 세 딸이 있었는데, 그들도 모두 여신들이다. 이때에도 이교도들은 카바를 순례하곤 했는데,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슬람 전통에 그대로 남아 있다. <br/>&nbsp; 무슬림들은 말하기를, 무함마드(마호메트)가 그 모든 우상들을 카바에서 제거해 버리고 알라 유일신 사상을 전파했다고 한다. 또한 그들은 달이나 달 형상에 대고 직접 절하거나 숭배하지는 않으며, “알라”라는 말은 단순히 “신”(하나님)을 의미하는 단어일 뿐이라 말한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알라가 원래는 여러 신들 중 “달 신”의 이름이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이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그들의 모든 삶이 달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그들이 섬기는 알라가 이전부터 있던 달 신에서 유래된 것임을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이다. <br/>&nbsp; 초승달은 이슬람의 가장 강력한 상징이다. 오늘날 몇몇 이슬람 국가들, 예컨대 파키스탄이나 터키 같은 나라들은 그 국기에도 초승달과 별 모양이 그려져 있다. 이 상징에 대해서 무슬림들은, 무함마드가 최초의 계시를 받을 때 초승달과 샛별이 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들이 섬기는 알라가 달 신이기 때문이다. 초승달은 알라를 상징하고, 별은 “신앙고백”(샤하다), “기도”(쌀라), “금식”(라마단), “자선”(자카트), “성지순례”(하지) 이상 5가지 율법을 상징한다. <br/>알라와 달 신<br/>&nbsp;코란에는 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새 달(초승달)에 대해서 그대에게 묻는다면 답하여라. ‘그것은 사람들을 위해 또 순례를 위해 정해진 때의 설정이다’ ”(코란 2:189). 즉 달이라는 것은 절기들을 보여 주는 알라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무슬림들은 초승달에 맞춰 그들의 모든 종교적 행사들을 치른다. 9월 “라마단”(금식) 기간도 초승달이 뜰 때부터 다음 초승달이 뜰 때까지이고, 12월 “하지”(성지순례)도 초승달이 뜰 때 출발해서 다음 달 초승달이 뜰 때까지 마쳐야 한다. 그들의 모든 생활이 바로 이 초승달에 맞춰져 있는 것이다. <br/><br/>달 신 알라 - 가슴에 초승달이 보인다<br/><br/>&nbsp; 달 신 알라는 아라비아의 많은 신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부족인 쿠라쉬족의 주신(major god)이었다. 왜 하필이면 그들은 달 신을 최고의 신으로 숭배했을까? 보통은 태양 신을 최고의 신으로 숭배하는데 말이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사막 기후와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기후적 특성상 태양은 저주, 혹은 죽음을 상징한다. 반면 달은 어둠을 밝히고, 사막에 이슬을 가져다 주어 생명의 상징이 된다. 그래서 무슬림들은 밤을 더 신성시한다. 예를 들어 라마단 기간인 9월에는 해가 떠 있는 동안, 즉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먹지도 마시지도 흡연도 하지 않다가, 해가 지는 즉시 이 모든 금기들을 행한다. 반면 성경은 이와 정반대로 말씀한다. 『이것이 정죄라. 즉 빛이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이 빛보다는 오히려 어두움을 더 사랑하니 이는 그들의 행위가 악하기 때문이라』(요 3:19). 『너희는 모두 빛의 자녀들이며 낮의 자녀들이라. 우리는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노라』(살전 5:5). <br/>&nbsp; 당시 아라비아의 가장 강력한 부족인 쿠라쉬족은 이러한 달 신을 섬겼는데, 마호메트는 정치적, 종교적 세력을 갖기 위해 바로 이 쿠라쉬족과 결탁했고, 그래서 그들의 신을 유일신으로 선포한 후 다른 우상들을 제거해 버린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기독교나 유대교에는 유일신이 있는데 자기들은 다신교를 믿는다는 것도 하나의 자극이 되었다. 다시 말해 무함마드가 알라를 유일신으로 선포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유일하심을 계시해 주셨기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상 쿠라쉬족과 결탁할 필요가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다. <br/><br/><br/>메카의 카바 모스크 전체. 모스크 안팎으로 순례객들이 가득하다.<br/><br/>성소를 확대한 것. 성소 주변을 순례객들이 돌고 있다<br/><br/>&nbsp; 2. 카바의 검은돌<br/>&nbsp; 카바(Kaba)라는 것은 메카에 있는 모스크인데, 그&nbsp; 안에 “하나님의 집”이라 불리는 “성소”가 있다. 이 “하나님의 집”은 아브라함이 이스마엘과 함께 이곳에 지었다고 전해지는데, 물론 성경을 왜곡해 만들어낸 말에 불과하다. 오늘날 카바 성소는 높이 15m, 폭 10m, 길이 12m의 직사각형 건물이다. 그 안쪽 한구석에 검은돌이 1.5m 정도 높이에 박혀 있는데, 이 돌은 천사가 아브라함에게 주어 그 건축에 사용한 돌이라 한다. 말하자면 이슬람의 성물이다. 무슬림들은 일생에 한 번 카바를 순례하는 것을 의무로 삼고 있으며, 카바에 와서는 성소를 일곱 번 돌기, 검은돌에 입맞추기 등의 행사를 한다. 왜 성소를 도는가? 무엇 때문에 이곳에 오는가? 그 안에 있는 것은 오직 검은돌뿐이다. 결국 검은돌을 향해 경배하기 위해 모이는 것이다. 왜 세계 각국에 있는 모스크들은 모두 카바를 향해 있는가? 왜 전 세계의 무슬림들은 카바를 향해 하루 다섯 번 절하는가? 카바에 무엇이 있기에 그토록 카바를 향해 종교적 열정을 불태우는가? 그것은 그곳에 검은돌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검은돌을 숭배하는 자들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다신교와 무엇이 다른가? 달 신 알라는 당시 수없이 많던 아라비아의 다신교 신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그들이 농경 정착민이 아니라 유목민임을 감안해 볼 때 태양 신보다 달 신을 섬기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을 뿐이다. 또한 카바의 검은돌 숭배는 고대의 거석 숭배 사상과 연관되어 있다 할 수 있다. <br/><br/>알라와 달 신<br/><br/>&nbsp; 3. 하나님을 흉내내는 알라<br/>&nbsp; 고대 카나안 종교에서 바알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흉내냈다면, 이슬람의 알라 역시 방식은 좀 다르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흉내내고 있다. 알라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유일신으로 무장해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려 한다. 어쨌든 이슬람은 유일신앙을 표방하는 종교로서, 알라 외의 다른 모든 우상들을 거절한다. 여기에는 기독교도 해당되는데, 왜냐하면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를 세 신을 섬기는 것이라 하여 우상이라 비난하는 것이다.<br/>이슬람은 실제적으로는 유대교와 기독교에 적대감을 갖고 이들을 정복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지만,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친밀함을 드러내려고 애쓴다. 대중에게 이슬람교를 선전하기 위해, 이슬람은 유대교나 기독교와 뿌리가 같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상당히 강조하는 것이다. 알라와 성경의 하나님이 같음도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들의 코란에는 많은 구절들이 성경에서 차용한 것들이다. 차용은 하되 왜곡하였다. 그러나 이슬람의 알라는 구속의 능력이 없다. 이슬람은 하늘 나라와 지옥을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성경을 흉내내고 있지만, 그 구속 사역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성경과 닮지 않았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이슬람교도 행위 구원을 전한다.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테러를 해야(지하드) 천국에 간다고 말하는 것 외에도, 결과적으로 선행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선행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는 모든 신들은 자신이 가짜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들은 죄인을 구원할 능력이 없기에, 죄인들이 지옥에 가고 구원받지 못하는 책임을 죄인들에게 짊어 지우고 있는 것이다. 정말 능력있는 신이라면 죄인이 어떤 죄를 지었든지 그를 구원할 수 있어야 한다. <br/>&nbsp;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친히 구원 계획을 마련하시고 또 완성해 놓으셨다. 십자가의 피로써 모든 죄들을 다 씻으셨기 때문에,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죄인은 구원받는다(엡 2:8). 구원받기 위해 어떤 선한 일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을 도와드릴 필요가 전혀 없다. 그러나 이슬람의 알라는 다른 종교의 신들과 마찬가지로 죄인들을 구원할 아무런 능력도 없다. 죄인들을 위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면서 전능하다,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nbsp; BB]]></description>
<dc:creator>지식뱅크 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2 Feb 2016 22:17:02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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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이슬람의 베일을 벗기다 1 - 인간을 숭배하는 사탄의 종교 이슬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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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이슬람은 로마카톨릭과 더불어 현존하는 가장 큰 사탄의 종교이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마호메트에 대해서 “사탄의 장자”라 말할 정도로, 이슬람교는 그들의 교리적인 측면 외에도, 역사적으로 그들이 저질러 놓은 수많은 살육과 악행들을 통해서 그들의 사탄적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참으로 이상하게도 오늘날 이슬람교는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호의를 얻고 있는 종교이다. 오늘날 무수한 사람들은 이슬람을 관대한 종교라고 생각한다. 손에는 칼을 들고 무자비한 학살을 하면서도 “나는 관대하다.”라고 말하는데, 사람들은 그 말을 그대로 믿는다는 사실이다. <br/>&nbsp; 인구 분포로 볼 때 이슬람은 세계 인구의 1/5을 자랑하며, 신도 수로 말하면 세계 제1의 종교이고, 또 가장 빨리 확산되는 종교이다. 오늘날 그들이 확산되는 가장 큰 이유는 기독교에 대한 반발 때문이다. 서구 사회를 이끌었던 기독교가 여러 가지 이유로 외면당하자 서구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다른 대안을 찾게 되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슬람교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반미 감정이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한다. <br/>&nbsp; 필자는 본지에 여러 번에 걸친 칼럼 형식의 기고를 통해 이슬람의 확산에 대해 경고한 바 있다. 하지만 오늘날 밀물처럼 밀려오는 이슬람의 홍보, 혹은 포교 전략에 비해 이 땅에 그들을 비평하고 경고하는 목소리는 너무 미약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기독교인들 사이에 그들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에 필자는 본지를 통해 이슬람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고, 체계적인 비평을 가하려 한다. 마호메트와 이슬람의 역사, 코란과 하디스에 나타난 그들의 교리, 성경에 대한 모방과 왜곡, 또 폭력의 근원과 그 실상, 그리고 그들의 확장 정책 등 그들의 거의 모든 면들을 다각도로 조명하며 비평할 것이다. 독자들은 이를 통해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사악한 면들을 더욱 확실히 알고 또 경고받을 것이다. <br/>무슬림의 신앙의 대상인 마호메트<br/><br/>&nbsp; 이슬람에 대해서 말하려면 먼저 마호메트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마호메트로 익숙한 이 이름은 사실 영어적 표현이고, 아랍어로는 무함마드라고 한다. 오늘날은 비무슬림들도 공식적으로 표현할 때는 모두 마호메트가 아니라 무함마드라 말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영어권의 영향을 받은 우리에게는 마호메트라는 표현이 훨씬 익숙하다. 따라서 필자는 필요에 따라 이 두 표현을 혼용할 것이다.)<br/>&nbsp; 무슬림들이 말하는 바, 마호메트(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이며 선지자”이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선지자가 아니라 그 종교에서 절대적인 존재로, 거의 알라와 동일한 지위의 사람이다. 물론 모든 무슬림들은 이 사실을 부정하며, 그는 선지자일 뿐이라 말한다. 그들의 교리에 따르면, 알라는 유일신 하나님이며, 알라를 믿는 자들이 무슬림이다. (물론 알라는 우리가 믿는 바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에 자세히 다룰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무함마드의 가르침대로 믿지 않는다면 그는 알라를 믿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마호메트는 “알라에게 이르는 길”이며, “알라와 그의 선지자 무함마드”를 믿는 사람만이 무슬림으로 불려질 수 있는 것이다. <br/>&nbsp; 무슬림들에 따르면, 마호메트는 생전에 우상 숭배로 가득한 아라비아 사람들을 유일신 알라에게로 돌아오게 했다고 한다. 즉 그는 유일신의 전파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마호메트가 요구한 것은 단순히 알라를 믿으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진정한 요구는 알라의 사도인 마호메트 자신의 명령을 따르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코란의 명령은 다음과 같다. <br/>인간을 숭배하는 사탄의 종교 이슬람<br/>&nbsp;<br/>&nbsp; “그리하여 알라와 사도에 복종하라. 그러면 너희들은 자비를 받을 것이다”(3:132).1)<br/>&nbsp; “사도에 복종하는 자는 곧 알라에게 복종하는 것이다...”(4:80).<br/>&nbsp; 무슬림에게 마호메트는 분명히 신앙의 대상이다. 코란 25:62에서는 “믿는 사람들”의 정의를 “알라와 그 사도를 믿는 사람”이라고 밝힌다. 심지어 그는 호칭에 있어서도 구별되었는데, 코란 25:63에서는 “너희들 사이에서 사도를 부를 때는 너희들이 서로 부르는 것처럼 불러서는 안 된다.”라고 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은 마호메트에 대해 말할 때 “마호메트(무함마드)께서 이렇게 했다...”라는 식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반드시 “알라의 사도께서...” 혹은 “선지자께서...”라고 말한다. 부득이하게 이름을 불러야 할 때에도 “선지자 무함마드...”라고 말한다. <br/>&nbsp; 그뿐 아니다. 그들은 그 사도, 혹은 선지자를 말할 때에는 반드시 그의 이름 뒤에 “그에게 평화가 깃들기를”(Peace Be Upon Him)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예를 들면 “선지자 무함마드(평화가 그분에게 깃들기를)가 말씀하시기를...”이라는 식이다. <br/>&nbsp; 왜 무슬림들은 그에게 평화를 기원할까? 그들에게 이러한 표현은 그에게 바치는 최고의 찬사이다. 하지만 이 말은 역설적으로 말해서, 마호메트에게는 지금 평화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에게 평화가 충만하다면 왜 그에게 평화를 기원하겠는가? 이것은 마치 카톨릭 교도들이 교황이나 추기경이 죽었을 때 그를 위해 연도하는 것과 같다. 연도란 죽은 사람들이 연옥에서 어서 빨리 하늘 나라로 올라가도록 비는 기도, 즉 “위령 기도”인데, 그가 빨리 하늘 나라로 가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는 것은 그가 현재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마호메트를 위해 평화를 빈다는 것은 그가 현재 평화롭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왜 지금 평화롭지 못하겠는가? 지옥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전 세계 20억 무슬림들이 그에게 평화를 기원한다 해도 그가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br/><br/>&nbsp; 뿐만 아니다. 이슬람교에서 마호메트는 죄를 용서하는 존재이다. <br/>&nbsp; “너희들이 만약 알라를 사랑한다면 나를 따르라. 그러면 알라께서는 너희들을 사랑하고 너희들의 죄를 사할 것이다...”(3:31).<br/>&nbsp; 죄를 용서받는 조건이 마호메트를 따르는 것이라는 것이다. 성경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이와 같은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신성을 드러내시면서 사용하시던 표현이다. 『너희가 하나님을 믿으니 또한 나를 믿으라』(요 14:1),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라』(요 12:44).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를 본다(요 14:9). 그런데 이슬람교에서는 마호메트를 통하여 알라를 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코란이 얼마나 성경을 모방하는지를 보여 주는 것임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마호메트가 신적인 존재라고 말하는 것이다. 무슬림들은 마호메트가 알라와 같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와 같은 코란의 구절들을 통해 그 교리를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같은 분이심을 확실히 증거한다. 『나와 내 아버지는 하나니라』(요 10:30). 마호메트는 이와 똑같은 구절을 얼마나 써 놓고 싶어했을까?<br/>&nbsp; 무슬림들은 참람하게도, 마호메트는 성경에 예언된 존재라 주장한다. 바로 신명기 18:15인데,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메시야를 예언케 하는 장면이다. 『주 너의 하나님께서 네 가운데로부터 네 형제들 가운데서 나[모세]와 같은 한 선지자를 네게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에게 경청할지니라.』 여기서 “나와 같은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요한복음 6:14과 7:40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선지자”셨음을 증거한다. 하지만 무슬림들은 “그 선지자”가 바로 마호메트라고 주장한다. <br/>&nbsp; 심지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내가 아버지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위로자』(요 15:26)가 마호메트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위로자”(Comforter)는 헬라어로 “파라클레이토스”라는 말인데, 무슬림들은 주장하기를 신약성경이 “페리클리토스”를 “파라클레이토스”라고 잘못 표기한 것이라 한다. “페리클리토스”는 “빛남, 칭찬” 등의 뜻인데, 이를 아랍어로 하면 “아하마드”이다. “무함마드”는 “칭찬받는 자, 빛나는 자”라는 뜻으로, “아하마드”가 인칭명사화된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것은 바로 “무함마드”(페리클리토스)인데, 신약성경이 실수로 “위로자”(파라클레이토스)라고 오기했다는 것이다. 어차피 그들은 신구약성경이 오류로 가득 찼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성경은 이 “위로자”라는 말을 세 번이나 강조하고 있다(요 14:16,26; 15:26; 16:7). 특히 요한복음 14:26과 15:26은 그분이 바로 “성령,” “진리의 영”이라고 정의내리고 있으며, 14:16은 그분이 성도들과 영원히 거하신다고 말씀한다. 하지만 마호메트는 누구와도 영원히 거하지 않으며, 어떤 영적 형태로라도 거하지 않는다. <br/><br/>인간을 숭배하는 사탄의 종교 이슬람<br/>&nbsp; 이와 같이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들에게 마호메트는 거의 알라와 같은 존재다. 그는 신앙의 대상이다. 그들은 애써 이 사실을 부정하지만 결국 이슬람교는 인간을 믿는 종교이다. 그는 이슬람교의 창시자일 뿐 아니라 “교주”이며, 그래서 인간 교주를 섬기는 모든 사이비 종교와 마찬가지로 이슬람교도 사이비 종교이다. 거의 모든 종교는 인간을 숭배하는데, 인간 숭배가 극치를 이루는 것은 대환란 때의 적그리스도 숭배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사탄 숭배가 된다. 이것이 바로 이슬람교가 사탄의 종교라 말할 수 있는 한 예인 것이다.&nbsp; BB<br/>주석)--------------<br/>1) 이 글에서 사용된 코란 구절은 &lt;코란&gt;(김용선 역, 명문당, 2002)에서 인용되었다.]]></description>
<dc:creator>지식뱅크 관리자</dc:creator>
<dc:date>Wed, 17 Feb 2016 21:13:03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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