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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받은 성도가 해야 할 첫 번째 순종, 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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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4년 11월호>
『“이 사람들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성령을 받았으니 어느 누가 물로 침례받는 것을 금하리요?” 하며 주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고 그들에게 명하더라』(행 10:47,48).로마제국의 박해가 있던 시절, 원형 극장으로 끌려갈 각오를 하고 공개적으로 침례를 받던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종교 재판이 횡행하던 중세 암흑시대에도 비슷했다. 그들은 유아 때 타의로 받은 세례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고 주 예수를 구주로 영접했을 때 다시 침례를 받았다는 이유로 “세 번째 침례,” 즉 물고문이나 물고기 밥이 되는 일을 당해야 했다. 소련의 마수 아래 있던 그리스도인들은 수용소에 갈 각오를 하고 밤이 깊은 때에 몰래 강가로 가서 침례를 받았으며, 지금도 이슬람권 국가들에서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비밀리에 침례를 받는다는 소식이 들려오곤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그처럼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침례를 받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그들의 양심이 생동하게 되었기 때문이다(히 9:14). 성경은 이 시대의 성도들이 순종하는 침례를 이렇게 정의한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이제 우리를 구원하는 모형이니, 곧 침례라. (이것은 육체의 더러움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응답이라.)』(벧전 3:21). 이처럼 침례란 그 의미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모형을 통해 자신을 구원하신 주 예수를 공개적으로 시인하는 의식이다. 구원받은 사람의 양심은 “지옥에 가야 했던 너 때문에 자신을 주신 분을 드러내지 않고 배은망덕하게 살아 갈 테냐?”라고 늘 소리를 지르는 고로, 기회가 있다면 침례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다(행 8:36-38). 그렇다면 어째서 물속에 잠겼다가 다시 올라오는 것이 주님을 시인하는 의식이 되는 것일까? 침례를 받는 사람이 죽어서 땅속에 묻히는 것처럼 물속에 잠겼다가, 부활하는 것처럼 다시 물속에서 올라온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쉽게 깨달을 수 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을 때 그분과 함께 죄에게 죽어 장사되었다가 생명의 새로움 가운데서 행하도록 다시 살아난다(롬 6:2-4). 구원받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들어가게 되기 때문에, 그분의 죽으심과 장사되심과 부활하심이 우리가 직접 행한 일처럼 되는 것이다. 더 이상 죄가 우리에게 “대가”를 요구할 수 없는 까닭도 이 때문인데, 죄의 삯인 사망(롬 6:23)을 우리가 이미 받은 셈이기 때문이다(고전 15:56,57). 성경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일을 “성령으로 받는 침례”라고 말씀하신다(행 1:5). 그리고 “물로 받는 침례”는 그때 일어났던 일을 믿는다는 사실을 모형을 통해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의식인 것이다.
비록 물리적으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을지라도, 이는 영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엄연한 현실이다. 어떻게 2,000년 전에 있었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자신의 것이 된다는 것이냐고 따져 묻고 싶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와 유사한 예시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가령, 어떤 회사원이 인사이동을 해서 다른 조직으로 들어가 새 직무를 맡는다면, 그는 좋든 싫든 전임자가 처리해 놓은 일을 마치 자신이 했던 일인 양 감당해야 한다. 제정신인 회사원이라면 일이 잘못되어 거래처에서 항의 전화가 왔을 때 “전임자가 그랬습니다.”라고 변명하지 않는다. 마치 자기가 한 일인 것처럼 “죄송합니다. 얼른 처리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답한다. 그 조직으로 “들어갔기에” 조직 내에서 행해진 모든 일은, 심지어 자신이 그곳에 없었던 먼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라고 해도 자신이 행한 일처럼 되는 것이다.
변개된 한글 성경들은 하나같이 “침례”(浸禮)를 “세례”(洗禮)로 오역했는데, 이는 한문 성경들이 “침례”를 씻음을 받는다는 뜻의 “수세”(受洗)로 오역한 데서 기인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베드로전서 3:21에서도 말씀하시거니와, 침례란 씻어서 더러움을 제거하는 의식이 아니다. 침례를 뜻하는 헬라어 “밥티조”(βαπτίζω)는 “씻다”라는 뜻이 아니라 “담그다,” “가라앉다” 등의 뜻을 가진 단어다. 굳이 원어까지 논하지 않아도, 성경은 스스로가 침례란 무언가의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라는 것을 말씀하신다(고전 10:1,2). 모형적으로 봐도, 더러운 것을 씻어 내듯 겉으로 물을 붓거나 뿌려서는 죽음, 장사, 부활을 보여 줄 수 없다. 말하자면 침례는 반드시 “물에 잠기는” 방법으로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어떤 변명을 갖다 댄다 해도 그러한 오역은 “세례(침례)를 통한 중생”이라는 거짓 교리를 옹호하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세례가 죄를 제거하는 데에, 그러니까 거듭남에 어떤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교리 말이다. 이는 초대 교회 시대의 성경 변개 집단인 알렉산드리아 학파에서 발원했다. 성경을 거부하는 이교도 집단인 로마카톨릭은 이를 확대 재생산하여 “유아 세례”라는 교리를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는데,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었다고 하겠다. 이 교리를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아기들을 볼 때 “만일 세례가 죄를 제거하는 의식이라면, 저 아기가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을 테고, 당연하게도 유아에게 세례를 주어야겠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테니 말이다. 또한 로마카톨릭이 공회들을 통해 공식화한 유아 세례의 파급력은 엄청났는데, 유아 세례를 거부하거나 그 오류를 지적하는 사람들에게는 저주(지옥행)가 선포되었고, 로마카톨릭과 결탁한 국가 권력으로부터의 철퇴가 뒤따랐다. 그래서 당시에는 누구나 아기가 태어나면 곧바로 성당으로 가서 세례를 받게 했다. 유아 세례의 효력을 믿지 않는다고 해도, 주변에 “아기를 지옥으로 보내려는 사악한 부모”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유아 세례에 참여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이 있었기에 암흑시대의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재침례교도”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들이 믿음을 고백할 수 있는 장성한 나이가 되었을 때 다시 침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침례교도”인 우리는 이 “재침례교도”로부터 그 믿음과 명칭을 전수받은 것이다.
“유아 세례”라는 비성경적인 실행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심지어 이 나라에서는 로마카톨릭뿐 아니라 대부분의 개신 교회들에서까지 유아들에게 세례를 준다. 죄에 대한 자각도 없고, 더더구나 그리스도를 영접한 적도 없는 유아들에게 “선한 양심의 응답”이 나올 리 만무하건만, 그들은 부득부득 유아들에게 물을 뿌린다. 장로교의 창시자 “존 칼빈”이 어느 누구도 세례의 축복에서 제외되면 안 된다고 말했다는 둥, “성 어거스틴”이 대답할 능력이 없는 아이들을 위해서 다른 성인들이 대신 말해 주면 된다고 했다는 둥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성경은 만일 그들이 “정말로” 유아 세례의 효력을 믿는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유아 세례라는 “행위”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8,9).
오늘날 “침례”는 지역 교회의 회원이 되는 의식으로서도 기능한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엡 1:23) 안으로 들어가 그 지체가 되는 것은 성령님을 통해 일어나는 일이지만, “지역 교회” 안으로 들어가 그 회원이 되는 것은 대개 “물”을 통해서 일어난다. 성경대로 믿는 지역 교회의 회원이 되려면 교회의 다른 형제자매들 앞에서 자신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롬 8:16)임을 밝혀야 하는데, 침례는 이를 대체하기에 제격인 의식이다. 이미 다른 곳에서 침례를 받은 경우라면 방법을 달리해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새 성도라면 침례식 때의 구원 간증을 통해 회원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보통이다.
일반적으로 성경대로 믿는 교회에서는 침례를 줄 때 목사가 “아무개 형제(자매)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은 간증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침례를 받는 사람이 이에 동의를 나타냈을 때에만 목사가 “나는 형제(자매)의 신앙 고백에 따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줍니다.”라고 말하면서 침례를 준다(마 28:19). 이를 통해 다른 성도들은 그의 신앙 고백을 확인하고, 함께 교제할 수 있는 믿음의 가족으로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침례식에는 한 가지 의미가 더 있는데, 바로 우리가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이다(롬 6:5). 만일 죽은 자들이 살아나지 못한다면 우리가 침례를 받을 이유도 없다(고전 15:29). 그러나 주 예수께서 그분의 몸을 입고 부활하셨듯이, 우리와 교제하다가 사별(死別)한 지역 교회의 성도들을 포함하여 그분을 믿고 잠든 성도들 모두는 반드시 자신의 몸을 입고 부활하리라는 사실을 우리는 믿는다. 그래서 그 믿음을 물속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일을 통해 선포하는 것이다. 이러한 진리에 입각한 성경대로 믿는 교회들의 침례식은 로마카톨릭이나 개신 교회들에서 행해지는 “죽어 버린” 종교 의식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성도들로 하여금 우리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상기하게 하며,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더더욱 강화해 주기 때문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