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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말씀보존학회 - 한글킹제임스성경 및 진리의 지식을 전파합니다 &amp;gt; 바이블마스터 &amp;gt; 지식뱅크 - 성경공부와 양육</title>
<link>https://www.biblemaster.co.kr/bb7</link>
<description>테스트 버전 0.2 (2004-04-26)</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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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씨 뿌리는 자의 비유</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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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본 코너는 솔로몬성경연수원 교재들의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려 주신 지식의 보화들을 담고 있다.<br/><br/>예수 그리스도께서 “산상설교”를 통해 “왕국의 헌법”을 제시하시고, “왕의 표적들”을 통해서 자신이 그 왕국의 왕으로 오신 분이심을 증명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왕국과 왕을 거부했다. 이에 따라 왕국의 수립이 연기되고 신비의 형태로 감추어지게 되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실을 비유를 통해 알려 주셨다. 이번 호에서는 그 첫 비유인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관해 알아보고자 한다.<br/><br/>초림 당시 왕의 선두주자로서 사역한 “침례인 요한”은 백성들을 향해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고(마 3:2), 뒤이어 예수님께서도 자신이 왕이요 메시아이심을 표적을 통해 증거하심으로써 “천국”을 전파하셨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 그러나 왕국의 백성인 유대인들은 왕과 그분의 왕국인 천국을 거절했다. 그 결과 왕께서는 불법자들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고, 천국은 초림 때 이 땅에 세워지지 못하고 재림 때로 연기되고 만 것이다. <br/><br/>“천국”(Kingdom of Heaven)은 이 땅에 문자적으로 세워질 “실제적이고 가시적이며 정치적인” 나라로서,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신정통치 왕국”이다. “왕국”은 성경의 주제이자, 하나님과 사탄 간의 치열한 영적 전쟁의 주제이기도 하다. 즉 하나님께서 어떤 인간을 천국의 왕으로 임명하시면 사탄은 그 왕을 쓰러뜨리고 그 왕국을 탈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사탄이 그 왕국을 빼앗았다고 해도 그가 차지하고 있는 나라를 “천국”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다만 “인간들의 왕국”(단 4:17,25)이나 “세상 나라들”(눅 4:5, 계 11:15)로 불릴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왕국을 차지하려 하는 사탄은 자신이 다스리는 왕국을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천국과 비슷하게 보이게 하려고 모조품 하나를 만들어 냈으니, 그것이 바로 “기독교계”이다. “천국”과 “기독교계,” 둘 다 왕국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지만, 분명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천국”은 하나님께서 실제적으로(물리적으로) 다스리시는 왕국인 반면, “기독교계”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왕국이 아니라 “이 세상의 신”(고후 4:4)이요, “이 세상의 통치자”(요 12:31; 16:11)인 사탄이 다스리는 왕국이다.<br/><br/>그렇다면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에 “천국”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천국”은 역사 전면에 드러나지 못하고 “신비적인 형태”로 감추어지는데, 이를 가리켜 성경은 『천국의 신비들』(마 13:11)이라고 말씀한다. 이렇듯 “천국의 신비”는 백성들의 거부로 인해 어떻게 천국이 감추어지게 되는지와, 감추어진 기간에는 어떤 경륜적인 변화가 있고, 왕국의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어 나가는지, 그리고 그 천국이 재림 때 어떻게 다시 역사 전면에 드러나게 되는지와 같은 일련의 변화들을 보여 주고 있다.<br/><br/>『주께서 많은 것을 그들에게 비유로 일러 말씀하시기를 “보라, 씨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씨를 뿌렸는데,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지니,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어떤 씨는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지니,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솟아오르자 시들었으며, 뿌리가 없으므로 말라 버렸고, 또 어떤 씨는 가시떨기 사이에 떨어지니, 그 가시떨기가 자라나서 기운을 막아 버렸으나, 어떤 씨는 좋은 땅에 떨어지니, 어떤 것은 일백 배로, 어떤 것은 육십 배로, 또 어떤 것은 삼십 배로 열매를 맺었느니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하시더라』(마 13:3-9).<br/><br/>땅의 구분 : 길가<br/>땅의 유형 : 새들이 와서 먹어 버림(4절)<br/>초림 당시 왕국의 관점에 따른 비유 해석 : 1) 새들 : 악한 자(마귀, 마귀들, 마귀의 종들) 2) 마귀들이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가로채 감 3)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들으나 마귀의 미혹에 넘어가 버림(왕국을 거부함 - 마 11,12장, 이사야 예언 - 마음이 무디어짐)<br/><br/>땅의 구분 : 흙이 많지 않은 돌짝밭<br/>땅의 유형 : 흙이 깊지 않아 곧 싹이 나오나, 해가 솟아오르자 시들었고, 뿌리가 없어 말라 버림(5,6절)<br/>초림 당시 왕국의 관점에 따른 비유 해석 : 1) 해 : 환난, 박해 2) 기쁨으로 말씀을 받지만, 말씀으로 인해 환난과 박해가 오면 실족함 3) 처음에는 주님을 따라다니는 것 같지만, 결국 시험을 받으면 넘어짐<br/><br/>땅의 구분 : 가시떨기 사이<br/>땅의 유형 : 가시떨기가 자라나서 그 기운을 막아 버림(7절)<br/>초림 당시 왕국의 관점에 따른 비유 해석 : 1) 가시떨기 :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미혹 2)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미혹이 말씀을 억눌러 열매를 맺지 못함 3) 공회에서 쫓겨나는 것이 두려워 조용히 믿었던 상급관원들이나 니코데모 같은 사람들이 있었음<br/><br/>땅의 구분 : 좋은 땅<br/>땅의 유형 : 30배 열매, 60배 열매, 100배 열매(8절)<br/>초림 당시 왕국의 관점에 따른 비유 해석 : 1) 말씀을 듣고 깨달아 열매를 맺음 2) 제자들(11명) : 30배 3) 베드로, 야고보, 요한 : 60배 4) 요한 : 100배<br/><br/>“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다른 모든 비유를 해석하는 기초”가 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너희는 이 비유[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알지 못하느냐? 그렇다면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막 4:13)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 비유에서 “씨”는 『왕국의 말씀』(마 13:19), “씨 뿌리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 “땅의 상태”는 말씀을 받는 사람의 “마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유대인의 왕과 천국”을 다루고 있는 마태복음의 관점에 따르면, “왕국이 임하기 직전의 상황,” 곧 “초림 당시”나 재림 직전인 “대환란 기간”에 “왕국 복음”이 전파될 때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세와 관련하여 “네 부류의 사람들”이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땅의 유형은 “네 부류의 사람들의 마음의 상태”로 해석하고 적용해야 한다.<br/><br/>“뿌려지는 씨”가 “왕국의 말씀”으로 해석되는 마태복음의 관점(“천국의 신비”)에서는 “왕국 복음”으로 적용되지만, “하나님의 나라의 신비”를 다루고 있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관점에서는 『말씀』(막 4:14) 또는 『하나님의 말씀』(눅 8:11)으로 해석되기에 교회 시대에 전파되는 “은혜의 복음”으로도 적용할 수 있다.<br/><br/>『또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또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마 13:14). 예수님께서 청중들에게 천국에 관하여 비유로 말씀하기 시작하시자, 제자들은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마 13:10)에 관해 묻게 되는데,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시어 답하신다(마 13:14,15). 여기서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사 6:9,10)이 삽입되어 있는 중요한 이유는,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천국의 신비들”이 “교회 시대”에 적용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민족적으로 눈멀고 귀먹은 시대”는 주로 “교회 시대”를 지나 “대환란 때까지” 이어진다(사 6:11,12). 따라서 마태복음 13장의 천국의 신비들은 교회 시대에 세상과 기독교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주로 다루게 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Wed, 24 Sep 2025 11:44:3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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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메시아 왕국이 연기된 이유</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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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본 코너는 솔로몬성경연수원 교재들의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려 주신 지식의 보화들을 담고 있다.<br/><br/>“산상설교”를 통해 “왕국의 헌법”을 제시하시고, 또한 “왕의 표적들”을 제시하셔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왕국의 왕으로 오신 분이심을 증명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마태복음 11,12장에서 왕국과 왕을 거부하는 모습들을 보였다. 이에 따라 왕국의 수립이 연기되었는데, 이번 호에서는 “왕국의 연기”에 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br/><br/>예수 그리스도께서 “왕국의 헌법”을 선포하고 “왕의 표적들”을 보이신 이 시기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온전한 왕국, 즉 “물리적인 왕국”과 “영적인 왕국”이 동시에 구현되는 “메시아 왕국”을 세우시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왕을 거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후로 유대인 중심으로 흘러왔던 이 왕국은 과거에 한 번 붕괴되었다가(바빌론 포로) 다시 온전히 회복될 수 있는 중요한 시점을 맞이한 것인데 또 한 번 위기를 맞은 것이다.<br/><br/>두 왕국의 합법적인 왕이 오셨고, 왕의 백성들도 약속의 땅에 집결해 있었으며, 왕국의 기틀이라 할 수 있는 법령(마 5-7장)까지 선포된 마당에, 안타깝게도 그들은 일생일대의 중요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들이 자신들의 왕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것이다. 백성들이 왕을 죽였고, 인간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역사상 가장 모순되고 참혹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진정한 왕이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왕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때 세워지지 못하고 재림 때(결과적으로는 약 2천 년 뒤)로 연기되고 말았다. 이번 왕국 수립의 실패 원인은 지금까지의 여느 인간 왕처럼 “왕”에게 있지 않았고, 마음이 완고하고 타락한 “백성들”에게 있었다. 그들이 왕을 받아들였다면 초림 당시에 구약의 모든 예언이 성취되면서 이 땅에 완전한 왕국이 세워졌을 것이다. <br/><br/>&lt;천국&gt;<br/>문자적 ․ 물리적인 왕국<br/>눈에 보이는 실제 왕국<br/>지상 왕국(마 19:28)<br/>정치적인 왕국(사 9:6,7)<br/>먹고 마시는 왕국(눅 22:30)<br/>메시아를 영접할 때 들어감<br/><br/>&lt;하나님의 나라&gt;<br/>영적인 왕국(롬 14:17)<br/>눈에 안 보이는 내적 왕국(눅 17:20,21)<br/>땅에 속하지 않는 왕국<br/>“비”정치적인 왕국<br/>먹고 마실 수 없는 왕국(롬 14:17)<br/>거듭날(born again) 때 들어감(요 3:3,5)<br/><br/>&lt;천년왕국&gt;<br/>(Millennial Kingdom)<br/>1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합쳐진 지상 왕국<br/>2 천 년간(계 20:1-7) 지속되는 왕국<br/><br/>왕국이 연기된 이유는 왕국의 백성들이 그 왕과 왕국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왕과 왕국을 거부한 것은, 첫째, 그들의 눈이 감기고, 귀가 둔해지고, 마음이 무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사 6:9,10).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노니, 이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며 또 깨닫지도 못함이라. 또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또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의 마음이 무디어지고, 그들의 귀는 듣는 데 둔하고, 그들은 자기들의 눈을 감았으니, 이는 그들이 어느 때라도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귀로 듣지도 못하며 마음으로 깨닫지도 못하고 회심하지도 못하게 되어 나로 그들을 치유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한 것이라』(마 13:13-15).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은 신약에서 인용될 때 주로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상황”에서 인용된다(마 13:14,15, 요 12:39-41, 행 28:26-28).<br/><br/>둘째, 그들은 “표적의 소리”에 경청하지 않았다. 『만일 그들이 너를 믿지 아니하고 처음 표적의 소리에 경청하지 아니하면, 그들이 나중 표적의 소리를 믿으리라』(출 4:8). 『주 너의 하나님께서 네 가운데로부터 네 형제들 가운데서 나와 같은 한 선지자를 네게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에게 경청할지니라』(신 18:15).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와 같은 한 선지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로서 행하시는 “표적들의 소리”에 경청하지 않았다. <br/><br/>결국 어떤 표적에 대해서도 경청하거나 믿으려는 자세가 없으면서 계속 표적을 구하기만 했던 그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게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표적”을 제시하셨는데, 바로 “요나의 표적”이었다(마 12:39,40; 16:4). 『요나가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고래 뱃속에 있었듯이, 인자도 그처럼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땅의 심장 속에 있을 것이라』(마 12:40). 요나의 실제적인 죽음과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말하는 표적이었고, 그러한 부활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롬 1:4), “주”와 “그리스도”이심을(행 2:36) 증거해 주는 확실한 표적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왕의 지상 사역의 마지막은 그분께서 행하셨던 많은 표적들 가운데 가장 초자연적이고 너무나 분명한 사건으로 장식된다. 당시의 악하고 음란한 세대인 유대인들은 이 “마지막 표적의 소리”에라도 경청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끝끝내 거부하고 말았다(행 7:51-60).<br/><br/>셋째, 그들은 “영적이고 도덕적인 왕국”을 간과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로마 제국을 쓸어버리고 자신들을 “물리적으로” 해방시킬 “정치적인 왕”만을 기대했다. “물리적인 왕국”(천국)이 도래하기 위해서는 먼저 “영적이고 도덕적인 왕국(하나님의 나라)이 마음속에(눅 17:21) 임해야 하고(마 12:28), 또한 그 나라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마 19:24; 21:31, 눅 16:16)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왕국의 도래를 위한 “회개”와 “도덕적인 의”를 촉구했던 구약 선지자들의 경고를 잊었으며,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상설교(마 5-7장)를 통해 백성들이 갖추어야 할 “도덕적인 의”와 “바리새인들보다 더 뛰어난 의”(마 5:20)를 강조하셨을 때 그 진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해야 한다.”(마 6:33)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br/><br/>영적인 왕국은 안중에도 없고, 종교적이고 형식적인 경배와 의식들에만 사로잡혀 있던 대부분의 유대인들(특히 종교 지도자들)은 위와 같은 말씀들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들의 죄를 지적하며 도덕적인 원칙과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제시하신 예수님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들은 결국 왕국으로 들어가기 위한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채, 죄 없으신 왕을 거부하며 이렇게 외치고 말았다. 『카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요 19:15).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마 27:22,23).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써 새 언약의 피가 흘려졌을 때(마 26:28),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을 위한 구속의 길이 마련되었다(히 9:12, 요 3:16). 이로써 물리적인 왕국은 유대인들에게서 점점 멀어지더니 미래의 재림 때까지 연기되고 말았다. 즉 왕국에 대한 유대인들의 혼란이 그런 불행한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8 Aug 2025 16:36:51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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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성령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도우시는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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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육신적인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그것은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로 할 수도 없음이라...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나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롬 8:7,13).<br/><br/>새 생명이 태어났을 때 즉각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갈망”이다. 아기들은 큰 소리로 울어 젖히면서 나를 달래라고, 젖을 달라고, 놀아 달라고, 기저귀를 갈아 달라고, 자세를 바꿔 달라고 끊임없이 보챈다. 영적 생명이 탄생했을 때도 마찬가지의 현상이 나타난다.<br/><br/>혹자가 주 예수를 구주로 믿으면 성령님께서는 그 사람 안으로 들어가서 죽었던 영을 살리시고, 그 살아난 영과 결합하여 한 영을 이루신다(고전 6:17). 우리 안에 “새 사람”이 형성되는 것이다(골 3:10). 예수님께서는 이를 “거듭남,” 곧 육신의 출생 이후에 다시금 성령으로 태어나는 일이라고 설명하셨다(요 3:6). 이러한 영적 출생이 있고 나면 전에는 없던 갈망이 꿈틀대게 되어 있는데, 즉 전에는 기도하지 않아도, 성경을 읽지 않아도, 죄를 짓고서 그냥 넘어가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혹은 종교인으로서 습관적으로 했을지 모르는데, 이제는 원해서 하게 된다.<br/><br/>성령님께서는 이처럼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셔서 영적인 일들을 갈망하게 만드는 역할도 하시지만, 동시에 그것들을 충족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도 하신다. 성령님께서는 “위로자”라고도 불리시는데(요 14:26), 이에 대응하는 헬라어 파라클레토스(para;klhtov)는 “곁으로 불러낸 자,” “돕는 자”라는 뜻도 지니고 있다.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미워하는 세상에 우리를 유기하고 떠나 버리시지 않고, 우리 안에 영원히 내주하시면서 우리를 도우시는 분인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님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렇게 하시는지를 이제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br/><br/>우선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확신하도록 도우신다. 거듭난 성도는 자신이 거듭났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고후 13:5). 성령님께서 그 새로운 출생에 대해, 즉 그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다는(요일 5:1) 사실에 대해 증거하시기 때문이다(롬 8:16).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스스럼없이 “아버지”라고 부른다.<br/><br/>익숙함에 속아 잊고 살았을지 모르지만, 사실 그러한 관계성은 대단한 특권이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방인들이었다(엡 2:12). 따라서 전능하신 창조주께 무엇인가를 요청하는 일이란 언감생심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응당 하늘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선물을 주실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심지어 악한 아비라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아는데, <br/><br/>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받지 못하겠느냐고 오히려 반문하기까지 하셨다(눅 11:9-13). 전에는 받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면, 이제는 받는 것이 당연해진 것이다!<br/><br/>성령님께서는 우리가 진리를 따르도록 돕는 분이시기도 하다. 그분은 우리를 모든 진리로 인도하신다(요 16:13). 그렇다고 해서 거듭난 성도가 아무런 오류에도 빠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잘못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우리의 잘못을 드러내실 때 고집부리지 않고 하나씩 바로잡혀 가다 보면, 반드시 진리의 올바른 길에 들어서게 되어 있다.<br/><br/>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시는 주된 수단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구약에는 이 일에 대한 훌륭한 그림이 있다. 당신은 성소 안에 있는, 빵을 차려놓은 상 맞은편에 금촛대가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가? 이 금촛대는 하나의 중심 가지에서 양쪽으로 가지가 셋씩 뻗어 나와 총 일곱 개의 등불을 밝히도록 한 기명인데(출 25:32), 이는 한 분이지만 『하나님의 일곱 영』(계 4:5)으로도 표현되는 성령님을 상징한다. 『주의 영이 그의 위에 머물리니 지혜와 명철의 영이요, 계획과 능력의 영이며, 지식과 주를 두려워하는 영이라』(사 11:2).<br/><br/>성막의 금촛대에서 타오르는 불은 성소 안의 유일한 광원(光源)이었다. 이 그림으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빵”이 잘 차려져 있다고 해도 성령님을 상징하는 촛대의 불이 없다면 그 빵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조명”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다.<br/><br/>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큰 오해를 갖고 있다. 어떤 “직통 계시”를 통해 성경을 해석할 수 있게 되리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다. 성령님께서는 영적인 일들을 영적으로 비교함으로써, 즉 성경의 말씀들을 서로 비교함으로써 진리를 가르치시기 때문이다(고전 2:13). 성령님께서는 기록된 말씀을 다른 기록된 말씀과 비교함으로써 그 의미가 드러나도록 하시는 분이시지, 성경에 전혀 기록된 바 없는 새로운 계시를 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br/><br/>성령님께서는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고 승리하는 일도 도우신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도 않는다고 고백했다(롬 7:18). 우리의 육신은 “열매”라고 부르기에도 적합하지 않은 간음, 음행, 더러운 것, 음욕 등의 일들만을 생산해 낼 뿐이다(갈 5:19-21).<br/>따라서 아무리 잘해도 육신을 따라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다. 우리의 육신은 늘 성령을 거스른다. 예컨대 하나님께서 이런 상황을 허락하셨는데 어떻게 기뻐할 수가 있겠느냐고, 저런 형제에게 친절하게 대할 수 있겠느냐고, 그렇게 재미없게 모든 것을 절제하면서 살 것이냐고 우리에게 묻곤 하는 것이다.<br/><br/>그럴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육신을 억누르거나 윽박지르면서 육신과 맞서 싸우는 게 아니다. 육신적으로는 납득도 되지 않고 하기도 싫은 일일지라도, 그 육신을 죽은 것으로 여기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시라고 내어드리는 게 우리가 할 일이다(롬 6:11-14). 그러면 사랑, 기쁨, 화평, 오래 참음, 친절, 선함, 믿음, 온유, 절제로 이루어진 성령의 열매가 맺히고(갈 5:22,23), 육신을 통해 역사하는 죄는 힘을 잃는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승리하는 삶의 비결이다.<br/><br/>우리는 잘 인지하지 못하는 때가 많지만, 성령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도우시는 정말로 고마우신 분이시다. 심지어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도 그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신다(롬 8:26).<br/><br/>인간에게는 서먹한 사이일 때보다 오히려 소중한 사이일 때 더 쉽사리 상대방을 슬프게 하는 못된 습성이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늘 우리 안에 내주하시며 우리를 위해 주시는 성령님을 너무도 쉽게 슬프시게 해 드린다. 심지어 그럴지라도 그분께서는 우리를 떠나시지도, 돕는 것을 포기하지도 않으시기에, 마음은 더욱 숙연해진다.<br/><br/>따라서 우리는 성령님께서 슬퍼하실만한 일을 하지 않아야 한다(엡 4:30). 이후로는 성령님께 슬픔이 아닌 기쁨만을 안겨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하며, 우리의 질그릇 안에 계신 “보물”(고후 4:7), 곧 성령님을 “성령의 열매”로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5 Aug 2025 17:46:5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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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땅의 심장 속에서의 사흘 낮과 사흘 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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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본 코너는 솔로몬성경연수원 교재들의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려 주신 지식의 보화들을 담고 있다.<br/><br/>마태복음 5-7장의 “산상설교”를 통해 “왕국의 헌법”을 제시하시고, 마태복음 8,9장에서 “왕의 표적들”을 보여 주시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왕국의 왕으로 오신 분이심을 증명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마태복음 11장부터는 이스라엘이 그 왕국과 왕을 거부하는 모습들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12장에서도 이스라엘이 왕국과 그들의 왕을 거부하는 모습들이 나타나고, 이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경고와 질책이 연이어진다.<br/><br/>『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고 하든지, 나무도 나쁘고 열매도 나쁘다고 하든지 하라. 이는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알기 때문이라』(마 12:33). 문맥상 예수님께서 좋은 나무시고, 바리새인들은 나쁜 나무이다. 주님께서는 나쁜 나무인 바리새인들을 가리켜서 『독사들의 세대』라고 꾸짖으셨고, 주님께 사탄이 들렸다고 말할 정도로 마음에 악한 보화가 쌓여 있는 그들을 책망하셨다. 『오 독사들의 세대야, 악한 너희가 어떻게 선한 것을 말할 수 있겠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이 말하기 때문이라.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한 보화에서 선한 것들을 내고, 악한 사람은 악한 보화에서 악한 것들을 내느니라』(34,35절). 초림 때 천국을 가로막은 일차적인 책임은 바리새인들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에게 있으며(마 23:13), 그들은 예수님의 사역 전반에 걸쳐서 그분을 거부하는 반대 세력으로 등장함으로써 그들의 나쁜 열매를 드러냈다. <br/><br/>『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사람이 말하는 어떠한 빈말이라도 심판 날에는 그에 관하여 설명하게 되리라. 이는 네 말들로 인하여 네가 의롭게 되고, 또 네 말들로 인하여 네가 정죄함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마 12:36,37). 주님께서는 초림 당시 유대인들이 말로 범하는 성령 모독죄와 관련하여 “빈말”에 대해서도 경고하셨다. 이 구절은 교리적으로 교회 시대에 적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심판 때”나 “심판 날”은 항상 “큰 백보좌 심판”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큰 백보좌 심판 때” 주님과 함께 심판하는 자리에 앉아 있을 뿐(고전 6:2) “빈말”에 대해 심판을 받지는 않는다. 하지만 위의 말씀은 우리가 항상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 반드시 유념해야 할 구절이다(약 3:8,9).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우리가 『자기 몸으로 행한 것들』(고후 5:10)을 심판받는다고 기록하는데, 거기에는 우리 몸의 지체인 혀를 사용한 일도 포함될 것이기 때문이다.<br/><br/>『그러나 주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줄 표적이 없도다. 요나가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고래 뱃속에 있었듯이, 인자도 그처럼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땅의 심장 속에 있을 것이라』(마 12:39,40). 이스라엘 백성은 “표적”으로 시작한 민족이며(출 4장) “표적”을 구하는 민족이기에(고전 1:22) 그들이 “표적”을 구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줄 표적이 없도다.』라고 하신 것은 그들의 완악함에 대한 책망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까지 어떤 표적을 보여 줘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주님께서 어떤 표적을 제시하셔도 믿지 않겠다고 마음을 정하고서 오직 예수님을 흠잡기 위해 표적을 요구했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런 그들을 가리켜 『악하고 음란한 세대』(39절)라고 꾸짖으셨고, 34절에서는 『독사들의 세대』라고 책망하셨다. 마음을 완전히 닫고 주님을 의심하고 시험하는 자들에게 그런 강력한 표현을 쓰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한 가지 표적만을 남겨 두신 것이고, 그것이 그 민족에게는 마지막 기회였다. 그 기회는 주님의 제자들이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사도행전에서 주어졌는데, 끝내 이스라엘은 거부했고, 그 결과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전 세계로 흩어지는 역사를 맛보게 되었다.<br/><br/>주님께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게 마지막으로 보여 주실 표적은 “선지자 요나의 표적”이었다. 말하자면 그들에게 보여 줄 표적은 더 이상 없었고, 주님 자신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을 보여 주는 선지자 “요나의 표적,” 곧 『사흘 낮과 사흘 밤』 뒤에 부활하시는 표적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마 16:21, 고전 15:4). 『하나님께서 그분을 셋째 날에 살리셔서 드러나게 보여 주셨으니』(행 10:40). 이것이 유대인들에게 보여 주신 최후의 표적이었다! 요나는 고래에게 삼켜졌고 죽었으며 부활했다. 주님께서는 요나가 고래 뱃속에 있었던 일을 주님 자신의 죽음과 연결시키셨는데, 그렇게 보면 요나가 고래 뱃속에서 죽어 있었고 그의 혼이 “지옥의 뱃속”으로 내려가 주님께 부르짖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내가 지옥의 뱃속으로부터 부르짖었더니』(욘 2:2). <br/><br/>한글개역성경은 지옥을 “스올”로 음역해 놓아 지옥의 실체를 가려 버렸다.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그러나 요나는 분명히 죽었고, 그의 혼은 “지옥의 뱃속”에 내려가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후에 “땅의 심장 속”에 들어가 계셨던 것이다.<br/><br/>한편 요나는 그의 기도가 응답받아 지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의 몸은 고래가 육지에 토해 냄으로써 부활했는데, 이것이 바로 요나의 죽음과 부활이며, 주님께서는 이것을 주님 자신의 죽음과 부활의 예표로서 제시하셨다. 요나의 죽음과 부활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알리는 “표적”이었던 것이다.<br/><br/>『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서 이 세대를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파로 회개하였기 때문이라.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위대한 이가 여기 있느니라. 심판 때에 남방의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서 이 세대를 정죄하리니, 이는 그 여인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의 맨 끝에서 왔음이라.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위대한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 12:41,42). 주님께서는 요나의 전파로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이 『심판 때』, 즉 “큰 백보좌 심판” 때 초림 당시의 유대인들을 정죄할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파로 회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나보다 더 위대하신 분이 주님 자신이라고 말씀하신다(41절). 주님께서는 또한 심판 때에 남방의 여왕이 초림 당시 유대인 세대와 함께 일어나서 그들을 정죄할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는 그 여인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의 맨 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솔로몬보다 더 위대한 이가 바로 주님 자신이라고 말씀하신다(42절). 말하자면 “이 악한 세대”는 요나보다, 솔로몬보다 더 위대하신 왕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니느웨 사람들과 남방의 여왕보다 더 큰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8 Jul 2025 14:57:42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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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성령을 거스르는 모독은 용서될 수 없느니라</title>
<link>https://www.biblemaster.co.kr/bb7/%EC%84%B1%EB%A0%B9%EC%9D%84-%EA%B1%B0%EC%8A%A4%EB%A5%B4%EB%8A%94-%EB%AA%A8%EB%8F%85%EC%9D%80-%EC%9A%A9%EC%84%9C%EB%90%A0-%EC%88%98-%EC%97%86%EB%8A%90%EB%8B%88%EB%9D%BC/</link>
<description><![CDATA[본 코너는 솔로몬성경연수원 교재들의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려 주신 지식의 보화들을 담고 있다.<br/><br/>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설교”를 통해 “왕국의 헌법”을 제시하셨고, 마태복음 8,9장에서는 “왕의 표적들”을 보여 주심으로써 그 왕국의 왕으로 오신 분이심을 증명하셨다. 그러나 마태복음 11장부터는 이스라엘이 왕국을 거부하고 왕을 거부하는 모습들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12장에서도 이스라엘이 왕국과 그들의 왕을 거부하는 모습들이 구체적인 사건들을 통해 제시된다.<br/><br/>『그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곡식밭을 지나가시는데,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따서 먹기 시작하더라.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그것을 보고 주께 말씀드리기를 “보소서,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아니되는 일을 하고 있나이다.”라고 하니』(마 12:1,2).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곡식밭을 지나가실 때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따서 먹기 시작하자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다며 주님을 정죄했다. 이에 주님께서는 “다윗”과 “제사장”을 예로 들어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셨다. 주님께서는 다윗과 그의 일행이 시장해서 성전의 차려 놓은 빵을 먹었던 일을 예로 드시면서 주님 자신을 도피 중인 다윗에 빗대셨으며(삼상 21:1-6), 또한 성전 안에서 안식일을 범해도 죄가 되지 않는 제사장들보다(민 29:32) 더 위대하신 분으로서 주님 자신을 제시하셨다(마 12:3-5).<br/><br/>주님께서 예로 드신 다윗은 “거부당한 왕”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제사장에게 부탁하여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성전의 빵을 먹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다윗의 행동을 책망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자비를 원하고 희생제를 원치 않으시는(마 12:7) 하나님께서 배고픈 다윗에게 자비를 베푸셨기 때문이다. 이 사건에서 예수님과 다윗의 공통점은, 둘 다 기름부음 받은 “왕”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보좌를 차지하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는 점이다.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은 지 한참 후에야 그 보좌를 얻게 되었는데, 예수님께서도 왕국의 주인으로 나타나셨지만 거부당하시고 2천 년이 지난 후에야 천국의 보좌를 차지하시게 된다.<br/><br/>민수기 29:32에서는 제사장들이 안식일을 어기는데, 매일의 제사는 7일간 계속되고 제사장들은 그 일주일 내내 “차려 놓은 빵”을 먹음으로써 성전 안에서 안식일을 범했다. 이것은 안식일보다 성전이 더 위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성전보다 더 위대하다고 말씀하심으로써(6절) 주님 자신이 안식일을 어겨도 전혀 문제가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즉 『인자는 곧 안식일의 주』(마 12:8)이시기 때문에 안식일의 주께서 안식일에 그분 마음대로 하시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안 되는 것이다.<br/><br/>『주께서 그곳을 떠나서 그들의 회당으로 들어가시니라. 보라, 거기 한쪽 손이 마른 사람이 있더라. 그들이 주께 물어 말씀드리기를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타당한 일이니이까?”라고 하니, 이는 그들이 주를 고소하려 함이라』(마 12:9,10). 주님께서는 곡식밭을 떠나 바리새인들의 회당으로 들어가셨는데, 그들은 그곳에 있던 한쪽 손이 마른 사람과 관련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타당한 일이냐고 물었다. 목적은 주님을 고소하기 위함이었다. 주님께서는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양 한 마리를 예로 들어 반박하셨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는데 그것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다면, 붙잡아서 들어올리지 아니하겠느냐? 하물며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일은 타당하니라』(마 12:11,12). 그러고 나서 그 병자의 손을 펴서 온전하게 회복시켜 주셨는데, 이 일로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하면 주님을 죽일까를 모의했다(마 12:13,14). <br/><br/>예수님의 논지는 첫째, 안식일을 의식적으로 준수하는 것보다는 그날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며, 둘째, 양을 구해 내기 위해서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안식일을 깨는 자들이 양보다 훨씬 귀한 사람을 안식일에 고쳐 주신 주님을 비난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안식일에 관한 논쟁은 주님께서 겪으신 논쟁 중 핵심이 되는 부분이었다. 누가복음 13:11-17에는 18년 동안이나 병약의 영에 사로잡힌 한 여인을 안식일에 치유해 주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때 사용된 예화는 구덩이에 빠진 양이 아니라, 안식일에 물을 먹이러 가는 소나 나귀의 이야기이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사례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예외적인 필요에 의해서 안식일을 깨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심판하지 않으셨다는 점을 보여 준다. <br/><br/>『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이 사람이 마귀들의 통치자인 비엘세붑을 힘입지 않고서는 마귀들을 쫓아낼 수 없느니라.”고 하더라』(마 12:24). 주님께서 마귀에게 사로잡혀 눈멀고 벙어리 된 사람을 고쳐 주시자 바리새인들은 주님께서 비엘세붑을 힘입어 마귀들을 쫓아낸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왕국과 성읍과 가정이 서로 갈라지면 제대로 서지 못하기에,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어 그의 왕국을 갈라지게 하는 일은 없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주님 자신이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 마귀들을 쫓아내신 것이며, 이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그 유대인들에게 임한 것이라고 알려 주셨다(마 12:22-30). <br/><br/>주님께서 비엘세붑을 힘입어서 사역한다고 비난을 가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주님은 “성령을 거스르는 모독”에 관해 경고하셨다. 『성령을 거스르는 모독은 사람들에게 용서될 수 없느니라...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을 수 없느니라』(마 12:31,32). 용서받을 수 없는 죄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성령을 거스르는 모독』과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자』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 이 죄는 성령님을 대적해서 하는 “말”에 있다. 마가복음 3:29,30에서는 『성령을 거슬러 모독하는 자는 결코 용서받지 못하고, 영원한 정죄의 위험에 처하리라.”고 하시더라.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그가 더러운 영을 지녔다.”고 함이더라.』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그 모독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더러운 영을 소유했다”라고 말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예수님께서 그분 안에 충만하신 성령의 능력으로 이적들을 행하셨는데도, 그 예수님 안에 계신 성령을 악령이라고 말한다면 그 죄는 결코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더러운 영을 지녔다고 말할 때 성립되기에 현 교회 시대에는 절대로 지을 수 없다. 왜냐하면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우리 앞에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죄는, 『이는 이 세상에서나 오는 세상에서도 마찬가지니라.』(마 12:32)라는 말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몸을 입고 계셨던 “초림”과 주님께서 몸을 입고 지상에 계실 “천년왕국” 때 지을 수 있는 죄이다. 성경에서 “오는 세상”은 언제나 물리적인 천국이 이 땅에 실제로 이루어지는 때인 천년왕국을 가리킨다(마 13:39,49; 24:13, 막 10:30, 히 2:5; 6:5).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9 May 2025 09:59:29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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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너희가 너희 혼에 “쉼”을 얻으리라</title>
<link>https://www.biblemaster.co.kr/bb7/%EB%84%88%ED%9D%AC%EA%B0%80-%EB%84%88%ED%9D%AC-%ED%98%BC%EC%97%90-%EC%89%BC%EC%9D%84-%EC%96%BB%EC%9C%BC%EB%A6%AC%EB%9D%BC/</link>
<description><![CDATA[본 코너는 솔로몬성경연수원 교재들의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려 주신 지식의 보화들을 담고 있다.<br/><br/>예수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설교”를 하신 것은 앞으로 임하게 될 왕국의 핵심적인 규범인 “왕국의 헌법”을 제시하시기 위함이었고, 마태복음 8,9장에서 “왕의 표적들”을 보여 주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왕국의 왕으로 오신 분이심을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마태복음 10장에서 열두 제자들을 부르신 것은 제자들에게 마귀들을 쫓아내고, 병을 치유하는 권세를 주시고 “천국 복음”을 위임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지속적으로 거부하자, 마태복음 11장 후반부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개인”들에게 관심을 보이시며 말씀을 전파하신다.<br/><br/>『그러나 내가 이 세대를 무엇에 비유할까?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자기 친구들을 부르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희를 향해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아니하며, 우리가 너희를 향해 애통하여도 너희가 통곡하지 아니하였도다.’ 함과 같으니라』(마 11:16,17). <br/><br/>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초림 당시의 세대를 장터에서 노는 어린아이들에 비유하셨다. 주님께서 보실 때 그 세대는 마치 어린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자기 친구들을 부르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희를 향해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아니하며, 우리가 너희를 향해 애통하여도 너희가 통곡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는 것과 같았다. 비유에서 피리를 불었던 자들과 애통했던 자들은 “초림 당시의 악한 세대”이며, 그들이 분 피리 장단에 맞춰 춤추지 않았던 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침례인 요한”이고, 그들이 애통하여도 통곡하지 않고 먹고 마시던 자는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br/><br/>초림 당시의 유대인들은 요한이 와서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므로 마귀들렸다고 했고,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와서 먹고 마시니 그분에 대해서는 “보라, 탐식하는 자요, 술을 즐기는 자며,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로다.”라고 비방했다. 요한은 금욕적인 거룩함을 엄격히 강조하던 설교자였는데, 그런 그를 유대인들은 “마귀들렸다”고 비난했다. 한편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먹고 마시는 대중적인 설교자를 보내시자, 유대인들은 그 예수 그리스도를 세리들과 죄인들을 친구삼아 탐식하고 술 마시는 자라고 비난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탐식하지도 않으셨고, 술을 마시지도 않으셨다. 이것은 그들의 모함일 뿐이었다.<br/><br/>『그후 주께서는 자기가 능력 있는 일들을 가장 많이 행하신 성읍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책망하기 시작하시더라. “코라신아, 너에게 화 있으리라! 벳새다야, 너에게 화 있으리라!... 카퍼나움아, 하늘까지 높아진 너는 지옥까지 낮아지리라. 네 가운데서 행하였던 능력 있는 일들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읍이 오늘까지 남아 있었으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더 견디기 쉬우리라.”고 하시더라』(마 11:20,21,23,24). <br/><br/>이스라엘 성읍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능력 있는 일들을 가장 많이 행하신 갈릴리 북쪽 성읍들이 회개하지 않자, 주님께서는 코라신과 벳새다에서 행하신 기적들을 투로와 시돈에서 행했더라면 그 이방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했을 것이라고 책망하셨다. 특히 카퍼나움에 대해서는 그들이 하늘까지 높아져 주님의 기적을 거부했다고 하셨는데, 그런 그들이 지옥까지 낮아질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그러면서 만일 소돔에서 그런 기적을 행했다면 그 성읍이 오늘까지 남아 있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투로와 시돈(바알 숭배자들), 소돔(동성연애자들)이 심판 날에 코라신과 벳새다, 카퍼나움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지옥에서의 죄의 형벌에도 등급이 있음을 계시하신 것이다(마 11:22,24, cf. 마 23:14, 눅 12:47,48, 신 32:22). 메시아 왕을 거부한 유대인들의 죄는 투로와 시돈의 우상 숭배의 죄보다 더 가증하고, 소돔의 성적인 타락보다 더 사악하다. 그런 그들에게 임할 “심판 날”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마지막 심판인 큰 백보좌 심판을 가리킨다(계 20:13-15, 벧후 2:9; 3:7, 단 7:9-13). <br/><br/>『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오 하늘과 땅의 주이신 아버지시여, 이런 일들을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기들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나의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또 아들과, 누구라도 아들이 아버지를 계시하고자 하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나이다』(마 11:25,27). <br/><br/>동일한 문맥인 누가복음 10:21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기뻐하시며』 위와 같은 말씀을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셨다는 표현은 사복음서에서 단 한 번 나오는데 바로 이 부분이다. 주님께서 기뻐하신 것은 자신을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진리를 숨기시고 어린 아기처럼 순수하게 믿는 갈릴리 어부와 같은 이들에게는 진리를 깨닫게 하신 일이었다(눅 10:17, 마 21:16, 벧전 2:1-3). 또한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에게 모든 것을 주셨고, 그 하나님의 아들께서 아버지를 계시해 주시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나타낸다.<br/><br/>『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쉼을 주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에 쉼을 얻으리라.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기 때문이라』(마 11:28-30). <br/><br/>예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이 주님의 왕 되심을 민족적으로 거부하자, 이제는 “개인”에게 관심을 돌리시면서 개인적으로 주님께 나아오라고 초청하신다. 이것은 주님께서 유대인의 왕으로서 거부당하셨기 때문인데, 그렇기에 방향을 바꾸시어 모든 믿는 자들의 구주이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을 제시하시는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28절)라는 말씀은 민족적 구원 이상의 것이 있다는 경고이며, “구원은 개인적 문제”라는 진리를 담고 있다.<br/><br/>예수님께서는 죄의 짐을 지고 허덕이는 자들에게, 곧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모든 자들에게 주님 자신께로 오라고 초청하신다. 주님과 멍에를 함께 메면서 배울 것이 많이 있는데, 그중에는 특히 주님의 온유하심과 겸손하심이 있다. 이 두 가지를 배우면 혼의 쉼에 이를 수 있다. 인생의 많은 문제와 그에 따른 심적 고통이 온유와 겸손의 부족으로 발생하며, 이 둘은 인생의 다양한 짐을 가볍게 할 수 있는 인격적 능력이 된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Wed, 30 Apr 2025 15:48:33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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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주의 사자”로 온 침례인 요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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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본 코너는 솔로몬성경연수원 교재들의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려 주신 지식의 보화들을 담고 있다.<br/><br/>마태복음 5-7장의 “산상설교”를 통해 앞으로 임하게 될 왕국의 핵심적인 규범인 “왕국의 헌법”이 제시되었고, 마태복음 8장과 9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왕국의 왕으로 오신 분이심을 증명하는 “왕의 표적들”을 보여 주셨다. 마태복음 10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을 향한 왕국 복음 전파를 위해 열두 제자들을 부르시어 마귀들을 쫓아내고, 병을 치유하는 권세를 주시며 “천국 복음”을 위임하신다. 이제 이어지는 마태복음 11장 전반부에서는 주의 길을 예비하는 “언약의 사자” 침례인 요한에 관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제시된다.<br/><br/>『그때 요한이 감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듣고 자기 제자 가운데 둘을 보내어 주께 말씀드리기를 “당신이 오실 그분이시니이까? 아니면 우리가 또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리이까?”라고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가서, 너희가 듣고 보는 일들을 다시 요한에게 전하라. 소경들이 보고, 절름발이들이 걸으며, 문둥병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머거리들이 들으며, 죽은 자들이 일으켜지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누구나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마 11:2-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열두 제자가 사는 지역”인 갈릴리 바다 근처 지역을 향해 떠나셨다(1절). 그래서 20-24절에서는 갈릴리 바다 북쪽에 있는 코라신, 벳새다, 카퍼나움이 언급된다. 이때 감옥에 있던 침례인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전해 듣고서 제자들 가운데 둘을 보내어 “당신이 오실 그분이시니이까? 아니면 우리가 또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리이까?”라고 물었다(2,3절). 예수님께서는 그분 자신이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표적”으로 증거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가 듣고 보는 일들』(4절)은 주님께서 행하신 사역들과 놀라운 이적들을 언급하는 것인데, 그것들로 주님 자신이 하나님이시자 메시아이심을 증명하셨던 것이다. 주님의 표적들은 그분께서 왕이시라는 사실 외에, 그분 자신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br/><br/>예수님께서 언급하신 표적들은 “이사야서”에 예언된 것들이었으며, 바로 그 표적들을 행하시는 주님 자신이 예언된 그 메시아이심을 침례인 요한에게 알려 주셨던 것이다. 『그때에 소경의 눈이 뜨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뚫리리라. 그때에 절름발이가 사슴처럼 뛰고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라. 광야에는 물이 솟아나오며 사막에는 시내가 흐르리라』(사 35:5,6). 주님께서 인용하신 예언은 천년왕국 때 있을 환경적 변화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초림 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했더라면 초림과 재림이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었음을 보여 준다.<br/><br/>『이는 이 사람에 관하여 기록되기를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네 면전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서 너의 길을 예비하리라.’고 하였기 때문이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 가운데 침례인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일어난 적이 없었느니라. 그러나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사람이라도 그보다 더 크니라』(마 11:10,11). 10절에서 인용하신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네 면전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서 너의 길을 예비하리라.』라는 말씀은 말라키 3:1을 인용하신 것이다. “만군의 주 앞에서 길을 예비할 침례인 요한”은 말라키 4:5,6에서 예언된 “선지자 엘리야”와 관련이 있다. 『보라, 내가 주의 크고 무서운 날이 오기 전에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들의 마음을 자식들에게로, 자식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들에게로 돌이켜, 내가 와서 땅을 저주로 치지 않게 하리라.』 천사 가브리엘은 “침례인 요한”의 탄생을 예고하면서 다시 올 “엘리야”의 사역과 말라키 4:5,6을 인용했으며(눅 1:16,17),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7:11-13에서 “침례인 요한”을 “엘리야”로 묘사하셨다. 따라서 침례인 요한은 유대인들이 그들의 메시아를 받아들였더라면 엘리야가 될 수도 있었던 인물이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만일 너희가 그것을 받을 의향만 있다면,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가 바로 그 사람이니라.』(14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br/><br/>주의 사자인 침례인 요한은 “여자에게서 태어난” 모든 구약 선지자 중에서 가장 위대했다. 그러나 누가복음 7:28에 따르면 여자에게서 태어난 침례인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요일 5:1,4), 거듭난(벧전 1:23) 그리스도인들보다 작은 위치에 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인에게서 난 사람 가운데 침례인 요한보다 더 큰 선지자는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일지라도 그보다 더 크니라』(눅 7:28). 침례인 요한과 달리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하나님의 양자”이고(엡 1:5),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으며(고전 12:13),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과 똑같은 “불멸의 육체”로 영원히 살게 되기에(요일 3:1-3) 요한보다 큰 사람이다.<br/><br/>『침례인 요한의 때로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폭력을 겪고, 폭력을 쓰는 자들이 힘으로 그것을 차지하느니라. 모든 선지서와 율법은 요한까지 예언한 것이라. 만일 너희가 그것을 받을 의향만 있다면,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가 바로 그 사람이니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마 11:12-15). 침례인 요한이 등장한 뒤로 마태복음 11장까지 천국은 폭력을 겪고, 폭력을 쓰는 자들이 힘으로 그것을 차지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왕국의 보좌에 앉으실 “상속자”이신데(마 21:38),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제사장들은 그분의 왕국을 차지하기 위해 그 보좌의 “상속자”를 겟세마네 동산에서 “힘으로 붙잡아 십자가에서 죽였다.” 천국과 달리, 하나님의 나라는 폭력을 쓰는 자들이 힘으로 탈취할 수 없는데,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나라”이기 때문이다(눅 17:20,21, 롬 14:17). <br/><br/>『모든 선지서와 율법은 요한까지 예언한 것』(13절)이라는 말씀은 침례인 요한까지가 한 세대임을 보여 준다. 이것은 “세대주의”의 기초가 되는 말씀이다. 선지서와 율법으로 구성된 구약은 침례인 요한으로 끝나게 되며, 요한이 목 베임당하고 그가 선두주자로서 그 길을 예비했던 예수 그리스도마저 십자가에 처형되신 뒤로는 구약이 끝나고 신약이 시작되었다. 침례인 요한과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 사이에는 일종의 과도기가 펼쳐지는데, 이 기간에 천국이 폭력을 쓰는 자들에 의해 탈취되는 일이 벌어졌다. 천국이 불법자들에 의해 탈취되었던 이 짧은 과도기적 기간에는, 당시의 힘 있는 자들, 곧 바리새인과 서기관, 율법사 등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실 천국의 도래를 막고(마 23:13) 자신들이 천국의 주인 노릇을 하려고 했다. 말로는 메시아를 기다린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자신들이 천국을 통치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자신들의 지배하에 있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몰려들자(요 11:48; 12:19), 이를 시기한 그들은 주님을 십자가의 죽음에 넘겨주었던 것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7 Feb 2025 17:21:38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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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수하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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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본 코너는 솔로몬성경연수원 교재들의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려 주신 지식의 보화들을 담고 있다.<br/><br/>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한 왕국 복음 전파를 위해 열두 제자들을 부르시어, 마귀들을 쫓아내고 병을 치유하는 권세를 주신다. 제자들에게 위임하신 이 복음은 “천국 복음”이었고, 주님께서는 자신이 행하시던 그 능력을 제자들에게 주셨다. 침례인 요한으로부터 시작된 이 천국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표적들을 행하심으로써 본격화되었고, 그분의 열두 제자에게로 이어진 것이다. 10장 후반부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면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자상하게 알려 주신다.<br/><br/>『보라, 내가 너희를 내보내는 것이 마치 양을 이리들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수하라. 그러나 사람들을 조심하라. 이는 그들이 너희를 공회들에 넘겨주겠고 또 그들의 회당들에서 너희를 매질할 것임이라』(마 10:16,17). 1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증인들을 박해하는 도구로써 “공회”를 언급하신다. 이러한 공회(니케아, 바티칸 등)는 역사적으로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대표적인 도구로 사용되어 왔다. 따라서 이에 대한 대응으로 시대를 막론하고 복음의 증인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순수함과 지혜”이다.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수하라”는 이 말씀은 죄와 타협하지 않는 순수한 믿음을 가지되, 악을 미리 보고 피할 수 있는 총명한 자가 되라는 명령이다(잠 22:3). 이것은 오직 주를 두려워하고 말씀에 순종할 때만 가능하다(시 19:9). <br/><br/>『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을 것이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들이 이 성읍에서 너희를 박해하면 다른 성읍으로 피하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인자가 올 때까지 너희가 이스라엘의 성읍들을 다 다녀 보지 못하리라』(마 10:22,23). “끝”(the end)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항상 “어떤 기간의 끝”을 의미하는 것으로, 천년왕국 도래 이전에 있을 “대환란의 끝”을 의미한다. 따라서 “끝까지” 견디라고 하신 것은 유대인 자신이 죽을 때까지 견뎌서 구원받으라는 의미가 아니다. “인자가 올 때까지,” 곧 왕국이 도래할 때까지 왕국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로서 박해자들로부터 받게 되는 미움과 증오로부터 견디라는 의미이다(마 10:23). 특히 『인자가 올 때까지 너희가 이스라엘의 성읍들을 다 다녀 보지 못하리라.』라는 말씀은, 사도행전 28장 이전에 제자들이 이스라엘에 대한 증거를 모두 마쳤기 때문에, 이것은 교회 시대를 넘어 “야곱의 고난의 때”를 향한 예언적인 언급으로 적용해야 한다(렘 30:7, 단 12:1-3). <br/><br/>『그러므로 그들을 두려워 말라. 가려진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겨진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어두움 속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빛 가운데서 말하고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지붕 위에서 전파하라. 또 너희는 몸은 죽여도 혼은 죽일 수 없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혼과 몸을 모두 지옥에서 멸하실 수 있는 그분을 두려워하라』(마 10:26-28). 복음은 늘 공개적으로 선포되어야 한다. 이것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두려워하는,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시인”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일이다. 특히 초림 당시의 왕국 복음은 예수님 한 분에서 시작하여 열두 제자들로 확산되어 전파되었고, 오늘날 교회 시대에 은혜의 복음은 기록된 말씀과 각종 매체를 통해 널리 “드러나게” 전파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들은 반대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해야 한다.<br/><br/>『내가 땅 위에 화평을 주러 온 줄 생각하지 말라. 나는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노라』(마 10:34).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양날 가진 칼”(히 4:12)이며,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체”(요 1:1,2,14)이시다. 그 칼에 의해 대적들이 하나님의 자녀들과 분리되며, 진리와 비진리가 나눠진다. 메시아 왕으로 오신 주님께서는 “왕국의 통치자”로서 궁극적으로는 이 땅에 화평을 주시겠지만(사 2:4; 9:6), 그 전에 자기를 반대하는 자들을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칼로 반드시 제거하셔야만 한다(계 19:21).<br/><br/>칼의 또 다른 용도는 악을 제거하고 치유하는 데 있다. 치료가 필요한 환자는 수술을 받고 회복된 이후에야 비로소 평안한 삶을 영위할 수가 있다(욥 5:18). 이처럼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치유하실 필요가 있으셨기에 먼저 칼을 주셨고, 치유된 이후에는 화평을 주실 것이다(눅 2:14). 거듭난 자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몸과 혼이 분리되는 영적 수술, 곧 영적 할례를 받았다(골 2:11). 그 결과로 원수였던 죄인이 하나님과 영원한 화평을 이루게 되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적 원리”이다.<br/><br/>『너희를 영접하는 사람은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며, 또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곧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라』(마 10:40). 메시아 왕으로 오신 예수님과 그분의 열두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 전파했던 왕국 복음은 마태복음 11,12장에서 계속 거부되어, 결국 천국은 신비의 형태로 감추어지게 된다(13장).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거부와 예수님의 죽으심에만 초점을 두고 본다면, 이스라엘을 향한 왕국 복음과 그들의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아예 수포로 돌아간 것처럼 보인다.<br/><br/>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또다시 지상명령을 내리시는데, 이것은 “왕국 복음”에 관한 것이었다(cf. 막 16:14-20).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베드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의 침례”를 전파했고(행 2장), 스테판 역시 유대인들에게 마지막으로 회개를 촉구함으로써 왕국 복음을 전파했기 때문이다(행 7장). 그러나 또다시 완강하게 거부하는 이스라엘로 인해 왕국 복음은 더 이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않았다. 이후로는 “은혜의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는데,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은 동족 이스라엘을 향한 연민 때문에 그들에게 먼저 은혜의 복음을 전파했지만, 결국 유대인들은 이를 거부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8장에 가서야 비로소 이방인들에게로 완전히 돌아서게 된다(행 28:28).<br/><br/>이제 잠시 후면 교회의 경륜이 끝나고, 다시금 유대인의 경륜이 중심이 되는 대환란이 시작될 것이다. 이 기간에는 은혜의 복음이 아닌 “천국 복음”이 다시 전파된다. 특히 사도들에게 주어진 동일한 권세와 표적이 환란 시대의 복음 전파자들에게 주어질 것이다(막 16:17,18). 이 기간에 그들을 영접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화평이 임할 것이고(마 10:13) “선지자의 상과 의인의 상”이 주어질 것이다. 동시에 많은 대적자가 일어나서 유대인들을 박해할 것이지만, 유대인들을 선하게 대한 이방인들은 “양의 민족”으로 분류되어 천년왕국의 백성으로 왕국의 복에 참여하게 된다(마 25:31-46).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Fri, 03 Jan 2025 08:26:40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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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열두 사도에게 맡겨진 “천국 복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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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본 코너는 솔로몬성경연수원 교재들의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려 주신 지식의 보화들을 담고 있다.<br/><br/>마태복음 5-7장의 “산상설교”를 통해 앞으로 임하게 될 왕국의 핵심적인 규범인 “왕국의 헌법”이 제시되었고, 마태복음 8,9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왕국의 왕으로 오신 분이심을 증명하는 “왕의 표적들”을 보여 주신다. 마태복음 10장에서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한 왕국 복음 전파를 위해 열두 제자들을 부르시어 마귀들을 쫓아내고, 병을 치유하는 권세를 주신다. 제자들에게 위임하신 이 복음은 “천국 복음”이었고, 주님께서는 자신이 행하시던 그 능력을 제자들에게 주셨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과 같은 치유의 “표적”을 행하게 된다(마 10:1). 결국 침례인 요한으로부터 시작된 왕국 복음은 예수님께서 표적들을 행하심으로써 본격화되었고, 이제 그의 열두 제자에게로 이어진다.<br/><br/>『주께서 자기 열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허약함을 치유하는 권세를 주시더라. 그 열두 사도들의 이름은 이러하니, 즉 첫째,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요, 그의 형제 안드레이며,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요,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라는 별명을 가진 렙배오, 카나안인 시몬과, 유다 이스카리옷이니, 그는 주를 배반한 자더라』(마 10:1-4). 예수님께서 전파하신 “천국 복음”은 이 시대에 전파되는 “은혜의 복음”과는 달리 표적을 동반한다(마 4:23). 그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사역을 맡기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동일하게 치유의 표적을 행할 수 있는 권세를 주셨다. 같은 맥락에서 바울을 부르실 때도 복음을 위한 능력을 주셨다(빌 4:13). 다만 본문의 열두 제자와 다른 점이 있다면 바울에게 맡겨진 것은 “은혜의 복음”이라는 점이다.<br/><br/>“사도”라는 말은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이 뜻을 지닌 라틴어 “미시오” (missio)라는 말에서 “선교”(mission)라는 단어가 파생되었다. 그래서 “선교사”라는 단어도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열두 사도에게 주어진 임무(mission)는 “왕국 복음”을 유대인들에게 전파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선교사들의 임무는 세상 모든 나라들에 “은혜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다. 만약 이 시대에 은혜의 복음 외에 어떤 다른 복음을 전하면 그는 저주를 받게 된다(갈 1:8).<br/><br/>『예수께서 이 열둘을 보내시면서 그들에게 명령하여 말씀하시기를 “이방인들의 길로도 가지 말고, 또 사마리아인의 성읍에도 들어가지 말고, 다만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서 전할 때,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말하고, 병든 자들을 고쳐 주고, 문둥병자들을 깨끗게 하며, 죽은 자들을 살리고, 마귀들을 내어쫓으라』(마 10:5-8).<br/><br/>산상설교(마 5-7장)가 대환란을 겪고 천년왕국에 들어갈 유대인을 향한 설교인 것처럼, 제자들에게 위임된 천국 복음 또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곧 유대인을 대상으로 전파된 복음이다. 따라서 5절에서 말씀하시는 “이방인들의 길”은 결코 불신자들의 길이 아닌데, 왜냐하면 이때는 아직 십자가 이전 상황으로 교회가 아직 나타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에 대한 “정확한 해석과 올바른 적용”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약속”과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을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여기서 “이방인”은 문자 그대로 “이방인”이다.<br/><br/>열두 사도들이 전파한 천국 복음에는 “거듭남”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한 구속”에 관한 내용이 전혀 없다. 오직 “천국이 가까이 왔다”(마 10:7)는 내용만 들어 있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다윗의 보좌에 앉으셔서 직접 통치하실 그들의 메시아 왕으로서 오셨고, 이스라엘이 그분을 받아들임으로써 이 땅에 진정한 왕국이 임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유대인들에게 알리는 복음이었다.<br/><br/>이스라엘은 출애굽 당시 모세를 통해 표적으로 시작된 민족이었고(출 4:1-6; 15:26, 신 26:8), 그런 그들을 주님께서는 잘 알고 계셨다(고전 1:22). 따라서 병 고침과 같은 표적이 동반되는 천국 복음은 오직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다. 표적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수님께서 “구약에서 예언된 천국의 왕”(사 35:4-6)이심을 증명하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거부로 인해 천국은 연기되었고, 대환란 기간에 “적그리스도”(단 2,7장)에 의해 박해받게 될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민족적으로 구원받고 회복될 것이다.<br/><br/>『너희가 값없이 받았으니 값없이 주라』(마 10:8). “은혜의 복음”이든 “천국 복음”이든 모두 값없이 전파해야 한다. 만약 값을 받고 전파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삯꾼들”이다(요 10:12). 그런데 은사주의자들은 사도들에게 주어진 치유의 표적이 자신들에게 주어졌다고 거짓말하면서 소위 신유와 귀신 쫓는 행세를 하되 돈을 받고 함으로써 스스로가 삯꾼임을 드러내고 있다. 이 삯꾼들은 거짓말쟁이요 도둑이며 강도들일 뿐이다(요 10:1).<br/><br/>주의 일꾼은 주께서 먹이신다. 이 약속은 먼저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들에게 주어졌다(마 6:25-31). 이들은 오직 은혜로 채우시는 주님만을 의지하며 복음을 위해 “여행”하는 순례자들이었다(히 11:13). 하지만 이 말씀은 오늘날 은혜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꾼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약속이다(고전 9:9, 딤전 6:8). <br/><br/>『너희의 돈주머니에 금이나 은이나 놋을 가지고 다니지 말라. 여행을 위하여 자루나 두 벌의 겉옷이나 신들이나 지팡이들도 지니지 말라. 일꾼이 자기 음식을 받는 것은 합당하니라. 어느 성읍이나 고을에 들어가든지 거기에 합당한 사람이 있는가 알아보아, 너희가 거기를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무르라. 그 집에 들어갈 때에 문안하라. 만일 그 집이 합당하면 너희의 화평이 그 집 위에 내리게 하고, 만일 합당치 못하면 너희의 화평이 너희에게로 되돌아오게 하라. 아무도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나,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면 그 집이나 성읍에서 떠날 때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읍보다 더 견디기 쉬우리라』(마 10:9-15).<br/><br/>11절의 “합당한(worthy) 사람”은 전파된 메시지, 곧 “천국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을 가리킨다. 복음을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그 집은 복음에 합당하게 되어(cf. 행 13:46) 화평이 그곳에 머물게 된다(히 11:31). 하지만 이 복음을 거부한 자들은 그 죄가 “소돔과 고모라”의 성적 문란 죄보다 더 사악하고 “투로와 시돈”의 우상 숭배의 죄보다 더 극악하기에 “더 큰 심판”을 받게 된다. 그 경고대로 이스라엘은 1,900년 이상의 참혹한 세월을 보내야 했지만, 대환란 기간인 “야곱의 고난의 때”에는 그보다 더 큰 심판을 받은 후에야 민족적으로 구원받게 된다. 『슬프도다! 그 날이 크므로 어떤 때도 그와 같지 않나니 그 날은 야곱의 고난의 때라. 그러나 그는 그 고난에서 구원을 받으리라』(렘 30:7).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02 Dec 2024 11:44:20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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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되새김질 못하는 불결한 짐승 “돼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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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고봉밥이라는 말이 있다. 밥그릇 위로 수북하게 높이 담은 밥을 말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고봉밥을 먹고 논밭에서 일할 힘을 얻었다. 바로 여기서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는 말이 나왔다. 그런데 이 말은 이제 옛말이 되어 가고 있다. 작년 한국인의 고기 소비량이 사상 처음으로 쌀 소비량을 추월했으며, 이 추세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서 발표한 “농업전망 2023”에 따르면 작년 1인당 3대 육류(돼지고기, 닭고기, 소고기)의 소비량은 60.6kg으로 쌀 소비량 56.4kg을 선회했다. 이 중에서 돼지고기 소비량이 30.1kg으로 단연코 많았고, 닭고기 15.7kg과 소고기 14.8kg이 그 뒤를 이었다. 특히 2021년 돼지고기 소비 트렌드 조사 결과, 돼지고기를 주 1,2회 이상 구이 혹은 요리로 해 먹는 가정이 69.5%에 달할 정도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돼지고기에 대한 사랑은 각별하다. 그러나 한국인의 각별한 애정과는 별개로,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는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심지어는 그 사체도 만지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유인즉 돼지는 되새김질을 하지 못하는 불결한 짐승인 까닭이다. 『돼지는 굽이 갈라져서 쪽발이지만 되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불결하니라. 너희는 그것들의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사체도 만지지 말라. 그것들은 너희에게 불결하니라』(레 11:7,8). 성경에는 되새김질 못하는 것이 불결한 이유가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묵상과 관련하여 그 이유를 유추해 볼 수 있고 또 얻을 수 있는 좋은 교훈이 있다. <br/><br/>우선 “되새김질”이란 소, 양, 염소 등의 동물이 한번 삼킨 먹이를 게워 내어 다시 씹는 것을 말하며, 이를 반추(反芻)라고 한다. 반추동물들은 일단 많은 양의 풀을 집어 삼킨 후, 조용한 장소로 가서 먹었던 풀을 천천히 되새김질 하며 소화시킨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 또한 젖(히 5:12, 벧전 2:2), 꿀(시 119:103), 사과(잠 25:11), 빵(눅 4:4), 고기(히 5:14) 등으로 제시되고 있는 우리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어야 하며, 읽은 후에는 반드시 그 말씀을 되새김질하는, 즉 “묵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일정 시간에 일정 분량을 읽었다고 해서 그것으로 만족하며 거기서 끝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온전히 “소화시키지” 못한 말씀으로는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것을 온전히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br/><br/>그런데 혹자는 묵상을 명상과 관상기도 같은 것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명상이나 초월 명상처럼 자신을 비워 피동적인 상태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마귀들이 들어오기 좋은 상태를 만들 뿐이다(마 12:43-45). 더욱이 묵상은 신비주의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묵상은 영의 양식인 말씀을 적극적으로 찾아 읽은 후, 능동적으로 읽은 그 말씀을 곱씹으면서 어떻게 우리의 삶에 말씀을 올바로 적용할 수 있을까를 숙고해 보는 것이다. 이를 통해 말씀을 지속적으로 삶에 적용시키고 체화하여, 말씀의 능력을 삶의 영역으로까지 승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즉 말씀으로 덧입고 말씀의 능력으로 사로잡혀야 한다. <br/><br/>묵상이 이렇게 중요했기에, 하나님께서는 “success”라는 단어로 “성공”을 말씀하신 성경의 유일한 곳에서 묵상에 관해 언급하셨다(수 1:8). 성공뿐만 아니라 복을 받기 원한다면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라고 말씀하셨다(시 1:1,2). 또한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차갑게 식어 버린 성도의 마음에 다시금 뜨거운 열정을 불어 넣어 준다(시 39:3). 되새김질, 곧 묵상에 이러한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에 되새김질을 하지 못하는 돼지는 불결한 짐승으로 여기셨을 가능성이 높다. <br/><br/>불결한 짐승인 돼지는 성경에서 줄곧 부정적인 이미지로 사용된다. 특히 베드로후서 2:22의 말씀을 보면 돼지를 구원받지 않은 여자로 묘사하고 계신 것을 본다. 『그러나 참된 잠언대로 그들에게 이루어진 것이니 “개는 그 자신이 토해 낸 것으로 다시 돌아가고 또 돼지는 씻고 나서 그녀의 진창 속에서 뒹군다.” 하였도다.』 씻겨도 다시 진창에 들어가 뒹구는 것이 돼지의 본능이다. 이는 비단 여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본능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긴 그리스도인 또한 죄의 몸을 죽은 것으로 여기고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다스리지 않는다면 아직 변화받지 못한 죄의 본성에 따라 죄악의 진창 가운데서 뒹굴게 되는 것이다.<br/><br/>베드로후서 2:22은 “개”를 먼저 언급하고 “돼지”를 그 뒤에 언급하는데, 이 점은 “돼지”가 베드로후서 2:1에서 뒤에 언급된 “거짓 교사”의 모형임을 말해 준다. 『그러나 백성 가운데도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너희 가운데도 거짓 교사들이 있으리라.』 예수님께서는 이 돼지 앞에 너희의 진주를 던지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들을 발로 밟고, 다시 돌아서서 너희를 찢을까 함이라』(마 7:6). 여기서 진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핏값을 지불하고 산 “교회”를 예표한다(마 13:46). 진주는 상처를 입거나 쪼개지면 보석으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리는데, 진주가 예표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상하거나 쪼개질 수가 없다(고전 10:17; 12:12,13, 엡 4:4-6). 말하자면 교회의 가치는 결코 손상되지 않으며 영원한 것이다. <br/><br/>그리스도인은 주님을 사랑하는 온전한 동기를 가지고 자기 몸으로 행한 일들에 따라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금이나 은이나 보석을 받는다(고전 3:12,13). 이 중에서 보석은 우리가 복음을 전해 그리스도께로 이겨온 사람들로서, 그들은 우리가 받을 『면류관의 보석들』(슼 9:16)이 될 것이다(cf. 말 3:17). <br/><br/>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는 구령자들에게 『자랑의 면류관』(살전 2:19)이 수여되는데, 이 면류관은 구령자 스스로가 자신을 돌아봄은 물론,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주님께 이겨왔을 때 그 “진주”(거듭난 성도들)를 “돼지들”(거짓 교사들)에게 던져 주지 않아야만 그들이 자랑의 면류관에 박히는 보석들이 되어 찬란한 면류관이 구령자에게 주어지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받은 성도의 구원은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지만, 그가 받게 될 상급은 그의 행실에 따라서 잃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많은 미혹하는 자들이 세상에 들어왔나니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않는 자들이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라. 너희 자신을 돌아보라. 이는 우리가 이루어 놓은 것들을 잃지 아니하고 온전한 상을 받으려는 것이라』(요이 1:7,8).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붙들어서 아무도 너의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계 3:11). <br/><br/>위와 같이 돼지는 성경에서 매우 부정적으로 제시되는 짐승이다. 유대인들에게 금지된 돼지는 유대인들이 결코 상종해서는 안 되는 짐승이었는데, 누가복음 15장의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아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재산을 모두 탕진해 버린 결과, 결국 그 먼 나라의 백성 중 한 사람의 돼지를 치는 사람으로 전락하게 된다. 작은아들은 돼지를 치는 일로 더부살이를 시작했고, 돼지가 먹는 곡식 껍질로 배를 채우고자 했지만 그에게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는 결국 자신의 상태를 숙고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아버지께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이제 내가 일어나서 내 아버지께로 가리라. 그리고 이렇게 말하리니, 아버지여, 내가 하늘을 거역하여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나이다』(눅 15:18). 작은아들은 자신이 “하늘을 거역하여”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했는데, 이처럼 죄는 하늘을 거역하여 하나님께 짓는 것이다(삼하 12:13, 시 51:4, 느 1:6, 삼상 12:23). 따라서 인간의 죄의 문제는 그가 범한 죄를 주님께서 어떻게 처리하시는가를 알고 따를 때 해결될 수 있다. <br/><br/>죄에 대해 사망을 선고하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원한 생명 또한 선물로서 예비하셨다(롬 6:23). 복과 저주를 눈앞에 두셨기 때문에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택하면 구원받게 된다. 비유 속의 작은아들이 죄의 “돼지우리”에서 뛰쳐나와 아버지께로 향했던 것처럼, 구원받지 못한 죄인 역시 지옥으로 떨어질 자신의 운명을 깨닫고서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받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을 그분의 아들로 받아 주시고, 상속자로서의 지위도 주신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주시려고 예비하신 유업과 상급과 면류관을 받도록 경주하라고 독려도 해 주시는 것이다. <br/><br/>돼지는 불결한 동물이다. 구약 시대의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말아야 할 민족으로 부름받았다. 지금은 율법을 지켜 구원받는 시대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은혜의 시대이기에 그리스도인은 돼지고기를 마음껏 먹어도 된다. 단, 돼지를 통해 지난날의 “불결하고 타락했던 자신”을 돌이켜 볼 수 있어야 한다.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아간 지금은 말씀을 되새김질하듯이 묵상함으로써 두 번 다시는 돼지와 같은 더러운 육신의 본성이 드러나지 않게 해야 한다. 이것이 구약 시대에 불결하여 사체조차 만지지 말라고 하셨던 “돼지”를 통해 얻는 교훈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02 Dec 2024 11:36:1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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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관원의 딸을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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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본 코너는 솔로몬성경연수원 교재들의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려 주신 지식의 보화들을 담고 있다.<br/><br/>마태복음 5-7장의 “산상설교”를 통해 앞으로 임하게 될 왕국의 핵심적인 규범인 “왕국의 헌법”이 제시되었고, 마태복음 8장과 9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왕국의 왕으로 오신 분이심을 증명하는 “왕의 표적들”을 보여 주신다. 특히 9장 후반부에서는 금식에 관한 논쟁, “새 포도주와 새 가죽 부대”의 비유, 유출병 여인의 치유, 관원의 딸을 살리시는 기적, 소경과 벙어리의 치유를 통해 왕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한다.<br/><br/>『그때 요한의 제자들이 주께 와서, 말씀드리기를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자주 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라고 하니,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신혼방의 아이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 슬퍼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신랑을 그들에게서 빼앗길 날들이 오리니, 그때에는 그들도 금식하리라』(마 9:14,15).<br/><br/>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왜 “금식”을 하지 않는지 물었고(14절), 그러면서 금식을 자주 하는 자신들이 주님의 제자들보다 우월하다는 듯, 바리새인처럼 “자기 의”를 슬며시 드러냈다. 이에 주님께서는 진정한 금식은 지금이 아니라 “신혼방의 아이들”(이스라엘)이 “신랑”(예수님)을 빼앗길 그날에 있을 것임을 밝히신다.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남겨진 제자들에게 적용되지만(요 14:28, 행 13:1-3), 미래에 있을 대환란 가운데서 “금식하며 울부짖게 될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적 의미를 담고 있다(욜 2:12).<br/><br/>금식에 관해 언급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새 천조각을 낡은 옷에 대고 깁는 사람은 아무도 없나니, 이는 기우려고 댄 천조각이 그 옷을 당기어 더 흉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라. 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붓는 사람은 아무도 없나니, 그렇게 하면 가죽 부대가 터져서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망가지게 되나 새 포도주를 새 가죽 부대에 부으면 둘 다 보존되느니라.』(마 9:16,17)라고 말씀하셨다. “낡은 옷”과 “낡은 가죽 부대”는 “새 천 조각”과 “새 포도주”의 요건을 충족시킬 수 없기에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필요한 상황임을 암시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전의 사역과 이후의 사역 간의 대조”를 보여 주는 것이다. 특히 여기서 언급된 “새 포도주”(new wine)는 “성령의 모형” 중 하나로(행 2:13, 엡 5:18), 구약에서처럼 몸에 들어왔다가 나가시는 분이 아니라 “내주하시는 분”으로서의 성령을 나타낸다(요 14:16, 엡 4:30). 말하자면 “낡은 가죽 부대”(이스라엘)가 아닌 성령께서 내주하실 “새 가죽 부대,” 곧 다가올 경륜(세대)에 “새롭게 태어날 백성”에 관한 필요성을 계시하신 것이다.<br/><br/>『주께서 이러한 것들을 그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보라, 어떤 관원이 그에게 와서 경배하며 말하기를 “제 딸이 방금 죽었나이다. 그러나 오셔서 그 아이에게 안수하여 주소서. 그러면 그 아이가 살아나겠나이다.”라고 하더라... 그러나 무리를 내보내신 후에, 주께서 들어가 그 소녀의 손을 잡으시니, 소녀가 일어나는지라. 이 명성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마 9:18,25,26). 『보라, 십이 년 동안 유출병을 앓던 한 여인이 주의 뒤로 와서 겉옷단을 만지니라. 이는 그 여인이 속으로 말하기를 ‘내가 그분의 옷을 만지기만 하여도 낫게 되리라.’고 함이라.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녀를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도다.”고 하시니, 그 여인이 그 시각부터 낫게 되니라』(마 9:20-22).<br/>“관원의 딸”(12세)과 “유출병을 앓던 여인”(12년)은 모두 숫자 “12,” 곧 “이스라엘”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이 사건들을 미래에 있을 이스라엘의 치유와 회복(부활)에 예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데, 무엇보다 “야곱의 고난의 때”(대환란)를 지나면서 강력한 민족으로 새롭게 태어날 이스라엘에 적용할 수 있다(겔 37장, 롬 11:25-27).<br/>예수님께서는 많은 표적들을 행하셨다. 그중에서도 특히 죽은 자를 살리시는 표적은 그분께서 메시아 왕이심을 증명하는 강력한 표적이다. 그 강력한 표적을 “말씀 그 자체이시며 생명이신 예수님”(요 1:1)의 입에서 나온 말씀으로 행하셨다. “나인 성 과부의 아들”(눅 7:15)과 마리아의 오라비 “나사로”(요 11:43)를 살리시는 표적 역시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으로 행하셨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나타내는 이런 강력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네가 이스라엘의 왕이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마 27:42)라고 하면서 주님을 완강하게 거부하고 말았다.<br/><br/>『주께서 집에 들어가시니 그 소경들이 주께 오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고 하시니, 그들이 주께 말씀드리기를 “주여, 그러하옵니다.”라고 하더라』(마 9:28).<br/>두 소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아들”로서 자신들을 치유하실 수 있는 분임을 확실히 믿고 있었다(27절). 반면에 “본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주님을 정면으로 거부했다. 바로 이런 자들에 의해 천국이 폭력으로 탈취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들에 의해 “천국의 문”도 가로막히게 되었다(마 11,12장).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과 관원, 그리고 12년간 유출병을 앓던 여인과 소경들은 모두 간절함과 절박함 가운데 주님을 신뢰하며 나아갔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은 주님을 신뢰하지 않았고 늘 의심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쉼을 주리라.』(마 11:28)라고 약속하신 주님께 죄와 의심의 짐을 온전히 맡기면 주님께서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신다.<br/><br/>『주와 그 일행이 떠나갈 때에, 보라, 사람들이 마귀에게 사로잡힌 벙어리 한 사람을 그에게 데려오니라. 그 마귀가 쫓겨나자 그 벙어리가 말을 하더라. 무리가 놀라며 말하기를 “일찍이 이스라엘에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도다.”라고 하더라.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말하기를 “그는 마귀들의 통치자를 힘입어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하니라』(마 9:32-34).<br/>주님께서 관원의 집을 떠날 때 『마귀에게 사로잡힌 벙어리』 한 사람을 치유하셨다. 이 표적에 대해 『일찍이 이스라엘에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도다.』(33절)라고 말하는 무리들의 반응과는 다르게 바리새인들은 『그는 마귀들의 통치자를 힘입어 마귀들을 쫓아낸다.』(34절)라고 말했다. 그들이 표적들을 보고서도 믿지 않은 이유는 주님을 자신들의 메시아 왕으로 받아들일 마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위선자인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통치자의 자리에 계속 머물기를 바랐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보좌를 찬탈하려는 마귀의 속성이었으니, 그들은 자신들의 아비인 마귀를 따라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요 8:44).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9 Oct 2024 16:57:08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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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구원받은 성도가 해야 할 첫 번째 순종, 침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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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이 사람들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성령을 받았으니 어느 누가 물로 침례받는 것을 금하리요?” 하며 주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고 그들에게 명하더라』(행 10:47,48).<br/><br/>로마제국의 박해가 있던 시절, 원형 극장으로 끌려갈 각오를 하고 공개적으로 침례를 받던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종교 재판이 횡행하던 중세 암흑시대에도 비슷했다. 그들은 유아 때 타의로 받은 세례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고 주 예수를 구주로 영접했을 때 다시 침례를 받았다는 이유로 “세 번째 침례,” 즉 물고문이나 물고기 밥이 되는 일을 당해야 했다. 소련의 마수 아래 있던 그리스도인들은 수용소에 갈 각오를 하고 밤이 깊은 때에 몰래 강가로 가서 침례를 받았으며, 지금도 이슬람권 국가들에서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비밀리에 침례를 받는다는 소식이 들려오곤 한다.<br/><br/>그리스도인들이 그처럼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침례를 받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그들의 양심이 생동하게 되었기 때문이다(히 9:14). 성경은 이 시대의 성도들이 순종하는 침례를 이렇게 정의한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이제 우리를 구원하는 모형이니, 곧 침례라. (이것은 육체의 더러움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응답이라.)』(벧전 3:21). 이처럼 침례란 그 의미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모형을 통해 자신을 구원하신 주 예수를 공개적으로 시인하는 의식이다. 구원받은 사람의 양심은 “지옥에 가야 했던 너 때문에 자신을 주신 분을 드러내지 않고 배은망덕하게 살아 갈 테냐?”라고 늘 소리를 지르는 고로, 기회가 있다면 침례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다(행 8:36-38). 그렇다면 어째서 물속에 잠겼다가 다시 올라오는 것이 주님을 시인하는 의식이 되는 것일까? 침례를 받는 사람이 죽어서 땅속에 묻히는 것처럼 물속에 잠겼다가, 부활하는 것처럼 다시 물속에서 올라온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쉽게 깨달을 수 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을 때 그분과 함께 죄에게 죽어 장사되었다가 생명의 새로움 가운데서 행하도록 다시 살아난다(롬 6:2-4). 구원받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들어가게 되기 때문에, 그분의 죽으심과 장사되심과 부활하심이 우리가 직접 행한 일처럼 되는 것이다. 더 이상 죄가 우리에게 “대가”를 요구할 수 없는 까닭도 이 때문인데, 죄의 삯인 사망(롬 6:23)을 우리가 이미 받은 셈이기 때문이다(고전 15:56,57). 성경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일을 “성령으로 받는 침례”라고 말씀하신다(행 1:5). 그리고 “물로 받는 침례”는 그때 일어났던 일을 믿는다는 사실을 모형을 통해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의식인 것이다.<br/><br/>비록 물리적으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을지라도, 이는 영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엄연한 현실이다. 어떻게 2,000년 전에 있었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자신의 것이 된다는 것이냐고 따져 묻고 싶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와 유사한 예시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가령, 어떤 회사원이 인사이동을 해서 다른 조직으로 들어가 새 직무를 맡는다면, 그는 좋든 싫든 전임자가 처리해 놓은 일을 마치 자신이 했던 일인 양 감당해야 한다. 제정신인 회사원이라면 일이 잘못되어 거래처에서 항의 전화가 왔을 때 “전임자가 그랬습니다.”라고 변명하지 않는다. 마치 자기가 한 일인 것처럼 “죄송합니다. 얼른 처리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답한다. 그 조직으로 “들어갔기에” 조직 내에서 행해진 모든 일은, 심지어 자신이 그곳에 없었던 먼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라고 해도 자신이 행한 일처럼 되는 것이다.<br/><br/>변개된 한글 성경들은 하나같이 “침례”(浸禮)를 “세례”(洗禮)로 오역했는데, 이는 한문 성경들이 “침례”를 씻음을 받는다는 뜻의 “수세”(受洗)로 오역한 데서 기인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베드로전서 3:21에서도 말씀하시거니와, 침례란 씻어서 더러움을 제거하는 의식이 아니다. 침례를 뜻하는 헬라어 “밥티조”(βαπτίζω)는 “씻다”라는 뜻이 아니라 “담그다,” “가라앉다” 등의 뜻을 가진 단어다. 굳이 원어까지 논하지 않아도, 성경은 스스로가 침례란 무언가의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라는 것을 말씀하신다(고전 10:1,2). 모형적으로 봐도, 더러운 것을 씻어 내듯 겉으로 물을 붓거나 뿌려서는 죽음, 장사, 부활을 보여 줄 수 없다. 말하자면 침례는 반드시 “물에 잠기는” 방법으로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br/><br/>어떤 변명을 갖다 댄다 해도 그러한 오역은 “세례(침례)를 통한 중생”이라는 거짓 교리를 옹호하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세례가 죄를 제거하는 데에, 그러니까 거듭남에 어떤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교리 말이다. 이는 초대 교회 시대의 성경 변개 집단인 알렉산드리아 학파에서 발원했다. 성경을 거부하는 이교도 집단인 로마카톨릭은 이를 확대 재생산하여 “유아 세례”라는 교리를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는데,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었다고 하겠다. 이 교리를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아기들을 볼 때 “만일 세례가 죄를 제거하는 의식이라면, 저 아기가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을 테고, 당연하게도 유아에게 세례를 주어야겠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테니 말이다. 또한 로마카톨릭이 공회들을 통해 공식화한 유아 세례의 파급력은 엄청났는데, 유아 세례를 거부하거나 그 오류를 지적하는 사람들에게는 저주(지옥행)가 선포되었고, 로마카톨릭과 결탁한 국가 권력으로부터의 철퇴가 뒤따랐다. 그래서 당시에는 누구나 아기가 태어나면 곧바로 성당으로 가서 세례를 받게 했다. 유아 세례의 효력을 믿지 않는다고 해도, 주변에 “아기를 지옥으로 보내려는 사악한 부모”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유아 세례에 참여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이 있었기에 암흑시대의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재침례교도”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들이 믿음을 고백할 수 있는 장성한 나이가 되었을 때 다시 침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침례교도”인 우리는 이 “재침례교도”로부터 그 믿음과 명칭을 전수받은 것이다.<br/><br/>“유아 세례”라는 비성경적인 실행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심지어 이 나라에서는 로마카톨릭뿐 아니라 대부분의 개신 교회들에서까지 유아들에게 세례를 준다. 죄에 대한 자각도 없고, 더더구나 그리스도를 영접한 적도 없는 유아들에게 “선한 양심의 응답”이 나올 리 만무하건만, 그들은 부득부득 유아들에게 물을 뿌린다. 장로교의 창시자 “존 칼빈”이 어느 누구도 세례의 축복에서 제외되면 안 된다고 말했다는 둥, “성 어거스틴”이 대답할 능력이 없는 아이들을 위해서 다른 성인들이 대신 말해 주면 된다고 했다는 둥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성경은 만일 그들이 “정말로” 유아 세례의 효력을 믿는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유아 세례라는 “행위”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8,9).<br/><br/>오늘날 “침례”는 지역 교회의 회원이 되는 의식으로서도 기능한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엡 1:23) 안으로 들어가 그 지체가 되는 것은 성령님을 통해 일어나는 일이지만, “지역 교회” 안으로 들어가 그 회원이 되는 것은 대개 “물”을 통해서 일어난다. 성경대로 믿는 지역 교회의 회원이 되려면 교회의 다른 형제자매들 앞에서 자신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롬 8:16)임을 밝혀야 하는데, 침례는 이를 대체하기에 제격인 의식이다. 이미 다른 곳에서 침례를 받은 경우라면 방법을 달리해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새 성도라면 침례식 때의 구원 간증을 통해 회원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보통이다. <br/>일반적으로 성경대로 믿는 교회에서는 침례를 줄 때 목사가 “아무개 형제(자매)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은 간증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침례를 받는 사람이 이에 동의를 나타냈을 때에만 목사가 “나는 형제(자매)의 신앙 고백에 따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줍니다.”라고 말하면서 침례를 준다(마 28:19). 이를 통해 다른 성도들은 그의 신앙 고백을 확인하고, 함께 교제할 수 있는 믿음의 가족으로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br/><br/>침례식에는 한 가지 의미가 더 있는데, 바로 우리가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이다(롬 6:5). 만일 죽은 자들이 살아나지 못한다면 우리가 침례를 받을 이유도 없다(고전 15:29). 그러나 주 예수께서 그분의 몸을 입고 부활하셨듯이, 우리와 교제하다가 사별(死別)한 지역 교회의 성도들을 포함하여 그분을 믿고 잠든 성도들 모두는 반드시 자신의 몸을 입고 부활하리라는 사실을 우리는 믿는다. 그래서 그 믿음을 물속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일을 통해 선포하는 것이다. 이러한 진리에 입각한 성경대로 믿는 교회들의 침례식은 로마카톨릭이나 개신 교회들에서 행해지는 “죽어 버린” 종교 의식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성도들로 하여금 우리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상기하게 하며,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더더욱 강화해 주기 때문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29 Oct 2024 16:53:33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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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죄인들을 부르고 치유하신 예수 그리스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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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본 코너는 솔로몬성경연수원 교재들의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려 주신 지식의 보화들을 담고 있다.<br/><br/>마태복음 5-7장의 “산상설교”를 통해 앞으로 임하게 될 왕국의 핵심적인 규범인 “왕국의 헌법”이 제시되었고, 마태복음 8장과 9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왕국의 왕으로 오신 분이심을 증명하는 “왕의 표적들”을 보여 주신다. 유대인들로 하여금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시요, 그들을 천국으로 인도할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받아들이게 하려면, 이스라엘 백성의 눈높이에 맞는 최상의 방법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표적”이었다. 표적은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불러낼 때부터 시작되었다(출 4:1-3).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가올 왕국의 통치자이심을 증명하시기 위해 표적을 행하신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br/><br/>『그리고 주께서 배를 타고 건너가 자기 성읍에 도착하시니라. 그런데, 보라, 사람들이 침상에 누운 한 중풍병자를 주께 데려오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들아, 기운을 내라. 네 죄들이 용서받았느니라.”고 하시더라. 그런데, 보라, 서기관들 중 몇 사람이 속으로 말하기를 ‘이 사람이 하나님을 모독하는도다.’라고 하니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죄들이 용서받았느니라.’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 위에서 죄들을 용서하는 권세를 가진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그후 그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일어나 네 침상을 들고 네 집으로 가라.”고 하시니, 그가 일어나서 자기 집으로 가더라. 무리가 이를 보고 놀라며 그러한 권세를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더라』(마 9:1-8). <br/><br/>마귀에게 사로잡힌 두 남자에게서 마귀들을 쫓아내신 후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성읍인 “카퍼나움”(막 2:1)으로 가셨다. 이때 주님께서는 몰려든 많은 사람에게 말씀을 전파하셨는데(막 2:2), 그때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다. 옴짝달싹 못하던 중풍병자를 예수님께로 인도한 사람은 네 사람이었다. 그들은 그가 흔들리지 않도록 안전하게 옮겼을 뿐만 아니라, 지붕을 뜯고 부수면서까지 그를 주님께로 인도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병자를 치유하셨다. 본문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안드레가 베드로를 주님께 인도하고(요 1:40), 우물가의 여인이 마을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한 것처럼(요 4:39),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죄인들을 주님께 인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9장에는 다섯 번의 치유 표적이 나타나는데, 그중 세 번은 “다른 사람의 믿음으로”(2,18,32절) 치유받고, 두 번은 “자신의 믿음으로”(21,28절) 치유받는다. 따라서 예수님을 흉내 내는 은사주의자들의 “믿음과 치유에 관한 주장”은 거짓임을 알 수가 있다.<br/><br/>“중풍병자를 걷게 하는 것”과 “죄들을 용서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쉬운 일인가?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이 더 쉬운가의 문제가 아니라 둘 다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치유의 표적을 통해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행하심으로써 자신이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셨다. 또한 이를 본 서기관들의 마음속 생각들을 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이셨다(4절). <br/><br/>예수님께서 중풍병자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전에 “영적인 회복,” 곧 죄들의 용서가 선행되어야 했다. 이는 산상설교에서 천국의 도래에 앞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라.”(마 6:33)라고 하신 것과 같은 맥락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표적을 행하시기 전에 먼저 백성들을 가르치시고 말씀을 선포하셨다(마 4:23; 9:35). 중풍병자의 “죄 용서와 치유”는 영적으로 타락한 이스라엘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이에 그들은 표적을 보면서 예수님을 메시아 왕으로 받아들여 그들의 죄를 용서받고 민족적으로 회복되는 치유를 받아야 했다.<br/><br/>바리새인들은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하시고 병을 고치신 일 모두가 하나님께 속한 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 나름의 확신”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비난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부인할 수 없는 치유의 표적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죄들을 용서하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진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목도하게 된다. 그럼에도 그들은 완고하게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무리들(막 2:12)과는 정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했다(막 3:6). 이것이 바로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한 죄인들의 반응”이다(창 4:5, 고전 2:14).<br/><br/>『예수께서 그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한 남자가 세무소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라오라.”고 하시니, 그가 일어나서 주를 따라가더라』(마 9:9).<br/><br/>마태는 “세리”로서, 그 당시 유대인들의 눈에는 동족에게 해악을 끼치는 죄인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런 그를 주님께서 “나를 따라오라”며 부르셨을 때, 그는 부르심에 즉각 응하게 된다(9절). 이것은 죄인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신약적인 그림을 보여 준다. 마태뿐만 아니라, 어부였던 “베드로와 안드레”(4:19) 그리고 “빌립”(요 1:43)도 부르심에 응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다양한 사람들을 부르신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모두 그 부르심에 순종한 것은 아니었다(마 8:19-22). 왜냐하면 주님의 부르심에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마 10:38). <br/><br/>“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늘 죄인들을 초청하셨고, 누구든지 주님께로 돌이키면 받아주셨다(요 6:35,37). 사실 식사에 초대된 사람 중 그 누구라도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죄인들이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고, 다른 사람들은 멸시”했다. 이런 자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자주 금식하고 십일조도 드리는 의로운 사람”과 “차마 눈을 들지 못한 채 가슴을 치며,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는 세리”의 비유로 그들의 양심을 찌르셨다(눅 18:9-13). 그렇게 해서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들인 바리새인들에게 “자비를 원하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자비를 원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오직 주의 진노만이 있을 뿐”임을 상기시키셨던 것이다(호 6:6).<br/><br/>율법에 관해 그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종교지도자들은 죄에 대한 회개보다는 자신의 의를 내세우고 있었다. 그런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행위로는 할 수 없었던 일을, 하나님께서 자비를 통해 이제 곧 “하나님의 의”를 그들에게 이루신다는 사실을 배우라고 말씀하신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말씀의 참 의미를 배워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공부함으로써(딤후 2:15)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춰져야 한다(딤후 3:16,17, 엡 2:10). 그런 사람만이 진리를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기 때문이다(행 4:13).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30 Sep 2024 16:58:18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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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참된 제자도를 알려 주신 예수 그리스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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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본 코너는 솔로몬성경연수원 교재들의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려 주신 지식의 보화들을 담고 있다.<br/><br/>마태복음 5-7장의 “산상설교”를 통해 앞으로 임하게 될 왕국의 핵심적인 규범인 “왕국의 헌법”이 제시되었고, 마태복음 8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왕국의 왕으로 오신 분이심을 증명하는 “왕의 표적들”을 보여 주신다. 8장 전반부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치유의 표적들”을 보여 주셨고, 이번 호에서 다루는 후반부에서는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참된 제자도”를 설명하시고, 또 폭풍우를 잠잠케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기적을 보여 주신다.<br/><br/>『어떤 서기관이 나아와서 주께 말씀드리기를 “선생님, 선생님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내가 따르겠나이다.”라고 하니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여우들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인자는 자기 머리 둘 곳조차 없노라.”고 하시니라. 그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주께 말씀드리기를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지내게 하옵소서.”라고 하니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르라. 그리고 죽은 자들로 그들의 죽은 자를 장사지내게 하라.”고 하시니라』(마 8:19-22).<br/><br/>예수님께는 편히 주무실 집조차 없으셨기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된다는 것은 문밖이나 맨땅 위에서도 잘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20절, cf. 벧전 2:11). 말하자면 “야전 군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여우들(마귀의 세력들, 눅 13:32)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들(마귀들, 계 18:2)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세상에서 나그네요 순례자로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세상이 살 만한 데가 못 된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마귀와 그의 세력들이 하나님의 자녀들보다 더 잘 되고 더 번성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순례자처럼 사셨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러한 삶을 본받아야 한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부르심을 받은 일꾼들로서 항상 육신의 일보다는 하나님의 일을 우선시할 수 있어야 한다(21,22절).<br/><br/>누가복음에서도 비슷한 말씀이 제시된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죽은 자들로 그들의 죽은 자를 장사지내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하시니라. 또 다른 사람도 말씀드리기를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 그러나 먼저 내 집에 있는 가족에게 작별을 고하게 하여 주소서.”라고 하니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적합하지 아니하노라.”고 하시니라』(눅 9:60-62). 이 사람의 마음속에는 주님께서 최우선의 자리에 있지 않았다. “자기의 일”이 먼저였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겠다는 결정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결코 미룰 일이 아니다. 그 무슨 일이 있어도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일인 것이다. 롯의 아내처럼 옛 생활들을 계속 돌아보고 여전히 그 옛 생활들에 머물러 있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양손에 꽉 쥐고 있는 세상적인 것들과 옛 습관들을 과감히 내려놓아야 한다. 그래야 주님을 위해 붙잡은 쟁기를 양손으로 제대로 들 수 있고, 또 쟁기질을 제대로 할 수 있다. 두 손에 쥐고 있는 세상적인 것들을 내려놓는 것, 그것은 우리가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해 마땅히 지불해야 할 대가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br/><br/>『또 주께서 배에 오르시니 제자들이 주를 따르더라. 그런데, 보라, 바다에 큰 폭풍우가 일어나 그 배가 파도에 덮였으나 주께서는 주무시고 계신지라, 제자들이 그에게 다가와서 깨우며, 말씀드리기를 “주여, 우리를 구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라고 하니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오 너희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 하시고 일어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조용해지더라. 그 사람들이 놀라서 말하기를 “이분이 도대체 누구시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에게 복종하는가!”라고 하더라』(마 8:23-27).<br/>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는 모습은 창조주로서의 권세를 보여 준다. 사실 주님께서는 창조 사역에 함께하셨다(요 1:3). 그래서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나타낸다. 예수님께서는 온 우주(자연계)의 주(Lord)이시고 왕이시다. 앞서 나타났던 “질병 치유”(2,3,13,15절)가 “그분의 왕 되심”을 증거한다면, 여기서 “자연을 관장하시는 모습”은 “하나님의 아들 되심”(마 14:33)을 증거한다.<br/><br/>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신 이유는 그들이 “구해 달라”고 요청한 사실 자체 때문이 아니다. 연약한 인간이 주님께 간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적은 믿음,” 곧 “두려워함”을 꾸짖으신 것이다. 베드로가 물에 빠졌을 때도 그가 “구해 달라”고 한 말을 꾸짖으신 것이 아니라 그의 “적은 믿음,” 곧 “의심”을 꾸짖으셨다(마 14:31). 인간으로서 창조주요 구주이신 주님께 “구해 달라”고 간절히 부르짖는 것은 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것,” 곧 “믿음 없는 모습”은 마땅히 책망받을 부분이다.<br/>여전히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몰랐기 때문에 온전한 믿음을 행사할 수도 없었고 마음이 다급하기만 했다. 그들의 적은 믿음은 바람과 바다가 잔잔해진 뒤에 그들이 놀라는 모습 속에서도 드러나게 된다. 『이분이 도대체 누구시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에게 복종하는가!』(27절)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나중에는 깨닫게 된다. 『참으로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4:33).<br/><br/>『주께서 건너편 겔게사인들의 지방에 가시니, 마귀들에게 사로잡힌 두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주를 만났는데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을 통과할 수 없더라... 그 마귀들이 주께 간청하여 말씀드리기를 “당신이 우리를 쫓아내시려거든 우리로 돼지떼에게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가라.”고 하시자, 그들이 나와 돼지떼 안으로 들어가니, 보라, 온 돼지떼가 산비탈을 거세게 달려 내려가 바다로 들어가서 물에 빠져 죽더라』(마 8:28,31,32).<br/><br/>이 구절들과 마가복음 5:1-17 등 마귀들에 관한 구절들을 통해 마귀들의 특성을 알 수 있다. 마귀들은 “더러운 영들”로서 “무덤”을 좋아한다(28절, 막 5:2,3,5). 마귀 들린 사람들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막 5:3,4). 마귀 들린 사람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부짖으며 소리를 지르고 “산”과 같은 “높은 곳”에 거하기를 좋아한다(막 5:5). 마귀 들린 사람들은 자기 몸에 상처를 내는 등 자해를 한다(막 5:5). 마귀들은 “벌거벗는 것”을 좋아한다(막 5:15). 마귀들은 매우 “종교적”이다(막 5:6,7,10-13, 눅 4:34, 약 2:19, 고후 11:14, 계 18:2). 한 사람 안에 하나 혹은 여러 마귀가 들어갈 수 있다(막 5:9, 눅 8:2). 마귀들은 돼지와 같은 동물들을 점유하여 미치게 만들 수 있고, 바다로 뛰어들기를 좋아할 만큼 “따뜻하고 젖어 있는 장소”를 좋아한다(32절, 마 17:15, 막 5:13). 그래서 마귀들이 인간의 몸을 좋아하는 것이다(눅 11:24).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Fri, 30 Aug 2024 16:12:31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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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부정적이고 경멸적인 동물, “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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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개하면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는 인간을 잘 따르는, 인간에게 우호적인, 인간에게 충직한 동물이라는 것이다. 인간과 오랫동안 함께해 오면서 쌓아온 친숙한 이미지들 때문에 개는 애완동물이 아닌 반려견으로 여겨지고 있다. “애완동물”은 개나 기타 동물을 키우면서 즐거움과 만족과 위안을 얻는다는 뜻인 반면, 반려견은 그러한 의미를 뛰어넘어 친구요 동반자로서 함께 살아가는 가족이라는 한층 더 깊은 의미가 있다. 반려견 문화는 일찍이 서양에서 발전했으며, 국내에서도 이제 대학교 별로 “반려동물과”라는 학과가 생기고 또 인기를 누릴 정도로 반려견 키우기가 하나의 문화로서 정착되고 있다. <br/><br/>하지만 개는 친숙한 이미지도 있지만 대수롭지 않거나 하찮은 동물, 또는 부정적이거나 경멸적인 동물로서 취급되기도 하는데, 성경에도 다윗이 골리앗을 대적하며 섰을 때 골리앗이 다윗을 보고 『내가 개이기에 네가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왔느냐?』(삼상 17:43)라고 묻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다윗왕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도피하던 중 바후림에 이르렀을 때는, 사울의 집안에서 한 사람이 나와 다윗왕을 저주하는데 이에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어찌 이 죽은 개가 내 주 왕을 저주하나이까? 내가 청하오니, 나로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삼하 16:9)라고 말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이뿐 아니라 마태복음에는 한 카나안 여인이 마귀에게 고통받는 자신의 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라고 주님께 간청하는 장면이 나온다(마 15:21-28). 이때 주님께서는 처음에는 대꾸도 하지 않으시다가 나중에 자신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만 보내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 카나안 여인은 “개들”도 주인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말하며 자신을 한껏 낮춘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창녀의 몸값이나 개로 번 돈은 주의 전에 어떤 서원하는 일로도 가져오면 안 되었다(신 23:18). 이 모두가 부정적이고 경멸적인 표현을 “개”에 빗대어 썼던 것이다.<br/><br/>성경에서 개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계속되는데, 개를 무리를 지어 다니는 늑대나 하이에나처럼 죽은 고기를 먹고 사는 짐승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들에서 짐승들에게 찢겨진 고기를 보게 되면 자신의 성결을 위해 그것을 개들에게 던져 줘야 했다(출 22:31). 또한 여로보암과 바아사에게 속한 자가 성읍에서 죽으면 개들이 죽은 고기를 먹듯 그 시체를 먹어 치울 것이라는 저주가 내려지기도 했다(왕상 14:11; 16:4). 그뿐 아니라 열왕기상 21:23에서는 티셉인 엘리야가 아합의 아내 이세벨에게 개들이 이스르엘 성벽 곁에서 그녀를 먹을 것이라고 예언하는데, 예언대로 개들이 그녀의 시체를 먹음으로써 두개골과 발과 손바닥을 제외한 나머지는 찾지 못했다(왕하 9:30-37).<br/><br/>한걸음 더 나아가서 시편 59편에서는 개가 멸망의 아들, 곧 적그리스도의 예표로 사용된다. 시편 59편은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다니던 사무엘상 19:11-17의 상황을 그리고 있는데, 그렇기에 시편 59편의 1-4절 말씀은 분명 사울로부터 도망가는 다윗에 관한 말씀인 반면, 뒷부분인 5-17절은 그 표현이나 적용에 있어 과거가 아닌 미래, 곧 재림의 때와 관련된 말씀이다. 특히 적그리스도가 예루살렘을 두 번 치러 올라오는 모습을 저녁에 돌아와서 개처럼 짖으며 성읍을 돌아다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 만군의 주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깨셔서 모든 이방을 감찰하소서. 어떤 사악한 범법자에게도 자비를 베풀지 마소서. 셀라. 그들이 저녁 때 돌아와서 개처럼 짖으며 성읍을 돌아다니나이다. 보소서, 그들이 그들의 입으로 악한 말을 내뱉고 그들의 입술에는 칼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누가 들으리요?” 함이니이다. 그러나 오 주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니 주께서는 모든 이방을 조롱하시리이다』(시 59:5-8). 저녁 때 개들이 다시 돌아온다는 이 말씀은 장차 적그리스도가 대환란 기간에 이스라엘을 한 번 친 후 또다시 치러 올라올 것이라는 예언인데, 그와 관련된 예표가 바로 “산헤립”과 “느부캇넷살”이다. 이 적그리스도의 예표들은 이스라엘을 실로 두 번 치려고 올라왔던 것이다(왕하 18:13,17; 24:1,10; 25:1).<br/><br/>개는 또한 거짓 선지자의 예표로도 사용된다. 베드로후서 2:22에서는 개와 관련하여 『그러나 참된 잠언대로 그들에게 이루어진 것이니 “개는 그 자신이 토해 낸 것으로 다시 돌아가고 또 돼지는 씻고 나서 그녀의 진창 속에서 뒹군다.” 하였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에서 거듭나지 않은 남자의 모형인 “개”는 베드로후서 2장 전체의 문맥을 살펴볼 때 베드로후서 2:1에서 언급하고 있는 “거짓 선지자”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마태복음 7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진리인데,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6에서 말씀하시기를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들을 발로 밟고, 다시 돌아서서 너희를 찢을까 함이라.』라고 하셨다. 마태복음 7장에는 베드로후서 2장에서처럼 개와 돼지가 등장하며, 15절에서는 베드로후서와 마찬가지로 “거짓 선지자”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다.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은 약탈하는 이리들이라』(마 7:15). 이 구절에서 거짓 선지자의 모형인 “이리”는 갯과에 속한 동물이다. 그렇기에 마태복음 7:6에서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거짓 선지자들”을 향한 말씀임을 확인할 수 있다. <br/><br/>위와 같은 이유로 사도 바울은 개들을 주의하라고 권면한다. 『개들을 주의하고 악한 일꾼들을 주의하며 살을 베어 내는 자들을 주의하라』(빌 3:2). 사도 바울이 주의하라면서 언급한 개는 물론 문자적인 개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개는 구절 뒷부분에 나오는 살을 베어 내는 자들, 곧 율법적이고 형식적인 종교 의식을 주장하는 자들을 가리키고 있다. <br/>시편 22:16에서는 『개들이 나를 에워싸고 악인의 무리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그들이 내 손과 내 발을 찔렀나이다.』라고 하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죽으실 것인가를 예언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에워싼 것은 이방의 개들, 곧 로마 병사들이었던 것이다. 또한 요한계시록 22:15에서도 『그러나 개들과 마술사들과 음행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누구든지 거짓말을 즐겨 행하는 자는 모두 다 바깥에 있으리라.』라고 말씀함으로써 개들을 사람들과 함께 언급하고 있다. 물론 요한계시록의 말씀에서도 개는 문자적인 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말씀에서 개는 구원받지 않은 자들과 거짓 선지자들을 뜻하고 있다.<br/><br/>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성경에서 개가 갖는 이미지는 극히 부정적이다. 그런데 성경에는 그와 대비되는 “개”가 등장한다. 바로 “회색사냥개”이다. 『잘 걷는 것 세 가지가 있고, 정녕, 위풍있게 다니는 네 가지가 있으니, 짐승 중에서 가장 강하여 어떤 것에게서도 물러서지 아니하는 사자와, 회색사냥개와, 숫염소와, 또 그에게 대적하여 일어날 수 없는 왕이라』(잠 30:29-31). 성경은 회색사냥개가 잘 걷는다고 말씀한다. 이는 화평의 복음을 전하며 좋은 일들의 기쁜 소식을 가져오는 자들의 아름다운 발을 연상케 한다. 『파송되지 아니하였는데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와 같으니 “화평의 복음을 전하며 좋은 일들의 기쁜 소식을 가져오는 자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하였느니라』(롬 10:15). <br/><br/>또한 앞선 잠언 30:29은 회색사냥개가 “위풍있게” 다닌다고 말씀한다. 마치 사자나 왕처럼 다닌다는 것인데, 위풍당당한 왕의 모습은 천년왕국 때 땅을 유업으로 받아 다스릴 그리스도인을 떠오르게 한다(계 20:4,6; 22:5). 본래 사람은, 특히 남자는 토한 것으로 돌아가는 개와 같은 본성을 지녔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믿고 거듭나게 되면, 잘 걷고 위풍있게 다니는 회색사냥개와 같은 모습으로 주님을 섬길 수 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라, 흔들리지 말라, 항상 주의 일을 넘치게 하라. 이는 너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아니한 줄을 너희가 앎이니라』(고전 15:58). 『깨어 있으라. 믿음 안에 굳게 서라. 남자답게 처신하라. 강건하라』(고전 16:13).<br/><br/>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죗값을 대신 치러 주신 구주로 믿고서 구원받았는가? 그렇다면 추수할 곡식이 익어 하얗게 되었지만 추수할 일꾼이 부족하여 일꾼을 찾으시는 이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찾으시는 바로 그 일꾼이 되도록 하라. “신실한,” “대담한,” “용감한”이란 뜻을 지녔고, 히브리어로 개를 뜻하는 “켈렙”과도 연관이 있는 여푼네의 아들 “칼렙”처럼, 주님께서 하신 말씀, 그 약속을 굳게 붙잡고(수 14:6-9) 앞으로 나아가는 바로 그 한 사람이 되도록 하라. <br/>파수꾼들은 눈멀었고 무지하며, 말 못하는 개들처럼 짖지도 못하고 잠자고 눕고 졸기를 좋아하는 그리스도인들로 넘쳐나는 이 마지막 때에, 당신은 주님 곁에서 주님을 충직하게 섬기는 “감시견”(watchdog)이 되어야 한다. 주님 곁에 굳게 서서 그 어떤 비진리와도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복음을 전파하며 진리를 수호함으로써 주님을 매우 기쁘시게 해 드리는 “충견”이 되도록 하라.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Fri, 30 Aug 2024 16:11:1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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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왜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히 보장되는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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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그들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이며, 또 아무도 나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할 것이니라.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나의 아버지는 만유보다 더 위대하시니, 아무도 나의 아버지 손에서 그들을 빼앗아 갈 수 없느니라』(요 10:28,29).<br/><br/>사람을 종교의 노예로 만드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바로 사후 세계에 대한 공포나 무지를 이용하는 것이다(히 2:15). 유대교,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로마카톨릭, 개신교 등 지구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종교는 이런 수법을 써먹는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등의 율례들을 지켜야 한다거나, 금욕과 고행을 통해 정신을 수양해야 한다거나, 매주 미사에 참여해서 빵과 포도주를 먹고, 또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서 믿음을 잃지 않고 끝까지 견뎌야 사후에 나쁜 운명을 맞이하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것보다 사람들을 회당, 모스크, 사원, 사찰, 성당, 교회 등에 잘 묶어 둘 수 있는 방법은 아마 없을 것이다.<br/><br/>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진리를 통한 자유를 선포하셨다(요 8:32). 진리이신 분, 즉 주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으며, 한 번 받은 구원은 무슨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영원히 보장된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지옥에 갈까 봐 두려워 무엇인가를 해야 할 필요가 없다. 이것이야말로 종교인들의 신앙과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가장 극명한 차이이다. 이런 까닭에 “종교”의 배후에서 군림하는 신(살후 2:4)인 사탄은 이 구원의 영원한 보장이라는 성경적 교리를 매우 싫어하며, 의의 종으로 가장하는 자신의 종들(고후 11:15)을 사주하여 이 교리를 공격하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공격을 잘 방어해 낼 수 있도록 왜 구원이 영원히 보장되는지를 성경적으로 명쾌하게 입증할 줄 알아야 한다.<br/><br/>1. 구원은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br/><br/>이 시대의 성도들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는 첫 번째 이유는 구원이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약 시대에는 구원받기 위한 “의”의 출처가 스스로의 행위였다. 『만일 우리가 주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주 우리 하나님 앞에서 이 모든 계명들을 지켜 행하면, 그것이 우리의 의가 되리라.” 할지니라』(신 6:25). 따라서 제아무리 의인이라고 할지라도 그 구원이 취소될 여지가 있었다. 『내가 의인에게 그가 반드시 살리라고 말하였는데도 그가 자기 자신의 의를 신뢰하고 죄악을 저지르면 그의 모든 의는 기억되지 아니하고 그가 저지른 그의 죄악으로 인하여 그가 죽을 것이라』(겔 33:13).<br/><br/>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신약 교회 시대의 성도들의 구원은 자신의 의가 아니라 주 예수의 의를 근거로 한다(고전 1:30). 이 의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에 우리들의 행위와 전혀 연관이 없다(롬 4:5, 엡 2:8,9). 이 의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가 없으셨던(히 4:15)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루신 “완벽한 의”이기 때문이다(마 3:15, 요 19:30). 이 시대에 그분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 완벽한 의의 전가(im- putation)가 일어나기 때문에, 그는 “의인”으로 여겨진다(롬 4:1-12). 마치 어머니가 바깥에서 놀다 온 아이의 더러워진 옷을 벗겨서 가져가고 깨끗한 옷을 입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더러운 죄들을 가져가시고 그분의 정결한 의를 주시는 것이다.<br/><br/>따라서 혹자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제아무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완벽한 의라 해도 인간에 의해 더럽혀질 수 있다고 말하는 셈이다. 물론 그런 신성모독적인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다. 지극히 거룩한 것은 제아무리 더러운 것이 닿는다고 해도 더러워지기는커녕, 오히려 거기에 닿은 더러운 것을 거룩하게 만들어 버리기까지 한다(출 30:26-29, 레 6:25-27, 마 8:3). 우리가 받은 “의의 옷”도 그러하다. 말하자면 우리는 “결코 때가 타지 않는 초자연적인 옷”을 받은 셈이다!<br/><br/>2.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br/><br/>우리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는 두 번째 이유는 예수님께서 『아무도 나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할 것이니라.』(요 10:28)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성경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아예 그분의 “손”이 되었다고까지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신약 교회 시대에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이제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개별적으로는 그 지체들이라』(고전 12:27). 우리가 주 예수를 영접하여 구원받으면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지만 우리 또한 주님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요 6:56). 성령님께서 우리 몸 안으로 들어오심(고전 6:19)과 동시에 영적 침례를 통해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넣으시기 때문이다(고전 12:13). 그렇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발, 손, 귀, 눈 등이 되는 것이다.<br/>따라서 우리가 만일 지옥에 간다면,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잘려 나가는 셈이 되고 만다. 누군가가 우리를 지옥에 보내려고 한다면 예수님의 손에서 무엇인가를 빼앗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분의 손을 잘라서 가져갈 정도의 힘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그분을 “장애인”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아니면 그분께서 우상 숭배자들이나 마귀 들린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자해(?)라도(왕상 18:28, 막 5:5) 하셔야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엽기적인 일은 결코 일어날 리가 없다! 설령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를 이룬 당사자 스스로가 떨어져 나가기를 원한다고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자기 몸을 아끼시는 이 몸의 “머리”께서는 그분의 몸을 불구로 만들 생각이 전혀 없으시기 때문이다(엡 5:22-33).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했다면 좋든 싫든 영원히 떨어져 나갈 수 없다.<br/><br/>3. “보호”가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br/><br/>우리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는 셋째 이유는 우리 자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의 손 안에서 이중으로 보호받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님께서도 우리가 주 예수를 믿었을 때 인을 치셨기 때문에(엡 1:13,14), 우리의 구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통해 보장되는 셈이다.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오고간 “보호 조약”이라면 몰라도,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라면 취소될 리가 없다. 이는 “검은 속내”가 있었다고 해도 그러하다. 당신은 여호수아의 군대가 두려워 화친을 맺으려고 왔던 기브온 거민들을 기억하는가? 그들은 여호수아와 고관들에게 자신들의 정체를 속임으로써 그 보호 조약을 획득해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조약은 유효했다. 카나안 땅의 연합군이 기브온 거민들을 치러 왔을 때, 여호수아의 군대는 그들을 도와야만 했다. 이미 그들을 살릴 것이라고 맹세했기 때문이다(수 9:19,20).<br/><br/>마찬가지로 수많은 사람들이 올바르지 못한 마음가짐을 갖고 구원을 받는다. 지옥에 가기 싫어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 예수를 구주로 믿겠노라고 고백하면서도, 대개는 그 모든 죄들을 끊어 내고 주님의 명령만을 따라 살겠다고 결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설령 그랬다손 치더라도, 복음을 믿은 것이 분명하다면 그들을 향하신 구원의 약속이 취소될 일은 없다(고전 15:2-4).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하지 않으시며 또 사람의 아들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행하지 않으시랴? 또한 이르신 것을 이루지 않으시랴?』(민 23:19)<br/><br/>구원의 영원한 보장에 대해 가르쳐주면 어떤 교인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요. 그러면 막 살아도 된다는 것입니까?”라고 따져 묻곤 한다. 지옥이라는 제동 장치가 없으면 사람들이 죄를 짓거나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 나온 반문일 것이다. 이런 반응을 접하면 “이 사람의 하나님이란, 지옥을 가지고 인간들을 협박해서 섬김을 강요하는 신이구나.” 하는 생각에 고소(苦笑)를 금할 길이 없다.<br/><br/>성경은 이렇게 답한다. 『그런즉 어떻게 하리요?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어도 된다는 말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롬 6:15). 그리스도인이 죄로부터의 승리를 갈망하고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까닭은 심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의 강권하는 사랑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느니라. 이는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면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우리가 판단하기 때문이라』(고후 5:14). 그 사랑을 받은 우리는 구원이 영원히 보장되기에 죽음의 문제에 있어서 두려움이 없고 언제나 자신에 차 있다(요일 4:17,18, 고후 5:6-8). 그런 사랑을 주신 분께서 우리에게 물으신다. 구원받았으면서도 너희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던 그 육신의 말에 여전히 귀를 내어줄 것이냐고, 그 육신을 죽은 것으로 여기고 나를 위해 사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냐고, 그렇게 사는 사람들에게 내가 줄 칭찬과 상이 기대되지 않느냐고 물으시는 것이다(골 3:1-5). 그런 까닭에 우리는 그분을 위해 산다. 구원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말이다!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ue, 06 Aug 2024 10:44:53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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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왕의 표적을 보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title>
<link>https://www.biblemaster.co.kr/bb7/%EC%99%95%EC%9D%98-%ED%91%9C%EC%A0%81%EC%9D%84-%EB%B3%B4%EC%97%AC-%EC%A3%BC%EC%8B%A0-%EC%98%88%EC%88%98-%EA%B7%B8%EB%A6%AC%EC%8A%A4%EB%8F%84/</link>
<description><![CDATA[본 코너는 솔로몬성경연수원 교재들의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려 주신 지식의 보화들을 담고 있다.<br/><br/>마태복음 5-7장의 “산상설교”는 앞으로 임하게 될 왕국의 핵심적인 규범, 즉 “왕국의 헌법”으로서 제시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 왕국을 통치할 왕은 누구신가? 마태복음 8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왕국의 왕으로 오신 분이심을 증명하는 “왕의 표적들”을 보여 주신다.<br/><br/>『그런데, 보라,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서 주께 경배드리며 말씀드리기를 “주여, 주께서 원하시면 저를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하니,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를 만지며, 말씀하시기를 “내가 원하노니 깨끗해지라.”고 하시니,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해지더라. 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주의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며,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고 하시더라』(마 8:2-4). 문둥병에 관한 구약의 규례는 레위기 13,14장에 나온다. 문둥병에 걸린 사람은 혼자 격리되어 살아야 했고(레 13:46), 아무도 그를 만져서는 안 되고 살펴보기만 해야 했다. 제사장 역시 살펴보기만 해야 했으며(레 13:17,25,36,43), 문둥병자가 정결하게 되는 날의 법(레 14:2)에 따라 속건제물의 피를 가지고서만 만질 수 있었다(레 14:14). 속건제물로 어린 숫양 한 마리가 필요했으니, 곧 “동물의 피”가 흘려져야 했던 것이다(레 14:12).<br/><br/>영원한 대제사장이신(히 3:1)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의 인간 제사장들과 달리 문둥병자를 살펴보셨을 뿐만 아니라 “직접 손을 내밀어 만지심으로써” 치유하셨다(마 8:3). 이는 예수님께서 문둥병을 깨끗하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심을 증거해 준다. 특히 속건제물의 피 없이 문둥병자를 만지셨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동물의 피가 아닌, 십자가에서 흘리신 자신의 피로 죄를 씻으시는 것을 모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br/><br/>『예수께서 카퍼나움으로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그에게 나아와 간구하여 말씀드리기를 “주여, 내 종이 중풍으로 집에 누워 몹시 고통 중에 있나이다.”라고 하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리라.”고 하시니 그 백부장이 대답하여 말씀드리기를 “주여, 주께서 내 지붕 아래로 오시는 것을 내가 감당할 수 없사오니 오직 말씀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종이 나을 것이옵니다』(마 8:5-8). 이 “이방인 백부장”은 유대인들을 사랑하고 선대하는 사람으로서 유대인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 주기까지 했다(눅 7:5). 그런데 그가 총애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어 예수님께 나아온 것이다(눅 7:2). 이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리라.”라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백부장은 “오직 말씀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종이 나을 것이옵니다.”라고 대답하여 예수님께서 직접 가시지 않고 그 자리에서 말씀만 하셔도 자기 종이 낫게 될 것이라 믿는 매우 큰 믿음을 보여 준다.<br/><br/>『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놀라워하시며 따르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스라엘에서는 이처럼 큰 믿음을 본 적이 없나니, 결코 없도다... 예수께서 그 백부장에게 말씀하시기를 “가라, 네가 믿은 대로 네게 이루어지리라.”고 하시니, 그의 종이 바로 그 시각에 나으니라』(마 8:10, 13).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믿음에 대해 “큰 믿음”이라고 평가하시면서(10절) 그의 종을 치유해 주셨는데(13절), 이는 그의 믿음이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는 믿음이었고(8절, 눅 7:7),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인정하는 믿음이었으며(9절), 예수님의 “주 되심”(Lordship)을 인정하는 믿음이었기(8절) 때문이다. 이러한 “주 되심”은 모든 사물과 자연계, 심지어 모든 질병에까지도 미치는 위대한 “주권”이다. 질병마저도 그리스도의 권위와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다. 앞서 나왔던 문둥병도 그러했고, 여기에 나오는 중풍병도 그러하며, 이후에 나오는 모든 질병의 치유는 바로 그 점을 보여 주고 있다. 그래서 그 “주 되심”을 인정했던 유대인들은 모두 예수님을 향해 “주여”라고 불렀던 것이다(2,8,25절).<br/><br/>이 표적 사건에는 다른 사건과 다른 특별한 부분이 있다.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에 대해 “이스라엘에서 이처럼 큰 믿음을 본적이 없나니, 결코 없도다.”라고 칭찬하시고(10절) “가라, 네가 믿은 대로 네게 이루어지리라.”(13절)라고 말씀하시는 사이에 “천국에 관한 예언”을 짧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사람들이 동과 서에서 와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왕국의 자녀들은 바깥 흑암에 던져져서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고 있을 것이라』(11,12절).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이었던 백부장의 큰 믿음을 보시고 장차 다가올 천년왕국에서 그 복을 누릴 “이방인들”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실제로 이 땅에 왕국이 임할 재림 때, 환란 기간에 유대인들을 사랑하고 선대한 이방인들이 “양의 민족”(마 25:31-40)으로 분류되어 왕국의 백성들로서 왕국의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창 12:3). 반면에 왕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고 거부한 유대인들, 곧 “왕국의 자녀들”은 바깥 흑암(지옥)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12절).<br/><br/>『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오셔서 그의 아내의 모친이 열병으로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그 여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 그들을 섬기더라. 저녁이 되었을 때에, 사람들이 주께로 마귀들에게 사로잡힌 자들을 많이 데려왔으니 주께서 주의 말씀으로 그 영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모두 고쳐 주시니라』(마 8:14-16).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아내의 모친의 열병을 치유하신 후, 사람들이 데려온 마귀들에게 사로잡힌 자들과 병든 자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br/><br/>“질병의 치유”는 “왕(메시아)의 대표적인 표적”이다. 이것은 구약에서 예언되었고(겔 34:16, 사 33:24; 35:6), 초림 당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다. “질병을 치유하는 표적”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졌다. 이스라엘은 “치유의 표적”과 더불어 시작된 민족으로서(출 4:6-8) 항상 표적을 구한다(고전 1:22).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라는 명령을 위임받았을 때 “치유의 기적”이 나타났고(출 2-4장),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에 재앙으로 내린 “질병”으로부터 그분의 백성을 보호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셨다(출 15:26). “모세와 같은 한 선지자”(신 18:15)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질병을 치유하심으로써 주님 자신이 왕이심을 백성에게 보여 주셨다. 이는 주님께서 백성들의 『연약함』을 맡으시고 『질병』을 짊어지신 분으로서(17절)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사 53:4)을 성취하신 메시아 왕이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심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을 이루려 하심이니, 말씀하시기를 “그가 친히 우리의 연약함을 맡으시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셨느니라.”고 하셨더라』(17절).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Thu, 27 Jun 2024 11:18:53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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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사탄의 거짓말” 진화론의 허구 (3)</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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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목 차<br/><br/>1. 성경은 과학을 무엇이라고 말씀하는가?<br/><br/>2. “사탄의 거짓말” 진화론의 허구<br/><br/>3.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<br/><br/>4. 우주의 구조<br/><br/>5. 노아의 홍수<br/><br/>6. 화석들의 증언<br/><br/>7. 인류의 기원과 역사<br/><br/>8. 성경 속 다양한 과학적 사실들<br/><br/>성경은 인간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지만 과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 스스로를 “신”(god)으로 만드는 데 있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말이다. 과학은 인간을 신으로 만들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6천여 년 전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를 통해 사탄이 이브를 속였던 것과 똑같은 거짓말이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서』(창 3:5). 결국 아담과 이브는 그것을 먹었지만, 사탄의 말대로 “신들”(gods)과 같이 되지 못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는 죄만 짓고 말았다. 과학 역시 인간에게 동일한 것을 약속하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을 반역하고 진리를 대적하도록 만든다. 성경은 『악인은 반역만을 찾나니』(잠 17:11)라고 말씀한다. “반역”을 정당화하는 수단은 “거짓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역하면 할수록 거짓말은 계속 양산될 수밖에 없다. 이에 성경은 『거짓되이 일컬어지는 과학의 반론을 피하라.』(딤전 6:20)고 경고하는 것이다.<br/><br/>#거짓말 4. 무질서에서 질서로, 단순한 형태에서 복잡한 형태로 진화한다.<br/><br/>어리석은 진화론자들이 맹신하는 네 가지 거짓말 가운데(세 가지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 호에서 다뤘음) 이 마지막 주장은 그들조차 인정하는 “열역학 제2법칙”을 정면으로 거부한다. 열역학 법칙(熱力學 法則, Thermodynamics Laws)은 “열과 힘에 관한 법칙” 또는 “에너지에 관한 법칙”이다. 이 법칙은 실제로 검증하고 입증할 수 있는 과학적 법칙이지만, 진화론자들의 주장은 “거짓말”이자 하나님의 법칙들을 고의적으로 거부하는 “불법”이다.<br/><br/>열역학 제1법칙은 한 마디로 표현하면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다. 어떤 에너지의 형태가 다른 형태로 바뀔 수는 있어도 에너지의 총량(量)은 보존되는 것이다. 일례로 풍력 발전기는 바람의 힘을 이용해서 전기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전기를 사용해서 열을 발생시켜 방을 따뜻하게 만든다. 즉 바람의 에너지가 전기 에너지로, 전기 에너지가 열에너지로, “형태”가 바뀌지만, 총량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양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에너지는 스스로 생성되거나 소멸될 수 없다. 따라서 우주의 어떤 것도, 어떤 생명도 스스로 창조되거나 파괴되지 않는다. 스스로 무에서 유를 생성할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생명은 생명으로부터 나와야만 한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시 36:9, 창 1:1, 히 11:3). 이 성경적이고 과학적인 법칙 하나로, “생물이 무기물로부터 자연적으로 우연히 발생했다.”(자연발생설)고 하는 진화론자들의 거짓말은 완전히 무너진다. 따라서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형태로 진화한다는 주장도 거짓말에 불과한 것이다.<br/><br/>열역학 제2법칙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에너지 변질의 법칙”이다. 에너지의 양은 변하지 않지만 에너지의 질(質)은 고급에너지에서 저급에너지로 저하되고 변질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쓸모 있는 에너지는 자꾸 소모되고, 쓸모없는 에너지만 증가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엔트로피”(entropy)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엔트로피는 증가하게 되어 있다. 에너지는 일정한데 시간이 지날수록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는 계속해서 줄어드는 것이다. 성경은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져』 간다(고전 7:31)고 말씀한다. 세상은 부도난 회사처럼 망해가고 있는 것이다.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이 고갈되고 먹을 수 있는 물도 부족하다. 에너지가 완전히 소모되고 나면 모든 것은 죽고 사라진다. 과학에서는 이것을 “열사”(heat death, 열역학적 죽음)라고 말하는데, 엔트로피가 최대가 된 상태를 의미한다. 우주가 영원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들이 굉장한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우주의 구성 요소들이 맹렬한 불로 녹아내리며 땅과 그 안에 있는 일들이 타버릴 것이라』(벧후 3:10).<br/><br/>따라서 이러한 열역학 법칙에 비추어 보면 우주에 있는 모든 존재가 진화해 가고 있다는 진화론은 성립할 수 없다. 진화론은 과학적 법칙이 아니라 과학적으로도 입증되지 않은 가설이다. 단순한 가설을 넘어 진리를 대적하기 위해 사탄이 고안해 낸 거짓말이다. 사탄에게 미혹된 진화론자들은 진화론과 열역학 법칙이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고의적으로 무시해 버린다. 헨리 모리스(Henry Morris) 박사는 그의 책 &lt;Scientific Creationism&gt;(과학적 창조론, 1974)에서 “진화를 장려하는 책들 대부분은 이런 사실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진화론자들은 그런 대립 현상을 하찮은 문제로 치부해 버린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책 &lt;The Troubled Waters of Evolution&gt;(진화라는 혼란의 바다, 1974)에서는 “한 토론회에서 진화론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엔트로피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다루지 못했다. 그들 대부분은 그 문제가 핵심사항으로 거론될 때마다 무시해 버렸다.”라고 말했다.<br/><br/>폐쇄된 시스템 안에 항상 존재하는 엔트로피를 어떤 인간도 극복할 수 없다. 가용한 에너지가 소비되고 줄어드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것이다. 변질되고 소모되고 분리되고 분해되며 부패하고 쇠퇴를 거듭하는 과학적 현실을 결코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막을 수 없다. 결국 모든 만물은 무질서와 혼란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진화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금 진화하고 있는 존재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분명하게 과학적으로 논증할 수 있는 진화론자는 아무도 없다. 그들이 이 질문에 답하려면 “거짓말”을 해야만 한다. 사람들은 태어나서 진화하지 않는다. 죽어가는 것이다. 모든 동식물들도 마찬가지다. 우주는 한 번도 진화된 적이 없다. 그것은 창조된 이래로 소멸되어 갈 뿐이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던 세상은 아주 완벽한 세상이었다. 모든 질서가 완전히 잡혀 있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온 이래로 세상은 겉옷처럼 낡아져 갈 뿐이다(히 1:11).<br/><br/>무질서가 계속 증가하는 것을 아무도 막을 수 없다. 이것은 비단 과학에만 적용되는 법칙이 아니다. 모든 정치, 경제, 종교, 문화, 역사, 음악, 미술, 건축 등 이 세상 모든 분야에 적용되는 법칙이다. 어떤 사회, 국가, 정부든지 결국은 무질서와 혼란 속에 몰락해 왔고 앞으로도 몰락해 갈 것이다. 활시위를 떠난 화살은 언젠가 움직임을 멈추고, 태엽이 풀리기 시작한 시계 역시 동작을 멈추게 된다. 새로 산 자동차나 새집은 시간이 지날수록 낡아지고 부서져 간다. 아이들이 뛰노는 장소에서 장난감이 저절로 정돈되는 경우는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무질서해지는 것은 정해진 법칙인 것이다. 이런 과학적 법칙을 거부하고 “진화론”을 신봉했던 “세기의 살인마들”은 오히려 혼란과 무질서를 가중시킴으로써 전 세계를 피로 물들게 했다. 이념적 근거를 진화론에 두었던 나치주의는 인종간의 약육강식을 당연시했고 약한 인종을 동정하는 것을 불법이라고 여겼다. 결국 히틀러는 순수 독일 정통의 위대함을 보여 주자고 하면서 “선별적 종족 번식”과 “우생학적 정책들”을 내세웠는데, 그 결과 그는 전 세계를 전쟁에 휘말리게 만들었고 유대인들을 기생충과 같은 존재라고 말하면서 무려 60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학살했다. 공산주의자들 역시 진화론 신봉자들이다. 그들은 “사회주의 지상낙원”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의 과정에서 죽임을 당하는 생명이 아무리 많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들에 의해 살해된 숫자는 전 세계에 약 9천만 명 이상으로 나치주의를 능가한다. 스탈린, 레닌, 마오쩌둥의 공포와 잔악한 통치는 수천만 명의 생명을 주검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br/><br/>“진화”되었는가? 무질서가 사라졌는가? 세상이 좋아졌는가? 현실을 직시하라. 아무것도 진화되지 않았다. 모든 것들이 퇴보하고 있다. 심판과 멸망의 날에 불살라질 때까지 퇴보할 뿐이다(벧후 3:7). 진화론자들은 거짓말쟁이들이다. 거짓말쟁이들의 최후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못임을 기억하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4 Jun 2024 15:00:20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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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과도기의 말씀들”에 나타나는 경륜적인 특징</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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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과도기적인 책들의 종류<br/><br/>지난 호에서 살펴보았듯이 과도기적인 말씀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이유 1) 때문에 과도기적인 책들은 “신약”에만 등장한다. 이 책들로는 마태복음과 사도행전, 히브리서가 있고, 한 가지 더 언급하자면 요한계시록을 포함시킬 수 있다. 마태복음은 구약에서 신약으로 전환되는 과도기적인 책이고, 사도행전은 유대인의 경륜과 교회 시대의 경륜을 이어주는 책이며, 히브리서는 교회 시대에서 환란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책이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교회 시대에서 환란 시대로, 환란 시대에서 천년왕국과 영원으로 전환되는 과도기의 말씀들을 다룬다. 이 시대에 수많은 교리적 오류들은 이 책들을 잘못 해석하고 적용한데서 비롯되었다. 말하자면 성경을 올바르게 나누지 못하고 이 책들의 모든 구절들을 신약 교회의 교리로만 억지로 끼워 맞추려 한 것이다. 우리는 과도기적인 책들에서 볼 수 있는 교리적인 특징들을 올바르게 나누어 공부함으로써, 그들과 동일한 오류를 범하는 어리석고 부끄러운 일꾼들이 되지 말아야 한다.<br/><br/>image1.jpg <br/><br/>과도기의 말씀들에 나타나는 경륜적인(또는 교리적인) 특징<br/><br/>과도기적인 책들은 어떤 특징들을 갖고 있는가? 우선, 하나의 시대나 경륜만을 다루지 않고, 두 개 이상의 시대와 경륜을 다룬다. 율법 시대면 율법 시대, 교회 시대면 교회 시대, 환란 시대면 환란 시대, 이렇게 하나의 시대와 경륜에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두 개의 시대와 경륜을 다루고 있다. 한 권의 책 안에 둘 이상의 서로 다른 경륜이 섞여 있는 것이다. 율법을 다루는 모세오경, 특히 레위기와 민수기, 신명기는 “율법 시대” 하나의 경륜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이 책들에 나오는 제사법 및 의식법은 이방인이나 교회 시대의 그리스도인과는 교리적으로 무관하다. 오직 구약의 이스라엘에게만 주신 교리들로 적용해야 하는 것이다. 반면 로마서에서 빌레몬서까지 13권의 바울서신들은 “교회 시대” 한 가지 경륜에만 맞추어져 있다. 따라서 이 책들에 등장하는 교리들과 명령들은 모두 교회에만 적용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륜이 바뀌는 과정 중에 있는 과도기적인 책들의 경우, 그 안에 서로 다른 두 개의 경륜들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br/><br/>둘째, 경륜이 섞여 있다는 것은 각각의 경륜들에 속하는 서로 다른 “대상들”이 나오고 각각의 대상들에게만 적용되는 서로 다른 “교리들”이 섞여 있음을 의미한다. 과도기적인 책들은 서로 다른 경륜에만 적용되는 서로 다른 교리들이 상호 교차하고 있는 “교차로”라 할 수 있다. 즉 각각의 교리들이 적용되는 서로 다른 시기와 대상이 중첩되고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은 구약에서 신약으로 전환되는 과도기의 말씀들을 다룬다. 구약이라 하면 주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율법 시대의 경륜”을, 신약은 “교회”를 대상으로 하는 “교회 시대의 경륜”을 주로 다룬다. 그래서 이 두 가지 경륜들에 해당하는 교리들이 마태복음 안에 공존하는 것이다. 물론 마태복음 대부분의 구절들은 여전히 구약에 속해 있어서 교리적으로는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되는 구절들이 훨씬 더 많다. 사도행전은 이스라엘에서 교회로, 천국(왕국) 복음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으로 전환되는 과도기의 말씀들을 다룬다. 그래서 “유대인”의 경륜에 해당하는 교리들과 “교회”의 경륜에 해당하는 교리들이 섞여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교회 시대에서 환란 시대로 전환되는 과도기의 말씀들을 다룬다. 대환란은 “야곱의 고난의 때”라 불리는데 이는 “유대인들”이 그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에는 “환란 시대의 성도들”(특히, “환란 시대의 유대인들”)에게 적용되는 교리들과 “교회 시대의 성도들”에게 적용되는 교리들이 섞여 있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무려 네 개의 시대와 경륜을 포함하고 있어 각 시대의 특징들을 보여 주는 교리적인 내용들이 함께 공존한다. 이를 무시한 채 성경의 모든 구절들을 교회 시대의 교리들로 가져오려 한다면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br/><br/>셋째, 과도기적인 책들은 신약 안에 있지만 “구약적인” 책들이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즉 같은 신약 안에 있는 바울서신들은 교회 시대에 적용되는 교리들로 가득 차 있어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고 한 번 구원받은 사람의 구원은 영원히 보장된다.”는 신약적인 교리로 일관하지만, 과도기적인 책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신약에 포함되어 있으면서도 오히려 “구약적인” 율법과 연관되어 있어서, “행위 구원 및 끝까지 견뎌야 구원받는다.”는 교리가 등장하고 왕국복음과 표적들이 나타난다. 이런 내용들은 교회 시대의 교리로 결코 적용할 수 없는 것들이다.<br/><br/>과도기의 말씀들을 공부하는 방법<br/><br/>오늘날 대부분의 이단들은 “과도기적인 책들”을 사사로이 해석하고 억지로 풀려는 데서 생겨났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그의 두 번째 편지 “첫 장”(1장)과 “마지막 장”(3장)에서 두 번이나 경고한다. 『성경의 어떤 예언도 사사로운 해석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벧후 1:20). 『무식한 자들과 견고하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들처럼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미니안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인도 한 번 받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거짓말한다. 그들은 이런 이단적인 교리의 근거로 “끝까지 견뎌야 구원을 받는다.”(마 24:13)는 말씀이나 “떨어져 나가면 다시 새롭게 회개시킬 수 없다.”(히 6:6)는 말씀을 제시한다. 반면 칼빈주의자들은 이런 구절들을 만나면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 채 교회 시대 성도들에게 억지로 끼워 맞추려 한다. 로마카톨릭이나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세례 혹은 침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고 거짓말한다. 이 이단 교리의 기초는 사도행전 2:38에 있다. 그러나 그들은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가 설교했던 대상이 이방의 죄인들이 아니라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들(행 2:36)이라는 사실을 간과해 버린다. 신유나 방언 따위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은사주의자들은 마태복음이나 사도행전에 나오는 병 고침과 방언 같은 표적들을 근거로 그들의 거짓 교리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 표적들이 교회가 아닌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이며 은혜의 복음이 아닌 왕국 복음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에 완전히 무지하다. 행위 구원 및 침례에 의한 중생을 가르치는 이런 각종 이단들은 과도기적인 책들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해서 생겨났다. 이는 그들이 “한 책” 안에 공존하는 “서로 다른” 교리들과 각각의 교리들이 적용되는 “서로 다른” 대상들을 올바르게 나누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그들은 성경이 모순적이고 오류투성이의 책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과도기적인 책들을 바르게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br/><br/>우선, 성경의 모든 구절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것은 성경을 해석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으로, 이 원칙을 따르면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실 그대로 받고 믿을 때”에만 온전히 깨달을 수 있다(살전 2:13). 그런데 과도기적인 책들은 문자적인 해석만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들은 아니다. 그래서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문자적으로 해석한답시고 “교회 시대의 성도들도 끝까지 견뎌야 구원받는다.”는 왜곡된 주장을 하고, 칼빈주의자들은 문자적으로 풀지 못하니까 영적으로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것이다.<br/><br/>그래서 두 번째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곧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공부해야 한다(딤후 2:15). 나누되 “올바르게” 나누어야 한다. 올바로 나눈다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의 차이”를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다양한 경륜에 따라 나타나는 서로 다른 대상들과 교리들을 올바르게 나누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이단들처럼 한 구절만 떼어내어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문자적 해석은 문맥을 고려한다. 문맥을 고려하여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는 말은 그 말씀이 “어떤 시대에 사는 어떤 사람에게 주신 말씀이냐” 하는 것까지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일례로 마태복음은 구약의 연장선상에서 유대인에게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책이기에, “유대인의 관점에서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히브리서는 “마지막 날들(히 1:2)을 사는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이기에(“마지막 날들”은 교리적으로 환란 시대를 가리킴) “마지막 날들을 사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성경은 역사적으로, 교리적으로, 영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이 기록된 첫 번째 목적은 “교리”이므로(딤후 3:16), 교리적으로 적용할 때는 성경의 각 책들과 각 장들과 절들을 “칼로 나누듯이” 교리적으로 정확히 나누어야 한다. 교리적인 구분을 명확히 하고 그에 따라 각 책들의 교리적 혹은 경륜적 위치를 바르게 설정하지 못하면, 성경을 온전히 깨달을 수 없다. 즉 하나님의 경륜들을 올바르게 구분할 줄 아는 세대적인 지식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br/><br/>셋째, “경륜”과 그 경륜이 적용되는 “시기”와 “대상”을 올바르게 나누어야 한다. 성경은 인류를 세 부류, 즉 유대인과 이방인과 하나님의 교회로 구분한다(고전 10:32). 따라서 각 대상에 맞게 진리의 말씀들을 교리적으로 구분하여 적용해야 한다. 말하자면 과도기적인 책들의 각 구절들을 문맥을 고려하여 각각의 대상에 맞게 올바르게 나누어 적용해야 하는 것이다.<br/><br/>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성경의 주제가 왕국이므로, 물리적 왕국인 천국과 영적 왕국인 하나님의 나라를 올바르게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본지 268,269호 참조).<br/><br/>이상 네 가지 사항을 유념하여, 과도기의 말씀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역사적으로, 영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물론, 교리적으로도 올바르게 나누어 적용함으로써 각각의 과도기적인 책들을 보다 더 자세하게 공부해 나가도록 하자. BB<br/><br/>(각주)--------------------------<br/><br/>1) 과도기적인 책들은 왕국의 연기에 따른 교회 시대의 등장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Mon, 24 Jun 2024 14:58:03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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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부끄럽기 짝 없는 간증</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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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여호사밧은 남유다 아사왕의 아들이며,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부터 시작된 남유다 네 번째 왕이었다(대상 3:9,10). 그는 아버지 아사의 모든 길로 행하여 주님의 눈앞에서 옳은 것을 행했고, 그 길에서 돌이켜 벗어나지 아니한 선한 왕이었다(왕상 22:43). 왕으로서 몇 가지 치적이 있었는데, 유다의 모든 방벽 친 성읍들에 군대를 배치하고 유다 땅과 그의 아버지 아사가 빼앗은 에프라임 성읍들에 거점을 둠으로써 북왕국 이스라엘에 대하여 스스로 힘을 길렀다(대하 17:1,2). 또 주님을 향한 열정도 있어서, 아버지 아사왕 때에 남아 있던 남색자들을 나라에서 쫓아냈으며(왕상 22:46), 조상 다윗의 처음 길로 행하여 바알들을 찾지 아니하고 주 하나님을 찾으며 그분의 계명대로 행하고 북왕국 이스라엘의 행실을 쫓지 아니했다. 주님께서는 이런 여호사밧과 함께하시어 그의 왕국을 견고하게 하셨고, 또 온 유다가 그에게 예물을 가져와 재물과 영예가 그에게 풍성하도록 해 주셨다. 이에 여호사밧의 마음은 주님의 길에서 고무되어 유다에서 산당들과 아세라들을 제거하기도 했다(대하 17:3-6).<br/><br/>남유다의 여호사밧왕이 북왕국 이스라엘에 대해 스스로 힘을 길렀다지만, 그의 참된 국력은 방벽 친 성읍들이나 군대가 아니었다. 그 힘은 그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순종했다는 데 있었다. 『또한 그의 치리 제삼년에는 그가 보내어 그의 고관들, 즉 벤하일과 오바댜와 스카랴와 느다니엘과, 미카야로 유다의 성읍들에서 가르치게 하였더라. 또 그들과 함께 레위인들, 즉 스마야와 느다냐와 스바댜와 아사헬과 스미라못과 여호나단과 아도니야와 토비야와 토바도니야 등 레위인들을 보내고, 그들과 함께 제사장들인 엘리사마와 여호람을 보냈더라. 그들이 주의 율법책을 가지고 유다에서 가르치고 유다의 온 성읍들을 두루 다니며 백성을 가르치니라』(대하 17:7-9). 그랬더니 『주의 두려움이 유다 주변에 있는 땅의 모든 왕국들에 임하므로 그들이 여호사밧을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키지 아니하더라. 또 필리스티아인들 중 얼마는 여호사밧에게 예물과 은으로 세를 가져왔으며, 아라비아인들은 그에게 짐승떼를 가져왔으니 숫양 칠천칠백과 숫염소 칠천칠백이더라.』(10,11절)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여호사밧은 이에 힘입어 성곽들과 국고 성읍들을 건축하고, 전사와 힘센 용사들을 유다 전역의 방벽 친 성읍들에 군대로 두었다(12-19절). 『주는 전사』(출 15:3)이시기에,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여호사밧왕에게 두려울 것은 없었다. 불필요한 사람과 제휴하지 않아도 그의 왕국은 “주님의 말씀”으로 인해 얼마든지 든든히 세워져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북왕국의 아합에게로 불필요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여호사밧에게 재물과 영예가 풍성히 있었으며, 그가 또 아합과 친족 관계를 맺었더라』(대하 18:1). 배가 부르고 모든 일이 잘 풀리면 인간은 딴 생각을 품기 쉽다는 것을 보여 준다. 먹고 배부르고, 또 아름다운 집들을 짓고 그 안에 거하며, 소떼와 양떼가 번성하고 은과 금이 증식되고 가진 모든 것이 번성하면, 마음이 높아져 주님을 잊고 자신의 능력과 손의 힘으로 그 모든 재물을 가져왔다고 생각하는 것이 인간이다(신 8:12-17).<br/><br/>여호사밧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사악한 왕과 친족 관계를 맺었다. 주님과 주님의 말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인간관계”를 원했던 것이다. 하나님이 아닌 사람의 손을 붙잡는 것은 “죽음”을 요구하는 저주의 관계로 들어서는 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몇 년 후 아합은 사마리아에 있는 자신을 찾아온 여호사밧을 설득하여 시리아와의 전쟁에 동참하게 했다(대하 18:2). 여호사밧은 아합과 “친족”이었기에 “친족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다(3절). 즉 전쟁 없이도 나라를 운영할 수 있었던 여호사밧이었는데 불필요한 제휴가 그를 불필요한 전쟁으로 이끈 것이다. 아합을 대적하여 군사력을 길렀던 여호사밧인데, 이제는 아합을 치려고 준비한 자신의 군대로 아합을 도와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br/><br/>세상을 사는 성도가 하나님을 잊고 사람과 육신적인 제휴를 하면, 그가 세상에서 성별하여 주님 안에서 축적해 왔던 힘을 세상을 위해서 허비해야 한다. 죄로 멸망해 가는 아합을 도왔듯이, 죄로 멸망하는 세상을 유익하게 하는 일에 성도의 에너지를 써야 한다.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면 그 무엇도 부러울 것 없는 안전과 풍요 속에서 살 수 있으련만, 우리 가운데에는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 쉬 관심을 갖고 하나님을 쉽게 잊어버리는 습성의 노예가 얼마나 많은가!<br/><br/>여호사밧이 아합과 제휴한 일에서 한 가지 기이한 현상을 목도하게 된다. 전쟁에 나가기 전, 여호사밧은 아합에게 전쟁에 관해 주의 말씀에 물어볼 것을 요구했다(대하 18:4). 아합의 사백 명의 거짓 선지자들은 『올라가소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왕의 손에 넘겨주시리이다.』(5절)라고 거짓 예언을 했다. 그곳에 그들 외에 주께 물을 만한 주의 선지자가 없느냐는 여호사밧의 질문에, 아합은 자신에게 항상 나쁜 것만을 예언하는 미카야를 데려오게 했다. 미카야는 하나님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보내시어 사백 명의 거짓 선지자들의 입에 있게 함으로써 아합을 라못길르앗에서 쓰러지게 하려 한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전했다(13-22절).<br/><br/>여기서 여호사밧의 “이상 행동”이 감지된다. 하나님께서 아합에 대해 재앙을 말씀하셨다는 참 선지자의 말을 분명히 들었음에도, 평소 자신의 백성에게 말씀을 가르쳐 주님을 두려워하는 법을 배우게 했던 이전 모습과는 달리, 그것을 한쪽 귀로 흘려버리고 전쟁을 하러 라못길르앗으로 올라간 것이다. 『미카야가 말하기를 “만일 왕이 분명히 평안히 돌아오신다면, 주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니니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너희 온 백성아, 경청하라.” 하더라. 그리하여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 여호사밧이 라못길르앗으로 올라가니라』(대하 18:27,28). 여호사밧은 주님께 물어 볼 것을 아합에게 요구한 장본인이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전달한 선지자의 예언을 무시하고 시리아와의 전쟁에 참여하고 만다. 여호사밧은 아합과 “죽음의 제휴”를 함으로써,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구별할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을 상실한 것이다.<br/><br/>성도가 세상과 손잡으면, 그 즉시 영적 분별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미 세상과 타협해 버린 상황에서 하나님께 인생의 길을 묻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설령 바른 길을 보여 주는 “경고”가 주어진다고 해도, 그것을 따를 만한 믿음을 상실했기에 죽음을 향해 죄의 어두운 길을 재촉하기가 쉽다. 『어두움 가운데 행하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느니라』(요 12:35). 너무 늦기 전에 세상과 맞잡은 손을 뿌리쳐야 한다!<br/><br/>여호사밧이 친족 관계를 맺은 아합이 전장에서 보인 행동은 성도가 세상과 육신적으로 제휴할 때 직면할 수 있는 위험의 한 유형을 보여 준다.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말하기를 “나는 변장을 하고 전장으로 가리이다. 그러나 왕은 왕복을 입으소서.” 하여 이스라엘 왕은 변장을 하고 그들이 전장으로 가니라』(대하 18:29). 아합의 이 돌출 행동은 여호사밧의 위기로 이어졌다. 시리아와의 전쟁에서 “왕”으로 돋보이는 것은 왕복을 입은 “여호사밧”뿐이었는데, 마침 여호사밧만이 적의 집중공격 대상이 된 것이다! 『그때 시리아 왕이 그와 함께한 병거 대장들에게 명하여 말하기를 “너희는 작은 자나 큰 자와 더불어 싸우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의 왕과만 싸우라』(30절). 이스라엘의 왕 아합은 자신이 설득하여 전쟁에 끌어들인 유다 왕 여호사밧과 실제 전장에서는 동행하지 않았다. 이 전쟁은 본질적으로 이스라엘과 시리아 사이의 전쟁이었다. 그러나 아합은 자신이 적의 공격 대상이 될 것이 뻔했기에 변장을 하고서 모습을 감춰 버렸다. 이로써 여호사밧만이 이스라엘의 왕처럼 보여 적의 집중공격을 받게 된 것이다.<br/><br/>주 안의 성도는 순수하기에 사람을 의심하지 않고 잘 믿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그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뿌리치고 사람과 손잡을 때 “아합”과 같은 죄인들의 배신에 예상치 못한 위기에 봉착할 수 있다. 성도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며(요일 2:15,16),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살아야 한다.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요일 2:17). 살면서 “아합들”을 만나지 않도록 기도하고, “아합들”에게 육신적으로 다가가 스스로 제휴하는 일을 절대적으로 삼가야 한다. 여호사밧은 시리아 군대가 자신에게 몰려든 죽음의 위험 앞에서 주께 부르짖어 죽음을 모면했다. 『여호사밧이 부르짖더라. 이에 주께서 그를 도우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움직여 그에게서 떠나게 하시니라』(대하 18:31). 하지만 이 일에 있어서 “여호사밧”에게 무슨 간증이 있는가? “내가 세상과 손잡고 쓸데없는 일에 인생을 허비하다 죽을 고비를 만났는데 주님의 도우심으로 벗어났다.”고 말하려는가? “참으로 부끄럽기 짝 없는 간증”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준행하며 주님으로부터 모든 필요를 채움 받아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이 악한 현 세상에서 택해야 할 성경적인 삶이다(빌 4:19). BB]]></description>
<dc:creator>최고관리자</dc:creator>
<dc:date>Fri, 14 Jun 2024 11:56:02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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