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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과 교회 개척의 첫걸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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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6년 11월호>
본 「지역 교회」 코너는 피터 S. 럭크만 목사의 책 <지역 교회>(The Local Church)의 핵심 내용을 편집하여 정리한 것이다.여러분의 사역은 대부분 잭 하일즈나 제리 폴웰의 그것처럼 거대하지도 않고, 오랄 로버츠, 홀튼 부부(PCC), 지미 스웨거트가 이룩한 왕국처럼 막대한 재정을 자랑하지도 못할 것이다. 여러분 가운데 대부분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면 작은 것도 크다.”라는 말을 인생의 모토로 삼아야 할 것이다.
(1950-1970년에 존 R. 라이스가 선전했던바) 현대의 “트렌드”는 국가적인 부흥의 전령 역할을 할 만한 거대한 주일학교가 스물 몇 개가량 생겨났다는 것이다. 라이스는 그것이 자기의 공이라면서 자기 신문(자칭 “미국 최고의 부흥과 복음 전파 주간지”)이 이 “부흥”에 기여한 바가 크다고 주장했다. 사실 1933년 이후로 부흥 비슷한 것이라도 있었다면, 그것은 J. 프랭크 노리스 본인과 그에게서 배운 학생들의 사역의 결과물인데도 말이다.
1933년에 있었던 “술을 다시 먹자”는 표결을 끝으로, 미국에서는 국가 차원에서의 부흥이 더 이상 일어나지를 않았다. 그 후로는 지역 차원에서의 부흥만 가능했다. 라이스와 존스 시니어는 모두 하나님께서 자신을 빌리 선데이의 “후계자”로 선택해 주시기를 바랐고, 빌리 그래함 같은 사람에게 스포트라이트가 비치는 것에 깊이 분노했다. 그러나 바뀌는 것은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빌리 선데이 이후 국가 차원에서의 부흥을 끝내셨기 때문이다. 뒤따르는 모든 부흥은 지역 침례교회들 안에서만, 즉 “텍사스 토네이도” (J. 프랭크 노리스(J. Frank Norris, 1877–1952)의 별명)의 본을 따랐던 교회들에서만 일어났다. 이러한 진짜 “각성”과 동시에 은사주의적인 가짜 부흥도 일어났으나, 당연하게도 처음부터 “맛이 간 상태”로 행해진 일이었다. 그 은사주의자들이 하는 짓이라고는 풋내기들을 벗겨먹는 것밖에 없었다.
자, 만일 여러분이 교회를 개척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무언가 착수하기 전에 다음의 사항을 심사숙고해 봐야 한다.
1 그 특정 지역에 성경대로 믿는 사역이 “정말로” 있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이탈리아 나폴리나 스페인 바르셀로나 같은 곳이라면 물을 필요도 없다. 파리, 살레르노, 베네치아, 마드리드, 빈, 베르히테스가덴과 같은 곳의 상황도 같다.
그러나 “미국 안”이라면(특별히 남부), 곧 달라스, 멤피스, 아틀란타, 잭슨빌, 펜사콜라와 같은 도시에 “진정한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멍청이다. 예컨대, 펜사콜라에는 130개의 침례교회들이 있고, 그중 최소한 여덟은 <킹제임스성경>을 믿는다. 게다가 펜사콜라에는 은사주의 교회도 최소 30개가 있는데, 그중 스물다섯은 <킹제임스성경>을 믿는다. “사역”을 한답시고 그러한 지역들의 “필요”에 대해 떠드는 것이란, 스스로 사역자도 아니요 “남자”도 아니라는 사실을 실토하는 것과 같다.
2 그 지역에 모일 그리스도인들이 있는가? 그들은 어떤 그리스도인들인가? 여러분이 교회를 시작하면 회중이 가족들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라나다, 리용, 오버아머가우, 발렌시아, 레바논 등에서 폴웰, 빅, 롤링스, 하일즈 등의 방식은 무용지물일 뿐이다.
3 집세, 건축 비용, 건물 가격 등은 어떻게 되는가? <주의 칼>지(紙)가 뭐라고 하든 간에, 감당이 안 되는 일에는 절대로 뛰어들지 말라. 결국 <주의 칼> 편집장들도 모두 사람들이 운집한 가운데 설교하기 위해 큰 교회들에서 집회를 열려고 애를 쓰지 않던가? 그런데도 그들의 말에 혹해서 무조건 일을 벌였다가는 빚더미가 숨통을 조여 올 것이다.
인종 혼합 거주지 혹은 곧 그렇게 될 지역은 피하라. 전미교육협회가 인종 혼합을 어떻게 조명하든 간에, 연방 법원과 법무부가 인종 혼합에 대해 어떻게 말하든지 간에, 뉴스 미디어가 백인우월주의 단체인 “KKK”를 얼마나 비난하고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를 얼마나 추켜세우든지 간에, 냉혹하고 엄정한 실체적 진실은 장소를 불문하고 인종 혼합 정책이 성공했던 사례는 단 한 건도 없다는 것이다.
디트로이트 시내, 휴스턴, 마이애미, 뉴욕, 워싱턴 D.C. 등은 세계에서 살인율 1위를 다툰다. 뉴욕에는 아프리카에 있는 어느 도시보다도 많은 흑인이 있다. 워싱턴 D.C.는 지자체 예산 대비 복지 수당 분배, 복지 수당 부정 수급, 거리의 부랑자들, 실업률, 세금 정책, 경제 성장 부진, 반체제 운동 등의 문제에 있어 최악을 기록하고 있다. 그 누가 뭐라고 떠들든지 간에, 여러분이 인종이 혼합된 지역에서 사역을 한다면, 그야말로 알거지 신세가 될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인의 사랑,” “성경적인 원칙,” “소수자들을 위해 짐을 지는 일” 따위를 아무리 많이 한다 할지라도 그와 같은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 점은 여러분이 파산한다는 “사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뷰챔 빅은 60대 시절에 디트로이트의 그랜드 리버 에비뉴를 떴다. 그가 떠나기가 무섭게 그곳은 당구장, 술집, 성인영화관, 사창가, 빗장 친 문과 창문 등이 4마일에 걸쳐 사슬처럼 늘어져 있는 곳이 되고 말았다. 레이 바테마는 켈리포니아 포모나에서 그야말로 생고생을 하고 나서야 이 점을 깨달았으며, 짐머만은 “동정심 많은 민주당 상원 의원들”이 “돌봄과 나눔”을 운운하며 파멸의 문을 열어 젖혔을 때, 현명하게도 플로리다 잭슨빌의 비버 스트리트로부터 빠져 나왔다. 어디에 사역을 일굴지 주의하라.
4 “전임” 사역자가 되기까지 먹고살 길이 있는가? 이 문제에 있어서 이곳 펜사콜라성경신학원의 학생들은 밥존스대학교, 펜사콜라기독대학, 성서침례대학 등에 다니는 일반적인 신학생들에 비해 엄청난 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런 학교들에서 “근로장학금,” “퇴역군인 지원금,” 그 외 다양한 재정적 지원 수단을 맛본 어린 사역자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교단이 모든 것을 다 마련해 줄 것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이 학교들에는 꼭 카톨릭처럼 하나같이 개신교의 교황들과 근본주의식의 위계질서가 있다.) 그러나 여러분은 다르다. (이곳에서 재학하는 3년 동안 그러했던 것처럼) 여러분은 졸업 후 얼마간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할지 모른다. 어쩌면 회중들과 함께 부지를 매입하고 “건축하는” 데 충분할 만큼의 돈을 마련하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첫 삽을 뜨기도 전에 선교사 몇 명을 지원할 돈을 먼저 마련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그 손길에 복을 주실 것이다.
5 여러분보다 나이가 많고 모든 면에서 경험도 많은 회중을 인도할 때 오는 부담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회중들의 질문에 “그 책”으로 답변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래야만 하는 순간이 수천 번은 있을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밥존스대학교, 펜사콜라기독대학, 테네시템플대학교, 성서침례대학 등을 졸업했다면 시도조차 하지 말고 관두는 편이 낫다. 그런 학교의 졸업생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자신을 가르친 교수들의 의견을 최종권위로서 제시하는 것뿐이니 말이다. 그들은 분명 “하나님의 말씀처럼”(벧전 4:11) 말하라는 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있는 그대로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들은 그 말씀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최소한 “어디에” 정답이 있는지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라. 비록 그 말씀을 펼쳐 보일 만큼 충분히 정진하지 못했다손 치더라도 말이다.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말씀에 전념하는 게 최선이긴 할 것이다. 회중들이 여러분에게 묻는 낙태, 연애, 마약, 음악, UN, 인종 혼합, 은사주의자들, 성경적 교리들, 결혼, 이혼, 직업, 세금, 애국심 등 별의별 질문에 다 답할 수 있어야 할 테니 말이다.
6 회중들이 흥미로워할 만한 메시지를 충분히, 대강 2년 치 정도를 가지고 있는가? 그 메시지는 여러분 자신에게도 중요한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회중들에게도 필요치 않을 것이다.
밥존스대학교, 테네시템플대학교, 펜사콜라기독대학, 성서침례대학, 피드몬트대학교, 필즈버리침례성서대학교, 마라나타침례대학교, 풀러신학교, 무디성경신학원, 휘튼대학 등을 졸업한 수많은 사역자들이 양들을 깡마르고, 혈기도 없고, 굶주리고, 병들게 만드는 이유는 그들이 설교할 수 있는 주제가 “출석”과 “헌금”뿐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그들에게 중요한 것이라고는 그 둘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계가 거기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딤전 6:9,10). 그 배교자들에게 성경이란 설교할 만큼 중요한 대상이 아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영감으로 주어진” 것이 “아닌” 데다가, 온갖 종류의 “오류”가 담겨 있는 까닭이다. 그런 이들이 도대체 무슨 이유로 성경을 자기 “수입”보다 중요하게 여기겠는가? 그렇게 할 리가 없다. 실제로도 그런 일은 없다.
준비한 그 메시지는 회중들에게 “필요”한 것인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설교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말하라고 주신 것이 전혀 “없다”면서, “이렇게 하는 것이 더 나은 번역일 것입니다.”라든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이렇습니다.”라든가, “유감스럽게도 번역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등등의 말이나 늘어놓으며 자신과 회중들의 시간을 낭비하는 목적이 도대체 무어냐는 말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말하라고 주신 것이 없다면, 그 입을 닥치고 있도록 하라. B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