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영원히 보존하신 말씀 분류

엉망진창인 개역개정판, “증오”인가, “긍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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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6년 08월호>

성경을 올바르게 깨달아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진리의 성경을 온전히 믿어야 한다. 그 책에 “기록된 그대로,” “사실 그대로,”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너희가 그의 글들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나의 말들을 믿겠느냐?』(요 5:47) 『이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들의 말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사실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음이니, 이 말씀이 믿는 너희 가운데서도 효과적으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우리가 성경을 기록된 그대로 믿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오류 없이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inspiration]으로 주어진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훈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여기서 『모든 성경[All scripture]』은 “모든 말씀들”(all the words), 곧 “그 책”(The Book)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단어들(all the written words) 하나하나”를 가리킨다. “성경”(聖經)에 해당하는 헬라어 “γραφή”(그라페)와 영어 “scripture”는 단수 형태와 복수 형태에 상관없이, “성경 말씀 하나하나”는 물론 “성경 말씀 전체”를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영감”이라는 개념이 최초에 기록된 “원본”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또 어릴 때부터 네가 성경을 알았으니, 그 성경은 너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인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지혜롭게 할 수 있느니라』(딤후 3:15). “디모데”가 어릴 때부터 알았던 성경은 “원본”인가, “필사본”인가? 당연히 “필사본”이다. 지구상에서 “원본”은 하나뿐이며 두 개일 수 없다. 하나뿐인 원본은 “디모데”의 시대까지 남아 있지 않았다. 남아 있었다 하더라도 “디모데”에게는 그것을 읽어 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가 제사장도, 레위인도, 서기관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유대인도 아닌 “헬라인”(“이방인”)이었다. 따라서 “디모데”의 손에 들려 있던 성경은 원본이 아닌 “필사본”이었다. 다시 말해 “영감의 개념”을 “원본”에만 국한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물론 영감으로 “기록된” 것은 “원본”이 유일하다. 그러나 그 “영감의 효력”은 “원본”에만 국한되지 않고 “필사본”과 “번역본”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께서는 “디모데후서 3:16”을 기록하실 때 “단어 선정”에 신중을 기하셨는데,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라 쓰시지 않고 『주어진 것』이라고 쓰셨다. 말하자면 “영감의 효력”을 “영감으로 ‘기록된’ 원본”만이 아니라, “영감으로 ‘주어진’ 필사본과 번역본” 모두에 적용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성경을 기록된 그대로 믿을 수 있는 둘째 이유가 있다. 그것은 곧 성경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보존되어 왔기 때문이다.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라. 흙 도가니에서 단련되어 일곱 번 정화된 은 같도다. 오 주여, 주께서 이 말씀들을 간수하시리니 주께서 이 세대로부터 영원토록 그것들을 보존하시리이다』(시 12:6,7).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것이 기록된 그대로 옳다.”라고 믿지 않으면, 성경이 말씀하는 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성경을 온전하고 유일한 진리라고 확신할 수도 없다. 이처럼 성경이 믿음과 실행의 “최종권위”(Final Authority)이자, “절대권위”(Absolute Authority)가 되지 못하면, 결코 성경을 올바르게 깨달을 수 없다.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효과적으로 역사할 수 있겠는가?

또한 성경이 “단어 하나하나”까지 온전히 보존되지 않고 변개되어 있으면, 어떻게 성경을 올바르게 깨달을 수 있겠는가? 대표적인 예로, 섭리로 보존된 <한글킹제임스성경>의 “유다서 1:22,23”을, 변개된 한글 성서들의 본문과 비교해 보라! 『어떤 자들을 동정하되 차이를 두어 하며, 다른 자들은 불 속에서 끌어내어 두려움으로 구원하되, 육신으로 더럽혀진 그 옷조차도 증오하라[And of some have compassion, making a difference: And others save with fear, pulling them out of the fire; hating even the garment spotted by the flesh]』(<한글킹제임스성경>). 이 본문과 대조해 보면, 부패한 한글 성서들로는 진리를 온전히 깨달아 알 수 없다는 점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개역개정판). “미워하라”는 것인가, “긍휼히 여기라”는 것인가? 도대체 어떻게 처신하라는 것인가? 변질된 “개역개정판”은 「의심하는」이란 단어를 제멋대로 첨가하는 대신 『차이를 두어 하며』를 삭제했고, 『두려움으로』라는 단어를 본래 있어야 할 자리에서 제거한 다음 맨 뒤로 보내서 임의로 첨가시킨 「또 어떤 자를... 긍휼히 여기라」는 표현에 연결시켰다. 다른 변개된 성서들도 이와 유사한 일을 자행했다.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도 싫어하여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개역한글판성경). 「믿음을 굳게 갖지 못하고, 의심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불 가운데서 끄집어 내어 구원하십시오. 두려움을 가지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되, 죄에 관한 것은 육체의 욕망으로 더럽혀진 옷까지도 미워하십시오」(쉬운성경). 여기에서는 「욕망」도 첨가했다. 「의심을 하는 사람들을 동정하십시오. 또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을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해 주십시오. 또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을 두려운 마음으로 동정하되, 그 살에 닿아서 더럽혀진 속옷까지도 미워하십시오」(표준새번역). 「Be merciful to those who doubt; snatch others from the fire and save them; to others show mercy, mixed with fear-hating even the clothing stained by corrupted flesh」(NIV).

변개된 성서들을 믿는 자들은 위 본문의 의미가 무엇인지 전혀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변개시킨 자들에게 “조명”을 꺼 버리셨다! 그들은 본문에서 언급하는 『불[fire]』을, “로마카톨릭”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배교자 “빌리 그래함”의 신학을 따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으로 해석하거나, 성경 변개자 “오리겐”과 당대 “알렉산드리아” 최초의 “기독교 학교”의 성경 해석 방법에 따라 “문자적인 불”이 아닌 “비유적인 불”로 만들었다. 또한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육신으로 더럽혀진 그 옷[the garment spotted by the flesh]』의 의미가 무엇인지 제대로 밝혀내지 못했고, 왜 『그 옷조차도 증오하라[hating even the garment].』라고 명령하시는 것인지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 멋대로 “첨가시킨 표현”에 따라, 왜 “두려운 마음으로 동정하거나 긍휼히 여기라는 것”인지, 그 이유에 대해 감조차 잡지 못했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인가? 우선 “유다서”는 “일반 서신”(General Epistles) 중 하나로서 “환란 시대의 교리”를 다루고 있다(자세한 내용은 피터 S. 럭크만의 주석서 <요한일이삼서 ․ 유다서>를 참고할 것). “환란 시대”는 구약의 율법이 다시 회복되는 등 “구약적인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특히 “믿음과 행위 체계에 따른 구원 방법”이 우리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너희 자신들을 지켜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기다리라』(유 1:21). 이 구절에서 “자신들을 지키라”는 말씀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영원한 보장”과 어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교회 시대의 교리”를 다루고 있는 “로마서 8:29”과 “고린도전서 1:8”에서는 구원받은 성도가 자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성도를 지키신다고 약속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분께서 너희를 끝까지 확고하게 지키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게 하시리라』(고전 1:8). 그러나 “환란 시대의 교리”를 다루고 있는 “유다서 1:21”에서는 “성도들이 직접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들을 지켜야” 한다. 그렇게 자신들을 지키면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자비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어지는 “유다서 1:22,23”은 “환란 시대”에 “문자적인 지옥의 불”을 경험하게 될 사람들을 언급하고 있다. “불”은 “문자적인 불”이지, 결코 “은유적이거나 영적인 불”이 아니다. 『그 역시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되리니, 그것은 그의 진노의 잔에 혼합하지 않고 부은 것이니라. 또 그 사람은 거룩한 천사들의 면전과 어린양의 면전에서 [문자적인] 불과 유황으로 [문자적인] 고통을 받으리니, [문자적인] 그 고통의 연기가 [문자적으로] 영원무궁토록 올라가리라. [환란 시대에] 그 짐승과 그의 형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문자적으로]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계 14:10,11). 이 본문에서 “문자적이지 않은 내용”은 단 한 가지도 없다! 『그러나 그 짐승이 잡히고, 짐승 앞에서 기적들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그와 함께 잡혔으니 그는 짐승과 더불어 그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과 그의 형상에 경배한 자들을 속이던 자라. 이 둘이 유황으로 불타오르는 불못에 산 채로 던져지더라』(계 19:20).

휴거되지 못하고 “환란 시대”에 이 땅에서 살게 될 죄인들이 “불못”에 산 채로 던져지는 이유는, 짐승의 표와 그 이름의 표를 받고 짐승과 짐승의 형상에 경배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짐승의 표”는 “검은 점”(black spot)이다. 이는 “적그리스도”가 『표범과... 같은... 짐승』(계 13:2)이기 때문이다. 표범의 몸에는 “검은색 점들”이 박혀 있다. 『에디오피아인이 그의 피부를 바꿀 수 있으며 표범이 그의 점들을 바꿀 수 있겠느냐? 그렇다면 악을 행하는 데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 표범의 “검은 점”은 반달 모양을 두 개 합쳐 놓은 것 같은 모습을 띠는데, 마치 “검은 입술”의 생김새와 흡사하다. 따라서 “짐승의 표”는 “유다 이스카리옷”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 사용했던 『원수의 입맞춤』(잠 27:6)과 연관이 있다.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배반하느냐?』(눅 22:48) 한편 환란 시대에 “검은 점(spot)”인 짐승의 표를 받는 사람들에게는 그에 대한 형벌로 온몸에 “반점”(spot)이 생기는데(유 1:12, 레 13장), 이것은 “표범”(leopard)과 관련된 질병인 “문둥병”(leprosy)이다. 『그러므로 첫째가 가서 자기 호리병을 땅에 쏟으니 그 짐승의 표를 가진 자들과 그의 형상에 경배한 자들 위에 악취가 나는 심한 헌데가 생기더라』(계 16:2). 이 “심한 헌데”가 바로 “문둥병”이다. 특히 “문둥병”은 사람들의 피부에 생기는 것은 물론, 심지어 그들이 입는 “옷”에까지 전염되기도 한다. 그래서 성경은 『육신으로 더럽혀진 그 옷조차도 증오하라.』(유 1:23)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그런 문맥에서 아주 생뚱맞게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라는 첨언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그것들은 깨닫는 자에게는 모두 알기 쉬운 것이요, 지식을 얻는 자들에게는 옳은 것이니라』(잠 8:9).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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