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논단 분류
“니코데모”를 닮은 자칭 성경교사들
컨텐츠 정보
- 30 조회
-
목록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5년 05월호>
멸망해 가는 현 세상에 복음 전파자가 필요하다면, 교회 안에는 성경교사가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시는데(딤전 2:4),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일에는 “복음 전파자”가 쓰임을 받고, 죄인이 구원받은 후 진리의 지식에 이르는 데는 “성경교사”가 쓰임을 받는다. 따라서 성경교사는 온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는 데 반드시 있어야 할 사람이다. 한 지역 교회 안에 바른 진리를 가르칠 수 있는 성경교사가 있다는 사실은, 바로 그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온전한 교회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준다. 올바른 성경교사의 부재는 종교적인 형식만을 갖춘 믿음 없는 세상 교회로의 전락을 예고할 뿐이다.구약 시대의 성경교사들은 “레위인들”이었다. 레위 지파는 야곱의 딸 디나가 히위인 하몰의 아들 세켐에 의해 더럽혀졌을 때, 지파의 조상 레위가 형제 시므온과 함께 세켐 성읍의 모든 남자를 죽인 일(창 34:25)로 인해 아버지 야곱의 유언에 따라 이스라엘 가운데로 흩어져 사는 운명을 맞게 된다(창 49:5,7). 하지만 출애굽기 32장의 금송아지 숭배 사건 때 민족적인 대배교에 가담하지 않고, 모세의 명령에 따라 “주의 편에 서서” 자기 형제와 친구와 이웃을 가리지 않고 배교한 자들을 과감하게 죽임으로써(출 32:26-29) 그들의 성별과 헌신과 열심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로써 레위인들은 야곱의 예언에 따라 이스라엘 전역에 있는 48개의 성읍에 흩어져 살면서도(민 18:20; 35:1-8, 수 13:14,33), 모세의 예언(신 33:8-10)에 따라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는 지파가 된 것이다. 특히 『그들이 야곱에게 주의 명령들을, 이스라엘에게 주의 율법을 가르칠 것』(신 33:10)이라는 예언에 따라, 이스라엘의 성읍들에 흩어져 살면서 그곳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매우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을 수행하게 되었다.
백성들의 성경교사로서 레위인들의 활약은 여호사밧왕 때 두드러졌다. 『또한 그의 치리 제삼년에는 그가 보내어 그의 고관들, 즉 벤하일과 오바댜와 스카랴와 느다니엘과, 미카야로 유다의 성읍들에서 가르치게 하였더라. 또 그들과 함께 레위인들, 즉 스마야와 느다냐와 스바댜와 아사헬과 스미라못과 여호나단과 아도니야와 토비야와 토바도니야 등 레위인들을 보내고, 그들과 함께 제사장들인 엘리사마와 여호람을 보냈더라. 그들이 주의 율법책을 가지고 유다에서 가르치고 유다의 온 성읍들을 두루 다니며 백성을 가르치니라』(대하 17:7-9). 여호사밧은 아버지 아사왕을 대신하여 왕이 된 후로 이스라엘에 대해 스스로 힘을 길렀는데, 그 방법은 유다의 모든 방벽 친 성읍들에 군대를 배치하고, 바알들을 찾지 아니하고, 주 하나님을 찾으며 그분의 계명대로 행하고, 산당들과 아세라들을 제거하는 것이었지만(대하 17:1-6), 그 모든 것 위에 그가 가장 중점을 둔 것은 백성들에게 주의 율법책을 가르쳐서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실행하는 일이었다. 그 일에 “레위인들”과 “레위인 제사장들”이 쓰임받았으며, 그 결과 주의 두려움이 유다 주변에 있는 땅의 모든 왕국들에 임하여 그들이 여호사밧을 대항해서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고, 오히려 필리스티아인들 중 얼마가 여호사밧에게 예물과 은으로 세를 가져오고, 아라비아인들이 숫양 칠천칠백 마리와 숫염소 칠천칠백 마리를 가져오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대하 17:10,11).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쳐서 지키게 했던 일이 여호사밧왕이 주변국들을 제압하고 심히 강성해지는 첩경이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주의 율법에 헌신』(대하 31:4)하여 『주의 선한 지식을 가르치는... 레위인들』(대하 30:22)의 책무는 포로기 이후 에스라 때도 계속되었다(느 8:7,8). 레위인들이 그 막중한 임무를 소홀히 했을 때 벌어질 일은 민족적 배교와 흩어짐뿐이었는데, 주님께서는 자기 직무에 소홀한 레위인 제사장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는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고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율법을 찾아야 함이니, 이는 그가 만군의 주의 사자이기 때문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 길에서 떠났고 많은 사람을 율법에 넘어지게 하였으며 레위의 언약을 변개시켰도다.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너희가 내 길을 따라 지키지 아니하고 율법을 편파적으로 지켰던 것처럼 나도 너희를 온 백성 앞에서 멸시받고 천대받게 했노라』(말 2:7-9).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의 성경교사들이 율법에서 떠나고 도리어 많은 사람들을 율법에 넘어지게 하는 것을 보고서 그들 “성경교사들”을 저주하신 것이다.
성경교사의 중요성은 초림 당시 예수님께서도 강조하셨다. 주님께서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거듭남에 관해 말씀하셨을 때, 니코데모는 “어떻게 이런 일들이 있을 수 있나이까?”라면서 사람이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일에 대한 강한 의심을 드러냈다. 이런 그를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책망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이런 일들도 모르느냐?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또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래도 너희는 우리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들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는데 하물며 하늘의 일들을 말한다면 어떻게 믿겠느냐?』(요 3:10-12) 초림 당시 유대인들은 “땅의 일들,”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비롯한 모든 구약성경(눅 24:27)에 계시된 예수님에 관한 진리를 믿지 않았는데(행 28:23,24), 이 점은 니코데모처럼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불리며 율법을 가르치던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너희가 모세를 믿었다면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나에 관하여 기록하였기 때문이라』(요 5:46). 이와 같은 자들이 “하늘의 일들”에 속한 “거듭남”을 어떻게 믿겠느냐며 주님께서 책망하셨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선생인 니코데모는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으로서 백성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거듭남”에 관한 “구약성경”의 진리를 모른다는 책망을 들었는데, 과연 “구약성경”에 “거듭남”에 관한 계시가 주어져 있다는 말인가?
시편 22편은 초림 때 메시아께서 고난받으신다는 것과 그 일로 인해 “태어날 한 씨”에 관해서 예언하고 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주께서는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돕지 아니하시며 나의 신음하는 말들을 멀리하시나이까?』(시 22:1) 『개들이 나를 에워싸고 악인의 무리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그들이 내 손과 내 발을 찔렀나이다』(시 22:16). 『그들이 그들 가운데서 내 겉옷을 나누고 내 속옷을 제비뽑나이다』(시 22:18). 시편 22편에는 이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와 주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신 후 벌어진 일들이 예언되어 있는데, 그 마지막 두 구절에서는 십자가 이후에 있을 “거듭남”이 계시되어 있다. 『한 씨가 그를 섬길 것이요, 그것이 주께 한 세대로 여겨지리라. 그들이 와서 태어날 한 백성을 위한 그의 의를 선포하리니 이는 그가 이것을 행하셨음이라』(시 22:30,31). 메시아의 고난에 관한 예언 뒤에 『주께 한 세대로 여겨지』는 『한 씨』, 곧 『태어날 한 백성』을 언급하고 있다면, 이것은 십자가 이후에 『한 세대』를 이루며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들』(요 1:13)이요 『독특한 백성』(벧전 2:9)이라고 불리는 “교회,” 곧 “그리스도인들”을 뜻함이 분명하다. 메시아의 고난을 통해서 태어나는 “씨”에 관해서는, 동일한 메시아의 고난을 다루는 이사야 53장에서도 예언되고 있다. 『그를 상하게 하는 것이 주를 기쁘시게 하였기에 주께서 그를 고난에 두셨도다. 주께서 그의 혼을 속죄제물로 만드실 때[십자가] 그가 자신의 씨를 보리니[거듭남, 교회] 그가 자신의 날들을 늘릴 것이요, 주의 기쁨이 그의 손에서 번창하리라』(사 53:10).
구약성경에는 “십자가의 고난”과 그 뒤 “한 씨가 태어나는” 거듭남에 관한 예언이 같은 장에 동시에 기록되어 있다. 주님께서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율법 선생으로 통하던 니코데모가 그것도 모른다며 책망하신 것이다. 그 씨가 예언대로 태어나 존재하는 현 교회 시대에 성경교사라는 이들의 상태는 어떠한가? 그들은 니코데모보다 나은 것인가? 지금 이 시대는 말로만 십자가를 이야기할 뿐 거듭남도 모르고 거듭나지도 않은 성경교사들로 넘쳐난다. 교회에서 성경을 좀 가르친다고 해서 그 사람이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고전 2:14)도 얼마든지 성경을 펼쳐서 세상 책처럼 가르칠 수 있다.
말하자면 사람의 “영”은 첫 사람 아담이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은 날 죽었다(창 2:17). 그 후로 모든 사람이 아담의 죄성을 물려받아 허물과 죄들 가운데서 “영”이 죽은 채로 태어나는 것이다(엡 2:1). 이처럼 영이 죽어 있는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죗값을 대신 치러 주신 구주로 믿을 때, 성령님께서 그의 혼을 죄의 몸에서 분리시켜(골 2:11) 구원해 주심과 동시에 그 죄인의 “영”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시는(엡 2:5)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신다. 이것이 바로 “영의 거듭남”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영은 거듭났는가? 어떤 교회의 성경교사가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당신은 영의 거듭남에 관해서 누군가에게 성경을 펼쳐서 가르쳐 본 적이 있는가? “거듭남”이라는 기본도 모른 채 성경을 가르치겠다고 나선 사람은 “구원”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가르치겠다고 나선 것과 같다. 『육신으로 난 것은 육이요, 또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요 3:6)라는 말씀을 기억하라. 이 말씀을 깨닫고 영의 거듭남에 대해 가르치지 못한다면, 당신은 주님께서 부르신 성경교사가 아니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