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국어 성경”에 대한 예수님의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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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4년 08월호>
성경은 그 안에 기록된 “살아 있는 말씀”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능력이 있어 양날이 있는 어떤 칼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 그리고 관절과 골수를 찔러 가르고 마음의 생각들과 의도들을 판별하느니라. 그 어떤 피조물도 그분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나니, 오직 만물이 우리가 회계해야 하는 그분의 눈 앞에 벌거벗은 채로 명백히 드러나게 되느니라』(히 4:12,13). 당신은 이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 어떤 생각이 드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다,” “능력이 있다,” “찔러 가른다,” “판별한다”는 표현에 대해서 드는 생각은 무엇인가? 이와 같은 말씀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문자 그대로 “살아 있어서” 움직일 수 있고, 발견하고 알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위의 말씀은 “살아 있는 인격”으로서의 성경을 가리키는 것이며, 그렇기에 13절은 그 말씀을 가리켜서 『그분』(his, him)이라는 인칭대명사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만물은 살아 있고 능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곧 『그분의 눈[the eyes of him]』(히 4:13) 앞에 벌거벗은 채로 명백히 드러나 있다. 하나님께 눈이 있으시듯이 성경에도 “눈”이 있다. 성경은 눈앞에 있는 것을 보고 판별하는 능력이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의 생각들과 의도들을 판별』(히 4:12)하는 것이다. “주님의 눈”이 어느 곳에서나 악한 자와 선한 자를 살피시듯이(잠 15:3), “말씀의 눈” 또한 그분께 다가오는 자들의 마음을 살핀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그 말씀 역시 우리를 “읽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을 읽는 사람의 마음의 생각들과 의도들을 그분의 “눈”으로 읽어 내어 판별한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이 이와 같이 “인격체”라는 사실에 대해 “단순한 수사적 표현” 운운하며 많은 이들이 불신과 반감을 표현한다. 그러나 “말씀”을 “인격체”로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누군가에게 자신을 나타내실 때 “말씀”으로 나타내셨음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주께서 실로에 다시 나타나셨으니, 이는 주께서 실로에서 사무엘에게 주의 말씀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음이더라』(삼상 3:21). 구약 시대에 주님은 “주의 천사”로서 나타나셨지만, “말씀”으로도 자신을 나타내셨다. “주님께서 나타나시되 그분의 말씀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이 명백한 “성경적 사실” 앞에 반기를 들지 말라! 주님께서 살아 계시듯이 그분을 나타내는 말씀 또한 살아 있어야 한다. 말씀이 살아 있지 않다면 『살아 계신 하나님』(신 5:26)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인격체”로서 제시되는 일은 신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첫째, “로마서 9:17,18”이다. 『성경이 파라오에게 말하기를 “이 목적을 위하여 내가 너를 세웠으니 이는 내가 너에게 나의 능력을 보이고 또 내 이름이 온 땅에 선포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자비를 베푸시고자 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또 원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출애굽기 9:16에서 파라오에게 이 말씀을 하신 분은 『주』(출 9:13)이시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성령의 영감을 받아 『주』를 『성경』으로 바꿔서 기록했으며, 그 『성경』을 『그분[he]』이라고 지칭함으로써 히브리서 4:12,13과 마찬가지로 “인격체로서의 성경”을 강조한다.
둘째, “갈라디아서 3:8”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하실 것을 미리 보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파하기를 “네 안에서 모든 민족이 복을 받으리라.”고 하였느니라.』 창세기 18:18과 관련된 이 말씀은 『주』(창 18:17)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것인데, 사도 바울은 로마서 9:17처럼 여기서도 『주』를 『성경』으로 바꿔서 기록했다. 『주』와 『성경』을 동일시하는 이러한 기술법은 『주』와 『성경』을 “동일한 인격체”로 계시한다. 이뿐 아니라 우리는 『성경은... 미리 보고』라는 표현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눈”(히 4:13)이 있음을 또다시 확인하게 된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하나님 자신”을 동일시하시며, “말씀”으로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성경을 읽을 때 사실상 우리는 “그 말씀들로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그런 책이다.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당신은 하나님을 더 자주 만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자신을 나타내시고 “말씀”으로 사람을 만나 주시는 분이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말씀』께서 사람을 만나러 오신 한 위대한 사건이 저 팔레스타인 땅에서 있었다. 『“보라, 한 처녀가 잉태하여 한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해석하면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라』(마 1:23).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 관한 말씀으로, 사도 요한은 이렇게 오신 『임마누엘』이 곧 『말씀』이시라고 그분의 정체를 밝혔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느니라. 그 말씀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느니라. 만물은 그에 의하여 지은 바 되었으며, 이미 지음받은 것 가운데 그가 없이 지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더라』(요 1:1-3).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므로,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으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은 인간이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주목하여 살필 수 있었으며, 손으로 직접 만졌던 『생명의 말씀』(요일 1:1)으로서, 하늘에서 증거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한 분이시다. 『이는 하늘에서 증거하시는 이가 세 분이시니,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시요, 이 세 분은 하나이심이라』(요일 5:7). 이 『말씀』께서 육화되어 지상에 나타나셨을 때 “사람”으로서의 삶은 화려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목수의 아들』(마 13:55)로 알려지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 자신 또한 목수이셨다. 『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와 요세와 유다와 시몬의 형제인 목수가 아니냐?』(막 6:3) 이와 같이 매우 평범한 인생을 사는 동안 주님께서 일상적인 언어로 사용하신 것은 “시리아어”였다. 주님께서 안드레의 형제 시몬을 만났을 때 그에게 지어 주신 이름 “게바”는 “시리아어”였다. 『그리하여 그가 시몬을 예수께 데려오니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너는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 너를 게바라 부르리라.” 하시니 그것을 해석하면 돌이라』(요 1:42). 또한 주님께서 회당장의 딸을 살리실 때 사용하신 “탈리다쿠미” 역시 “시리아어”였다. 『그 소녀의 손을 잡으시고 “탈리다쿠미.”라고 말씀하시니, 이를 해석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하심이라』(막 5:41). 이뿐 아니라 갈보리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하신 말씀 역시 “시리아어”였다. 『제구시에 예수께서 큰 음성으로 소리지르며 말씀하시기를 “엘로이, 엘로이, 라마 사박타니.” 하시니, 해석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이더라』(막 15:34). 숨을 거두시기 전에 정신이 꺼져 가시는 가운데 나온 말씀이라면 그것은 평상시에 늘 사용하시던 언어였음이 분명하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사용했던 이 시리아어가 신약성경의 사복음서에 기록될 때는 코이네 헬라어로 번역되어 기록되었다. “호 테오스 무, 호 테오스 무, 에이스 티 메 엥카텔리페스(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유대인으로 오셔서 유대인들의 정통 언어인 히브리어를 사용하시지 않고 시리아어를 사용하셨다는 사실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말씀을 전하심에 있어 특정 언어에 국한되지 않으셨음을 보여 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지상에서 “시리아어”로 말해진 후 “헬라어”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히브리어”로 하신 말씀도 “헬라어”로 번역되어 기록되었다. 『우리가 모두 땅에 엎드렸을 때 한 음성이 내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는데 히브리어로 말씀하시기를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걷어차는 것이 네게 고통이라.’ 하시기에』(행 26:14). 따라서 『말씀』이신 분의 “말씀들”은 “시리아어”로도 주어지고 “히브리어”로도 주어졌으며, 그 모든 말씀들이 “최초의 원본”에 “헬라어”로 “번역(!)”되어 기록된 것이다. 이 점은 『말씀』께서 자신을 “말씀”으로 계시하심에 있어서 특정 언어에만 국한되지 않으심을 “성경적으로” 매우 분명하게 보여 준다 하겠다.
그렇다면 “구약 시대”에 “선지자들”을 통해서 “히브리어”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다가올 영광을 미리 증거하셨던 『그리스도의 영』(벧전 1:11), 곧 성령님께서는 그 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계시하실 때 어떻게 역사하셨는가? 오순절에 “사도들”은 성령님으로 충만해져서 “다른 방언들”로 말하기 시작했다(행 2:4). “시리아어”를 썼던 “사도들”이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천하 각국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인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발설하게 하신 대로』(행 2:4) 그들이 태어난 곳의 “고유 언어”로 말씀을 전파했던 것이다. 『그때 이 소문이 퍼지자 무리가 함께 모여 혼란이 생겼으니 이는 각 사람이 자기 나라 말로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라. 그러자 그들이 모두 놀라고 이상히 여겨 서로 말하기를 “보라, 말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그런데 어떻게 해서 우리 각 사람이 우리가 태어난 곳의 고유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듣게 된단 말인가?』(행 2:6-8) 그때 당시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파대인과 메데인과 엘람인과, 메소포타미아, 유대와 캅파도키아, 폰토와 아시아, 프루기아와 팜필리아, 이집트와 쿠레네에 가까운 리비아의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에서 온 타국인들, 즉 유대인과 유대교로 개종한 자들과 크레테인과 아라비아인들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언어로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말하는 것을 듣고 있도다.』라고 했는데(행 2:9-11), 말하자면 “사도들”을 통해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모국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최초의 원본”을 기록하는 데 사용되었다는 히브리어와 헬라어에 국한되지 않고 각 민족의 “모국어”로 전파되어 왔다. 『말씀』께서 사용하신 “시리아어,” “히브리어”와, 그 『말씀』이신 분을 성령님께서 증거하시는 데 사용된 민족들의 “고유 언어”는 누군가의 “모국어”이다. 『말씀』께서는 각 민족의 모국어로 번역된 성경으로 그분 자신을 전파하셨고, 그 성경으로 혼들이 구원받아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딤전 2:4). 하나님의 말씀은 특정 언어에 매이지 않는다(딤후 2:9). 당신의 손에 들린 바로 그 <한글킹제임스성경>이 『말씀』께서 관심을 두시는, 당신의 “모국어 성경”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