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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을 흉내낸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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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3년 06월호>
오늘날 기독교에서 “영성”이란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영성을 회복하자, 영성을 계발하자, 영성 훈련 등등의 말들이 언제부터인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더니 어느새 기독교 신문, 잡지, 논문, 수련회, 강단 등을 가득 채워 버렸다. 한편에서는 신비주의적인 영성 훈련이 개발되어 가고 있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개인적인 신앙 경건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어느 편에서는 기독교 공동체 속에서의 행실에 대한 과정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 도대체 영성이란 말은 어떻게 정의내려야 하며, 어떻게 그 어휘를 신학적으로 정립해 나가야 할 것인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영성” 이란 말은 성경적인 용어(Biblical term)도 아니요, 그리스도인의 용어(Christian term)도 아니라는 것이다. 마치 카톨릭이란 용어가 비성경적이듯이 이 영성이란 용어도 비성경적인 용어이다. 그러므로 이 용어가 어느샌가 기독교계에서 널리 쓰이게 되었지만 그 정확한 의미와 방향을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글에 제시된 문제의 자료들은 기독교 월간지 「그말씀」 1993. 5월호에서 특집으로 다루고 있는 「설교자의 영성」 코너에 게재된 저명한 목사님들의 글에서 뽑은 것이다.
먼저 장신대 오성춘 교수는 「기독교 영성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기독교 영성이란 단순한 영적인 성품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말하기를 기독교 영성은 어떠한 위대한 정신을 내면 세계로 받아들임도 아니요(p.135), 인간이 먼저 성결해져야 하나님께서 회복하신다는 인본주의적 영성도 아니요(p.136), 하나님과 교통을 회복하기 위해 영을 살리는 웟치만 니적인 영성도 아니라고 말하면서, 기독교 영성을 삼위일체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삼위일체론적 영성이란, 하나님께서 우리 내면에 심어 놓으신 하나님을 갈망하는 씨앗을 개발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며, 그 분이 명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성부론적 영성,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모델로 따라 사는 기독론적 영성,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이루어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구현(삶의 과정)인 성령론적 영성으로 정의된다(p.138).
이 말은 우리에게 상당히 설득력있게 들리며, 하나님 중심의 영성을 정확하게 설명해 주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이러한 이해의 관점들이 칼빈주의적 후천년체계에 맞춰진다는 점이다. 그는 특히 성부론적으로 영성을 정의하면서,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를 부르시는 소명에 응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삶”이라고 말한다(p.137). 그러나 그가 주장하는 이 소명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이 명령을 후천년 체계에 맞추어 모든 인간을 사랑하는 사랑의 삶,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을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자연으로 회복시키는 삶, 이 사회 속에 정의를 구현하는 삶이라고 설명한다(p.137).
칼빈주의의 커다란 모순점 중 하나는 하나님의 주권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도 그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소명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데 있다는 후천년주의 체계와 연결된다는 점인데, 오성춘 교수는 이 글에서 이러한 모순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더우기 이러한 기독교 영성의 요소들을 설명하면서 종교적 요소, 영적인 요소, 윤리적인 요소로 구분하여, 하나님을 찾는 것과 그와 만나는 것, 그리고 올바른 실천이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하는 한편,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요 수단으로써 골방훈련, 성도의 교제, 공동훈련, 참여와 봉사 등을 제시한다. 이러한 훈련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선 그 분의 형상으로 우리를 바꾸어가신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을 뜻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른다는 것인가? 히브리서 1:3에 제시된 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인데 이러한 방법대로 훈련을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인가?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서 이러한 방법들을 사용한다. 골방훈련을 한답시고 수십 일씩 금식을 하며 몇시간씩 기도하고, 철야기도와 새벽기도를 밥먹듯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위해서 아침에 목욕재개하고 Q.T.를 하며 명상한다. 이러한 가운데 떠오르는 생각을 성령이 주시는 것으로 간주한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서 공동훈련을 강조한다. 많은 교회와 선교 단체에서는 하나님을 만나고 능력을 받아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대규모의 집회와 수련회 등을 개최한다. 그들은 수만 명 모인 것을 자랑하고, 최대 인파를 즐거워하며 그 안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믿는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서 성도의 교제, 즉 코이노니아를 아름답게 이루며, 사회 참여와 봉사, 사랑의 실천 등을 강조한다.
코이노니아를 강조하는 대표적인 사람은 아마도 어거스틴일 것이다. 계명대 이상훈 교수는 교회사를 통해 나타난 영성있는 설교가로서 어거스틴을 소개하며, 그가 주장했던 공동체 속에서의 영성을 말한다(pp.139-147). 어거스틴은 수도원이라는 격리된 사회 속에서 엄격한 규칙을 정해 공동체 생활과 개인기도 시간을 철저히 지키도록 하였다. 이 “함께” 사는 사람들은 세상 속에서 성공적으로 자신을 지키는 비결을 찾아 그것을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어거스틴은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 성령의 역사하심을 찾기 위하여 공동체란 미명 하에 세상과 격리된 수도원과 그 안에서 엄격한 규칙을 따르는 생활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 공동체의 “하나됨”을 추구 하였는데(요17:21), 그의 관심은 진리 안에서의 하나됨이 아니라, 규율적인 공동체 안에서의 하나됨이었다. 그러므로 교회에 대한 그의 관념도 진리와 순결이 아니라 “연합”과 “세력”이었다. 그는 카톨릭이라는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자를 이단으로 정죄하여 수많은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을 죽였던 사람이다. 결국 그의 영성은 “카톨릭 공동체” 안에서의 영성일 뿐이다.
오늘날도 이러한 어거스틴의 주장에 따라 공동체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코이노니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고, 또 성경 지식의 증가와 덕을 세움을 체험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 있어서 코이노니아는 종종 서로 빵을 떼며 친교하는 모습을 통한 격이 없는 “하나됨”으로 묘사된다. 대천덕 신부(예수원)는 「성령충만의 두 가지 역사와 코이노이아」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모든 것은 성령의 코이노이아란 표현과 성체성사 안에 함축되어 있는데, 신자들은 주님의 만찬을 통하여 떡과 포도주를 나누며 예배에 참여하고 그리스도를 함께 나누게 됩니다”(p204). 하지만 성경 어느 곳에 성체성사 속에 성령이 임한다는 구절이 있는가? 사도행전 2장의 빵을 떼는 것은 성체성사가 아니다. 카톨릭 신부들은 성체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하며 공동체를 이루어 하나가 된다고 믿는데, 공동체를 통해 성령이 임한다는 것은 순전히 카톨릭적 사고 방식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개인이 하나님을 영접할 때 일어나고(요1:12, 3:16), 말씀을 통해서 개인의 영이 주님과 교제하며, 각 개인이 의지를 사용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마16:24).
그러나 또한 개인적인 영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밀실에서의 기도와 성령 충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데, 은성 수도원의 엄두섭 원장은 「설교자의 영성부재와 필요성」에서 신비주의적 목회자, 수도사들을 영성있다고 칭찬하면서 “한국의 영성인(靈性人)인 이현필은 지리산에 들어가 갈밭 속에서 쑥을 뜯어 먹으면서 몇 해 동안 엎드려 기도하며 영성을 길렀다. 이집트 사막의 수도 교부들인 성 안토니, 성 마카리어스 등은 깊은 사막에 들어가 일생을 보내면서 모래와 하늘의 별밖에 보이지 않는 그 속에서 영성을 길렀다. 그곳은 실로 영성이 무르익은 지대였다. 그들은 서로 만나면 “웁시다. 웁시다”하면서 언제나 무릎에 수건을 펴놓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라고 말한다(p152). 과연 수도원장다운 말씀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리없는 외침에 응답하지 않으신다(요4:24; 히11:6). 마음을 비운다고 무조건 성령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ㄷ. 오히려 그곳은 악령으로 채워 질 수 있다(눅11:24-26). 이러한 영성 운동은 16세기 로욜라(예수회)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신비주의자로서, 사탄의 힘을 빌어 혼적(魂的) 능력을 계발하여 신비적인 능력을 발휘하면서 그것을 성령의 능력으로 속였던 자이다. 방언(현대의 많은 교회에서 들을 수 있는 이상한 소리) 훈련도 카톨릭 예수회에서 나온 것이다. 명상과 금식과 기도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마음을 비우게 한 다음, 혼의 잠재 능력을 사용해서 기적을 행하기도 하고, 또 거기에서 깊은 감동(사실은 감정)을 얻는다. 최근에는 경배와 찬양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영성 훈련이 등장하게 되었다. 카리스마적 은사주의자들에 대해선 언급할 필요조차도 없다. 그들은 영성은 곧 성령 충만이요, 성령충만은 성령의 은사요, 은사는 방언부터라고 말하는 자들이다(pp.156-163, 조용기 목사, 「은사와 영성개발」).
참여와 봉사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물뿌리는 무천년주의자들이 아닌가? 칼빈주의적 후천년주의자들이 아닌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 분의 의”가 되어버린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사회 속에서의 역할, 사회 참여, 세상에서의 영향력, 그리고 사회 정의 등을 부르짖는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영성이 될 수도 있고, 영성을 이루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그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참다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니, 즉 그 분이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라』(요6:29)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을 위해서 간구하지 않으셨다(요17:9).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세상에 속한 각 사람들의 구원일 뿐이다(요3:16). 세상이 아름답게 변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재림을 하신 후 천년 기간에 펼쳐지는 일이며(계 20:1-6; 사 11:6-9), 그것은 우리에게 맡겨진 일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칼빈주의적 후천년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이 아닌 것이다.
자, 영성(靈性)이란 말을 정의해 보자. 영적인 성품인가? 성령충만의 외적인 은사인가? 사회적 책임인가? 아니면 공동체 속에서의 성령의 내주하심인가?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관점으로 각자의 설명을 하고 있음을 살펴 보았다. 왜 이렇게 다양한 해석이 나와야 하는가? 그것은 서두에서 말했듯이 이 용어가 성경적 용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럴듯한 말에다 개념을 붙여서 설명하려고 하니 그런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영성이라는 말에서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 말하려고 한다면 “경건”을 말해야 할 것이다. 경건에 대해서는 디모데전서에서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경건은 선행과 관계되며(2:10) 육신적이지 않고(3:1-13), 생명에 이르는 지식, 즉 좋는 교리와 관련이 있다(4:6-8). 특히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과도 관계가 되어있는데, 성경은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경건의 신비”(3:16)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이시다(히1:3). 그러므로 경건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다. 경건(godliness)이란 말은 그자체가 ‘하나님을 닮는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마지막 날에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몸으로 변하게 된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살 동안 우리는 영적으로 그 분을 닮아가야 한다. 이것은 육신적인 훈련이나 혼적인 계발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마음을 비우거나 공동체에 참여한다고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사회참여를 하거나, 봉사를 한다고 되는 것도 결코 아니다. 비록 이 중 어떤 것이 경건의 결과 중 하나는 될 수 있을지 모르나, 그 수단은 되지 않는다.
참다운 경건이란 하나님의 진리의 지식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온전한 하나님의 진리(말씀)를 배격한 자들에게는 참다운 경건이 따르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하셨다(요4:24). 거듭난 사람, 즉 성령이 그 안에 거하는 사람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진리의 말씀을 깨달아 알 때, 그 말씀이 그의 속에서 살아 움직여서 경건을 이루게 되고, 성령충만하게 되어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또한 그는 지체들을 섬기고 돌아보아 그들도 경건에 이르도록 격려해 주며, 협력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게 된다.
애매모호한 영성이란 말로 경건의 지식을 가리지 말라. 영성에 대해 허탄히 말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자기들의 교리를 내세우려고 애쓰는 모습을 본다. 그들이 제대로 이야기하려 한다면 차라리 경건에 대해서 이야기 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그들이 그들의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로 돌리리라』(딤후4:4),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리니, 이런 자들에게서 돌아서라』(딤후3:5). 『비속하고 허황된 말장난과 거짓되이 지식이라고 일컬어지는 반론을 피하라. 이것을 (진리로) 공언하는 몇몇 사람이 믿음에 관해서는 정도를 벗어났느니라』(딤전6:20,21).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