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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월”에서 “증오”로 변한 이스라엘 - 이란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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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6년 04월호>
“미국-이란 전쟁”이 전면전 양상으로 치닫고 있는 현 시점에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반세기쯤 전만 해도 이스라엘과 이란은 “우방”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돈독한 관계였다. 이란은 이슬람권 국가들 가운데서는 터키 다음으로 빠르게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고(1950), 수도 테헤란 한복판에 이스라엘 “대사관”을(주변국 눈치 때문에 곧이곧대로 “대사관”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지만) 뒀던 나라였다. 경제적 협력도 활발하여 많은 이스라엘 사업체가 이란에서 성업했고, 기술자들은 이란의 인프라 구축을 도왔다.이스라엘과 이란, 이 둘 사이에는 심지어 군사적인 협력도 있었다. 이스라엘은 이란에 무기를 수출했고, 양국은 각자의 장점인 “군사 기술”과 “오일 머니”의 시너지를 통해 첨단 탄도미사일을 공동으로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기도 했다. 제4차 중동전쟁(1973) 당시 아랍 국가들이 석유 수출 중단 조치를 통해 이스라엘을 말려 죽이려고 했을 때, 이스라엘의 탱크와 전투기가 멈춰 서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란의 석유 덕분이었다.
양국 간의 좋은 관계는 지정학적 이해관계에 의해 형성된 것이었다. 우선 건국(1948)과 동시에 국경을 둘러싼 아랍 국가들로부터 존립을 위협받던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생존을 위해 그 밖의 국가들과 손잡을 필요가 있었다. 이스라엘의 국부(國父)인 벤구리온 총리는 이를 “주변부 동맹”(Alliance of the Peri- phery)이라는 이름으로 구체화했다. 아랍 국가들의 포위망 너머 반대편에서 그들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터키, 이란, 에티오피아 등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하는 외교 전략으로, 쉽게 말해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것이었다.
아랍 민족주의 색채를 띤 국가들을 견제해야 했던 이란 입장에서도, 이스라엘이 내민 손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덧붙이자면 이란은 아랍 국가가 아니다. “아랍 국가”란 “아랍어”를 사용하는 “아랍인”이 다수인 국가를 말하는데, 이란은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페르시아인”이 과반 이상이다.) 물론 다른 “이슬람 형제들”의 반발이 있었으나, 티를 내는 것만 자제하면 그들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랍 국가들로서는 확실한 명분도 없는데 “주적” 이스라엘을 뒤에 두고 이란을 치러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던 것이다.
둘 사이의 “물밑 협력” 관계는 쿠데타(1953)를 통해 본래 입헌 군주국이었던 이란을 절대 왕정 체제로 바꿔 놓은 이란의 “샤”(페르시아어로 “왕”을 뜻함),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의 치세에서 한층 깊어졌다. 쿠데타의 발단은 민족주의자 총리 모사데그가 본래는 이란에 들어온 영국계 회사가 운영하고 있던 석유 산업을 국유화하는 “반(反)제국주의적” 정책을 폈던 데에 있었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정책에는 자유세계의 강력한 보복성 제재가 뒤따를 수밖에 없었고, 석유가 있어도 팔 수가 없게 되자 이란의 경제는 파탄이 났다. 이때 미국과 영국의 정보기관은 샤에게 접촉하여 쿠데타를 종용했다. 혹 총리가 소련과 결탁하여 문제를 타개하려 들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샤는 처음엔 이를 거절했으나, 여론의 악화를 견디다 못한 총리가 급기야 비상대권을 선언하면서 샤의 권한까지 빼앗으려 들자 동의의 뜻을 전했다.
미국과 영국의 도움으로 쿠데타에 성공한 샤는 이후로도 철저한 친미노선을 걸으며 권력기반을 확고히 했다. 그는 이윽고 “백색 혁명”(1963)이라는 서구식 근대화 개혁을 단행했는데, 이는 문맹 퇴치, 사회 기반 시설 구축과 같은 복지의 영역으로부터 여성의 참정권 부여, 국영 기업의 민간 매각, 토지 개혁 등의 굵직한 정치, 경제적 영역까지를 아우르는 대개혁이었다. 이 개혁의 산물은 사람들이 흔히 회자하듯 “테헤란 도심에서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들이 오픈카를 몰던” 자유롭고도 풍요로운 이란이었다(물론 이것은 6,70년대의 이란이다). 석유 매장량만 해도 세계 3,4위를 다툴 정도로 엄청난 자원 잠재력을 가진 나라가 미국의 호감을 살 만한 일만 골라서 했으니, 당시 국제 정세상 그와 같은 눈부신 발전은 이미 예견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백색 혁명”은 단순한 근대화 혁명이 아니라, 이란의 근간을 뒤흔들겠다는 샤의 원대한 포석이기도 했다. 샤가 꿈꿨던 이란은 성직자들의 눈치를 보면서 후진적 사회에 머무르는 “이슬람 국가”가 아니었다. 그는 그 옛날 코레스 대왕 치세에서 중동 전체를 호령했던 “세속 왕정” 페르시아의 영광을 재현하기를 원했다. “백색 혁명”의 핵심이라고 할 만한 토지 개혁이나 교육 정책 등은 바로 그 영역에서 기득권을 쥐고 있던 이슬람 성직자들로부터 그것을 빼앗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실제로 샤는 “이슬람교가 아닌 페르시아 제국이 바로 이란의 뿌리”라는 인식을 대중에게 각인하고자 하는 작업을 착착 수행해 나갔다. 이란에서는 옛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페르세폴리스로 세계의 정상들을 초대하여 제국 건국 2,500주년을 기념하는 성대한 행사가 열리기도 했고(1971), 수백 년간 사용해 오던 달력 체계인 “이슬람력”(마호메트의 메카 성지순례 기준)이 폐지되고 코레스의 즉위를 기점으로 하는 “제국력”이 도입되기도 했다(1976).
바로 이때, 서두에서 본 것과 같은 이스라엘과 이란의 “밀월 관계”는 “큰형님” 미국이 흐뭇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절정에 달했다. 이란이 이슬람교가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페르시아 제국 시대로 회귀하려 했을 때 이스라엘과 가까워지고 또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는 것은 성경을 아는 우리에게는 참으로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셨던 『너를 축복하는 자들에게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리라. 네 안에서 땅의 모든 족속들이 복을 받을 것이라.』(창 12:3)라는 약속이 이스라엘에게 계승되었음을 염두에 둔다면, 샤의 “백색 혁명”은 이란 입장에서는 복을 받을 수 있는 첩경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란의 종교계는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그들은 빠른 경제 성장의 혜택에서 소외된 빈곤층, 그리고 민주적 공화정을 열망하던 지식인층과 연대하여 샤를 압박했다. 그 중심에 있었던 “아야톨라”(이슬람 율법에 대한 유권해석 권한이 있는 시아파의 최고위급 성직자를 부르는 칭호) 루홀라 호메이니는 쿰의 한 신학교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이 정권은 이슬람 그 자체와 종교적 가르침의 존재를 대적합니다. [이 정권과 밀월 관계에 있는] 이스라엘은 이 나라에 코란이 존재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우리와 여러분, 그리고 국가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러분의 경제를 장악하고, 무역과 농업을 파괴하고, 여러분의 재산을 빼앗기를 원합니다... 가난에 찌든 우리 국민들의 고생으로 만들어진 부를 외국의 은행들에 채워 넣은 이 정부, 하늘 높이 솟은 궁전을 세우면서도 국민들을 평안하게 해 주지 못하는 그들은, 우리의 자원을 가지고 그들과 이스라엘의 호주머니를 채우려 합니다. 참으로 기생충과 같은 자들이 아닙니까?”
샤를 폭군이자 기생충으로 묘사한 이 연설을 계기로 호메이니는 체포되었고, 이는 대규모 반정부 폭동으로 이어졌다(1963). 호메이니는 추방을 면치 못하고 터키와 이라크 등 타국을 전전하게 되었지만,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오히려 나날이 커져만 갔다. 정부는 언론을 통제하여 그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막아 보려 들었으나, 카세트테이프에 녹음되어 밀수된 호메이니의 메시지는 이란 전역에 있는 수만 개의 모스크를 통해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결국 우리가 군사 정권 시절에 겪었던 것과 유사한 격동의 과정 끝에 팔라비 왕조는 무너졌고, 호메이니는 이란으로 돌아와 이슬람 성직자들이 지배하는 이슬람 원리주의 국가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이란 이슬람 혁명”(1979)이 성공한 것이다. 민주 공화정이 세워질 줄 알고 혁명에 가담했던 지식인층은 뒤늦게 자신들이 어리석었음을 깨달았지만, 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죽음, 침묵, 혹은 망명뿐이었다.
호메이니 체제 아래에서 공식 국호를 이란 “이슬람” 공화국으로 정한 이란은 서구 사회로부터 온 모든 문화적, 경제적 영향을 몰아냈고, 그간 자신들을 약탈해 왔던 “작은 사탄,” 이스라엘을 지도상에서 지워 버리는 것을 국가적 과제로 삼았다(“큰 사탄”은 미국이다). “코란대로 믿는 사람들”인 그들이 이스라엘을 향한 적개심을 불태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너희는 신자들을 향해 가장 맹렬한 원한을 가진 자들은 유대인과 다신교도들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코란> 5:82).
그러나 이스라엘을 치겠다는 이란의 뜻은 쉽게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두 나라는 국경을 맞대고 있지도 않을뿐더러, 대부분 수니파인 주변의 아랍국 역시 시아파의 맹주로 부상한 이란에게 호의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란의 존재는 여전히 세속 왕조의 통치가 이어지던 국가들에게 상당한 부담이기도 했다. 이란의 영향력이 커지면 자국에서도 똑같은 이슬람 혁명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판단하에, 아랍의 왕조들은 이란을 견제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호메이니가,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이란 최고 지도자가 된 알리 하메네이(1989)가 선택했던 전략은 “대리전”이었다. 이란은 80년대 초 레바논의 무장 정파 헤즈볼라의 창설에 깊이 관여한 이후로,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 이라크의 시아파 민병대, 예멘의 후티 반군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대리할 무장 세력들을 키워 내어 “시아파 벨트”를 형성했다. 90년대 초에는 종파가 다를지라도 반(反)이스라엘이라는 목표를 공유하는 하마스도 이 “연합”의 일원으로 합류했다. 목숨을 건 테러 행위도 불사할 이 광신도들에게 전폭적으로 자금과 무기를 대줌으로써, 이란은 앙숙인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 등의 수니파 패권국이 함부로 할 수 없는 힘을 갖추는 한편,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최근 이스라엘이 미국과 공조하여 하메네이를 포함한 이란 수뇌부를 폭사시킨 배경에는 이와 같이 수십 년간에 걸쳐 형성된 깊은 원한 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그가 거친 사람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대적할 것이요,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대적할 것이라.』(창 16:12)라는 예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는 “이스마엘의 씨”(아랍인)라면 몰라도, 그 뿌리가 완전히 다른 “페르시아의 후예” 이란인들은 “투쟁적인 역사”에 휘말릴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들이 아랍인들과 “같은 생각”(이슬람교)을 공유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들이 입으로 떠드는 것처럼 진정한 “평화”를 그 땅에 가져오고 싶거든,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 행위를 중단하고 그 관계를 정상화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이 일은 말처럼 쉽게 되지 않을 것이다. 현재의 이란이 이스라엘과의 관계에 있어 막장에 이른 것으로 보이는 것은, 지금 예언의 시간표가 “교회의 휴거”를 가리키고 있고, “온 세상”이 적그리스도를 따르며(계 13:3) 이스라엘을 짓밟을(계 11:2) “대환란”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B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