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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나의 목자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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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6년 01월호>
미국인들은 양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당신이 양과 목자에 관해 무언가를 배우고 싶다면, 그것을 알기 위해 기독교 대학에 가지는 않을 것이다. 양은 역사적으로 중요하다. 침례인 요한은 예수님께서 침례받으실 때 『보라,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요 1:29)라고 말했다. 이 말씀 그대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며, 그 점이 이사야서에 예언되어 있다. 『그가 억압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여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으니 그가 어린양처럼 도살장으로 끌려가며, 또 털 깎는 자들 앞의 양이 말없듯이, 그가 자기 입을 열지 아니하는도다』(사 53:7).당신은 우리에게 익숙한 구약 성도들 대부분이 “목자”임을 알고 있는가? 아벨,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요셉, 그리고 다윗까지도 모두 목자였다. 이 모든 목자들의 원형이 되시는 분이 바로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주님께서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어 놓으신 선한 목자이시다(요 10:11). 이 양의 목자께서는 도둑이나 강도처럼 다른 길로 양우리에 넘어 들어가지 않고 문으로 들어가신다(요 10:2). 그래서 『그에게 문지기가 문을 열면 양들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러면 그는 자기 자신의 양들의 이름을 불러서 이끌어 내느니라. 그가 자기 양들을 이끌어 낸 후 양떼 앞에서 걸어가면 양들이 그를 따라가나니 이는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알기 때문이라』(요 10:3,4).
내가 양에 관하여 가장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양이라는 짐승이 자기 덩치에 비해 가장 멍청한 포유류 중 하나라는 사실이다. 양들은 멍청하다. 양들은 초장을 스스로 찾을 수 없기에 사람들이 목초지로 인도해 줘야 한다. 그만한 크기의 동물들은 대부분 그렇게 멍청하지 않은데, 일례로 말은 우유 배달 경로를 외울 수 있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그런 말들을 보면서 자랐다. 말이 끄는 마차가 우유병을 싣고 거리를 내려오면, 배달부가 주문한 사람의 집 앞에 멈춰서 병을 현관까지 가져다주곤 했다. 그러면 말은 다음 집으로 이동하는데, 만약 세 집을 건너뛰어야 한다면 어떤 집을 지나쳐야 할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양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개와 고양이는 집에서 320km 떨어진 곳에 버려져도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양은 헛간으로 돌아오는 길조차 찾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우리를 내려다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이 녀석들은 양 같구나!” 왜 그런가 하면 양은 잘 속기 때문이다. 이리가 무리 속에 들어와 서너 마리를 죽일 때까지도 양들은 울지 않는다. 진짜 멍청한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너희는 양과 같다.”라고 하셨다. 이는 어리석은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성경 역본들을 쉽게 수용한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올바른 믿음을 위해 비평하는 일을 싫어하는 모습에서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아시거니와, 요즘에는 거짓된 신앙과 거짓 교리가 해변의 모래알보다 많다. 내가 누군가의 거짓된 믿음을 비판하면, 어리석은 사람들은 오히려 나를 비난한다.
주님께서는 양들이 목자를 따라가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가 자기 양들을 이끌어 낸 후 양떼 앞에서 걸어가면 양들이 그를 따라가나니』(요 10:4). 양들에게는 소위 “군집 본능”이라는 것이 있다. 양 한 마리가 무리에서 이탈하여 길을 잃으면 다치거나 병에 걸린다. 어떤 목자가 내게 말해 준 바에 따르면, 양은 야생동물에게 곧잘 놀라고,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며, 더 푸르게 보이는 울타리 건너편의 풀을 먹으러 가다가 길을 잃기도 한다. 어디선가 들은 듯한 얘기가 아닌가! 대개 그리스도인들도 울타리 건너편의 목초지에, 즉 다른 교회에 더 먹을 것이 있겠다 싶어 그쪽으로 가다가 길을 잃고, 다치고, 병드는 것이다.
양들은 또한 정말 잘 따라 하는 짐승이다. 목동들이 내게 뭐라고 했는지 아는가? 양떼가 들판을 가로지르다가 리더 격인 양이 공중으로 뛰어올라 발뒤꿈치를 차면, 뒤따르던 모든 양들도 뛰어올라 발뒤꿈치를 찬다고 했다. 이런 양들을 도살장으로 데려가는 방법은, 바로 검은 염소 한 마리를 앞세우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염소를 “유다”(Judas)라고 부르는데, 양들은 그 염소를 따라가다가 도살당할 곳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양들은 정말 잘 따라 하는 것이다. 텍사스의 한 목자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본 짐승 중에서 유독 양만이 태어날 때부터 죽을 장소를 찾느라 두리번거립니다.”
양은 또한 변변찮은 짐승이다. 목자들이 양에 대해 말해 준 또 다른 사실은, 양이 스스로를 깨끗하게 할 수 없는 동물이라는 것이다. 다른 동물들은 더러워지면 연못으로 가서 몸을 적시거나, 울타리나 통나무에 몸을 비비고 긁지만, 양은 털 속에 더러움이 배어들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목자가 양을 씻겨 주어야 한다. 알겠는가? 목자가 양을 씻겨 주어야 하는 것이다! 또 다른 사람도 내게 말하기를 “대부분의 양들이 더러워지고 털이 엉켜 붙은 상태에서 깨끗해지려면, 목자가 양들을 데리고 내려가서 씻긴 다음 다시 데리고 올라와야 해요!”라고 했다. 이 말은 솔로몬의 노래 6:6의 『씻는 곳에서 올라가는 양떼』를 떠오르게 한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에서는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님의 피밖에 없다고 노래하는데, 성경을 기록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짐승들에 관해 기록하실 때 그들의 모든 습성을 잘 알고 계셨던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아들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을 것이다. “우리가 저들을 씻겨 주지 않으면, 저들은 결코 깨끗해질 수 없다.” 그러나 불교나 이슬람교, 힌두교, 카톨릭과 같은 세상 종교들에서는 이런 진리를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더러운 걸레』(사 64:6)로 자신을 닦으려다 지옥에 갈 뿐이다.
목자는 초장에서 양을 먹여야 한다. 『그리하여 그들이 식사를 끝마쳤을 때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하시니, 그가 주께 말씀드리기를 “주여, 그러하옵니다. 주께서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아시나이다.”라고 하니,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어린양들을 먹이라.”고 하시니라』(요 21:15). 저 옛날 팔레스타인에서 양을 치던 이들은 양들이 안전하게 잠을 잘 수 있게 막대기와 가시덤불로 울타리를 쳤다. 그 앞쪽에 작은 구멍을 남겨 두었는데, 그것이 “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 자신을 『양들의 문』(요 10:7)이자 『선한 목자』(요 10:11)라고 하셨다. 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양들은 목자를 넘어가지 않고는 울타리에서 빠져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목자는 밤에 문에서 잔다. 이리와 곰이 양들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입구에 가로눕는다. 선한 목자는 자신의 양을 위해 죽을 만큼 양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다윗이 곰과 사자를 물리친 것처럼 목자는 양을 보호한다. 우상 목자는 스카랴서에 언급되는데, 문자 그대로 우상을 숭배하는 목자이다. 삯꾼인 그는 선한 목자와 달리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에 양떼를 버려 둔다. 『삯꾼이 도망치는 것은 그가 삯꾼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양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느니라』(요 10:13). 『양떼를 버려 둔 우상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슼 11:17)
또한 목자는 양과 함께 있는 사람이다. 목자는 양들과 함께 잔다. 양떼와 단둘이 그곳에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외로운 영웅이다. 목자는 목자의 지팡이를 가지고 다니면서, 그것을 뻗어 양을 올바른 길로 끌어오고, 곤경에서 건져 내기도 한다. 목자의 지팡이는 양들이 줄지어 가게 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양들은 때때로 자신이 혼자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으스대는데, 그럴 때 목자는 지팡이로 양을 확 잡아당겨서 바로잡아 준다.
어미 양이 무리를 따르지 않을 때는, 목자가 새끼 중 한 마리를 안고 가 버리는데, 그러면 대개 어미가 따라온다. 새끼 양을 데리고 가 버리는 것은 목자에게 나쁜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의 삶에 재앙이 닥칠 때, 그것은 주님께서 당신에게 원한을 품고 계셔서 그런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이 평생 건강하다가 갑자기 병이 든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화가 나신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어린아이에게 죽음이 찾아온다면, 그것은 당신이 양우리에 붙어 있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때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마귀가 당신을 잡아채 가지 못하게 함으로써 당신을 목자 곁에 계속 머물게 하기 위해서다.
양들은 고백한다. 『주의 막대기와 주의 지팡이가 나를 위로하심이라』(시 23:4). 막대기는 때리는 데 쓰고, 지팡이는 끌어당겨서 대열을 맞추는 데 쓴다. 이와 같은 막대기와 지팡이가 양에게는 위로가 된다. 같은 시편은 또한 이렇게 말한다.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인도하시는도다』(시 23:2). “잔잔한 물이 깊게 흐른다.”라는 격언이 있다. 급류는 빠르지만 얕다. 『주께서 내 원수들의 면전에서 내 앞에 식탁을 마련하시나이다』(시 23:5). 선한 목자는 세상이 아무것도 줄 수 없는 곳에서 양들을 먹이신다. 나는 세상이 아무것도 줄 수 없는 곳에서 식사를 할 수 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노라.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그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으며 그도 나와 함께 먹으리라.』(계 3:20)라고 하셨다. 나는 주님과 함께 먹을 것이다. 나는 내 초장에서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나를 살리는 영양분을 얻는다. 세상은 나의 초장으로 뛰어 들어와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혹자는 “왜?”라고 물을 수 있다. 나는 양이고, 양은 그 입의 모양이 풀을 잘 뜯어먹을 수 있게 되어 있어서, 양이 먹고 난 곳에서는 다른 가축이 뜯어먹을 풀이 없기 때문이다. 미국 서부 목동들은 양들이 지나간 곳에 소가 뜯어먹을 풀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소를 치는 사람들과 양을 치는 사람들 사이에 마찰이 심하다고 말했다.
목자들은 항상 앞에서 양들을 이끈다. 서양인들은 때때로 양들을 뒤따라가지만, 아시아인 목자들은 양들을 이끈다. 그들은 양들을 절대로 뒤에서 몰지 않는다. 이것이 목사의 임무이다. 즉 양떼 앞에서 본을 보이며 앞서가는 것이다. 목자장이신 주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고 돌보되 마지못하여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익을 위하여 하지 말고 준비된 마음으로 하』라고(벧전 5:2) 하셨다.
시편 23:6은 『진실로 선하심과 자비하심이 내 생애의 모든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라고 말씀하는데, 레스터 롤로프는 “선하심”(Goodness)과 “자비하심”(Mercy)을 “주님의 개들”이라고 불렀다. 즉 주님의 개 두 마리가 양인 성도를 평생 동안 따라다닐 것이라고 했다. 목자는 앞에 있지만, 개들은 뒤에서 양들을 줄지어 가게 한다. 당신은 콜리종 개가 양떼를 다루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정말 대단하다! 나는 두세 번 봤는데, 개들이 양떼를 몰아가는 것이 정말 신기했다. 목양견은 어떤 양이 다른 양들을 방해하는지 잘 알고 있다. 개는 그 “문제아” 양을 찾기 위해 여덟 마리에서 열 마리의 등 위를 뛰어넘어 기어코 그 양을 잡아낸다. 그리고 한 마리가 도망치면 쫓아가서 무리 안으로 몰아넣는데, 정말 장관이 아닐 수 없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따른다(요 10:27). 생각해 보라. 오늘이면 좋겠지만, 언젠가 나는 내 이름을 불러 본 적이 없는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게 될 것이고, 나는 주님의 목소리를 단박에 알게 될 것이다.
한번은 어떤 관광객이 팔레스타인에서 목자가 일하는 것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목자는 양들을 부르고 싶을 때면 언덕에 올라가 “메나! 메나!”(Menah! Menah!)와 비슷한 소리를 내었다. 관광객은 목자에게 말했다. “내가 해 봐도 될까요?” 그러자 목자가 말했다. “아니오. 양들은 당신의 목소리에 반응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자 관광객이 “뭐라고 해야 듣는지 알아요. 당신이 하는 걸 봤습니다.”라고 했고, 목자는 “그럼, 한번 해 보세요!”라고 했다. 양들은 저 멀리서 풀을 뜯고 있었고, 관광객은 언덕에 올라가 “메나!”라고 외쳤다. 양들은 고개를 들어 스윽 쳐다보고는 다시 풀을 뜯었다. 그렇게 세 번을 시도해도 안 되자 관광객이 목자에게 말했다. “어디 당신이 하는 걸 봅시다!” 그러자 양치기는 언덕에서 “메나!”라고 다시 외쳤고, 모든 양들이 일제히 일어나 곧장 그에게로 다가왔다. 『내 양들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
교황이 서서 “평화! 평화! 평화!”라고 아무리 말해 봐도, 주님의 양들은 그냥 한번 봤다가 계속 먹기만 한다. 양들은 진짜 목자의 목소리를 아는 것이다. 양들은 “저건 우상 목자야. 난 저자와 엮이지 않을 거야!”라고 말한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알고 계시며, 언젠가 당신의 이름을 부르실 것이다.
한 어미 양이 기형인 새끼 양을 낳고 죽었다. 같은 양무리에서 다른 양도 새끼를 낳았는데, 그 어린양이 죽고 말았다. 그때 목자들은 죽은 어린양의 가죽을 벗겨 기형인 어린양에게 입혀서 살아 있는 어미에게 주었다. 어미 양은 죽은 새끼의 가죽을 입은 기형의 어린양을 자기 새끼처럼 키웠고, 둘 사이의 차이점을 전혀 알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를 쫓아내실 때 그들에게 입혀 주신 것은 짐승의 가죽이었다(창 3:21). 성경은 말씀한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을 위해 계획하지 말라』(롬 13:14). 당신이 저 위 하늘나라에서 하나님 앞에 설 때, 당신은 자신의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고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양가죽”이다.
주님께서는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고 또 구원하려는 것이라.』(눅 19:10)라고 말씀하셨다.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는 “나와 함께 기뻐하자. 내가 내 양을 찾았노라!”라고 말한다. 『집에 돌아와서는 친구들과 이웃들을 함께 불러서 말하기를 ‘내가 잃어버린 양을 찾았으니 나와 함께 기뻐하자.’고 하리라』(눅 15:6). 한번은 어떤 연회에서 한 배우가 일어나 시편 23편을 낭송했다. 모두가 박수를 쳤고, 그는 자리에 앉았다. 그 뒤 늙은 감리교 설교자가 일어나 똑같이 시편 23편을 낭송했다. 늙은 설교자가 낭송을 마쳤을 때, 그 연회장에는 눈시울이 젖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누군가가 그 배우에게 물었다. “저 설교자가 낭송했을 때는 모두 울었는데, 당신은 왜 그렇게 하지 못했나요?” 배우는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단지 그 시편을 알지만, 저분은 목자를 알기 때문이죠!” 바로 그것이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고 또 구원하려는 것이라』(눅 19:10). 당신은 목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가? 주님께서도 당신을 아시는가? 당신은 지금 본향으로 가는 여행길에 있는가? 본향으로 가는 길에 있다면, 당신은 목자이신 주님 품에 안겨 있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당신은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분이 되었다. 이 교회 시대에는 성도가 주님의 일부가 되고, 주님께서도 그 성도의 일부가 되시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그의 몸과 그의 살과 그의 뼈의 지체임이라』(엡 5:30). B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