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묵상 분류
유다 이스카리옷을 저주하신 예수님
컨텐츠 정보
- 393 조회
- 목록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5년 06월호>
표제가 「악장에게, 다윗의 시」로 되어 있는 시편 109편은 자신에게 박해를 가한 사람을 저주하는 “저주의 시”이다. 다윗의 시이기에 다윗이 누군가를 저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본 시편은 다윗의 인격 안에서 말씀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계시하고 있다.『오 내 찬양의 하나님이여, 가만히 계시지 마소서. 악인의 입과 속이는 자의 입이 나를 대적하여 열려 있으니 그들이 거짓말하는 혀로 나를 대적하여 말하였나이다. 그들이 또한 증오의 말들로 나를 에워싸며 이유 없이 나를 대적하여 싸웠나이다. 나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나의 대적들이 되었으나 나는 기도하나이다. 그들은 내게 악으로 선을, 증오로 나의 사랑을 갚았나이다』(1-5절).
시편 109편은 화자 자신의 억울함을 하나님께 하소연하는 부정적인 내용으로 시작한다. 다윗의 인생에서는 사울왕과 시므이, 압살롬, 도엑과 같은 악인들이 그를 대적해서 싸웠지만, 악으로 선을 갚고 증오로 사랑을 갚는 일은 다윗의 역사적인 경험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분의 사랑을 보여 주셨으나(마 23:37,38, 딤전 1:15),원수들은 초림 당시에 선한 일을 행하시며 마귀에게 억압받는 모든 자들을 치유하신 주님의 선하심과 사랑에 악과 증오로 갚았기 때문이다(행 10:38; 2:22,23). 다윗이 그의 대적들을 위해서 기도했던 것처럼(『나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나의 대적들이 되었으나 나는 기도하나이다.』 - 4절), 예수님께서도 그분의 대적들을 위해 기도하셨다.『아버지시여,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눅 23:34). 따라서 본 시편은 다윗의 기도에만 한정되지 않으며, 그 다윗을 뛰어넘어서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되는 시로 인식되어야 한다.
『악인으로 하여금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사탄으로 하여금 그의 오른편에 서게 하소서. 그가 심판받을 때에 정죄받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가 되게 하소서. 그의 날들이 짧아지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다른 사람이 취하게 하소서. 그의 자녀들로 아비 없는 자들이 되게 하시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게 하소서. 그의 자녀들로 계속 유리하는 자들이 되어 구걸하게 하시며 그들의 황폐한 곳들을 떠나 양식을 찾게 하소서』(6-10절).
시편 109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다 이스카리옷을 향해 저주를 퍼부으시는 시로서, 『그의 날들이 짧아지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다른 사람이 취하게 하소서.』(8절)라는 말씀을 사도행전 1장에서 베드로가 인용함으로써 본 시편이 유다 이스카리옷을 대상으로 한 시임을 밝혀 준다. 『형제 여러분, 예수를 붙잡은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에 관하여 성령께서 다윗의 입을 통해 미리 말씀하신 이 성경이 이루어진 것은 당연하도다. 그가 우리와 함께 계수되었으며 이 사역의 한 부분을 담당하였느니라. 그런데 이 자가 실로 불의의 대가로 밭을 샀는데 그후에 곤두박이로 떨어져서 몸의 중간이 터져 그의 모든 창자가 쏟아져 나왔느니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게 되어 그 밭을 그들의 고유의 말로 ‘아켈다마’라고 하니 즉 ‘피의 밭’이라는 뜻이라. 이는 시편에 기록되기를 ‘그의 처소를 황폐케 하시고 그곳에 사는 사람이 없게 하시며 그의 감독의 직분을 다른 사람이 취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음이라』(행 1:16-20).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한 뒤로 나무에 목매달아 자살한 유다는 8절의 예언대로 “그의 날이 짧아졌다.” 이뿐 아니라 그의 사도직분을 “맛디아”가 대신함으로써(행 1:26) 『그의 직분을 다른 사람이 취하게 하소서.』(8절)라는 기도 또한 응답이되었다.
그뿐 아니라 3절의 『그들이 또한 증오의 말들로 나를 에워싸며 이유 없이 나를 대적하여 싸웠나이다.』라는 말씀은 『그러나 이는 그들이 자기들의 율법에 기록된 ‘그들이 나를 까닭없이 미워하였다.’고 한 그 말을 이루려 함이라.』(요15:25)라는 말씀에서 성취되었고, 25절의 『내가 또 그들에게 비방거리가 되었으니 그들이 나를 쳐다보고 그들의 머리를 흔들었나이다.』라는 말씀 역시 『그때 지나가던 자들이 자기들의 머리를 흔들며 주를 모독하여 말하기를 “아하, 성전을 헐고 삼 일 만에 짓는 자여』(막 15:29)라는 말씀에서 성취되었으며, 또한 26절의 『오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오, 주의 자비를 따라 나를 구원하시어』라는 말씀은 『그는 육체로 계시는 날들 동안 자기를 사망에서 구원하실수 있는 분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와 간구를 드렸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두려워하심을 인하여 들으셨느니라.』(히 5:7,cf. 마 26:39)라는 말씀과 상황적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이와 같은 구절들(3,25,26절)이 초림 때 고난을 당하시던 예수 그리스도께 성취되었으니, 이 정도면 시편 109편이 유다 이스카리옷을 저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라는 데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저주는 “초림 때의 유다”와 “대환란 때의 유다”를 향해 있다. 즉 『그의 날들이 짧아지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다른 사람이 취하게 하소서.』(8절)가 초림 때의 유다를 저주한 것이라면, 『악인으로 하여금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사탄으로 하여금 그의 오른편에 서게 하소서.』(6절)는 대환란 때의 유다를 저주한 것이다. 왜냐하면 초림 때 예수님에 의해 『마귀』(요 6:70)요 『멸망의 아들』(요 17:12)이라고 불린 유다 이스카리옷은 대환란 때 『멸망의 아들』(살후 2:3), 곧 마귀가 육화된 “적그리스도”로 등장할 것이고, 바로 이 “짐승”의 오른편에 사탄이 서서 그를 실제적으로 지지하며 그에게 능력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또 내가 본 그 짐승은 표범과 같고, 발은 곰의 발 같고,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자리와 큰 권세를 그 짐승에게 주더라』(계 13:2).
“대환란 때의 유다”는 가난하고 궁핍한 환란 성도들을 저주하기를 좋아할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본 시편에서 그를 역으로 저주하신다. 『이는 그가 자비 베풀기를 기억하지 아니하였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박해하여 마음이 상한 자를 죽이려 하였음이니이다. 그가 저주하기를 좋아하였으니 그것이 그에게 닥치게 하시고 그가 축복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였으니 그것이 그로부터 멀리 떠나게 하소서. 그가 옷을 입듯 저주로 자신을 덮었으니 그것이 물같이 그의 창자 속으로, 기름같이 그의 뼈들 속으로 들어가게 하소서. 저주가 그를 덮는 옷같이 그에게 임하게 하시고 그가 항상 두르고 있는 띠와 같게 하소서. 이것이 나의 혼을 대적하여 악담하는 자들, 곧 나의 대적들이 주로부터 받는 보응이 되게 하소서』(16-20절). 마태복음부터 요한복음까지 사복음서에서는 유다가 누군가를 저주했다는 말씀이 나오지 않는다. 위의 본문에서 유다가 퍼붓는 저주는 대환란 때 적그리스도로서 등장할 그가 『큰 일들과 모독하는 말들을 하는 입』(계 13:5)을 받아 퍼붓는 모독에서 성취가 된다. 『그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대적하여 모독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성막과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모독하더라』(계 13:6). 대환란 때에 유다는 그의 입으로 하늘의 하나님을 저주할 뿐만 아니라 지상에서 하나님을 따르는 환란 성도들을 저주하여 지치게 할 것이다. 『그가 지극히 높으신 분을 대항하여 큰 말을 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성도들을 지치게 할 것이고 또 때와 법을 변경시키려고 생각할 것이라』(단 7:25). 이와 같은 유다에 관해서 본문 7절은 “심판”을 이야기하는데(『그가 심판받을 때에 정죄받게 하시며』), 이 심판 역시 초림 때 이뤄지지 않았으며, 미래의 백보좌 심판에서 유다 자신의 오른편에 있는 사탄과 함께 정죄받아 심판받는 일로 성취가 될 것이다(단 7:9-11,계 20:10-14).
본 시편의 마무리(21-31절)에서 “24-27절”은 유다를 향한 저주에서 벗어나 예수님 자신에 관한 기도로 이루어져 있다.『내 무릎은 금식으로 인하여 약하며 내 육체는 기름기가 부족하나이다. 내가 또 그들에게 비방거리가 되었으니 그들이 나를 쳐다보고 그들의 머리를 흔들었나이다. 오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오, 주의 자비를 따라 나를 구원하시어 이것이 주의 손인 것을 그들로 알게 하소서. 주여, 주께서 그것을 행하셨나이다.』 여기서 『이것이 주의 손인 것을 그들로 알게 하소서. 주여, 주께서 그것을 행하셨나이다.』(27절)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이 하나님에 의해 계획된 것임을 보여 준다(행 2:23). 이 점에 대해서는 선지자 이사야도 『그를 상하게 하는 것이 주를 기쁘시게 하였기에 주께서 그를 고난에 두셨도다.』(사 53:10)라고 예언했다. 시의 결미에서 다윗은 원수들의 저주 가운데서 임하는 주의 복과 박해 가운데서 누리는 즐거움을 구하고 있는데(28절), 대적들에게 닥칠 부끄러움과 수치를 간구하는(29절) 그는, 자신은 무리 가운데서 주님을 크게 찬양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30절). 이유는 『주께서 가난한 자의 오른편에 서시어 그의 혼을 정죄하는 자들로부터 그를 구원하실 것』(31절)이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궁핍해도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구원 가운데 있다면 그 성도는 행복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의 인생은 돈으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구원과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로 채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