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이송오 목사 분류
세 가지 가증한 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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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6년 10월호>
에스겔 8장에는 “주의 성전”에 있으면서도 태양을 향해 경배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온다. 『또 그가 나를 주의 집의 안뜰로 데려오시더라. 보라, 주의 성전의 문에 곧 현관과 제단 사이에 약 이십오 명이 있는데, 그들의 등은 주의 성전을 향하고 그들의 얼굴은 동쪽을 향하였으니 그들이 동쪽을 향하여 태양을 경배하더라』(겔 8:16). 유다 백성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지만 사실은 우상(태양신)을 섬기고 있었던 것이다.하나님께서 가증스럽게 보시는 것들은 사회적으로 범죄라고 규정되는 행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분의 관심사는 우리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증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우상 숭배를 금지하셨다. 십계명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계명도 바로 이 문제에 대한 것이다(출 20:3,4).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의 제2계명에서 자신을 “질투하는 하나님”으로 소개하신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뜻이다. 우상으로 떠받들어지는 조로아스터, 석가모니, 마호메트, 공자 같은 자들은 질투할 수가 없다. 그들은 모두 썩어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질투는 오직 살아 있는 존재만 할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질투할 수 없는 우상들, 곧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은 모두 헛것이다(사 41:29). 즉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경배하면 반드시 마귀가 그 경배를 받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상 숭배를 금지하신 것이다.
거듭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존재를 진지하게 의식하지 않고 생각이 딴 데 있으면서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린다면, 그 가증함은 우상 숭배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예배”는 “제사”를 의미한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에 입각해서 영적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인데, 이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부 바친다. 『너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것이 너희가 드릴 합당한 예배니라』(롬 12:1). 헌신하지 않은 사람, 즉 자신의 전부를 예배에 쏟아붓지 않는 사람은 합당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달리 마귀는 마음 없이 형식만 있는 경배도 받는다. 온갖 무속 신앙이 바로 그러한 것들이며, 그 본산은 바빌론이다. 요한계시록 18:2의 『큰 바빌론이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마귀들의 거처가 되었고 온갖 더러운 영의 소굴이요, 모든 더럽고 가증한 새의 소굴이로다.』라는 말씀은 그 진리를 우리에게 알려 준다. 옛 바빌론에서 탄생한 무속 신앙은 카나안 땅으로 흘러들어갔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카나안 땅의 민족들을 철저하게 섬멸하고 그들과 관계를 맺지 말 것을 명하신 것이다(신 20:16-18).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정복 전쟁 이후 카나안 땅의 우상 숭배자들을 멸하라는 명령에 순종하지 않음으로써 배교하고 말았다. 그들은 카나안 땅에서 계속된 전쟁에 지친 나머지 싸우기를 포기하고 그 땅의 민족들과 혼인 관계를 형성했던 것인데,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을 섬기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그대로였던 것이다(신 7:2-4).
후일 솔로몬이 배교했던 것도 동일한 이유 때문이었다. 천 명이나 되는 아내들을 거느렸던 그는, 결국 그 여인들이 들여온 모든 잡신들을 섬기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는 신약 교회 시대의 자녀들에게도 『믿지 않는 자들과 멍에를 같이 메지 말라.』(고후 6:14)라고 말씀하신다. 그럼에도 자신감 넘치는 사람들은 “나는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더라도 그 사람을 주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그 반대로 자신의 믿음마저 잃고 만다. 자신의 구원, 부활, 휴거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더 이상 실제적으로 와 닿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배교다. “배교”란 믿음을 잃는 것을 말하는데, “배교자”라고 써 붙이고 다녀야 배교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데서 돌아섰다면 그 사람이 바로 “배교자”다.
에스겔 8장에는 배교한 자들의 가증한 짓 세 가지가 나온다. 우선 비밀스런 장소에서 자행되는 가증함이 있었다. 『그가 나를 뜰의 문으로 이끄시기에 내가 보았더니, 보라, 담에 구멍이 있더라. 그때 그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인자야, 지금 그 담을 파라.” 하시기에 내가 그 담을 팠더니, 보라, 문이 있더라. 또 그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들어가서 그들이 여기서 행하는 악한 가증함들을 보라.” 하시기에 내가 들어가서 보았더니, 보라, 갖가지 모양의 기어다니는 것들과 가증스런 짐승들과 이스라엘 집의 모든 우상들이 사면 담에 그려졌더라. 거기 그들 앞에는 이스라엘 집의 노인들 가운데서 칠십 명이 서 있고 그들 가운데는 사판의 아들 야아사냐도 서 있으며 각자가 손에 자기 향로를 가졌는데 향의 짙은 연기가 올라가더라. 그때 그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집의 노인들이 어두운 곳, 각기 자기 형상의 방 안에서 행하는 것을 보았느냐? 그들이 말하기를 ‘주께서는 우리를 보지 않으시며 주께서는 땅을 버리셨다.’ 하는도다.” 하시더라』(겔 8:7-12).
사람들은 우상을 어떤 형상(image)으로 만들어 섬긴다. 그 상(image), 곧 모습은 인간의 상상(imagination)에서 나온다. 인간의 발상으로 경배의 대상을 그리는 것이다. 성경에 근거가 없는데도 “내가 이러저러하게 하면 잘하는 것이겠지.”라면서 제멋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하는 일도 이와 같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의 종교 행위는 모두 그러하다. 그들이 장승, 돌무더기, 불상, 마리아상, 파란 눈에 노란 머리를 한 예수의 초상 등을 놓고 기도하는 모든 행위는 하나님께 가증할 뿐이다(롬 1:21-23). 유다의 백성들은 『주께서는 우리를 보지 않으시며 주께서는 땅을 버리셨다.』라면서 비밀리에 그런 우상 숭배를 행했다. 그들은 자조적이었다. 이런 마음 자세는 이 시대의 교인들에게서도 보이는데, 그들은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뒤로는 돈이나 인맥 등의 우상에 의지하여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 은밀하게 점을 보러 가는 사람도 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인생에 개입하실 수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다. 그들은 배교자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인 것이다.
(이 시대의 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돌보신다는 사실에 대해 자조적이 되어 우상을 의지하는 자들이다. 겉으로는 그렇지 않아 보일지라도 뒤로는 돈이나 인맥 등의 우상에 의지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드는 것이다. 은밀하게 점을 보러 가는 사람들도 있다. 모두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인생에 개입하실 수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인데, 그런 자들은 배교자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다.)
두 번째로 행해진 가증한 짓은 탐무스를 위하여 우는 것이었다. 『그가 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다시 돌아서라. 그리하면 너는 그들이 행한 더 큰 가증함들을 보리라.” 하시더라. 그때 그가 나를 북쪽을 향한 주의 집의 대문의 입구로 데려오시더라. 보라, 거기에는 여인들이 탐무스를 위하여 울며 앉아 있더라』(겔 8:13, 14). 탐무스는 어떤 존재인가? 바빌론 신비 종교에서 태양신 님롯의 아들로서 숭배되는 우상이다. 탐무스는 님롯의 환생으로 여겨지며, 그런 탐무스를 낳은 여인 세미라미스는 “하늘의 여왕”으로 숭배되었다. 우스운 것은 탐무스를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세미라미스에게는 “영원한 처녀”라는 개념이 투영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로마카톨릭에서 숭배되는 “영원한 동정녀” 마리아가 바로 이 세미라미스다. 예나 지금이나 수많은 사람들이 이 바빌론 종교의 모자(母子)에게 미혹되어 하나님 앞에 가증한 짓을 하다가 지옥으로 떨어진다.
그 우상들은 “아들을 잃은 어머니”를 보여 주며 인간적인 감정에 호소한다. 그러나 그런 곳에서는 “믿음”이 생겨날 수가 없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아야 발휘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고후 5:7). 나는 “똑똑한 사람”이란 자신이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감각이나 감정 따위를 믿는 사람은 똑똑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런 것은 사탄도 얼마든지 날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13:15을 보면, 거짓 선지자가 짐승의 형상에게 생명을 주는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형상으로 말도 하게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보고 느끼는 것에 관해서라면 사탄의 세력도 얼마든지 잘할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마리아상에서 피눈물이 나오는 것을 보았든, 은사주의 집회에서 병이 고침받고 사람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것을 보았든, 기도하다가 무슨 환상을 보고 가슴이 뜨거워졌든, 그런 것들은 믿음을 둘 만한 대상이 아니다. 믿음은 오직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만 근거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믿음 없는 배교자들의 종교 행위를 아주 가증스럽게 여기신다. 그럼에도 오늘날 제도권에는 성경적인 믿음은 갖추지 못한 채 “탐무스를 위하여 우는” 종교 행위가 만연해 있다. 그들이 새벽 기도, 금식 기도, 경배와 찬양 따위를 한다고 할 때, 그리고 기도원, 여의도 광장, 수련회장 등지에 모일 때, 성시화 대회, 성령화 대회 등 무슨 대회를 연다고 할 때 보이는 모습이 그러하다. 그런 일들은 바빌론 신비 종교의 한 형태를 답습하는 것일 뿐, 하나님께는 어떤 기쁨도 드리지 못한다.
세 번째 가증한 짓은 성전 안에서 태양신을 경배한 것이었다. 『그러자 그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오 인자야,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너는 다시 돌아서라. 그리하면 너는 이것들보다 더 큰 가증함들을 보리라.” 하시더라. 또 그가 나를 주의 집의 안뜰로 데려오시더라. 보라, 주의 성전의 문에 곧 현관과 제단 사이에 약 이십오 명이 있는데, 그들의 등은 주의 성전을 향하고 그들의 얼굴은 동쪽을 향하였으니 그들이 동쪽을 향하여 태양을 경배하더라』(겔 8:15,16). 앞선 두 가지 가증한 짓은 성전 바깥에서 행해졌지만, 이 행위는 성전 안에서 버젓이 일어났다. 다들 잘 알다시피 성전은 동에서 서로 들어가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들이 얼굴을 동편으로 향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계신 자비석을 등지고 태양신에게로 돌아섰다는 뜻이 된다.
위와 같이 가증한 짓이 행해진 “현관과 제단 사이”라는 위치로 볼 때, 이 일을 벌인 25명쯤 되는 사람들은 제사장들이었음이 분명하고(욜 2:17), 그중에서도 대표격인 인물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하나님께 경배한답시고 거기에 들어갔지만 마음은 딴 곳에 가 있었다. 그들에게 제사장 직분이란 “비즈니스”요, 제사는 “쇼”였던 것이다. 그들이 정직했다면 제사를 없애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먹고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제사란 “생계 수단”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신다.”라는 말은 곧잘 하면서도 정작 어떤 성경이 바른 성경이냐는 논의는 뒷전에 두는 배교한 목사들이나 교수들도 그런 자들이다. 그와 같은 자들은 성경에 역행하면서도 밥을 먹기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체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바른 교리를 제시하지 않고, 그 대신 교단 교리를 제시하고는 사람들을 교단의 종으로 만든다. 이는 그들의 형식적인 복음 전파와 예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다. 그들의 본심은 사람들에게 진리를 제시하는 데 있지 않다. 그들이 목표로 하는 것은 헌금 액수, 사람 수, 교단 소속 교회 수 따위밖에 없다. 『너희 가운데 대가없이 문을 닫을 자가 누가 있느냐? 너희는 대가없이 내 제단에 불을 지피지 않는도다. 만군의 주가 말하노니,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않으며 내가 너희 손에 있는 제물도 받지 아니하리라』(말 1:10).
배교의 끝은 진노의 심판뿐이다. 『그러므로 나도 진노로 다루리니 내 눈이 아끼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리라. 그들이 내 귀에다 큰 소리로 부르짖는다 해도 내가 그들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더라』(겔 8:18). 심판을 면할 대책은 “회개”뿐이다.
우리 역시 은밀하게 숨겨진 죄들이 있고, 말씀이 아닌 다른 것에 믿음을 두고 있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형식주의에 빠져 있다면 회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 아무것도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을 열성적으로 한다 해도 예외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속지 않으신다. 사람들 앞에서는 믿음 있는 체할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거짓으로 그분을 섬기는 자들을 반드시 찾아내실 것이다. 이것은 교회 차원의 문제라기보다 각자의 문제다. 예수님의 오심이 가깝다. 그분께서 오셨을 때 부끄럽게 되지 않으려면 각자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보아야만 한다. B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