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렇게 성경대로 믿는 사람이 되었다 분류
자기 의를 깨고 진리의 말씀으로 살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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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6년 11월호>
나는 학창 시절에 교회를 접했지만, 말과 행동이 다른 교인들의 모습에 크게 실망했다. 이후 대학에 진학하면서 나만의 종교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했고, 차분하고 엄숙한 미사 분위기에 이끌려 천주교를 선택했다. 2년 넘게 성당에 다니며 “모세”라는 세례명을 받았고, 졸업할 무렵에는 견진성사까지 받았다. 그러나 교리적 의미는 알지 못한 채 그저 세례보다 한 단계 높은 의식 정도로만 이해했다. 그러다 개신 교회에 다니는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부부는 천주교와 개신교로 나뉘었지만,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아내를 따라 개신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2003년 가을, 당시 그 교회의 목사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강조하며 별도의 찬양단을 중심으로 목회를 이어가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목사 및 찬양단원들과 교제하며 교회 일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주일 예배조차 군 상급자의 가족과 함께 드렸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기보다 상급자의 눈치를 보며 종교적 분위기를 맞추는 데 신경이 먼저 갔다. 각종 행사 때면 가장 먼저 나와 가장 늦게 귀가했다. 당시 목사는 우리 가정을 주변에 적극적으로 소개했고, 유명하고 활동적인 목사들을 알게 되면서 그들에게 “신실한 가정”으로 인정받는 것을 은근히 즐겼다. 그것이 신앙생활의 전부인 줄로만 알았던 나는 당시에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지 못한 채 “자기 의”로 충만한 상태였다.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에게 열성적인 행위로 인정받고자 애썼던 것인데, 마치 나는 예레미야 48장에서 정죄받는 모압처럼 “오만과 거만, 교만과 마음의 도도함”(렘 48:29)으로 가득 차 있었다.미국으로 2007년 가을에 들어가서 그곳 은사주의 목사를 통해 <킹제임스성경>을 알게 되었고, 이 성경이 한글로 번역된 <한글킹제임스성경>, 곧 “바른 말씀”을 읽고 실행하면서 삶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생소한 한자어 때문에 사전에서 그 의미를 찾아 이해해야 했던 한글개역성경을 읽느라 곤욕을 치렀고, 이 말이 그 말이고 그 말이 이 말인 듯하여 단 몇 페이지만 읽어도 졸리어 읽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한글킹제임스성경>은 논리적이고 쉽게 기술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풍성한 주석으로 인해 진리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2007년 가을부터 시작한 성경 읽기는 이듬해 6월 29일, 강원도 인제에서 처음으로 마치게 되었다. 당시에 느꼈던 감동을 <킹제임스성경> 번역자들의 대표인 “마일즈 스미스”가 쓴 서문에서 공감되는 부분을 발췌하여 성경 맨 뒷장에 기록해 두었다. “우리의 눈에서 비늘을 벗겨 내셨으며 우리의 마음에서 장막을 걷어 내시고 우리의 지혜를 열어 주셨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명철로 말씀을 깨닫도록 하심이요, 우리의 가슴을 여시고 편견을 바로잡으셨으니, 이는 우리를 금보다 은보다 말씀을 더 사랑하되, 정녕 끝까지 사랑하게 하심이라.”
2007년 12월 말, 나는 은사주의 목사가 있던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침례교도인 “린”(Lyn) 할머니를 만났고, 이분의 도움으로 첫째와 둘째 아이가 예상치도 못하게 현지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이후 “바른 말씀”을 통해 은사주의 목사의 실체를 깨닫고 성별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아이들과 세 가정이 캘리포니아의 LA로 거처를 옮겼다. 그렇게 5년간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2012년 3월에 귀국 길을 밟았다. 아이들은 귀국 전부터 “서울크리스찬중고등학교”를 알고 있었고, 그 학교에 진학하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우리 가족은 서울 강서구 방화동에 위치한 성경침례교회를 찾아 출석하기 시작했다. 나는 경기도 연천에 있는 부대에서 대대장 보직을 마치고 2013년 8월에 아이들 교육을 위해 연고가 없는 김포로 이주했다. 돌이켜 보면 <한글킹제임스성경>을 통해 바른 말씀을 접하여 은사주의 목사와 성별함으로써 놀라운 일을 경험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인에게 우연이란 없다.”라는 말처럼, 강원도 인제에서 시작된 우리의 안식처는 동에서 서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포천과 전곡을 거쳐 김포까지 이어진 것이다. 지금은 교회에서 우리 거주지가 보일 만큼 가까운 곳에 살고 있으니, 이 모든 것이 “바른 말씀”을 알고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손길로 친히 인도하고 보호해 주신 결과였다.
나의 구원은 2012년 3월 30일, 아이들 입학을 문의하러 서울크리스찬중고등학교를 방문했을 때 이뤄졌다. 당시 이송오 목사의 목양실에서 내가 죄인인 것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고 목사님을 따라 영접기도를 함으로써 구원을 받았다. 아내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는데, 우리가 목양실에서 나오자 아이들이 “아빠가 구원받았어!” 하며 기뻐하던 모습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이후 바른 말씀을 알기 위해 성경침례교회에서 진행하는 주일 “기초성경공부” 과정을 시작했고, 과정을 마친 뒤 침례를 받았다. 이렇게 조금씩 알게 된 진리의 지식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더 갈급하게 만들었는데, 구원받은 이후 새벽에 깨자마자 기도하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일 년에 성경 한 번은 읽자!”라는 생각으로 시작한 일이 2014년 이후에는 매년 성경을 통독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런 노력을 기울인 결과 주일 설교가 이해되기 시작했고, “젖이 아닌 고기”를 조금씩 씹어 맛볼 수 있었다. 돌이켜보니 <한글킹제임스성경>을 알고 난 뒤, 5년이 경과한 시점에 이송오 목사님을 통해 구원을 받게 되었기에 “지금 성경침례교회에서 사용하는 ‘전도지 한 장’만 있었으면 보다 빨리 구원을 받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여하튼 내가 거듭남으로 인해 나의 인생도 조금씩 변화를 겪게 되었고, 마귀의 공격도 시작되었다.
나는 2019년 6월부터 연대장직을 수행했고, 2020년이 되면서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해 봄부터 둘째 아이가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많이 아파했다. 당시 교회에서도 미국 LA의 김경환 측과 치열한 영적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병든 둘째 아이를 위해, 나와 첫째 아이, 그리고 아내가 순번을 돌아가며 병원을 지켰다. 이런 와중에 LA 교회에서는 우리가 성경침례교회에서 나와야 한다고 끈질기게 종용했다. 당시 LA와 연결된 많은 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우리는 배운 대로 성경에 비추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했고, 하나님께 “옳은 길”을 보여 주시라고 기도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한글킹제임스성경>의 말씀을 굳게 붙들자 파멸에서 건져 주셨다. 결국 가장인 나와 첫째 아이는 성경침례교회를 지키겠다는 의사를 강력하게 표명했다. 이로써 가장 가까웠던 형제자매들, 특히 LA에서 아이들을 돌봐주던 이들로부터 성별하게 되었다. 아픈 중에 이 상황을 지켜봐야 했던 둘째 아이는 더 큰 괴로움과 힘든 시간을 겪어야 했다. 돌이켜보면 그때가 우리 가족에게는 가장 고통스럽고 어두운 시기였다. 만약 그때 성경침례교회에서 떨어져 나갔다면, 지금쯤 어딘가에서 파멸의 쓴맛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감사하게도 둘째 아이는 병세가 호전되어 무사히 퇴원했고, 이전의 믿음과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깊이 교제했다. 하나님께서는 성별한 우리 가정이 이전보다 더 많은 지체들과 교제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고, 지금까지도 풍성한 교제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게 하셨다. 가족 모두가 똘똘 뭉쳐 마귀를 대적하고, 자칫 파멸의 길로 빠질 뻔했던 순간을 지혜롭게 극복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은혜다. 이 영적 전쟁을 통해 우리 가족은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으며 한없이 겸손해졌다.
군생활을 하다 보면 내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마주하는 순간이 닥친다. 그럴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회피하거나 방관자의 입장에 서곤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하면 언제나 가장 옳은 결과를 낳게 하셨다. 내가 경험한 수많은 일 중 대표적 사례가 바로 철원 GOP에서의 기억이다.
철원과 인접한 GOP의 추위는 상상을 초월한다. 영하 25도를 밑돌고, 여기에 매서운 바람까지 불어닥치면 체감온도는 영하 30도 이하로 떨어진다. 밖에서 순찰을 돌다 보면 내쉬는 숨 때문에 마스크가 금세 얼어 버리고, 순찰이 조금만 오래 걸려도 입주변이 얼어 동상에 걸릴 지경이었다. 그렇기에 장병들은 개인별로 마스크를 3,4개씩 지니고 다니며, 휴식 공간에서 번갈아 말려가며 착용해야 했다. 더구나 북쪽을 주시해야 하는 경계초소는 모든 창문을 떼어낸 채 불어오는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아야 하는 곳이었다. 이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는 것뿐이었고, 그분께서 내게 주신 지혜는 “만나는 부하들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이었다. 추위와 싸우는 용사들에게 따뜻한 차와 초코파이를 건네고, 만날 때마다 한참 동안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 그들의 귀에 이렇게 속삭였다. “너희가 진정 행동하는 애국자다. 너희 덕분에 대한민국 모두가 편안한 밤을 보낸다. 정말 고맙다.” 살을 에는 듯한 혹한의 날씨였지만, 이러한 진심 어린 격려와 노력이 있었기에 한 명의 동상 환자도, 단 한 건의 사고도 없이 무사히 경계 작전을 마칠 수 있었다. 나중에 전역을 앞둔 병사들이 그때를 생생히 기억하며 “참 따뜻했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나는 말로 다 할 수 없이 깊은 감동을 느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는 언제나 가장 좋은 결과를 낳았다. 『사람의 마음이 자기의 길을 계획하나, 주께서 그의 걸음들을 인도하시느니라.』(잠 16:9)라는 말씀처럼, 부대를 지휘하며 마주하는 수많은 문제들을 하나님께 내어놓을 때마다 그분은 놀라운 해결책을 제시해 주셨고, 언제나 예상치 못한 선한 열매를 맺게 하셨다. 그 은혜 덕분에 나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남다른 군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바른 말씀”과의 만남, 2012년 3월 30일의 구원, 매일 기도와 성경 읽기는 육신적으로 살았던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삶을 선사해 주었다. 만약 그 날들이 나와 내 가족에게 없었다면 우리는 분명 “자기 의”로 가득 차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생의 자랑』(요일 2:16)만을 추구하는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을 아는 삶은 날마다 넘치는 복을 누리게 했다. 이제 곧 전역을 앞두고 있지만, 다가올 삶에 대해 나는 그 어떤 염려도 하지 않는다. “현명한 사람은 과거를 교훈 삼아 오늘을 살고, 이제 곧 다가올 영광스러운 재림을 소망하는 사람이다.” 이 말처럼, 지금까지 이 글을 읽어 온 독자 여러분도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자문해 보았으면 한다. “하나님을 알고, 매 순간 그분께 밀착된 삶을 살고 있는가?” “육신적인 이유나 타협 때문에 성별을 미루고 있지는 않는가?” “주님을 참된 구주로 믿지 못한 채, 내 생각과 기준으로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지는 않는가?”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의 두려우심과 자애하심을 깨닫고 있는가?” 인생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주님을 신뢰할 때, 삶의 모든 순간은 마귀를 이기는 영광스러운 간증이 된다. 이 간증문을 읽는 독자 여러분에게도 그와 같은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B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