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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식의 기적 - 요한복음 연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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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7년 08월호>
셋째 날에 갈릴리 카나에서 혼인식이 있었는데, 예수의 모친도 거기에 있더라. 예수와 그의 제자들도 그 혼인식에 초대되었는데, 그들에게 포도주가 부족하므로, 예수의 모친이 그에게 말하기를 “그들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하니,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여인이여,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하시니라. 주의 모친이 종들에게 말하기를 “그가 너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그대로 행하라.”고 하더라(요 2:1-5).예수님께서 처음으로 기적을 행하신 이곳은 나사렛에서 북쪽으로 약 7마일 정도 떨어진 곳으로, 아셀의 카나와 구분하기 위해 갈릴리 카나로 불리는 곳이다.
성경에서 “포도”는 기쁨의 상징이다(시 104:15, 판 9:13). 그래서 본문의 사건에서 포도주가 다 떨어졌다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의 결혼의 기쁨을 상실해 버렸음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모친은 이 복음서에서는 단 한 번도 마리아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다.
“셋째 날에”라는 말은 본문의 말씀을 예언적으로 적용할 수 있게 한다. 거의 이천 년 동안 이스라엘에게는 왕도 제사장도 집도 없었다. 그러나 둘째 날이 거의 끝나고 셋째 날이 열릴 때, 성경의 예언대로 이스라엘의 부활이 있을 것이다. 이틀 후에 그가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그가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목전에서 살리라(호 6:2).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교회이듯 하나님의 신부는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은 이미 하나님의 아내였으나 그들은 반역함으로 스스로 이혼을 한 셈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새 이스라엘과 다시 혼인하실 것이다(사 54장, 호 2장).
그리스도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셨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이스라엘의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 채우실 것을 의미한다. 그때 이스라엘은 이방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그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다(요 2:11, 마 25:31).
“때”에 대한 언급은 요한복음에서만 7번 등장한다(요 2:4; 7:30; 8:20; 12:23,27; 16:32; 17:1). 이 때는 그의 낮아지심의 때, 즉 그의 고난의 “때”를 말한다.
거기에는 유대인의 정결의식에 따라, 한 통에 두세 메트레타를 담는 돌로 된 물통이 여섯 개 놓여 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통을 물로 채우라.”고 하시니, 그들이 아구까지 채우더라.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제 떠다가 잔치를 주관하는 사람에게 가져다 주라.”고 하시니, 그들이 가져다 주더라. 그 잔치를 주관하는 사람이 포도주가 된 물을 맛보고, 그것이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나, (그 물을 떠 온 종들은 알더라.) 잔치를 주관하는 사람이 신랑을 불러서(요 2:6-9).
6절의 “여섯”은 인간을 나타내는 숫자이다. 왜냐하면, 여섯째 날에 인간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이 여섯 개의 항아리는 구속을 나타내는 “은”이나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금”이 아닌 “돌”로 만든 것이었다. 우리는 이사야 1:22에서 네 은은 찌꺼기가 되고라는 말씀과 예레미야 애가 4:1에서 어찌하여 금이 빛을 잃었으며...라는 말씀을 읽게 된다. 이것은 돌같이 굳으며 비어있는 인간의 마음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을 제공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종들이 믿지 않는 자들의 빈 마음을 말씀으로 채울 때 이러한 기적이 일어나게 된다.
종들이 모든 일을 다 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항아리를 채웠고, 그들이 포도주를 떠 왔고, 그들이 그것을 연회장에게 갖다 주었다. 손님들은 일하는 종들만을 보았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는 못하였다. 이때 주님께 가장 가까이 있어 그분의 마음을 알았던 사람은 제자들도 마리아도 아닌 바로 종들이었다. 연회장을 어리둥절하게 했던 일도 이 종들은 알고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을 도구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 종들은 순종함으로 그 기적을 행한 동역자가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것을 기뻐하신다. 장차 그분께서 자신의 왕국에서 참 포도주를 공급하실 때, 주님께서 이 지상에 계시지 않은 동안 그를 섬겨 왔던 자들은 그때, 그분 아래서 기쁨을 나누어 주는 자들이 될 것이다.
그에게 말하기를 “누구나 처음에는 좋은 포도주를 내었다가, 사람들이 취한 다음에 덜 좋은 것을 내는데, 당신은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간직해 두었도다.”라고 하니라(요 2:10).
세상(사탄)은 먼저 좋은 것을 주고 마지막을 위해 가장 나쁜 것을 남겨 놓는다. 즉 먼저 잠시 동안의 죄의 쾌락이 있고, 그 다음에 죄의 삯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와 정반대로 행하신다. 그는 그의 백성들을 약속된 유업으로 이끄시기 전에 먼저 광야로 이끄신다. 먼저 십자가가 있고 그 다음에 면류관이 있다.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에 동참하지 않고 주님과 함께 영광을 누릴 것이라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주님꼐서 주시는 좋은 것은 영원한 것들이다.
예수께서 기적들 가운데 이 처음 기적을 갈릴리 카나에서 행하시고,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시니, 그의 제자들이 그를 믿더라(요 2:11).
이 사건이야말로 주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기적이다. 예수님의 소년 시절의 기적을 다룬다는 외경의 기록이 거짓임을 명백히 보여준다. 주님께서는 인간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기적을 행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 믿게 하시고자 기적을 행하신다. 이것은 다른 기적을 행하실 때도 동일하다(요 4;53,54). 예수님께서는 은사주의자들처럼 돈이나 명성을 위해 기적을 행하지 않으신다.
이 일 후에 주께서 그의 모친과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카퍼나움으로 내려가셨으나, 거기에서 여러 날을 머물지는 아니하시더라(요 2:12).
예수님의 모친은 이스라엘 민족, 특히 이스라엘의 특권을 상징한다. 그의 형제들은 불신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한다(요 7:5). 그의 제자들은 이스라엘에서 그를 믿은 극히 소수의 남은 자를 대표한다(요 2:11). 이들과 함께 주 예수님께서는 카퍼나움으로 내려가셨으나 거기에서 여러 날을 머물지는 아니하셨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 특별한 은혜를 오랫동안 즐기지 못하였다. 그리스도께서 곧 그들을 떠나실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늘에까지 높아졌던 카퍼나움은 지옥까지 낮아져야 했다. 이 때문에 그가 카퍼나움으로 “내려가셨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워지니,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그런데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상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그들 모두를 양과 소와 함께 성전에서 몰아내고,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고, 상들을 뒤엎으시며, 비둘기 파는 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것들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하시니라. 그때 제자들이 “주의 집을 위한 열성이 나를 삼켰나이다.”라고 기록된 것을 기억하더라(요 2:13-17).
“주의 유월절”(출 12:11)은 “유대인의 유월절”로 타락해 왔다. 유월절과 그리스도께서 성전을 깨끗케 하신 일이 함께 연결되어 있다. 유월절 준수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명백히 요구하신 것 중의 하나는 그의 백성의 모든 집에서 모든 누룩을 엄격히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고전 5:6-8). 그러나 환전상들과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은 예배하려고 성전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편리를 제공해 주기 위해 그곳에 있었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나머지 세 복음서에 나온 성전을 정화하신 일은 주님의 공생애 끝 부분에 그가 체포되기 전에 행하신 마지막 일들 가운데 하나로서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여기에 기록된 것은 나머지 공관복음의 사건들과 동일한 사건이 아니다. 성전은 “이스라엘의 집”으로 불리다가, 요한복음에서는 “내 아버지 집”으로 불리며, 마태복음에서는 “내 집”으로 불린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부르시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언하신다. 모세도 솔로몬도 에스라도 성막이나 성전을 자신의 ‘아버지’의 집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 그리스도만이 이렇게 하실 수 있었다. 한 분이, 한 손으로 채찍을 잡자 온 무리가 그 앞에서 두려워하며 도망하였다. 이 분은 단순한 인간이 아니셨다. 그들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위엄과 두려움을 맛보았던 것이다. 이 일들은 그분의 심판 보좌 앞에 설 때 일어나게 될 일에 대한 경고가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동기를 드러내셨다. “장사하는 집”이란 표현이 “강도들의 소굴”(마 21:13)이라는 말로 분명해진다. 주님께서는 돈에 대한 사랑, 즉 탐심이 그 동기의 밑바닥에 놓여 있었음을 말해 준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제거하신 누룩은 다른 무엇보다도 탐욕과 우상 숭배를 말한다(고전 5:7-10). 골로새서 3:5에는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기록되어 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우상을 숭배하지 않는다고 자랑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그의 아버지 집에서 발견했던 것은 바로 이 우상 숭배, 즉 ‘탐심’이었다. 요한복음이 처음부터 보여주는 이스라엘의 상태는 눈이 먼 제사장들(요 1:19-26), 기쁨이 없는 민족(‘포도주’가 없음, 요 2:3), 더럽혀진 성전(요 2:16) 등이다.
이 사건은 카나의 혼인식과 여러가지로 대조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1) 전자는 흥겨운 모임인 데 반하여 후자는 하나님의 심판의 장면이다. 2) 전자에서 주 예수님께서는 초대를 받으셨는데 반하여 후자에서는 그가 주도권을 잡으셨다. 3) 전자에서 그는 인간을 도구로 사용하신 데 반하여(요 2:7) 후자에는 그가 홀로 행동하셨다(요 2:15). 4) 전자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가리키신 데 반하여(요 2:4) 후자에서는 자신의 부활을 가리키셨다(요 2:19,21).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주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우리에게 무슨 표적을 보여 주겠느냐?”고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성전을 헐라. 그러면 내가 삼 일 만에 이것을 다시 세우리라.”고 하시니라. 그러자 유대인들이 말하기를 “이 성전을 짓는 데 사십육 년이 걸렸는데, 네가 이것을 삼 일 만에 세우겠단 말이냐?”고 하더라. 그러나 주께서는 성전 된 자기 몸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이라(요 2:18-21).
“성전된 자기 몸”은 지상에 계실 때 예수님의 몸이 성전임을 보여준다. 구약 시대에는 모세의 성막(B.C.1500-1000), 솔로몬의 성전(B.C.1000-586), 스룹바벨의 성전(B.C.516-50), 헤롯의 성전(B.C.40-A.D.70)이 있었지만, 예수님이 지상에 오신 이후로 성전은 더 이상 사람의 손으로 만든 건물이 아니다. 예수님이 올라가신 이후 신약시대에는 그리스도인의 몸이 “성전”이 되는 것이다(고전 6:19-20). 더 이상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전에 계시지 않는다(행 7:48; 17:24).
그러므로 “성전을 헐고 다시 세우신다.”는 말씀으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처음으로 알리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심으로써, 자신이 육체를 입으신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더럽혀진 성전을 깨끗케 할 명백한 권리를 소유하신 분임을 나타내셨다.
그후 주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셨을 때, 제자들은 주께서 그들에게 하신 이 말씀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더라. 유월절 명절날에 주께서 예루살렘에 계실 때, 많은 사람이 그가 행하신 기적들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더라(요 2:22-23).
주님의 제자들이 말씀을 기억하고 믿은 것과 많은 사람들이 기적들을 보고 믿은 것이 대조되고 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는 민족인데(고전 1:22), 이스라엘 국가는 처음부터 그러했다(출 4:30). 그들은 기적과 표적으로 인도하는 지도자(모세)를 통해 이집트로부터 구출되었으며(출 2-5장), 그들이 만일 기적과 표적으로 인도하는 새로운 지도자(예수 그리스도)를 따랐다면 그들은 로마로부터 구출될 수 있었다(물론 그 정도가 아니라 구약에서 예언된 대로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의 우두머리가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표적을 구하고, 기적을 보고 믿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유대인이 아닌 자들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제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어야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을 맡기지 아니하시니, 이는 주께서 모든 사람을 아시기 때문이더라. 또 사람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아시므로, 누가 사람에 관하여 증거하는 것도 필요로 하지 아니하시더라(요 2:24-25).
주께서는 주의 거처 하늘에서 들으시고 용서해 주시며, 행하시고,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아시오니, 각자에게 그의 행위대로 갚으소서. (이는 주, 곧 주만이 모든 사람의 자손들의 마음을 아심이니이다)(왕상 8:39). 본문은 또 다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악한지를 알고 계사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막 7:20-23). 주님께서는 “실로, 하나님은 참되시나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라.”(롬 3:4)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도 반드시 이 두 가지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우리 속에 있는 것들까지)을 알고 계신다는 사실과 우리 인간의 속에는 악한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