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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들 - 요한복음 1: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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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7년 07월호>
1. 은혜와 진리를 가져오신 분『우리 모두가 그의 충만한 데서 받았으니, 은혜 위에 은혜니라.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받았지만,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것이라』(요 1:16-17).
주님의 고갈되지 않는 ‘충만함’으로부터 우리는 영생을 받았고(10:28), 평안(14:27)과 기쁨(15:11)과 아버지의 말씀(17:14), 그리고 성령(20:22)을 받았다.
율법을 경시한 자는 자비를 얻지 못하고 죽었다. 그리고 ‘모든 범죄와 불순종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다(히 10:28; 2:2). 그것은 ‘정죄의 직분이요, 죽음의 직분’(고후 3:7,9)이다. 『...이는 율법을 통해서는 죄의 깨달음이 있음이니라』(롬 3:20). 성경은 결코 ‘율법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깨달음이 있음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지 않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가 많아지게 하려는 것이라』(롬 5:20). 『...이는 계명에 의한 죄가 심히 죄 많게 되게 하려는 것이라』(롬 7:13). 율법은 죄의 극악함을 깨닫게 하였다. 그것은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신다는 것과, 죄를 응징하시기로 한 그분의 거룩한 결정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율법과 은혜는 모든 면에서 대조된다. 율법은 행위를 필요로 하는 반면에 은혜는 믿음을 필요로 한다. 율법은 인간이 움직이는 것인 반면 은혜는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것이다. 율법은 선한 자를 축복하는 것이지만 은혜는 악한 자를 구원하시는 것이다. 율법은 행함으로 받는 보상이지만 은혜는 값없는 선물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는 ‘은혜와 진리’가 없었는가? 틀림없이 있었다. 그러나 ‘은혜와 진리’는 구세주 자신이 나타나실 때까지는 결코 온전하게 계시되지 않았었다. 은혜는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 이전에도 있었지만, 본문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시작된 특별한 은혜를 가리킨다. 또한 이 은혜는 진리를 통하여 온다. 진리를 거부하는 자는 은혜를 거부한다. 『죄가 군림하여 사망에 이른 것같이, 은혜도 의를 통하여 군림하여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인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려는 것이니라』(롬 5:21).
2. 독생자
『아무도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아버지의 품 안에 계신 독생자, 그가 하나님을 분명히 밝히셨느니라』(요 1:18).
하나님께서 온전히 알려지시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뿐이다(요 14:9; 1:3). 성경은 ‘아버지 품 안에 계셨던’이 아니라 ‘아버지 품 안에 계신’이라고 말씀한다. 그분은 인간의 몸을 입고서도 이전과 동일하게 아버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셨다.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온전히 드러나신 바 되었다. 즉 아들이 아버지를 분명히 밝히신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단지 그 등을 본 것은 그가 살았던 율법의 세대 자체와 완벽하게 일치된다(고후 4:6).
3. 침례인 요한의 증거
『또 이것이 요한의 증거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보내어 그에게 묻기를 “네가 누구냐?”고 하였더니』(요 1:19).
이 사건은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의 영적 무지를 보여준다.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로, 주님의 선두주자가 광야에 나타났다. 그러나 영적 분별력의 결여로 예루살렘에 있는 지도자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였다. 백성들은 그들 마음 속에 요한에 관하여 생각하기를 “그가 그리스도인가 아닌가”라고 할 정도가 되었다(눅 3:15).
침례인 요한이 ‘낙타털로 만든 옷’을 입었다거나 ‘가죽띠를 허리에 두르고’ 음식으로 ‘메뚜기와 야생꿀’을 먹었다거나 하는 어떠한 암시도 여기 요한복음에는 없다. ‘회개하라.’는 그의 준엄한 외침이나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는 그의 선포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것들은 이 네 번째 복음서에서의 성령의 의도와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그는 또한 주 예수를 “손에 키를 든 자”, “그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철저히 정결케 하실 자”라고 말하는 대신에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소개하고 있다.
침례인 요한은 의심할 여지없이 여러 가지 측면에 있어 성경에서 제시된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 중의 하나이다. 그는 구약의 예언의 한 주제였으며(사 40장), 그의 탄생은 하나님의 직접적이고도 기적적인 개입하심의 결과였다(눅 1:7,15). 그는 ‘모태에서부터 성령으로 충만하리라’고 한 자였고(눅 1:15),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었으며(요 1:6), 주의 길을 예비하도록 보내심을 받은 자였다(마 3:3). 그에 대하여 주님은 이같이 말씀하셨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 가운데 침례인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었느니라’(마 11:11). 이로써 주 예수님께 침례를 베푸는 큰 영예가 그에게 부여되었다.
『요한이 시인하고 부인하지 아니하였으니, 시인하기를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하더라. 그들이 묻기를 “그러면 네가 무엇이냐, 네가 엘리야냐?”고 하니, 그가 말하기를 “나는 아니라.”고 하자, 그러면 “네가 그 선지자냐?”고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아니라.”고 하더라』(요 1:20-21).
“엘리야”와 그 선지자를 언급했던 유대인들의 기대는 성경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마 17:9-10). 『보라, 내가 주의 크고 무서운 날이 오기 전에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말 4:5). 이 예언은 엘리야가 (그리스도의 재림 바로 직전에 사역을 완수하기 위하여) 지상에 다시 나타날 것을 말한다. 침례인 요한은 “엘리야의 영과 능력을 가지고”(눅 1:17) 그리스도 앞에 온 자였다. 그는 ‘주를 위하여 마련해 놓은 백성을 예비하기 위하여’ 왔던 것이다. “그 선지자”는 모세를 통하여 예언되었다(신 18:15-18).
우리는 요한의 대답으로부터 한 교훈을 배울 수 있으며 그의 아름다운 겸양을 닮기 위하여 은혜를 구해야 할 것이다. 특히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라오디케아 교인들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교훈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에게 말하기를 “네가 누구냐? 우리로 우리를 보낸 자들에게 가서 답변하게 하라. 너는 네 자신을 무엇이라고 하느냐?”고 하니, 그가 말하기를 “나는 선지자 이사야가 말한 것처럼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음성이라.”고 하더라』(요 1:22-23).
그런데 왜 요한은 예루살렘에 있었으면서도 성전에서 외치지 않았는가? 왜냐하면 주께서 더 이상 성전에 계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가 그 시대의 종교적 체제와 영역 밖에서 나타났다. 그는 랍비 학교에서 훈련을 받지도 않았으며, 바리새인도, 사두개인도, 헤롯당원도 아니었다. 그리스도는 ‘말씀’이시나, 요한은 단지 “음성”(사 40:3)이었다. 말씀은 음성 이전에(마음에) 존재하며, 음성은 말씀이 표현되는, 혹은 알려지는 단순한 도구에 불과하다. 또한 음성은 단지 들릴 뿐이며 보이지 않는다. 요한은 그 자신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요한의 음성은 죽음으로 인하여 침묵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말씀’은 영원히 계신다.
4. 하나님의 어린 양
『그 다음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요 1:29).
지금 요한 앞에는 구약 시대의 모든 희생 제물들이 예시하였던 바로 그분이 서 계신다. 구약에 등장했던 어린 양들을 살펴 보면, 첫째로 창세기 4장에서 희생 제물로 아벨이 제물로 드린 첫 새끼를 볼 수 있다. 둘째로 창세기 22:8에서 자신을 번제에 쓸 어린 양으로 마련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볼 수 있다(변개된 성서들에는 이 약속이 없다). 셋째로, 출애굽기 12장에서 죽임당하고 그 피가 뿌려진 유월절 어린 양을 볼 수 있으며, 넷째로, 이사야 53:7에서 인격화된 양을 보게 된다. 다섯째로, 본문(요 1:29)에서 이사야가 예언한 어린 양이 누구신지를 알 수 있고, 여섯째로, 요한계시록 5장에서 하늘의 무리들에게 찬미를 받는 “도살당하였던 것 같은 한 어린 양”을 보게 된다. 일곱째로, 성경의 맨 마지막 장(계 22장)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보좌에 앉아 계신 영화롭게 되신 양을 보게 된다. 그분은 단순히 세상 죄를 담당하신 것이 아니라(벧전 2:24), 죄를 제거하시는 분이시다(시 103:12, 요일 3:5). 죄를 없앨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피흘림에 의한 것이다.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기 때문이니라』(벧전1:19).
『또 요한이 증거하여, 말하기를 “나는 성령께서 하늘로부터 비둘기같이 내려와, 그분 위에 머무시는 것을 보았노라. 나는 그분을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시어 물로 침례를 주라고 하신 그분이, 내게 말씀하시기를 ‘성령이 내려와 그 위에 머무는 것을 보리니, 그가 성령으로 침례를 주는 이라.’고 하시기에, 내가 보았고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노라.”고 하니라』(요 1:32-34). 본문은 삼위일체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다. 요한은 그 아들은 알지 못하나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는 알고 있었으며, 성령께서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내려와 그 위에 머무는 것을 보았다. 다른 세 복음서는 모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으신 사건을 다루고 있으나 요한복음은 성령이 그 위에 “머무시는” 이라고 말한다. 이같은 일은 구약에서 여러 번 예언되었던 내용이다(사 11:2; 42:1; 61:1).
5.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 인자
『나다나엘이 대답하여 주께 말씀드리기를 “랍비여, 주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주는 이스라엘의 왕이시니이다.”라고 하더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고 하니, 네가 믿느냐? 네가 이보다 더 큰 일들을 보리라.”고 하시고, 또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이 후로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리라.”고 하시더라』(요 1:49-52).
본문에는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가장 중요한 세 단어인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 “인자”가 나온다.
요한복음 1장에서만도 본문의 나다나엘과 침례인 요한(35절), 사도 요한(18절)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직접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시며(마 3:17; 17:5), 예수님 자신이 직접 증거하였고(요 10:36), 베드로(마 16:16), 제자들(마 14:33), 마르다(요 11:27), 마가(막 1:1), 백부장(마 27:54), 가브리엘(눅 1:32)도 증거했으며, 심지어 마귀도 시인할 정도였다(마 8:29). 요한복음은 바로 그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 기록된 책이다(요 20:31). 누구든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 있다(요 1:12).
구약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셨고(시 10:16, 사 44:6), 그 주(LORD, 여호와)께서 바로 육신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이시다. 마태복음은 바로 그 사실을 증거해 준다. 예수님이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환호했던 백성은 그분을 “이스라엘의 왕”이라 불렀다.
“인자”(the Son of Man)는 구약에서 단 한 번 쓰였던 용어이며(단 7:13), 신약에서는 지상에 계신 예수님과 연관해서만 88번 사용되었다. 복음서 외에 언급된 세 곳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해서 쓰였다. 그래서 바울은 단 한 번도 이 용어를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인자”는 단순한 “사람의 아들”(a son of man)이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다스림과 영광과 왕국을 이어받으실 분인 “인자”는 초림 때 오셨지만 그 백성(유대인들)이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의 영원한 왕국은 재림 때 세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