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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악을 스스로 자랑하는 사회주의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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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9년 05월호>
시편 52편은 「악장에게, 마스킬, 다윗의 시, 에돔인 도엑이 사울에게 가서 고하여 “다윗이 아히멜렉의 집으로 갔나이다.”라고 말했을 때.」가 그 표제이다. 다윗의 시인 본 시편은 ① 자신의 사악한 혀로 해악을 스스로 자랑하는 힘있는 자(1-3절), ② 모든 집어삼키는 말들을 사랑하는 간사한 혀를 영원히 멸해 주실 것이라는 소망(4,5절), ③ 악인의 멸망을 두려워하면서 그를 비웃을 의인들(6,7절), ④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영원무궁토록 신뢰하는 화자(8,9절)로 구성되어 있다.『오 힘있는 자여, 어찌하여 네가 해악을 스스로 자랑하느냐? 하나님의 선하심은 항상 지속되도다』(1절). 살다 보면 악한 자가 힘있는 자가 되어 자신의 해악을 스스로 자랑하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보고 살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 자유민주주의의 선거제도를 악용하여 어리석은 유권자들의 표심을 자극해서 권력을 탈취한 자들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그들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악을 국민이 쉽게 알아차릴 수 없는 말들로 교묘히 포장하여 행동으로 옮기기를 주저하지 않는데, 성경은 이를 가리켜서 “날카로운 칼날같이 속임수로 일한다.”라고 말씀한다. 『네 혀가 해악을 꾀하며 날카로운 칼날같이 속임수로 일하는도다. 네가 선보다는 악을, 의를 말하기보다는 거짓말하기를 더 사랑하는도다. 셀라』(2,3절). 속임수는 그들의 들숨과 날숨이다. 삶 자체가 속임수인 것이다. 외적의 무력 공격에는 국민들이 저항해도, 사상의 유입에는 거의 무방비 상태라는 점을 알고 있기에 그들이 속임수로 일하는 것이다. 진보와 평화를 앞세운 좌파 사회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으면 칼 마르크스의 망령이 나라 전체를 떠돌게 된다. 국가가 주도권을 잡고 국가 경제를 계획하는 것이(계획경제체계) “모두가 평등하게” 잘사는 길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그들은, 소득주도성장(최저임금법), 동반성장, 경제민주화, 상생과 공존, 교육평준화, 평등 사회 등과 같이 교묘하게 “집어삼키는 말들”로 국민을 현혹하고 있다. 자기 가족 하나 벌어 먹이지 못한 게으르고 시기심 많은 칼 마르크스의 강령대로 움직이는 자들이 권력을 잡으면 경제가 망하고, 결국 자유가 사라진, 곧 소수의 권력자들이 전권을 쥐고서 통제하는 “독재 노예국가”로 전락한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해 온 사실이다. 이 나라가 바로 그러한 위기에 빠져들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감출 수가 없다.
『오 간사한 혀여, 너는 모든 집어삼키는 말들을 사랑하는도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너를 영원히 멸하시며 너를 없애 버리시리니, 네 처소에서 너를 뽑아 내시며 산 자들의 땅으로부터 뿌리째 뽑으시리라. 셀라』(4,5절).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소원은 이 땅의 사회주의자들이 뿌리째 뽑혀서 자유대한민국에서는 그들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는 “가진 자들”을 시기하여 그들의 재산에 눈독을 들인 탐욕에서 비롯된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레닌의 볼셰비키 공산주의 혁명 때 얼마나 많은 “가진 자들”이 폭력과 약탈과 죽음을 맛보았던가! 부자들의 돈을 폭력으로 빼앗아 가난한 자들을 위해 분배하는 것이 사회주의 이념의 핵심이다. 칼 마르크스는 그의 <공산당 선언>에서 말하기를 “폭력”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쟁취하는 수단이라고 “당당히” 선언했다. 이런 시기와 탐욕과 폭력의 근원이 누구인가? 죄의 원흉인 마귀이다!(약 3:15,16) 가난의 원인을 모조리 부자에게 돌리고 사회 구성원들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이원화함으로써, 못 가진 자의 가난은 가진 자 때문이라는 궤변으로 못 가진 자가 스스로 위로받으면서 폭력을 행사하게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사업주에게 고용되는 것을 “착취”로 여기는 바보들이 있다. 고용주가 임금노동자들보다 수익을 더 가져가는 것을 죄악시하는 그들은, 자기들에게 일터를 제공해서 먹고살게 해 준 고용주를 협력과 공생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착취자로 보면서 분노하는 것인데, 이것이 과연 정상적인 사고방식이겠는가? 『진노는 잔인하고 성냄은 사나우나, 시기 앞에 누가 설 수 있으리요?』(잠 27:4) 시기에는 “진노와 성냄”(폭력)만이 있을 뿐이다. 일은 자기들이 주로 했으니까 고용주가 더 많이 가져가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이 “잔인한 논리”야말로 적반하장의 최절정이다. 차라리 취직을 안 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착취한다는 곳에 제 발로 찾아 들어갔으면서도 그렇게 시기하고 분노해야 하는 이유를 단 한 가지라도 대 보라! 사회주의자들은 가진 자들의 재산을 빼앗아 못 가진 자들에게 나눠 주는 일에만 안달이 나 있다. 최근의 개정된 최저임금법 시행령으로 사업주들이 경영난을 견디지 못해 더 많은 사람들이 실업자가 된 현실은 그들에겐 안중에도 없다. 사회주의식 경제 셈법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본 이들은 어이없게도 “못 가진 자들”이다. 그들의 가난은 이전보다 훨씬 더 심각해졌고 경제는 파탄에 이를 지경이다.
권력을 가진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해악을 자랑하지만, 성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은 항상 지속될 것이다. 악인은 결코 자신의 해악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압도하지 못한다. 이는 이 땅의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주의자들의 해악에 삼켜질 사람들이 아니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면서 필요한 모든 것을 항상 그분으로부터 충족 받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현재의 일들이나 다가올 일들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어떤 다른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롬 8:38,39) 없다는 사실이다!
『의인들도 보고 두려워하며 그를 비웃으리니, 보라,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의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자기 부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 악으로 자신을 힘있게 하던 자라』(6,7절). 7절에서 언급하는 『이 사람』은 1절의 『힘있는 자』로서, 곧 “죄의 사람”을 가리킨다. 죄의 사람의 숫자는 13이며, 반역의 숫자 13에 4를 곱하면 52가 되는데, 죄의 사람에 관한 본 시편이 바로 “52편”인 것이다. 『아무도 어떤 모양으로든지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이는 먼저 배교하는 일이 이르지 않고, 또 그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지 않고서는 그 날이 오지 아니함이라』(살후 2:3). 이 죄의 사람을 가리켜서 본문 7절은 『보라,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의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자기 부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 악으로 자신을 힘있게 하던 자라.』라고 말씀한다. 그런데 『이 사람』은 동일한 죄의 사람, 곧 적그리스도를 다루고 있는 이사야 14장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지칭어다. 『이 자가 땅을 떨게 하고, 왕국들을 진동시켰으며, 또 세상을 광야같이 만들었고, 그 성읍들을 멸망시켰으며, 그의 갇힌 자들의 집을 열어 주지 않았던 그 사람이냐?』(사 14:16,17) 적그리스도의 특징은 자신의 악으로 스스로를 힘있게 하여 세상을 광야같이 황폐케 만드는 것인데, 이미 활동하고 있는 그의 『불법의 신비』(살후 2:7)는 현 교회 시대에 특히 사회주의로 교회를 박해하는 데 역사해 왔다. 사회주의가 일당독재체제로 들어서는 국가마다 그리스도인들이 피를 흘렸던 것인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인간 안에 잠재된 종교성이 죄인들을 사회주의에 헌신하게 만든 것이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온통 사회주의뿐”이다. 그것이 숭배 대상이 되어 그들의 “유일한 종교”가 되어 버렸다. 사회주의는 필연적으로 국민 전체에게 자신들의 종교를 강요하는 독재로 이어지고, 국가가 전권으로 국민을 통제하는 전체주의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제거 대상 1호 목록에 올린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의 유일한 숭배 대상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회주의 사이에서 하나님을 택할 수밖에 없다.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사회주의 계획경제체계를 가리켜 “국민을 전체주의의 노예로 만드는 길”이라고 했는데, 인간의 자유를 향한 의지를 부정하는 사회주의 아래에서는 성경의 창조주를 자유롭게 섬길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을 거스르는 국가의 권력에 복종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사회주의는 통제 불능의 반체제 집단으로 분류한다. 그럼에도 자신들에게 교회가 있음을 과시하기도 하는데, 과연 중국의 삼자교회나 북한의 봉수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교회이겠는가? 그것은 사회주의 권력의 통제를 받는 가짜 교회, 체제 선전용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그런 가짜와 교류하는 한국 교회 역시 가짜 교회인 것이다! 사회주의식 통제를 거부하는 성도들은 붙잡혀서 죽든지, 지하로 숨어들든지 해서 자신들의 믿음을 지켜야 한다. 적그리스도가 대환란 때 유대인들을 학살하듯이, 그의 불법의 신비는 현 교회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을 학살해 온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올리브 나무와 같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영원무궁토록 신뢰하는도다. 주께서 그것을 행하셨으므로 내가 주를 영원히 찬양할 것이요, 주의 이름이 주의 성도들 앞에 선하시므로 내가 주의 이름을 기다리리이다』(8,9절).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하나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영원무궁토록 신뢰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면 적그리스도를 멸망시키실 것이고(계 19:20), 성도들은 주께서 행하신 그 일로 인해 그분을 찬양할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회주의자이셨다고 헛소리하지만, 주님께서는 결코 그런 분이 아니셨다. 주님께서는 부자들의 재산을 빼앗아 가난한 자들에게 분배해야 한다고 가르치신 적이 없다. 부의 재분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한 칼 마르크스의 이론이다. 그는 메시아를 거부한 유대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선생님, 내 형제에게 말씀하셔서 유산을 나와 함께 나누라 하소서.』(눅 12:13)라고 하면서 사실상의 “부의 재분배”를 요구한 사람에게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 위에 재판관이나 재산 나누는 사람으로 세웠느냐?』(눅 12:14)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부를 재분배하는 분이 아니심을 천명하셨다. 사실 초림 당시의 사회주의자는 유다 이스카리옷이었다. 장차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요 17:12, 살후 2:3)로 등장할 유다는 오늘날의 사회주의자들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걱정하는 척했는데, 실은 도둑으로서 사익을 챙기려 했던 자다(요 12:4-6). 말로는 못 가진 자들을 염려하는 척하면서도 자기들은 권력의 자리에 앉아 부를 누리며 호의호식하는 사회주의 위선자들과 정확히 일치하는 “배신자”가 바로 유다 이스카리옷인 것이다!
사회주의는 노동자와 농민의 기대를 배신하고 가난에 더 찌든 삶을 선물한다. 사회주의(생산 수단의 사회적 공유, 재화의 공평한 분배)를 수용하면 공산주의[공동 생산, 공동 분배(배급제)]에 이르게 되는데, 적그리스도의 세계 정부 역시 러시아처럼 “공산주의로 운영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13장의 첫째 짐승(적그리스도)의 이동 수단인 “곰의 발”(곰은 러시아의 상징)에서 그 점이 계시된다. 『또 내가 본 그 짐승은... 발은 곰의 발 같고』(13:2). 이 “곰의 국가”에서 박해당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그곳에서 자행된 혹독한 탄압에 대한 연대기 <수용소군도> 서문에서, “부(富)가 쉽게 창출되지 않아도 공산주의는 분배로 경제적 평등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데,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 인간을 개조하겠다는 전체주의적인 욕망이다.”라고 말했다. “인간 개조”의 명분으로 국민을 억압하며 노예로 삼는 것이 사회주의의 최종 형태인 공산주의다. 인간 개조를 국가가 하겠다는 것인데, 이를 위해 탄압과 고문으로 국민을 노예로 삼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두려워하므로 평생을 그런 노예로 속박되어 있는 자들을 놓아주실 수 있다(히 2:15).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새롭게 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고후 5:17) 마귀의 노예에서 해방되는 자유와 영생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