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신약교회사 분류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사데 교회 (2)

컨텐츠 정보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6년 08월호>

- 절정에 이른 암흑시대 -

두아티라 교회 시대 말엽의 카롤링거 르네상스 이후로 중세 유럽의 미사는 “로마 교회의 방식,” 곧 “로마 전례”로 표준화되었다. 그 결과 사데 교회 시대엔 (변개된 성경으로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무언가를 깨닫는 일이 일평생 거의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미사 중에 라틴어 성경만이 사용되었고, 사제들은 라틴어로만 미사를 집전했다. 미사가 끝난 뒤 선택적으로 행해진 “(모국어) 설교” 시간이 있었지만, 이때도 성경 구절을 듣기 어려웠다. 사제들조차 대개 라틴어를 잘하지 못해 회중에게 자신이 가진 라틴어 성경을 번역해 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대의 “설교”란 잘 해 봐야 훈화에 지나지 않았고 그마저도 형식적으로 행해지거나 아예 생략되기 일쑤였다. 따라서 미사 말미에 사제들이 십계명, 주기도문, 사도신경 따위를 짧게 요약해 읊어 줄 때를 제외하면(역사를 정직하게 다루기 위해 덧붙이자면, 그나마 이것만큼은 모국어로 행해졌다), 중세의 후반기를 살아가는 일반적인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문자 그대로 전무했던 것이다.

교황청도 라틴어의 사용으로 초래된 상황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미숙한 사제들(혹은 청중들)이 모국어로 성경을 번역해 가르치다(혹은 배우다) 문제를 일으킬 바에야, 그런 일을 원천 차단해 버리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구원이 “말씀”이 아닌 “의식”에서 나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보헤미아의 공작이 (키릴 형제가 그 옛날 가르쳐 줬던 대로) 슬라브어로 예배를 드려도 괜찮을지를 묻는 편지를 보냈을 때,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그것에 대항하라.”라고 회신했다. “지식이 부족한 이들에게 혼선을 일으켜 그들을 오해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이 일로부터 약 200년 후, 교황청은 제4차 라테란 공회를 통해 오직 “화체설”에 의한 성체성사를 시행하는 카톨릭 교회 안에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공식적으로 선포했다(A.D. 1215). 요컨대 로마카톨릭 교회에서 나눠 주는 빵과 포도주를 먹었다면, 하나님의 말씀 없이도 지옥행을 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시대의 양심들”의 행보 -

백성들이 “말씀들을 듣지 못하는 기근”(암 8:11) 속에 허덕이는 것을 보다 못한 몇몇 사제들은 제도권을 박차고 나와 모국어로 말씀을 전파했다. 12세기에 활동했던 브레시아의 아놀드, 브루이즈의 피터, 로잔의 헨리 등이 바로 그 선두에 있던 인물들이다. 성경으로 화체설, 유아 세례를 위시한 로마카톨릭의 비성경적 교리들을 지적하는 그들의 메시지에 감화된 사람들은 불이익을 감수하고 로마카톨릭에서 성별하여 그 대열에 동참했다. 세 사람 모두 순교했지만, 그 바통을 이어받은 아놀디스트, 페트로부르시안, 헨리시안은 말씀의 사역을 수세기 동안 지속했다.

“왈덴시안”이라는 유명한 이름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것도 바로 이 무렵이다. 그들을 이끌었던 피터 왈도는 독특하게도 사제 출신이 아니라 상인 출신이었기에, 왈덴시안들의 행보는 다른 성별주의 그룹과 비교했을 때 파격적이었다. 그들은 로마카톨릭의 성사 체계를 모조리 부정했을 뿐 아니라, 독자적으로 <구라틴어 역본>으로부터 모국어 성경을 번역하여 누구나 성경을 공부하고 전파하도록 했다(행 8:4). 이 “평신도들”의 설교는 당대 사람들에게 매우 충격적이었다. 그들을 담당했던 어떤 이단 심문관은 그들의 “만행”에 대해 이렇게 증언한다. “그들은 신구약성경을 일상 언어로 번역했고, 그것으로 배우고 가르쳤다. 나는 일자무식인 촌놈이 욥기를 한 자도 빠짐없이 암송하는 것을 보고 들었고, 많은 다른 이들이 신약 전체를 알고 있는 것도 보았다.” 이 거침없는 행보가 “라틴어 카르텔”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것임을 눈치챘던 그 지역 추기경은 툴르즈에서 공회를 열어 평신도의 성경 소지 금지를 공포했다(A.D. 1229). 그러나 그런 정도의 조치로는 이 “이단들”의 활동을 완전히 뿌리 뽑을 수가 없었다. 훗날 종교 개혁 시대에도 왈덴시안 출신의 “올리베탄”이라는 인물이 바른 원문으로부터 성경을 번역하는(A.D. 1535) “만행”을 되풀이했기 때문이다.

바다 건너 영국에도 말씀에 대한 목마름을 해결해 줄 사역자가 나타났는데, 바로 14세기에 활동했던 존 위클리프였다. 그는 “종교 개혁의 샛별”이라는 별명답게 루터가 향후 펼칠 개혁의 예고편과도 같은 행보를 보였다. 교황의 수위권, 면죄부 발부 등에 있어 교황청과 마찰을 일으켰던 그는 “모국어 성경을 읽는 평신도들”을 이단 취급하는 로마카톨릭의 말을 뒤집어 “오히려 평신도들이 모국어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하는 자들이 이단”이라고 주장하며 영어 성경을 번역했다(A.D. 1382). 위클리프는 그 성경으로 옥스퍼드 출신 사제들을 훈련시켜, 영국 전역에서 모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전파하게 했다.

성경에 대한 위클리프의 입장은 반세기쯤 뒤에 태어난 보헤미아의 존 후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후스 덕택에 보헤미아인들 전체가 모국어로 말씀을 접하는 특권을 향유할 수 있었다. 후스는 교황의 비성경적 권위와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다가 화형에 처해져 일찍 생을 마감했지만, 체코어 연구와 성경 번역에 있어 독보적인 업적을 남겼다. 훗날 “모라비안”이라 불리는, 역사상 복음 전파에 가장 헌신적이었던 그룹도 후스가 체코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함으로써 낳은 열매였다.

냉정하게 평가하면, “시대의 양심들”의 눈부신 활약에도 불구하고 대세에는 영향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11-15세기에 살았던 이들 가운데는 아마 단 한 사람도 유럽에서 로마카톨릭의 마수 아래 드리운 “암흑”을 걷어낼 수 있으리라고 전망하지 못했을 것이다. 각지에는 종교재판소가 세워지고, 일반 공무원들에게도 이단을 고문하여 “오류를 정정하도록” 할 뿐만 아니라 “동료들을 밀고할” 책임이 부여된 세상에서 어떻게 암흑이 걷혀질 것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 불가능이란 없다.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적 견지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았던 그 일을 위한 발판을 그분 차원에서 하나씩 차근차근 준비하고 계셨다.

- 십자군 전쟁의 여파 -

수백 년에 걸쳐 벌어진 십자군 전쟁은 유럽 사회에 큰 변혁을 불러왔다. “교황 성하”의 명을 받들어 진군하면 지중해가 갈라지고 하늘에서 불벼락이 떨어져 이교도들을 쓸어버릴 것이라고 기대했던 백성들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그 반작용으로 인해 “세속 군주들의 리더십”이 부각되었다. 거듭된 패전으로 교황들의 위세는 세속 군주들의 그것에 비해 한참 뒤처지게 되었는데, 이 점을 깨닫지 못한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프랑스 왕에게 자존심을 세웠다가 왕실을 뒷배로 둔 추기경에게 뺨을 맞는 굴욕을 당하기까지 했다(그는 이 일로 큰 충격을 받았고, 약 한 달 동안을 앓다가 사망했다). 이후 교황들은 무려 7대에 걸쳐 로마가 아닌 프랑스의 아비뇽에 교황청을 두는 치욕을 맛보아야 했다(A.D. 1305-1377).

물론 군주들과의 권력 다툼은 늘 있는 일이었으므로 “아비뇽 유수” 사건이 로마카톨릭 체제 자체를 뒤흔드는 사건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중세 약 1,000년에 걸쳐 구축된 그들의 공고한 아성에 균열을 만들어 냈던 것은 동방과 서방의 교역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교역로가 개척되고 무역이 활발해짐에 따라, 전통적인 봉건 영주와 농노 간의 종속 관계로부터 독립된 다른 세력, 곧 “중산층”과 “자유 도시들”이 생겨난 것이 로마카톨릭의 입장에서는 큰 악재였다. 로마카톨릭의 주요 재원은 농노들의 세금이었으므로(그들은 유럽 땅의 3분의 1을 소유한 “대지주”였다), 농노들이 자유 도시를 선망하여 봉건 영지로부터 이탈하는 것은 재정적인 문제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자유 도시들을 상대로 할 때는 그간의 정교유착적 문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였다. 그 안에서 로마카톨릭의 영향력은 극히 제한되었고, 반면에 “이단들”의 활동 반경은 넓어졌다. 이런 흐름 속에서 종교 개혁 시기에 자유 도시들이 로마카톨릭과 대립하는 핵심 세력으로 부상한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고 하겠다.

교역로를 통해 동방에서 들어와 유럽 인구의 30-60%를 사망에 이르게 한 “흑사병”도 로마카톨릭에게 엄청난 악재였다. “그리스도의 대리자”를 자처하는 교황도 “재앙”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라는 사실을 백성들이 깨달았다는 것도 주효했지만, 로마카톨릭의 성사들 가운데 하필 “종부성사”가 있다는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흑사병으로 죽어가는 카톨릭교도들에게 찾아가 성사를 집전해야 할 사제들은 무서워서 줄행랑을 쳤고, 이로써 곳곳에서 성사가 파행되자, 결국 교황은 임종 직전이라면 사제 없이 종부성사를 해도 좋다고 선언해야 했다. 백성들 사이에서 로마카톨릭 성사의 권위에 대한 의구심이 피어났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로마카톨릭 체제를 무너뜨린 “마지막 한 방”은 바로 동방에서 들어온 “비잔틴 계열”의 헬라어 필사본들이었다. 학자들은 이 바르게 보존된 필사본들에 비추어 암흑시대를 촉발한 “가짜 성경,” 곧 <라틴 벌게이트>의 오류를 찾아냈는데, 그 가운데는 로마카톨릭 교리 체계 전체를 뒤흔드는 것들도 있었다. 이로 인해 “근원으로”(ad fontes) 돌아가야 한다는, 즉 현재의 잘못된 부분을 성경으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로마카톨릭 내에서 힘을 얻기 시작했다(15세기). 마침내 온 유럽의 어둠을 걷어낸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라는 개혁 정신의 원류가 형성된 것이다. BB

전체 105 / 1 페이지
RSS
번호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