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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례로 거듭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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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3년 03월호>
침례로 인한 중생이 카톨릭의 근본 교리이며 그들 제도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은 주지하는 바이다. 그들은 침례가 “구원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며, “침례가 새로운 영적 탄생을 가져다 준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정의하는 침례는 다음과 같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이제 우리를 구원하는 모양이니, 곧 침례라. 이것은 육체의 더러움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선한 양심을 고백하는 것이니라』(벧전3:21).헨리 8세 때의 인물 리너서(Linacer)는 뛰어난 의사였던 동시에 철저한 로마 카톨릭 신자였다. 우연히 신약 성경을 수중에 얻게 된 그는 그 책을 읽은 뒤 저주하고 내동댕이치면서 이렇게 외쳤다. “이 책이 진리가 아니든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든지 둘 중 하나다.” 그는 단번에 로마 카톨릭 제도가 신약의 성경적 교리와는 정면으로 대립된다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로마 카톨릭과 신약 성경을 진지하게 비교해 본 사람이라면 그가 내렸던 결론과 다른 결론에는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성경이 빛이라면 카톨릭 제도는 암흑 그 자체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며 인간에게는 영적 암흑과 타락을 가져다 주는 교리가 어떻게 해서 로마 카톨릭에 의해 받아들여지게 된 것인가? 성경이 그토록 모호하고 애매해서 인간이 우연하게 성경이 말하는 정반대의 것을 믿고 또 따르게 되었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카톨릭의 교리와 계율은 결코 성경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카톨릭이 그 권력을 악용하여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는 것을 금한 것과, 수없이 많은 성경을 창고에 쳐넣거나 불살라 버렸다는 사실만으로도 입증된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들 외에도 더욱 더 결정적인 증거가 있다. 카톨릭 제도의 주요 교리들을 살펴 보면 그것들이 모두 바빌론에서 유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제부터 독자들 스스로의 눈으로 그것을 확인해 나가기 바란다.
1. 침례로 인한 중생(Baptismal Regeneration)
침례로 인한 중생이 로마 카톨릭의 근본 교리이며 그들 제도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은 주지하는 바이다. 그들은 첫째, 침례는 “구원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침례받지 못하고 죽은 아기들은 하나님께로 갈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침례의 능력은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에게 새로운 영적 탄생을 가져다 주며,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침례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양 우리에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문이며, 우리가 하나님과 최초의 화해를 얻게 되는 수단이다. 따라서 침례는 우리의 원죄와 자범죄에 관한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충족시켜 주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는 모든 은혜를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수단인 것이다”[헤이(Hey) 주교의 <신실한 그리스도인> p.356]. 카톨릭에서 말하는 침례로 인한 중생에 대한 두 가지 측면 모두 비성경적이고 순수하게 이교도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 이유는 침례의 의미를 성경이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이제 우리를 구원하는 모양이니, 곧 침례라. 이것은 육체의 더러움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선한 양심을 고백하는 것이니라』(벧전3:21). 거짓 교사들이 침례와 관련하여 거짓 교리를 펼 것을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시고 그들이 변명할 수 없도록 성경에 침례의 정의를 분명히 해 두셨다. 그런데 로마 카톨릭의 주교 헤이는 실제적으로 침례받지 못한 아이는 천국에 갈 수 없다고 서슴없이 말하였다.
이러한 교리는 성경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이교도의 교리에서 유래한 것이다. 영문학의 고전을 접해 본 사람이라면 애네아스가 지옥의 영토를 방문했을 때 소위 “교회의 의식”을 받기 전에 죽은 불행한 어린 아이들의 혼들을 발견하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그가 그 입구를 지날 때 새로 태어 난 어린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그의 귀를 때렸다. 그들은 운명이 그들의 다정한 어머니로부터 잡아 채 온 어린 아이들 이었다.”
이 가엾은 아기들은 그들 교회의 의식을 거치지 않고 죽었기 때문에 이교도들의 낙원인 엘리지안(Elysian Fields)으로 가지 못한 것이다.
침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자들의 운명은 그러했다. 한편, 침례를 받은 사람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카톨릭의 교리 또한 완전히 비성경적이다. 침례라고 하는 교회의 의식에만 순종한 채 구원받을 줄로 믿고 있는 가짜 그리스도인들이 허다하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침례로 구원받는다는 말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다. 어쨌거나 카톨릭의 교리에 의하면 누구든지 교회법에 따라서 침례를 받은 사람이라면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든지 모르든지 간에 분명히 거듭나는 것이며, 침례의 물로 씻은 아이들은 그들의 원죄로부터 깨끗이 씻겨진다는 것이다. 예수회 신부들은 인도에서 수천 명의 개종자들을 얻었다고 자랑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그만큼의 사람들에게 물을 뿌렸다는 뜻이고 세례를 주기 전에 필요한 최소한의 교육이나 신앙의 고백 없이 기독교의 가장 근본적인 진리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지한 채 로마에 개종하겠다는 그들의 “말로만의 고백” 위에 이루어진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2. 죄를 씻고, 새로운 생명을 주는 물 침례로 구원받는다는 카톨릭의 교리는 순전히 바빌론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교도들도 “중생”(Regeneration)이라는 개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여러분은 아마도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기독교에 대해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인도의 정통 힌두교도들이 갖고 있는 중생이라는 용어 자체와 그 개념은 우리의 그것과 유사하다. 브라만 계급은 자기들이 “두 번 태어난”(twice-born) 사람들임을 자랑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영원한 행복을 보장받았다고 말한다. 그와 똑같은 교리가 바빌론에도 존재했다. 갈대아 신비 종교에서는 그 종교에 입교하려는 사람이 다른 교육을 받기 전에 우선 절대 복종의 표시로서 침례를 받아야만 했다. 우리는 고대의 저술가들로부터 이 침례식에 대해서, 또 그것이 뜻하는 바에 대해서 분명한 증거를 얻어낼 수 있다. 터툴리안(Tertullian)은 특별히 이시스와 미타라의 숭배 의식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교도들은 그들의 종교에 입교하려는 사람에게 반드시 침례를 주었다.” 이 침례는 물에 완전히 잠기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오늘날의 침례와는 판이하여 생명까지 위협하는 정도의 과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침례 및 다른 의식들을 통과한 사람이 “만일 살아 남았으면 그제서야 그에게 신비 종교에 입문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된다”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입교 의식을 거치는 데는 굉장한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 의식에 복종하는 사람에게는 중생 외에도 이제까지 그가 했던 모든 거짓 맹세에 대한 용서를 약속받는 것이었다.
오딘을 숭배했던 영국인의 조상들도 침례의 의식을 지켰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들은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호수나 강가로 데려가서 아기에게 물을 뿌리거나 혹은 물에 담그는 것으로 그의 원죄가 씻겨진다고 믿었다.
멕시코에서도 같은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코르테즈(Cortez)와 그의 병사들이 멕시코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그곳의 토착민들에게도 카톨릭과 똑같이 침례를 받음으로써 거듭난다는 교리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스페인 로마 카톨릭 선교사들로 하여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했던 멕시코인들의 침례식은 프레스코트(Prescott)의 <멕시코 정복,Conquest of Mexico> 에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침례 의식을 위한 모든 것이 준비되고 아기의 친족들이 모두 모이면 의식을 수행할 산파가 불려 오고 이른 새벽에 그 집의 안뜰에 다같이 모인다. 산파는 아이를 팔에 안고 있다가 태양이 떠오를 때 쯤이 되면 흙으로 만든 항아리에 물을 가득 담아 오라고 시키고, 의식에 필요한 기구들은 뜰의 중앙에 놓는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얼굴을 서쪽으로 향하고 서서 몇 가지 의식을 치른다.... 그 뒤에 아기의 이마에 물을 뿌린 후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가야, 세상의 주인이시며 우리의 생명이고 우리의 몸을 자라나게 하며 새롭게 하시는 분의 물을 받아라. 이 물은 너를 씻어 주고 정결케 하기 위한 것이니라. 이 천상의 물방울들이 너의 몸 속으로 들어가 세상이 시작되기 전부터 너에게 주어진 너의 모든 죄악을 멸절시키고 제거하기를 기원하노라’.... 그리고 나서 산파는 물로 아이의 몸을 씻고 이렇게 말한다. ‘네가 어디서부터 왔든지 아이에게 해를 끼치려 하는 너는 이 아이에게서 떠나가라. 이제 이 아이는 새로 태어났고 새 생명을 받았기 때문이니라. 이제 이 아이는 깨끗해졌으며, 우리의 어머니이신 물의 여신께서 이 아이를 세상으로 내보내셨다.’ 이렇게 기도한 후 산파는 아이의 양 팔을 잡고 하늘을 향해 들어올리며 말한다. ‘오 신이여, 당신께서는 당신의 피조물인 이 아이를 슬픔과 고통과 참회뿐인 이 세상으로 보내셨나이다. 신이여, 이 아이에게 당신의 은사와 영감을 주시옵소서. 당신은 위대하시며 또 위대하신 여신과 함께 하심이니이다.’ 이와 같은 A.D.1000년 경에 이르러 교회사의 두아티라 기간(500-1000)이 끝난다. 이어서 사데 기간(1000-1500)이 전개되는데 이 기간은 암흑시대 후반부로 로마 카톨릭이 정치적(국가적)으로 종교적(교회적)으로 전 유럽을 지배하는 전성기이다. 로마 교회는 샤를먀뉴 대제에게 왕관을 수여한 이후로(800) 국왕들을 시녀로 삼아 정치 의식과 산파의 말에서 우리는 로마 카톨릭의 교리와 똑같은 “침례로 인한 중생”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3. 바빌론 기원의 교리
그렇다면 멕시코의 이러한 의식이 갈대아에서 유입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증거는 어디 있는 것인가? 그것은 멕시코인들이 숭배했던 “워단”(Wodan)의 이름에서 명백하게 알 수 있다. 험볼트(Humbolt)의 연구에 따르면 멕시코인들은 워단을 그들 민족의 창시자로서 숭배했는데, 멕시코의 워단은 스칸디나비아에서 오딘(Odin)으로 불렸으며, 워단과 오딘은 결국 바빌론의 아돈(Adon)과 같은 인물이다. 험볼트의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 멕시코의 워단이 바빌론의 아돈과 일치한다는 것이 분명해질 것이다. “프란시스 누에즈 주교의 연구에 따르면 멕시코의 워단은 인류가 멸망했던 대홍수 때 뗏목을 타고 가족과 함께 살아남았던 뛰어난 인물의 손자였다. 그는 인간이 하늘에 닿기 위해 탑을 쌓는 일에 동참했었다. 이 무모한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고 사람들은 그 때부터 각기 다른 방언으로 말하게 되었을 때, 위대한 신의 영은 워단에게 아나후악으로 가서 민족을 이룰 것을 명령했다.” 이 말은 멕시코의 신화가 어디에서 기원했으며, 갈대아의 하늘의 여왕을 숭배하는 이집트 및 페르시아와 동일하게 침례로 인한 중생을 믿는 멕시코의 교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또한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