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들에게 고함 분류
전임 설교자 지원에 관한 성경적 사실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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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6년 11월호>
설교학의 주제로는 설교뿐만 아니라 “설교자”도 고려의 대상이다. 그렇기에 평생을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하는 설교자를 물질로 지원하는 문제를 다루는 것은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니다. 전임 설교자와 비전임 설교자가 주님의 일에 들이는 시간과, 둘의 재정 지원 방식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현 기독교계에 존재하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은 신약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으며, 성경의 원칙과도 완전히 어긋난다. 모든 성도는 왕과 제사장으로(계 1:6), 또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으로 묘사된다. 오늘날에는 하나님께 설교와 가르치는 은사를 받았고 생업으로 스스로 생활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시간을 내는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감사하게도 그런 성도들 중 상당수가 주님의 부르심과 위임에 순종하여, 지금도 “가는 곳마다 말씀을 전하고” 있다(행 8:4). 사역에 전 시간을 바치는 지체들만큼이나 이들도 엄연한 주님의 종들이다. 이와 맞물려 “전문성”이라는 관념이 몰래 스며들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단순함』(고후 11:3)을 우리에게서 도둑질해 가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몇몇 뛰어난 설교자와 성경 교사들이 손수 일하는 모습을 보는데(엡 4:28), 이는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준 조언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너희 자신의 일을 행하며 너희 손수 일하도록 힘쓰라』(살전 4:11).성경의 방침은 선택된 소수만이 주님의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여 설교와 가르치는 일을 도맡고, 나머지는 한가로이 앉아 구경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종으로서 각자의 은사에 따라 특정한 섬김을 감당하는 것이 성경의 참된 방침이다. 모든 성도가 각자의 자리에서 사역자요 주님을 위한 구령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너희 마음속에서 주 하나님을 거룩하게 여기며 너희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답변할 것을 온유와 두려움으로 항상 예비하고』(벧전 3:15).
성경에는 “평신도”와 구분지어 “성직자”에게 주는 권면이 없다. 이 진리를 우리 마음에 단단히 새겨 두도록 하자. 그래야만 오늘날 기독교계가 이 문제로 겪는 온갖 혼란을 우리가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 유념하며, 이제 하나님의 말씀 사역에 전 생애를 드리는 그리스도인에 관해 세 가지 사실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성경은 전임 설교자에 대해 고려한다.
초대 교회 당시 매일의 구제와 관련된 비용 분배를 두고 다툼이 일어나자, 사도들은 제자들을 불러 이 문제를 지혜롭게 처리할, 훌륭한 평판을 듣는 일곱 사람을 택하도록 조언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계속해서 기도하는 일과 말씀의 사역에 전념하겠다고 했다(행 6:1-4). 당시 주님의 일에 전 시간을 쏟는 사람이 적어도 12명은 있었던 셈이다. 이후 성령께서 바나바와 바울을 부르셨을 때 그들 역시 전임 사역에 들어섰고(행 13:1-4), 성도들은 그 사역을 위해 그들을 하나님의 은혜에 온전히 의탁했다. 우리는 디모데전서 5:17에서 말씀과 교리에 수고하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사람으로 여기라는 구절을 읽을 수 있는데, 여기에는 그들의 필요를 위해 물질로 지원하라는 뜻도 담겨 있다. 이 전임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1) 주님께서는 그들을 특정한 일을 하도록 부르셨다(행 13:2).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바쁜 와중에 부르심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게으른 그리스도인을 전임 사역에 부르시지 않는다. 성경은 일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먹지도 말라』(살후 3:10)고 말씀하신다. 이 단식 요법은 매우 유익해서 게으름뱅이를 다루는 일에 있어 가장 효과적인 치료책으로 드러나리라 확신한다!
2) 주님께서 갖춰 주셨다.
그들은 그 일을 위해 주님께로부터 은사를 받았다. 『그가 어떤 사람들은 사도로,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들은 복음 전도자로, 어떤 사람들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들을 온전케 하며 섬기는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여 우리 모두가 믿음의 하나 됨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지식의 하나 됨에 도달하게 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엡 4:11-13). 이 은사들은 또한 그들이 기쁘게 교제를 나누던 성도들과의 모임에서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주어졌다. 결국 성도들은 그들의 은사를 알아보게 되는데, 그 은사를 통해 세움을 입었기 때문이다. 어떤 지체가 참으로 은사를 받았는지는 동료 성도들이 알아보고 감사하며 칭찬하는가로 입증된다.
3) 형제들이 인정했다(행 13:3).
전임 사역으로 부르심을 받은 당사자들도 심사숙고했지만, 형제들도 그 일에 관해서 생각이 같았다. 형제들이 금식하고 기도한 후에, 그들이 부르심을 받았음에 동의한다는 표시로, 또 그들이 부르심 받은 사역을 전적으로 지지한다는 표시로 그들에게 안수했던 사실에서 그런 모습이 보이는 것이다. 형제들은 그 부르심이 유효함을 인식했고 주님께서 부르신 그 사역에 전폭적인 연대감을 가졌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이 안수가 설교하는 일이나 가르치는 일에 대해 권위를 부여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그 일들을 오랜 시간 동안 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약에서 설교자를 선임하는 일은 없었다. 성도가 선임되는 기록으로는 목사가 유일하고, 그 일은 사도에 의해서든 사도가 위임한 사람에 의해서든, 사도의 직접적인 권위를 통해 이루어졌다(행 14:23, 딛 1:5). 안티옥 교회의 형제들은 바나바와 바울에게 자신들의 온정이 담긴 지지를 표현하고자 그와 같은 행동을 한 것이었다. 로마카톨릭과 성공회가 기반을 두는 소위 “사도적 계승”이라는 오류는 하나님의 말씀에서든 역사적 사실에서든 찾을 수가 없다. 오히려 사도들이 했던 사역을 우리가 성공적으로 수행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강조해야 한다!
후에 바울과 바나바가 안티옥에 돌아왔을 때, 그곳은 그들이 완수한 일을 위해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의탁받았던 곳이다(행 14:26). 보다 후에 바울은 실라라고 불리는 동역자를 택해서 두 번째 선교 여행을 떠났다. 『형제들이 그들을 하나님의 은혜에 의탁하더라』(행 15:40). 이 모두가 얼마나 단순한가! 또 기독교계의 “임직 예배”와는 얼마나 다른 것인가! 기독교계는 대부분 이러한 예식을 거치지 않은 이에게는 설교, 침례, 주의 만찬 집례를 허락하지 않는다. 찰스 스펄전은 사람이 주도하는 임직식을 거부하며 “빈 머리 위에 빈손을 올리는 경우가 허다하다!”라며 한탄하곤 했다.
형제들의 진심 어린 추천 없이 전임 사역에 들어서는 사람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당연히 회중도 어떤 성도가 경건하고 한결같으며 신실한지, 또 어떤 은사를 받았고 하나님의 사역자로 적합한지 오랜 시간 스스로 증명해 보이지 않았다면 전임 설교자로 추천하지 않았다.
4) 성령의 보내심을 받았다(행 13:4).
그들은 위원회나 선교회가 아니라 형제들의 추천을 받아 파송되었다. 이어 하나님의 영께서 이끄시고 권한을 부여하심으로그들의 사역은 복되게도 큰 열매를 맺었다. 성령님의 능력 없이 전임 사역에 발을 들이는 것이 얼마나 무용하고 심각한일인가! 세상의 신학 교육이나 선교사 훈련, 그리고 회중의 인정만으로는 이 고된 사역을 감당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요구하시는 기준은 스카랴 4:6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힘으로도 아니요, 능력으로도 아니며, 오직 나의 영에의해서니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B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