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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용감한 군사들> 허드슨 테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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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8년 04월호>

중국에 선교하러 간 위대한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는 1832년 영국 반즐리(Barnsley)에서 태어났다. 그는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났고, 그의 아버지는 감리교회의 목사였다. 하지만 허드슨은 17세가 될 때까지 세상에서 살기로 작정했다. 그러던 중 어머니의 기도와 전도지 한 장이 17세가 되던 해에 그를 그리스도께로 돌려놓았다. 1849년 그는 자신의 영적 상태가 매우 침체되어 있는 것을 깨닫고, 중국에 선교사로 가서 새롭게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스스로를 연단시키기 위해 저소득 계층이 살고 있는 지역으로 이사했고, 앞으로 중국에서 직면하게 될 여러 가지 예상되는 난관들을 스스로 극복하면서 자신을 단련시켰다. 그러면서 그가 맨 처음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최우선 순위로 모시고 섬기는 사람을 돌보시며 복을 주신다는 점을 깨닫게 된 것이다.

허드슨은 런던에서 약간의 의료 훈련을 받은 후, 1853년 9월 중국복음화협회(Chinese Evangelical Society)에 소속되어 중국으로 떠났다. 그는 아주 고된 항해 끝에 1854년 3월 1일 상하이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이곳 상하이에 정착했지만, 이후 시민전쟁이 발발하여 다른 외국인들이 거주하는 국제 거주지로 강제로 이주당했다. 1855년에는 여러 마을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는 여행을 시작했다. 어떤 때는 혼자 다녔고, 또 어떤 때는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다녔다. 복음을 전파했을 뿐 아니라 책들도 나눠 주었고 환자들을 치료해 주기도 했다. 한번은 청밍(Tsungming)이라는 섬에서 잠시 일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의 의료 행위가 그 지방 의사들의 사업에 손실을 끼친다는 이유로 그 섬으로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허드슨 테일러와 스코틀랜드 출신의 복음 전도자 윌리엄 번스(William Burns)는 상하이 남부를 1,600km나 여행했다. 그리고 1856년에는 스와튼에서 두세 달 동안 사역했다. 하지만 곧 사역의 문은 거기서도 닫히고 말았다. 같은 해에 그는 도둑을 맞았는데, 당시 그는 닝포(Ningpo)에 정착하려고 여행하던 중이었다. 그가 도둑맞은 품목으로는 여행용 침대, 약간의 옷, 시계 두 개, 어머니가 주셨던 성경 그리고 몇 가지 의료 기구들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를 지원하던 선교 기구에서 그에게 선교 지원금을 중단한 일이 발생했다. 그는 그 선교 기구에서 1856년 말에 사임했다. 그 후로도 그는 지속적으로 말씀을 전파했다.

1859년 1월 허드슨 테일러는 결혼했는데, 신부는 영국 선교사 메리 앤 앨더시(Mary Ann Aldersey)로 21세의 조력자였다. 그들은 매우 행복한 신혼 생활을 했고, 하나님께서는 몇 명의 자녀들을 그들에게 주셨다. 허드슨 선교사는 건강상의 문제로 1860년에 영국으로 휴가를 떠났다. 휴가 기간에 허드슨은 닝포어 신약성경을 번역했다. 그리고 그 성경에다 "중국의 영적인 필요와 요청들"(China's Spiritual Needs and Claims)이라고 썼다. 그는 1865년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를 설립하고 효과적인 사역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자기에게 24명의 선교사들을 주시어 중국으로 보내 주시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는 1년 안에 그에게 24명의 자원자와 1만 3천 달러의 지원금을 보내 주셨다. 1865년 12월에는 조산으로 인해 한 아기를 잃었고, 아내 메리는 양쪽 폐가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1866년 5월, 테일러 부부와 자원자 16명은 중국을 향해 출발했다. 남중국해에서 불어닥친 태풍을 간신히 견딘 후 9월에는 증기 예인선에 의해 예인되었다. 닝포 선교지가 사람들로 넘쳐 났기에, 그들 모두는 12월에 양초우(Yangchow)로 이사하기로 결정했다. 여덟 살 된 딸 그레이시가 1867년에 죽었다. 1868년 7월 말에는 양초우에서 울타리를 두른 거주지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몇 주가 지난 후 도둑들이 들어서 선교사들에게 폭력을 가하고 물건들을 강탈해 갔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거주지가 완전히 불타 버렸다. 그 사고로 인해 허드슨 선교사의 아내를 포함해서 몇 명의 선교사들이 심하게 상처를 입었고, 아내 메리는 부축을 받지 않고서는 걸을 수 없는 지경까지 되었다. 그때가 허드슨에게는 영적 전환기가 되었는데, 그는 자신의 노력으로 일하기보다는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면서 그리스도 안에 거하겠다는 서원을 했다. 그런 후 그들은 친키앙(Chinkiang)에서 몇 주간 머물다가 11월에 양초우로 돌아왔다.

1870년 2월, 테일러 가족은 어려운 결정을 해야 했는데, 다섯 명의 자녀들 중에서 네 명은 영국으로 보내고 막내 찰스만 그들과 함께 있기로 했던 것이다. 그런데 또다시 다섯 살이었던 사무엘이 2월 4일에 죽었다. 마침내 3월 22일에는 눈물을 머금고 세 자녀(베티, 프레디, 메리)와 헤어져야 했는데, 그들을 돌볼 에밀리 블래츨리(Emily Blatchley)와 함께 영국으로 떠나보냈던 것이다.

새로운 아기 노엘이 7월에 태어났지만 20일 후에 죽고 말았다. 그로부터 13일 후에 아내 메리도 결핵으로 인해 죽었다. 그때 메리는 32세의 나이였고, 8명의 자녀를 출산했으며 한 명은 사산했다. 건강 문제와 사역 때문에 귀향해야 했던 허드슨은 1871년 영국으로 돌아갔다. 같은 해에 폴딩(Faulding) 자매를 만났고, 그해 둘은 결혼했다. 그다음 해인 1872년 중국내지선교 런던위원회를 설립했다. 그런 후에 새 아내와 함께 중국으로 돌아왔다. 1874년 허드슨은 새로운 성에서 일할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이를 위해 4천 달러를 보내 주시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다른 선교사와 함께 우창(Wuchang)의 서부 지역에 선교지부를 신설하려고 했다.

그러던 중 영국에 있던 보모 블래츨리가 죽었고, 허드슨과 그의 아내는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급히 영국으로 가야만 했다. 이 여행 기간에 그는 심하게 상처를 입어서 이후 2,3개월을 몸이 마비된 채로 침대에서 보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건강을 회복시켜 주셨고, 그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허드슨 혼자 왔고, 그의 아내는 영국에 남아 여섯 명의 자녀들을 돌보았다. 이 중에서 세 명은 이전 아내에게서 낳았고, 두 명은 새 아내에게서 낳았으며, 나머지 한 명은 입양한 딸이었다.

정치적인 변혁은 중국에 새로운 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하여 그는 1876년에서 1878년까지 2년 동안 새로운 선교 거점들을 만들기 위해 5,800km를 여행했다. 1878년 아내가 다시 합류했다. 1887년에 이르러서는 59개의 교회를 설립했다. 성도들의 수는 1,600명이 넘었다. 하나님께서는 사역을 위해 그에게 10만 달러를 주셨고, 102명의 새로운 선교사들이 합류했다.

건강 문제 등으로 그는 잠시 후면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다. 그와 그의 아내는 은퇴해야겠다는 생각을 거의 굳힌 상태에서 스위스로 갔다. 바로 그때 중국에서는 의화단 사건(Boxer Rebellion)이 발발하여 수백 명의 선교사들과 중국인 그리스도인들이 살해되거나 추방당했다. 그의 아내는 1904년에 죽었다. 1905년 허드슨 테일러는 마지막으로 중국에 돌아와 새로운 병원 건립을 위해 장소 몇 군데를 방문하여 점검했다. 이후 그는 1905년 6월 3일에 죽었고, 양쯔 강 근교에 있는 아내 메리의 묘 옆에 장사되었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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