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신학논단 분류

주기도문 오독(誤讀)의 시대

컨텐츠 정보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6년 06월호>

책의 본문을 읽고 해석하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주관적”이다. 그러나 그 주관성이 독자 자신의 편견을 강화하는 도구로 전락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혹자는 독자의 주관이 개입된 “창조적 오독”이 새로운 문학을 탄생시킨다고 했지만, 오독은 대부분 창조적이지 않으며, 성경과 관련해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은 독자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취하는 책이 아니다. 그러한 자세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의 의도를 왜곡할 뿐만 아니라, 본문에 따라서는 오독한 독자를 지옥에 던져 넣을 수도 있다. 교회와 관련되어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배우거나 만들어 낸 해석의 감옥에 갇혀, 성경 본문을 읽으면 읽을수록 오류가 강화되는 비극에 빠져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성경을 아무렇게나 읽을 자유가 없으며, 오히려 성경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것을 읽는 독자의 생각들과 의도들을 판단하는 인격을 지닌 매우 무서운 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능력이 있어 양날이 있는 어떤 칼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 그리고 관절과 골수를 찔러 가르고 마음의 생각들과 의도들을 판별하느니라』(히 4:12). 『성령의 칼』(엡 6:17)인 성경은 그것을 잘못 읽어 낼 때 혼을 파괴하는 가장 위험한 무기가 된다. “책들의 제왕”인 성경은 그 어떤 책보다도 권위가 높기에, 그 해석에 따른 책임 또한 그 무엇보다 무겁고, 결과는 극과 극을 오간다. 해석에 따라 하늘나라와 지옥을 오가는, 초극단적인 결과를 낳는 책이 바로 “성경”인 것이다.

이 마지막 때는 “주기도문 오독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대”라는 말에는 “그 시기의 특징이나 징후가 뚜렷한 시대적 구간”이란 뜻이 담겨 있다. 본 논단의 제목을 “주기도문 오독의 시대”라고 정했을 때는 나름대로 엄중한 이유가 있다. 현재 우리가 지나고 있는 배교한 “라오디케아 교회 시대”(1900년 - 현재)는 “주기도문 오독”이 영적 소경이 된 모든 교회들의 강단과 성경 공부, 신학교들의 강의실과 기독교 서가의 책들에서 매우 광범위하고도 뚜렷하게 자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주기도문 오독”을 “라오디케아 교회 시대의 거대한 영적 특징”이라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혹자는 주기도문에 관하여 “학자연(學者然)하는” 설명을 늘어놓는다. “주기도문은 마태복음에 수록된 단순한 ‘기도 교육용 텍스트’나 신약성경 내에 고립된 파편적 본문이 아니다. 이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의 언약 사상과 고대 세계의 종교적·문화적 토양이라는 거대한 지평 위에서 주기도문을 재위치시켜야 한다. 후반부의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나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와 같은 간구는 철저히 고대인들이 마주했던 실존적 불안정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주기도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형성되고 전승되던 고대 세계의 문화적·종교적 토양에 대한 배경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풍유적 해석을 선호하는 자들은 “일용할 양식”에 관해 “창조적 오독”으로 횡설수설한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말라. 예수님이 고작 하루 먹을 밥을 구하라고 하셨겠는가? 여기서 ‘양식’은 영적인 양식, 즉 ‘말씀’이자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는 것이다. 주기도문을 육신의 배를 채우기 위한 기도로 격하시키지 말라.”
“행위 구원”을 좋아하는 자들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에 푹 빠져 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는 구원의 조건이다. 성경에 ‘우리가 남의 죄를 용서해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것은, 내가 남을 용서 안 하면 하나님도 나를 용서 안 하신다는 뜻이다. 즉 구원은 내 행위에 달린 것이다!”

“단편적 성경 지식 예찬자”는 구절과 구절을 비교해 가면서 오류를 방출한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는 오역이다. 야고보서에 보면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고 했는데, 왜 주기도문에는 하나님보고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라’고 기도하는가? 번역이 잘못됐다! ‘우리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 달라’고 번역해야 맞다.”
본 논단을 읽는 독자는 이 가운데 어떤 부류에 속하며, 주기도문을 어떻게 “오독”하는가? 독자도 “주기도문 오독의 시대”를 부채질하는 숨은 공모자인가? 그 허황된 지식의 잿더미 위에 얹어질 또 하나의 불쏘시개인 것인가?

배교한 교회들에서 주기도문이라고 불리는 기도는,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마 6:9)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주님께서 “유대인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알려 주신 “제자들의 기도”이다. 이 구절의 『너희』를 신약 그리스도인들로 해석함으로써 치명적인 이단 교리를 교회에 퍼뜨린 자들이 무수히 많았다. 『너희』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성하는 “유대인 제자들”을 지칭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민족적으로” 낳으신 “한 아들”이기에(출 4:22), 그들은 하나님을 부를 때 민족적으로 『우리 하나님』(수 24:24, 삼상 7:8, 왕하 19:19 등)이라고 부른다. 그렇기에 이 기도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 아닌 “우리 아버지”로 부르면서 그 아버지의 영광에 초점을 맞춘 내용으로 시작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시옵고,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시오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10). 성경이 기록된 첫 번째 목적은 『교리』(딤후 3:16)이기에, “제자들의 기도” 역시 “교리”적으로 올바르게 해석되어야만 한다. 그 시작부터 “아버지의 왕국의 도래”가 강조되는 기도에 “왕국”과 관련된 진리가 담겨 있어야 한다는 점은 너무도 당연하다.

“유대인들”이 그들의 하나님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기도는 『아버지의 왕국』이 문자적으로 “땅”에 이루어지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 왕국에 관해 유대인 제자들에게 통치를 약속하셨다. 『나의 아버지께서 나에게 왕국을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가 나의 왕국에서 내 식탁에서 먹고 마시며 또 보좌에 앉아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하게 하리라』(눅 22:29,30). 이 왕국은 왕국 백성인 유대인의 거부로 초림 때 이뤄지지 않았다. 따라서 그것은 주님께서 장차 재림하시어 “다윗의 보좌에 앉아 통치하실”(눅 1:31-33) 물리적인 왕국이 된다. 초림 때는 주님의 왕국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었지만(요 18:36), 재림 때는 세상 왕국들을 접수하여 그분의 왕국으로 삼으실 것이다(계 11:15). 이것은 교회 시대의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롬 14:17)가 아닌,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왕국이다.
주님께서는 미래, 곧 재림 때에 “왕국이 임할 것”(마 6:10)을 구하면서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셨기 때문에, “제자들의 기도”가 드려지는 시점은 왕국이 임하기 전인 “대환란 기간”으로 설정될 수밖에 없다. 주님께서는 그 기간에 다음의 세 가지 사항을 놓고 기도할 것을 가르치셨다.

1. 일용할 양식 : 광야에서의 초자연적 부양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 6:11)라는 간구는 교회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드려야 할 일상적인 기도가 아니다. 주님께서 왕국을 가져오시기 전, 이 세상에는 전무후무한 대환란이 있게 되는데, 이는 『야곱의 고난의 때』(렘 30:7)라 불리는 이스라엘의 민족적 고난 기간이다. 대환란 때 적그리스도의 박해를 피해 “셀라 페트라”라 불리는 바위 성읍으로 피신한 유대인들은 짐승의 표 없이는 경제활동을 할 수 없기에(계 13:17), 후 삼 년 반 동안 초자연적인 부양을 받아야만 한다(계 12:14). 과거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만나를 공급받았듯이(시 74:14, 미 7:14,15), 대환란 때의 유대인 환란 성도들은 그날의 생존을 위해 이 기도를 드려야 한다. 이것은 대환란 때 유대인들이 적그리스도의 박해 아래서 드려야 할 실질적인 “생존 기도”인 것이다.

2. 용서의 조건 : 행위와 인내가 요구되는 대환란 기간의 구원 방법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의 빚진 것들도 용서해 주시오며』(마 6:12)라는 말씀은 교회 시대의 은혜 복음과 전혀 다른 교리를 담고 있다. 교회 시대의 성도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근거로 행위라는 조건 없이 죄 용서를 받았지만(골 1:14), 대환란 때에는 타인의 죄(죄의 빚, 눅 11:4)를 용서하는 “행위”가 뒷받침되어야만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다. 이는 명백한 “행위 구원”의 요소이며, 대환란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더하여 계명을 끝까지 지키는 “인내”가 뒤따라야 구원받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계 14:12). 『대환란』(마 24:21)을 예언하는 마태복음 24장에서는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가 왕국에 들어가는 조건인 “왕국 복음”으로서 제시된다(마 24:13,14). “끝까지 견디는 인내”를 강조하는 구원론은 믿음과 행위로 끝까지 견뎌야만 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 환란 성도들을 위한 것이다.

3. 시험과 악으로부터의 구원 : 적그리스도의 박해에 따른 배교의 위험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악에서 구하여 주시옵소서.』(마 6:13)라는 간구는 대환란 때의 급박한 상황을 전제한다. 환란 성도들은 행위로 구원을 지켜야 하기에, 광야의 시험 때처럼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죄를 지으면 구원을 상실할 위험이 크다(히 3:8). 무엇보다 짐승의 형상에게 경배하지 않으면 목베임을 당하는(계 13:15) “악”의 통치 아래서, 믿음을 부인하는 죄를 짓지 않도록 날마다 시험에서 구원받는 일은 생명보다 귀중한 일이 된다. 만약 적그리스도의 극심한 박해 아래서 시험에 들어 적그리스도와 타협한다면, 즉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형상에게 경배한다면 “구원을 잃어버려” 영원한 불못의 심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계 14:9-11). 대환란 때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믿음”과 하나님의 계명들을 끝까지 인내하며 지키는 “행위”로 구원을 유지하면서, 그들의 조상이 2천여 년 전에 거부했던 그 “왕국”을 기다려야 한다. “제자들의 기도”는 대환란 때에 왕국을 기다리는(마 6:10) 유대인들이 드려야 하는 기도이며, 기도에 담긴 “모든 실제적인 목적”을 위해서 드려져야 할 기도이다.

기도의 마지막 내용은 『그 왕국과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옵니다.』(마 6:13)이다. 주님께서는 기도의 시작 부분인 10절에 이어 또다시 “왕국”을 언급하시며 기도를 종결지으신다. 기도의 “시작”과 “끝”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지상에 세우실 “왕국”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마태복음 6장의 “제자들의 기도”는 적그리스도의 박해 아래 있는 유대인 환란 성도들이 그들을 구원하실 메시아 왕의 지상 왕국을 기대하면서 드려지는 기도인 것이다.

초림 때 실패한 왕국, 그 “연기된 왕국”에 대한 무지가 “신학적 혼란”을 낳았고, 무수한 “창조적 오독”을 낳았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기도”를 가르치신 당시 상황은 철저히 유대적인 “왕국 복음” 전파 시기였다(마 4:23). 이 왕국 복음은 다시 전파될 것이다(마 24:13,14). 그 일이 일어나는 대환란 때 드려질 기도를 분별하지 못한 채 예배 때마다 주문처럼 웅얼거리는 한국 교회는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딤후 2:15) 해석하지 못하는 “아전인수식 영해(靈解)”를 당장 중단해야 한다. BB

전체 1,034 / 1 페이지
RSS
번호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