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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히브리서 2: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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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6년 08월호>
2:14 자녀들이 피와 살에 참여하는 자인 것같이 그 역시 같은 모양으로 동일한 것에 참여하신 것은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망시키며 또 죽음을 두려워하므로 평생을 노예로 속박되어 있는 자들을 놓아 주시려 함이니라. 이는 주께서 진실로 천사들의 본성을 입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의 씨를 입으셨음이라. 그러므로 그가 모든 일에 마땅히 자기 형제들과 같이 되셔야 했으니, 이는 하나님과 관련된 일들에 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백성의 죄들을 위해 화해를 이루려 하심이라. 그가 이 일에 친히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와주실 수 있느니라.이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다루는 위대한 구절들이다. 히브리서 2:5-8에서 우리는 아담에게 주신 땅의 유업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을 유업으로 받기 위해서는 아담처럼 인간의 모습을 입고 오셔야 함을 보았다. 이 땅은 인간에게 차지하도록 주신 것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인자로 오셔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가리켜 “인자”라고 부를 때는 그 분의 왕되심이 강조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왕이 되시기 이전에 먼저 인간으로서 죽으셔야 했다. 그 분이 아담처럼 땅의 유업을 차지하려고 오신 것은 아담이 죄로 인하여 죽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담의 입장으로 땅을 차지하시기 위해서는 아담이 실패했던 것을 먼저 회복하셔야 했다. 우리가 로마서 5장에서 본 것처럼 아담 안에서는 모두가 죽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두가 살게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담의 입장으로 죽으셨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인자”라는 말로 그 분의 인성을 다룰 때 우리는 그 분의 왕되심을 말하기 전에 그 분의 고난과 죽음과 대속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8절까지의 본문이 아담에게 주어진 왕권위임이기 때문에 9절부터 펼쳐지는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차지하시는 땅의 유업을 다루어야 당연한 것 같으나 9절부터의 본문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다루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 분은 영광을 얻기 이전에 아담이 실패한 일을 죽음으로 이루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이다. 그래서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다루는 위대한 본문이다. 히브리서에는 본문과 같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다루는 부분이 여럿 등장하는데, 예를 들면 5:7-9과 13:10-14 등이다.
『자녀들이 피와 살에 참여하는 자인 것같이』(14절). 피와 살은 인성(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왜냐하면 완전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피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성육신하시기 전, 그리고 부활하신 후의 예수 그리스도는 피가 없으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이 되실 때 자녀들과 똑같이 “피와 살”에 참여하셨는데, 그것은 죽음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멸망시키기 위함이다. [누가복음 24:39에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자신의 몸을 언급하셨을 때 “살과 뼈”만 말씀하셨지 피는 언급하지 않으셨다. 이것은 또한 아담이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어 타락하기 전의 몸의 상태였다. 그래서 아담은 이브를 보고 피를 언급하지 않고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고만 말했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부활하면 얻게 될 육체이다(빌 3:21).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피와 살”에 참여했다는 것은 그 분이 인간의 육체를 입으셨다는 것을 말하며, 따라서 그 분의 인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피를 가진 자는 죽게 되어 있다. 예수님은 죽게 되어 있는 인간들을 그 속박에서 풀어주시기 위해서 죽는 몸을 가진 인간이 되셨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멸망시키시는 방법은 죽음에 참여하심을 통해서다. 그래서 예수님은 피와 살에 참여하신 것이다.
『죽음의 세력을 가진 자, 곧 마귀』(14절). 사실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 나는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고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건져낼 수 있는 자가 없도다』(신 32:39).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죽이는 권세를 허용하셨다. 사탄은 악한 일이나 재앙을 내리는 일을 수행하기 위한 하나님의 종이다. 사무엘하 24:1에는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인구조사를 하도록 말하게 하셨다고 되어 있는데, 역대상 21:1에는 사탄이 다윗을 충동하여 인구조사를 하게 했다고 되어 있다. 이 두 가지 진술은 모순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사탄을 시켜서 하신 것이다. 사탄은 재앙을 가져오기 위한 하나님의 종으로 등장한다.
그러므로 그는 죽음의 권세를 가진 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욥기 1:12에서 사탄의 권세를 인정하신 다음 욥의 생명을 건드리지 말라고 특별히 명령하시는 것이다. 주님께서 욥의 생명에 대해 특별히 명령하시지 않았다면 사탄은 그 죽음의 권세로 말미암아 욥을 죽였을 수도 있다.
사탄은 죽음의 권세를 가진 자이다. 아담이 타락하여 죽게 되었을 때 그는 사탄의 수하에 들어갔다. 아담 안에서는 모두가 죽게 되었는데, 그들은 모두 사탄에게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에 죽어도 다시 사는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게 된다. 그리고 이 사탄은 결국 멸망당하게 되고, 죽음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로 말미암아 멸망당하게 된다. 『멸망받게 될 마지막 원수는 사망이라』(고전 15:26).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그 분 안에 들어온 자는 누구나 살게 된다.
『또 죽음을 두려워하므로 평생을 노예로 속박되어 있는 자들을 놓아 주시려 함이니라』(15절).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죽게 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이 15절에서 분명해진다. 예수님은 마귀를 멸망시키신 것 뿐 아니라 죽음을 두려워함으로 평생을 노예로 속박되어 있는 인간들을 풀어주셨다.
모든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구약성도들은 죽음을 두려워했다. 왜냐하면 구원을 영원히 잃어 버리지 않고 또 하나님께서 받아 주신다는 보장이 그들에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확실한 자비”(행 13:34)를 받은 다윗마저도 죽음을 두려워했다. 그는 성령께서 그를 떠나갈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시 51:11). 그러나 십자가 이후에는 상황이 바뀌었다. 그리스도인은 죽은 다음에 어디에 가는지 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일로 인해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요한일서 4:17-18에는 최후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온전한 사랑에 대해서 강조한다. 우리는 죄를 처리하신 분이 계시기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탄을 심판하신 분을 모시고 있기에 두려워하지 않는다(요 16:11). 우리는 죽은 다음에 즉시로 전능하신 분의 임재 앞으로 가게 된다(빌 1:21-23, 고후 5:1-10).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의 속박에 놓여 있지 않다. 우리는 자유다. 비록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많은 문제와 고난을 당할지라도 결코 죽음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주께서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이다(고전 15:50-56).
『이는 주께서 진실로 천사들의 본성을 입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의 씨를 입으셨음이라』(16절). 천사들은 영이다(히 1:7).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천사들의 본성을 입으시고 오셨다면 그 분은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같이 영으로만 오셨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주님은 “아브라함의 씨”를 입으셨다. 다시 말해서 육체를 입으시고 아브라함의 후손인 마리아를 통해 인간으로 오셨다는 말이다. 로마서 1:3에서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다윗의 씨”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이것은 “육체를 따라서”만 그렇다는 말이다. 『그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씨에서 나셨으며』(롬 1:3). 그 분의 진정한 씨는 하나님의 씨이다. 『주의 거룩하신 아들 예수』(행 4:27).
이것은 신약에서 매우 강조되어 있는 “경건의 신비”이다. 『경건의 신비는 논쟁의 여지없이 위대하도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으로 나타나셨고...』(딤전 3:16). 이 말씀에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시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 교리를 가리기 위해서 이 구절에서 “하나님”을 빼버리고 “그는 육신으로 나타나셨고”라고 변개시켜 육신으로 나타나신 그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게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그 분이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글 개역성경>을 비롯한 대부분의 변개된 성경들은 이 부분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의 성경과 정확히 일치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격하시키는데 동참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가 모든 일에 마땅히 자기 형제들과 같이 되셔야 했으니』(17절). 여기에서 “형제들”이란 기본적으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육체적인 후손인 히브리인들을 가리킨다. 16절에서 예수님이 천사와 대조되는 모습으로 인간의 육체를 입으셨다고 설명하는 부분에서 특별히 “아브라함의 씨”를 강조했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곧바로 창세기 12장과 17장에 있는 아브라함의 언약을 생각나게 한다. 아브라함의 씨는 갈라디아서에서 보는 것처럼 영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지만, 육신적으로는 여전히 유대인에게 한정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씨인 유대인들을 축복하는 자들을 복 주시고 유대인들을 저주하는 자들을 저주하신다(창 12:3).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것처럼 팔레스타인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며(창 13:14-15; 15:18-21), 하나님은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어 영원히 그들의 하나님이 되신다(창 17:7). 그러므로 본문의 “형제들”은 일차적으로 육체를 따른 유대인들이다. 예수님께서도 육체로는 이스라엘에게서 나셨다(롬 1:3).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형제들”이란 이방인들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본문의 문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순히 육체를 입으시고 오신 것을 말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백성의 죄들을 위해 화해를 이루려 하신다고 말한다. 마태복음 1:21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백성, 유대인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러 오셨다고 말하고 있으나, 또한 요한복음 1:12에서는 영접하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다고 말하고 있으며, 고린도후서 5:18-21에서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형제들”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유대인이요, 둘째는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백성이다.
『이는 하나님과 관련된 일들에 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백성의 죄들을 위해 화해를 이루려 하심이라』(17절). 예수님은 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이시다. 그 분은 아론을 포함한 구약의 대제사장들과 같지 않고, 로마 카톨릭의 사제들과도 같지 않다. 제사장이란 기본적으로 죄를 지은 백성들이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는 직분을 가진 사람이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러한 일을 하셨는데, 구약의 대제사장들이 하지 못했던 완전한 구원을 이루신 것이다.
“화해”라는 말은 적대관계에 있던 사람들이 그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좋은 관계가 된 것을 말한다. 하나님과 인간은 서로 적대 관계에 있었다. 우리의 죄가 필연적으로 그의 거룩하심에 반응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히 2:17)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적의가 존재하게 되는 것인데(엡 2:15-16), 하나님의 호의로 말미암아 이제는 화해를 통해 서로 친구가 될 수 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도 그의 아들의 죽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으니, 더욱더 화해하게 된 우리는 그의 생명으로 인하여 구원받게 되리라』고 말한다(롬 5:10). 『그의 십자가의 보혈을 통하여 화평을 이루고 땅에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이나 그에 의하여 모든 것이 자신과 화해하는 것이라』(골 1:20). 많은 사람들은 죄에 대한 개념을 무시한 채 단순하게 사랑이나 평화, 화해를 말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죄와 저주, 적대관계 등에 대한 전제하에서 하나님의 피로 인한 화해를 제시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한 개념이 없이 “믿음을 나눕시다”, “그리스도를 당신의 생활에 모시라”, “사랑”, “평화”, “하나됨” 등의 말은 모두 인본주의적인 발상에서 나오는 것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죄를 지적하지 않으며, 강단에서는 지옥 설교가 사라져간다. 이것은 라오디케아 교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가 이 일에 친히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와 주실 수 있느니라』(18절). 이 구절은 우리의 실제적인 신앙생활에서 굳게 붙들 수 있는 말씀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순간 순간 시험과 고난을 당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시험을 능히 도우실 수 있기에 이 말씀은 고난과 시험을 당할 때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큰 힘이 된다.
주님께서 우리의 시험과 고난을 도우실 수 있다는 것은 단지 그 분의 능력이 크시기 때문에 도우실 수 있다는 말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시험을 당하셨기 때문에 고난 받는 자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고 또 도우실 수 있다는 말이다. 누군가가 고난받는 자를 상담할 때 그의 위치가 되어보지 않았다면 그의 마음을 참으로 헤아릴수 없을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험받고 고난받는 우리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모든 시험을 다 받으셨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4장에서도 재차 설명된다. 『이는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할 수 없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기 때문이라』(히 4:15).
Bible Believers / 79
주님은 그의 생활 중에 많은 고난을 당하셨다. 그 분의 백성들로부터 거절당했으며 때때로 주님은 누우실 만한 집도 없었다. 주님이 당하신 대표적인 시험은 누가복음 4장에서 제시된, 광야에서 마귀에게 받으신 세 가지 시험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시험은 인간이 당할 만한 모든 시험을 다 포함한다. 이 세 가지 시험은 요한일서 2:16에서도 제시되며, 창세기 3장에서 인류가 최초로 겪은 시험과도 연결된다. 돌로 빵을 만들라는 것은 육신의 정욕에 대한 시험으로, “먹음직하고”에 해당한다. 세상의 왕국들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사탄에게 절하라는 것은 안목의 정욕에 대한 시험으로, “보기에도 즐겁고”에 해당한다. 성전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은 생의 자랑에 대한 시험으로, “현명하게 할 만큼 탐스러운”에 해당된다. 인간이 당하는 시험 중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생의 자랑 가운데 포함되지 않는 것은 없다. 이 모든 시험은 인간이 당하는 모든 시험의 기초가 된다. 그리고 이것들은 주님께서 사랑하지 말라고 하신 “세상”으로부터 나온 것들이다. 중요한 것은 최초의 인류는 이 세 가지 시험을 당할 때 이기지 못했으나 주님은 이 세가지 시험에서 승리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4:15에서는 예수님께서 모든 시험을 당하셨으나 죄는 없으시다고 말한다. 주님은 우리가 받으시는 모든 시험을 당하셨으므로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할 수 있으시다. 또한 그 시험들을 다 이기셨으므로 우리가 시험당할 때 도우실 수 있다. 만일 그 분이 시험을 이기지 못하셨다면 우리를 동정하실 수는 있을지 몰라도 결코 도우실 능력은 없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것을 승리하셨다. 혹자는 “주님은 결혼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결혼생활에서 발생되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동정하실 수 없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 또한 위에서 말한 세 가지 시험에 포함된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생의 자랑, 또는 재물과 쾌락과 명예와 관계되지 않은 시험은 없다.
주님은 시험 뿐 아니라 모든 고난에서도 우리를 도우실 수 있다. 그 분이 당하신 많은 박해가 이를 증명하며,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은 가장 큰 고통이셨다. 이 죽음은 히브리서 2장의 본문이 직접적으로 말하는 시험과 고난이다. 그러나 주님은 죽음의 속박 아래 놓여있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인간의 육체를 입으시고 죽음에까지 순종하셔서 이 고난과 시험을 승리하셨다. 우리가 어찌 모든 시험과 고난 앞에서 능히 도우실 수 있는 그 분을 신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