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들에게 고함 분류
설교자에게 적합한 “정신”과 “교육”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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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5년 06월호>
설교자는 적합한 정신, 성경적으로 표현하자면 건전한 생각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영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이라』(딤후 1:7). 유전적 요소가 크게 작용하기에 맑고 또렷한 정신 상태를 사람마다 다르게 갖지만, 설교자는 하나님을 위해 정신적인 면에서도 자신의 최고치를 추구해야 한다.1.
광신의 위험
광신자는 “사소한 것에 특히나 관심을 쏟는 사람”이라고 누군가가 잘 정의했다! 다시 말해 그런 사람은 성경의 진리에서 한 면만 가져다가 극단으로 밀어붙이고 성경의 나머지 부분을 배제하는 바람에 전체로서의 올바른 균형을 갖지 못한다. 몇몇 설교자가 정신적으로 이렇게 비뚤어진 부분을 보여서 복음을 설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신뢰를 크게 잃었다. 그들은 성경 한 구절이나 진리의 한 측면을, 그 구절 또는 그 진리와 관련된 모든 다른 절이 비추는 조명을 통해서 해석할 능력이 없어 보인다.
광신은 균형이 깨진 마음에서 나온다. 진리 하나를 얼토당토않게 뒤틀고자 힘을 쏟으면서 다른 진리 모두는 무시하기 때문이다. 한 관점으로 가르치는 데 전문가이고 입을 열 때마다 그 유별난 주제를 되풀이하는 설교자는 주의하는 편이 좋다. 그는 자기가 특히 좋아하는 그 주제만 빼고 성경의 나머지에는 깜깜하다. 이와 관련해서 누군가 다음처럼 말했다. “‘네게 믿음이 있느냐? 그 믿음을...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롬 14:22)라는 말씀을 본떠서 이렇게 표현해 봤다. ‘네게 구부러짐이 있느냐? 그 구부러짐을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마귀는 하나님께 “모든 성경”을 자세히 설명하라는 임무를 받은 설교자가 “기이한 관점으로 가르치는” 데 빠져서 시간과 힘을 소진하게 된다면 크게 흐뭇해 할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임을 늘 기억해야 한다. 그렇기에 어떤 진리나 교리에 관해서든 성경 전체를 살펴본 뒤에 고려 중인 그 문제에 대해 명확하게 결론지어야 한다.
진리와 연관해서 지닌 특이한 관점 하나가 집착으로 자리 잡으면, 그 설교자는 편향성을 갖는다. 그 특이한 가르침이 제자리에 있을 때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성경의 다른 진리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확대되는 순간, 해를 끼치는 존재가 되어서 혼란과 분열을 일으키기 쉽다. 그런 이상한 편중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예언, 교회의 양상, 심지어는 주의 만찬에서 사용하는 빵과 포도주의 종류, 세대주의의 다양한 시대와 관련하여 나타난다.
하나님의 일을 힘 있게 해 나갈 수 있었던 유망한 설교자가 성경 전체를 가르치라고 하신 범위를 떠나, 부차적인 진리나 이상한 이론, 특이한 성경 해석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씁쓸하다. 그가 그 개념에 치명적으로 매료되면 그의 마음을 통과해 흐르는 개울 하나가 만들어지면서 생각하는 능력이 남김없이 거기로 흘러 들어간다. 그의 사역 전체가 그 강박관념이 내는 색을 띤다. 그가 취한 본문의 주제가 무엇이든 상관없는데, 조만간 그는 단골 주제를 설교로 끌어들인다. 성경의 다른 진리를 잃어 가면서까지 어떤 진리를 붙들고 있다면, 그것이 광신이라는 점을 언제나 명심하기 바란다. 바로 이런 모습 때문에 적극적으로 섬기던 설교자 다수가 그만둬야만 했다.
2.
분별 있고 건전한 사고가 필요하다.
디도서에서 바울은 건전을 강조하면서 건전한 교리(딛 1:9; 2:1), 믿음 안에서 건전해짐(딛 1:13; 2:2), 정죄받지 않도록 건전하게 말함(딛 2:8)을 언급한다. 건전한 말은 건전한 생각에서 나온다. 그렇기에 설교자는 분별 있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설교자는 어떤 진술에 관해 또렷하고 충분하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하고, 읽고 들은 것에 대해 사리에 맞는 결론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설교자에게 깨어 있어 주의 깊게 살피는 정신은 필수이다. 가장 고귀하고 숭고한 진리들, 즉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님, 죄, 구원, 인간의 영원한 복과 저주와 같이 위대한 교리들에 열중해 있는 사람이니 말이다. 이런 주제를 다루자면 분별 있고 엄숙하게 생각하는 능력이 얼마나 많이 요구되겠는가? 또한 그는 활발하게 상상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청중에게 진리를 적용하고자 할 때 연관된 예를 자연과 역사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쇠약한 무릎, 힘없는 손, 나약한 마음, 특히 약한 정신은 결코 바라지 않으신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한다.
자, 다음으로 설교자는 교육을 적합하게 받아야 한다. 회심 당시에는 충분하게 교육받지 못했더라도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다. 다른 이들처럼 교육 기회나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은 많다. 하지만 고의로 고집스럽게 그 상태에 머물고자 한다면 용서받지 못한다.
3.
교육의 필요성
하나님의 사역은 당연히 그 사람의 능력 안에서 최고를 요구한다. 젊은 그리스도인은 진심으로 이 찬송을 부를 수 있어야 한다.
“젊고 힘 있고 매이지 않은 / 내 모습 이대로 / 진리와 의와 당신을 위해 / 나의 최상을 드리고자 / 생명의 주님께 갑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지에 어떤 가치도 두지 않으신다. 의도적으로 무식하고자 하는 자는 더 깊고 더 어둡고 더 무겁고 더 끔찍한 무지를 벌로 받는다. 심지어 그 피해자는 무지에 푹 빠져 안주하다 못해 자기 지식의 부족을 뽐내기에 이른다. 그런 사람이 하는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들은 적이 있다. “오, 주님, 제가 아무것도 모름을 감사합니다!” 또 그런 부류 중 하나가 여러 사람에게 “제가 무지해서 감사하답니다.”라고 말하자 듣던 이가 답했다. “글쎄요. 감사할 일도 참 많으시네요!”
성경은 그러한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그러나 누구든지 무지하다면 무지하게 내버려 두라』(고전 14:38). “주님의 일에는 뭐든 괜찮다”는 식의 발상은 성경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하며 되레 호된 비난을 받는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곧 설교 자료를 집중해서 연구하고 공들여 준비하며 진솔하게 전달하는 데 그야말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주님의 사역을 위해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제일 좋은 시간과 힘과 능력을 아낌없이 들여야 한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내 온 힘을 쏟아 주님께 영광 돌리리!”라고 짧게 표현했다.
주님의 일을 위해 특별히 받는 훈련을 업신여기는 자들을 예수님께서 보이신 모습에 실망한다. 열두 제자를 택하시고 부르시는 상황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쓰셨다. 『그들을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내보내어 전파하게 하시며』(막 3:14).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설교하고 가르치기에 앞서 3년간 주님과 동행하며 최고의 선생님께 수업을 받았다. 그들은 『어리석은...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눅 24:25)이었기에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 중 상당 부분을 이해하지 못했다. 주님께서 많이 가르치실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으니 그들 능력의 한계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셔야 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말할 것들이 많이 있으나 지금은 너희가 그것들을 감당할 수 없느니라』(요 16:12). 오순절에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성령님께서 오시자 그들에게 이 말씀을 기억나게 하셨고, 주님께서 그토록 인내하며 가르치셨던 교훈들을 명확히 깨닫게 해 주셨다. 결국 그런 가르침들은 제자들의 삶에서 위대한 능력이 되어 그들의 사역에 하나님의 권위를 부여했다.
종교적 선입견에 눈먼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을 『배우지 못한 무식한 사람들』(행 4:13)로 여겼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실제로는 세계 최고의 교육, 곧 제일가는 학교인 예수님의 학교에서 3년 이상을 배웠다! 성경대로 성경을 가르치는 기관을 비판하는 무지한 자들은 그 학교들도 예수님의 학교와 동일한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즉 성경 지식을 전수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알고 설교하는 데 그리스도인 젊은이들이 더 알맞게 갖춰지도록 하는 일 말이다. 그런 비평가들은 주님께서 직접 보이신 본에 자기 말을 비춰 진지하게, 냉정하게, 총명하게 숙고하고 조심해야 한다.
몇몇 경솔한 성도가 “배움”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사용하라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두뇌를 주셨다! 지능이 전부는 아니더라도 그리스도인을 비롯한 대부분에게 머리가 없다면 살아가기가 곤란하다. 거듭남은 성도의 지력을 강탈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처음에 의도된 목적,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깨달아 알게 하고 고상하게 하며 힘을 실어 준다. 지능은 주님을 비난하고 경시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그분을 위해 개발하라고 주신 것이다.
한번은 두 성도가 열띤 토론을 벌이게 되었다. 학식이 많은 형제가 타당한 논거를 대자, 상대 형제가 그 상황을 끝내 버릴 생각으로 다음과 같이 소리쳤다. “형제님의 지식은 하나님께 필요가 없어요!” 그러자 반대쪽 형제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정말 맞는 말씀이에요. 그런데요 형제님, 하나님께서는 형제님의 무식도 원치 않으신답니다!”
당연히 배움에는 끝이 없다. 어떤 주제에 대해 교육과정이 만들어지는 목적은 그저 학생이 정보의 원천에 접근하고 학습법들을 이용해 스스로 더 잘 배우게 하고자 함이다. 3,4년으로 정해진 교육과정을 통과하는 데 느긋하게 가도 되는 그런 쉬운 길은 없다. 여기에 지식과 지혜의 차이가 놓여 있다. 지식이란 지적으로 사실을 쌓는 것인 반면, 지혜란 그 지식을 옳게 연관 짓고 바르게 보유하며 제대로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지혜가 함께하지 않는 지식은 교만하게만 하고 개탄의 대상이 될 뿐이다(고전 8:1).
설교는 청중 앞에서 설교자의 지식을 내보이려거나 설교자 자신의 박식함으로 깊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은 설교를 들으면 극히 불쾌해진다. 누군가가 이렇게 잘 말했다. “지식은 다른 이들이 했던 생각으로 가득하며 사람의 머리에 산다. 한편 지혜는 스스로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정신에 산다. 지식은 너무 많이 알기에 거만하지만, 지혜는 이해에 한계가 있음을 알기에 겸손하다.”
한 교사가 마땅히 자기 몫이라 여겼던 승진이 더 어린 교사에게 돌아가자 교장에게 불평을 터뜨렸다. “제 교사 경력이 20년이잖습니까.” 그러자 교장은 이렇게 답했다. “그렇지 않아요. 실제로는 1년 했던 경험을 20번 되풀이했을 뿐이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이와 관련하여 C.F. 호그가 남긴 다음의 말은 외워 둘 만하다. “지혜는 경험을 통해, 삶의 필요와 상황에 맞게 지식을 적용할 때 얻게 된다.” 결과적으로 지식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 잘 알고 더 잘 대신하며 더 잘 나타내는, 유용한 목적을 이루는 데 쓰인다. BB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