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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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럭크만”이 웃고 갈 “박진영 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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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6년 11월호>

성경에는 다양한 “천직”이 나온다. 즉 “빵 굽는 자”(창 40:1), “이발사”(겔 5:1), “법률가”(단 3:2,3), “선원”(계 18:17), “목수”(막 6:3), “의사”(골 4:14), “군인”(요 19:34), “목사”(엡 4:11), “시인”(행 17:28), “은행가”(눅 19:23), “어부”(마 4:18), “농부”(창 9:20) 등 무려 100가지의 천직이 언급되고 있다(<럭크만 주석성경>의 “부록 96” 참고). 그 가운데 “노래하는 자”(대상 9:33)와 “음악 하는 자”(“악장,” 곧 “Musician,” 시 4편의 표제)는 오늘날 “가수”와 “뮤지션”(전문 음악가)에 해당된다. “세상” 가수와 뮤지션은 『세상의 영』(고전 2:12)을 받은 자들로서,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natural man, 고전 2:14)이기에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영의 일들』(고전 2:14)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알지도 못한다. 이는 그들이 『세상의 영』을 소유한 까닭인데, 설령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났다 해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지 말라고 엄명하신”(요일 2:15) 『이 악한 현 세상』(갈 1:4)에서 여전히 『이 세상의 신』(고후 4:4)인 “마귀”의 통제를 받는 『불순종의 자녀들』(엡 2:2)을 즐겁게 해 주는 일을 계속하는 한, 그들은 결코 “거룩한 책(HOLY BIBLE)의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서 하나님을 숭앙하는 척하는 『두 마음을 품은』(약 1:8) 위선자들에게 성경은 “닫혀 있는 책”이다. “피터 럭크만”은 거듭난 뒤로 “라디오 디스크 자키”와 “드러머”의 일을 완전히 청산하고 “성경 교사”(엡 4:11)의 길을 걸었다. “피터 럭크만”과 “연예인 그리스도인” 사이에 “동질감”이란 있을 수가 없다.

박진영은 대한민국 가수이자 작곡가 겸 프로듀서로, 대형 연예기획사인 “JYP 엔터테인먼트”의 설립자이다. 현 정부에서 “대중문화교류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고 있는 그는, 지난 2018년 자신이 직접 주도한 7일간의 성경 공부 집회가 언론에 보도되면서 기독교복음침례회(“구원파”) 교리와 유사하다는 의혹에 휩싸이자 구원파와의 관련성을 강력히 부인했다. 지금은 “첫열매들 교회”라는 모임을 이끌면서 또다시 논란의 도마에 올랐는데, 이를 해결하려고 만든 「박진영 씨 교회 무슨 파예요?」라는 제목의 유튜브 영상을 통해 자기 교회의 “족보”를 알리고 있다. 그는 영상에서 “성경으로 검증되지 않은 주관적이고 억측성 짙은 지식”을 전파함으로써 그의 대중적 영향력으로 신앙의 영역에 혼란을 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박 씨가 어떤 교파와 교리를 구분하는 기준은 반드시 “영생”이어야 한다면서 제시한 “분석 기준”은 첫째, “영생은 어떻게 얻는다고 가르치는가?”이고, 둘째, “영생을 얻은 후에 잃어버릴 수 있다고 하는가, 없다고 하는가?”이다. 질문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이 두 기준을 가르치기 위해 그가 제시한 “교리”는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

박진영은 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해 “영생은 회개를 한 사람들에 한해서, 선물로 받는 신비하고 완전한 믿음을 통해 얻는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 교리의 뿌리를 “웨슬리안 감리교”(Wesleyan Methodist)에 두고 있다고 했다. 존 웨슬리가 의롭다 하심(justification)과 상속자 자격은 믿음만으로 얻지만 그 완전한 믿음을 선물(엡 2:8)로 받기 위해서는 그 전에 반드시 “회개”가 필요하다고 가르쳤으며, 자신은 그의 가르침을 수용했다는 것이다.

박 씨가 파악한 웨슬리의 구원론은 “회개한 사람에게만 선물로 주어지는 ‘완전한 믿음’으로 죄인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그가 웨슬리를 “정확히” 파악했다면 그는 “에베소서 2:8에 관한 웨슬리의 오류”를 붙든 것이다.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8,9). 이 에베소서의 말씀은 회개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믿음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이 두 구절에는 눈을 씻고 봐도 “회개”라는 단어가 없으며, “회개”가 완전한 믿음을 받는 조건이나 구원의 조건으로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는다(물론 구원받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한다). 구절에 “회개”가 없는데도 “회개”를 “완전한 믿음”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 가르치는 것 자체가 모순이 아니겠는가.

에베소서에서 가르치는 바는 단순하다. 즉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완전한”과 같은 어떤 수식어도 없다. 그냥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사실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믿음은 선물로 주어져 있다. 이 “선물로서의 믿음”은 조건 없이, 대가 없이 누구에게나 주어졌고, 그것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음에도 은혜로 주어졌기에, 누군가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다고 해서 구원을 위해 사용한 자신의 “믿음”을 자랑할 수 없다(엡 2:9). 박 씨의 주장대로 “회개”해서 “완전한 믿음”을 받아 구원을 받았다면, “회개”는 “완전한 믿음”을 받아서 “구원받기 위한” “행위적 조건”이 되고, 이로써 이 시대의 구원은 “100% 하나님의 은혜”가 될 수 없게 된다. 이 “은혜의 시대”에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행위로 된 것이면 그것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롬 11:6).

(“피터 럭크만” 목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구원받은 죄인”과 “구원받지 못한 죄인”의 유일한 차이점은 그가 “의지”를 사용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느냐”에 있다. 즉 두 사람이 있었는데 둘 다 죄의 깨달음이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두 사람 모두에게 믿을 수 있는 “믿음”을 선물로 주셨다. 하지만 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였고(행 13:48), 다른 한 사람은 거절했다(행 13:45). 둘 다 “믿음”을 가졌지만 한 사람만 “마음에 믿음으로써,” 즉 “마음으로부터 진리를 받아들임으로써” 구원받은 것이다(롬 10:9,10).

“회개”와 “믿는 일”에 관해서라면 “마가복음 1:15”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도다.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회개하면 복음을 믿을 수 있도록 ‘완전한 믿음’을 주겠다”고 하지 않으셨다. 단순히 “회개하라” 하셨고, “복음을 믿으라” 하셨다. “회개하라”와 “믿으라”는 연속적인 “명령”이다. “명령”이 무엇인가? “명령”은 “강제”의 뜻을 담은 “일방적인 지시”이다. “회개”도 명령이고, “믿는 일”도 명령이라면 “회개”와 “믿는 일”은 선택적 사항이 아니다. “회개하고 믿느냐 안 믿느냐”가 죄인들의 영원을 결정짓기에, 그들의 혼을 아끼시는(막 8:36) 주님께서는 안타까운 마음에 일방적으로 “명령”하실 수밖에 없다(행 17:30).

박 씨의 주장처럼 “완전한 믿음을 받아야만” 믿고 구원받을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에게도 “믿으라”고 “명령”하실 수 없다. 그러나 “믿으라”는 “명령”은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도 주어진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안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이 말씀은 “회개”에 대한 언급 없이 다만 “믿는 일”을 요구한다. 이 점은 “회개” 후 “완전한 믿음”을 받아야 “믿을 수 있다”는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한다. 우리가 더불어서 알아야 할 것은 “회개”와 “믿는 일”은 둘 다 “의지의 작용”이라는 것이다. “명령”이 듣는 이의 “의지”를 자극하듯이(순종할 것인지 말 것인지, 마 21:28-31), “복음을 믿으라”는 명령도 “의지”를 자극한다. “믿으라”고 하면 “안 믿어진다”고 하지만, 믿고자 “의지”를 사용하지 않는 그 완고한 마음으로 “안 믿는” 것일 뿐이다. “안 믿기에” 지옥에 가는 것이지 “안 믿어져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다. [이 외에도 선물로 주어진 믿음은 성경에서 다양한 경우에 그 사용을 명령받고 있다 - 대하 20:20, 막 11:22,24, 요 4:21; 10:38; 12:36; 14:1,11.]

이후 박진영은 “영생을 얻은 후에 잃어버릴 수 있는가?”에 대한 주장을 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이방인들의 시대)에는 ‘무할례자들의 복음’이 적용되어, 구원을 얻은 성도들이 잘못 살면 하나님의 혹독한 징계를 받고 심지어 죽임을 당하기도 하지만, 결코 지옥에는 가지 않는다.」 그는 시대에 따라 구원의 취소 여부가 다르다는 교리를 명료하게 정리한 “피터 럭크만 목사”를 소개하면서 자신의 뿌리가 바로 그분이라고 했다. 하지만 럭크만 계열의 교회로 들어갈 수 없는 것은 “첫열매들 교회”가 성경에서 “새롭게 밝혀 낸” 가장 핵심적인 교리적 차이 때문이라고 했다. 「럭크만을 포함한 과거의 모든 신학자들은 대속의 원리를 한 가지로만 이해했다. “예수님께서 내 죄를 짊어지시고 떠안고 돌아가셨다”는 것과, “예수님이 우리의 머리와 남편이시라 우리가 그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을 완전히 똑같은 개념으로 뭉뚱그려 전했다. 하지만 성경의 사실은 다르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라는 연합의 개념은 오직 바울 서신 13통에만 나온다. 바깥 53권에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우리의 죄가 예수님에게 넘어갔다”는 죄의 전가 개념은 바울 서신 13통에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이 두 가지는 근본적으로 다른 원리이다. 내 죄를 예수님께 다 떠넘겼다면 나는 죄가 없으니 죽을 이유가 없다. 반대로 남편과 함께 연합하여 내가 십자가에서 같이 죽으려면 내 죄를 떠넘기면 안 된다. 이 차이가 바로 성경(갈라디아서 2장)이 명시하는 두 가지 복음이다.」
위와 같은 주장이 비성경적인 이유는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연합의 개념은 바울 서신에만 나온다는 주장에 대하여
박 씨의 첫 번째 거짓말을 반박하는 책은 “요한복음”이다. 요한복음은 성도가 그리스도와 한 생명으로 연합되는 원리를 “한 알의 밀의 죽음을 통해 맺는 많은 열매”로 설명한다(요 12:24). 주님의 죽음과 그 결과를 언급한 말씀에 “한 알의 밀에 속한 생명들이 함께 땅에 묻히고 죽어 부활한다”는 신약적 연합 개념이 담겨 있는 것이다. “한 몸으로서의 연합”은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 강림” 때 성령님께서 제자들을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넣어 주심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렇기에 그때부터 『하나님의 교회』(갈 1:13)를 박해하는 것, 곧 “그리스도인들”(몸)을 박해하는 것이 그 몸의 머리(골 1:18)이신 예수님을 박해하는 것과 동일시되었다(행 9:5).

둘째, 죄의 전가 개념이 바울 서신에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하여
“죄의 전가”는 이사야 53:4-6에 『실로 그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지었』으며 『그는 우리의 허물로 인하여 상처를 입었고, 그는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상하였』고 『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도다.』로 예언되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에 관한 이 예언은 “죄의 전가”가 신약적 구속과 관련된 “유일한 교리”임을 보여 주며, “신약적 복음의 경륜이 맡겨진”(고전 9:17) 바울의 서신에 분명히 계시된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는 그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예수께서는 우리의 범죄함을 인하여 드려지셨고』(롬 4:25).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셔서』(갈 3:13). 『율법이 육신을 통하여서는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죄 때문에 자신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 그 육신에 죄를 선고하셨으니』(롬 8:3).

셋째, 이방인들의 시대에 전파된다는 “무할례자들의 복음”에 대하여
박 씨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무할례자들에 대한 복음”만 적용되며,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그 복음으로 구원받는다. 사도행전 9장에서 바울이 회심하고 무할례자들에 대한 복음을 계시받기 전 시대, 곧 사도행전 9장 이전 시대와 교회가 휴거된 뒤 오는 대환란 시대는 “할례자들에 대한 복음”이 적용된다.」라고 주장했다.
“죄의 전가” 개념이 바울 서신에 있다는 것이 입증된 마당에 추가적인 논증은 의미가 없다. 박 씨의 교리는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모래 기둥”이 무너질 때 동시에 실속 없이 무너져 버린, 겉만 화려한 “사상누각”(砂上樓閣)이었다. 박 씨가 들고 나온 “할례자들에 대한 복음”과 “무할례자들에 대한 복음”은 “윤경원의 표준역 갈라디아서 2:7”에서 가져온 것이다. 스스로를 “무할례자들에 대한 복음파”로 명명한 박 씨는 “윤경원의 오역”이 낳은 열매인 것이다. <한글킹제임스성경>에는 『할례자들에게 복음 전함』과 『무할례자들에게 복음 전함』으로 바르게 번역되어 있다.
“사도행전”은 “유대인의 경륜”에서 “교회의 경륜”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책”으로, 이 책을 잘못 다루면 “이단 교리”가 나온다. 사도행전 9장에서 바울이 회심한 사건은 그 “과도기”가 진행되는 동안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교리적 전환점”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극단적 세대주의자들”이 바로 그러한 짓을 저질렀는데, 이 점에 대해 알고 싶다면 “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사도행전>”을 읽기 바란다.

박 씨는 사도행전 9장 이전에는 “죄의 전가”가 “할례자들에 대한 복음”으로 전파됐다고 했지만, 그때 전파된 것은 “죄의 전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이었다(행 1:21,22; 2:31,32; 3:15; 4:10,33; 5:29-32; 7:52,55). “사도행전 9장 이후” 바울에게 신약의 복음이 계시되기 전까지는 그 누구에게도 공식적으로 “죄의 전가”가 계시되지 않았다. 베드로가 “베드로전서 2:24”에서 “죄의 전가”를 기록한 것은 A.D. 60년경이었으며, 이는 바울이 회심하고(A.D. 35) 나서 약 25년이 지난 시점이다.

“할례자들에 대한 복음”을 “맡았다”는 베드로는 사도행전 10장에서 “무할례자”인 코넬료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과 죄 사함을 증거했다(행 10:43). “죄의 전가”에 대해서라면 “사도행전 8장”에서 에디오피아의 “무할례자” 내시에게 “이사야 53장”의 “죄의 전가”가 증거된 것이 유일하다. 이는 사도행전 9장 이전에는 “할례자들”에게 “죄의 전가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박 씨의 주장과 정면으로 반대된다.

바울과 베드로가 소위 “무할례자들에 대한 복음”과 “할례자들에 대한 복음”을 “맡고(!)”(갈 2:7) “이방인들과 할례자들에게로 간(!)”(갈 2:9) “시점”도 문제가 되는데, 이는 그 일을 다루는 “갈라디아서 2:7-9”이 “사도행전 9장 이전”이 아닌 “사도행전 15장”에서 “신약의 복음이 확정되었을 때”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때 일을 이렇게 기록한다. 『그리고 나서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는데 디도도 데리고 갔느니라. 내가 계시를 따라 올라가서 이방인들 가운데서 전파한 복음을 그들 앞에 제시하였으되』(갈 2:1,2, cf. 행 15:2). 이 예루살렘 회의 때 다음과 같이 “신약의 복음”이 확정되었다. 『우리[할례자들]와 그들[무할례자들] 사이에 어떤 차이도 두지 아니하셨으니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정결케 하셨느니라...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믿으며 그들도 마찬가지니라』(행 15:9,11). 이렇게 “사도행전 15장”에서 신약의 복음이 확정된 이후, 바울과 베드로는 “윤경원의 표준역”처럼 “무할례자들에 대한 복음”과 “할례자들에 대한 복음”을 들고 간 것이 아니라, <한글킹제임스성경>처럼 “베드로가 할례자들에게 복음 전함을 맡고 바울이 무할례자들에게 복음 전함을 맡고서 각기 ‘동일한 신약의 복음’을 들고서 할례자들과 이방인들에게로 갔다”(갈 2:7-9).

“죄의 전가”로 인한 대속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 이 복음을 믿으면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넣어져(고전 12:13)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며, 그때부터 “남편과 한 몸 된 아내”의 관계가 성립된다(엡 5:31,32).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침례받은 우리는 “남편”과 “한 몸”이 되었기에 “남편”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은 “자연스레” 우리 자신의 것이 된다(롬 6:3,4).
“박진영”은 노래나 부르고 살아야 할 사람이다. 고린도전서 15:23,24의 “첫열매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구약 성도들”이라는 점도 몰라서 자기 교회를 “첫열매들 교회”라 했으니, 만일 “피터 럭크만”이 그를 만난다면 “이런 한심한 인간을 봤나!”(Of all the miserable specimens!) 하며 실소를 금치 못할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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