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특집 분류

피를 부르는 로마카톨릭의 거짓 교리들

컨텐츠 정보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5년 07월호>

알비겐스 십자군(20만-100만 명 사망), 후스파 전쟁(10만-25만 명 사망), 위그노 전쟁(200만-400만 명 사망), 네덜란드 독립 전쟁(10만-20만 명 사망), 30년 전쟁(450만-800만 명 사망) 등이 발발했던 까닭은 무엇이었는가? 이상의 굵직한 전쟁들 외에도 수많은 무력 충돌, 봉기, 종교 재판, 마녀 사냥 등이 일어났던 이유는 또 무엇이었는가?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이었다고 진실을 호도하지 말라. “진짜 이유”는 누군가가 로마카톨릭이 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순교자들의 피에 취한 그 창녀(계 17:6), 로마카톨릭에 대해 흔히들 갖고 있는 오해가 있다. 바로 그녀가 수많은 유혈사태를 일으키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은 천 년이 훌쩍 넘는 장구한 세월 동안 “타락”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카톨릭의 배타성과 외부 세력을 향한 적의는,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카톨릭 기독교”를 공인한 지 100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도 이미 존재했다. 그 창녀는 “태생적으로” 거짓되었으며, 거짓을 수용하지 않는 자들에게 살의를 품는 “유전자”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로마카톨릭을 로마카톨릭 되게” 했는가? 답은 “교리”이다. 콘스탄티누스가 열어젖힌 교회 시대요, “숱한 결혼”이라는 뜻의 퍼가모 교회 시대를 향해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가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이는 네게 발라암의 교리를 지키는 자들이 있음이라... 그리고 네게 역시 니콜라파의 교리를 지키는 자들도 있도다. 내가 그것을 미워하노라』(계 2:14,15). 즉 “그릇된 교리”가 피를 불러왔던 것이다. 그 창녀의 교리는 그저 악의 없는 오해에 의해 흔하게 생겨나는 잘못된 생각 정도가 아니다. 그 안을 들여다보면 나치즘이나 공산주의에 견줄 정도의 파괴적인 해악이 도사리고 있다.

1. 카톨릭주의

어떤 사람들은 “공교회주의”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 거짓 교리는 일곱 산 위에 앉은 창녀(계 17:9)의 정신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개념이다. “카톨릭”이라는 이름은 A.D. 110년경 안티옥 교회의 감독 이그나티우스가 썼다는 편지로부터 비롯되었다. (위조문서일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이 편지에는 “감독들이 나타나는 곳마다 사람들도 있게 할진대, 마치 예수께서 계신 곳이면 ‘보편적인’ 교회도 있는 것처럼 하라.”라는 글귀가 있다. 여기에서 “보편적인”(universal)이라는 말, 곧 헬라어로 “카톨리케”(καθολικὴ)를 로마 제국의 “국가교회”가 제도권 바깥의 다른 “이단”들과 자신들을 구분 짓는 어휘로 차용하여 썼던 것이다.

편지 내용의 오류는 차치하더라도, “카톨릭”이라는 단어의 문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 “카톨릭” 교회가 항상 있다면, 그것은 특정 지역에 존재하는 물리적인 교회라는 뜻이 될 수 없다.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 항상 있을 수 있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즉 구원받은 성도들 전체로 형성된 영적이며 우주적인 교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카톨릭은 이를 “로마 교회와 교제권을 형성하고 있는 지역 교회들”에 적용한다. 그들은 여러 개가 존재하는 “지역 교회들”(행 9:31; 15:41; 16:5)과 하나밖에 없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고전 1:2; 10:32, 엡 1:23)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로마 교회와 교제권을 형성하고 있는 지역 교회들”을 “카톨릭,” 그러니까 우주적인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여긴다면 “카톨릭 안”은 “그리스도 안”이 된다. 그러면 “카톨릭 안”에 있지 못한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한 게 되고, 누군가가 “카톨릭” 안에 있다가 떨어져 나간다면 구원을 잃어버린다는 말이 된다. 이것이 카톨릭주의이다. 적어도 중세 암흑시대까지 이런 인식은 세간에서 “상식”이었다.

이런 세계관을 품고 세상을 바라보니, 가장 나쁜 종류의 인간은 카톨릭 교회로부터 떨어져 나간 “분리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구원을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을 설득함으로써 타인들까지도 지옥으로 보내는 자들로 여겨졌던 것이다. 누구라도 자칭 “그리스도의 몸”인 “로마카톨릭”을 찢으려고 든다면, “저런 자는 이 세상에서 없애 버리라. 그는 살 자격이 없도다.”(행 22:22)라는 말을 듣기 합당했던 것이다.

2. 무천년주의

성경에 따르면 주님께서는 반드시 장차 그분의 왕국을 세우실 테지만, “지금은” 그때가 아닌데(요 18:36), 이는 대환란이 먼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대환란 전에 휴거된다. 데살로니가전서 1:10에 따르면 이 시대의 성도들은 “다가올 진노”인 대환란으로부터 이미 구해 냄을 받았다.) 『야곱의 고난의 때』(렘 30:7)라고도 불리는 그 기간에 유대인들은 적그리스도에게 극심한 박해를 받을 텐데, 주님께서는 극적인 순간에 재림하셔서 적그리스도의 군대를 쳐부수시고 유대인들을 구해 내실 것이다(욜 2:30-32). 그러고 나서 비로소 주님의 천 년 통치가 시작된다(계 20:4).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는다면 이렇게 믿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믿음을 “전천년주의”라고 한다. 2,3세기까지 대부분의 성도들은 다소간의 차이는 있었을지언정 이러한 믿음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지 않고 제멋대로 풀어 해석하려던 오리겐만큼은 초대 교회 시대에도 꿋꿋이 무천년주의를 설파했다. 주님의 실제적인 지상에서의 천 년 통치란 없으며, 요한계시록 20:2-7의 “천 년”이라는 기간은 상징적인 표현일 뿐이고, 그 통치는 현재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이었다. 오리겐의 무천년주의는 “대체 신학”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는데, 이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모든 약속들은 교회에게 이양되었다,” 즉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했다”는 이론이다. (이런 생각을 가진 자들을 요한계시록 2:9에서는 “자칭 유대인”이라고 부르며, 그들의 말은 하나님께 대한 모독으로 여겨진다.) 오리겐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이스라엘의 회복을 장차 실제로 일어날 사건으로 믿지 않는 데서 출발하여, 재림하시는 주님께서 이 땅에 세우실 천년왕국을 부정하는 데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이를 더욱 체계화했던 것은 “최초의 완전체 로마카톨릭”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인물이었던 “성” 어거스틴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도성>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왕국이요 천국(물리적인 왕국)이다. 따라서 지금 이 시점에도 그분의 성도들은 그분과 함께 통치한다.” 물리적인 통치가 미래가 아닌 현재에 속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무천년주의적 이론에 입각하여 “하나님의 질서,” 즉 “평화”를 목적으로 한다면 전쟁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이제 통치자들이 휘두르는 칼은 “육신적인 전쟁 무기”(고후 10:4)가 아닌 훌륭한 “복음 전파 도구”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땅을 점령한 뒤에 그곳에 교회를 세워 주기만 한다면, 로마카톨릭은 얼마든지 살인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수고를 감당해 주었다. 그렇게 로마카톨릭은 “평화”의 이름으로 이교도들뿐 아니라 자신들의 편에 서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사는 땅까지도 유린했다. 그 단적인 예가 십자군 전쟁이다. 어거스틴의 사상이 십자군 전쟁에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는 것은 세속 역사가들조차 인정하는 바다.

3. 세례 성사와 성체 성사

세속 권력과 결탁하여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 로마카톨릭에게는 큰 숙제가 있었다. 바로 어떻게 하면 전쟁이나 이주를 통해 영향권 안으로 들어오게 된 이교도들을 “개종”시킬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구태를 유지하려는 데서 오는 반발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무지”였다. (4세기 후반부터 로마카톨릭은 교회 안에서 라틴어를 고집했으므로) 의사소통도 잘 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종교적 소속감과 유대감을 느끼게 하는 일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 효과적인 타개책으로 부상했던 것이 “세례 성사”와 “성체 성사”였다. 쉽게 말해 물 뿌림을 받음으로써 중생하는 것이요 성체를 먹음으로써 구원이 유지되는 것이라고 가르치면, 이교도들을 로마카톨릭의 울타리 안으로 손쉽게 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귀찮게 손짓 발짓 해 가면서, 또는 그 나라 말을 배우고 성경을 번역해 가면서 “선교”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얼마나 편리했겠는가?

분명 성경은 침례 때의 물, 그리고 주의 만찬 때의 빵과 포도주는 실체가 아니라 상징이며(벧전 3:21, 요 6:52-63), 구원받는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선을 긋는다. 그러나 2,3세기에는 이미 소개한 바 있는 오리겐과 그가 속해 있던 알렉산드리아 학파를 중심으로, 물침례나 주의 만찬에 대한 오해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도처에서 물침례(세례)를 “원죄를 씻어 내기 위한 수단”으로, 주의 만찬을 “예수님의 실제 살과 피”나 “예수님께서 임재하시는 음식”으로 가르쳤다. 북아프리카에서는 한술 더 떠서 유아들에게도 침례(세례)를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당초 침례가 죄 문제와 연관이 있다는 교리는 유아세례로 연결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저 아이가 침례받지 않고 죽는다면 어디로 가는가?” 하고 고민해 보지 않을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침례(세례)와 주의 만찬이 단순한 의식 이상이라는 인식이 이미 퍼져 있었기에, 로마 제국의 카톨릭 교회들은 무리 없이 “세례 성사”와 “성체 성사”를 “멤버십”을 확인하는 장치로 채택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 장치는 반대로도 퍽 잘 작동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는데, 이러한 실행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심층적 조사 없이도 손쉽게 “이단”으로 색출해 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4,5세기에 활동했던 “최초의 완전체 로마카톨릭”인 어거스틴은 자기의 아기에게 유아세례를 주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저주를 선포했고, 11세기부터는 성체 성사 때 먹는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실제적인 살과 피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정죄를 받았다. 그 결과, 자기 아기들에게 세례를 주지 않는 자들과 자기가 어렸을 때 받았던 유아세례가 무효라고 주장하며 다시 침례를 받는 자들, 로마카톨릭의 성체 성사를 거부하는 자들은 더 볼 것도 없이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4. 교황의 수위권과 성직위계제도

요한계시록 2장에는 주님께서 “니콜라파의 교리”를 미워하신다는 말씀이 두 번이나 나온다(계 2:6,15). “니콜라”는 헬라어로 “지배”를 뜻하는 “니코스”(νῖκος)와 “사람”을 뜻하는 “라오스”(λαός)가 합쳐져 생긴 말로, “사람들을 지배하는 자”라는 뜻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니콜라파의 교리”가 주님께서 주신 영적 권위를 넘어 회중들에게 지배력을 행사하려는 영적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임을 읽을 수 있다. 주님께서는 그 교리를 미워하신다고 하셨다.

“니콜라파의 교리”는 퍼가모 교회 시대로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로마 제국에서 카톨릭이 “국교화”된 것이 문제였는데, 황제를 필두로 한 세속 권력가들은 교회 지도자들을 “신하들”로 여기면서 그들에게 권위를 행사했던 것이다. 당시 로마 제국의 황제는 “폰티팩스 막시무스”(“대제사장”)이기도 했기 때문에, 이제는 제도권 안으로 들어온 카톨릭의 “영적” 문제에 대한 황제의 개입은 당대로서는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었다. 이에 따라 교회의 감독들이 행사하는 권위는 자연스럽게 세속의 권위와 닮아 갔다. 그들은 회중들에게 “형제”라기보다는 “높으신 분”(주교)이요, 여러 지역의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는 큰 도시에 있는 경우에는 “매우 높으신 분”(대주교, 총대주교)이 된 것이었다.

앞서 언급했던 “대체 신학”은 이러한 위계질서를 강화하는 데도 기여했다. 이스라엘에 제사장 지파였던 레위 지파가 있었던 것같이, 교회 안에도 “평신도 계급”(laity)과는 구분되는 “제사장 계급”(priesthood)이 따로 존재해야 한다는 논리를 파생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이 제사장이라는 말씀(벧전 2:5)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경적 정보를 얻기가 불가능했던 “평신도 계급들”은 이를 알 턱이 없었다.

시간이 흘러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한때 황제가 취했던 “폰티팩스 막시무스”라는 칭호는 자연스레 로마 교회에 있던 “매우 높으신 분”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로마카톨릭 교황들은 “폰티프”(pontiff)라고 일컬어진다.] 과거에는 기껏해야 로마라는 한 지역 교회의 감독에 불과했던 직위가 모든 지역 교회의 “머리 역할을 할 권한”(수위권)을 가진 “교황”의 자리까지 높아진 것이다. 그러자 엄청난 일이 가능해졌다. 교황은 “허가 없이” 예배를 드리거나, 거리에서 설교하거나, 침례를 주는 사람들을, 또는 자신에 대해 비방하는 누군가를 “이단”이라고 규정하고 화형대에 묶어 “사법 살인”을 저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왜 고작 로마카톨릭 교황에게 대들었다는 이유로, (유아)세례나 성체 성사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교회에게 물리력을 사용할 권리가 없다고 말했다는 이유로, 심지어 그저 로마카톨릭 신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는지 알겠는가? 노바티안, 도나티스트, 유카이트, 카타리, 보고마일, 알비겐스, 폴리시안, 아놀디스트, 헨리시안, 페트로부르시안, 왈덴시안, 재침례교도들이 떠돌이 생활을 하며 죽임을 당해야 했던 이유를, 후스와 사보나롤라, 틴데일, 로저스, 리들리, 라티머, 크랜머가 화형당해야 했던 이유를, 로마카톨릭이 일으킨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려야 했던 이유를 알겠는가?

소름이 끼치는 것은, 로마카톨릭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현대의 교황들이 과거를 반성하는 체하며 “평화”를 외치는 데 속지 말라. 그들의 살육적인 교리들은 철회된 적이 없다. 그 교리들은 그들의 정체성 자체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비록 그 “계시록의 창녀”가 지금은 잠시 주춤할지라도, 장차 이 땅에 대환란이 펼쳐지면 또다시 “평화”를 명목으로 사람들을 학살할 것이라는(단 8:25) 데에 내 모든 것을 걸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여, 이런 피비린내 나는 저주받은 교리들로부터 성별하라.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기억하라!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다른 음성이 나서 말하기를 “나의 백성들아, 그녀에게서 나오라. 그리하여 그녀의 죄들에 동참자가 되지 말고 그녀의 재앙들도 받지 말라』(계 18:4). BB

특집 114 / 1 페이지
RSS
번호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