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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교회의 개념을 오해한 지방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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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5년 11월호>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를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 곧 “지방교회”를 아느냐고 물으면 “모른다”는 응답이 주를 이룰 것이다. 그러나 어떤 교파적 명칭도 없는, 지역명만 붙은 교회 간판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물으면 아마 많은 이들이 무릎을 칠 것이다. “서울교회,” “대전교회,” “부산교회” 하는 식으로 간판을 달고는 그 아래에 조그마하게 “OO집회소”라고 덧붙인 장소들, 거기가 바로 “지방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지방교회”의 시조인 워치만 니는 허드슨 테일러, C.T. 스터드, 조나단 고포드 등의 신실한 복음 전파자들에 의해 조성된 “중국 역사상 가장 복음적이었던 중국”에서 태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나 복음 전파자가 되었고, 중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 여러 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했다. <좌행참>, <영에 속한 사람>,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 등의 “기독교 고전”이라고 불릴만한 책들을 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워치만 니는 당대의 다른 복음 전파자들과 비교했을 때 교리적으로 더 건전한 면이 많았는데, 이는 그가 문자적 성경 해석과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를 표방한 플리머스 형제단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워치만 니는 플리머스 형제단의 “배타적인” 노선을 거부함으로써 그들로부터 교제의 종료를 통보받고 말았다. 문제가 된 것은, 교제권 바깥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만찬을 거행했다는 것이었는데, 이 점은 워치만 니의 독특한 신학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어떤 도시에라도 단 하나의 교회만 있어야 하며, 같은 도시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교리나 실행에 차이가 있다고 할지라도 믿는 사람들로서 함께 모여야 한다.”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성경이 예루살렘, 안티옥, 에베소, 스머나, 퍼가모 등의 각 도성에 있는 교회들을 오직 하나씩만 언급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는 교리에 따른 교파들의 분열과 감리교회, 회중교회, 장로교회, 침례교회 등의 이름 그 자체를 비성경적이라고 봤고, “소재한 도시”의 이름을 딴 단 하나의 “지방교회”(지역 교회)만이 하나님께로부터 승인받은 교회라고 생각했다. 워치만 니의 사역을 계승한 위트니스 리는 <그 영과 몸>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우리는 들림받음[휴거]이나 왕국 등 의견들을 일으킬 수 있는 교리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러한 것들에 대해 가르치지만, 여러분이 그에 관하여 서로 논쟁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논쟁하고 싶어 할 때 여러분은 다만 이렇게 말해야 한다. ‘형제여, 당신은 이렇게 믿으십시오. 그것은 나에게는 문제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들림받음에 대해 다른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논쟁할 필요가 없다. 교리에 대하여 토론하거나 대적하는 분위기를 만들지 말고 다른 사람과 화목하라.”
위와 같은 주장과 달리 성경은 아무리 구원받은 “형제”라 해도 교리적으로 오류가 있다면 함께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롬 16:17, 딤전 6:3-5, 요이 1:10). 거짓 교리를 말하는 누군가가 지역 교회 내에 있다면, 목자에게는 그들을 꾸짖고 그 입을 막을 책임이 있으며(딛 1:10-14), 그들이 바로잡히기를 거부할 경우에는 지역 교회에서 쫓아내야 한다(딛 3:10, 갈 4:30; 5:10-12). 설령 그들이 “기본적인 교리들”에는 동의한다 할지라도, 휴거와 부활에 관한 무천년주의적 거짓 교리를 가르친다면 그런 자들과 함께하는 것은 “죄악”에 동참하는 일이 된다(딤후 2:16-19). 따라서 지역 교회는 그런 자들을 결코 수용할 수 없다.
“한 도시에 한 지방교회(지역 교회)”라는 원칙은 비상식적인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다. 그런 원칙을 따른다면, 정부가 한 도시를 분할하면 지역 교회도 쪼개져야 하고, 반대로 도시들을 통합하면 지역 교회도 합쳐져야 한다(워치만 니는 실제로 이렇게 가르쳤다). 정부의 정책적, 행정적 결정에 따라 별안간에 담임목회자를 선정해야 하거나, 반대로 원래는 담임목회자였던 사역자가 다른 목회자의 권위 아래에 놓이는 게 과연 “하나님의 뜻”이겠는가?
“한 도시에 한 지방교회(지역 교회)”라는 원칙은 매우 비상식적이다. 그런 원칙을 따른다면, 정부가 한 도시를 분할하면 지역 교회도 쪼개져야만 한다. 반대로 도시들을 통합하면 지역 교회들도 합쳐져야 한다. 워치만 니는 실제로 그런 식으로 가르쳤다. 정부의 정책적, 행정적 결정에 따라 담임목회자를 선정하거나, 반대로 담임목회자였던 사역자가 다른 목회자의 권위 아래에 놓이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요한삼서는 그 같은 헛소리를 더 이상 늘어놓지 못하도록 결정타를 날린다. 이 서신에서 사도 요한은 디오트레페가 성도들을 “교회에서” 내쫓았다고 했다(요삼 1:10). 쫓겨난 형제들이 전부 이사를 갔을 리는 없을 테니, 그들은 분명 같은 도시에서 삼삼오오 모였을 것이다. 말하자면 새로운 “지역 교회”가 생긴 것이다. 자, 그렇다면 어느 쪽이 진짜 “지방교회”였는가? 사도 요한이 그의 서신에서 “교회”라고 확증한 교회인가, 아니면 다른 형제들을 영접하다가 억울하게 쫓겨난 이들의 모임인가? 지방교회의 회원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할지 모르겠으나, 우리는 거리낌 없이 답을 댈 수 있다. 정답은 “둘 다”이다. 성경에 따르면 구원받은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어떤 지역에 모인 모임은 다른 어떤 조건과도 관계없이 “지역 교회”가 되기 때문이다(마 18:17,20).
한편, 1952년 이후로 워치만 니는 더 이상 “지방교회”를 세우지 못하게 된다. 하얼빈에서 공안에게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몇 해 전,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 있던 워치만 니는 자신의 사역이 중단되지 않도록, 최측근이었던 위트니스 리를 대만으로 보냈다. 이후 서구 세계에까지 외연을 넓히던 위트니스 리는 후일 미국으로 건너가 “The Stream Publishers”라는 출판사를 세웠다. 이 출판사는 “Living Stream Ministry(LSM)”라는 이름으로 현재까지 명맥을 유지하며 “지방교회”들의 실질적 본부 역할을 한다.
LSM에서 출간하는 것들 가운데 그들 사역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것 둘을 꼽으라면, 하나는 위트니스 리의 성경 강해록인 <라이프스타디> 시리즈이고, 다른 하나는 변개된 원문으로부터 번역된 본문에다 리의 주석을 단 <회복역 성경>이라고 하겠다. 지방교회들은 위트니스 리의 해석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며 그를 사실상 신격화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 지방교회들에서 내놓는 알리바이는 “주님의 회복”이라는 개념이다. 본래 순수했던 최초의 교회들이 수세기에 걸쳐 변질되다가 종교 개혁을 즈음하여 회복되기 시작했고, 루터, 진젠도르프, 다비 등을 거쳐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사역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이 그 골자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계시에 있어 위트니스 리가 이전 세대의 성경 교사들에 비해서 월등하다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도출되고, 성경 본문 자체보다 리의 해석에 더 주안점을 두는 그들의 작태도 정당화가 된다.
그러나 변개된 원문을 가지고서 “원문에 더 가까운 번역”을 냈답시고 떠벌리는 위트니스 리와 같은 자에게 하나님께서 “향상된 계시”를 허락하셨을 리 만무하다. 실제로 그의 가르침은 잘못된 정도를 넘어 기괴하기까지 하다. 그 가운데 절정을 이루는 것은 “새 예루살렘”에 대한 그의 입장이다. 한국지방교회성경진리사역원의 홈페이지에 나오는 설명에 따르면, 리는 “하나님의 경륜의 궁극적인 목표가... 사람으로 생명과 본성에 있어서 하나님이 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조성하여 새 예루살렘, 즉 신성과 인성의 연합인 우주적인 합병체를 완결하기 위함”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니까 “새 예루살렘”이란 문자적인 “도성”이 아니며, “인간이 하나님이 되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위트니스 리는 성경에서 “새 예루살렘”이 “어린양의 신부”와 동일시된다는(계 21:9,10) 점에 몰두한 나머지, 성경에서 그 “치수”까지 구체적으로 언급되는(계 21:16) 도성을 실제 도성이 아니라고 생각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인격”과 “도성”이 동일시되는 사례는 이외에도 종종 있다(시 46:1-7, 사 60:14, 계 17:18). 주님께서는 “코라신아, 벳새다야, 예루살렘아” 하면서(마 11:21; 23:37), 특정 도성을 그 안에 거하는 사람들의 인격과 동일시하셨다. 그렇지만 이 도성들은 모두 실재했다. 심지어 하늘의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존재하기도 전부터 이미 실재하고 있었다(시 48:1). 따라서 새 예루살렘에 대한 리의 설명은 성경을 억지로 푼(벧후 3:16) 것이지, 그들의 말마따나 “높은 진리들을 해방”한 것이 전혀 아니다.
츠빙글리, 루터, 녹스, 웨슬리, 워치만 니와 같은 사역자들의 열매를 연구하다 보면 생각에 잠기게 되는 때가 많다. 이들은 마치 베드로처럼(마 16:23),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았지만 동시에 사탄에게도 쓰임을 받았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훌륭한 사역자라고 해도 온 반죽을 부풀게 하는 누룩을 퍼뜨림으로써(갈 5:9), 사역이 몇 세대도 못 가 망가지도록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등골을 오싹하게 한다. 그런 일이 없으려면 읽는 것, 권고하는 것, 그리고 교리에 전념해야 한다(딤전 4:6,13,16). 직접 성경을 읽지 않고 주석가의 해석에만 의존하거나, 비진리를 바로잡지 않고 묵과하거나, 교리를 등한시하지 말자. 그렇지 못하면 찬란했던 선배들의 과거 외에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으면서도 바람만 잔뜩 들어간, 추하기 그지없는 교회로 전락할 테니 말이다. B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