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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를 투표로 뽑아도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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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6년 01월호>
일상생활에서 잘 쓰이지 않는 한자어를 제도화된 교회들에서는 왕왕 쓴다. “송영”이라느니, “노방 전도”라느니, “서리집사”라느니 하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로서는 무슨 말인지 감을 잡는 것조차 버거운 용어들이 아무렇지 않게 통용되는 것이다. 그 가운데는 “청빙”이라는 것도 있다. 문자 그대로 보자면 “부탁하여 부름”이라는 뜻이지만, 교회들에서는 흔히 (담임)목사를 “선출”하는 것을 칭한다.청빙은 대개 전임 목사의 은퇴와 함께 이루어진다. 국내 주요 교단들은 대부분 목사의 정년을 70세로 하고 있는데, 정년을 채우지 않고 은퇴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실제로는 그보다 빠른 시기에 청빙 과정이 진행되곤 한다. 2026년을 기준으로 하면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가 63-71세가 되기 때문에, 앞으로는 이들의 은퇴와 더불어 청빙은 더 활발하게 일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한때는 청빙의 과정이 주로 지명(혹은 승계)의 방식으로 행해지던 시절도 있었으나, 그런 것은 이미 옛말이 되었다. 요즈음 대부분의 교회들에서는 청빙위원회를 구성하여 교회 안팎에서 후보자를 “추천”받거나 “공개 모집”을 한 뒤, 일차적으로 그 자격 요건을 검토한다. 그렇게 해서 어느 정도 자격을 갖춘 후보들이 추려지고 나면, 설교 “경연”이 벌어지고, 최종적으로 회중들의 “투표”를 통해 담임목사가 결정된다.
목회데이터연구소(이하 목데연)가 작년 5월부터 6월까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현직 담임목사들 가운데 후보자를 “추천”하는 방식과 “공개 모집”하는 방식으로 청빙된 이는 각각 전체의 50.2%, 28.8%였다. 이미 강단을 차지하고 있는 목사들 가운데 약 80%가 나름대로의 “민주적인” 절차로 “당선”된 사람들인 셈이다. 그러나 교인들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못하는 듯하다. 교인들에게 바람직한 청빙 방식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는 무려 전체의 92.8%가 “추천”과 “공개 모집”이라고 답했고, 고작 7.2%만이 “지명 및 승계”라고 답했으니 말이다.
투표는 입후보자의 존재가 전제되어야 성립할 수 있다. “민주적인” 청빙 방식이 주를 이루게 된 배경에는 지원자가 많다는 현실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목데연에서 지난 2023년 5월에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부목사들 가운데 향후 진로를 “선교사,” “교회 개척”으로 응답한 비율은 각각 3.6%, 14%밖에 되지 않은 데 비해, “담임목사 청빙”으로 응답한 비율은 50.4%였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하는 부목사 생활을 하다가 “남이 차려 둔 밥상”에 숟가락을 얹고 싶다는 자칭 사역자들의 속내가 여실히 드러난 조사였다. 그들의 응답이 바울의 간증과 얼마나 다른가? 『또 나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불려지지 아니한 곳에서만 복음을 전파하려고 노력하였으니 이는 다른 사람의 기초 위에다 짓지 아니하려 함이라』(롬 15:20).
물론 경연과 투표를 통해 담임목사를 선출하는 게 보편화된 데에는 제도화된 교회들에서 지명 방식으로 후임 목사가 선출될 때 온갖 부도덕한 일들이 벌어진 것도 큰 몫을 했다. 인맥, 혈연, 더한 경우에는 “뒷돈” 따위가 지명 과정에 개입되는 것을 보면서 환멸을 느낀 교인들이 점차 민주적인 청빙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래서 요즈음 대부분의 교회들에서는 청빙위원회를 구성할 때 담임목사를 배제한다. 분명 차기 담임목사를 선정하는 데에 그간 교회를 이끌어 왔던 현직 담임목사의 의견이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는 것은 “비상식적인” 일이다. 그렇지만 교인들은 “비상식”이 “부도덕”보다는 낫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청빙을 둘러싼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교회들이 해야 할 일은, 반드시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느냐?』(롬 4:3)라는 질문을 던져 보는 것이다. 목사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아갔고 사람들에게는 은사들을 주셨다.”고 하셨느니라... 그가 어떤 사람들은 사도로,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들은 복음 전도자로, 어떤 사람들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들을 온전케 하며 섬기는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여』(엡 4:8,11,12).
자,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위의 말씀에는 짚고 넘어갈 만한 이상한 점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 말씀하시는 “장로”나 “감독”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목사와 교사를 언급할 때만큼은 “어떤 사람들은 목사로, 어떤 사람들은 교사로”라고 하지 않으시고, “어떤 사람들은 목사와 교사로”라고 하셨다는 점이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를 쓰다가 졸아서 실수를 한 것이 아니라면, 이에 대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뿐이다. 바로 “장로”나 “감독”은 “목사”와 같은 직분이며(딛 1:5-9, 벧전 5:1-5를 주의 깊게 읽어 보라), 또 모든 “목사”는 성경 “교사”라는 것이다(딤전 3:2). 이와 같은 성경의 조명에 입각하여, 필자는 지금부터 “감독,” “장로,” “교사”에 대해 말씀하시는 구절들을 목사직에 관한 참조 구절로서 제시할 것이다.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성경은 목사로 세워지는 권위가 사도나 선지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은사”로서 주어지는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다른 모든 은사들이 그러하듯이, 목사직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주신다는 것이다(고전 12:11). 여기에는 성도들의 의견이 반영될 틈이 없다. 심지어 목사직을 원한다고 무조건 주시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신약성경 전체를 뒤져 보아도 “집사”를 선출한 사례는 찾을 수 있을지언정(행 6:2-6), “목사”를 선출한 사례는 찾아볼 수가 없다. 목사는 언제나 하나님께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은 사람의 지명에 의해 임명되었던 것이다(딤전 1:3, 딛 1:5).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목사들을 임명하신 목적은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맡기신 일은 교회 시대의 경륜을 안착시키는 것이었는데(엡 2:20), 경륜의 전환이 완전하게 이루어짐에 따라 그들의 역할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복음 전도자들” 역시 과거 위대한 부흥사들의 사역으로 끝이 났고, 이제는 “목사들”에게 맡겨진 역할이 교회 시대의 끝까지 유효하다. “복음 전파”라는 순수한 의미에서는 여전히 복음 전도자들이 있으며, 그들은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행 8:26; 21:8). 목사들이 해야 할 일은 그들의 사역을 통해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인 지역 교회를 감독하는 것이다(행 20:28).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목사였던 디모데에게 『그리고 네가 많은 증인들 가운데서 내게 들은 것들을 신실한 사람들에게 맡기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2)라는 권면을 준 바 있다. 당연히 이것은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고 돌보는 목사 본연의 임무와 동떨어진 게 아니었고, 그 사역의 안정성과 지속성을 담보하기 위해 함께할 사람들을 세우라는 것이었다. 같은 이유로 각 교회들은 한 명의 감독이 아니라 감독“들”을 두었다(행 14:23, 빌 1:1). 그런즉 목사 안수란 기본적으로 함께 양무리를 맡을 동역자를 세우는 일이요, 자신의 유고 시에 양무리가 길을 잃지 않도록 일종의 보험을 들어 두는 일이었다고 하겠다.
이런 까닭에 목사 안수는 “갑자기”(경솔히) 행해져서는 안 되었고(딤전 5:22), 지역 교회 내외부의 평판으로부터 가정사에 이르기까지(딤전 3:2-7) 사람됨 전반을 철저히 검증한 후에 행해져야 했다. 자신이 담임하고 있는 지역 교회에 소속되지 않은 형제들에 대해서는 이런 점을 속속들이 알 턱이 없었을 테니, 외부에서 데려온 형제에게 목사 안수를 주는 일이 불가능했음은 자명하다.
성경의 조명에 비추어 보면, 머릿속에 “청빙받을 생각”만 가득한 부목사들은 스스로 그리스도의 군사입네 하면서도 제 역할조차 모르는 “고문관들”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들이 “목사 안수”를 받았다면, 그것은 자신이 소속된 지역 교회를 감독하기 위한 것이었어야 한다. 그런데도 다른 교회에서 불러 줄 날만을 기다리며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이런저런 활동들에 참여하면서 이력서를 다듬고 있다면, 그런 자들은 스스로 “목자”가 아닌 “삯꾼들”(요 10:12,13)임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사례비”라는 요소를 빼놓고서, 그들이 현재의 부목사직을 내려놓아야만 맡을 수 있는 다른 교회의 담임목사직을 희망하는 이유에 대해 온전하게 설명할 길이 있겠는가?
현직 담임목사를 청빙위원회에서 배제한 채 “민주적인” 방법으로 차기 목사를 청빙하려는 교인들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다. 목사가 거짓 교리를 가르친다면 그 교회에서 빠져 나오면 해결될 일이고(딤전 6:3-5), 목사가 부도덕하다면 송사를 통해 쫓아내든지 징계를 받게 하든지 하면 될 일이다(딤전 5:19). 이도 저도 아닌데도 현직 담임목사로부터 후임 지명권을 탈취하려 드는 교인들은 제 분수를 한참 벗어난 것이다(민 16:7).
6ㆍ25 전쟁 당시, 미국의 언론들은 군인들에게 연고도 없는 타지에서 목숨을 버릴 것을 강요하는 미군 수뇌부를 “비민주적”이라며 질타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이에 대하여 한마디의 말로 일축했다. “군대에는 민주주의가 없다.”
실로 그렇다! “영적 전쟁”을 운운하면서도 교회는 “민주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정말로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다. 그런 교회들은 “무질서하게”(disorderly, 살후 3:6) 운영되는, “병” (disorder)이 든 교회들이다. 그런데도 꿋꿋하게 “민주적인 절차”를 고집하려 든다면, “치유의 방책”(remedy)이 없을 것이라고(대하 36:16, 잠 29:1) 성경은 경고하신다. B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