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단의 거성 분류
그리스도인의 실천하는 믿음
컨텐츠 정보
- 197 조회
-
목록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6년 05월호>
야고보서 2:26은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영이 몸을 떠나면 인간은 죽는다. 마찬가지로 행함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대에는 단순히 어떤 감정을 “느낀 것”만으로 구원받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구원은 느낌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 것이며, 그 믿음은 자연스레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혹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했을 때, 그 사람은 주님의 보혈로 사신 바 된다. 많은 사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다 하면서도 실상 그 의미를 모르고 살아간다. “주”라고 불렀다는 것은 곧 그분께서 합당한 값을 치르고 나를 “종”으로 사셨다는 뜻이다. 그분을 “주”라고 부르는 것은 본래 “예수님은 나의 주인이시고 나는 종입니다. 나는 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것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일이다. 이것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실에 입각한 믿음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단순한 느낌만을 가지고 믿음 생활을 하면 믿음의 핵심에서 멀어지게 된다. 물론 우리가 어떤 사실을 믿으면 느낌이 뒤따라올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사실을 믿지 않고, 그저 구원받았다는 느낌만 가지고 있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여러분이 구원받았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죄들로 인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믿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그렇게 기록된 말씀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니라』(롬 10:17).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이 사실을 제대로 믿지 않으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제아무리 아는 게 많은 사람이라도,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해도 이 사실을 진정으로 믿지 않았다면 성경의 진리를 제대로 가르칠 수 없다.
히브리서 11:1의 말씀대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에 대한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증거』이다. 성경에 기록된 사실을 믿는 우리의 믿음은 하늘 그 자체의 실상이며, 위대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우리 마음속에 모셔 들이고 교제하는 엄청난 일을 수행한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면서 그분의 사역을 수행한다. 성경은 이것을 가리켜 영광의 소망이라고 말씀하신다(골 1:27). 이 소망은 우리 믿음의 정수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록된 말씀을 못 믿으면 모든 것이 허사다. 우리의 믿음은 무엇인가를 보거나 느끼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우리는 기록되었기에 믿는 사람들이다. 기록된 말씀을 믿지 못하면 결국 언젠가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릴 “느낌”만 남게 된다. 지금 나는 성경을 다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해했느냐 못 했느냐의 여부는 이 문제에 있어 중요치가 않다. 자신이 읽고 있는 그 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문제이다. 느낌만으로는 구원받을 수가 없다. 느낌이 구원의 열매는 될 수 있어도 뿌리가 될 수는 없다.
기록된 말씀을 믿으면 그 증거가 “실천”으로 나타난다. 그러한 실천은 첫째, 용기로 나타난다. 히브리서 11:23은 『믿음으로 모세는 태어났을 때에 출중한 아이로 보였기에, 그의 부모가 삼 개월 동안 숨겼으니, 이는 그들이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모세의 부모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들이 말 한마디로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법령과 권위가 인간의 그것보다 위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용감하게 행했던 것이다.
둘째, 믿음은 고난받는 것을 택하게 한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잠시 동안 죄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택하였고 그리스도의 능욕을 이집트의 보화들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그가 상 주심을 바라보았음이라』(히 11:24-26). 모세는 왕족의 특권을 포기해 버렸다. 왕국에서 누리는 쾌락이 일시적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받기를 택한 것이다. 대개의 경우 그리스도인들이 강요받는 것은 선을 택할 것이냐 악을 택할 것이냐가 아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택지는 고통을 감수할 것이냐, 악과 타협할 것이냐는 것이다. 믿음이 만사를 형통하게 한다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믿음은 오히려 기꺼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길을 버리고 고통을 선택하게 한다.
셋째, 믿음은 영적인 안목으로 나타난다. 『믿음으로 그는 왕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집트를 떠났으니 이는 그가 보이지 않는 분을 보는 것처럼 견디었기 때문이라』(히 11:27). 이 안목이 있는 사람은 사람의 얼굴을 크게 개의치 않는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권세에 눌리거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자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수 없다. 하나님을 온전히 두려워하는 사람은 세상에 두려워할 대상이 없다. 모세가 왕의 진노에 아랑곳하지 않고 죽음을 불사하며 이집트를 떠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도 바울에게 주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셨을 때, 회심한 그는 즉시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했다. 그때까지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직접 예수님을 만난 뒤로 그분께서 저 하늘의 보좌에서 내려오신,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이시란 사실을 전파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영적 안목으로 본 사람은 즉각적으로 무엇인가 행동을 취하게 되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뒷전에 앉아 있지 않는다. 사람들이 모인 곳이면 어디서나 복음을 전하려 드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무슨 큰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작은 일부터 실천해야 한다. 일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 처한 환경이 좋지 않더라도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본분이다. “할렐루야”로 유명한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여러분은 알 것이다. 「메시아」를 작곡했을 때 헨델은 어떤 상태였는가? 그의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고 중풍으로 오른쪽 몸이 마비된 상황이었다. 재산도 없고 자신을 돌봐 줄 사람도 없는 처지였지만, 그는 인류 역사에 남을 찬양을 써 내려갔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아야 한다. 처한 환경이 좋지 않더라도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본분이다. 「메시아」를 작곡했을 때 헨델은 어떤 상태였는가?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고 중풍으로 오른쪽 몸이 마비된 상황이었다. 재산도 없고 자신을 돌봐 줄 사람도 없는 처지였지만, 그는 인류 역사에 남을 찬양을 써 내려갔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넷째, 믿음은 확신에 찬 행동으로 나타난다. 『믿음으로 그들은 마른 땅을 가듯이 홍해를 통과하였으나 이집트인들은 그렇게 해 보려고 시도하다가 물에 빠져 죽었느니라』(히 11:29). 어떤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물이 얕은 데를 골라서 홍해를 건너갔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직접 제다라는 곳에 가서 홍해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수평선을 보게 되었다. 홍해는 무슨 개울물이나 냇가 같은 것이 아니라 수평선이 보이는 아주 광활한 바다인 것이다. 바닷물은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새까맸다. 아무리 얕은 곳을 찾았다기로서니 그런 데를 어떻게 건너겠는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홍해를 건널 수 있게 했던 것은 하나님의 능력, 곧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바다 가운데를 통과하여 마른 땅 위로 갈 것이라는 것을 확고히 믿었기에 그들은 건너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또 다른 믿음의 실천에 대해 증거하신다. 『믿음으로 그들이 칠 일 동안을 돌았더니 여리코의 성벽이 무너졌느니라』(히 11:30). 이 일을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한 성읍의 성벽이 누군가가 일곱 번 돌았다고 해서 무너지는 것을 어떻게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능력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가 없다.
또 보라. 『믿음으로 창녀 라합은 정탐꾼들을 평안히 영접함으로 믿지 아니한 자들과 더불어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히 11:31). 라합은 여리코 성벽에 집을 두고 살았다. 그런데도 라합의 집은 성벽이 무너질 때 무너지지 않았다. 그녀가 정탐꾼들을 숨겨 주면서 약속한 대로 주홍색 실을 내려 두었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서는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성적으로 이 일을 설명하려고 시도하려는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만 하게 된다.
성경은 왜 하필이면 창녀를 믿음의 사람으로 내세운 것인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데는 어떤 신분이나 능력 같은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일전에 잭 가너에 대한 이야기를 성도들에게 들려준 적이 있다. 잭 가너는 살인자였고, 창녀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 중 가장 설교를 잘하고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잭 가너였다. 믿음만 있다면 그 사람의 전력이나 외모 따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라합은 이때의 믿음으로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까지 들어가지 않았는가?
라합의 믿음은 “실천하는 믿음”이었다. 그녀는 그 믿음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고, 그분께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인정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다. 우리는 한번 스스로에게 되물어보아야 한다. 참으로 내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믿음으로 무언가를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고 있었는지 말이다. 우리는 다 목사가 아니다. 다 교사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그분을 주님으로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런 사람은 자기 입을 열어 그분을 증거한다. 기꺼이 주님을 위해서 박해를 받고, 노력이든 시간이든 돈이든 주님을 위해 기꺼이 사용한다.
믿음을 가진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주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면서 보람을 느끼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합당히 향유해야 할 느낌이다. 우리는 단순히 구원받았을 때 뒤따른 감격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구원받았을 때의 기분은 오래가지 못한다. 우리는 다들 바쁜 일상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믿음을 실천해 나감으로써 계속해서 올바른 감정이 발생하도록 해야 한다. 이대로 하지 않고, 그 반대로 감정이 생기는 대로 무엇인가를 행하려고 하면 주님을 영화롭게 해 드릴 수가 없게 된다.
스페인 남부에서 감옥으로 잡혀 들어간 신실한 복음 전파자가 있었다. 그곳에는 그와 같은 그리스도인뿐 아니라 공산주의자들, 무정부주의자들, 반정부 시위자들도 수용되어 있었다. 거기로 들어온 사람들은 전부 다 사형을 당했다.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했던 그 수용자들은 벽에다 욕설을 새기고 있었다. 그런데 이 복음 전도자는 벽에다가 마태복음 10:28을 썼다. 『또 너희는 몸은 죽여도 혼은 죽일 수 없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혼과 몸을 모두 지옥에서 멸하실 수 있는 그분을 두려워하라.』 그리고는 그 밑에다 요한복음 3:16을 적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다음 날 아침, 어떤 사람이 사형장으로 가면서 그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당신이 쓴 성경 구절 덕분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참으로 절망에 빠져서 ‘아, 나는 이제 사형장으로 간다. 내 인생은 끝장이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당신 덕분에 이제 소망을 가지고 갑니다. 나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러 갑니다. 이제 절망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그 신실한 복음 전파자가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상상이 가는가? 그는 믿음을 실행으로 옮김으로써 절망만이 가득한 곳에서도 벅찬 감격을 향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요한일서 5:4의 말씀처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주는 감정에 지배당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실행했을 때 뒤따르는 기쁨과 평안을 향유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대로 잘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신뢰하지 말라. 느낌은 결코 안전을 담보해 주지 않는다. 여러분의 신앙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게 하려거든 기록된 말씀에 입각한 믿음을 실행으로 옮겨야 한다.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님”이시라는 믿음의 고백을 했는가? 그렇다면그분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돌아보고, 또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믿음으로 결단하기를 바란다.BB






